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사랑의 훼방꾼들 (16/20)

16. 사랑의 훼방꾼들

세원이 출근하고 하빈이 혼자 집에 남아 있는 동안 할 일이 없어 뒹굴뒹굴하는 건 일상이었다. 요가를 하는 것도 지루했고 책을 읽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동네로 산책하러 나가기에는 무서웠다. 전부터 지나가던 사람들과 얽혀서 누군가 따라온다든가 하는 일이 잦았던 터라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탓에 오늘도 소파에 누워 티비 채널만 돌리고 있는데 때마침 재미있는 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 아빠들이 엄마들이 없을 때 아기들을 돌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오고 있었다.

하빈은 티비 속 귀여운 아기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우리 아기도 저렇게 예뻤으면 좋겠다. 단지도 세원 씨랑 저렇게 잘 지내면 좋겠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티비를 보던 하빈이 세원을 생각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기들이 아빠 일하는 곳에 가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나도 심심한데 세원 씨가 일하는 곳에 가면 안 되나?

처음 하빈이 세원을 만나게 된 것도 회사 이사실로 찾아가게 된 덕분이었다. 이번에도 간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빈은 싱글벙글 웃으며 옷을 챙겨 입고 지갑을 들었다. 세원이 사 준 명품 지갑에는 그가 가지고 다니라고 준 카드 하나만이 들어 있었다.

하빈은 덜렁덜렁 지갑 하나를 챙겨 든 채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하빈이 탄 택시는 곧장 세원의 회사로 향했다.

쏟아질 듯이 높은 빌딩은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자신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하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빈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 안내데스크에 말을 걸었다.

“강세원 이사님 만나러 왔는데요.”

안내원은 하빈을 쭉 훑어내리고 잠시 기다리라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구라고 말씀드릴까요?”

“김하빈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제 이름을 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올라오시라고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차단기가 열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사람들이 제 차례를 기다렸다. 하빈도 사람들 사이에 껴서 가만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19층까지 올라가는 길은 짧고도 길었다.

띵, 하빈이 탄 엘리베이터가 이사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와인색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비서가 미리 나와 하빈을 안쪽으로 에스코트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세원은 데스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빈이 다가가자 세원이 책상에 턱을 괴고 올려다보며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 일로 우리 하빈이가 여기까지 먼 걸음을 했을까?”

“세원 씨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네.”

“이리 와 봐.”

세원이 제 무릎을 두드렸다. 하빈이 냉큼 그 위로 올라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폭 안겨 있자 심장이 콩닥거리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분 좋다……. 하빈이 눈을 감고 그의 향기를 맡으며 더욱 품을 파고들었다. 세원은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나 보러 오니까 좋네. 저기 소파에 누워 있을래?”

“네. 내가 세원 씨 방해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저기에서 쉬고 있어. 심심하면 이걸로 게임하든가.”

“저 세원 씨가 핸드폰 바꿔 줘서 이제 세원 씨 핸드폰으로 안 해도 돼요.”

제 핸드폰을 주는 세원을 거절하고 하빈이 주머니에서 자신의 최신형 핸드폰을 꺼내며 자랑했다. 세원은 웃음을 터뜨리며 하빈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잘됐네. 가서 게임 하고 있어.”

“네.”

그렇게 하빈이 세원의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세원의 인터폰이 울려 댔다. 세원은 전화를 받아 무어라 대답하며 잔뜩 짜증을 내고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놨다.

무슨 일이지……. 하빈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뒤를 돌아봤다. 세원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회사 일에 뭐가 문제가 생겼나? 괜히 자신이 와서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진 하빈이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원의 이사실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잘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나 잘났소’하는 포스를 뿜는 남자였다. 그가 다가와 세원에게 말을 걸었다.

“강세원,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해?”

“누가 멋대로 들어오래. 안 꺼져?”

누구지……. 하빈이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는 하빈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세원에게 다가갔다. 세원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특별히 널 보러 여기까지 왔건만 사람을 보고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네가 뭔데. 난 너 볼일 없어. 좋게 말할 때 가라.”

“싫어. 오늘 저녁이나 같이하자.”

“꺼지라고 했지. 가드 불러서 끌어내기 전에 네 발로 나가.”

딱 봐도 세원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에 하빈이 가만히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원은 그제야 하빈을 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하빈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뭐야? 웬 임신한 오메가가 여기 있어?”

“누구예요?”

남자의 물음에 하빈도 지지 않고 세원에게 물었다. 세원은 한숨을 푹 쉬며 하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소파에 앉히며 하빈의 배를 쓰다듬었다.

“별것 아닌 놈이야. 그냥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마저 해.”

“세원 씨한테 저렇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뭐야, 저렇게 마누라처럼 말하는 꼴은. 누군데 너한테 저래?”

양옆에서 조잘거리는 통에 세원은 정신이 없었다. 하빈은 잔뜩 울상을 하고 세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바람피우는 거예요? 하빈이 묻자 세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하빈을 남자와 떨어뜨리고 제 등 뒤로 숨겼다.

“야, 꺼지라고 했지. 너 때문에 오해하잖아.”

“내가 왜 꺼져. 밥이나 한 끼 하자니까?”

“내가 왜 너 같은 새끼랑 밥을 먹어. 난 너랑 밥 먹을 생각 없다고. 나가.”

세원이 남자를 내쫓듯 어깨를 잡아 돌렸고, 남자는 휘청거리면서도 세원에게 들러붙었다. 하빈은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봤다.

세원은 결국 가드를 불렀다. 가드들에게 붙들리고 나서야 남자는 제 발로 나가겠다며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의 손을 뿌리쳤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비싸게 굴든 뭐든, 나 곧 결혼하니까 짜증 나게 달라붙지 마.”

“뭐?”

세원의 말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빈을 바라봤다.

“쟤랑?”

방금 ‘쟤’라고 그랬어? 하빈이 혀를 찼다. 예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하빈은 짜증스럽게 남자를 노려보며 배를 감쌌다.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데 세원이 대답했다.

“쟤라고 하지 마. 나랑 결혼할 사람이니까. 너한테 그렇게 불릴 사람 아니야. 알아들었으면 얼른 꺼져.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이거 소문나도 돼? 다 말하고 다닌다?”

“말하든가 말든가.”

세원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빈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방을 나섰다. 하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원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누군데 세원 씨한테 저러는 거예요? 나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예전에 알던 앤데 나한테 자꾸 달라붙는 새끼야. 조금 친하게 지냈었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거야.”

“그래도…… 어디 가서 소문내고 다니겠다는데…….”

“소문내서 나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너랑 결혼하는 거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치만 걱정되는데…….”

“괜찮대도. 걱정하지 마.”

세원이 하빈을 달랬지만 하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괜한 걱정이면 좋겠다.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나 때문에 세원 씨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세원은 그런 하빈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분위기를 풀어 주려 애를 썼다.

“오늘은 외식하고 들어갈까? 뭐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갈래?”

“……배가 별로 안 고파요.”

“그래도 굶으면 안 되지. 아기도 있는데 건강하게 잘 챙겨 먹어야지. 응?”

“네…….”

“뭐 먹을래? 고기 먹을까? 아니면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냥 간단하게 먹고 싶어요.”

하빈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세원이 하빈에게 손을 뻗었다. 여전히 걱정에 빠져 있던 하빈이 그 손을 꼭 붙잡고 세원의 뒤를 따랐다. 어린애처럼 따라오는 하빈의 모습이 마냥 귀여운 세원이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걱정만 가득 안고 끌려가듯 식당으로 향했다.

“내려. 간단하게 먹자고 해서 여기로 왔어.”

“뭐예요?”

“국수 먹자고. 어때?”

“좋아요.”

막국수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먼저 주문을 하고 수저를 놓았다. 밑반찬이 나오기 무섭게 하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가 고파져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세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 남자는 누구길래 세원 씨한테 그러는 거예요?”

“나랑 같이 어울려 다니던 애 중 한 명인데 아직도 옛날처럼 그러고 사는 거야. 철이 안 들었어.”

“……세원 씨도 옛날에는 저렇게 막무가내로 살았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튼…….”

세원이 말끝을 흘렸다. 하빈은 새초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열무김치를 씹었다. 맞는 것 같은데……. 예리한 눈초리에도 그는 고개를 돌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국수가 나오고 하빈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세원은 천천히 먹으라며 만두도 시켜 줄까 물었다.

“만두도 먹고 싶어요.”

“그럼 만두도 시키자.”

“좋아요.”

만두 한 접시를 시켜 나눠 먹고, 더는 간단하다고 말할 수 없는 저녁식사를 마친 둘은 어쩐지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세원이 산책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한강을 따라 걸으며 바람을 느꼈다.

운동을 하자 소화도 되고 가라앉았던 기분도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하빈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안 좋았는데 지금은 좀 좋아졌어요.”

“나 때문에 기분 안 좋았지.”

“그 남자 때문에 안 좋았지 세원 씨 때문에는 아니었어요.”

“그게 나 때문이지 뭐.”

“그런가? 세원 씨 때문인가?”

하빈이 살짝 노려보자 세원이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미안해. 사과하는 목소리가 다정해 또 금세 마음이 풀렸다. 하빈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커플들도 자신들처럼 깨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강변에는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술 마시고 싶다.”

“술 마시고 싶어?”

“네…….”

“그러고 보니 임신해서 술 못 마신 지 오래됐지.”

“그러게요.”

하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세원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만 더 참으라 달랬다.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기를 위해서라면야……. 지금은 그 무엇보다 아기가 중요했다.

“근데 그 사람이 세원 씨 결혼하는 거 소문낸다고 했잖아요. 어디에 소문낸다는 거예요? 소문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냥 친구들 사이에 소문낸다는 거야. 소문내면 나 결혼하는 거 다 알겠지, 뭐.”

“그게 끝이에요?”

“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어차피 부모님도 다 아시는데 뭐 어때.”

“그런가?”

“그치. 걱정할 거 없어.”

세원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원 씨 부모님도 다 아시니까 정말 상관없는 건가? 자신은 알 수 없는 세계에 하빈은 그저 세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넌 그냥 있으면 돼.”

“세원 씨만 믿을 거예요.”

“그래. 나만 믿으면 돼.”

“……그 사람이 세원 씨한테 계속 같이 밥 먹자고 한 거 생각하면 조금 화나지만.”

“그건 걔가 이상한 새끼라서 그래.”

하빈을 토닥이며 세원이 말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한 쪽은 오히려 하빈이었다. 자신은 도움이 되지 못하니 민폐라도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볍게 샤워를 하고 잠을 잘 준비를 한 뒤 눕자 세원이 다가와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사무실에 놀러 와 줘서 기분이 좋았다며, 다음에 올 때는 힘들 테니 미리 말을 하면 차를 보내 주겠다는 그의 말에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아서였다.

“괜찮아요. 내가 애도 아니고.”

“그래도 차 보내는 게 마음도 편하니까.”

“그래요? 그럼 말할게요.”

세원 씨가 마음이 편한 쪽이 좋겠지. 하빈이 세원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세원이 먼저 잠들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을 때 콩닥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은 가만히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 * *

지난번의 전화 이후 오랜만에 지환을 만나 점심을 같이하기로 한 날이었다. 집 앞까지 데리러 온 형의 차를 타고 시가지로 나온 두 사람은 어디로 갈까 하다 지환의 추천으로 맛이 있다는 짜장면집으로 향했다.

하빈은 자장면을 시키고 지환은 짬뽕을 시킨 뒤 탕수육도 하나 추가해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동안 하빈은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여기 되게 넓다.”

“중국집치고는 되게 세련되지 않아?”

“그러게. 맛집이야?”

“어. 너 데려오려고 맛집 알아보고 온 거야.”

“우와……. 맛있겠다. 빨리 먹고 싶어.”

하빈이 입맛을 다시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지환은 그런 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너 강세원네 집에 갔다 온다고 했을 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아아. 나도 걱정 많이 했는데 가족분들이 생각보다 친절하시더라고.”

“그랬어? 다행이네. 강세원만큼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봐.”

“세원 씨도 싸가지 없진 않은데.”

“너한테나 그렇겠지, 다른 사람한테는 얼마나 재수 없게 구는지 알아?”

“몰라…….”

하빈이 식초를 뿌린 단무지를 하나 집어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혀를 끌끌 차며 하빈을 나무랐다.

“하여간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네 꼴이 딱 그 짝이네.”

“내가 세원 씨 편을 들어야지 그럼 여기서 누가 세원 씨 편을 들어.”

“너도 아주 극성이다, 극성이야. 형 앞에서까지 그래야겠냐?”

“내가 뭘. 형도 형부랑 결혼하기 전에 이랬잖아.”

“내가 언제!”

“이랬어. 형도 콩깍지 껴서 맨날 자랑하고 그랬어.”

“안 그랬거든.”

시치미를 뚝 떼는 지환에 하빈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딱 그 짝이네. 이럴 때는 형제가 많이 닮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빠르게 주문했던 메뉴가 나왔다. 먼저 탕수육이 나오고 하빈은 신이 난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탕수육 엄청 맛있겠다.”

“많이 먹어. 이 집이 탕수육도 맛있대.”

“그럴 것 같이 생겼네. 탕수육이 생긴 것부터 맛있어 보여.”

“그치? 일부러 너 데려오고 싶었다니까.”

지환이 뿌듯한 얼굴로 하빈을 바라봤다. 하빈은 젓가락으로 탕수육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왔다. 달콤한 소스와 함께 바삭한 튀김옷이 씹히고, 이어지는 쫀득한 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와 진짜 맛있다. 눈을 크게 뜨고 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랑 가면 거의 다 맛집인 것 같아.”

“아까도 말했잖아. 내가 너 맛있는 곳 데려가려고 맛집만 찾아본다니까.”

“역시 형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데 가보겠어.”

“나밖에 없지?”

뿌듯한 얼굴로 자신도 젓가락을 드는 지환의 모습에 하빈이 미소 지었다.

형이 자신을 챙겨 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잔소리하고 들들 볶고, 그러다가도 철딱서니 없는 형처럼 귀찮게 구는 것도 잊지 않는 지환에게 짜증이 나다가도, 때때로 보여주는 이런 자상하고 살가운 모습에 마음이 풀리는 하빈이었다. 그래도 나한텐 형밖에 없지.

“형.”

“왜?”

“형은 결혼했는데 아기 안 낳고 싶어?”

“나? 나는 별로.”

“그러고 보니까 형은 애들 별로 안 좋아하지.”

“어. 난 사문 씨랑 둘이 있는 게 좋아.”

“하긴……. 형은 신혼 생활 즐기는 게 더 좋다고 했으니까.”

“응. 너야 임신해서 결혼하게 된 거니까 아기 있는 것도 좋겠지만 난 결혼 먼저 해서 그런지 아기 욕심이 별로 없어. 그리고 양육비가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지금 난 그렇게 돈이 여유가 없으니까. 아기 키우는 것도 다 돈이야.”

지환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기 키우는 것도 다 돈이지…….

세원이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혼자 고생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검사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는데 그 비용을 감당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세원이 없었더라면 하빈은 무거운 몸으로 일을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나 세원 씨 안 만났으면 지금쯤 일하고 있었을지도.”

“내가 돈 대줬겠지. 임신한 몸으로 너 일하게 놔뒀겠어?”

“그래도 형이 어떻게 다 대줘. 내가 해결해야지. 내가 벌인 일인데.”

“그러게 내가 진작 지우라고 할 때 해결했으면!”

“형, 애가 다 듣는다니까.”

핀잔을 주는 하빈의 말에 지환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말은 잘 듣는 지환이었다. 얌전히 탕수육만 먹고 있는 두 사람 앞으로 짜장면과 짬뽕이 나왔다. 하빈은 지환이 시킨 짬뽕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국물 마시고 싶어?”

“응. 한 모금만.”

“가져가서 마셔.”

하빈이 냉큼 그릇을 받아 국물을 호로록 마셨다. 얼큰한 짬뽕 국물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배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좋다. 하빈이 생글생글 웃으며 지환을 쳐다봤다.

“그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너도 짬뽕 시킬걸 그랬나?”

“아냐. 너무 매운 거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짜장면 시킨 거야.”

“그랬어? 그럼 국물만 내 거 좀 마셔.”

“알았어.”

“근데 너 살이 좀 붙긴 했다. 전보다 웃을 때 포동포동한 게 귀엽네.”

“내가 그렇게 살이 많이 쪘어?”

지환의 말에 하빈이 놀라서는 제 얼굴을 붙잡았다. 살이 그렇게 많이 쪘다고? 볼을 더듬거리는 모습에 지환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며 하빈을 달랬지만 하빈은 이미 잔뜩 상심하고 난 뒤였다.

“야, 괜찮아. 괜찮아. 일단 밥부터 먹어. 짜장면 하나 먹는다고 살 더 많이 안 찐다니까?”

“그래도 짜장면 살 많이 찐다는데…….”

“많이 찌긴 뭐가 많이 쪄. 그리고 임산부들은 원래 살찌는 거야. 살이 빠지면 웃긴 거야.”

“아냐, 살 너무 많이 찌면 안 된댔어. 의사 선생님이.”

시무룩한 얼굴에 괜히 살 얘기를 꺼냈다 싶어진 지환이 화제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강세원 어머니는 어떠셔? 너 싫어하시는 것 같았다며.”

“그냥……. 조금 까칠하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친절하셨어…….”

하필이면 지환이 새로 꺼낸 화제가 세원의 가족 이야기여서, 하빈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을 하며 짜장면을 깨작거렸다.

“까칠하셔? 너한테?”

“응. 처음에는 나 좀 싫어하셨는데 나중에는 그래도 좋게 말해 주셨어. 그래서 다행이었어.”

“하긴 다 널 좋아할 순 없으니까. 걔 아버지는?”

“친절하시던데? 엄청 인자하게 생기시고 세원 씨랑 많이 닮았어.”

“많이 닮았어? 티비에서 볼 때도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티비에 나온 적이 있어?”

하빈이 젓가락을 물고 휘둥그레한 눈으로 물었다. 지환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며 대답했다.

“뉴스에 여러 번 나왔었지. 강세원 집안이 보통 집안이야? 자료화면 같은 걸로도 얼굴 나오고 그러잖아. 난 꽤 봤는데? 너도 봤는데 자세히 안 봐서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걸걸?”

“그런가? 나도 봤으려나?”

“당연하지. 걔 집안이 얼마나 큰데. 우리나라에서 알아주잖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세원 씨네 가족이 엄청 많았어.”

“얼마나 많냐? 걔가 형만 두 명에 누나가 있었나?”

“누님이 한 분 계시더라고.”

하빈이 젓가락으로 면을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왔다. 짜장면을 입으로 후루룩 집어넣고 단무지를 오도독 씹으며 양파를 춘장에 찍었다. 생양파에서는 늘 그렇듯이 달달한 맛이 났다. 익숙한 맛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짜장면을 집어 들었다.

“그 누나 성격은 어떤데?”

“엄청 밝고 착하셨어. 나한테 피부도 좋다고 하고……. 친절하시던데. 세원 씨 가족 중에서는 제일 대화하기 마음 편했던 것 같아.”

“그래? 의외네. 누나라고 해서 까칠하게 시누이 짓이라도 할까 걱정했는데.”

“에이,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시대가 어느 때긴. 주변에서 그런 얘기 안 듣냐? 그런 집들이 파다해.”

“그래? 세원 씨 가족들은 안 그랬어. 완전 다행이네…….”

“다행이지. 사람들이 착한 모양이야. 집안이 좋다고 해서 더 무시할까 걱정했는데.”

지환이 오징어와 양파를 잔뜩 집어 입으로 쑤셔 넣었다. 하빈은 그 모습을 보다 냅킨을 몇 장 뽑아 내밀었다. 입 주변에 묻은 국물을 닦아 낸 지환은 입 안의 것을 열심히 씹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가서 상처라도 받고 왔을까 봐 엄청 걱정했단 말이야. 그래도 강세원이 제 말대로 잘 해서 다행이네.”

“그치. 나도 다행이야. 세원 씨가 가서 우리 결혼할 거니까 그런 줄 알라고 딱 말했어. 엄청 멋있었어.”

“넌 별게 다 멋있다.”

“형도 형부가 사돈댁에 말할 때 멋있었을 거 아냐. 결혼 허락받을 때.”

“그렇긴 하지. 아무튼 넌 지금 너무 콩깍지가 꼈어. 강세원이 뭐가 멋있다고.”

“멋있는 건 사실이잖아!”

하빈이 투정을 부리며 젓가락으로 짜장면을 쿡쿡 찔렀다. 지환은 먹는 걸로 그러지 말라며 타박했지만 하빈은 듣지 않고 짜증을 부렸다.

“아기 낳고 결혼하게 되면 나도 그 집 사람들하고 만나야겠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되네. 형도 세원 씨 가족들하고 만나야겠네.”

“말이 되냐. 네가 강세원네 가족하고 결혼이라니…….”

“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상상이 안 간다.”

“그것도 내 전 남친이랑.”

“그 얘기 좀 하지 마.”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지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 얘긴 싫어? 하고 묻자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세원이 지환과 사귀었던 과거는 괜히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하빈의 말에 지환은 알겠다며 작게 웃고는 말했다.

“난 어차피 걔랑 진심으로 좋아하고 이랬던 사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게 걱정이야. 잘 모르겠어…….”

“뭘 몰라?”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도 모르겠고 세원 씨가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별걸 다 걱정한다. 강세원이 너한테 하는 걸 보고도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보이는 대로 믿어.”

지환의 말에 하빈은 짜장면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더부룩했다. 면이 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아메리카노와 핫초코를 하나씩 시켜 놓은 뒤 마주 보고 앉아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단지가 지금 몇 개월이지?”

“8개월. 9개월 다 되어 가.”

“출산도 얼마 안 남았네. 이것저것 준비해야지.”

“뭘?”

“산후조리원 같은 것도 다 챙겨야지 될 거 아냐. 이것도 너무 늦은 거야. 다들 엄청 일찍 준비한다던데.”

“맞다……. 나 산후조리원 들어가야 하나? 집에서는 못 하나?”

“집에서 하기 힘들지. 산후조리원 들어가야 편해. 그냥 들어가.”

“그렇겠지…….”

하빈이 핸드폰으로 ‘산후조리원’을 검색하며 지환의 말을 들었다. 검색 결과를 보니 비용은 시설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오래 머물지 않더라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어떡하지. 지환의 눈치를 살피자 그는 뭘 걱정하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일 좋은 데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래 있어. 강세원이 돈 내 주겠지.”

“어떻게 그래!”

“뭐 어때. 돈 많으니까 돈 내라고 해.”

“형…….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몸 네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

지환의 성화에 하빈이 한숨을 쉬며 알겠다 대답하고 핸드폰을 대충 쑤셔 넣었다. 그렇잖아도 집에 가면 세원과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이외에도 챙겨야 할 게 많았다. 육아용품도 더 사야 했고 지환의 말대로 산후조리원을 알아보는 것부터 아기 키우는 방법도 미리 숙지해야 했다. 이건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라 더 어려웠다. 어디서 보고 배워야 하는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찾아봐야 하나.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 둘이 하면 잘 하겠지, 뭐.”

“이제와서 그렇게 말한다고 걱정이 안 될 것 같아?”

하빈이 밉지 않게 지환을 노려봤다. 지환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하빈을 바라봤다.

“너 고생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까 웃기네.”

“뭐가 웃겨! 동생 고생하는 게 재미있어?”

“불쌍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러게 누가 내 말 안 들으래?”

“씨이……. 좀 도와주지.”

“나는 지금 나름대로 도와주는 거다?”

“알았어…….”

하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형과 이야기하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매일 세원과 둘만 있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도 만나니 사회성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형 말고도 다른 사람도 더 만나고 하면 좋을 텐데. 문득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형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하빈은 세원을 기다리며 오늘 지환과 했던 대화를 돌아보았다. 그중 어떤 것을 세원에게 전해야 할까?

일단 산후조리원 이야기도 해야 했고 아기 키우는 것도 이야기하고……. 티비 채널을 돌리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끙차.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자 세원이 들어와 하빈을 끌어안았다. 나 왔어. 그에게서는 바깥 공기 냄새가 났다. 하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서 오라 그를 반겼다.

“피곤하죠.”

“아냐, 나 금방 씻고 나올게.”

“배 안 고파요?”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왔어. 너는?”

“저도 형이랑 먹고 들어왔어요.”

“김지환이랑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어? 잘했어.”

“네. 얼른 씻어요.”

세원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고 하빈은 거실에 앉아 멍하니 그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씻고 나온 세원이 집안을 돌아다니며 어질러진 집을 대강 정리했고, 하빈은 그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원이 하빈을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 있어? 왜 가만히 못 있고.”

“네, 할 말 있어요.”

“뭔데?”

“아기 낳고 나면…….”

“응.”

“산후조리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떡해요?”

“아,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산후조리원 예약도 해야 하지.”

“네. 집에서도 산후조리 할 수 있긴 한데. 그냥 집에서 할까요?”

“산후조리원 가서 해야지 더 몸이 빨리 낫는 거 아냐? 그냥 가서 하자. 집에서 하다가 괜히 탈 나면 어떡해.”

“저는 어디가 좋은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좋은 곳으로 알아보라고 할게.”

“네. 세원 씨만 믿을게요.”

하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은 하빈을 방으로 데려와 눕히고 배를 걷어 올렸다. 잔뜩 부풀어 오른 배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산을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관계도 잘 할 수 없었다. 하빈은 배를 쓰다듬으며 세원을 바라봤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기가 안에서 다 자라 있을 거예요.”

“그러게.”

“엄청 신기하다…….”

“나도 신기해. 단지가 빨리 태어나면 좋겠다.”

“아기 이름은 생각해 봤어요?”

“아니, 아직. 뭐로 하면 좋을까?”

“우리 이름 섞어서 지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것도 좋다.”

세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빈은 다시 얌전히 옷을 내리고 이불을 덮은 뒤 세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하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얼굴에 뽀뽀를 했다.

“너무 예뻐서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네.”

“나중에 해요, 나중에.”

“그러자.”

“근데 아기 낳을 때 아프면 어떡해요?”

“안 아플 거야. 수술하니까 금방 끝날 거야.”

“걱정된다……. 건강하게 태어나겠죠?”

“걱정하지 마.”

꼭 끌어안아 주는 그의 커다란 품에 안겨 하빈이 눈을 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한참이나 안아 주고 달래 주며 잠들 수 있도록 애를 썼다.

* * *

주말은 출근하지 않는 세원 덕분에 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함께 밖에 나가 공원을 걷거나 한강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때로는 백화점에 가서 쇼핑도 하고 외식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행복이었다.

오늘은 세원이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어서 거실 탁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보고 있었다. 하빈은 긴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며 하품을 했다. 밤잠을 설쳐서 그런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느리게 껌뻑였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괜찮아요.”

졸음기 어린 눈으로 세원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빈이 입을 열었다.

“세원 씨.”

“응?”

“그거 다 하면 우리 놀러 나가요.”

“그래. 뭐 하고 놀까.”

타자를 두드리며 대답해 주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하빈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제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 주는 세원이 좋았다.

“운동도 할 겸 좀 걸어야겠어요.”

“어디 공원이라도 다녀올까?”

“공원도 좋고 아니면 카페도 좋고.”

“카페? 근처 카페 갔다 올까?”

“네. 좋아요.”

“그래, 일 금방 처리하고 가자.”

세원이 뒤를 돌아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깜빡 잠들었을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세원은 일을 벌써 마무리했는지 탁자는 비어 있었고 집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원 씨 뭐 해요?”

“일어났어?”

“네. 뭐 하고 있어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자 세원이 한쪽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공간에 하빈이 갸우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여긴 왜 비웠어요?”

“나중에 아기 태어나면 아기방으로 쓸까 해서 정리했어.”

“벌써 정리했어요?”

“미리 해둬야지, 나중에 태어나고 나면 아기 보느라 바빠서 따로 할 시간도 없을 것 같길래.”

“그렇네요. 나도 뭐 도와줄까요?”

“괜찮아. 거의 다 했으니까 가서 앉아 있어.”

남은 짐을 다른 방으로 옮긴 세원이 방을 한 번 쓸어 내고 뿌듯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저 방을 이제 아기용품으로 가득 채우면 되는 건가? 하빈이 웃으며 세원에게 물었다.

“저 방에 이제 아기용품이나 가구 같은 것들 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우와, 좋다. 그럼 우리 언제 가서 사야겠다.”

“내일 가서 살까?”

“좋아요.”

“그래. 지금은 카페 다녀올까? 아까 카페 가고 싶다면서.”

“아직 시간 있어요?”

“시간 있어. 나가서 저녁 먹고 카페 갔다가 들어오자.”

“네.”

하빈이 옷을 챙겨 입자 세원이 손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길을 걸을 때도 조심조심 안내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해서 자꾸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오늘의 외식 메뉴는 스테이크였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익숙하게 칼질을 하는 자신을 돌아보자니 어쩐지 제 팔자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지금과 같은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그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고에 쫓기고 있었겠지. 여전히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높은 언덕을 오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겠지……. 이런 생각을 하자 입안이 썼다.

식사를 마치고 동네 카페로 들어와 차를 시키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이 동네는 사는 사람들도 남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돈이 많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빈이 차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누구지? 그가 반가운 얼굴로 세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강세원! 오랜만이다?”

“아, 오랜만이다.”

세원도 그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빈은 멀뚱멀뚱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을 내려놨다. 세원 씨 친구인가? 잠시 인사를 나눈 남자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야, 어떻게 지내고 있었냐?”

“나야 뭐. 잘 지내고 있었지. 너는?”

“나는 해외 나갔다가 얼마 전에 들어왔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싸 보이는 물건들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명품을 모르는 자신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운 것들뿐이었다. 하빈의 시선을 느낀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이쪽은 누구신지?”

“인사해. 내 애인인데 곧 결혼할 거야.”

“결혼한다고? 임신하신 것 같은데…….”

“어, 임신했어. 이제 곧 있으면 출산이야.”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하빈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원의 친구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세원과 하빈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너 그 얘기 진짜였어? 애 생겨서 결혼한다는 거?”

“누가 또 내 이야기 하고 다녀?”

“어. 너도 알잖아. 입 싼 새끼 하나 있는 거.”

그의 말에 세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 사무실에서 봤던 그 남자 말하는 건가……. 하빈이 눈치껏 입을 다물고 분위기를 살폈다. 찻잔을 들어 후후 차를 불고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졌다.

“결혼하면 나한테 말을 해야지, 왜 말도 안 하냐?”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나중에 언제! 너는 애가 꼭 그러더라. 새끼가 섭섭하게.”

“뭐가 섭섭해. 매번 해외 나가 있어서 바쁜 놈이 누군데.”

“그래도 내가 네 결혼식을 안 가겠어? 누구 결혼식인데.”

“해도 애 태어나고 할 거야. 지금은 못 해.”

결혼을 정말 하긴 할 생각인가……. 하빈도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결혼 이야기가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원의 친구는 한참을 투덜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놨다. 세원은 귀찮다는 듯이 대충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래도 나한테 친한 친구가 몇이나 된다고. 네가 결혼 먼저 하면 나한테 말해 주기로 했잖아.”

“그랬지.”

“근데 이렇게 남한테 얘기 듣게 하기 있냐?”

“누가 걔랑 먼저 만나래?”

“하여간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래서 여긴 왜 온 건데?”

“아, 맞다. 너 보러 온 거 아닌데.”

세원의 말에 친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하더니 일행을 발견하고는 간다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폭풍처럼 쓸고 지나가 버린 친구의 존재에 하빈은 멍하니 세원을 바라봤다. 무슨 저런 사람이 있지?

하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원은 한숨을 쉬며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쟤가 원래 좀 부산스러워.”

“……그러게요, 말이 많으시네요.”

“그런 편이야. 그래도 착해.”

착하다는 말에 하빈이 힐끗 뒤를 돌아 그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언제 남의 테이블에 쳐들어왔었냐는 듯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약속 상대와 열심히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아하니 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 듯싶었다. 하빈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 남자가 세원 씨 친구들한테 다 소문내고 다닌 거예요?”

“뭘?”

“세원 씨 저랑 결혼한다고…….”

“그런가 본데. 너 임신한 것도 말했나 봐.”

“어떡해요?”

“뭘 어떡해?”

“그냥…….”

“사실인데 그냥 있으면 되지.”

“사람들 만날 때 괜히 눈치 보이잖아요.”

“뭐가 눈치 보여. 상관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당당했다. 자신도 저렇게 당당해야 하는데. 배를 감싸고 움츠러든 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난 왜 저렇게 멋있을 수 없는 거지. 하빈은 세원에게 물었다.

“그럼 결혼식 같은 건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 해?”

“세원 씨 친구들 부를 거예요? 저는 부를 친구들도 별로 없어서, 가족도 없고.”

“나도 부를 사람 별로 없어.”

“그래도 오라고 하면 올 사람 엄청 많을 것 같아요.”

“됐어. 오라고 안 할 거야.”

끝까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그의 모습에 하빈은 고마우면서도 의기소침해져 기분이 축 처져 버렸다. 왜 괜히 결혼 이야기를 꺼내서 이렇게 됐지. 다른 이야기나 할까……. 하빈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세원이 입을 열었다.

“결혼하는 거 너무 부담스러우면 결혼식 안 해도 상관없고. 난 네가 섭섭할까 봐 결혼식 하자고 하는 거야. 난 안 해도 상관없어.”

그의 말에 하빈은 잠시 고민에 빠져 버렸다. 결혼식을 하지 않고 그냥 살게 되면 그냥 그전까지 해 오던 동거의 연장선 같고 부부라는 느낌이 잘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도 남들처럼, 인생에 한 번쯤 기념할 만한 추억을 세원과 함께 만들고 싶었다.

“저는 부담스럽긴 한데 그래도 하고 싶어요.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럼 하지 뭐.”

순순히 제 의견을 따르는 그의 모습에 하빈은 고마우면서도 부담이 됐다. 괜히 하자고 했나,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는데. 배를 감싸고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불안할 때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세원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래? 뭐가 불안해?”

“네?”

“배를 하도 쓰다듬고 있길래. 뭐 불안한가 싶어서.”

“아니에요, 그냥…….”

눈치를 살피며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세원의 친구를 만난 게 너무 큰일이 되어 버렸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세원의 친구가 달려 나와 세원을 붙잡았다.

“야야, 강세원.”

“어? 왜.”

“언제 한번 시간 내라. 밥이나 먹자. 세원이 예비 신부분도 같이 먹어요.”

“그래. 연락해.”

“잘 가라.”

하빈도 꾸벅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와 앉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필요도 없는 긴장을 하고 있던 거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해하면서 하빈이 세원을 돌아봤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는 다정하게 하빈에게 말을 걸어 왔다.

“졸려? 하품하네.”

“조금 졸려요. 집에 빨리 가서 씻고 자고 싶어요.”

“얼른 가서 씻고 자자.”

“네. 세원 씨도 낮에 일해서 많이 피곤하죠.”

“나는 괜찮아.”

웃는 얼굴에 하빈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다정함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데 그의 다정함과 체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집에 도착한 하빈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몸을 담갔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따라 들어온 세원이 그런 하빈의 몸을 잠시 감상하다 물을 튀기며 장난을 쳤다.

“아, 뭐예요.”

“이리 와. 세수하자.”

“세수했어요!”

“또 해야지.”

“싫은데…….”

“내가 세수시켜 줄게.”

세원은 하빈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받치고 뽀득뽀득 세수를 시켰고, 하빈은 버둥버둥 물을 튀기며 그를 밀어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하빈의 어깨를 주물렀다.

“어깨가 다 뭉쳤네.”

“배가 너무 무거워서 힘주고 다니느라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서있기만 해도 너무 피곤해요.”

“얼른 아기가 태어나야 하는데. 그치?”

“네. 빨리 태어나서 봤으면 좋겠어요.”

다리를 첨벙거리던 하빈이 뒤를 돌아 세원에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이 진득한 키스로 이어지고 세원은 하빈의 머리를 헤집으며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한참 키스를 이어 가던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관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후끈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빨리 아기 낳아야 해.”

“그러게요…….”

그 어느 때보다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침대에 누워 세원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서 나는 향기가 똑같이 그에게서도 풍겨와 기분이 좋았다. 페로몬 향기 말고도 샴푸 향과 바디워시 향이 느껴졌다.

“세원 씨.”

“응?”

“우리 내일은 뭐 하러 가기로 했었죠?”

“내일은 육아용품도 사러 가고 가구도 사기로 했었지.”

“맞다…….”

하빈이 크게 하품을 하며 세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는 하빈의 등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푹 자야 내일 일어나서 돌아다니지.”

“네. 잘 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들어 버린 하빈이 귀여웠는지 세원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에 입을 맞췄다. 잠시 후 세원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꼭 붙어서 잠든 두 사람은 뒤척이지도 않은 채 다음 날 아침까지 한 이불 속에 얌전히 있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왔다. 세원의 취향은 깔끔하고 모던한 스타일이라면 하빈은 아기자기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취향이 갈리는 탓에 가구점을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 동안에도 무엇을 살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저 침대가 좋아요.”

“난 이게 좋은데.”

“그럼 어떡해요? 둘 다 살 수도 없는데.”

“그냥 둘 다 살까?”

“아기는 하나예요.”

하빈의 말에 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기는 한 명이지. 고민하던 세원은 결국 아기들 보기에 예쁜 걸 사 주어야 한다는 하빈의 주장에 따라 아기자기한 침대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모빌도 사고 베개도 사고, 이불도 사고. 이것저것 고르자 시간이 금세 지나가 있었다.

“세원 씨,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다리 안 아파? 부었을 것 같은데.”

“우리 어디 가서 좀 앉아요. 힘들어요.”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세원이 얼른 하빈을 데리고 백화점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사람들이 가득해 앉을 자리가 없어 보였다. 어떡하지……. 하빈이 고민하며 서성이고 있는데 앉아 있던 커플이 일어나며 하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여기 앉으세요.”

“네? 어, 정말요?”

“네. 앉으세요. 저희 곧 일어날 거였어요.”

“와……. 감사합니다.”

연거푸 인사를 하며 하빈이 의자에 앉아 세원을 불렀다. 커피를 들고 온 세원은 어떻게 자리를 잡았냐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도 많은데 자리 잘 잡았네.”

“누가 양보해 줬어요.”

“그래? 착하네.”

“그쵸. 세상은 아직 살 만한가 봐요.”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는 하빈의 볼을 살짝 꼬집은 세원이 주스를 건넸다. 샌드위치도 같이 사 온 덕분에 고픈 배를 조금은 채울 수 있었다. 하빈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원은 핸드폰으로 뭘 더 사야 할지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아기 옷만 더 사면 되겠는데?”

“옷이요? 옷 어디서 사지?”

“내가 아까 어머니한테 문자로 여쭤 보니까 좋은 브랜드 알려 주셨어. 거기서 사자.”

“어머님이 알려 주셨어요? 우와…….”

하빈이 부러움에 눈을 빛내며 세원을 쳐다봤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하빈은 임신한 동안 내내 외로웠다. 나한테도 격려해 주고 조언해 줄 엄마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지금까지 부모님을 대신해 부족함이 없도록 자신에게 잘해 준 형을 생각하면 어쩐지 그런 생각조차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세원의 어머니가 아기한테 좋은 브랜드도 알려 주실 정도면 지금은 그래도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제게 마음을 열어 주신 게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답을 주기는커녕 무시했을 텐데.

하빈은 금세 기운이 난 표정으로 세원의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며 세원의 어머니가 알려 준 브랜드 매장의 위치를 검색했다.

카페에서 조금 쉬는 동안 부었던 다리도 가라앉고 세원이 팔도 주물러 준 덕분에 뻐근하던 몸도 풀렸다. 다시 쇼핑하러 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하빈이 다시 카페를 빠져나가려 하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하빈!”

고개를 돌리자 고등학교 동창이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빈은 놀란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여기서 다 만나네. 네가 백화점에는 웬일이야?”

“아, 옷 사러 왔어.”

“옷? 네가 여기에?”

딱 봐도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하빈은 부끄러운 얼굴로 연신 뒤를 돌아보며 세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과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빈은 대강 얼버무리고 나가려 했지만 친구는 하빈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배는 왜 이래? 임신이라도 한 거야? 너 뭐 사고 쳤어?”

“아니……. 나 임신한 건 맞는데…….”

“미쳤어?!”

놀란 얼굴로 자신의 팔뚝을 퍽퍽 때리는 친구의 모습에 하빈이 아프다며 팔을 피했다. 그때 세원이 하빈을 감싸 품에 안으며 하빈의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아프다는데 그렇게 때리면 안 되죠.”

“누구세요?”

“하빈이 남편입니다.”

“남편이요? 너 결혼했어?”

친구의 물음에 하빈이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혼식은 안 했지만 할 거니까 했다고 해도 되겠지……. 하빈의 반응에 친구는 놀란 얼굴로 세원을 빤히 쳐다보다 하빈을 붙잡고 속삭였다.

“대박이다. 야, 저 사람 돈 완전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꼬셨어?”

“뭐, 뭘 꼬셔…….”

“하긴 네 얼굴이면 넘어올 만도 하지.”

친구가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불쾌한 시선에 하빈이 인상을 쓰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해.”

“내숭은……. 됐어. 오랜만에 만났길래 반가워서 인사했더니 엄청난 소식을 알려 주네.”

“너는 잘 지내고?”

“나야 별일 없지.”

하빈이 말을 돌리듯 안부를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학생 때도 말이 많은 친구였다. 하빈은 불안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친구는 쉴 새 없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놨다.

“그래서 팔자 폈다고 백화점도 오고 그러는 거야? 너희 집 엄청 가난했잖아. 잘됐다, 야.”

“아, 무슨 그런 얘기를 해…….”

“왜. 말도 못 하냐? 내가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

세원을 쳐다보자 그는 묵묵히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내가 부끄러우려나……. 하빈이 울상을 하고 얼굴을 가리려는데, 그 손목을 친구가 홱 잡아끌었다.

“나중에 너 애 낳고 나면 친구들이랑 다 같이 만나서 놀자. 연락처 좀 줘 봐.”

“어? 어…….”

하빈이 핸드폰 번호를 찍어 주자 친구가 좋다며 웃으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하빈은 입술을 꾹 깨물고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세원을 돌아봤다. 세원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나 때문에 부끄럽죠…….”

“뭐가 부끄러워?”

“그냥…….”

얼버무리는 하빈의 말에 세원은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난 네가 친구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그게 걱정됐지, 다른 건 걱정 안 했는데.”

“저 친구가 원래 말이 좀 많아요.”

“나도 말 많은 친구 있어. 저번에 봤잖아.”

“그치만 그 친구는 만나도 안 부끄럽잖아요. 저는 만나면 부끄러운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괜찮아. 나는 오히려 나 때문에 네가 사고 쳤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런 소리 듣는 게 미안한데.”

세원의 말에 하빈은 푹 숙인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진심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그가 이렇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너무 어리게만 느껴지는 자신이 부끄럽고 속상한 하빈이었다. 난 언제쯤 더 커서 세원 씨를 따라갈 수 있을까. 그에게는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가.

“세원 씨는 너무 멋있는 것 같아요.”

“내가 멋있어?”

“네.”

“늘 말하지만 너한테 멋있으면 됐어.”

“근데 다른 사람한테도 멋있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

“괜찮아, 내가 신경 안 쓰니까.”

“그래도…….”

하빈이 울상을 했다.

자신만 가지고 싶은데 자꾸 주변에서 세원을 탐내는 것 같아 질투가 났다. 방금만 해도 친구가 세원을 보고 눈을 빛낼 때 자랑스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다. 세원이 자신의 친구에게 잠깐이라도 눈길을 주는 게 싫었다.

내가 이렇게 질투가 많았나. 하빈은 다시 고개를 푹 처박고 홀로 회개의 시간을 가졌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반성하고 있어요.”

“응? 뭐라고?”

“제가 질투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질투가 많은 게 왜. 귀여운데.”

“뭐가 귀여워요.”

“난 귀여워서 좋은데.”

작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하빈은 당장이라도 뽀뽀를 하고 싶었다. 길 한복판에서 그러면 안 되겠지……. 한숨을 푹 내쉬자 세원이 왜 그러냐며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하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뽀뽀하고 싶어요…….”

“뭐라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세원이 다시 물었다.

“세원 씨랑 뽀뽀하고 싶어요.”

하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세원은 웃으며 그래? 하고는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하면 되지.”

“사람들이 보잖아요!”

“보면 어때.”

“뭐 하는 거예요!”

세원이 장난스레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하빈은 놀란 얼굴로 세원을 밀쳐냈다. 사람도 많은데 민폐에요! 입을 가리자 세원이 다가와 괜찮다고 속삭이고는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어 대며 서슴없이 애정표현을 해 댔다. 하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세원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걱정스럽게 묻자 하빈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몰라요. 세원은 키득거리며 하빈의 손을 붙잡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세원의 엄마가 알려 준 매장에 가자 아주 질 좋은 아기 옷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하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떤 걸 사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이것저것 만져 봤다.

직원이 다가와 알려주기 전까지 두 사람은 속닥거리며 천이 어떻다, 색이 어떻다 하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또다시 자신의 취향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게 갓 태어난 아기들한테 입히는 옷이에요. 여자 아기들한테는 보통 이런 색을 많이 입히죠.”

“아아……. 천이 되게 좋다.”

하빈의 말에 직원이 자랑을 잔뜩 늘어놓으며 브랜드를 설명했다. 세원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장난감에 시선을 돌렸고 하빈은 공부라도 하는 듯이 집중해 들으며 이것저것 물어보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가격을 물었을 때 깜짝 놀란 얼굴로 하빈이 세원을 돌아봤다.

“세원 씨.”

“응?”

“여기 옷 너무 비싼데!”

“뭐가 비싸.”

“아니, 옷이 몇만 원부터 몇십만 원까지 해요.”

“애들 옷이 다 그렇지 뭐.”

“천 쪼가리도 조금씩 쓰면서 뭐가 이렇게 비싸…….”

투덜거리는 모습에 세원이 웃으며 하빈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괜찮으니까 그냥 골라. 아무렇지 않은 그의 모습에 하빈은 알겠다며 다시 옷을 골랐다. 직원은 그런 하빈에게 봉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온갖 옷과 장난감을 소개하며 추천을 했다.

“아기 태어나면 누굴 닮아도 예쁠 것 같아요.”

직원의 말에 하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빠 닮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딸인데? 널 닮아야지. 나 닮으면 안 돼. 너 닮아야 예뻐.”

“내가 뭐가 예쁘다고 진짜…….”

“어머, 얼마나 예쁘신데. 뭘 모르시네.”

슬쩍 어깨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늘어놓는 직원에 하빈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안 예뻐요. 평소의 칭찬을 두 배로 받아 버리자 뻘쭘함도 두 배였다. 하빈은 서둘러 계산을 하자며 세원의 카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직원은 웃으며 카드를 받아 들고는 말했다.

“다음에 또 오시면 더 예쁜 옷들 많이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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