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웁……!”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을 거른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줄이야.
청난은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양손 양발이 땅에 닿은 사족 보행의 모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정말 약하구나? 백매가 안 부러뜨려서 참 다행이다.”
“…….”
연화의 말본새는 결코 정갈하지 못했다. 분명 그는 유서 깊은 수선계 집안에서 태어나 가혹할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조금 억눌려 있었지만 예의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방탕아가 되었지?
연화는 청난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비슷한 위치긴 하였다. 청난은 그를 잘 안다 자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최근 삼백 년간의 행보는 자신이 알던 아이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대체 삼백 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돌보던 두 아이 중 예상대로 자란 아이가 없었다. 이 정도가 되자 그는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사이에 천지가 세 번쯤 개벽하였다고 하여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진군, 타인의 고충을 그리 가볍게 말씀하시는 건 그리 좋은 화법은 되지 못합니다.”
“사존과 같은 말을 하네.”
청난은 그의 말에 움찔했다. 그가 말하는 ‘사존’은 연화문에서 그를 가르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연화는 백매가 ‘사존’이라 부르는 것을 부러워했다. 때문에 어린 그를 달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자신을 그리 부르는 것을 허락했었다. 이제는 그가 우화등선을 하여 인간의 위에 섰으니, 그가 누구를 어떻게 부르든 간에 지적할 자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줄곧 청난을 그리 불러 온 모양이었다.
청난은 모른 척 대답하였다.
“단점을 놀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단점인 건 알고 있구나.”
“음, 셈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났는걸요.”
후. 작게 숨을 내뱉은 청난은 옷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울렁거림이 남아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청난은 자신의 어깨에서 묵직함을 느꼈다. 이윽고 연화의 손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영기가 전해졌다. 떨어진 기력만큼 가득 채웠음에도 연화의 손이 여태 남아 있자 청난은 그의 손가락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이제 됐어요. 제 그릇은 워낙 작아서 더는 들어가지도 않아요.”
“아, 그래? 수선자가 아닌가 보네.”
“네. 그냥 작은 산골 마을의 서점 댁 아들일 뿐이에요. 하늘에서 문과 시험을 보기라도 하지 않는 한 이곳과는 연이 없을 테죠.”
“억울하겠네.”
“전혀요. 모두가 신선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어?”
연화는 쭈그려 앉아 청난과 눈을 마주하더니 품속에서 천 자락을 꺼내 청난의 얼굴을 비벼 댔다. 얼굴 닦는 용으로 쓰기엔 천은 너무나 값져 보였고, 청난의 얼굴에는 물기 하나 없었기 때문에 피부가 당겨 아팠다. 연화의 말투며 행동은 고얀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청난은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배려에 서툰 모습은 여전하네.’
그가 자신이 알던 꼬마 연화라는 사실이 이제야 와닿기 시작했다.
청난은 그의 모습을 마냥 귀엽게 보고 싶었지만 볼이 너무나 아팠다. 결국 가죽이 벗겨지기 전에 몸을 뒤로 빼며 양손으로 볼을 방어했다.
“아파요!”
“나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문지르기만 했는걸?”
“연화의 힘이 너무 세요.”
청난은 양 볼을 감싸 쥔 채 뒤로 걸으며 그에게 멀어지고는 몸을 돌려 휙 돌렸다. 그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때가 아님에도 활짝 핀 벚나무와 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이 뜰의 오 할 이상이 호수였는데, 단순히 큰 웅덩이의 형태가 아닌, 거대한 붓이 일필로 그은 선을 그대로 뚫은 듯했다. 덕분에 어디서든 볼 수 있어 실용적이었고,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인위적이었다. 청난은 이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새 청난의 옆으로 연화가 다가왔다.
“인사선의 뜰이야. 온몸이 황금빛인 잉어는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어.”
“황금색 잉어?”
“응 맞아. 그걸 만들려고 인사선이 온갖 명약을 쏟아부었다는 소문마저 있지.”
“그럼, 그분이 키우는 문지기 같은 건가요?”
“아니, 감상용 애완동물.”
“…….”
청난은 황당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름 자신도 틀에 박히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사람의 틀을 벗어난 자들의 사고는 짐작조차 못 한 것이었다.
명약 하나로는 세가의 영웅이 탄생하고, 명약 두 개로는 맹(盟)의 영웅이 탄생하며, 명약이 열이면 나라의 영웅이 탄생한다고 한다. 그렇게 희귀하면서도 큰 효능을 가진 것을 그저 잉어 한 마리를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쏟아부었다니. 청난은 아까움에 뒷맛이 씁쓸했다.
“그 덕분에 이곳은 영기로 충만하지. 우리야 이곳이나 아래나 거기서 거기지만, 인간들에겐 훌륭한 수행처일 거야.”
“인간은 여기까지 못 오지만요.”
“그래도, 넌 왔잖아. 몸은 좀 어때?”
“음…….”
청난은 자신의 몸 곳곳을 더듬거렸다. 더 이상 어지럽지도 않았고, 멍이 든 곳도 없어 보였다.
“좋아요. 진군 덕분이에요.”
청난은 애초에 아팠던 것이 그 탓임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은가. 지나간 일을 다시 끌어올 만큼 속이 좁진 않았다.
“아까처럼 연화라고 부르지 않네.”
청난은 그를 돌아봤다. 연화는 청난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서 기대감이 내보였다. 청난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고민했다.
“아까는 마음이 급해 실례했습니다. 연화선.”
고민은 선을 긋는다는 결론으로 끝을 냈다. 연화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보였지만, 큰 타격을 받진 않은 듯했다.
“그럼 다음은 화사선의 우산을 보러 가자. 그 우산은 펼치면 비가 온대. 참 쓸모없지? 그거 만들겠다고 몇 개의 법보를 부순 줄 알아? 하하하하하하.”
연화는 이번에도 청난의 의견은 듣지 않고 그를 안았다. 다행히 그가 멀미한다는 것을 신경 쓴 것인지 이번엔 날지 않고 차곡차곡 땅을 밟으며 이동했다.
그는 화사선의 비가 내리는 우산으로 시작해, 신으면 넘어지는 신발, 나무를 패지 못하는 도끼 등 다양하고도 독특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쓸모없는 법보들을 몰래 보여 주었다. 주인들이 집을 비운 틈에 말이다.
연화는 청난의 기분을 풀어 주려던 것 같았지만, 그중에서 청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설레게 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위해 낭비된 재료들이 아까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것들이면 이 망해 가는 수선계를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연화는 청난의 지루하다는 표정을 보고는 팔짱을 끼었다.
“마음이 무거운 건 백매랑 닮았네. 음… 어쩌지.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그냥 보내기도 아쉽고.”
“전 그냥 가도 좋겠…….”
“그럼, 백매선의 궁관에 가자.”
“아?”
청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이번엔 집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백매가 지난 삼백 년간 살아온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가 궁관에 꽁꽁 숨겨 놓는 게 있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고, 말해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근처에도 못 가게 한다니까? 뭔지 궁금하지 않아?”
“……안 돼요. 그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에요.”
그들 모두가 인간이던 시절, 백매는 청난에게 숨기는 게 없었고, 청난은 그의 모든 것을 알았었다. 그런데 그가 삼백 년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게 있다니.
‘사실 조금 궁금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숨겨 놓은 것을 몰래 보는 건 결코 옳지 못하다. 청난이 그에게 그것을 가르쳤는데 어찌 자신이 어긴단 말인가.
“고집불통. 그럼 뜰만 가 볼래? 뜰이야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니까. 너도 궁금할 거 아냐. 그 정돈 괜찮지?”
청난은 그의 말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사실 다른 이들의 궁관을 볼 때마다 백매의 것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찔리는 것 없이 볼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백매의 궁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덕분에 청난은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걸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도착하여 바라본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이건 너무…….”
“너무 삭막하지?”
“…….”
청난은 그의 말에 공감했으나, 차마 긍정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연화는 청난의 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을지도 몰라. 아니다, 단벌 공자는 아니니 옷장은 있겠네.”
“……여기가 백매선의 집인 건 맞죠?”
“그건 아닐걸?”
“네? 여기가 백매선의 궁관이라면서요.”
“그건 맞는데, 백매는 늘 자신의 집은 없다고 했어. 이것도 거의 내가 지은 거야. 소꿉친구를 길바닥에 나앉게 할 수 없으니까. 그랬더니 못 들어가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연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백매의 궁관에는 연화의 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동상은커녕 그 흔한 꽃나무조차 없다니, 매일 아침 자신에게 꽃을 따다 주던 제자는 동명의 다른 사람이었나?
“마치 홀연히 떠나 버릴 사람 같지. 그런데 이 안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게 있다니, 뭘지 상상이 가?”
청난은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지?”
“…….”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궁금하냐면, 당연히 궁금하다. 하지만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연화는 자신을 들고 들어가 버리지 않겠는가.
“그럼 가야지.”
그런데 청난의 고민은 헛된 것이었다.
연화는 청난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궁관에 발을 들이밀었다. 청난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묵묵히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