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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12)화 (12/111)

#12

눈을 뜬 백매는 익숙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곳. 삶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사존과 함께 지냈던 그 시절 수야각 입실 제자의 숙소다.

백매는 지금껏 이곳을 떠올리는 것을 피해 왔다. 그러나 막상 보게 되니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것이 꿈에 불과한 탓인 걸까.

백매는 곧장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바깥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대사형은?”

“아직 주무셔.”

“정말? 대사형이 정말 주무신다고?”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두고 떠났던, 더는 볼 수 없게 된 사제와 사매들이었다. 백매는 그들의 목소리로 이 꿈속이 대략 언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백매는 곧장 옷을 챙겨 입으며 생각했다.

‘왜 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거지? 분명 그 꼬마에게 술법을 건 게 맞는데.’

누구나 숨겨 둔 기억이 있다. 백매가 피워 낸 향로는 그런 기억을 끌어와 꿈으로 보여 주는 법기였다. 거기에 상대의 꿈속에 파고들 수 있는 자신의 술법을 가하여 그 어린 꼬마, 청난이 숨기는 것을 훔쳐보려 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눈을 뜨고 보인 공간은 자신의 기억이다.

백매는 어디서 꼬인 것인지 유추해 보려 하였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을뿐더러, 이 시절의 자신은 아침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이런 ‘사소한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백매는 그분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정성을 다했다. 설사 이것이 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숙소 바깥으로 나오니 문 앞에서는 사제와 사매들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사매가 백매를 발견했다.

“대사형, 오늘은 어쩐 일로 늦잠을 주무셨어요?”

“응, 그럴 일이 있었어. 사존께서는?”

“오늘 못 뵈었는데, 아직 주무시는 것 같아요. 사존께 가시는 거죠?”

“응. 그래야지.”

백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제와 사매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모두들 그런 백매의 부드러운 표정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을 뒤로하고 백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 시절의 그는 정숙의 모범이었는데, 지금 그의 발은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지나는 풍경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하는 그런 사소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사존. 사존을 뵐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백매는 내공을 쓰는 것조차 잊고 무작정 달리느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사, 사존!”

문 너머에 있을 그를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런한 숨소리를 얼핏 들을 수 있었다. 백매는 숨과 함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사, 사존, 기침하셨나요?”

“…….”

이번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백매의 사존인 진청난은 워낙 아침잠이 많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 의문스럽진 않았다. 백매가 매일 아침 이곳에 들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으니.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백매는 예의상의 인사를 건네고 문을 열었다.

그는 사존께서 아직 자고 계시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가자, 진청난은 이미 깨어나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본 백매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옆얼굴에서 보이는 기다란 속눈썹은 청초했고, 그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 같았으며, 그의 피부는 맑고 투명하였다. 이마에서 시작되어 콧등을 타고 입술 아래, 턱 끝으로 향한 윤곽은 부드럽기 그지없으니, 마치 한 폭의 미인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백매는 진청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기 전까지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가구나.”

그는 목소리까지 아름다웠으니 백매는 그만 울음이 나올 뻔했다. 백매는 용케 그에게 달려가 안기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제 나이가 벌써 열여섯입니다.”

“그래도 내 아가가 아니더냐.”

진청난은 몸을 돌려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걸쳐 있던 얇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바깥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침상도 창가 가까이에 있었다. 그 까닭에 그가 일어나자 햇빛이 그를 비췄고, 그의 얇은 침의를 투과하여 그 아래에 있는 살갗마저 비추었다.

백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진청난은 제자의 귀여운 모습에 파핫 웃었다.

“하하하, 같은 사내이거늘, 무얼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진청난은 침상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의복을 들어 차례로 껴입었다. 겹겹이 걸치는 하얀 의복은 그를 더 청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가 머리를 묶기 위해 거울 앞에 다가가자 백매가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

“제자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진청난은 순순히 자신의 제자에게 은빛의 관을 넘겨주었다.

백매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며 빗어 내려갔다. 머리카락은 얇았으며, 기름을 바른 것처럼 부드러웠다. 또한 고운 풀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백매는 그 어떤 수식어도 그를 꾸미는 데엔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백매는 그의 모든 것에 감탄하느라 말이 없었고, 진청난 또한 평소와 달리 말을 아꼈다. 그렇게 관과 비녀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리던 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거라.”

진청난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서인지, 혹은 신경 쓰지 않아서인지, 상대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그를 들어오게 했다. 그 때문에 상대는 문을 열고 들어온 후에야 인사를 건넸다.

“각주, 초하입니다.”

“그래, 주 사질이구나. 어쩐 일이더냐.”

마침 머리 손질이 다 끝난 터라 어느새 진청난은 수야각주로서의 위엄 높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주 사질이라 불린 주초하는 가슴 앞에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예, 제자가 오늘 태산(太山)에서 민간인을 해치는 산귀(山鬼)를 처치하는 임무를 행하는 날입니다. 일전에 각주께서 가기 전에 들러 물건을 받아 가라 이르셨기에 방문하였습니다.”

“아……. 그날이 오늘이었구나.”

“네, 각주께서는 업무가 막중하시니 이런 사소한 것은 잊으셨을 만하지요.”

‘이날이었구나.’

주초하는 사소한 것이라 하였지만, 이날은 이후 수야각의 모두가 잊지 못하는 날이 되었다.

주초하는 진청난의 친형인 진주국(秦朱竹)의 첫째 제자로, 그 실력이 우수하여 주목을 받는 인재였다. 그가 이 임무를 맡은 이유는 산귀 퇴치도 있으나, 그보다는 수야각에서 먼 지역이라 하여도 중한 인재를 보내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 더욱 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임무는 그에게 사소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선행 조사가 잘못되었지.’

태산에 간 그가 마주친 산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와 대립하던 와중에 산에는 갑작스러운 큰불까지 났고, 주초하는 후퇴도 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이 수야각에 닿아 수야각주 진청난과 주초하의 사존인 진주국이 나서며 뒤늦게 산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주초하는 중상을 입은 후였다.

수야각으로 이송된 주초하는 다섯 주 동안이나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그의 단전이 손상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초하는 자신의 발로 문파를 나가야만 했다.

그 임무를 맡긴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사존인 진주국이었으니, 그는 십수 년 동안 제자를 망쳤다는 죄책감 속에 살았고, 진청난 또한 그런 형제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

“그래, 내가 너를 통해 전달할 것이 있었지.”

진청난은 침상 옆에 놓인 작은 탁상의 서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나 그것을 뻔히 바라보기만 할 뿐, 주초하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주초하가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주?”

“아, 그래.”

가만히 서 있던 진청난은 주초하가 다시 부른 후에야 움직였다. 주초하의 앞으로 다가간 진청난은 그에게 주머니를 건네려 하였다. 하지만 주초하가 받아 들기 전에 그것은 다시 진청난의 주먹 안으로 사라졌다.

“네게 미안하지만, 네 일을 내가 가로채야겠구나.”

“네… 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것은 주초하뿐만이 아니었다. 백매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각주께서 나서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어디 내가 나서도 될 일이 있고, 나서면 안 되는 일이 있더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각주께서는 문파의 기둥이신데, 이곳을 지키심이…….”

“왜 내가 기둥이더냐, 너희가 기둥이지. 수야각이야 별일이 있겠느냐. 내 형님께서 계시고, 너도 있을 텐데. 걱정할 게 어딨겠어?”

주초하는 수야각주의 말에 반대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말을 쉬이 잇지 못하였는데, 진청난이 이리도 굳건하게 나오기까지 하자 ‘하지만…….’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주초하는 주머니를 받아 가는 대신에, 지령서를 진청난에게 건네야 했다.

자신의 숙소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풀이 죽어 있는 듯하였다.

백매는 호기롭게 웃고 있는 제 사존을 바라보았다. 진청난은 애당초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능력이 매우 좋았고, 책임감도 뛰어났으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동시에, 필요할 때에는 굽히지 않는 면모 또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하고 선망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기분파였다.

단지 책임감이 그보다 강한 탓에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문파 내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백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평소의 그를 생각한다면, 이런 변덕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꿈이며, 단순히 기억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백매의 기억에는 이런 장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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