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외전 (20/20)
  • 20. 외전

    하빈이 요즘 취미로 시작한 홈 베이킹 덕분에 집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쿠키도 굽고 빵도 굽고, 아침마다 만드는 샌드위치는 이제 제법 전문가 수준이었다.

    세원은 출근할 때마다 하빈이 챙겨 준 샌드위치를 먹고 나가서 간식으로 하빈이 만들어 준 빵을 먹었다. 맛있게 먹어 주는 세원을 생각하면 만드는 즐거움이 샘솟았다.

    세빈은 훌쩍 커서 이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하빈이 집에서 빵을 만들 때마다 옆에 붙어 자기도 뭔갈 하고 싶다며 반죽을 자른다거나 짤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등 열심히 따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하빈은 세빈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엄마, 이거 여기에 넣어요?”

    “응. 다 넣으세요.”

    “이렇게요?”

    “네. 잘했네.”

    초코칩을 잔뜩 반죽에 부은 세빈이 뿌듯한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봤다. 하빈은 잘했다며 이번에는 반죽을 섞어 달라고 주걱을 내밀었다. 세빈이 알겠다며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열심히 힘을 줘 주걱으로 반죽을 휘저었다. 뻑뻑한지 잘 섞이지 않자 세빈이 땀을 뻘뻘 흘리며 팔을 움직였다.

    옆에서 마들렌을 만들고 있던 하빈이 그 모습을 힐끔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뒤에서 세빈을 끌어안고 함께 반죽을 섞었다.

    “이렇게 하면 잘 되나?”

    “잘 돼요!”

    “그러네. 세빈이가 잘하네요.”

    “엄마, 쿠키 빨리 먹고 싶어요.”

    입맛을 다시며 반죽 통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모습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하빈은 알겠다며 세빈의 손을 닦아 주고 다시 반죽을 내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도와주는 세빈 덕분에 베이킹 시간이 더욱 즐거웠다.

    쿠키를 오븐에 집어넣고 나서야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자 뻐근한 몸이 풀어졌다. 하빈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세빈이 달려와 뒤에서 하빈의 허리를 두드렸다. 작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해 주는 안마에 하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렸다.

    “엄마 두드려 주는 거예요?”

    “네!”

    “세빈이는 안 아파?”

    “안 아파요. 세빈이는 튼튼해요.”

    폴짝폴짝 뛰며 튼튼하다 자랑을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하빈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늙었지, 싶다가도 이제 겨우 20대 후반이었다. 하빈은 오븐이 다 되는 동안 어지럽혔던 주방을 치우고 세빈과 오붓하게 소파에 앉아 만화 영화를 시청했다.

    “엄마, 엄마.”

    “네? 왜요.”

    “유치원에 다른 친구들 엄마는 다 나이가 엄청 많아요.”

    “그래? 근데 엄마는 엄청 어리지.”

    “네.”

    “그래서 싫어?”

    “아니! 엄마 엄청 예뻐서 좋은데요!”

    대부분 늦게 결혼을 하고 늦게 아이를 가지는 시대이다 보니, 학부모 참관 수업이나 학예회를 가면 모두 하빈보다 열 살은 더 많은 엄마뿐이었다. 그 사이에 끼기도 어려웠던 하빈은 그저 눈치만 보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세빈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눈치도 빠르지.

    “조금만 더 있으면 세빈이도 유치원에서 언니 되겠네.”

    “세빈이 더 크면 엄마랑 나이 똑같아져요?”

    “세빈이 열 살 되면 엄마도 그만큼 나이 많아지지.”

    “맞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세빈이 손뼉을 쳤다. 아쉽다는 표정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아쉬운 거지? 하빈이 묻자 세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의 세계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화를 보는 사이 쿠키가 익어 맛있는 냄새가 났다. 세빈이 달려가 오븐에 붙은 유리로 안을 들여다봤다. 부풀어 오른 쿠키가 맛있어 보였다. 세빈이 빨리 먹고 싶다며 동동거렸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하빈이 그런 세빈을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쿠키를 꺼냈다.

    “좋은 냄새 나요.”

    “맛있는 냄새 나지요?”

    “네!”

    쿠키 하나를 호호 불어 식혀 주자 세빈이 얼른 달라며 양손을 예쁘게 내밀었다. 작은 고사리손이 손이 참 귀여웠다. 그 위에 하나를 올려주자 아직 어린 세빈은 식힌 쿠키도 뜨거웠는지 팔딱거리며 난리를 쳤다.

    “뜨거워! 앗! 뜨거!”

    “많이 뜨거워?”

    “이잉, 먹을래, 먹을래요.”

    “뜨겁다며.”

    “그래도…….”

    하빈이 세빈의 손바닥 위 뜨거운 쿠키를 집어들자 세빈이 먹을 수 있다며 입을 벌렸다. 귀엽게 나 있는 유치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하빈이 피식 웃으며 세빈의 입에 쿠키를 넣어 주자 맛있게도 먹으며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빈과 똑 닮은 미소였다.

    “맛있다!”

    “맛있어? 세빈이가 만들어서 더 맛있나 보네.”

    “맞아요. 세빈이가 잘 만들었어.”

    스스로 잘 만들었다며 자신감에 차 있는 세빈을 보니 참 대단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칭찬을 잘도 받아들이지? 제 성격은 전혀 닮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빈은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하빈이 옮겨 놓은 과자를 야금야금 집어 먹었다.

    “엄마!”

    “왜요?”

    “아빠 것도 남겨 놔야 하죠?”

    “그렇지. 아빠 것 몇 개 남겨 둘까?”

    “세 개!”

    “세 개? 세 개가 몇 개지?”

    “이렇게…….”

    세빈이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똑똑하네, 우리 세빈이. 하빈이 머리를 쓰다듬자 세빈은 또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 똑똑해!”

    “아이고, 유치원에서도 이래요?”

    “유치원에서 세빈이 공주님이에요.”

    “누가 그래?”

    “친구들이!”

    “친구들이 세빈이 보고 공주님이라고 그래?”

    “네!”

    이제 공주님 소리까지 듣고 사는 모양이었다. 하빈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원……. 알 수 없는 세빈의 세계였다.

    공주님 세빈을 데리고 거실로 나온 하빈은 세빈을 탁자 앞에 앉혀 두고 낱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세빈이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거는 뭐지?”

    “기역!”

    “이거는?”

    “디귿!”

    “세빈이 왜 이렇게 잘해요?”

    “나 원래 잘하는데? 엄마가 몰랐지!”

    “유치원에서도 이렇게 잘해요?”

    “네. 세빈이 유치원에서 일등이에요.”

    손가락 하나를 우뚝 세워 보이며 세빈이 뿌듯한 얼굴로 자랑했다. 하빈은 손뼉까지 쳐 주며 맞장구를 쳤다. 세빈이가 최고다! 추켜세워 주자 세빈은 좋다며 하빈의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

    “나도 우리 딸이 제일 좋아.”

    하빈이 세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끌어안았다. 품에 한참을 안겨 있던 세빈이 금세 조용해졌다. 얘 이러고 자나? 슬그머니 내려다보자 엄마의 품에서 눈을 감고 그새 잠들어 버렸다.

    하빈은 세빈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안고 일어나 세빈의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세빈이 웅얼웅얼 잠투정을 하며 돌아누웠다.

    세빈이 잠들고 나서야 하빈은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세빈이 유치원에 간 시간 동안은 자유롭게 책도 읽고 외출도 했지만 퇴원하고 집에 온 순간부터 하빈은 세빈에게 붙잡혀 세원이 올 때까지 휘둘리고 있어야 했다. 세빈이 하빈을 졸졸 쫓아다니며 놔주질 않는 탓이었다.

    “세빈이가 나를 너무 좋아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파에 푹 드러누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옛날에는 게임이라도 했는데 요즘에는 할 게 없었다. 뭘 할까 하다 하빈이 인터넷으로 아기들에게 좋은 식단이며 간식을 찾아봤다. 시간을 내서 세빈에게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빈이 있으나 없으나 결국엔 딸 생각뿐이었다.

    세원이 돌아오자 하빈은 저녁을 먹고 셋이 모두 모여 앉아 게임을 했다. 똑같은 그림 카드를 맞추는 게임이었는데 아직 어린 세빈도 곧잘 하고 있었다. 덕분에 세원과 세빈의 팀이 하빈을 이기는 중이었다. 하빈은 기를 쓰고 이기려 했지만 두 사람의 공격을 이길 수 없었다.

    “아, 졌어!”

    “엄마가 졌대요.”

    놀리는 목소리에 하빈이 세원을 노려봤다. 세빈은 좋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벌칙으로 뭐 하는데……. 하빈이 울상을 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자 세원과 세빈은 서로 마주보다 하빈에게 말했다.

    “뽀뽀해줘.”

    “뽀뽀!”

    “이리 와. 입술을 다 잡아먹어야지.”

    하빈이 세빈의 볼을 꾹 누르고 입술을 쪽 빨아들이자 세빈이 파닥거리며 난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재밌다며 신나서 웃음꽃을 피웠다. 세원에게도 입을 맞추자 너무 가벼운 게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럼 뭘 더 원해요?”

    “글쎄?”

    “몰라요. 못 본 거로 할게요.”

    “왜 봐 놓고 못 본 거로 해.”

    “내 맘이에요!”

    “김하빈 고집불통이네. 세빈아, 엄마 나쁘다. 그치?”

    “엄마가 왜 나빠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세빈에 하빈이 하지 말라며 세원의 허벅지를 퍽 때렸다. 세원은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는 세빈을 품에 끌어안았다. 귀여운 내 새끼. 세빈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다.

    게임을 마치고 목욕을 하러 들어온 세빈과 하빈은 욕조에 입욕제를 풀어 놓고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세빈은 뽁뽁 소리가 나는 오리 모양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하빈에게 물을 튀겼다. 하지 말라고 할 법도 했지만 만사가 귀찮았던 하빈은 눈을 감고 지친 얼굴로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엄마, 엄마.”

    “왜요?”

    “오리는 왜 울어요?”

    “오리도 오리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왜 사람 말을 못해요?”

    “사람이 아니라서 못해요.”

    “사람만 사람 말을 할 수 있어요?”

    “네.”

    “그렇구나.”

    세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리 장난감을 쳐다봤다. 오리는 꽥꽥. 세빈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장난을 치자 욕실 안이 울렸다. 하빈은 살짝 눈을 뜨고 그런 세빈을 쳐다보다가 혹시 혼자라서 심심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동생이 필요하진 않을까. 하빈이 슬쩍 세빈을 불렀다.

    “세빈아.”

    “네?”

    “세빈이는 동생 필요 없어요?”

    “네.”

    단호한 세빈의 대답에 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왜냐고 물었다. 세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동생 있으면 안 좋다고 친구들이 그랬어요!”

    “친구들이 그랬어요?”

    끄덕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다 하빈이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로 세빈의 얼굴을 닦아 냈다.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엄마랑 아빠랑 세빈이만 좋아하는 게 좋아요.”

    “동생 있으면 세빈이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네.”

    “왜?”

    “동생도 좋아하니까!”

    “세빈이도 동생 좋아하면 되잖아.”

    “그치만 세빈이는 동생 싫은데…….”

    “알았어, 알았어.”

    울상을 하는 세빈에 하빈은 얼른 알았다며 아이를 달랬다. 동생은 안 가져도 되겠구나. 언제 또 변덕이 생겨 동생을 낳아 달라 할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괜히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하빈은 세원에게 세빈과 목욕하는 동안 나눴던 대화를 전해 주었다. 세원은 세빈의 말을 듣고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시큰둥한 반응에 하빈이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반응이 없어요?”

    “나도 동생은 반대야.”

    “왜요?”

    “힘들어서 어떻게 낳아.”

    “그런가?”

    “그래. 나는 그냥 애는 세빈이로 만족해.”

    그의 말에 하빈은 그럼 알겠다며 이불에 폭 파묻혀 생각에 잠겼다. 다들 둘째는 필요 없다고 하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열 달 동안 품고 있다가 낳는 게 보통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둘째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출산 이후부터는 세원과 섹스를 할 때도 늘 피임을 하고 있었던 터라 둘째가 생길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아기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세원 씨도 싫다고 하니 절대 걱정할 일은 없겠네. 하빈은 눈을 감고 편하게 잠들었다.

    * * *

    세빈을 본가에 맡기고 오랜만에 세원과 단둘이 데이트를 하러 나온 참이었다. 하빈은 신이 나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둘러보기 바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네. 예전과 비교하면 제법 익숙하게 매장을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쇼핑하는 내내 하빈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 주던 세원이 카페에 앉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하빈아.”

    “네?”

    “오늘 세빈이도 없고 간만에 데이트도 나온 김에 예전에 우리 만나서 처음 갔던 호텔 가 볼래?”

    “거기 오래되지 않았어요?”

    “얼마전에 리모델링 했다던데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네.”

    “그래요? 저도 궁금해요, 가 봐요.”

    하빈이 웃으며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은 그럼 예약을 해야겠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하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쪼로록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바쁘게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이런 곳에, 이런 사람들에게 적응했을까. 어느새 어색함이 하나도 없어지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었던 양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저녁도 레스토랑에서 먹을까?”

    “네!”

    “그래, 그럼 레스토랑도 같이 예약할게.”

    “좋아요.”

    함께 있으면 뭔들 좋지 않을까.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세원이 바쁘게 무언가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멋있어 보여 가슴이 설렜다.

    “그럼 지금 가자.”

    쇼핑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따라 하빈이 쫄래쫄래 카페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방문한 호텔의 내부는 많이 바뀐 듯하면서도 예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레스토랑에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 타면서 엄청 떨었는데. 혼자 옛 추억을 되살리며 피식 웃자 세원이 왜 그러냐며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났어요.”

    “무슨 옛날 생각?”

    “여기 처음 왔을 때 저 벌벌 떨던 생각…….”

    그리고는 세원을 쳐다보자 그때 봤던 그 잘생긴 얼굴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똑한 콧날에 예쁜 입술, 날카로운 눈매. 하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세원은 왜 그렇게 쳐다보냐며 하빈의 어깨를 잡아 돌리고는 의자에 앉혀 버렸다.

    “내가 남편 좀 보겠다는데!”

    “부끄럽잖아.”

    “이런 거 잘 안 부끄러워하잖아요.”

    “그렇지. 근데 지금은 좀 부끄러워.”

    “왜요?”

    “나도 옛날 생각 나서.”

    세원의 말에 하빈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옛날에 세원 씨는 무슨 생각 하면서 저 만났어요?”

    “너는?”

    “저요? 저는 세원 씨 보고 싶어서 만났는데.”

    “그게 다야?”

    “그게 다라뇨, 보고 싶은 게 얼마나 중요한데. 세원 씨랑 헤어지기 싫어서 제가 엄청 달라붙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투덜거리는 말에 세원은 피식 웃으며 그랬나? 하고 물을 한 모금 넘겼다. 느긋한 그의 모습에 괜히 약이 오르는 하빈이었다. 세원 씨는요? 하빈이 묻자 세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너 예뻐서 좋았는데 호텔 방까지 갈 생각은 없었어.”

    “저도 처음부터 호텔 방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진짜?”

    “그럼 설마 세원 씨가 여기로 데려왔는데 제가 호텔 방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겠어요.”

    “하긴, 내가 너 여기로 데려왔었지.”

    식전빵이 나왔지만 세원과 하빈 모두 손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하빈이 요즘 베이킹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런 바게트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빵을 쪼개 안에 있는 부드러운 부분만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그럼 내가 너 호텔 데려가려고 여기로 온 거라고 생각했어?”

    “세원 씨가요? 아니요. 전 너무 떨고 있어서 그런 생각 할 정신도 없었는데.”

    “대체 왜 그렇게 떨었던 거야.”

    세원이 큭큭거리며 하빈에게 물었다.

    “그야 세원 씨가 너무 멋있었으니까 그렇죠.”

    “이유가 그게 전부야?”

    “아, 뭐……. 제가 이런 데는 진짜 그때가 처음이라 긴장한 것도 있었고…….”

    “하긴 너 그때 호텔 오는 거 처음이라고 했었지.”

    “네. 제가 설마 거짓말을 했겠어요?”

    “그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설마 진짜겠어? 이런 생각은 했던 것 같아.”

    “그게 뭐야…….”

    “못 믿었어.”

    그의 말에 하빈이 세원을 살짝 노려봤다. 세원은 미안하다며 손을 뻗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믿어요? 하빈의 말에 세원은 믿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깔끔하게 봐주는 그의 모습에 세원이 멋있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는 그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러면서 취할 때까지 술을 그렇게 마셨었어?”

    “긴장되니까 더 마시게 되던데요? 그리고 세원 씨가 시켜 줬잖아요!”

    억울한 마음에 소리치자 세원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내가 그래서 그 뒤로 너 어디 가서 술 먹으면 큰일 나겠다 싶었지.”

    “그 정도는 아니에요.”

    “결국 술 마시고 나랑 했잖아.”

    “그것도 분위기 타서 그런 거고…….”

    “조심해야 해.”

    “알아요, 알아.”

    들려오는 잔소리에 하빈이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잔소리 싫어. 그럼에도 세원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나는 그때 너 보고 엄청 놀랐는데.”

    “왜요, 술 잘 마셔서?”

    “잘 마시긴. 금방 취하던데.”

    “아닌데! 제가 세원 씨보다 더 마셨잖아요.”

    “내가 더 많이 마셨었지.”

    “됐어요. 지금 우리가 주량 대결할 것도 아니고.”

    손을 내젓자 세원이 웃으며 그건 그렇지, 하고 말을 이었다.

    “너 엄청 예뻐서 놀랐었어.”

    “예뻤다고요?”

    “어.”

    “아휴…….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익숙하다는 듯이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원은 당연한 말이 아니냐며 하빈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지금도 엄청 예쁜데. 하빈이 놓으라며 세원의 손목을 잡고 떼어 냈다. 세원은 이번에는 하빈의 손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세빈이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세원 씨를 닮은 것 같아요.”

    “왜? 뭘 닮았는데?”

    “자신감 넘치던데요.”

    “자신감 넘치면 좋지.”

    “너무 과해도 안 좋잖아요. 친구들이 싫어하면 어떡해요. 걱정되는데…….”

    “유치원에서 잘 챙겨 주겠지.”

    걱정스럽다는 하빈의 얼굴에 세원이 괜찮다며 하빈의 손등을 문질렀다.

    세빈은 언제나 자신이 최고였고 제일이었다. 그런 모습이 제 눈에는 마냥 예쁘고 귀여웠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왕따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세원은 걱정하지 말라며 하빈을 다독였다.

    “나 어렸을 때 세빈이랑 성격 똑같았는데 애들이랑 아주 잘 지냈어.”

    “……역시나.”

    “완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았는데 애들이 다 착해서 받아 줬어. 세빈이 친구들도 그렇겠지.”

    “세빈이가 자기보고 공주님이라고 해요, 알아요?”

    “공주님 맞는데 뭐.”

    “웃겨 죽겠다니까…….”

    하빈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와중에도 세원은 웃으며 자기 딸이 맞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팔불출 같은 그의 모습에 더욱 어이가 없는 하빈이었다.

    “세빈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같이 하다 보면 세빈이가 잘 자라지 않을까?”

    “혹시라도 세빈이한테 실수하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상처 주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다정한 그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자신보다 이미 훨씬 어른 같은 세원도 세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아기를 키우는 게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든든하고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 좋았다.

    “세원 씨랑 여기 와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으니까 좋아요.”

    “그러게. 추억의 장소가 남아 있는 게 참 좋다.”

    밥을 먹고 호텔 방으로 올라가자 그때와 비슷한 방이 그대로 있었다. 여기는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달라진 게 별로 없네.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옷을 벗어 놓는데 세원이 같이 씻자며 뒤에서 옷을 붙잡았다.

    “같이 씻고 싶어요?”

    “어.”

    “그래요, 집에서는 맨날 세빈이랑 씻으니까.”

    “맞아. 나랑도 씻어야 하는데 세빈이한테 뺏겼어.”

    투덜거리는 모습이 아이 같아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 보겠나 싶어 하빈이 얼른 옷을 벗고 세원과 함께 넓은 욕조에 물을 채워 들어가 앉았다. 하빈이 따뜻한 물속에 축 늘어져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세원이 옆으로 다가와 하빈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춰 왔다.

    깊은 입맞춤에 하빈이 입을 열고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느새 내려온 손이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밑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빈은 몸을 꿈틀거리다 세원의 위로 올라타 더욱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흐응, 읏…….”

    신음이 욕실 안을 울렸다. 하빈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에 가득 찬 물이 첨벙거렸다. 세원은 제 위에 앉은 하빈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빨아 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욕조 밖으로 나와 일어난 두 사람은 서로의 젖은 몸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오랜 키스 끝에 입술이 떨어지고 세원이 하빈의 목을 타고 내려와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강하게 키스마크를 내는 세원에 하빈이 끙끙대면서 다리를 달달 떨었다. 세원은 하빈의 다리를 벌려 무릎으로 페니스를 살살 문질렀다.

    “하아……. 세원 씨가 그렇게 해 놓으면, 씻을 때마다 세빈이가 왜 이러냐고 물어보는데…….”

    “그래서 뭐라고 해?”

    세원이 웃으며 물었다. 하빈은 앓는 소리를 내다 입을 열었다.

    “벌레 물렸다고 하지 뭐라고 해요…….”

    “내가 벌레야?”

    “으응, 몰라…….”

    세원이 하빈의 뒤로 손가락을 하나둘 밀어 넣으며 구멍을 넓히혔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하빈이 칭얼거렸다.

    “서서, 하면, 힘들어…….”

    “조금만 참아 봐.”

    “네에…….”

    몸이 달아오른 하빈이 세원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세원의 손에 몸이 훌쩍 들어 올려졌다. 세원이 천천히 하빈의 뒤에 페니스를 맞추고 삽입해 왔다. 하빈이 그대로 고개를 젖히고 끙끙대며 몸을 들썩였다. 빨리 움직여 줬으면 싶었다. 빨리.

    세원은 하빈을 벽에 기대놓고 거칠게 박아넣었다. 퍽퍽 치대다가도 하빈이 절정에 오를 때가 되면 쑥 빠져나와 잠시 열을 식혔다. 애태우는 세원의 행동에 하빈이 짜증을 냈다. 가게 해 주지, 짜증 나.

    “앗……!! 아앙, 앗, 흐응, 읏!”

    다시 파고드는 세원의 페니스에 하빈이 신음을 내며 눈을 감았다.

    “밖에다 쌀게.”

    “으응…….”

    투명한 물속으로 허여멀건한 액체가 툭툭 떨어졌다. 하빈은 헐떡이며 세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리를 후들후들 떨던 하빈이 아예 주저앉았다.

    세원이 얼른 하빈을 부축하하는가 싶더니 하빈을 돌려세워 다시 엉덩이를 벌렸다. 또다시 삽입하는 세원에 하빈은 벽을 잡고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하윽, 으, 흣!”

    “예쁘네. 봐봐, 하빈아.”

    세원의 말에 하빈이 없는 정신으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뿌연 김이 서린 욕실 안에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우는 자신과 세원의 나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까지 내며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야한 동영상 같아서 하빈은 제 앞을 붙잡고 흔들었다.

    “하앙, 아, 으앙, 아흐…….”

    절정에 오르며 뒤를 바짝 조이자 세원이 몇 번 더 빠르게 박아대다 쑥 빠져나가며 사정했다. 그대로 엎어져 잠시 숨을 고르던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원을 붙잡았다.

    “괜찮아?”

    “네……. 방금 엄청 야했어요.”

    “그치.”

    “네. 뭔가 신기했어요. 그냥 거울로 볼 때랑 또 달라요.”

    “실루엣만 비치니까 더 야하게 느껴지더라.”

    세원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얼른 씻고 나가서 우리 또 해요. 하빈이 조르는 말에 세원은 좋다며 샤워기를 틀었다. 정성스럽게 몸을 씻겨 주는 그의 손길에 하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 * *

    아침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했고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묘한 기시감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달력을 확인했다. 히트싸이클을 할 때가 됐나. 원래 주기가 일정하지 않은 탓에 하빈은 세빈을 낳은 후부터 꾸준히 약을 먹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약을 끊자 다시 주기가 불규칙해져 버렸다.

    “약 또 먹어야 하나…….”

    하빈이 고민하며 거실로 나오자 세빈이 어질러 놓은 장난감이 가득했다. 강세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방에서 유치원 갈 준비를 하던 세빈이 쪼르르 나와 왜요? 하고 대답했다. 하빈은 거꾸로 돌아간 세빈의 모자를 똑바로 씌워 주고 말했다.

    “오늘 유치원 끝나고 할머니 댁 가서 놀다 내일 올래?”

    “왜요?”

    “엄마가 세빈이 대신 거실 어지른 거 청소하려고. 싫으면 세빈이가 거실 청소하자.”

    “좋아요! 세빈이가 할머니네 가서 놀다 올게요.”

    청소 얘기에 거실을 한 번 둘러본 세빈이 냉큼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의 손에는 아직 신지 못한 양말 한쪽이 들려 있었다.

    “그거 신겨 줘?”

    “혼자 할 수 있어요.”

    세빈이 방바닥에 앉아 낑낑거리며 양말을 신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하빈이 흐뭇한 얼굴을 하다가도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세빈은 힐끔거리며 그런 하빈의 눈치를 살폈다. 유치원 버스를 타러 나가기 전, 세빈이 엄마 손을 붙잡고 물었다.

    “엄마.”

    “응?”

    “기분 안 좋아요?”

    “엄마가? 엄마 기분 좋은데?”

    “엄마 근데 왜 에휴 했어요?”

    “엄마가 그랬어요?”

    “네. 아까 저기서 그랬는데…….”

    “엄마가 아직 졸려서 그랬나 봐요. 기분 나쁜 거 아니니까 세빈이는 신경 쓰지 마요.”

    하빈의 말에 세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앞장서서 열심히 걸어가는 모습이 아기 펭귄 같아 귀여웠다. 뒤따라 걸어가며 하빈이 세빈의 모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유치원 차를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이 세빈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세빈아!”

    “세빈이다!”

    “안녕.”

    걱정과는 달리 세빈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다들 쪼르르 달려와 세빈을 감싸고는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 댔다. 아이 엄마들은 하빈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무리 지어 수다를 떨었다. 말할 사람이 없는 하빈은 혼자 가만히 서서 세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세빈의 인사에 하빈도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이 헤어졌다. 하빈이 집으로 돌아와 어지러웠던 거실을 대충 치우는데, 몸이 좋지 않은 건지 평소와는 달리 조금만 움직였는데도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샤워를 좀 해야겠는데……. 하빈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기 직전,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하빈이 짜증을 내며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세원의 전화였다. 하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당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자 세원이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별일 없어요…….”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욕실이라 그런가 봐요.”

    [씻으려고? 어디 나가게?]

    “아니요, 몸이 별로 안 좋은지 조금만 움직였는데도 피곤하고 땀이 나고 그래요.”

    [그래? 걱정이네. 씻고 한숨 더 자.]

    “네. 근데 왜 전화했어요?”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전화했지.]

    “알았어요, 세원 씨도 잘 챙겨 먹어요.”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하빈이 흘리듯 말을 꺼냈다.

    “근데요.”

    [응. 왜?]

    “히트싸이클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 지금?]

    “네. 그래서 몸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집에 갈까?]

    “굳이 안 와도 돼요.”

    세원의 회사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빈은 됐다며 전화를 끊고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지만 몸은 풀린 기분이었다. 기운 없는 모양새로 방까지 걸어가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 가운만 걸치고 있던 하빈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누, 누구세요?”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세원이었다.

    “나 말고 올 사람이 또 있어?”

    “깜짝 놀랐어요. 회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왜 왔어요?”

    “너 아프다고 해서 왔지.”

    “아픈 건 아니고…….”

    “페로몬도 점점 풀리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확 민감해지는 거 아냐? 약 사 왔어. 약부터 먹어. 늦어서 괜찮을지 모르겠네.”

    “아, 고마워요.”

    세원의 손에 들린 약을 보고 하빈이 쫄래쫄래 따라가 약을 먹었다. 찬물이 목을 타고 배 속까지 내려가는 느낌이 시원해서 좋았다.

    하빈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에 파묻혀 세원을 바라봤다. 침대에 걸터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걱정해 주니까 좋다.

    “저, 그러고 보니까 세원 씨 어머님께 세빈이 유치원 끝나고 내일까지 부탁한다고 말을 안 해 뒀는데…….”

    “내가 지금 나가서 바로 전화할게.”

    “네. 그리고 저 조금만 잘게요.”

    “그래.”

    나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하빈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물에 잠기듯 스르륵 잠에 빠져든 하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온몸이 후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땀투성이가 된 하빈이 힘겹게 눈을 껌뻑이며 방안을 둘러봤다.

    “왜 이렇게 더워…….”

    세원을 찾아 하빈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세원 씨……. 하빈은 그의 위로 올라타 샤워 가운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세원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에서 깨어난 세원이 놀란 얼굴로 하빈을 살피며 등을 쓰다듬었다.

    “하빈아, 왜 그래. 응?”

    “흐읏……. 세원 씨…….”

    하빈이 먼저 세원에게 달라붙어 몸을 비비적거렸다. 아래가 잔뜩 부풀어 낑낑대는 모습에 세원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빈은 다급하게 세원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약을 조금 늦게 먹어서 그런지 히트싸이클이 온 모양이었다.

    세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하빈을 꼭 끌어안았다. 하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쾌락에 빠져 몸을 들썩이며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우응, 읏, 세원 씨…….”

    “괜찮아.”

    한참 껴안고 있자 잠시 진정되는 듯한 하빈의 모습에 세원도 옷을 벗었다. 하지만 하빈은 지금 몸에 닿는 모든 게 자극적이었다. 세원의 손끝 하나에도 그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부들부들 떨던 하빈이 뒤로 드러눕자 세원이 위로 올라타 하빈에게 입을 맞추고 몸을 쓸어올렸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곳이 짜릿했다.

    “하아, 앙, 좋아…….”

    하빈의 페로몬이 거실에 가득 찰 정도로 강하게 풀어져 나왔다. 세원은 자신을 자극하는 하빈의 페로몬에 정신을 붙잡으려 애를 쓰며 조심스레 가슴을 애무했다.

    물고 빠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미 잔뜩 젖어 뻐끔거리며 넣어 주길 바라는 하빈의 뒤에 세원은 참지 못하고 부풀어 오른 자신의 페니스를 그대로 삽입했다.

    “으흣! 으, 응! 아앙! 앗!”

    세원이 빠르게 쳐올리며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의 몸에서는 땀이 뻘뻘 흐르고 있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고 있는 대로 박아 넣었다. 페니스가 깊숙한 곳을 푹푹 찔러 대자 하빈이 황홀감에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렸다. 입에서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세원이 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빈을 내려다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몸이 아름다웠다. 세원은 하빈에게 다시 몸을 겹치며 입술을 가져갔다.

    하빈은 더 해 달라며 뒤를 바짝 조여 댔다. 세원은 쉴 새 없이 치대다가도 사정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빠져나와 하빈의 배 위에 정액을 내뿜었다.

    하빈은 다시 발기해 꺼떡이는 세원의 페니스를 붙잡고 흔들며 넣어 달라 졸랐다. 세원은 결국 콘돔을 끼고 끝없이 하빈의 안을 파고들었다.

    “하으, 흐앙, 아, 하앙!”

    한껏 달아오른 몸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하빈의 유혹에 세원은 그대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거실에서 진탕 뒹군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와 또다시 몸을 섞었다. 침대 위에서도 헤드를 붙잡고 뒷치기를 하며 섹스를 이어 갔다. 하빈의 골반을 붙잡고 거침없이 쳐올리던 세원이 엉덩이를 콱 붙잡자 하빈이 아앙!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밤늦도록 이어진 섹스가 끝이 나고, 녹초가 된 하빈은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설 수도 없을 것 같은 상태에 세원이 하빈을 안아 들고 예전처럼 몸을 정성스레 씻겨 줬다. 오랜만에 받는 그의 손길이 다정해 또다시 가슴이 떨렸다.

    “좀 괜찮아?”

    “네…….”

    “정신없이 했네.”

    “맞아요.”

    이불을 걷어 낸 침대 위에 하빈이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서둘러 새 이불을 가져온 세원이 하빈의 위에 덮어 주며 먼저 자라고 토닥였다.

    “피곤할 텐데 먼저 자.”

    “세원 씨도 얼른 와서 자요.”

    “알았어. 금방 치우고 갈게.”

    “네.”

    다음날이 되어 세빈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깔끔하게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세빈은 할머니네 집에서 맛있는 양갱을 먹었다며 하빈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귀여운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엄마도 양갱 먹고 싶다.”

    “세빈이가 할머니한테 말해서 다음에는 엄마도 주라고 할게요.”

    “진짜? 고마워요.”

    하빈이 웃으며 말하자 세빈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손을 뻗었다. 왜요? 다가가 얼굴을 마주하자 세빈이 하빈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엄마 예뻐요.”

    “예뻐요?”

    “네.”

    “고마워요.”

    “나는 엄마가 좋아!”

    자신이 예쁘다는 말을 시작으로 세빈이 혼자 엄마가 좋다며 노래를 부르고 집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아이의 행동에 하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 거예요, 세빈이?”

    하빈이 묻자 세빈은 양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엄마가 좋아 노래예요!”

    “누가 알려 줬어요?”

    “세빈이가 만들었어요.”

    “세빈이가? 우와, 대단하다.”

    놀란 척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세빈이 으쓱한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세빈이 유치원에서도 노래 잘해서 일등으로 밥 먹어요.”

    “그랬어? 오늘 알림장 봐야겠네.”

    “그리고 오늘 깍두기 나왔는데 세빈이 다 먹었어요!”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드는 세빈을 보며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이 맛에 아이를 키우나 보다. 하빈은 세원을 품에 안고 티비를 보다 말했다.

    “세빈아.”

    “네?”

    “엄마하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

    하빈의 말에 세빈은 눈을 끔뻑거리며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세빈이는 엄마랑 같이 살 거야!”

    “그치?”

    입술에 뽀뽀를 하자 세빈이 하빈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폭 안겨들었다. 사랑스러운 작은 몸이 한 품에 들어오는 게 참 좋았다.

    * * *

    저녁 식사를 하고 세 가족은 함께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한 날씨라서 그런지 하빈의 가족 외에도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나무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어두운 시간인데도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꽃이 예쁘네. 그치?”

    하빈의 말에 세빈이 고개를 번쩍 들고 제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봤다.

    “엄마, 엄마.”

    “응?”

    “저거는 무슨 꽃이에요?”

    “벚꽃이야.”

    “예쁘다!”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토끼처럼 귀여웠다. 하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세빈의 손을 붙잡았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산책로에 있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세빈이 요즘 유치원 안 가서 심심하지?”

    세원의 물음에 세빈은 고개를 저었다.

    “엄마랑 계속 같이 있어서 좋아요!”

    “그래? 엄마가 그렇게 좋아?”

    “네에.”

    하빈의 무릎 위로 올라앉으며 세빈이 대답했다. 품을 파고드는 행동에 하빈은 등을 쓰다듬어주며 미소지었다. 귀여운 애교가 담긴 세빈의 행동이었다.

    유치원이 방학한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빈은 온종일 세빈을 돌보느라 내내 정신이 없었지만 그와 달리 세빈은 그 시간이 마냥 행복한 모양이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안쓰럽게 보면서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을 속삭였다.

    “내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세원 씨는 출근해야죠.”

    “휴가 내고 집에 좀 있을까?”

    “괜찮아요. 세빈이랑 집에서 같이 노는 것도 재밌어요.”

    “그래? 그래도 이제 곧 방학 끝나니까 그 전에 셋이서 어디 놀러 가자.”

    “아빠, 우리 어디 놀러 가요?”

    세원과 하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빈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세원은 웃으며 세빈에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음……. 아무 데나 놀러 가고 싶은데!”

    “그럼 기차 타고 해 뜨는 거 보러 갈까?”

    “기차 타고요? 그러고 보니까 세빈이 기차 안 타봤지?”

    “네!”

    세빈이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빈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으니 며칠 안으로 가면 좋겠네. 생각하고 있는데 세원은 당장에 내일 가자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회사는 어쩌고요?”

    “전화해서 쉰다고 하면 되지.”

    “그래도…….”

    “괜찮아. 휴가 내면 돼. 내일 기차표 미리 끊어두자.”

    세원이 기차표를 예약하는 동안 하빈은 세빈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세빈아, 아빠가 저래도 되는 것 같아?”

    “왜요?”

    “아니야……. 그나저나 세빈이 바닷가 가면 추울 텐데 옷 단단히 챙겨가야겠네.”

    “바다 보러 가는 거예요?”

    “그렇지. 해 뜨는 거 보려면 바닷가 가야지.”

    “우와! 신난다!”

    좋다며 몸을 흔들자 하빈이 위험하다며 세빈을 꼭 끌어안았다. 하빈의 품에 안긴 세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헤실헤실 웃으며 제 기분에 취해 있었다. 세원은 기차표 예약을 마쳤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로 예약했어.”

    “네? KTX로 안 가고요?”

    “이왕이면 옛날 기차 타야 재밌을 것 같아서.”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그럼 얼른 집에 가서 짐 싸자.”

    “설마 지금 당장 출발해요?”

    “지금 가야지. 새벽 기차야.”

    “애 힘들 것 같은데.”

    “세빈이는 가면서 자면 돼. 자리 여러 개 예매했어.”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하는 세원의 모습에 하빈은 조금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그를 졸졸 따라갔다. 집에 도착해 여행 갈 짐을 챙기며 연신 세원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정말 지금 가요? 진짜로? 내일 저녁에 가도 되지 않나? 어차피 그다음 날이 주말이잖아요.”

    “주말은 주말에 또 놀고 오늘 가서 내일 해 뜨는 거 보자고. 내일 날씨가 좋대.”

    “늘 이렇게 추진력이 좋다니까…….”

    한숨을 푹 쉬며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청량리역에 도착한 세 사람은 플랫폼에 서서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동안 세빈은 화장실이 가고 싶다며 하빈을 졸랐다.

    “화장실 다녀올까?”

    “네에.”

    “얼른 갔다 오자.”

    “갔다 오면서 편의점 들려서 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와. 가면서 먹어야지.”

    “알겠어요.”

    세빈을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오며 편의점에 들러 과자며 음료수, 이것저것 고르자 어느새 손에는 한 봉지가 가득 들려 있었다. 다시 세원의 곁으로 돌아왔을 땐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빈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기차를 가리키며 방방 뛰어댔다.

    “기차다! 엄청 크다!”

    “신기해?”

    “네! 기차가 길어요.”

    하빈의 손을 놓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차를 구경하던 세빈이 출발 시각에 맞춰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낡은 모습의 기차 내부에 세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하빈 역시 무궁화호는 처음이었다.

    예전에 부산으로 도망칠 때 KTX를 탔던 게 제 기차 여행 경험의 전부였다. 세빈과 함께하는 첫 기차 여행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엄마, 엄마.”

    “응?”

    “이거 의자 이렇게 돼 있는데 어떻게 앉아요?”

    정면을 보고 나란히 되어 있는 의자들에 하빈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세원이 가만 보자며 의자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휙 돌려 네 개의 의자를 마주 보게 했다.

    “우와, 이런 거 어떻게 알아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 옛날에 대학 다닐 때 기차 여행도 가고 그랬었어.”

    “그랬구나……. 세원 씨는 별별 경험 다 해봤네요.”

    “그렇지, 뭐.”

    세원과 하빈이 나란히 않고 그 맞은편에 세빈이 앉아 과자 봉지를 바스락거렸다. 창밖으로는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세빈아 가면서 자야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해 뜨는 거 볼 수 있어. 엄마가 담요 가져왔으니까 누워서 자.”

    “안 졸릴 것 같은데…….”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다리를 달랑거리는 모습이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하빈은 그런 세빈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날 만도 하지. 나도 신나는데. 하빈이 알겠다며 과자 봉지를 하나 뜯어주고 세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린대요?”

    “다섯 시간 정도 걸린대.”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어. 그러니까 너도 가면서 자.”

    “그래야겠다. 세빈이도 좀 재워야겠어요.”

    “가면 뭐 먹을래? 맛있는 거 먹자.”

    세원이 하빈을 품에 안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세빈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다가도 기차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쯤 지나자 세빈도 잠이 오는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떨궜다. 하빈이 세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제 무릎을 베고 잘 수 있게 눕히자 세빈이 하빈의 무릎을 파고들며 곤히 잠들었다.

    “불편해서 금방 못 잘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잘 자네요.”

    “그러게. 너도 의자 젖혀두고 자.”

    “세원 씨도 좀 자요. 내일 다니려면 힘들지도 모르는데.”

    “그래야지.”

    세 사람은 나란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네 시간이 지나고 정동진에 도착하자 창밖으로는 바로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광경에 하빈이 세빈을 깨워 얼른 구경하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으응…….”

    “세빈아 도착했는데 바다 안 볼 거야?”

    “볼래.”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문을 바라보던 세빈이 컴컴한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멋지지?”

    “우와아.”

    “하빈아, 세빈아. 얼른 내리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세원이 두 사람을 챙겨 기차를 빠져나왔다. 정동진역 앞에는 음식점이 주르륵 널려 있었다. 배가 조금 고팠던 세 사람은 열려 있는 아무 곳을 찾아 들어가 우동을 두 개 주문했다.

    “뜨끈한 걸 먹어야 몸이 좀 풀리지. 바닷가라 밖은 좀 춥지?”

    “세빈이를 한 겹 더 입힐 걸 그랬어요. 세빈아 추워?”

    “괜찮아요.”

    “괜찮아? 추우면 말해. 엄마가 담요 줄게.”

    “네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동이 나오고 하빈이 세빈과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따뜻한 온기를 나눴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오자 추웠던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해는 몇 시에 뜬다고 했죠?”

    “여섯 시 삼십사 분에.”

    “그러면 지금이 다섯 시 반이니까 한 시간은 더 남았는데 바로 가지 말고 한 이십 분 남았을 때 택시 타고 가요. 너무 일찍 가면 추우니까.”

    “그러자.”

    세빈을 생각했을 때 밖에 오래 있기는 무리였다.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 시가 넘어서야 출발한 세 사람은 해가 뜨기 십 분 전이 되었을 때 바닷가에 도착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수평선을 바라봤다.

    “해가 저기에서 뜰 거야, 세빈아.”

    “저기요?”

    “응. 날이 많이 밝아졌네. 해가 뜨려나 보다.”

    하빈의 말에 세빈이 꽃받침을 하고 앉아 일출을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멀리서 빨갛고 동그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빈도 처음 보는 멋진 광경에 넋을 놓고 멍하니 바라봤다.

    “소원 빌자, 소원.”

    세원의 말에 하빈도 세빈도 양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소원을 빌었다. 하빈의 소원은 가족의 행복과 건강이었다. 우리 가족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보다 바랄 게 없었다.

    “뭐 빌었어?”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밀인데요.”

    “그럼 세빈이는 소원 뭐 빌었어?”

    “나도 비밀인데!”

    “뭐야, 아무도 안 알려주는 거야?”

    “아빠는 뭐 빌었는데요?”

    “나도 비밀이야.”

    모두 각자의 소원을 가슴에 품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뜨거운 태양이 얼굴을 비췄다.

    일출을 보고 기분 좋은 상태로 세 사람은 근처 식당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우동을 한 그릇씩 먹었던 터라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일단 식당을 찾았다. 뭘 먹을까 하다가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들어왔다.

    “여기 맛집이라니까 먹어 보자.”

    “좋아요.”

    세원이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하빈이 물을 따라 앞에 놓아주며 가족들을 챙겼다. 세빈은 자리에 앉아 아빠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세빈아 안 피곤해?”

    하빈의 물음에 세빈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직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곧이어 순두부찌개와 세빈이가 먹을 음식이 나왔다. 빨간 양념이 된 음식을 보니 배가 고프지 않다가도 입맛이 돌았다.

    “엄마가 덜어줄게요.”

    “내건 이거에요?”

    “응. 이게 안 매운 거야.”

    맵지 않은 비지찌개를 세빈의 앞접시에 덜어주고 하빈도 식사를 시작했다.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아빠 우리 오늘 어디 놀러 가요?”

    “시간박물관이라는 곳도 가고 레일바이크도 타러 갈 거야.”

    “우와 재미있겠다!”

    잔뜩 기대된 표정을 한 세빈을 보고 있으니 하빈도 웃음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해변 따라서 레일바이크를 탈 수가 있대.”

    “해변이면 경치도 좋겠다. 세빈이랑 탈 수 있어요?”

    “당연히 애들도 탈 수 있다고 하지.”

    “다행이에요.”

    “좋아요!”

    세빈이 몸을 파닥거리며 좋다고 흔들어 댔다. 하빈은 얌전히 먹으라며 그런 세빈을 진정시켰다. 소란스러운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세 사람은 근처 호텔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커다란 침대에 다 같이 누워 잠을 청했다.

    “알람 맞췄지?”

    “한 세 시간만 자요. 이따 점심때 지나면 일어나서 놀러 나가요.”

    “그러자. 잘 자고.”

    “네.”

    피곤했던 몸이 풀리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가운데 누운 세빈은 세원과 하빈 사이에 끼어 잠들었다. 한참 자던 세 사람을 깨우는 건 핸드폰의 요란한 알람 소리였다.

    “아직도 피곤해? 좀 더 잘래?”

    “저는 괜찮아요. 세빈아 더 잘래?”

    “아니요…….”

    눈을 비비적거리며 세빈이 일어나 하품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이 조금 부어 있었다. 하빈은 세빈의 옷을 챙겨 입히고 다시 짐을 챙겼다. 시간이 어느덧 한 시를 넘어갔다.

    “지금 나가서 박물관도 가고 레일바이크도 타면 딱이겠다.”

    “신난다!”

    “좋아요?”

    “네!”

    폴짝폴짝 뛰는 세빈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하빈이 몸을 일으켰다. 세빈은 하빈의 손을 꼭 잡고 방을 나섰다. 세원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오늘 차를 가져오지 않아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조금은 불편했지만 기차 여행의 묘미였다. 박물관에 도착해 제일 먼저 기념품샵에 들어간 세빈은 가득한 모래시계를 보고는 갖고 싶다며 하빈을 쳐다봤다.

    “모래시계 하나 사줄까?”

    “이거 뒤집으면 모래 떨어지지요?”

    “그렇지. 시간 지나가면 다 떨어져서 시간 알 수 있어요.”

    “재밌다! 세빈이 갖고 싶어요.”

    “골라봐, 엄마가 하나 사줄게.”

    하빈의 말에 세빈이 신중한 얼굴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모래시계를 골랐다. 그동안 세원과 하빈은 뒤에 서서 세빈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것도 들어보고 저것도 들어보고 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귀여움이 묻어났다.

    기념품샵에서 모래시계를 하나 사주고 카페에 들려 커피를 한 잔씩 산 두 사람은 드디어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전시관에는 직원이 있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세빈이는 알아듣긴 하는 건지 제일 앞에 서서 열심히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세빈아.”

    “네에?”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듣겠어?”

    “음……. 잘은 모르겠는데!”

    “응?”

    “시계가 이렇게 변했대요!”

    “그래, 맞아. 똑똑하네.”

    제법 맞는 말을 하는 세빈에 하빈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다니며 버튼을 눌러보는 체험도 있어 세빈이가 좋아하며 누르고 다니기도 했다. 하빈은 그런 세빈의 뒤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빈아 뛰지 말아야지.”

    “엄마, 여기도!”

    “알았어, 알았어. 천천히 가자.”

    전망대 위로 올라가자 바다 전경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원과 함께 벤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처음에는 신이 나서 구경을 하던 세빈이도 점차 지루해졌는지 어서 레일바이크를 타러 가자며 졸라댔다.

    세빈이의 손에 이끌려 내려온 두 사람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정동진역 앞에 있는 레일바이크 매표소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탈 수 있으려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원을 쳐다보는데 세원이 미리 예매를 해뒀다며 핸드폰을 흔들었다.

    “예약해뒀어요?”

    “어. 혹시나 사람들 많을까 봐 어제 했지.”

    “잘했어요. 사람들 꽤 많다.”

    “그치. 잘한 것 같다.”

    사람들 사이를 파헤치고 들어가 이용권을 받은 세 사람은 탑승구로 향했다. 약 한 시간가량 전동으로 운행된다는 말에 하빈은 신기하다며 안내 책자를 들여다봤다. 네 군데의 포토존도 있었다.

    “사진도 찍어주나 봐요.”

    “그럼 포즈도 취해야겠네.”

    “그러게요. 세빈아 우리 사진도 찍는대.”

    “사진? 세빈이 사진 예쁘게 찍을래요.”

    “어디서 찍는지 엄마가 이따가 알려줄게.”

    “네!”

    레일바이크에 올라타고 서서히 출발하자 앞에 달린 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동으로 움직여서 돌릴 필요가 없었지만 세빈이는 돌리는 게 재미있다며 열심히도 돌리고 있었다. 하빈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얘들아 풍경도 좀 보고 그래.”

    뒤에서 세원이 하빈과 세빈에게 말을 걸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세빈이 노는 모습 좀 봐요.”

    “엄마! 이거 세빈이가 엄청 빨리 돌릴 수 있어요!”

    “잘하네.”

    세원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소지었다. 마냥 해맑은 모습이 보기 좋은 가족들이었다. 해변은 아름다웠다. 오늘 날씨는 아주 맑았고 햇볕도 따스했다. 하빈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며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봤다.

    “엄마, 엄마.”

    “왜요?”

    “세빈이랑 나중에 또 놀러 와요.”

    “그럴까? 재밌어요?”

    “네!”

    재밌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제 기분까지 좋아지는 하빈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세빈을 꼭 끌어안자 세빈이 불편하다며 칭얼거리는 모습마저도 좋았다.

    레일바이크를 다 타고 내리자 아쉽다며 더 타고 싶어 하는 세빈이를 달래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회로 정했다. 아직 회를 좋아하지 않는 세빈이에게는 어린이용 돈가스를 시켜주고 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를 했다.

    “돈가스 맛있어요?”

    “네! 엄마는 그거 맛있어요?”

    “그럼 맛있지. 세빈이도 먹어 볼래?”

    “으응, 싫어……. 맛없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빈이 한 입 만 먹어 보라며 세빈의 앞으로 회를 가져갔다. 고민하던 세빈이 회를 받아먹고는 오물오물 씹으며 이상한 표정을 해보였다.

    “어때요? 이상해요?”

    “우엥 이상해!”

    “뱉을래?”

    “우응…….”

    세빈이 휴지에 회를 뱉고 물을 마신 뒤 얼른 돈가스를 입에 집어넣었다. 아직 세빈에게 회는 무리인 듯싶었다.

    “회 잘 먹는 애들도 있다는데 세빈이는 싫은가 보네.”

    “그런가 봐요. 세빈이도 아무거나 잘 먹으면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세원이 귀엽다는 듯이 세빈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세빈은 불퉁한 얼굴을 하고 돈가스를 콕콕 찍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빈은 장난치지 말라며 세빈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

    “응?”

    “엄마는 세빈이가 더 좋아요, 아빠가 더 좋아요?”

    “갑자기?”

    갑작스러운 세빈의 물음에 하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세빈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도 아빠도 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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