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백매의 궁 안은 마치 복도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끝없이 복도가 이어졌고, 끝없이 텅 빈 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가장 먼 곳에도 문이 있었다.
그 문은 다른 것들과 달라 보였다. 이 삭막한 곳에서 유일하게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청난은 어렴풋이 저곳이 목적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의 문을 열자, 예상외로 이곳 또한 텅 비어 있었다. 안에 있는 것은 방 가운데에 놓인 나무로 된 작은 함이 유일했다.
“백매 이 친구는 나 몰래 다른 집이라도 만들었나?”
연화는 이 작은 함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텅 빈 방 안을 구석구석 살피었다. 비밀 통로라도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청난은 함의 뚜껑을 잡아 열어 보려 하였지만,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난은 이 함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백매에게 이런 잠금 방식을 알려 준 것이 바로 그였다.
“연화선, 여기 와 보세요.”
“응, 왜?”
연화는 착하게도 곧장 와 주었을뿐더러 청난이 말없이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척 얹어 주기도 하였다.
청난은 그의 손을 함의 뚜껑에 문지르며 어떤 모양을 그렸다. 그것은 글자 같기도 하고, 마름모 같기도 한 것. 불개미의 동굴에서 매화나무에 새겼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원래는 영력을 담아야 하지만, 연화는 신선이라 숨만 쉬어도 영기가 뿜어져 나오지.’
딸깍. 함이 열렸다. 청난은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그것은 청난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내 옥 장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얇게 조각된 옥을 여러 갈래의 실에 꿰어 놓은 장신구. 그것은 수야각 진청난의 검을 장식하던 옥 장식으로, 무예를 펼치는 그의 모습이 풀이 춤을 추는 듯하다 하여 ‘초무검’이라는 별호가 생기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옥일 뿐이었다. 천지에 많고도 많은 게 옥인데 신선까지 이른 그가 이런 걸 애지중지 품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걸 어떻게 구한 거지. 그 독사가 아무것도 안 넘겼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넌 모르겠지. 이건 우리 사존의 유품이야. 그런데 사존의 형님이 백매를 유달리 싫어… 음?”
연화가 말을 하던 도중 해태 한 마리가 들어왔다.
청난은 순간 놀랐지만, 곧 그것이 영기로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해태가 커다란 입을 벌리자 그 너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연화선. 신선들은 급하게 중앙으로 모여 달라는 전언이 있습니다.
“어째서?”
-대봉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대신선이 알려 줄 겁니다.
영기로 된 해태는 청난을 힐끔 보더니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허.’
저 해태의 정체도 신선일 텐데, 신선이 상대의 영기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겠는가. 저자는 청난이 하찮기 때문에 저리 행동하는 것일 테지. 만약 그가 청난의 제자였더라면 청난은 따끔하게 혼냈을 것이다.
해태의 설명을 들은 연화는 고개를 기울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음, 그건 땡땡이 못 치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대봉인이 무엇인지는 청난도 얼핏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멸하지 못하는 악한 자들을 봉인해 놓은 것으로, 그것을 처음 만든 이가 바로 수야각을 세운 이였다.
연화는 자연스럽게 청난을 안아 들었고, 청난도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청난은 해태에게도 그리 다양한 표정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연화를 졸졸 따라온 해태는 줄곧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으로 청난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자면, ‘저 자격도 없는 것이 감히 신선의 위에 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물론 청난이 알 바는 아니었다.
“아, 다른 신선들이 모여 있다면, 백매선도 그곳에 있나요?”
-…….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대봉인은 백매가 주관하고 있거든.”
-맞습니다. 백매선께서는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해태는 청난의 말은 못 들은 체하더니, 연화선의 의문에는 냉큼 대답해 주었다. 이런 사람도 신선이 된다니, 삼백 년 전 신선을 꿈꾸며 수련했던 사형제들이 안다면 통곡을 금치 못할 것이다.
청난은 이 어린애 같은 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자신 또한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하였다.
“왜 백매가… 아니, 백매선이요? 이런 중책을 맡기엔 신선들 중에서는 어리지 않나요?”
“대봉인은 대대로 수야각 수사들이 맡는 전통이 있거든.”
“다른 신선은요?”
“행방불명.”
“행방불명?”
“너무 놀라지 마. 꽤 흔해. 오래 살다 보니 지루해진 건지 아니면 소멸한 건지 하나둘씩 안 보이더라고. 선계가 왜 늘 인력난이겠어?”
인력난이구나.
청난은 속으로도 웃을 수 없었다.
해태는 가는 내내 연화에게 시시콜콜한 말들을 던졌다. 요즘 어느 공자가 재능이 넘치는지, 어느 세력이 커졌는지. 주로 내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허구한 날 인계에 내려가는 연화에게 맞춘 주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연화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었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황성 아래에 괜찮은 당호로(糖葫蘆)집이 있어. 그리고 그 옆에는 나쁘지 않은 주점이 있지. 네가 다 자라면 데려가 줄게.”
“전 아직 열 살인데, 제가 자랄 때까지 보려고요?”
“응. 백매가 네 옆에 있으면, 나도 있어도 되겠지?”
연화와 청난의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청난은 오래간만에 만난 아이와 대화를 나눠 즐거웠지만, 찬밥 신세인 해태를 보니 그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대화에 섞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으나, 곧 시선에 닿은 풍경에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신선들이 한곳에 모여 회의를 한다고 하니, 청난은 넓은 내전에 있는 궁관들의 모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이곳을 본 청난은 자신의 상상력이 비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지붕이 없었으며, 심지어 바닥조차 없었다. 그들의 발아래는 흙도, 모래도, 바위도 아닌 속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안개, 또는 구름으로 차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동시에 모든 것으로 가득했다. 구름, 풀, 바람, 소리. 자연에게 선택받은 이들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장소가 있겠는가. 그들의 이목구비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는데, 청난은 아우러져 있는 그들을 보며 자신이 보는 것이 사람이 아닌 나무와 같은 자연이라는 감각을 받았다.
청난은 그들에게 쉬이 눈을 뗄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청난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들만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것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의 조짐인 것이지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요, 시작이 있는 것들은 모두 끝이 있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방치에 가까웠으니 때가 되었을 때 진 것이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어찌 간섭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생과 멸의 섭리를 따지는 건 모양새가 우습군요. 태어났지만, 끝은 없는 이들을 눈앞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선께서 그새 눈이 머신 줄을 몰랐군요.”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면 서로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연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만 한 높은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품에 안고 있던 청난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청난은 본래 바위 뒤에 숨으려고 했었는데, 신선들은 그들만의 대화에 빠져 주변을 보지 않았으니, 연화가 애써 골라 준 바위까지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연화선이 왔군.”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청난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과연 아무도 없었다. 연화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제자리에서 포권을 취하였다.
“예, 연화가 대신선을 뵙습니다.”
“흠, 좋다. 대화를 계속하지.”
청난은 이 대화로 선계에도 위계질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의 바른 모습이었던 연화는 그새 다시 돌아와 바위 옆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꽤나 지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난은 그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대봉인이 파괴된 것이 우리 신선들과 무슨 상관이 있지?”
“허허, 말을 참. 우리가 지키던 것이 아니오? 그 탓에 천 가지의 악이 세상에 퍼졌으니, 신선은 그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애초에 그것이 잘못되었소. 그들도 결국 하늘 아래의 생명이고, 자연이지 않소. 그것을 인위적으로 가둔 것조차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의 섭리니 뭐니 말하지 말고, 솔직히 따져 봅시다. 우리가 누구 편입니까? 우리를 이곳에 이끈 것은 인간들의 기원이요. 그들이 인간에게 해가 된다면, 우리가 나서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신선이 인간들의 기원을 담는 항아리라는 말은 속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두 눈 뜨고 지켜보자는 거요?”
“물론입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해결해야지요.”
“이대로라면, 저 아래에 있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그건 그들의 일입니다. 우리 또한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같습니까? 아예 싹 다 죽고 새롭게 천지를 창조하자 말씀하시지요!”
청난은 싸늘해진 머리로 그들의 대화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금 대봉인이 깨져서 악귀들이 세상에 판치는데 그냥 두고 보자는 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