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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23)화 (23/111)

#23

연화가 자신을 멋대로 데려왔고, 그가 물은 적도 없었지만, 어쨌든 뻔히 알고도 알려 주지 않았으니 청난은 그를 속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사과하고 달래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청난은 돌아간 고개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범재의 몸으로 허락받지 못한 땅을 밟은 것은 사죄드리나, 제 의지가 아니었음을 참작해 주시어, 저의 한 가지 의문을 풀어 주실 것을 간청드립니다.”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가지는 쪽은 선사께서가 아니라 우리 신선들이지 않겠소?”

지화선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으나, 그의 어투에서는 전과 달리 존중이 묻어났다. 청난은 그것에서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먹힌다.

청난은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수사의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청난의 고개를 살짝 기울어지며 백매를 향했다.

“백매야, 나는 널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단다. 하지만 이는 인계에 사는 모든 존재가 당사자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나는 그 당사자로서 네게 물어야겠구나.”

“하문하세요, 사존.”

백매는 혼나는 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청난은 비승까지 한 자신의 제자가 만인 앞에서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불편했다. 수많은 신선들이 보는 선계가 아니었더라면 그를 안고 달래고 싶을 지경이었다.

청난은 그를 안심시켜 보고자 옅게 웃음을 지었다. 애교살이 둥글게 휘었고, 입꼬리는 달팽이의 걸음처럼 천천히 위로 향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은 위아래에서 누르는 힘에 옆으로 튀어 나가 도드라졌다. 그 미소는 누가 보아도 귀여웠다.

한데 백매는 그와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더욱더 떨어트려 이젠 아예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이 아이가 무엇을 저질렀기에 제 앞에서 고개도 못 든단 말인가. 청난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을 이었다.

“신선의 도리에 살생이 없다면, 다시 봉인하면 되지 않으냐. 그렇다면 이 사태를 더 빨리 수습할 수도 있을 것인데, 어째서 의견이 분분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것은…….”

“그건 봉인할 신선이 없는 탓이지요.”

해태의 울음소리, 아니 목소리의 주인이 백매 대신 대답하더니, 흐르는 안개 연기 사이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가득한 화려한 장신구는 그의 얼굴보다 더 눈길을 끌었다. 그의 주변에서 흩날리는 불송이들은 그가 화계 재능을 가진 신선임을 보여 주었다.

“연화선께서 말씀하신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잊지 않았습니다. 수야각 출신 신선들이 모두 사라졌다고요. 하지만, 이곳엔 백매가- 아니, 백매선이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의 술법은 배제하는 것이죠?”

“…….”

다시금 주변이 고요해졌다. 고요함을 뚫은 건 이번에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걸 당신이 물으면 안 될 텐데요.”

헛바람을 내뱉는 그의 말투는 청난을 무시하는 것처럼도 들렸으나, 그보다는 진심으로 기가 막혀 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사망, 아니 사라진 탓에 기술이 전수되지 못한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리다니. 당신의 인간됨이 훌륭하다던데, 그 소문은 그저 허상이었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기술이 전수되지 못해? 그럴 리가.

청난은 당황스러움에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평범한 시각으로는 연화와 백매, 그리고 이 신선밖에 볼 수 없었다.

연화와 백매는 대답을 고르는 중인 건지 짙게 내려온 눈썹이 올라갈 생각을 않았고, 영수의 주인은 청난을 질색하며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에게선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청난이 웅성이는 소리 사이에서 단서를 찾으려던 차에 백매가 눈썹꼬리를 내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떼었다.

“제자가 깨우치지 못한 것을 어찌 사존의 탓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은 것처럼 청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곧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청난은 자신이 아는 것과 다름을 먼저 지적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잘못도 아닌 일로 그렇게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부모를 감싸는 것도 과하면 불효입니다. 세상의 어떤 천재도 말 한마디 듣지 못한 비술을 혼자서 깨우치진 못합니다.”

해태의 목소리가 백매를 다그쳤다. 하나 그의 속뜻은 청난을 탓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문을 열자 곳곳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이 맞소. 어째 백매선이 오늘따라 얌전하오?”

“스승의 앞이라 내숭을 부리는 게지. 그가 그간 배움의 공백을 메꾸려 얼마나 노력했소. 그게 누굴 위해서겠나? 스승을 욕보이기 싫어서지.”

“그가 효심으로 비승했던가?”

“검으로 비승했지.”

“참으로 스승을 아끼는구만.”

“그 검을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나. 일찍 요절한 게 아니라면 그도 비승했을 테지. 아쉽구나. 아쉬워.”

또다시 그들의 대화는 점점 주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청난은 더 이상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청난은 짧은 다리로 성큼 걸으며 백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청난이 키가 작은 탓에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땅에 고개를 박고 있던 백매와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백매는 청난과 이렇게 가까이 마주 보는 건 예상에 없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 버렸다. 청난은 백매의 양 손등을 가볍게 잡았다.

“아가.”

“……예… 예, 사존.”

청난은 백매의 양손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은 컸고, 거칠었으며, 또 따뜻했다.

“아가, 이 스승의 말 들어야지. 응?”

청난의 두 눈동자에는 오직 백매만이 담겼고, 지금 그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도 오직 백매였다. 청난은 그의 손에 제 볼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네게 술법을 전수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다른 이들은 다르게 아는 듯하구나. 아가, 이 스승에게 설명해 주련?”

청난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해 그 안으로 파고들고 싶게 만들었다.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백매는 이 사람이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어느새 백매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감돌았고 당장이라도 뜨거운 물방울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저는,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사존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 아둔한 제자는 모르겠습니다. 사존…….”

“누가 내 제자보고 아둔하다 해? 이 스승이 혼내 주마.”

“제자가 나쁩니다. 사존께서 언제 전수해 주신 건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비밀이 그리 간소하니 오해할 수도 있다. 이해해. 더군다나…….”

흐르는 시냇물 같던 청난의 말은 댐에 막힌 것처럼 중단되었다. 아무리 청난이라 하더라도 이 뒤의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청난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빙 돌려 말했다.

“그날이었으니. 다 이해해.”

“그날… 이요?”

“……내 마지막 날.”

청난은 결국 꺼내 버린 말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백매 또한 혼란스러워 보였다. 청난의 볼을 감싸는 백매의 손이 움찔거렸다.

“제, 제자가 당신께 들은 말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술법에 관한 게 아니었어요. 제가 갔을 때 당신께선 이미…….”

“……음…….”

그날, 한 명은 목숨을 잃었고, 또 한 명은 스승을 잃었다. 이 중 누가 그날의 일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주제에서 대화가 끊기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청난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판본이 다르단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차이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백매는 당장이라도 울 듯하였고, 이런 아이에게 대답을 재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겐 스승을 잃은 슬픈 기억이지 않은가.

물론, 그 스승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다소 기이하긴 하였지만.

청난은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소각주가 나를 불렀다. 내가 곧 떠나니 마지막 술법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그래서 가르쳐 주었어.”

백매는 침울한 와중에도 차분히 청난에게 맞춰 기억을 되짚었다.

“그날, 제자는 사존을 뵙지 못하였어요. 밤이 무르익을 때까지 당신께선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제자가 당신을 찾아 나섰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 울려 퍼졌다.

“어째서 두 사람의 말이 다른 것인가!”

“조용히 하세요. 지금 당사자들이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낄 데 못 낄 데를 구분해야지. 거참.”

“…….”

그것은 또 다른 목소리에 저지당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덕에 더 이상 대화에 끼어드는 신선은 없었다. 여러 눈동자는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보는 듯 다시금 청난과 백매를 향해 몰려들었다.

우습게도 그가 음울했던 분위기가 한번 깨 준 덕에 전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것은 백매 또한 마찬가지인 것인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존, 정말 저에게 비술을 전수해 주신 건가요?”

“그래. 너처럼 생긴 이가 어디 흔하더냐.”

청난은 이 분위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애써 푸흐흐 웃었다. 백매가 말을 했으니 다음은 청난의 차례였다. 청난은 조금 더 생생하게 알려 주기 위해 그날을 회상하였다.

그날은 여러 이유로 잊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삼백 년이 지났음에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끌어 숲속으로 들어갔던 어두운 손을, 전수한 술법에 성공하고 활짝 웃던 웃음을, 자신을 번쩍 들어 안았던 두 팔을,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를.

잠깐만.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고?

수줍은 많은 백매가?

청난은 빠르게 답을 찾았다. 동시에 그의 낯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아니구나.”

과거의 그 사람은 백매가 아니었다.

백매는 그렇게 웃지 않았고, 그런 목소리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를 ‘화백매’라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그자를 특정할 만한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 그의 얼굴에는 이목구비 대신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실수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수야각의 비술을 노출하고, 지저분한 술법에 걸린 탓에 단전되게 만들었다.

내가 수야각을 무너뜨렸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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