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사랑의 결실 (19/20)

19. 사랑의 결실

해외여행은 정말 처음이었다. 게다가 인천공항은 생전 처음 오는 곳이었다. 이렇게 넓고 시설이 좋을 줄이야. 하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항 안을 둘러보며 세원의 뒤를 따라갔다. 캐리어 하나를 질질 끌고 따라가는 뒷모습이 흡사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 같았다.

세원은 세빈을 품에 안고 익숙하게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비즈니스라고 말하자 바로 체크인을 도와준다는 말에 하빈은 아무것도 모르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짐을 올려놨다.

“일본까지 가시는 거 맞으시죠?”

묻는 말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탑승 게이트까지 확인을 시켜 주고 나서 따로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하빈이 그 뒤를 따라갔다. 세원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다.

“세원 씨.”

“응?”

“우리 이제 어디로 가요?”

“면세점 갈 건데 뭐 살래? 아니면 라운지 가서 쉴래?”

“면세점도 가 보고 싶고 라운지도 가 보고 싶어요. 라운지는 뭐예요?”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세원은 직원을 보내고 하빈과 함께 면세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둘러보던 세원은 명품관으로 들어가 신발을 골라 하빈에게 신겨 보며 어떠냐 물었다.

“어떻긴……. 예쁜데요?”

“살까? 사자.”

세원이 바로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빈은 영문도 모르고 세원과 커플 신발을 신게 되었다.

바로 신발을 갈아신고 나온 두 사람은 손에 신발을 들고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뷔페처럼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음료를 만들어 주는 직원도 서 있었다.

잘 모르는 하빈은 세원의 뒤를 쫓아 일단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먹고 싶은 거 가져다 먹어.”

세원은 태블릿을 꺼내 들었고 하빈은 그를 지켜보다 알겠다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나페나 과일 같은 음식들도 있었고 쿠키나 케이크도 종류가 다양했다.

“이건 뭐지?”

핫 푸드도 놓여 있는 곳을 발견한 하빈이 뚜껑을 열고 깐풍기 몇 개를 접시 위에 올려놨다. 맛있겠다……. 이것저것 챙겨 자리로 돌아온 하빈이 열심히 집어먹으며 세원에게 물었다.

“여기는 아무나 다 올 수 있어요?”

“아니, 좌석 등급에 따라서 티켓 있는 사람만 올 수 있어.”

“우리는 무슨 좌석인데요?”

“비즈니스.”

“좋은 거예요?”

“좋긴 좋은 거지.”

“그렇구나…….”

멀뚱멀뚱 세원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옆을 돌아봤다.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하거나 노트북을 만지고 있었다. 나도 뭘 할까……. 하빈이 고민하고 있는데 세빈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세빈아, 왜 울어.”

놀란 하빈이 세빈을 안아 들고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세빈은 하빈의 손길에 금세 진정하고 다시 품에 안겨 잠들었다. 하빈은 그제야 자신이 세빈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빈이가 날 가만히 놔두질 않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세원이 왜 그러냐며 고개를 들고 하빈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빈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익숙해진 일이었다. 엄마니까 다 감내해야지 뭐. 하빈은 그래도 이렇게 놀러 나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라운지에서 대기하던 두 사람은 출국 시간이 다 되어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문이 열릴 때 직원이 다가와 제일 먼저 입장시켜 준다며 하빈과 세원을 데려갔다. 서비스가 엄청 좋다. 하빈이 싱글벙글 웃으며 뒤따라 들어가자 지난번보다 더 넓은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웰컴 드링크와 넛츠가 나오고 하빈은 땅콩을 집어먹으며 세빈을 살폈다. 비행기 뜨면 울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편으로는 신기한 마음도 가득했다. 이제 비행기 타고 내리면 다른 나라에 가는 건가? 창밖을 바라보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빈이 내가 볼까?”

세원의 물음에 하빈이 괜찮다며 품에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세빈은 하빈의 품에 안겨 고롱고롱 잠을 자고 있었다. 이륙하기 시작하자 귀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세빈도 잠에서 깨어 칭얼거렸다.

“아이고, 우리 세빈이. 왜 이럴까. 응?”

“귀 아파서 그런가 봐.”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데……. 어쩌죠?”

“그냥 재워 봐. 아니면 나한테 넘겨. 내가 볼게.”

잠들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세빈을 보자 마음이 쓰린 하빈이었다. 고생하네, 우리 딸. 그렇게 아기를 보고 있는데 승무원이 다가와 하빈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기내식 서비스입니다. 고르시고 말씀해 주세요.”

“네? 네…….”

세빈을 진정시키고 기내식을 고르자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전채요리부터 시작해 메인요리, 디저트까지 코스로 이어지는 식사에 하빈은 얼떨결에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동안 세빈은 얌전히 앉아 하빈이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 받아 보는 기내 서비스에 하빈은 얼떨떨한 상태로 앉아 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승무원은 선물이라며 하빈에게 아기 인형을 하나 건넸다. 그에 하빈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귀엽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비행기에서 내리자 생소한 언어로 안내판이 적혀 있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게 작은 글씨로 한글이 적혀 있었다.

“여기 오면 길 잃어버리겠어요.”

“아냐, 다들 잘 찾아다녀.”

“그래도 모르는 글씨만 있으니까 무섭다.”

하빈이 두리번거리며 세원의 손을 붙잡았다. 세빈은 하빈의 목을 꼭 끌어안고 처음 와 보는 곳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했다.

일본 공항은 생각만큼 깨끗하고 생각보다 작았다. 두 사람은 호텔에서 모시러 나온 기사의 차를 타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짐을 먼저 내려놓고 놀러 나갈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넓은 룸이었다. 하빈이 기분 좋게 침대에 세빈을 눕혀 놓고 풀썩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너무 긴장했더니 벌써 피곤하다. 중얼거리자 세원이 뒤에서 다가와 옆에 앉으며 허리를 꾹꾹 주물렀다.

“왜 긴장까지 했어.”

“그냥 비행기로 해외 나오는 것도 처음이고 세빈이도 챙겨야 해서 긴장했어요.”

“그러게 내가 세빈이 본다고 했잖아.”

“세빈이가 내 말 더 잘 듣잖아요. 비행기에서 시끄러우면 민폐에요.”

하빈이 중얼거리며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이대로 잠들 것 같았다. 이미 비행기에서 너무 배부르게 먹은 탓에 배도 고프지 않았다.

“한숨 자고 저녁에 나갈까?”

세원의 물음에 하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그래도 돼요? 하고 물었다. 이미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입을 맞추며 다정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고맙다 중얼거리고는 발라당 누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원은 세빈을 엑스트라 침대에 눕혀 두고 하빈이 있는 큰 침대 위로 올라와 하빈을 끌어안았다. 하빈과 함께 눕고야 말겠다는 세원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빈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빈은 혼자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허공을 버둥거리며 장난을 쳤다.

하빈이 먼저 잠들고 세원은 그런 하빈을 조금 더 쓰다듬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빈의 밥을 먹였다. 분유도 먹이고 이유식도 먹일 때라 뭘 먹일지 고민하다 분유를 탔다.

“세빈이도 배고팠겠네.”

세원의 말에 세빈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옹알이를 하며 움직였다. 그랬어요? 세원이 맞장구를 쳐 주며 세빈에게 밥을 먹였다. 한가한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하빈은 밤이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같이 근처에서 뭐라도 먹고 오자는 세원의 제안에 온 가족이 밖으로 나왔다. 맛집을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열려 있는 가게 중 아무 곳이나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눈에 띈 곳이 꼬치 집이었다.

“일본은 꼬치가 맛있어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꼬치도 괜찮다며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세빈을 오래 안고 있던 터라 손목이 아팠다. 하빈이 손목을 붙잡고 끙끙거리자 세원이 세빈을 대신 안아 들고 하빈의 손을 붙잡았다.

“많이 아파?”

“아니,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닌데…….”

“무리하지 마.”

“네.”

다정한 그의 말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더 아파지면 안 되는데……. 하빈이 걱정하는 사이 세원이 꼬치와 생맥주를 시키고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주위에서는 이미 주문한 메뉴를 열심히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일본인들도 많이 오는 곳인 듯싶었다.

“여기 현지인들도 많이 오나 봐요.”

“그러게. 우리가 괜찮은 곳으로 왔나 보다.”

“맛있으면 좋겠다.”

얼마 기다리자 꼬치와 함께 생맥주가 나오고 맛있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와, 좋다. 하빈이 웃으며 세원을 바라봤다.

“얼른 먹어 봐.”

그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이름 모를 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뭐지? 알 수 없는 꼬치 하나를 입에 넣자 쫄깃쫄깃한 식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좀 물컹물컹한 것 같기도 하고…….

계속해서 씹던 하빈이 알려 달라는 듯 세원을 바라보자 그는 자기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뭘까요, 이게.”

“글쎄. 나도 모르겠네.”

“왜 모르는 걸 시켰어요?”

“나도 일본어 잘 몰라. 그냥 눈에 익은 거 아무거나 시켰어.”

당당한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야 그게. 하빈은 피식 웃으며 다시 꼬치를 한 입 넣고 씹으며 생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개운한 느낌이 온몸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아, 좋다. 하빈이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맛있다.”

“나도 먹어야겠다.”

“이거 먹어 봐요, 맛있어요.”

“거짓말 같은데.”

“진짜예요!”

하빈이 꼬치를 직접 먹여 주며 말했다. 그는 받아먹으면서도 의심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 날 못 믿을 수가 있어! 하빈이 투덜거리며 다시 맥주를 마시자 세원이 웃으며 하빈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장난이었어, 장난.”

“장난 아닌 거 다 알아요!”

“어떻게 알았지?”

“거봐요!”

두 사람이 장난스레 말다툼하는 동안 세빈은 세원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가게 안이 시끄러운데 잘도 자네. 하빈은 잠시 그런 세빈을 보다 핸드폰을 꺼내 세원과 함께 있는 세빈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런 건 사진을 찍어 줘야지. 한 컷에 담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여행 와서 좋아?”

그의 물음에 하빈은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좋죠. 세원 씨 아니었으면 제가 해외여행을 와 볼 수 있었겠어요?”

“더 좋은 데도 가고 싶은데.”

“앞으로 가면 되죠. 뭐가 걱정이에요.”

“그렇지? 앞으로 갈 일 많겠지?”

“네. 그러니까 지금을 즐겨요.”

잔을 부딪치며 하빈이 말했다. 세원은 좋다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야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세빈을 다른 침대에 재우고 큰 침대에 찰싹 붙어 누워 잠을 청했다. 아기가 깰 때를 대비해 한 사람은 선잠이 들어야 했다. 하빈은 자신이 자다 세빈이 울면 보겠다며 말했지만 잔뜩 취해 잠들어 버렸다. 결국 세원의 몫이 되고 말았다.

세원은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세빈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세빈은 자다가도 중간에 일어나 오줌을 싸고 울며 세원을 깨웠다. 세원은 졸린 와중에도 기저귀를 갈고 세빈을 재우며 아빠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하빈은 술기운과 잠기운으로 무거운 몸을 부스스 일으켜 세원을 바라봤다.

“잘 잤어?”

“……세원 씨, 세빈이 때문에 잘 못 잤죠. 내가 아기 봤어야 했는데.”

“네가 잘 잤으면 됐지. 나도 잘 잤어.”

“나 완전 푹 잠들어서 깨지도 않고 잤어요.”

하빈이 까치집을 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퉁퉁 부은 얼굴이 귀여워 세원은 연신 입을 맞췄다. 으응, 하지 말아요. 하빈의 말에도 세원은 쫓아다니며 뽀뽀를 해 댔다.

“귀여워 죽겠다.”

“뭐가 귀엽다고…….”

“너 귀엽다니까, 너.”

“취향 한 번 이상하다니까.”

중얼거리는 하빈의 말에 세원이 문가에 서서 말했다.

“내 취향이 이상한 거면 세상 사람들 다 이상한 거게?”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좋아해요? 그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다 널 보면 좋아할 거야.”

“너무 오버한다. 또, 또.”

익숙하게 받아친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세원은 뒤따라 들어와 양치질 중인 하빈의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사랑을 속삭였다.

귀찮을 법도 했지만 하빈은 그가 그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뒤를 돌아 젖은 손으로 세원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찬물 맞고 정신 차려요.”

“나 세수했는데.”

“또 해요.”

“싫어.”

“싫긴, 또 하라면 또 해요.”

하빈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원은 여전히 하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려 댔다. 그의 행동에 하빈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 거예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왜 그러냐며 모르는 척 떨어져 나와 옷을 벗었다.

“옷은 또 왜 벗어요.”

“갈아입어야 나가지.”

“우리 오늘 어디 가는데요?”

“오늘? 디즈니랜드.”

“우와, 디즈니랜드!”

“가서 놀이기구 탈 건데 아기 있어서 많이 탈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탈 수 있으면 좋겠다.”

“너 혼자라도 타.”

“에이, 혼자 타면 재미없을 텐데…….”

하빈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세원은 그래도 괜찮다며 하빈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하얗고 탱탱한 피부가 손 끝에 반질반질하게 닿았다.

“일단 세빈이 짐도 챙겨서 나가자.”

“네! 저 디즈니 영화도 많이 봐서 기대돼요.”

“예습이 철저해.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겠어.”

“저 공부 진짜 잘했는데!”

가방을 챙기다 말고 하빈이 돌아보며 말했다. 귀엽게 자랑하는 듯한 말투에 세원은 그렇냐며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원이 세빈을 안고 하빈이 가방을 짊어지고 숙소를 나섰다.

디즈니랜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놀이공원도 몇 번 가 본 적 없는 하빈으로선 모든 게 생소할 뿐이었다. 놀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자 세원이 자신을 놓치지 말라며 손을 붙잡았다.

“사람이 엄청 많아요.”

“그러게. 들어가서 일단 밥부터 먹을까? 배고프잖아.”

“놀이공원 안에서 파는 거 비싸지 않을까요? 밖에서 뭐 사 먹고 들어갈까요?”

“다 똑같아. 그냥 안에서 사 먹어.”

세원의 말에 하빈은 쫄래쫄래 따라 들어가 식당으로 향했다. 미키마우스 테마의 식당은 의자부터 식기까지 모두 미키마우스로 가득했다. 자리를 잡자 직원이 달려와 세빈이 앉을 아기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서비스가 좋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메뉴판을 보았더니, 가격이 하나같이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만 원이 넘어갔다.

“비싸다!”

“뭐가 비싸. 뭐 먹을래?”

“몰라요. 가격만 알아볼 수 있고 메뉴는 하나도 못 읽겠어요.”

까막눈이 되어 버린 하빈이 그저 세원을 바라봤다. 세원은 웃으며 알아서 주문하겠다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져오겠지, 뭐. 하빈은 그 틈에 미리 이유식을 꺼내 세빈에게 밥을 먹였다. 세원이 오기 전에 다 끝내 놓을 생각이었다.

사람이 많아서 주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세빈에게 밥을 다 먹이도록 세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하빈은 세빈에게 과일까지 먹이고 지금은 놀아 주고 있었다.

세빈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하빈의 손을 붙잡으려 애를 쓰고, 하빈은 잡히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이게 뭐가 재밌는 건지 아기들의 세계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하빈은 열심히 세빈과 놀아 주었다.

“사람이 많아서 오래 걸렸어.”

“메뉴를 아예 받아 오는 거예요?”

“어. 그렇더라고.”

한참만에 세원이 양손에 식판을 들고 돌아왔다. 식판을 각자 앞에 하나씩을 놔두고 밥을 먹었다. 하빈은 함박스테이크였고 세원은 치즈 돈가스였다.

하빈이 함박스테이크를 먹다 말고 세원을 바라보자 그는 알겠다는 듯이 돈가스를 하나 집어 하빈에게 내밀었다. 맛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하나 받아먹고 자신의 함박스테이크를 내밀자 그도 받아먹고. 두 사람이 정답게 음식을 나눠 먹었다.

놀이기구는 예상대로 많이 타지 못했다. 아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오랫동안 줄을 서야 했다.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했던 하빈은 참지 못하고 그냥 다른 곳이나 구경하자며 세원을 이끌었다.

다른 건 몰라도 퍼레이드는 꼭 보고 가자는 세원의 고집에 하빈은 피곤하지만 알겠다며 어서 빨리 퍼레이드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해가 지고, 드디어 기다리던 디즈니랜드의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동화 속 공주나 왕자, 요정처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불빛으로 장식된 조형물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행렬이 움직이며 거리를 눈부신 빛깔로 물들이고,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하빈은 마음을 빼앗겼다. 세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멋지게 폭죽이 터지는 순간, 세원은 하빈의 손을 붙잡았다.

“하빈아.”

“네?”

진지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하빈이 돌아보자 그의 따뜻한 손이 제 손을 덮어 왔다. 뭐지? 손을 내려다보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조심스레 뺨을 쓰다듬었다.

“어디 가서 분위기 잡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데서 말하고 싶어서.”

“……뭐예요?”

“나랑 결혼해 줘.”

놀랍게도, 그는 지금 자신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다.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세원이 다가와 천천히 입을 맞췄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그와의 입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빈은 멍하니 깜빡이다 천천히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다.

* * *

세원의 턱시도는 세원의 어머니와, 그리고 자신의 턱시도는 지환과 각각 맞추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 결혼 준비를 하기로 하고 돌아섰을 때 제일 먼저 지환은 청혼받은 이야기를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소름이 돋는다며 연신 하빈의 팔뚝을 때려 댔다. 하빈은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며 형에게 짜증을 냈다. 나는 좋기만 한데.

“형은 형부가 어떻게 청혼했는데!”

“몰라도 돼.”

“왜!”

“비밀이야.”

“나도 알려 줘. 내가 알려 줬잖아.”

두 사람은 카페에 마주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아직도 프로포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세빈은 내내 지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환은 싫다며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하빈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아, 나는 그냥 레스토랑에서 결혼하자고 사문 씨가 청혼했어.”

“뭐야, 너무 평범하잖아.”

“평범한 게 좋지, 괜히 겉멋만 부리는 것보단!”

“나처럼 로맨틱한 게 좋지!”

“야,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야.”

“헹, 형이 지금 나 부러워서 그러는 거 다 알거든.”

하빈이 혀를 내밀고 지환을 놀렸다. 마냥 어린 모습에 지환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러고도 애 엄마라니. 나이를 어디로 먹었니?”

“내가 뭘!”

“하여간 너 결혼 준비 제대로 해야 해. 돈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네 돈 써?”

“아니, 세원 씨가 쓰라고 준 카드 있는데. 그거로 하면 돼.”

“줘 봐.”

“왜?”

“그걸로 우리 밥부터 먹자.”

당당한 지환의 말에 하빈이 웃으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자며 한우 집을 찾은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세빈은 자리에 눕혀 두고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자 입을 뻐끔거리며 혼자 장난을 쳤다. 아이고, 귀여워라. 하빈이 세빈과 놀고 있자 지환이 말을 걸었다.

“그럼 결혼식장이나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건 세원 씨 어머니가 다 해 주시기로 했어.”

“신혼여행도?”

“우리 신혼여행 가려나?”

“가야지, 그럼 안 가냐?”

고기를 놓아 주며 지환이 말했다. 그런가……. 하빈이 중얼거리며 고기를 열심히 받아먹었다. 앞으로 세원과 여행을 자주 가기로 한 터라 신혼여행을 따로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오늘 집에 가서 물어볼까. 하빈이 오물거리며 고기를 먹고 있는데 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혼여행 가면 세빈이는 어떡해?”

“뭘 어떡해? 데려가야지.”

“놓고 가야지. 신혼여행이면.”

“왜!”

“당연히 놓고 둘만 다녀와야지, 어떻게 데려가.”

“어떻게 놓고 가. 데려가야지.”

잠시 티격태격 말다툼이 일었다. 지환은 한숨을 푹 쉬며 집게를 휘둘렀다.

“네가 뭘 모르는데 신혼여행이면 신혼부부 둘만! 가는 거야.”

“난 애가 있으니까 애도 같이 가야지.”

“네 시부모님이 봐주시겠지.”

“어떻게 맡겨.”

“몰라. 알아서 해.”

어깨를 으쓱이며 지환이 고기를 낼름 집어먹었다. 얄미운 모습에 하빈이 발로 지환을 걷어차며 짜증을 냈다. 지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고기 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세빈이를 놓고 둘만 여행 다녀와야 하나……. 하빈이 옆에 누워 있는 세빈을 힐끔 돌아봤다. 혼자서도 잘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놓고 가도 되려나 싶다가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턱시도는 골라 줄 거야?”

“엄청 좋은 거로 고를 거야.”

“왜……. 세원 씨도 그렇게 좋은 거로 안 할 것 같은데.”

“걔가 뭘 하든 넌 좋은 거로 해야지. 넌 내 동생인데.”

“너무 유난 떨지 말자, 어?”

“뭐가 유난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아, 진짜 형 때문에…….”

“내가 뭘.”

당당한 지환의 모습에 하빈이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오버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환은 유명한 브랜드가 있다며 밥을 먹고 가 보자고 말했다. 하빈은 억지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고기를 잔뜩 먹었더니 배가 불러, 바로 옷가게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잠시 걷기로 했다. 근처 공원에 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조금 자란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어 노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세빈이도 크면 저렇게 예쁘겠지. 하빈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지환은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냐며 물었다.

“저기 애들 너무 예뻐서 구경하고 있었어.”

“뭐가 예쁘냐.”

“예쁘지 뭐. 세빈이도 크면 저렇게 뛰어다닐 텐데.”

“세빈이야 예쁘지만.”

다른 아기들은 싫다면서도 제 조카는 끔찍하게 예뻐하는 지환이 그저 웃긴 하빈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더운 기운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하빈은 남방을 풀어헤치고 옷을 펄럭이며 가만히 앉아 옆에서 지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난 그래도 네 인생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잘 풀려서 다행이다.”

“잘 풀린 건가?”

“풀린 거지. 강세원 안 만났으면 팔자 펼 일도 없었지.”

“그러게. 형이 시켜서 간 거 아니었으면 세원 씨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다 내 덕분이네.”

“그 정도까진 아니고.”

하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뭐가 아니냐며 하빈의 팔뚝을 퍽 때렸다. 세빈은 지환의 품에 안겨 버둥거리며 제 엄마에게 간다고 조르고 있었다. 하빈은 그 모습에 세빈을 다시 안아 들고 토닥이며 지환에게 말했다.

“형은 처음에 나 세원 씨랑 만나는 거 반대했잖아.”

“당연히 반대하지. 너 같으면 네가 만났던 사람하고 내가 만난다고 하면 쌍수 들고 환영할래?”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난 그래서 속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세원 씨랑 잘 돼서 형한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아. 아기 생겼을 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는데.”

“너만 그랬겠니? 난 어땠을 것 같아, 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철이 없어서 대형 사고를 쳤는데.”

“내가 왜 철이 없어?”

“철이 들었으면 네가 집을 나가질 않지.”

“책임지려고 나간 거지!”

두 사람이 또다시 언성을 높이며 투닥거렸다.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하빈은 투덜거리며 형을 바라보다 됐다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결혼해서 나보다 잘 사는 모습 보니까 좋네.”

“형도 잘 살아야 해. 지난번에 부족하다는 돈은 어떻게 처리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했어.”

“어떻게 했는데?”

“네 방 빼면서 받은 보증금이랑 대출 좀 더 껴서 얼른 갚았어.”

“혹시라도 급하다고 사채 같은 거 쓰지 마.”

“그런 거 안 해.”

지환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반응에 조금 안심이 된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옷 고르러 가자. 하빈이 세빈을 안고 먼저 이동하자 지환이 세빈의 짐가방을 들고 뒤를 따라왔다. 짐이 왜 이렇게 많냐? 중얼거리는 소리에 하빈은 원래 아기들 짐이 많다며 그냥 들고 따라오라고 대답했다.

예복을 맞추러 간 곳에는 화려한 턱시도부터 시작해 깔끔하고 단아한 턱시도까지 다양한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하빈은 직원들이 입혀 주는 옷을 걸치고 어색하게 거울을 바라봤다.

옷을 하얀색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입고 있던 자켓을 내려놓고 하얀색 턱시도가 있는 쪽으로 향하자 지환이 왜 그러냐며 물었다.

“나 하얀색으로 입어야 할 것 같아서.”

“왜?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그래도. 세원 씨도 하얀색 입으면 맞춰야지.”

“뭐 어때. 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나도 흰색이 좋아.”

하빈이 이것저것 골라 보다가 깔끔한 디자인의 예복 하나를 보고는 직원에게 피팅을 부탁했다. 옷을 입어 보자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듯했다. 하빈이 지환에게 보여주며 어떻냐 물었다.

“괜찮네. 잘 어울려.”

“이거로 할까?”

“그래, 그거로 해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빈은 이걸로 하겠다며 사이즈를 조정하고 결제까지 마쳤다. 그제야 엄마를 찾는 착한 딸 덕분에 쇼핑이 어렵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예쁜 세빈이. 하빈이 다가가 입을 맞추자 세빈이 작고 고운 손으로 하빈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그렇게 좋아요?”

“엄마가 좋겠냐, 그냥 다 좋은 거지.”

“내가 좋은 거야, 형이 뭘 몰라서 그래.”

“뭘 모르긴 뭘 몰라.”

“엄마랑 아기는 통하는 게 있다니까? 모르면 빠져.”

있는 대로 자랑을 하며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환은 못 볼 꼴을 봤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직원들은 그런 하빈과 세빈이 귀엽다며 다가와 아기를 구경했다.

예복을 다 맞추고 밖으로 나오자 큰일을 해낸 것 같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형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지환은 결혼식 전에 한 번 더 보자며 어깨를 토닥였다.

“결혼식은 세원 씨 어머님이 준비하시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을 것 같아.”

“크게 하신대? 작게 하신대? 나 주변에 얼마나 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겠어. 세원 씨는 작게 한다고 했는데 세원 씨 어머니가 그렇게 안 하신다면 아닌 거니까……. 난 초대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 큰일이야.”

하빈이 울상을 하자 지환은 왜 그러냐며 하빈을 끌어안았다.

“원래 이런 건 어른들 지인 오고 그러는 거야. 넌 애들이니까 괜찮아.”

“형은 뭐 얼마나 어른이라고…….”

“내가 너보다 몇 년을 더 먼저 일했는데.”

“거야 그렇지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네 결혼에나 신경 써.”

지환의 말에 하빈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형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 세원이 먼저 집에 들어와 있었다. 하빈이 놀라 헐레벌떡 다가서자 세원이 왜 그렇게 놀랐냐며 오히려 하빈을 달랬다.

“왜 그렇게 놀랐어.”

“세원 씨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오늘 어머니랑 식사하고 옷 맞춘 김에 일찍 집에 왔지.”

“세원 씨도 오늘 옷 맞췄어요?”

“어. 하빈이 너도 오늘 했어?”

“네!”

“예쁜 걸로 잘 맞췄어?”

“네. 형이랑 골랐어요.”

“잘했네.”

세원이 칭찬하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빈을 안아 든 그는 목욕을 시켜야겠다며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온종일 세빈과 함께 다니느라 신경 쓴 통에 녹초가 된 하빈은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 그대로 엎어졌다.

“아, 피곤해…….”

“많이 피곤해?”

아기 욕조에 물을 받아 두고 밖으로 나온 세원이 물었다. 하빈은 잔뜩 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자야 하는데 씻을 기운도 없어요……. 중얼거리자 세원이 그럼 너도 들어오면 씻겨 주겠다며 욕실로 손짓했다. 진짜 들어가 버려? 하빈이 웃으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진짜 들어가 버릴 거예요.”

“오라니까? 씻겨 줄게.”

“됐어요……. 금방 씻으러 들어갈 거예요. 세원 씨는 가서 세빈이나 열심히 목욕시켜요.”

하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세원은 세빈을 씻기러 가 버리고 하빈은 끙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고 안방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더운 날이어도 샤워는 꼭 따뜻한 물로 해야 했다. 뜨거운 물이 온몸을 적셔 내리자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온천이라도 다녀오고 싶다. 욕조에 물이라도 받고 입욕제라도 할까……. 생각하던 하빈이 후다닥 씻고 나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니 뭐니 해도 이불 속이 최고였다.

세원이 세빈을 데려와 하빈의 옆에 눕히고 침대에 걸터앉아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머리칼을 털어 내며 감기에 걸리겠다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빈은 괜찮다며 턱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피곤해?”

“네…….”

“얼른 자. 세빈이 금방 재우고 올게.”

“세빈이 목욕하면 좋은 냄새 나는데.”

하빈이 옆에 누워 있던 세빈을 끌어다가 제 얼굴에 가져다 대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콧속에 아기 냄새가 가득 들어왔다. 뭐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보송보송한 냄새가 좋았다.

하빈이 헤실헤실 웃으며 세빈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세원이 그만 자라며 세빈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져와 입을 맞췄다.

“세빈이는 왜 뺏어가요?”

“나랑 하면 되잖아.”

“세빈이랑 하고 싶은데!”

“나는?”

“세원 씨도 좋지만…….”

말끝을 흐리자 세원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하면 그가 정말 삐칠 것 같았다. 하빈이 웃으며 세원의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술을 찍으며 어서 다녀오라 속삭였다. 세원은 하빈의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고 있어, 금방 올게.”

“네.”

눈을 감자 금방 잠이 쏟아졌다. 폭신한 침대가 자신을 푹 끌어안는 느낌이었다. 하빈은 매트리스에 파묻혀 잠을 자다 말고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에 세원이라 생각하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역시나 잠결이었지만 늘 맡아 오던 익숙한 페로몬 향기가 느껴졌다.

* * *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떨리는 마음이 반, 기대되는 마음이 반이었다.

크게 결혼식을 하진 않지만 올 사람은 다 올 거라는 말에 괜스레 긴장되는 하빈이었다. 지난번에 그 친구라는 사람들도 오는 걸까? 하빈은 묻고 싶었지만 세원도 신경 쓰게 만드는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했겠거니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 쪽 하객은 정운을 비롯하여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이었다. 오랜만에 갑자기 연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억하고 기꺼이 결혼식에 와 준다는 말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화장을 받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지환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옷 태가 산다.”

“화장을 해서 그런가.”

“사진 찍으면 딴사람 같겠는데?”

“아, 진짜.”

놀리는 형의 말에 하빈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세빈은 세원의 어머니가 봐주고 있었는데, 울지도 않고 잘 있는지 밖은 사람들 소리만으로 시끌벅적했다. 하빈이 지환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냐고 묻자 그는 꽤 많이 왔다며 놀란 표정을 했다.

“근데 돈 많은 사람들이 엄청 오더라.”

“뭐?”

“아니, 강세원 결혼 축하해 주려고 무슨 기업들 여기저기에서 화환도 보내고 장난 아니야, 지금.”

“진짜? 나 궁금해, 볼래.”

“문 살짝 열고 봐봐.”

대기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자 세원의 자리 옆으로 화환이 잔뜩 서 있었다. 와, 우리랑 비교된다……. 하빈은 멀뚱멀뚱 보다 다시 문을 닫았다. 우리도 우리 돈으로 화환 같은 거 하나 신청할 걸 그랬나? 하빈이 말하자 지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똑똑한데?”

“그치. 우리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잖아.”

“아냐, 안 그래도 자리 없어서 강세원네 쪽에 온 거 우리 쪽에도 놨어. 괜찮아.”

“멋있네…….”

하빈이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세원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 그냥 나가 보면 안 되나?”

“나와! 강세원도 나와서 사람들 만나고 돌아다니던데?”

“아, 진짜?”

“어. 인사하고 바빠. 오는 사람 중에 거물급 사람들이 많나 봐. 근데 다들 와서 강세원네 아빠한테 인사하고 그래.”

“뭔가 대단하다…….”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있던 하빈이 지환을 따라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나 없을 때 누가 찾진 않겠지? 하빈이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세빈이 있을 세원의 대기실로 향했다. 할머니, 즉 세원의 어머니와 놀고 있던 세빈은 하빈이 나타나자 엄마를 봤다며 좋다고 팔을 흔들었다.

“왜 나왔어? 안에서 쉬고 있지. 이따 결혼식 하려면 피곤할 텐데.”

“세원 씨도 나와서 돌아다닌다고 하고……. 저도 심심해서요.”

“그랬어? 이리 와서 앉아. 밖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세빈이가 힘들까 봐 안에 들어와 있는 중이야.”

“세빈이가 어머님 손에 잘 있네요.”

“그러게, 예쁘네.”

세원의 어머니가 세빈을 안아 들고 예쁘다며 등을 쓰다듬었다. 세빈은 그런 세원의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좋다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밖은 더 시끄러워져 있었다. 하빈이 세원의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결혼식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지환이 문을 열었다.

“하빈아, 친구들이 너 찾는다.”

“어, 진짜? 어머님, 저 가 볼게요.”

“그래. 이따 보자.”

하빈이 후다닥 대기실로 돌아가자 친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모두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함께 하던 친구들이었다. 반가운 얼굴들에 만나자마자 손을 붙잡고 방방 뛰자 친구들은 사고까지 쳐 놓고 뭐가 그렇게 좋냐며 하빈을 타박했다.

“넌 어떻게 소식 하나 없다가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냐?”

“뭐가?”

“어떻게 저 집안이랑 결혼해!”

“응? 나도 몰라…….”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은 다들 놀랐다며 하빈에게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다. 하지만 하빈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정운만이 웃긴다는 표정으로 하빈을 지켜봤다.

친구들도 식장에 들어가 있겠다고 대기실을 빠져나가고 하빈은 혼자 남아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님이 없는 하빈이 혼자 입장하려 하자, 세원의 아버지가 함께 입장을 해 주기로 했다.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뒤이어 자신이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세원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박수 소리가 들리고 환한 조명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세원의 아버지는 하빈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괜찮다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주례대 앞까지 도착한 하빈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세원의 아버지가 하빈을 안아 주고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뒤이어 세원이 입장하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주례 앞에 섰다.

줄줄이 이어지는 주례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맹세합니까?’ 하는 소리만 들려 세원을 따라 네! 하고 대답했다. 뒤에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자 지환이 제 결혼식을 보며 눈물을 콕콕 찍어 내고 있었다. 저 형은 이 좋은 날에 왜 청승맞게 울고 그래……. 하빈도 울먹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세원의 부모님께 먼저 절을 올리고 다음으로 지환에게 다가가는데 결국 자신도 왈칵 눈물이 나 버렸다. 하빈이 훌쩍이자 세원이 눈물을 닦아 주며 어깨를 감싸 안고 한참을 토닥였다.

“형 고마워…….”

하빈이 한마디를 하자 지환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생각하며 하빈이 제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 앞에 서자 세원이 하빈의 얼굴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지? 궁금해할 새도 없이 세원이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우응, 읏!”

진한 키스가 이어지고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진 하빈이 급하게 세원의 손을 붙잡았다.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맹세하는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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