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청난은 자신의 손바닥에서부터 영기를 흘려보냈다. 등의 중심에서 시작하여 양어깨까지 특정 맥을 짚어 갔다.
“수야각주들만 익혀 왔던 이것은,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야. 진법이 물건을 담는 함과 같은 것이라 가르쳤던 건 기억하느냐?”
“사존의 말씀을 어찌 잊었겠나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기억력이 좋구나. 봉진은 그 함을 잠그는 자물쇠 같은 것이다. 모든 자물쇠에 그에 맞는 열쇠가 있는 것처럼, 봉진에도 그것에 맞는 해법진이 각각 존재하지. 그래서 이 둘은 동시에 익혀야 해.”
백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청난은 그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았다. 청난은 설명을 이었다.
“수야각주들은 예로부터 열어서 안 될 것을 봉인하는 술법을 한 가지 고안하고, 그것의 이름을 수근봉진(水根封陣)이라 이름 붙였다. 그것은 대가 넘어갈수록 그들의 지혜를 덧대어져 더욱 견고해졌어. 그래서…….”
청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음… 술식이 긴 편이야.”
청난은 말을 멈추고 백매의 등 뒤로 자신의 영기를 뿜어내었다.
봉인술은 각 지점을 능히 잇는 기술. 때문에 선이 복잡할수록 해법이 어려웠고, 지점이 많을수록 선이 복잡했다. 청난은 그의 등 뒤에 쉰둘의 지점을 잡아 그 사이로 자신의 영기가 헤엄치게 하였다. 수백의 선들이 하나의 단면에 그려지니 과히 복잡하였으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듯했다.
“네 등 뒤에 남겨 줄 테니, 외우기만 하면 돼. 어렵진 않을 거다.”
음?
청난은 그의 등을 헤엄치다가 또 다른 영기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백매의 것이다. 그는 청난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따라온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청난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해야 했다. 기초적인 것도 아니고, 이런 복잡한 술식은 수를 기억하는 것에만 최소 반나절은 걸렸다.
과거에 백매의 재능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지만, 이것은 정말 과했다. 그런데 그는 노력파이기까지 하니, 경계의 대상이 되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예전엔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었지.’
백매를 처음 데려왔던 날, 그는 수야각의 모든 것을 경계하면서도, 배우는 것에는 필사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자신이 또 길바닥에 버려질까 두려워했던 모양이었다.
수련은 어린 나이에 할수록 성과가 좋았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어느 정도 찬 후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동문들이 그를 안타깝게 보며 챙기곤 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들은 백매에게 멀어졌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그를 외딴곳에 방치하는 등의 괴롭힘으로까지 이어졌었다.
백매는 자책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괴롭힘당하는 이유도 자신에게 찾으려 하였었다. 보다 못한 청난은 그를 자신의 거처에 머물게 하며 생활을 도왔다.
눈에 잘 띄지 않으니 그를 괴롭히는 이들도 줄었다. 사실, 그중 심했던 몇 명은 산 아래로 쫓아내기도 했었다. 수야각의 의협은 남을 돕는 것이지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데 걔네가 쫄래쫄래 다른 곳에 가 우리와 척을 졌지.’
보통 수사는 여러 속성의 영근을 가졌으니, 한 계통의 문파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몸을 의탁한 문파들은 청난에게 시비를 걸곤 하였는데, 청난이 수야각주를 이어받은 후로는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고, 청난은 그들은 완전히 잊었다.
청난의 가르침이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렵, 백매가 몸을 돌려 그를 제지했다.
“사존, 무리하지 마세요.”
“음? 내가 무리라고 할 게 있느냐. 네가 더 피곤할 테지.”
“사존, 땀이 나고 계세요. 만약 사존께서 제자 때문에 고뿔에라도 걸리신다면, 제가 선조들 뵐 면목이 없습니다.”
물론, 그는 볼 일이 없다. 불멸이니까.
신선이라 하여도 끝이 없는 건 아니나 적어도 자연적인 건 없었다. 그리고 청난은 그의 생이 부자연스럽게 끝나도록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청난은 예전부터 백매의 부탁에 약했다. 그는 도통 부탁을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청난은 이번에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 내 제자가 땡땡이가 치고 싶다는데, 하루쯤은 눈감아 주어야지.”
“아, 아닙니다. 사존, 그건 아니에요…….”
청난이 바위 아래로 털썩 내려왔다. 백매가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갔다. 청난이 대여섯 걸음 걸은 후 자리에서 멈추자 백매 또한 두 걸음 뒤에서 멈추었다. 허벅지 옆에서 흔들리던 청난의 손이 쥐었다 폈다 하며 허전함을 과시했다. 백매는 그제야 두 걸음 더 걸어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백매의 궁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난밤 보았던 허전하기 그지없던 방은 몰라볼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나랑 하루 종일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이렇게 꾸며 놓은 거야?’
그가 방을 좀 채웠다고 했을 때, 요나 함 몇 개를 가져다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방에는 침상, 협탁, 장과 같은 기본적인 가구는 물론이요, 침상 위에 드리워진 가림 천, 모서리에는 은은한 풀 내음을 풍기는 화분, 심지어 벽에는 한 붓으로 그린 아름다운 난 수묵화까지 장식되어 있었다.
“부족하겠지만, 앞으로 더 채워 놓을 테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안 부족하다, 안 부족해.”
청난은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은 창가의 바로 앞에 있었다. 청난이 그 위에 걸터앉았다.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목을 간질이는 게 기분이 좋았다. 백매는 한쪽에 곱게 놓여 있던 옷자락을 챙겨 청난에게 다가왔다.
“피곤하실 테니 이만 주무세요. 이곳은 낮과 밤의 경계가 없지만, 인계는 이미 해가 저문 지 오래거든요.”
“그렇게나 오래됐어?”
하루 종일 엄청난 것들이 쏟아져 내린 탓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피곤하더라.
청난은 취침 준비를 위해 허리끈의 매듭을 풀었다. 그렇게 조물조물 손으로 한 겹, 또 한 겹 옷을 벗어 나갔다. 그리다 문득 백매가 무엇을 하고 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백매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완전히 돌려 버린 탓에 청난은 그의 귀 모양이나 겨우 볼 수 있었다. 청난을 향해 뻗은 손에는 갈아입을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아가,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내가 여인도 아닌 것을. 하하하, 그런 건 삼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청난은 푸흐 웃으며 그의 손 위에서 옷을 건져 올렸다.
백매가 준비한 잠옷은 청난이 평소에 입는 것과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좋은 천이라, 옷을 걸친 느낌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그럼, 전 옆방에 있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백매는 청난을 보지 않고 돌린 고개 그대로 후다닥 나가 버렸다. 청난은 거구의 백매가 십대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귀엽기만 하였다.
백매가 나가고 문마저 닫혀 온전히 혼자 남게 된 청난은 침상에 몸을 눕힌 채 생각에 젖었다.
삼백 년 만에 백매를 처음 만났던 불개미의 굴에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청난이 아는 백매는 그런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자가 백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이 모르는 이가 되었구나,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삼백 년 전부터 전혀 자라지 않은 것처럼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겉모습은 많이 달라졌지. 원래도 그리 컸던가.’
청난이 죽기 전에는 그가 자신의 키를 거의 따라잡고 있었는데, 지금 보면 전생의 제 키를 훌쩍 넘겨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걸 잃은 줄 알았는데, 그중 하나는 돌려받았다.
하지만 청난은 이 기쁨을 마냥 누릴 수 없었다. 정말, 정말 많이 놀았다. 청난은 침상에 누워 차분해져서야 현실이 눈앞에 떠올랐다.
만귀가 세상에 퍼지고, 인계의 상황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신지, 마을 주민들은 괜찮은지. 결국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밤을 새웠는데 걱정하진 않으실까. 그 작은 마을에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고 지내 왔다. 청난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곳이 부디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랐다.
‘내일 안에 끝내자. 그러곤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곳을 지킬 사람은 나뿐이니까.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자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온 것인지, 아니면 방 안을 살피는 고운 풀 향기 탓인지 청난은 순식간에 졸음이 쏟아졌다. 이윽고 그의 고운 눈꺼풀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제가 곁에 있을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어디선가 백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다음 날 백매는 청난이 일어날 시간에 맞춰 찾아왔다. 그가 옷 입는 것부터 시작해 씻고 밥 먹는 것까지 하나하나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청난은 자신이 신선을 이리 부려 먹는다고 다른 이에게 미움이 박히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뭐 어떠랴. 내가 그리 하게 두겠다는데.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청난은 지난 날처럼 풀어지지 않고 곧장 수련에 임하였다.
“사존, 어제 행하신 수결을 다시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좋아. 처음부터?”
“부탁드립니다, 사존.”
어제처럼 청난은 백매의 등에 대고 수결을 맺었다. 이 작은 몸으로 법보의 영기를 운용하는 것이 그새 익숙해져 어제보다는 좀 더 수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은 오래 걸렸다. 한 바퀴 운용을 끝낸 청난은 백매의 등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백매는 이어서 수련에 임하였다. 청난은 시범을 보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조금 벗어난 자리에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