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진영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 밑을 닦으니 눈물이 묻어났다. 진영은 자신도 어리둥절한지 멍하니 손가락을 문질렀다.
“제, 제가 왜 울죠?”
“저, 저야 모르죠……?”
안타깝게도 이 안에는 그들의 의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울고 있는 미남과 당황한 미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청난은 어쩔 줄 모르며 방황하다가 넓은 소매 안에서 헝겊을 꺼내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귀한 소공자의 얼굴을 닦기엔 형편없는 천이었으나, 어쩔 텐가. 이것밖에 없는데. 다행히 진영의 눈에서는 더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청난은 진영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하였는데, 지금은 진영이 앉아 있고 청난은 서 있으니 자연히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속눈썹이 기네.’
그는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도 미인이었으나,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미인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말하면, 바로 전 눈물이 그의 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속눈썹 끝에 맺혀 있던 아침이슬이 떨어진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울고 있는 모습도 정결했다. 뭇사람들이 말하는 선인의 풍모는 이런 사람을 두고 있는 말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새 청난은 그를 달래 주던 중이란 사실도 잊은 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청난의 손등을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진영의 손이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었나 봐요. 이젠 괜찮으니, 부디 앉으세요.”
“아, 그럴게요. 그런데 공자께선 속눈썹이 기네요. 풀잎 같아요.”
청난은 속생각을 말하지 않고는 못 버티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분명 높은 곳에 앉은 사람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나쁜 버릇이었다. 환생한 이후 충분히 고쳤으나 오늘따라 이전 생의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오랜 습관이 그만 튀어 나오고 말았다. 청난은 뒤늦게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을 깨닫고는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다.
“아, 아니, 제 말은…….”
“괜찮아요. 아버지께서도 종종 그리 말씀하셨거든요.”
“하하하… 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실 줄은 몰랐네요.”
진영은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다. 청난은 진영이 저를 보지 못함을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 분명히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그럼 마저 수업할…….”
청난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뒤에서 잡아당겨졌다. 당연하게도 청난은 그 힘이 원하는 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다. 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구는 대신 푹신한 것 위로 쓰러진 덕분이었다.
청난이 질끈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갸름한 턱선이었다.
“공자?”
청난이 넘어진 곳은 진영의 무릎 위였다. 그 덕에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지만, 청난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 감상하지 못했다. 진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부서진 화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영이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청난의 머리가 저곳에서 함께 나뒹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청난은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진영, 아니 화백매는 당황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불개미의 동굴에서 청난을 만났던 화백매는 그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진영의 이름을 빌리고, 자신이 만든 공간으로 청난을 유인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번거로운 일 따윈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사존에 관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파고들지 못해 안달이었고, 그러다 보면 익숙하지 않은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 탓에 이런 실수마저 낳았다.
백매는 단순히 그를 떠보기 위해, 화분을 깨트려 큰 소리가 나게 하려고만 했었다. 그런데 청난이 사존과 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고, 그 탓에 집중이 다른 곳으로 쏠리고 말았다. 자신이 청난을 유심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화분에 가한 술법이 그에게 향한 후였다.
결국 맹인이라는 본인이 정해 둔 설정도 잊은 채 그를 잡아당겼다. 다행히 청난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백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백매는 그를 달래 주려 하였다. 그것이 호감을 사기 좋을 테니. 그러나 백매가 입을 열려던 때에 청난의 고개가 돌아오며 선수를 치고 말았다.
“공자는 어디 안 다치셨나요? 몸은 무사해요? 어디 베인 건 아니죠?”
군자의 도리를 덕목으로 삼는 청난은 백매의 팔을 들으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방금 전까지 위험했던 것이 본인임을 생각한다면 꽤나 우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매는 웃을 수 없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베이진 않았고? 참지 말고 말하거라. 그대로 두면 덧날 게야.
과거에 그의 스승은 그리 말하며 이처럼 제 손을 들어 이곳저곳을 살펴 주시곤 하였었다. 그럴 때면 자신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부끄러워하며 말없이 고개를 파묻었었지. 그때 고개를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표정을 봤었어야 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봤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에 가슴이 쓰려 왔다.
어떻게 이 꼬마는 볼 때마다 제 상처를 들쑤시는가. 정말이지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백매는 화가 났다.
“공자?”
백매가 아무 말도 않자 청난이 의아해했다. 백매는 그제야 입 끝을 둥글게 말았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이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네, 공자 덕분에 큰 화를 피했어요. 어찌 이런 일이 생긴 건가요? 평소엔 공자 혼자 계셨을 텐데, 너무나 위험합니다.”
“아마 길고양이의 짓이겠지요. 담이 높잖아요. 하인이 청소하다 올려 둔 걸 고양이가 쳤나 봅니다. 제가 단단히 일러둘 테니 선생님은 염려 마세요.”
백매는 그가 믿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 당연했다. 이 별관은 담과 거리가 있었다. 평범한 고양이가 담장 위의 것을 이곳까지 날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건 고양이가 아닐 테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방도도, 반박할 근거도 없다.
백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수업을 더 하긴 어렵겠죠? 저는 몸이 안 좋고 선생님은 아직 어리시니 위험할 거예요. 사람을 불러 청소하라 시킬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청난은 멋쩍어하며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방 한편에 있던 등에 푸른 불꽃이 잠시 타올랐다 사라졌다. 현혹술은 불을 다루는 이들의 특기지만, 화영근이 없다 하여도 익히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순순히 술법에 현혹된 청난이 조금의 의아함도 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응, 그렇네요. 내일 마저 공부하도록 하죠. 원하시는 책이 있나요? 들고 올게요. 독특한 것도 좋아요. 아마 독특할수록 저희 집에 있을 확률이 높을 거예요. 아버지 취향이시거든요.”
“괜찮습니다. 선생님께서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요.”
“하하, 공자께서는 어찌 그리 말을 잘하시나요? 부모님께서 기뻐하시겠어요.”
“음……. 네, 맞아요. 이젠 들어가세요. 곧 날이 저뭅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공자.”
그렇게 청난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짐과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배웅 없이 큰집을 벗어났다.
청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씻는 것도 잊은 채 침상에 몸을 뉘었다. 서점에서 일을 보던 청운이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려던 것처럼 보였으나, 청난의 표정을 보더니 들어가 쉬라는 말로 축약하였다.
제 방으로 들어간 청난은 옷도 채 벗지 않고 침상 위에 폴싹 엎어졌다. 진영과의 수업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생각이 든 탓에 굉장히 피곤해졌다.
전생의 제자들을 떠올렸고, 갑자기 날아온 화분에 흥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뭣보다도 진영이 가진 영적 재능이 청난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진짜 아깝다……. 훌륭한 수사가 될 수 있었는데…….’
전생의 청난은 한때 제자를 들이는 것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수야각주가 되기 전이라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만났던 소년·소녀마다 영맥을 짚어 보곤 하였었다.
그 습관은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하였고, 심지어 죽고 나서도 고치지 못하였다. 청난은 이 마을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영맥을 짚어 왔다. 그 덕에 이 마을에는 좋은 영근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었다.
그 습관 탓에 청난은 진영에게 붓을 쥐여 줄 때에도 저도 모르게 그의 영맥을 짚었었다. 그 순간 청난은 감탄했다. 그의 영기는 청아한 느낌을 주었다. 도구 없이 손으로만 대충 본 터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의 영근은 천영근에 가까울 게 분명했다.
‘눈만 보였더라도, 아니 적어도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영기는 탁해진다. 그 때문에 수선은 어린 나이에 시작할수록 성과가 좋았고, 대부분의 문파도 새로운 제자는 열두 살 이내인 아이 중에서 맞는 것이 보통이었다. 천영근이라 하더라도, 열다섯을 넘겼다면 수선에 성과를 보이기 어려웠다. 아무리 어리게 본다고 해도 진영은 이미 열다섯을 넘었을 것이다.
‘전생에 만났더라면, 내 제자로 들였을 텐데. 백매에게 좋은 사제가 되었을 거야…….’
“흐아아암…….”
청난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왔다. 졸음은 빠르게 찾아왔다.
수선계를 잊겠다 마음먹었던 것은 제자의 이름 앞에서 사르륵 녹아 버렸다. 청난은 그날 또다시 전생을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