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아직까진 깊은 산속이나 동굴 같은 곳에 진지를 만들고 밖을 경계하고만 있을 뿐이야. 하지만 이 상태가 고착된다면, 조만간 민간에도 피해가 생기겠지. 선대들도 봉인에 그칠 수밖에 없던 존재를 토벌해야 하는 데다가, 가뜩이나 인력난인데, 그 인력이 반으로 나뉘기까지 했으니까 위험성이 커질 수밖에.”
“나뉘어요? 어째서? 대신선께서 토벌을 결정하지 않았나요?”
“그 전에, 사존은 왜 나한테 말을 높여?”
“그거야, 연화선은 신선이시니까요. 저는 말을 높이는 게 맞죠?”
“백매한테는 낮추잖아.”
“음…….”
청난은 눈앞에 있는 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짐작할 수 없어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과거의 연화는 청난의 제자가 되길 희망했었다. 하지만 그는 연화문주의 장남이었던 데다가 화계 천영근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 탓에 연화는 백매에게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여기서 ‘백매는 제자니까’ 따위의 대답은 결코 정답이 되지 못했다. 결국 청난은 궁여지책으로 다른 답안을 건넸다.
“연화가 내게 반말하니까……?”
“그럼, 내가 말을 높이면 제게 편히 말해 주실 건가요, 선사님?”
그럴 리가. 자진해서 말을 낮추고 제자의 신분이 된 백매와 달리, 그는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난의 행동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 말을 높인다면, 청난은 이번에야말로 감히 신선의 위에 서려는 자가 되지 않겠는가. 청난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우리 둘 다 말을 낮추는 건 어때?”
“좋아.”
연화는 입꼬리를 길게 뻗어 웃어 보였다. 그는 웃으면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하는 편이었다. 어릴 적엔 크게 웃을 때가 좀처럼 없었는데, 이렇게 웃으니 마치 여우를 닮은 것 같았다.
“그럼 사존을 위해 알려 주자면, 대신선은 직책 같은 게 아냐.”
“응? 아니야?”
“응, 아니야. 그의 신명이 뭐라고 생각했어?”
“그거야…….”
절대신, 최고신이라 한다면 떠오르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옥황상제를 떠올렸지?”
“응.”
청난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럴 것 같았어. 하지만 전혀 아니야. 옥황상제께서 저렇게 주책없는 사람이겠어?”
“싫어하나 보네. 안 그래 보였는데.”
“그 신선, 연화문 출신이거든.”
연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그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청난은 못 본 체하였다. 금세 표정을 바꾼 연화는 말을 이었다.
“상제를 직접 본 사람은 신선 중에서도 손에 꼽혀. 상제는 가장 오래된 신전에서 묵묵히 일을 수행할 뿐이지.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전혀 관여하지 않고, 웬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수족을 시킬 뿐이야.”
“어째서?”
“글쎄, 지친 게 아닐까? 그의 신화 중 가장 오래된 건 벌써 몇천 년 전이니까. 나는 고작 삼백 년을 신선으로 있었는데도 이렇게나 지루한걸.”
“지루해?”
연화는 눈꼬리를 둥글게 말며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입꼬리는 여전하고 눈만 웃고 있었다. 대체로 억지로 웃는 사람들이 입만 웃고 눈이 그대로인 걸 생각하면 그답다면 그다운 점이었다.
“그나마 지금 움직이는 것도 애정 따위가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해.”
“인계의 수사들한테도 이렇게 말해?”
청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딴에는 진지하게 말한 것일 테지만, 그의 양 볼이 둥글둥글한 까닭에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백매라면 그의 볼이 얼마나 통통하든 모른 체했겠지. 하지만 연화에겐 그런 섬세함이 없었다. 연화는 청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하하.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안 그래. 사존이니까 말하는 거지. 그나저나 정말 귀엽다. 어쩌다 이렇게 작아졌어?”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청난은 쓰다듬음받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연화의 손힘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탓에 고개를 이리저리 빼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안 알려 줄 거야?”
“나도 잘 몰라. 그냥 일어나니까 다시 태어났어. 아마 내가 신선이 되다 말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추측만 했지.”
“흐음-, 사존은 천겁은 겪고 비승은 안 했었지? 후회해? 바로 비승하지 않았던 것.”
“후회해서 뭐가 달라져?”
청난은 여전히 수행에 임하고 있는 백매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집중하는 것인지 대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응? 방금 귀가 움직인 것 같은데……. 잘못 봤겠지.’
백매가 어릴 땐 생각이 표정이나 동작에 드러나는 편이었는데, 설마 삼백 년간 고치지 못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참 슬픈 일일 것이다. 그런 게 상관없을 만큼 타인과 교류하지 않은 것일 테니까.
후회하느냐?
그럼 안 할까. 그 누구도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당사자인 청난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개죽음이었지.’
천겁을 겪은 그때, 지체 없이 올랐다면 머지않아 비승했을 백매와 함께 지낼 수 있었겠지. 그가 혼자 남은 것은 제 탓이 컸다.
청난의 긴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눈동자에 긴 그림자를 남겼다. 아직 얼굴의 근육이 다 발달하지 않았기에 청난은 표정을 숨기는 것이 어려웠다.
청난의 낯에 음울한 빛이 드리워지자 연화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는 최고신이 아니야. 그저 나이 많은 신일 뿐이지. 아마 고대신을 빼곤 가장 오래됐을 거야.”
“얼마나 됐는데?”
청난은 어느새 연화의 말에 따라 그를 물건처럼 대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대략 천 년 정도.”
“생각처럼 오래되진 않았네. 그보다 오래된 신선은?”
“대체로 옥황상제랑 비슷해. 천명선인은 잘 알려진 대로 월궁에서 나오지 않아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구천현녀는 구천현남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돌 정도고, 이랑진군은 사실 호랑이 산신일 거라는 얘기가 신빙성 있게 돌고 있어.”
“……굉장하네.”
“사실 고대신뿐만 아니라 웬만한 신선들은 개인주의라서 그렇게 이상할 건 아니야. 고대신들이 유명하다 보니 유언비어가 많을 뿐이지.”
“어라, 그래?”
“응. 뭐어, 백매가 특히 유별나긴 하지.”
연화는 턱짓으로 백매를 가리키다 다시 말을 이었다.
“선군 중 명령받는 생활을 했던 자가 몇이나 있겠어. 눈치 보며 자란 적도 없고, 눈치 볼 이유도 없지. 우린 누군가가 등용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난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내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면, 내게 제를 올리는 신도들에게 실례이지 않겠어?”
“연화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많이 자랐네.”
“삼백 년이 지났으니까. 많은 게 변했지.”
“안 변한 것도 있던데.”
“백매? 원래부터 사존 말곤 없었는데, 변할 게 뭐가 있겠어. 어쨌든 사존이 돌아와서 기뻐. 선계는 너무 콩가루라서 많이 그리웠거든.”
변하지 않은 건 백매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아이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나오지 못한 것일까. 청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기에 청난은 마저 쓰다듬기로 하였다.
연화는 그 손길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밥 먹고 갈래?”
“신선은 먹을 필요가 없는데?”
“그래도 못 먹는 건 아니잖아.”
“흠 그럼…….”
“연화는 싫대요. 저랑 먹어요, 사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명상에 잠겨 있던 백매였다. 그는 마치 산보를 하다 온 것처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산뜻한 모습이었다.
연화가 비죽이듯 물었다.
“질투?”
“응.”
백매는 연화를 지나쳐 청난의 반대쪽 옆에 앉았다.
“수련은 잘 되어 가느냐?”
“네. 괜찮았어요. 슬슬 식사가 준비되었을 테니 돌아가요.”
백매는 그리 말하곤 청난을 안아 들었다. 청난은 그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지만, 지금까진 걸어 다녔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질투 나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인 건가.’
청난은 그 모습이 귀여웠다. 만약 연화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대로 그와 함께 돌아가 또다시 침상에서 그를 재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쓸 시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다.
“백매 너는 수련해야지.”
“제자가 오늘은 동파육을 준비하였는데, 예전과 조리법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사존께서 드시고 가르침을 주신다면 이 제자가 기쁠…….”
“아가.”
신이 나 말하던 백매는 청난이 내뱉은 두 글자로 큰 벽에 마주한 듯 멈추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청난은 자신의 제자가 주절거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가 재밌게 살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 아래에선 수천만의 백성이 삶의 위협을 받고 있다. 네가 스승을 알뜰히 살피는 것은 좋으나, 나로 인해 너희의 대의가 늦어진다면 그것이 어찌 군자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느냐.”
백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청난을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지 그의 눈길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백매는 청난을 안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그… 네……. 그래도 저와 식사는 해 주셔야 해요.”
“물론이야. 이젠 네 얼굴을 보지 않으면 밥이 넘어가질 않아.”
청난의 대답에 백매의 처진 고개가 빳빳이 들어 올려졌다. 백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청난이 제 발로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내려 주었다.
청난이 구겨진 옷자락을 펴는 것까지 본 백매는 굳이 수련하던 곳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좌선하였다. 제자가 이토록 수련에 열심히 임하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만 하자니 청난은 무안했지만, 그가 지금 좌선한다고 하여 뭐가 달라지겠는가. 좌선을 겉치레로 하는 건 수련하는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청난은 연화와 다음에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하고 그를 되돌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