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찌 그 작은 구슬에 이리 다양한 것이 담겨 있을까. 그는 참으로 처연해 보였고, 안되어 보였다. 청난은 감히 그를 달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전생에 그를 둘러싸던 제자들이 떠오른 탓이리라.
“저어…….”
청난이 부르자 그의 고개가 돌아가며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청난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가졌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신선을 상대로 뭘 하려고 했던 거야? 안아서 토닥여 줄 생각이었던 거야?’
청난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책망하다가 이내 차분하게 생각했다.
간혹 신을 영접한 자들이 신앙에 깊게 빠져 스스로를 망치곤 하였다. 아마도 방금 자신이 겪은 것이 그러한 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영기에 취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역시 낯이 익어. 누구지?’
다른 문파가 그러하듯 수야각 또한 전통을 중시했다. 그 말은 장식되어 있는 전대 각주의 초상화를 하루 한 번은 보게 된다는 말이었으며, 큰 업적을 달성한 사람의 초상은 더욱 크게 걸려 하루 세 번은 보게 된다는 말이었고, 더욱이 비승을 한 선조는 동상이 세워져 얼굴부터 체형까지 하루에 다섯 번은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선조이신가. 내가 전대 수야각주라고 말하면, 살려… 주시긴커녕 헛소리한다고 단칼에 베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신선은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은 데다가 청난은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청난은 다시 한번 침을 꼴깍 삼켰다.
신선은 여전히 땅에 주저앉아 있는 청난의 목은 조금도 배려해 주지 않았다. 고개를 전혀 숙이지 않고 오로지 눈동자만이 청난을 예의 주시하기 위해 아래로 향해 있었다. 처연한 분위기가 사라진 그의 낯은 다시금 차갑게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나지막이 말했다.
“살려 줘?”
그의 단 한 마디 말에 청난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마치 칼을 목에 댄 채 마지막 유언을 묻는 것 같았다. 청난은 난생, 아니 모든 생 동안 처음으로 느낀 위협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사, 살려 주실 건가요?”
“억울한 꼬마를 굳이 해치진 않아.”
그는 그제야 허리를 숙이며 청난을 제대로 마주 보았다. 청난은 그를 자세히 보려고 했다. 어떤 선조인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아까와 달리 안개가 낀 것처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보고 있구나 하는 정도만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청난이 그의 눈동자에 홀린 것을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청난은 그의 다정함이 내심 아쉬워졌다.
‘뭐, 광신도가 되는 것보다야 모르는 게 낫긴 하겠다.’
신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방금 행한 것은 사도의 술법이다. 무슨 소리를 듣고 익힌 것인지 모르겠으나, 네 몸을 망칠 뿐이니 그만둬.”
아.
청난은 그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피를 이용한 술법은 사술 중의 사술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 신선이 친히 단속하러 내려온 듯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그 사용자가 무엇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으니.’
그는 청난을 사파의 피해자라 여긴 모양이었다.
청난은 무해한 아이를 연기하기 위해 굳이 사족을 달지 않고, 그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선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청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감춘 탓에 청난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제게 뻗으려다 멈칫한 손은 볼 수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싶었으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난도 섣불리 물을 수 없었기에 조용히 시선만이 오갔다. 신선의 손이 허공에서 두 번 쥐었다 펴진 후에야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묵묵히 말했다.
“나가는 길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알아서 가. 구석에 있는 자들도 챙기고.”
“어……. 네, 그럴게요.”
신선은 청난의 대답 따위는 관심 없다는 것처럼 빠르게 몸을 돌려 버렸다. 그러곤 몇 걸음 걷더니 곧 쏟아지는 빛 사이에 몸을 담았다.
신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청난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남은 것은 바닥을 나뒹구는 신발 한 짝과 조금의 형체도 남아 있지 않은 피 웅덩이,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억누르고 있던 피로감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아 있으니, 눕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강하게 들었다.
‘이젠 포식자도 없어졌으니까, 아주 잠시, 잠시만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청난은 자신의 욕구에 충실히 임했다. 털썩, 등마저 바닥에 대고 누워 버린 것이다.
“하아암…….”
큰 하품과 함께 청난의 두 눈꺼풀은 금세 서로 맞물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잠에서 깨어난 청난은 익숙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익숙한 침상, 익숙한 벽. 바로 서점 안쪽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청난은 어른들을 업고 낑낑대며 그 개미굴을 헤쳐 나올 필요가 없음에 안도했다. 물론 저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피 웅덩이 사이에서 대자로 뻗어 있던 것을 해명해야겠지만.
‘내가 있던 곳은 꽤나 안쪽이었는데. 날 찾아 준 건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청난의 얼굴 근육이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내친김에 일어나기까지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내리친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악다문 이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생에 벼락을 맞아 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생각해 보니, 벼락보다 더 아픈 것 같다. 결국 청난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털썩 온몸을 맡겨야 했다.
“끝내주네…….”
근육통인가. 근육통이 원래 이렇게 아프던가. 전생엔 워낙 건강했고, 현생엔 워낙 무리할 일이 없었던 탓에 이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청난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상에 붙은 떡이 되기로 하였다. 대신 고개만 가볍게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에는 잎 없이 나뭇가지만 남은 매화나무가 가지를 길게 뻗고 있었다. 이 나무는 얼핏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느새 새로운 가지를 뻗으며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청난은 저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똑똑.
청난이 깨어날 때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기적절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아, 깨어났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청난의 양아버지인 청운이었다.
청운이 가져온 작은 나무 쟁반 위에는 죽이 담긴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애써 깨우지 않아도 되니 잘됐다. 밥은 먹으면서 쉬어야 더 빨리 낫지.”
청운은 나무 협탁 위에 쟁반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널 업고 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애써 사 온 책을 강가에 던져 버리고 말았지 뭐니.”
“……죄송… 해요.”
“내가 널 탓하기라도 할까 봐?”
청운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저어 식혔다.
“사정은 이웃들에게 들었다. 꽤 위험했었다지.”
“으음……. 네.”
이웃들이 말한 사정이나 위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청난은 굳이 말을 더하지 않고 교묘히 주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그래, 동재도 무사해. 네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소풍을 다녀왔다 하여도 믿었을걸. 네가 만신창이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겠지.”
“으… 죄송해요.”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
청운은 죽을 젓고 있던 손을 멈추더니 방금 한 말을 번복했다.
“아니 조금은 미안해하는 게 낫겠다. 너는 남에게 폐 끼치려 하지 않으니 말이야. 어휴, 이 애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이제는 괜찮고?”
올 것이 왔다.
청운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청난은 한껏 긴장하였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청운의 시선을 피했다.
“잘,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청난은 차마 청운의 눈을 마주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상대가 청운인 탓이 크지만 애당초 거짓말에 능하지도 못했다.
전생 때엔 다른 문파의 대표 앞에서 거짓을 말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반박하지 않은 건 청난이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무력 앞에 굴복했던 게 아닌가 싶어진다.
청운은 이마에 ‘숨기는 것 있음’이라고 써 놓은 듯한 제 아들을 보았다. 언제나 명석하던 제 아들의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만약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알려 주거라. 내게 굳이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라. 묻지 않으마.”
“으응… 네, 그럴게요.”
청난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에 청운이 씨익 웃었다.
“정말이지 그런 고집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구나. 분명 난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와 화본집 아저씨가 흥정할 때 배웠죠.”
“어이구, 이래서 자식 앞에서 물도 바르게 먹어야 한다고 하는가 보구나.”
청운은 장난스레 한숨을 뱉고는 거의 다 식은 죽은 한 숟가락 떠 청난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몸이 아픈 탓인지 아니면 어제 꾼 꿈 때문인지 청난은 잠시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 같은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먹여 주는 입장이었지.’
청난이 입가의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이 청운은 빈 그릇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