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술법의 근원이 되는 힘인 ‘영기’는 오행으로 구분됩니다. 화·수·목·금·토, 이렇게 다섯 가지요. 그리고 그걸 다룰 수 있는 재능을 ‘영근’이라고 하죠. 대부분의 수사는 여러 속성의 영근을 타고나는데, 극히 드물게 단 하나의 영근만을 가진 자들도 있어요. 굉장한 재능을 타고난 거라 할 수 있죠. 수선계에선 그것을 ‘천영근’이라고 불러요.”
청난은 진영을 슬쩍 보았다. 이 학생은 사담을 나눌 땐 말이 많더니, 수업을 시작하니 말이 적어졌다. 어쩔 수 없이 청난은 자문자답을 해야 했다.
“그럼, 왜 한 가지 속성을 가진 사람보다 여러 속성을 가진 사람이 더 수선하기 힘든 걸까요? 영기의 순정함 때문이랍니다. 오행의 영근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속성의 방해를 받기 쉽거든요. 그 때문에 높은 경지에 이르기 힘들어요. 음, 흔히들 수선을 ‘노력의 길’이라고 하는데, 실제는 다른 거죠. 태어났을 때 결정된 영근이 수선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요. 대표적으로, 가장 최근에 신선이 우화등선한 것이 삼백 년 전이에요. 그때의 두 선인도 천영근을 타고난 인재들이었죠. 아니었더라면 우화등선이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그건, 정말 억울한 말인데요.”
“그렇죠? 그에 반해 문과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에요. 수선계의 개천에선 용이 나지 않지만, 시골 마을의 개천에선 용이 날 수 있거든요.”
청난은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영의 감은 눈동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따라 청난의 그림자를 좇았다. 청난의 발걸음은 방을 크게 도는가 싶더니 진영의 옆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진영의 몸에 바짝 붙어 앉았다.
진영은 굳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고 생각했다.
‘말본새는 마치 수십 년 동안 공부만 한 서생 같더니, 정작 체격은 또래보다 왜소한가.’
진영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청난의 작은 두 손이 진영의 손등을 감싸 안았다.
진영은 이번에는 딴생각을 하느라 다가오는 손을 보지 못했기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애당초 표현이 다양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며 더욱 무덤덤해졌기에 청난은 그가 놀랐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선생님, 뭐 하시는 건가요?”
“잠시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청난은 마치 점토를 만지듯 진영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을 펴기도 하고, 접기도 하였는데, 진영은 그의 뜻을 알 수 없어 손짓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런 경계가 무색하게도 결국 진영의 손에 들린 것은 그저 기다란 막대기 하나뿐이었다.
“됐다. 붓은 이렇게 쥐면 됩니다.”
“아, 붓?”
“아, 제가 너무 어리게 봤나요? 그래도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잖아요.”
어느새 진영의 다섯 손가락은 붓을 쥐고 있었고, 청난의 작은 손은 진영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청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진영의 손이 함께 순순히 딸려 올라갔다.
“절 따라서 천천히 느껴 보세요.”
그리고 붓끝이 먹물에 가 닿았다. 하얗던 털은 순식간에 먹색으로 물들어 갔다. 청난이 손을 이끌면 진영은 그대로 따라갔고, 붓끝이 종이에 닿으며 한 획 한 획 선이 그어져 나갔다. 획 하나를 그을 때는 의미를 몰랐으나, 글자가 완성되어 가니 그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蓮化門’
“연화문.”
“네, 맞아요. 이 근방을 수호하고 있는 문파죠. 연화문은 오행 중 화(火)계 술법에 뛰어나요.”
청난과 진영은 그렇게 이름 세 개를 더 써 내려갔다.
“오행에는 각각 전승되는 술법이 있어요. 선계의 힘으로도 죽일 수 없는 거대한 요마귀괴를 잡아 두기 위한 술법이죠. 각 문파의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만 전승되던 것인데, 어느 순간 오행의 가장 큰 문파 다섯의 장문인에게 전승되는 것으로 변해 버렸죠. 그 문파가 이곳들이에요.”
“남은 한 군데는요?”
“음… 다른 한 군데는 수(水)계 제일의 문파인 ‘수야각’이라는 곳인데, 이젠 없어요.”
청난은 수야각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생이 질문을 한 이상 설명을 하는 것이 도리였으니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덧붙였다.
“수야각은 삼백 년 전 각주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어요. 그리고 그의 제자였던 소각주가 우화등선했죠. 그 이후 급격히 쇠퇴해서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직까진 수계 수사의 맥이 완전히 끊어질지, 새로운 문파가 생겨날지는 모르겠는데, 알게 되면 알려 드릴게요.”
어쩌다 보니 청난은 자신의 과거를 남 이야기 하듯 말하게 되었다.
대여섯 살 이전까지만 해도 예전 생각을 할 때면 속이 거북했건만, 어느새 마모되었나. 아니면 익숙해졌나. 지금은 긴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과거에 붙잡혀 있기엔 새로운 삶이 너무나 아까웠으니까.
청난은 자신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진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청난은 고개를 위로 돌려 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왜 화났지?’
지금까지 진영의 입꼬리는 대체로 올라가 있어 웃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게 닫힌 입 끝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두꺼운 눈썹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청난은 당황스러웠다. 그의 기분이 상할 만한 행동은 한 적이 없다.
‘아니면, 누가 만지는 걸 싫어하나?’
청난은 슬그머니 진영을 잡은 손을 빼냈다.
‘갑자기 만지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긴 했어. 그간 마을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더니 그만 잊고 말았네. 내 실책이야. 잘리는 건 아니겠지? 하루 만에 잘리면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어. 그리고 진 공자랑 멀어지기도 싫고. 십 년 만에 친구를 사귈지도 모르는 일인데, 사과하자.’
청난이 그렇게 반성하며 결론에 이를 즈음이 되자 진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사라졌어요. 수야각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청난은 그가 자신에게 화난 것이 아님에 안도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 그렇죠. 따지자면 아직 수선자들이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 대부분은 삼백 년 전 우화등선한 백매선을 보고 빈집을 지키는 것에 불과할 거예요. 동시대에 우화등선한 연화문의 연화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계에 간섭하고 있으니까요. 콩고물이 떨어질까 싶은 것이겠죠. 안타깝게도 백매선이 그들을 보우할 일은 없겠지만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청난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화난 것 같다가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활발한 청년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청난은 그가 왜 이러는지 짐작 가지 않았다. 청난은 스스로를 나름대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난번 신선에 이어 이 작은 아이까지 그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으니 가뜩이나 몇 안 남은 장점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신선을 닮은 것 같기도 하네. 선조가 수사인가?’
신선의 이목구비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그날 저를 보며 울적해하던 그 신선을 생각나게 했다.
사실 청난은 그날 이후 그 신선을 자주 생각했었다. 딱히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 그런지 온갖 잡다한 생각이 다 들었다. 그 탓에 혼자만의 친근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는 것과 남에게 투영해 보는 건 다른 문제였다.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는 청난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생각을 떨쳐 내고는 아무 일 없던 양 수업을 이어 나갔다.
“음……. 백매선이 인간일 적엔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인품도 좋았다고 해요. 하지만 그의 스승이 죽고 나서 바뀌었죠. 사형제를 돌보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수선에만 목매었다고. 결국 그는 모두가 꿈꾸던 우화등선을 했어요. 그 대신 각주도, 소각주도 잃은 수야각은 점차 맥이 끊기고 말았죠. 그가 문파를 돌볼 생각이 있었더라면, 망하기 전에 손을 썼겠죠?”
청난은 이야기책을 읊는 듯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뱉어 내었다.
착잡함은 뒤늦게 찾아왔다.
‘왜 그런 아이가 되었지?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청난이 다시 태어나 처음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수야각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들려온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매가 동문을 버리고 홀로 신선이 되었다니. 청난은 그 아이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고, 그럴 아이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게지.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 잘 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내 죽음을 이겨 내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그건 아니었으니 다행이지.’
청난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며 고된 그리움을 떨쳐 냈다. 그 아이 또한 과거를 등지고 현재를 살아가는데, 스승이란 사람이 과거에 연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자신의 제자는 제 앞에 있는 진영 공자였다.
청난은 다시 수업을 이어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다 협탁 위에 생긴 작은 물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생긴 것…….’
톡. 청난이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
청난은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고개를 올렸을 때 진영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청난은 정말로,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공자, 왜 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