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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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난은 다음 날에도 같은 시간에 큰집을 방문했다. 지난 날 진영이 별관과 가까운 뒷문을 알려 준 덕분에 굳이 대문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었다.
청난은 현재 조정의 상황에서부터 민간의 사건 처리 방법까지 여러 분야의 것을 알려 주며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그는 한 무더기의 책을 가져왔는데, 당연히 진영이 읽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가 지루해하는 듯싶으면 읽어 주기 위한 이야기책이었다.
다행히 진영은 잠시도 지루해 보이지 않았기에, 청난은 책들을 그대로 가져가야 했다.
“선생님, 제가 들어다 드릴까요?”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청난에게 진영이 물었다. 청난은 진영의 감은 눈을 보며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공자의 마음만 받을게요. 함께 가는 것은 좋으나, 돌아오는 길에는 혼자 오셔야 하잖아요. 사고라도 나실까 봐 제 마음이 안 놓일 거예요.”
“음,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잠시만요.”
진영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자, 청난과의 눈높이가 얼추 맞게 되었다. 진영은 묶고 있던 머리 끈을 하나 풀더니 청난의 손목을 살포시 들어 자신의 머리 끈을 묶어 주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주세요. 저라고 생각하고, 한시도 떼어 놓지 말아 주세요.”
청난은 진영의 머리 끈이 감긴 손을 위로 올려 보았다. 그와 어울리는 분홍빛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진영의 귀여운 면모에 청난은 파핫 웃었다. 마치 전쟁을 나가는 지아비의 무사 생환을 비는 것 같지 않은가.
“하하하, 좋아요, 좋아요. 공자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길게요. 집에 가면 잘 씻기고 잘 말려 주기도 할 것이고요.”
“네, 좋아요. 가끔 밥도 먹여 주세요.”
진영 또한 푸흐흐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내 청난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백매의 얼굴에 퍼졌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백매가 허공에서 손짓하자 청난에게 건넸던 끈처럼 분홍색을 띤 작은 새가 나타났다. 작은 부리 사이에서는 지저귐 대신, 가지각색의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청난에게 묶은 끈과 백매가 소환한 새는 한 짝으로, 소리를 전달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만으로 상황을 유추해야 하는 단점이 있으나, 들어가는 법력이 적어 상대가 눈치채기 어려울뿐더러 백매의 법력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몇 년을 내리 쓸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저잣거리의 잡다한 소리, 발걸음 소리, 무거운 것이 내려지는 소리. 소리만 듣고 있으면 마치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듯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던 발걸음 소리는 이내 드르륵, 문소리로 바뀌었다.
[아버지, 다녀왔어요.]
[오늘은 일찍 왔구나.]
[매일 이 정도씩만 하려고요.]
[그래, 네 건강이 우선이지. 마침 주막에서 수육을 보내 주었다. 함께 들자꾸나.]
청난과 그의 아버지, 청운의 목소리가 새 부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청난이 밥 먹는 소리와 설거지하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청난은 정말로 한시도 끈을 떼어 놓지 않았다. 백매는 자신이 풀지 못할 정도로 꽉 묶었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기까지 하였다.
청난의 일상은 크게 특별한 게 없었다. 귀가하자마자 식사를 하고 그 후엔 설거지를 하였다. 그동안 청운은 서재를 정리하는 듯했다. 그러다 잠시 후, 마을 주민인 듯한 사람이 농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자 청난이 책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러곤 또 다른 주민이 찾아와 이번에는 키우는 개가 사람을 문다며 곤란해하였다. 그러자 청운이 그를 따라나섰고, 청난은 홀로 서점을 지켰다. 이 부자는 쉴 틈 없이 움직였고, 반대로 듣고 있는 사람은 꽤 지루해졌다.
청난의 하루에서는 그 어떤 술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나절 내내 이런 지루한 생활을 듣고 있자니 백매는 아플 리 없는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백매의 꺼림칙함은 이어진 청난의 목소리에서 극대화되었다.
[아버지, 먼저 씻을게요.]
곧 스르륵 천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매는 화들짝 놀라며 새를 쫓아내었다. 불미스러운 의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의, 그것도 어린 소년의 목욕을 훔쳐 듣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이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도록 백매는 차마 술법을 다시 발동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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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매와 청난의 수업은 몇 날 며칠 이어졌다. 그동안 백매는 청난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은근슬쩍 속내를 떠보는 등 갖은 시도를 해 보았으나,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으며 날이 갈수록 의문점만이 늘어 갔다.
그의 외모며 어투는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한데, 지식은 성인보다 뛰어났다. 막연히 책만 ‘읽은’ 것과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경험이 필요할진대, 그는 고작 열 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는 영재라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환골탈태한 것은 아닐지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어린 데다가, 너무 약했다. 무예는커녕 책 여섯 권을 드는 것조차 버거워하며, 피부가 약해 조금만 세게 부딪혀도 쉽게 멍이 들었다. 어떤 정신 나간 무인이 이런 몸을 원하겠는가.
백매는 골똘히 생각함에도 이 불가사의한 소년에 대한 답을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관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난이 떠나고 별관에 홀로 남은 백매는 장을 열어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오래된 물건을 꺼내었다.
이튿날, 청난은 여느 때처럼 후문을 지나왔다. 꽤 걸어 들어와야 하는 정문과 달리 후문은 별관의 바로 앞에 있어 일하는 하인들을 가로지르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그러나, 이것은 청난처럼 조용히 방문하고 싶은 객에게나 좋을 뿐이다. 아들로선 자신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치워 둔 꼴이 아닌가.
그런 처우에 비해 진영이 말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그에게 다정다감했다. 청난은 때론 이 집안의 큰 어른과 진영이 말하는 ‘아버지’가 같은 인물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청난은 잘 다듬어진 풀을 밟으며 별관의 문 앞에 섰다. 의아하게도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공자?”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자는 것일까. 비록 말벗을 의도한 것이라 하여도 청난은 그의 스승이니, 제자가 수업 시간까지 늦잠을 자는 것을 모르는 체할 순 없었다. 청난이 문 사이에 손을 넣어 문을 열던 차에 마당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
청난은 다시 그를 부르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진영과 처음 만났던 커다란 매화나무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두꺼운 나무 기둥 아래로 걸어가자 선잠을 자고 있는 진영이 보였다. 상체는 나무 기둥에 기대고 있었고, 양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였다. 청난은 가져온 책을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진영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잠든 진영의 모습도 참 아름다웠다. 의식이 없을 때도 이렇게 정갈할 수 있는 것이었나? 청난은 자신의 잠버릇을 떠올렸다. 전생에는 침상에서 잠들고 바닥에서 눈뜬 적이 비일비재했었다. 그럴 때면 백매가 이불을 가져와 자신을 돌돌 말아 침상 위로 올려 주곤 하였었지.
“…….”
지금 생각하면 애를 참 귀찮게도 했었다. 청난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여기서 자면 감기 걸릴 텐데……. 공자, 일어나세요. 공자.”
청난이 진영의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진영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며 뺨에 붙었던 머리카락이 땅으로 떨어졌다. 정말 잘생겼다. 또다시 감탄에 빠졌던 청난이 이번에는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진영의 얼굴이 흔들리며 그의 뺨이 청난의 손등에 닿았다.
‘이렇게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청난은 한 번 더 흔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진영의 얼굴이 손등에 붙어 있으니 청난이 손을 흔들면 그의 얼굴을 흔드는 꼴이 되어 적절하지 못했다. 청난이 어찌할 줄 몰라 고민하던 차에 진영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곤 자신의 뺨에 닿은 청난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 공자. 일어나셨네요. 다행이에요.”
진영은 청난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잠에서 깨서 그런 것일까.
“수업 시간이 되었으니 이만 일어날까요?”
청난은 그를 일으켜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진영이 청난의 손을 당겼다. 그 탓에 청난은 또다시 진영의 위에 넘어질 뻔했다. 청난이 고개를 휙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자? 어디 불편하세요?”
“가실 필요 없어요. 잠깐만 저와 있어요.”
평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퍽 감미로웠고, 무엇이든 승낙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굳게 맞붙어 있던 위아래 속눈썹이 벌어졌다. 청난은 진영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청난은 그 눈을 보자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뻗지 못했다.
진영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강력한 수면 향을 맡은 것처럼 졸음이 쏟아진 탓이었다. 청난이 그 힘에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결국 진영의 몸 위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백매는 잠든 청난의 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만 본다면 어린 동생을 돌보는 다정한 형의 모습처럼 보였다.
“네가 누구인지, 곧 알 수 있겠지.”
백매는 허리를 펴 매화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눈동자가 다시 속눈썹 사이로 감춰지며, 그 또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래된 매화나무 아래 잠든 청난과 백매 옆에서 오래된 향로의 연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