#37
길게 숨을 뱉으며 뛰쳐나올 듯한 심장을 진정시켰다. 고개를 들자 한쪽 벽에 뭉개져 있는 어두컴컴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청난이 그것에 성큼 다가가려 하자, 굵직한 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방해하였다.
“사존, 위험합니다.”
“네가 있으니 위험할 게 없다.”
청난은 백매의 얼굴도 채 보지 않고 다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백매의 손이 여태껏 그를 부여잡고 있는 탓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제자는 그렇게 믿음직한 사람이 못 됩니다. 혹여나 당신께서 다치시면…….”
청난은 걱정 어린 그의 말을 끊더니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안 다친다. 그러니 놓아라!”
청난이 백매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힘을 주어 밀어 내 보았지만, 그의 손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청난은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 청난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 순간의 분노와 제자를 앞에 둔 스승으로서의 이성이 양쪽에서 줄다리기하였다.
그 사이에서 이긴 것은 죄책감이었다.
“내가, 내가 봐야 한다. 내 손으로 망친 것이지 않느냐. 내가 책임져야 해.”
청난의 손이 다급하게 백매를 밀어 내려 하였다. 하지만 청난의 손힘은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백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백매는 이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의 사존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찬란하셨던 분이셨는데, 무엇이 이분을 이리 만든 것일까. 고작 저 같은 자에게 휘둘리셔선 안 되었다. 그럼에도 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저곳에서 마기가 느껴집니다……. 사존, 사, 사존, 제자가 보고 올 테니… 까…….”
“……아가.”
“사존께서는 몸을 돌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부디 그래 주세요…….”
어린 제자의 애원 섞인 목소리가 청난의 뇌리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청난은 밀쳐 내려던 손짓을 멈추고 그의 양 볼을 감싸 안았다. 예전에는 이리하면 백매의 눈과 가까이 마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발돋움을 해야 겨우 그의 눈앞에 닿을 수 있었다.
“어째서 네가 속상해하느냐. 내 죄이거늘.”
“사존……. 제자의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저는 사존을 사모하고, 은애합니다. 당신의 역경을 지켜만 보는 것은 무엇보다 힘든 일이에요. 정말, 정말 당신 없으면 저는 안 됩니다…….”
“…….”
청난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돌보고 키운 아이가 저를 사모한다는데 무어라 말하겠는가.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안 돼.’가 옳았다. 하지만 십 년 전 그렇게 이별하였고, 지금의 그는 울기 직전이었으니, 그런 대답을 내놓기가 몹시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그는 청난의 사랑스러운 제자였다.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 오랜 시간 동안 저만을 봐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저를 누구보다 애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선단보다 귀하고, 천겁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점철하였는데, 저의 행동에 이토록 서글퍼하는 백매를 보니 찬물이 끼얹어진 듯 정신이 들었다.
“응. 그래, 알았다. 나는 힘이 없으니, 이런 일엔 네 도움을 받도록 하마.”
“아, 사존, 제자는 그런 뜻이…….”
“안다. 내가 네 성격을 모르겠느냐. 내가 감정적이었다. 내 부족함을 알고도 모른 척했고. 그렇게 어제도 무리하였지.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지낸다면 이르게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사존, 제발 그런 말…….”
“그래, 안다. 알아. 그러니 네가 도와 다오. 나는 사문의 것을 되찾을 의무가 있어. 나는 힘이 필요해. 네가 빌려주겠니. 불을 빌려준 것처럼 간단한 거면 돼.”
백매가 팔을 풀자 그제야 청난의 뒤꿈치가 땅에 닿았다. 백매의 한쪽 다리가 굽어지며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의 빈손은 스스로의 가슴 위에 올려졌다. 그는 청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거웠고, 그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에게라면 제 심장도 드릴 수 있어요.”
“그럼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아무것도. 아니, 당신의 만족을 바랍니다. 당신의 힘이, 선의가, 당신의 모든 것이 보상받길 원해요. 당신은 마땅히 그러셔야 할 분이니까요.”
“세상은 그렇게 좋게만 돌아가지 않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것이 유일한 제 삶의 이유입니다.”
백매의 두 눈이 감겼다. 그의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헌신적으로 만든 것일까. 저는 이렇게 헌신적일 수 있을까. 청난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네 심장을 받아 어디 쓰겠느냐. 자, 나를 돕기로 하였으면 바로 시작하자꾸나.”
청난은 옅게 웃으며 또다시 어물쩍 넘겼다.
과거에 청난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이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했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청난의 발이 움직이자 백매가 번쩍 일어나 세 걸음 앞서갔다. 그는 검은 무언가에 손을 뻗어 여러 가지 조치를 한 후에 청난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제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청난이 그제야 걸음을 마저 옮기니 백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어졌다.
“이건 요물의 흔적입니다. 피와 살, 가죽이 모조리 섞인 것이죠. 사존께 달려들었던 인면늑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걸 벤 건 너였구나.”
“알고 계셨었나요?”
“몰랐더라면 고집스럽게 여길 오르지 않았겠지. 계속 알려 다오. 저것의 영근을 볼 수 있겠느냐?”
백매는 스승의 요구가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도 착실히 그것에게 다가가 면밀하게 살피었다.
십 년 전 저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땐 냉랭하기 그지없어 보였고, 그 속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사사로운 감정마저 드러내고 있으니, 이 애정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아, 역시 사존께선 영민하세요. 이 시체는 쌍영근을 가졌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나 봅니다.”
“아니, 짐승이었을 게다. 오면서 본 인면늑대의 시신도 쌍영근이었어.”
“짐승이 쌍영근일 수 있나요? 이 부족한 제자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네가 왜 부족해? 나도 처음 본 것이었다. 다른 건 더 없었느냐?”
백매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온 신체에서 수분이 뭉쳐지며 넓은 날개를 가진 새의 형태를 이루어 갔다. 백매의 손끝이 마지막으로 부리를 빚어내자, 그것은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금류처럼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것이 한번 날갯짓할 때면 몸의 일 할이 흩날렸고, 그것이 제 몸을 모두 날려 버렸을 때에는 이 크지 않은 동굴 안이 온통 그의 흔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백매의 맑고 청아한 영기로.
백매가 정갈하게 적힌 글을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읊었다.
“진법에 남겨진 영기와 흩어진 생명체에 남겨진 영기가 거의 일치합니다. 아마, 이 진법의 영향을 받은 것들인 것 같아요. 이곳 안에 오행의 흔적이 모두 있는데, 그중 으뜸은 수(水)입니다. 수야각의 진법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거겠죠.”
“흐음……. 네 말은 여기에 유체들이 있다는 말이냐?”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유체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저 거뭇한 것이 피와 살, 거죽이라고 한다. 그러니 모르는 사이에 유체를 밟았을 수도 있었다. 이제껏 짐승을 살육해 본 적 없다고 한다면 분명 거짓이겠지만 그것의 시신을 밟고 다니는 건 또 다른 것이었다. 청난은 어쩐지 발바닥이 신경 쓰였다.
“네. 대충 백여든 개체 정도 되는 것 같아요.”
“…….”
정말 신경 쓰였다.
대체 어떻게 분리되었길래 이곳에 일백여든의 시신이 있단 말인가? 잘게 다져 뿌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아……. 그럼 백여든의 짐승이 이곳에서 이 진법을 이용한 술법에 걸려 죽었다는 거지? 그것들은 모두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쌍영근일 테고.”
“아마도요. 선계에 알릴까요?”
“아니. 일단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게 좋겠구나.”
“어째서요? 신선들이 믿음직한 성격은 못 되지만, 실력은 좋으니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청난은 옅게 웃었다.
“그 점이 걱정되는 것이지. 누군가를 믿고, 믿지 않을지 판단하기엔 정보가 부족하지 않으냐. 우선 좀 더 조사해 보고, 무엇이 연관된 것인지 알게 된다면 그때 도움을 청해 보도록 하자.”
“네, 그렇게 할게요.”
청난이 전생 동안 얻은 교훈이랄 게 있다면, 상대가 힘 있는 자일수록 믿음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난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훑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남아 있지 않았고, 영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백매가 꼼꼼히 탐색했을 터였으니, 이곳에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백매야, 바로 선계로 돌아갈 것이냐?”
“사존께서 허락하신다면… 곁에 있고 싶습니다…….”
백매가 말끝을 흐리며 넌지시 청난의 눈치를 살폈다.
청난은 그의 다리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십 년이 지났다. 십 년 동안 청난은 그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 물론 백매에게 물을 수 없었으니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인간은 망각의 생명체라 하던가. 그렇게 십 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그때의 감정을 잊고야 말았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보다 더욱 오래된 감정이었다.
청난이 그의 손을 움켜잡고 앞서 걸었다.
“좋아, 그럼 가자꾸나.”
청난의 힘은 어린이의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백매는 순순히 그의 손에 잡힌 채 그의 걸음을 뒤따라갔다. 백매가 만든 인공적인 빛이 사라지고 잠깐의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그들은 곧 진짜 햇빛 아래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