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18)화 (18/111)

#18

청난은 지금까지 진영과 대할 때는 어느 정도 ‘스승’이란 입지를 생각해 마을 사람들을 대할 때보단 어른스럽게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갑자기 10년은 어려진 것처럼 말하려니 어색함에 입술 끝이 실룩거렸다.

‘아, 부끄러워.’

다행히도 진영이 조금도 지체 없이 바로 대답해 준 덕분에 부끄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건 다 드세요. 전부 사 드릴게요.”

이번엔 그는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길은 어떻게 아는 것인지 청난보다 반걸음 앞서가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뼈다귀를 눈앞에 둔 강아지 같았다.

이미 가판대에는 달콤한 냄새에 발길을 돌린 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청난을 오 분도 서 있지 못하는 약골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듯 순서를 양보해 주었다.

“어이쿠, 청난이구나. 먼저 사렴. 오늘은 햇빛이 뜨거우니 조심해야 해.”

“집까지 데려다줄까? 아저씨, 난이 먼저 줘요.”

“하하하,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늘은 일행이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먼저 가 볼게요!”

줄 서 있던 사람 수대로 걱정을 한 아름 받은 청난은 조금 민망해져서, 닭꼬치 두 개가 제 손에 쥐어지자마자 지체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청난은 닭꼬치 하나를 진영에게 건네며 말했다.

“공자, 다른 데 가서 먹어요. 제가 조용한 곳을 알아요.”

“네,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요.”

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난은 곧장 그의 손을 이끌고 북적한 저잣거리 사이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자 곧 황량한 공터가 나왔다. 그곳에 남아 있는 건물의 잔해가 훌륭한 의자가 되어 줄 예정이었다.

청난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평평하여 앉기 좋은 곳으로 진영을 이끌었다. 진영이 안정적으로 앉은 것을 확인한 후 청난은 그의 옆에 척 붙어 앉았다.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이곳에 왔었어요. 아무도 데려온 적 없는 저만의 장소인데, 공자에게만 특별히 알려 드릴게요.”

“저에게만 특별히요?”

“네. 제 첫 제자잖아요. 누구보다 특별하죠.”

“…….”

진영은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청난은 고기와 채소가 조화를 이룬 닭꼬치를 입 안에 넣느라 그의 시무룩해진 표정은 미처 살피지 못했다. 진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지, 제가 첫 제자라서?”

진영의 목소리는 다소 울적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정도가 미미한 탓에 청난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였다.

“물론 좋은 친구기도 하고요. 저는 공자와 함께 있는 게 좋거든요.”

청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청난은 그제야 진영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단 걸 알았다. 이번에는,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저도 선생님이 좋아요.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당신이라서 좋아요. 뭐든 해 드리고 싶어요. 언제나 닭꼬치를 사 드릴게요. 더 맛있는 것들도 사 드릴게요.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당신의 앞에 놓아 드릴 수도 있어요.”

그는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뼈다귀를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 떠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진영의 손은 청난을 잡으려는 듯 공중을 선회했지만, 그의 손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결국 자신의 양손을 부여잡는 것에 그쳤다.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쩌다 이 아이는 이런 표정을 짓게 된 것일까. 그와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이토록 애정이 고팠던 걸까.’

청난은 문득 세상이 너무 억울하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난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수야각의 어린 제자들이 눈물방울을 달고 찾아오면 그들을 꼬옥 안아 주곤 하였었다.

-그래, 옳지. 괜찮다, 사존이 있는데 무얼 그리 겁내느냐.

청난은 말솜씨가 좋지 않아 그가 달래는 말들은 언제나 비슷하였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울음을 그쳤었다.

“…괜찮아. 무얼 그리 겁내. 내가 곁에 있는데.”

청난은 감상에 너무 깊게 빠진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를 옛 제자에게 하던 습관대로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단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어린아이에게 어린 취급을 받았으니, 그의 기분이 상해도 마땅했다.

‘어…….’

하지만 청난의 생각과 달리 그의 가볍게 다물린 입술 끝은 귀에 닿을 듯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본 진영의 미소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의 모습에 정말로 홀려 버린 모양인지 청난의 입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뱉어 냈다.

“저는, 저는 공자를 떠나지 않아요.”

청난은 맞잡은 진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떠나지 않을게요. 공자께서 절 찾으시면, 언제나 찾아갈게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네?”

청난은 양손을 들어 진영의 볼을 감싸 쥐었다. 청난의 눈동자 안에는 진영만이 담겼다. 이 순간은 마치 이 세상에 단둘만이 남은 것 같았다.

진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

하지만 그가 온전한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청난의 손이 스르륵 거두어졌다. 청난은 그의 얼굴을 만졌던 왼손을 오른쪽 소매에 비볐다. 그곳에는 붉은 양념이 묻어났다.

“양념이 묻었어요.”

“아.”

“하하하, 그 집 참 맛있게 잘 굽죠? 또 가요.”

“……네. 네 좋아요 선생님.”

그들은 식어 버린 닭꼬치를 마저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영은 첫 만남 때처럼 청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 왔다. 청난은 타인에게 궁금한 점이 이만큼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첫 만남 때보다 진영에게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마치 그와 대화할 때는 청난이라는 어린 소년이 아닌, 전생부터 알고 지낸 지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탓에 청난은 하마터면 오래전에 쓰던 말투가 튀어 나갈 뻔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폐허는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밤은 맹인과 병약한 어린아이가 걸어 다니기엔 적당하지 않으니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을이 넓지 않았기에 진가의 후문에 도착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난은 그 점이 퍽 아쉬웠다.

‘어차피 내일 또 볼 텐데,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수업하지 않고 놀아서 그런가.’

농땡이 부리던 사문 제자들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청난은 진영의 손을 잡아 그가 문턱을 넘는 것을 도와주었다. 후문 너머는 어두웠으나, 진영에게는 조금도 상관없는 것일 터였다. 그 때문에 청난은 그를 안쪽까지 바래다줄 핑계를 찾지 못하고 포개었던 진영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 볼게요. 공자, 내일 또 뵙겠습니다.”

청난은 인사한 후 뒤돌던 차에 진영의 손에 소매를 붙잡혔다.

“공자?”

“서, 선생님 잠시만요.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진영이 손을 놓고 허둥지둥 반대쪽 소매 안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꺼낸 것은 머리 끈이었다. 어두운 탓에 자세한 무늬는 구별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진영은 그것을 청난에게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달아 드려도 될까요?”

청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청난의 등 뒤에서 진영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묶고 있는 끈 위에 덧씌우거나 교체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목 뒤로 스치는 진영의 손으로 보아 어떤 형태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동작은 익숙한 듯 능수능란하였다.

“이건 언제 사신 건가요.”

“선생님께서 닭꼬치를 고르고 계셨을 때요.”

“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옆에 장신구를 팔던 가판대가 있었던 것 같았다.

“선생님이 생각나는 색이에요. 따뜻한 물색이거든요.”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분명 어여쁜 색이겠지요. 지금 빛이 들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자, 다 됐어요.”

진영은 손질한 머리의 끝을 청난이 볼 수 있도록 그의 어깨 너머로 돌려 주었다. 청난은 손끝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두껍게 땋인 머리카락의 끝에는 머리 끈이 둥글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빛만 있다면 머리를 풀지 않아도 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였다.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볼게요.”

“그래 주신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그들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서로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두컴컴해진 밤하늘에는 오직 옅은 달빛만이 비추었지만, 길이 익숙한 덕분에 청난은 두려움은커녕 방금의 일로 흥이 나기만 하였다.

청난은 머리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달빛은 미세했지만, 조금은 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푸른빛이 감돌았다. 밝은 곳에서 본다면 온전한 색을 알 수 있겠지.

‘집에 들어가면 바로 볼 수 있겠지. 나를 보고 색을 떠올렸다니 얼마나 기특해.’

청난은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기이함을 알아챘다.

그는 더 이상 발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청난은 자신의 머리 끈을 흘깃 바라보았다. 앞이 안 보이는 귀한 도련님의 솜씨치고는 탁월했다.

‘나를 닮은 물색? 맹인이 어떻게 색을 구별할 수 있어?’

청난은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길 끝에 있는 거대한 저택의 후문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바람을 타고 매화꽃만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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