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사존, 다 왔습니다.”
“오.”
백매가 문을 열자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진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니 ‘진 공자’와 함께 갔던 식당이 생각났다.
사실 청난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급스러운 음식을 주로 접했던 탓에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 때문에 수야각의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아 벽곡 수련을 서두르기도 했었다. 그러니 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백매가 준비한 음식들은 하나같이 그의 입이 환영할 것이었다. 심지어 진 공자와 먹었던 음식들과 겹치지도 않았다.
자신이 생각보다 뻔한 것인지, 그가 세심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겠지만.
“사존의 입맛엔 맞으신가요?”
“그래, 이렇게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은 간만이구나.”
“사존께서 원하신다면, 제자가 매일 풍족하게 차려 드릴게요.”
“아서라, 이 몸에 얼마나 들어간다고. 아까워. 자, 너도 먹자. 혼자 먹으려니 심심해.”
청난은 백매가 거절하기 전에 그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백매는 어쩔 도리가 없어 앞에 놓인 음식들을 깨작거렸다. 청난은 그의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배 속을 채우며 마냥 지켜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더 먼 옛날이 생각났다. 삼백 년 하고도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 말이다.
“예전의 넌 편식쟁이였는데 말이야.”
백매가 입 안에 넣은 음식물을 오물거리며 청난을 바라보았다.
“네가 수야각에 오자마자 식당으로 데려갔었지. 나는 나름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골랐는데, 넌 한 입 먹고 말았었어.”
“부끄럽습니다…….”
“하하, 재밌는 추억이지. 그래서 네가 그런 음식을 싫어하는 줄 알고 형님께서나 좋아하는 각종 풀이며 약재를 해 먹였었는데 말이야.”
“제가 그것마저 편식했었죠.”
“맞아. 그랬어.”
청난은 추억에 잠겨 푸흐 웃었다.
“사실 네 입맛은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그때는 그저 낯선 음식에 대한 경계였던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어.”
“그리고 사존께서는 한밤중에 주방으로 가 만두를 빚어 주셨죠.”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
청난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청난과 백매는 옛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동안 회포가 쌓인 탓에, 음식을 씹는 시간보다 말을 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주로 그 둘만이 가졌던 추억거리였고, 약속한 것처럼 그들 중 누구도 신이나 천겁, 또는 그 연회의 날이 떠오를 만한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니, 시간은 대략 한 시진이 지났다. 선계에는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청난의 젊은 다리가 저릴 정도이니, 대략 그쯤 된 것이 맞을 것이다.
“백매야, 수행하기 좋은 곳이 있느냐?”
“제가 명상하는 곳이 있긴 합니다만… 보기 좋은 광경은 못 되니 다른 곳이 좋겠습니다.”
“이곳에도 흉한 곳이 있어?”
“물론입니다. 음… 제 탓이지만요. 쓰고서 안 치웠거든요.”
청난은 그가 무엇을 치우지 않은 것인지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으로 안내할게요.”
백매가 곧장 일어나 청난을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종일 안내받고 있으니 마치 관광지에라도 온 것 같았다.
청난은 도착한 곳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청난은 대략 숲 깊은 곳이나, 폭포 뒤에 숨겨진 동굴 같은 곳을 떠올렸었다. 그런 곳들이 잔류한 영기가 많아 수련 성과를 급진시키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그런 곳들과 조금의 연관성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곳이라면 증진은커녕 기껏 쌓은 수행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곳은 너무나 세속적이었다.
“…….”
“사존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아요. 하지만 선계에서 이곳보다 나은 장소는 몇 없을 거예요.”
“이… 궁이?”
청난과 백매가 도착한 곳은 어떻게 보아도 누군가의 ‘집’이었다. 백매의 것과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궁관. 하지만 백매의 것과 달리 뜰에서부터 내부까지 속세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장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긴 한연화의 궁관이에요.”
“연화의?”
“네. 그가 인계에 살다시피 한다는 건 아시나요?”
“그래, 잘 안다. 아, 어제 만났을 때 한 소리 할 걸 그랬어.”
“나중에 기회를 마련해 드릴게요.”
“좋아. 그런데, 그 아이가 나도는 것이 수련 증진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자체로는 관련이 없지만… 한연화는 내려갈 때마다 기념품을 가져오거든요.”
“아.”
청난은 백매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신선쯤 되는 사람이 길가에서 파는 아무런 것을 기념품이라 가져오진 않을 것이다.
“대부분 법기겠어.”
“대부분 법보인 편이었죠.”
“……인계를 아주 탈탈 털었구나.”
“예, 다음에 꼭 혼내 주세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인계 혹은 인간들에게 원한이라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가 인계에 드나드는 탓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뿐 아니라, 수사들이 수련에 쓸 법무들이 죄 여기 있는 것도 훌륭한 수선자가 배출되지 못한 것에 한몫했을 것이다.
“신선에겐 큰 효과를 주진 못하지만, 사존께는 나름 도움이 될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나름이 아니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몇 가지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그에게 약이 될 것이다. 그만큼 청난의 영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백매는 마치 그가 과거 수선계의 중심에 있던 때와 다름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상냥하네.’
그가 청난의 상태를 모르진 않을 터. 제 스승의 자존감을 지켜 주려는 것이다. 청난은 묵묵히 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백매는 주인의 허락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궁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갖가지 종류의 법기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이거 참 많구나…….”
영기가 오계로 나뉜 것처럼, 법기도 어느 정도 그 속성을 따른다. 때문에 보통은 같은 속성의 법기를 쓰기 마련이다. 백매가 하고 있는 장신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백매가 들고 온 연화의 법기들은 모두 수계이면서 그 양도 종류도 다양했다.
다른 속성이 이 정도면 화계 법기는 얼마나 많은 걸까. 인계에서 가장 활약하고 있는 곳도 화계인 연화문이었는데, 이쯤 되니 그가 어디서 법기 나오는 광산을 발견한 걸까 싶었다. 물론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청난은 그중 장신구의 형태인 것을 몇 개 골라 몸 위에 둘렀다. 워낙에 영기가 부족한 몸인 탓에 법기가 일 할도 활용되지 못하겠으나 청난은 당장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수련도 여기서 해?”
“사실 선계는 어딜 가나 비슷해요. 그래서 대부분 주변 경관이나 소음의 정도로 장소를 정하곤 하죠.”
“하긴 그렇겠구나.”
“그래서 말인데요. 사존, 제자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여기 뒤쪽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수련하는 건 어떠신가요?”
청난은 눈을 깜박였다. 머뭇거리길래 인계에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다. 그런데 그저 좋아하는 장소로 가자는 귀여운 청일 줄은 몰랐다.
“하하하, 좋아. 좋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꾸나.”
“사존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럴 테지. 넌 날 가장 잘 아는 아이잖니.”
백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줍게 웃어 보였다.
도착지는 연화의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떤 독특한 신선의 취향인지, 고급스러운 건축물 사이에서 불쑥 형성된 이곳은 마치 산 한가운데를 반듯하게 잘라다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자연을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호화로운 선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참으로 장관이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응, 마음에 들어. 이곳은 어느 신선이 만든 것이야?”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 독특한 신선이 자신의 제자였다.
“그, 그랬구나. 네가 이런 취향을 가진 줄은 몰랐어. 보기엔 좋다만, 너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느냐?”
“원래는 여기 있지 않았어요. 외딴곳에 있었죠. 그런데 거리가 있는 편이라 사존께서 불편하실까 봐 지난밤에 옮겨 두었습니다.”
“네가 참… 바빴겠구나.”
지난밤에 요리도 하고 산도 옮겼다. 그것도 어린아이를 품에 재운 채로.
‘그냥 내가 잘 자는 건가?’
전생에는 아침잠이 너무 많아 곤혹스러울 정도였는데, 그의 품에 있으니 이전의 습관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네가 애썼구나. 고맙다 아가.”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뭐든 말하세요.”
“좋아. 그럼 이제 수련을 하자꾸나.”
청난은 주변에 넓은 바위를 찾아 좌선하고는 앞자리를 탕탕 두드렸다. 백매가 제 사존의 뜻대로 그를 등지고 앉았다. 청난은 백매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본래라면 그가 상의를 벗어 맨살을 맞대는 것이 효과가 좋았으나, 백매가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막았다.
‘대체 스승과 제자 사이에 남녀칠세부동석이 왜 나오는 거야? 어릴 땐 여제자들과도 잘 어울렸었는데. 그새 숫기가 더 없어졌어.’
청난은 제자의 앞날을 잠시 고민하다가, 신선은 혼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본래 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