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백매의 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주변을 감싸는 강렬한 영기는 목줄에 매인 들개처럼 사나우면서도 정확하게 조절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었으니 기술을 익히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청난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거리를 두고 보는 백매는 제 손바닥만 하였다. 청난은 손을 오므렸다. 당연하게도 그런다 하여 그가 쥐어지진 않았다. 아마 청난의 손이 그를 감쌀 만큼 크다 하더라도 그를 잡을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날아올랐으니까.
청난은 백매를 지켜만 보고 있자니 지루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해졌다.
‘책이라도 가져올걸.’
청난은 읽다 말았던 책이 생각났다. 청운이 사 온 특이한 책 중 하나로, 신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기원이 신선을 만든다.]
그 말은 즉, 신선은 감히 누구 한 명이 독점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청운의 책은 그것에서 말미암아 꾸며진 신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 즉 세간에 흐르는 소설이었다. 수선자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줄거리였으나, 청난은 그 이야기들이 꽤 마음에 들었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선계의 자연은 훌륭했고, 청난은 점차 나른해졌다. 열 살이면 낮잠을 잘 만한 나이였으니 청난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존? 사존? 사존!”
청난은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순식간에 나타난 시야 속에는 저를 보며 우는 덩치 큰 제자가 담겨 있었다. 주변을 훑어보니 어느새 자신은 백매의 신전 내 침상으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매… 아?”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백매는 양손으로 청난의 왼손을 굳게 쥐어 잡고 있었다. 그의 손은 경련하듯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가.”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 죄송해요.”
청난의 말을 듣기나 한 것인지 그의 대답은 생뚱맞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도무지 정상이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죄송해요. 제자가 잘못했어요. 가지 마세요.”
청난은 당황스러웠다. 그의 이런 모습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기원을 올리는 자다. 인계에서 그의 이름은 높고 우월하니 그의 눈길이 닿는 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호령할 수 있었다. 강하고, 용맹한. 오직 그러한 단어만이 그를 꾸며 주었다.
그런데 그가 왜 자신의 손을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그 시선에 담긴 것은 왜 자신이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청난은 그의 슬픔을 보고 싶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청난은 몸을 크게 일으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네 스승은 안 가. 여기 있단다. 어딜 보는 게야.”
토닥토닥. 청난의 작은 손이 백매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그제야 백매의 눈이 사르륵 떠지며 청난과 마주 보았다. 청난이 그때에 맞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백매의 가쁜 숨이 점차 진정되었다.
“사존, 저는… 사존이 없으면 안 돼요. 저는… 아직 너무나 부족해서…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네가 부족하면, 하늘 아래의 수사들은 어찌 되느냐. 그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젠 네 자신을 바로 볼 필요가 있구나.”
“제자가 부족합니다. 노력해도 안 돼요. 하지만, 하지만 사존이 좋아요. 가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안 듣는구나. 그래, 그래. 일단 진정하자.”
청난은 그의 호흡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그를 토닥였고, 그는 대답으로 죄송하다는 말만을 연신 내뱉었다.
“아가, 난 널 떠나지 않아. 그 무엇도 너보다 소중하지 않아.”
“제가 부족한 탓에 두고 가신 게 분명해요.”
“그렇게 말하면 이 스승이 너무 나쁜 사람 같지 않더냐. 그렇게 나쁜 스승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제가 더 강했으면, 떠나지 않으셨을 텐데.”
“그건 내 실책이었어. 제일 강한 나도 당했는데 네가 어찌하겠어?”
“모든 게 저 때문이었어요…….”
백매는 청난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했고, 또한 청난에게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공황 상태에 빠져 혼잣말만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청난은 그의 모든 말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가 듣길 바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라도 꺼내는 것에 가까웠다.
청난은 그를 안은 손을 점점 안쪽으로 당겼다. 그는 성실하게도 스승의 지도에 따랐고, 결국 침상에 몸을 뉘었다. 청난은 여전히 그를 안고 있었고, 여전히 달랬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백매는 속을 표현하길 겁내던 아이였고, 청난은 그가 슬퍼할 때면 제 침상에 끌고 와 재우곤 했었다. 그러면 다음 날 말했지. ‘제자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실 어제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청난의 앞에서 솔직하던 아이였다. 그러니 내일이 되면 모든 걸 말해 주리라. 그러니 지금은 이 아이가 부디 눈물을 거두길 바랄 뿐이다.
선계에 올라오고 셋째 날이 되었다. 그새 청난은 누군가 차려 주는 아침에 익숙해졌다. 백매는 지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을 시작하였고, 지난밤 눈물이 흐르던 눈덩이는 조금의 부기도 없이 여전히 잘생겼다.
“아가, 신선은 몸에 변화가 안 생기느냐?”
“대체로 그렇습니다. 저는 비승했던 그날의 신체로 쭉 살아가고 있는데, 다른 신선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의 신체가 아닌, 가장 최상이었을 때의 신체를 갖게 되는 것 같았어요.”
“반로환동 같은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아마 사존이라면 갑자기 성장하실지도 몰라요.”
“하하, 그럼 좋겠구나.”
‘그럴 리 없겠지만.’
청난이 신선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신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될 수 있는 경지였더라면, 수많은 수사들이 그것만 보고 달리다 명을 다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제자 앞에서 어떻게 초를 치겠는가. 청난은 그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로 사흘째구나. 오늘이면 네가 술법을 다 익힐 테지. 네 수련이 일찍 끝나면 전에 갔던 식당을 다시금 가지 않겠느냐? 그때는 내 입맛만 보고 음식은 고른 거였지? 다음엔 네가 원하는 걸 먹자꾸나.”
그는 곧 봉진을 준비하기 위해 바빠질 테니, 청난은 그 전에 그와 시간을 더 나누고 싶었다.
‘그러곤 마을을 정비해야지.’
마을 사람들이 요물의 눈곱도 보지 못하도록. 소식조차 들리지 않도록.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렇게 그를 기다리다가, 모든 일이 끝나면 아버지께 소개하겠노라. 청난은 그렇게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백매의 대답은 청난의 예상외였다.
“사존, 그것이…….”
“식사도 어려울 것 같으냐? 음, 그래. 네 일이 더 중하지. 스승은 언제든 네게 시간을 낼 수 있으니 너 편한 대로 하거라.”
“그게 아닙니다. 사존… 저는…….”
백매는 뒷말을 잇기 어려운지 한참을 뜸을 들였다. 청난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제자가 부족하여…….”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백매는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불안할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당신의 배움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으나…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익히긴 어려울 듯합니다.”
“어, 어째서……?”
“그게…….”
“아, 아니다. 실언이야. 자책 마라. 그럴 수 있지. 영기 없는 스승에게 배우느라 네가 얼마나 힘들겠느냐.”
“아, 아닙니다. 사존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세요. 제게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네겐 늘 좋은 말만 듣는구나. 알았다 알았어. 너는 부족하지 않고, 나 또한 그러한 걸로 하자.”
청난은 그를 달래기 위해 적당히 말을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꺼림칙함이 남았다.
영기가 전혀 없는 청난도 법기의 도움을 받으면 오래 걸리나 어느 정도 결을 맺을 수 있었다. 전혀 다른 계통을 배운 이라면 모를까, 줄곧 수야각에서 자라 수야각의 전통적인 술법을 익혀 온 데다가 비승까지 한 자가 이토록 오래 걸릴 만한 게 아니었다. 청난은 가르친 그날 바로 다 익힐 것이라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역시 내 문제인가.’
청난이 백매를 가르친 방법은, 그 또한 그의 사존께 전수받았을 때와 같은 방법이었다. 이것은 대대로 수야각주, 즉 수야각에서 가장 영기가 충만한 이들이 전승받은 것이었으니, 청난과 같이 티끌만큼의 영력도 없는 이가 다른 이에게 전수하게 되리라곤 선조 그 누구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는 전승이 부족할지도 몰랐다.
“너무 걱정 마세요 사존. 백매는 최선을 다할 테니, 이른 시일 안에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러길 바라마. 아무래도, 내 사람들이 걱정돼.”
“‘사존의’ 사람들… 말인가요.”
“응, 다음에 네게 소개해 주마.”
백매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은 것을 청난은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전과 같은 장소에서, 전과 같은 방식의 수련이 이어졌다. 백매는 명상의 시간에 들어갔고, 청난은 지난 날을 교훈으로 삼아 방에 있던 아무 책이나 가지고 나왔다.
책의 내용은 별것 없었지만, 시간을 보내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장씩 넘기던 무렵, 청난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드니 연화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쁜 줄 알았는데, 토벌은 다 끝났나요?”
연화는 고개를 저으며 청난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럴 리가. 사존이 날 찾을 것 같아서 잠시 들렀어.”
“내가 왜……. 음, 아니야. 마침 잘 왔어요. 지금 진전은 어때요? 민간인의 피해는 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