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의 피부는 어찌 그리 맑고 투명한지, 그의 미소는 어찌 그리 어여쁜지. 백매는 그 작고 둥근 눈동자 속에서 만개한 꽃이 저를 향해 피어난 것 같았다.
백매는 그를 만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고,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자, 이리 와 나를 안아 다오.”
백매의 속도 모르고 청난이 두 팔을 벌렸다.
“제자가 감히 그런 무례를…….”
“된다, 돼. 하지만 거절해도 된다. 그런데 이 스승이 몹시 다리가 아프구나. 누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청난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어깨를 투덕였다. 누가 보아도 그의 말은 거짓이고 농이었다. 백매는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자신의 사존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를 들어 안았다.
백매는 과연 힘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안긴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정적이었고, 편안했다. 그 덕에 청난은 높아진 시야에서 주변을 볼 여유도 생겼다.
백매의 키만큼이나 높아진 시야에서, 청난이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백매의 얼굴이었다. 청난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백매는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피하느냐. 스승이 제자의 얼굴을 보면 안 되느냐?”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청난은 백매의 볼을 잡아 자신에게 돌렸다. 백매는 순순히 그의 손길을 따라와 주었다.
과연 그의 얼굴은 진영과 닮았다. 아니, 똑같았지. 그가 진영의 이름을 썼을 때엔 아마 술법을 덧대었던 탓에 하루 종일 그를 보았음에도 백매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 터다.
허나 이렇게 보니, 청난은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청난은 자신의 애제자와 만났고, 그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와 함께 식사를 하였고, 그의 앞에서 잠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 청난은 백매를 다시 만났다.
백매는 고개를 숙여 잠든 청난을 바라보았다.
피곤하셨던 것인지 그의 스승은 백매의 품에 안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청난의 몸은 매우 작았고, 가벼웠다.
전생의 그는 인계에서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절대자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이는 감히 그에게 함부로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강인함을 가졌음에도 제 품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마치 풀잎처럼 부드러웠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이 작은 몸속에서, 늙은 자의 호통에도 고통스러워한다니, 백매는 너무나 분했다. 그를 다시 돌릴 수 있다면, 천지를 다 바쳐서라도 그렇게 하리라.
“끄응…….”
청난이 신음을 뱉으며 몸을 뒤척였다. 그 탓에 방금 전에 가졌던 불손한 생각은 날아가 버렸다. 마치 청난이 그의 생각을 읽고 혼을 낸 것만 같았다. 백매는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청난의 몸을 다잡고는 자신의 허전한 궁으로 향했다.
백매는 이제껏 그곳을 집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침상 같은 가구를 들여놓았을 턱이 있겠는가. 백매는 오늘에야 그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궁 앞에 도착한 백매는 막힘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수 개의 문들은 주인을 알아보고 그가 손을 대기도 전에 스스로 입을 벌려 환영하였다. 백매가 고개를 내려 청난을 바라보니 그의 두 눈꺼풀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도 뒤척였는데, 언제 또 깨어날지 몰랐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감히 그를 바닥에서 재울 순 없었다.
이윽고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몇 시진 전에 청난이 연화와 함께 왔던 그 방이었다.
‘어떡하지. 한연화한테 침상을 빌려 와?’
백매가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살피던 차에, 방의 중심에 놓인 함이 쩍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백매는 다급하게 달려가려다 품 안에 있는 청난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함은 열려 있었고, 그 속은 비어 있었다.
옥 장식은 백매가 삼백 년간 감히 품지도 못한 채 지켜 온 것이었다. 그것이 사라지자 백매는 분노보다는 허망함이 들었다. 사존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으로 아꼈었다.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남겨진 그와의 끈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품속에 사존이 계셨다. 비록 외모가 다르며, 전과 같은 강인함도 없었으나, 그가 수백 년을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었다.
‘감히 이 제자가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아주 오래도록 되뇌었던 소망. 백매는 그의 잠을 방해할까 그저 속으로만 삭였다. 아니, 그가 깨어 있었다 하더라도 입에 올리진 못했을 것이다.
백매는 청난을 안은 채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손을 풀기는커녕 더욱 단단하게 맞잡았다. 백매의 시선 앞에서 청난의 작은 숨이 내뱉어졌다.
부디, 그가 나의 꿈을 꾸고 있길.
청난은 눈을 떴다. 보통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을 보거나, 낯선 천장을 볼 텐데, 이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바로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청난과 눈을 마주친 백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존, 기침하셨습니까?”
“으음… 그래.”
청난은 얼떨떨하였다. 이 아이는 밤새 저를 안고 있던 것인가?
“죄송합니다. 바닥이 딱딱해서, 제자가 감히 사존께 불경을…….”
“아니다. 널 탓할 리 있느냐. 밤새 고생했다. 하지만 나는 바닥에서도 잘 자니, 다음엔 내려 두어도 된다.”
“그럴 순 없어요. 오늘 내로 사존께 맞는 크기로 침상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괜찮아. 여기 얼마나 있는다고 그런 수고를 하느냐. 너는 배움이 빠르니 금방 익힐 것이야. 너는 내 최고의 제자가 아니더냐.”
고개 숙인 백매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숫기 없는 모습은 여전했다. 청난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삼백 년 전에는 매일같이 아침 인사를 나누었었는데, 그 후엔 무엇을 했었지?
그때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가 나를 입히고, 씻기고, 꾸며서 함께 식사를 하러 갔었다.
‘…….’
돌이켜 보니 귀찮은 걸 전부 제자에게 떠넘긴 게으른 쥐 같은 생활을 했었다.
꼬르륵.
밥 생각을 해서인지 청난의 배가 대대적으로 식사 시간을 알려 주었다.
“…….”
“…….”
청난은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자 앞에서 이게 무슨 부끄러운 소리인가. 백매도 청난의 배곯음 소리에 놀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난은 이 아이만 만났다 하면 어색해지기 일쑤인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백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존, 제자와… 조찬을 들러 가시겠습니까?”
“여기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어?”
“사존께서 계시니 밤사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밤새 저를 안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준비를 한 것인지. 청난은 저를 안은 채 부엌을 꾸미는 백매를 상상해 보다 푸흡 웃음이 새어나왔다.
“좋다, 좋아. 너와 함께하는 식사는 간만이구나. ‘진 공자’와는 있었지만 말이야.”
“그건……. 죄송합니다… 제자가 감히 사존을 속이고…….”
“됐다. 농이야. 뭔 말을 못 하겠구나. 네 스승이 놀리기 좋아한다는 것을 그새 잊었어?”
“저는 사존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청난은 강아지 같은 백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대체 어떻게 잔 것인지 의복은 조금의 구김도 없었다. 백매는 따라 일어나서는 방문을 밀어 복도를 가리켰다.
“냄새가 사존의 숙면을 방해할까 조금 떨어진 곳에 준비했습니다.”
“여전히 세심하구나. 가자. 등딱지가 배에 붙겠다.”
청난이 문을 나서자 백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는 일직선이었으니 길을 잘못 들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백매가 앞서 안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청난은 부디 그가 자신의 옆에 서 주길 바랐다.
청난의 몸은 열 살에 불과했다. 그런데 약관을 넘어 다부진 신체의 남성이 보좌관처럼 한 걸음 떨어져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제자가 스승을 앞서 걷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예의라 하지만, 예외는 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와 나란히 걷기 위해 발을 멈추면 그도 따라 멈추었다. 그의 성격상 함께 걷자 하면 또다시 고개를 굽힐 것이다. 청난은 장성한 제자가 신선까지 되었는데 사소한 이유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청난은 눈동자를 굴리며 묘책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싶어졌다. 청난은 아랫입술을 비죽이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갑자기 제 스승이 예사롭지 못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니 백매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청난은 아예 몸을 돌리고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낚아챘다. 청난은 그의 손을 주무르며 자신의 손과 맞잡게 만들고는 만족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사존……?”
“네 궁은 아무도 없어 허전하니, 이렇게 허전함을 달래야겠다. 불만은 받지 않아.”
백매는 크게 뜬 눈으로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청난이 사전에 자른 탓에 그럴 수 없는 듯 보였다. 청난은 그런 제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 채 묵묵히 앞을 걸었다.
그렇게 잠시 걸으니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도착이 머지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따듯하네요.”
“응?”
백매의 목소리에 청난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하며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