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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24)화 (24/111)

#24

“사존……?”

청난의 시선이 혼탁해졌다. 그는 백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백매는 그가 보는 것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알았다. 청난의 머릿속에 있는 하얀 도화지가 그의 실수를 낱낱이 파헤쳤다.

“네가 아니었어.”

“네?”

“네가…….”

“그러니까, 선사께선 수야각의 비술을 엉뚱한 사람에게 넘겼으며, 그 뒤로 대가 끊겼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들의 짧은 대화마저 답답하게 여긴 해태의 신선이 짧게 정리하였다.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나누던 다른 신선들은 뒤늦게 한탄을 내뱉었다.

“허 참, 그 집 양반들이 들으면 목덜미 잡고 쓰러지시겠네.”

“말 좀 예쁘게 하시오. 양반이 뭡니까.”

한 사람이 말보를 트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줄줄이 성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시작되었다. 청난은 가뜩이나 심란하였는데, 이런 상황까지 보려니 짜증이 치솟았다. 청난은 이번에도 그들의 말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향한 관심을 닫았다. 그러던 때에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사님, 그럼 그자가 누군지는 아시겠어요?”

연화였다.

어느덧 그가 자신을 부르는 칭호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연화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전보다는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청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짐작도 가지 않아. 그 시절의 내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니, 나를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뛰어난 자의 소행이겠지. 그렇다면 그는 숨은 고수일 거야.”

“……그렇겠네요. 그리고 이젠 없겠죠. 벌써 삼백 년 전 일이니.”

“음, 그렇겠지. 너희 둘,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을 테니까.”

청난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심장이 덜컹거리는 듯했다. 이 기분은 수많은 시선보다 익숙해진 것이었으니 청난은 이번에도 애써 외면했다.

“그럼, 이젠 걱정할 건 없네요.”

연화가 말을 끝내자, 아웅다웅하던 신선들 사이에서도 정리가 되어 갔다.

“결론을 말해 보자고요. 여기 모인 건 다 대봉인 때문이 아닌가요? 수야각의 봉인 술진이 끊기지 않았으니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까?”

“백매선은 모른다 하지 않았나.”

“거참, 선께선 두 시진 동안 무덤에 다녀오셨소? 여기 마지막 전수자와 그의 제자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요?”

“아.”

아.

청난은 자신의 이름이 수면 위에 오르자 백매와 마주 보았다.

그를 가르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에게 가르쳐야 하는 술법은 원리만 안다면 손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었고, 그는 신선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손짓 발짓뿐인 가르침에도 잘 따라올 것이다.

다만, 그와 사제의 연이 끝난 지 벌써 삼백 년이다. 더구나 그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고, 나는 신선은커녕 수사라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백매는 내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선들이 어찌 바라볼지는 알 수 없었다.

“좋네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저 아이의 몸은 영기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백매선이 기술을 익힌다면 문제 될 건 없겠지. 다만, 술법이란 게 말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선사, 가능하겠나요?”

청난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사실 청난은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물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설득할 만한 말도 준비하지 않았다. 청난은 짧게 대답하였다.

“네. 백매라면 가능합니다.”

“봐요. 백매선은 천재이니, 걱정할 것 없소.”

천재. 그 단어가 청난의 입가에 머물렀다. 신선 중 그 누가 천재가 아니겠는가. 애초에 재능, 노력, 운을 다 가져도 될까 말까 한 자리거늘.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천재라 인정받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청난은 지금 이 순간을 마을 주민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잘생기고, 능력까지 좋다. 이런 제자는 일평생의 운을 다 쏟아부어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운은 백매를 만나는 데 다 쓴 건가 보네. 어쩐지 이번 생애 동안 재수가 없더라니.’

회의의 결론이 나자 신선들의 존재감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러자 신비로움이 가득 찼던 안개가 사라지고, 공간은 평범한 땅덩어리로 변했다. 이제 이곳에는 청난과 백매, 연화, 그리고 영수의 주인만이 남아 있었다.

영수의 주인은 어느새 긴 두루마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천천히 청난에게 다가왔다. 청난의 양옆에는 백매와 연화가 서 있었는데, 그들은 청난의 곁에 붙어 섰다.

영수의 주인은 두루마기를 청난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맨 처음 대봉인을 만들었던 신선이 남긴 것입니다. 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수야각의 주인이라면 무언가를 찾으실지도 모르죠.”

청난은 얌전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영수의 주인은 뻗었던 양손을 자신의 소매에 넣어 숨기고는 설명을 이었다.

“선사께서도 아시겠지만, 대봉인은 예로부터 강력한 요물을 봉인한 거대한 술법입니다. 그것이 존재한 덕분에 선계는 강력한 존재를 퇴치하기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게 되었죠. 지치게 만든 뒤에 봉인하면 되니까요.”

“그렇죠.”

“대봉인은 아주 먼 옛날, 초대 수야각주던 신선이 인간일 적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문파에서만 전승하게 하였죠. 각 문파들이 그들만의 술법을 연구해 만든 것이 그때부터였죠. 어쨌든 그 술법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고, 지금까지 수야각 출신의 신선들이 대봉인의 관리를 맡아 왔습니다. 보통은 각주가 비승하니까 말이죠.”

청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각주였을 때 천겁이 찾아왔었다. 영수의 주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최근 수야각에서 난 신선들의 행방이 묘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할 건 없는 일이었죠. 그들을 제어할 존재가 없으니, 쉬고 싶으면 쉬고, 죽고 싶으면 죽고, 뭐.”

설명을 잇는 그는 꽤나 불편해 보였다.

“덕분에 선계는 언제나 인력난입니다. 그런데 문뜩 보니, 수야각의 신선들은 오직 백매선 한 명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대봉인의 관리를 부탁하였었는데…….”

“백매는 아는 게 없으니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곤란하던 차였죠.”

연화가 말을 이어받아 대답했다.

“네, 그러다가 불과 두 시진 전에 일이 터지고 만 거죠. 갑자기 대봉인이 산산조각 나고, 그 속에 잠들었던 만귀가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만귀?”

“‘만’은 그저 비유입니다. 실제로는 약 삼백이 조금 안 되지요.”

영수의 주인은 별거 아니란 듯 말하지만, 절대로 별거 아닐 수가 없었다. 선계의 신선들조차 살생하지 못하는 요물들이 삼백 마리나 되며, 그것들이 인계에 숨어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신선들이 효율을 위해 별것 아닌 것도 봉인했다 하여도 현재의 인계는 그것들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청난의 이목구비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해태의 주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연화선께서는 서둘러 내려가 주시고, 백매선과 선사께서는 속히 수업을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인계엔 내려가지 마세요. 위험할뿐더러,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 이곳만큼 수련에 좋은 땅은 없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휙 몸을 돌려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 버렸다.

연화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꼬았던 다리를 풀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수업 열심히 해, 백매.”

백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난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탓에 떠나는 걸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북적이던 이곳에는 청난과 백매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

“…….”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그리 쉽게 입이 열렸건만, 막상 둘만 남게 되자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심지어 백매는 청난의 한 걸음 뒤에서 걸으려고 하였다.

“아가, 나는 길을 모른단다.”

“아, 제, 제자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백매는 그제야 청난의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백매는 일부러 청난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기라도 하는 듯 조금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라, 말보를 어떻게 터야 할지 몰라 저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보다 어른인 청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개미의 동굴에서 만났었지.”

청난은 그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지금 보면 왜 알아보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똑같이 자랐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땐 그와의 연은 끝났다고 생각해 상상도 못 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청난이 불과 며칠 전의 추억에 잠긴 사이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할 존재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난이 그를 찾으러 뒤를 돌았다. 백매는 자리에 멈춰 서 있었고, 반대로 그의 눈동자는 멈출 틈 없이 사방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가?”

“제, 제자가 감히… 감히 사존께…….”

백매는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양손을 세게 붙잡았다. 그의 모습에는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 청난은 그의 늠름하게 장성한 모습을 보느라 잠시 잊고 말았다.

내 제자는 땅굴을 정말 잘 판다.

청난이 입꼬리를 올리고 보다 산뜻하게 말했다.

“아가, 백매야. 무슨 그리 서운한 말을 하더냐. 이 스승이 혼을 내는 것처럼 보여? 오래간만에 만난 날의 추억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란다.”

“제자가 사존께 저지른 불경을 어찌 감히 추억이라 미화하십니까.”

“아이고야, 내 말은 다 옳다던 그 제자 어디 갔느냐? 나는 내 아이를 찾으러 가야겠다.”

“사, 사존!”

청난이 정말로 몸을 돌려 앞으로 향하자 백매가 그를 쫓아 걸었다. 백매가 청난의 바로 옆까지 오자 청난이 고개를 휙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었구나.”

청난이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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