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16)화 (16/111)

#16

‘나는 그의 꿈을 꾼 게 맞아. 그의 과거를 겪은 거야. 나는 그때 배후 같은 게 있다는 걸 알지 못했어. 사존께서는 수야각의 형제들끼리 서로를 의심하는 걸 바라지 않으셨을 테지. 사존이야. 사존이셔!’

백매는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 속에 처음 이 소년, 청난과 마주했던 그 동굴 안이 생생히 그려졌다.

‘이 세상에 그 말고 그 술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용기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어째서 빨리 눈치채지 못한 걸까.’

차마 소년의 몸에 닿지 못한 백매의 두 손이 그의 가슴 앞에서 꾹 쥐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둥글게 말아 이 벅차오름을 참아 내었다. 그의 눈은 소년을 보지 않았으나, 그의 모든 신경은 소년을 향해 있었다.

“사존…….”

소년은 여전히 새근거렸고, 백매는 그가 깰까 봐 숨마저 죽였다.

그들을 향해 고개 숙인 나뭇가지의 꽃봉오리 하나가 드디어 몸을 열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맞물려 있던 청난의 속눈썹이 천천히 서로 멀어졌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낯설면서 어쩐지 익숙한 천장. 청난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자신의 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다 여기 있게 된 걸까. 골똘히 생각할 무렵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깨셨나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피부의 긴 손가락이 보였으며, 그것을 타고 올라가자 진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청난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난은 그제야 이 낯선 천장의 주인이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업을 할 때 늘 보던 문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을 누가 특별히 기억하겠는가.

청난이 그에게 인사하고자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자 진영이 손을 뻗어 등을 받쳐 주어, 덕분에 청난은 편안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다, 당연한 일이에요, 선생님.”

청난은 그에게 인사와 함께 미소를 보이며 호의에 화답하였다. 비록 진영은 보질 못할 테지만, 상대가 보지 않는다고 하여 무시한다면 그것은 예를 지킨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자 진영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빠르게 소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고개는 청난이 아닌 빈 벽으로 향했다. 그가 앞이 보였다면, 청난은 쑥스러워 눈길을 피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영의 큼지막한 손은 여전히 청난의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이불을 매만지며 구김을 펴 나갔다. 그의 세심한 손길은 전보다 공손해진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사고를 친 후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제가 어째서 여기 누워 있는 건가요?”

“아.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제가 낮잠을 잘 때면 피워 두는 향이 있는데, 그것이 선생님께는 강했나 봐요. 불편하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진영의 양 눈썹꼬리가 축 처지더니 그가 이내 심각한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정말로 사고를 친 후라는 것을 알게 되자, 청난은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쑥스러워한 게 아니라, 찔린 거구나. 소공자는 정말로 어린 구석이 있네. 그나저나, 잠들기 전에 그의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 않았던가?’

청난은 잠들기 전을 떠올렸다. 잠시나마 그의 눈을 마주 보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 또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운이 좋은가 보네.’

만족스러운 꿈을 꾸었고, 그것을 온전히 기억한 채 일어나기까지 했으니까.

오래간만에 그 아이를 다시 보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이전까지는 마지막으로 그 아이와 만난 꿈이 하필 죽었던 그날이었던 까닭에 추억에 젖어 들긴 어려웠다. 물론 조금 전 꿈도 그리 좋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 아이와의 꿈이 죽지 않는 꿈으로 갱신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꿈에서의 일을 잠시 생각하던 청난은 마지막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청난은 그것을 듣지 못하고 깨어나고 말았다.

‘꿈이란 게 그렇지 뭐.’

청난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고 현실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누가 절 안으로 데려와 주신 거죠? 공자께서 사람을 불러오셨나요?”

“아, 아니요. 제가 모시고 왔어요.”

“공자께서요?”

청난은 당연히 하인을 불렀었을 거라 생각하고, 하인에게 감사를 표하여 그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을 업고 들어왔다니!

문뜩 이 소공자를 처음 만난 날,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 기억났다. 청난은 자신이 그를 너무 얕보았던 것인지, 무리하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실례한 것은 분명했으니, 청난은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공수하여 그에게 예를 표했다.

“제가 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공자.”

“실례라니, 당치 않아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선생님을 맡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제가 욕심부린 것뿐이었습니다.”

응……?

그 말을 들은 청난은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을 탐낼까 경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청난이 차마 고개를 일으키지 않고 있자 진영은 자신의 몸을 낮추어 청난과 눈을 마주쳤다.

진영의 두 눈은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이 짓누르고 있었다. 청난은 어쩐지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청난은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가 보고 싶어졌다.

꼬르륵.

청난이 그에게 손을 뻗고 싶은 것을 이성으로 참고 있던 와중에 때마침 인간이 가진 시계가 점심을 먹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아.”

“아.”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이 별거 아닌 일은 꽤 우스웠고, 그 탓에 웃음보가 터지는 것도 동시에 일어났다.

“하하하하. 사제는 닮는다더니, 벌써 닮아 가려나 보네요.”

“하하하, 선생님을 닮는다는 건 최고의 영광이에요. 벌써 점심때이니 배고프시죠? 제가 요리하…… 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죠? 하하, 나가서 식사하시겠어요?”

진영의 명량한 목소리와 달리 청난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은 분명 좋은 생각이 아닐 것이다. 만약의 사태라도 발생하면 청난은 그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 하지만 그가 대부분의 대갓집 자제들처럼 ‘사람을 부르겠다’라는 말보다 직접 요리를 하거나, 밖에서 사 먹겠다는 말을 먼저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청난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평소에도 나가서 드시나요?”

“먹어야 할 때는 그렇죠.”

“그러시군요…….”

청난은 이번에도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은 적어도 하루 두 번은 먹어야 할 때가 온다. 그런데 이 공자는 마치 벽곡 수련한 늙은 수선자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적이었다. 그는 이것만으로도 천하 백 대 인물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게 분명했다.

청난은 도저히 나가서 먹지 말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도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일진대, 자신과 먹는 것이 아니라면 홀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거나, 굶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청난은 다리를 돌려 침상에서 내려갔다. 처음 진영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그의 손을 잡아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럼 나가요. 제가 맛있는 식당을 알아요.”

진영은 청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맞잡은 손을 살포시 쥐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한창 점심때라 저잣거리는 북적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진씨 가문 소공자가 밖을 나서는데도 그를 따르는 시종은 붙지 않았다. 청난은 편했지만, 자신의 제자가 이런 취급을 받는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청난은 혹시라도 진영을 놓칠까 그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다행스럽게도 한눈에 보아도 눈이 불편한 사람과 어린 소년, 그것도 마을 해결사인 소년을 감히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덕에 사람에 치이지 않고 비교적 편안하게 저잣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청난은 이렇게 제자와 함께 민가를 걸으니 문득 옛 생각이 났다. 환생하기 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방금 꿈에서도 백매와 이렇게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옛날 생각이 나네요.”

목소리의 주인은 진영이었다. 진영은 청난의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청난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청난을 돌아볼 생각도 없는지 정면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어디를 향한다 하더라도 그의 시야는 변함이 없겠지만, 청난은 이제까지 그가 자신을 ‘봤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었다.

그런 기분이 든 것은 아마도 그의 진실성 넘치는 이목구비가 원인이겠지.

청난이 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감상하던 와중에 진영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마치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선생님, 동파육 좋아하시죠? 저쪽에서 파는 것 같아요.”

“푸흐, 맞아요. 좋아해요. 그런데, 제가 언제 말한 적 있던가요?”

“네, 말씀하셨어요. 전 선생님이 말씀하신 건 모두 기억하고 있거든요.”

청난은 그와 대화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곤 하였었는데, 이런 사소한 개인 취향까지 그에게 말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자신의 별거 아닌 말조차 이렇게 경청해 주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였다.

청난은 발돋움하며 손을 위로 뻗었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 옆면에 손을 올려 가볍게 쓰다듬었다.

“매우 훌륭한 학생이네요. 덕분에 이 스승이 보람을 느낍니다.”

진영은 처음엔 움찔하더니, 곧 얇은 입술을 둥글게 휘어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 스승이 발돋움하느라 그의 발이 무리할 것을 생각해 주었는지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성의까지 보여 주었다. 청난의 손이 완전히 내려간 뒤에야 그는 굽혔던 목을 꼿꼿이 세웠다.

“선생님, 식사를 다 하시면 말씀드릴 게 있어요. 들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