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두근거리는 첫 만남
세원의 가족을 만나기로 결정한 뒤로, 매일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환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평소에는 귀찮기만 하던 이름도 반가웠다. 하빈은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려놓고 냉큼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지환이 말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길래 연락이 통 없어?]
“형!”
[뭔데 이렇게 반가워해? 무슨 일 있어?]
“안 그래도 형한테 전화하고 싶었는데.”
[나한테? 왜.]
“아니, 그냥…….”
말끝을 흘리는 하빈에 지환이 추궁하듯 물어왔다.
[뭔데 그래. 강세원이 너보고 뭐라고 그래? 집 나가래?]
“아냐, 그런 소리 안 해.”
[근데 왜 갑자기 안 찾던 나를 찾아? 불안하게.]
“그게 아니라……. 세원 씨랑 같이 세원 씨 가족들한테 나 임신한 거 이야기하기로 했단 말이야. 근데 걱정이 좀 돼서.”
[아아. 임신한 거 드디어 말하기로 했어? 언제?]
“조만간 할 것 같아. 너무 떨리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뭘 못 하겠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뭐 하고 있는데?]
“그냥 집에서 가만히 과자나 먹으면서 티비 보고 있지.”
[아무것도 못 하겠다더니 팔자는 좋네.]
“그렇지 뭐.”
하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말 잘하고 와. 떨지 말고.]
“떨리는데 어떻게 안 떨어.”
[그냥 친구네 가족들 보러 간다고 생각하고 가면 되지.]
“그게 마음처럼 안 돼. 게다가 내가 친구들 부모님을 많이 만나 본 것도 아니고…….”
[으이그, 하여간 세상 고민 다 짊어지고 살지.]
“그치만 고민 많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하빈이 투덜거리자 지환은 알겠다며 말을 이었다.
[가서 얼굴만 보고 와. 너한테 뭐 물어보면 강세원이 대신 대답하게 놔두고.]
“난 별로 말하지 마?”
[어. 괜히 네가 입 열었다가 무슨 트집이 잡히려고. 그리고 자기 아들이 말하는 걸 듣지 네가 말하는 얘기를 듣겠어? 그냥 가만히 있어.]
“알겠어.”
[네 얘기 듣고 있으니 걱정이네.]
“나도 걱정이야……. 차라리 더 일찍 가서 말씀드릴 걸 그랬나 봐.”
[더 일찍 갔으면 잘 말할 수 있었어? 그때도 똑같았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냥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고 가서 잘 하고 와.]
“알았어.”
[혹시라도 가족들이 뭐라고 하거나 너 괴롭히면 말해. 내가 가서 아주 지랄을 떨어 줄 테니까.]
“됐어. 괜히 나 때문에 형까지 그럴 것 없어. 그냥 한두 번 보고 말 것 같은데 뭐.”
[너 강세원하고 결혼까지 할 거라며. 근데 어떻게 한두 번 보고 말아. 계속 만나야지.]
그런가?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세원 씨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밝힌다면 출산할 때도 만나야 했고, 결혼을 허락 받는다 치면 결혼 준비하는 동안도 만나게 될 테고, 결혼식에서도 만날 게 분명했다. 그걸 생각 못 했네. 나는 바본가…….
“맞다, 그걸 깜빡했다.”
[바보냐? 그냥 가서 너대로 나가. 괜히 잘 보이겠다고 움츠러들고 그러다가 눈칫밥만 더 얻어먹고 오지 말고. 넌 있는 그대로가 제일 괜찮으니까.]
“알았어.”
[네가 그러니까 더 걱정된다. 내가 너 때문에 걱정이 많아. 알아? 잠도 잘 못 잔다고.]
“형이 안 그래도 나도 걱정이 잔뜩이야…….”
[넌 뭘 또 걱정해. 지금처럼 팔자 좋게 먹고 자고 놀다가 다녀와!]
“어떻게 그러냐! 내 일인데…….”
[하여간 사서 고생하지.]
형의 말에 하빈은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별 영양가 없는 대화 끝에 전화를 끊자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형한테 말하니까 좀 낫네. 이마를 긁적이며 주변을 살피던 하빈이 리모콘을 집어 티비를 켰다.
티비를 보는 내내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세원의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만나 본 적이 없으니 그저 두렵기만 한 존재들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기한테는 좀 친절하면 좋을 텐데. 하빈의 작은 소망이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하빈은 세원이 돌아오는 때에 맞춰 상을 차렸다. 세원은 오늘도 시간을 맞춰 퇴근할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 제육볶음과 쌈 채소를 가득 준비한 하빈은 어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앉아 세원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세원이 들어왔다.
“왔어요?”
“응, 나 왔어. 잘 있었어?”
“네. 얼른 손 씻고 와요. 밥해 놨어요.”
“맛있는 냄새 나네.”
세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하빈이 뒤를 졸졸 따라가며 오늘은 뭘 만들었다고 자랑을 늘어놨다. 듣고 있던 세원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했다.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오늘의 대화 주제 역시 세원의 부모님께 임신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대화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걱정하는 하빈을 세원이 달래 주고 있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걱정돼요. 나 싫어하실 것 같은데…….”
“널 왜 싫어하셔. 그럴 일 없으니까 가서 하던 대로 인사하고 밥 잘 먹고 오면 돼.”
“정말 괜찮겠죠? 쫓아내시는 건 아니겠죠…….”
“아니야. 그리고 그런 일로 쫓아내시면 내가 화낼 거야. 누굴 쫓아내.”
입맛이 뚝 떨어진 얼굴로, 반찬을 집지도 않은 젓가락만 입에 물고 있던 하빈이 세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이번 주 주말에 세원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을 잡아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살도 더 빼고 싶었고 몸 관리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아쉬웠다. 잘 보이고 싶은데…….
“세원 씨 아버님, 어머님께 잘 보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속상해요.”
“뭘 지금보다 더 잘 보이려고 그래. 충분한데. 그냥 있는 그대로 해도 잘 보이는 거야.”
다독여 주는 말에 하빈은 안심하면서도 세원을 마냥 믿을 수는 없는 눈치였다. 귀여운 막내아들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원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나한테 무섭게 하시면 어떡하지.
“누가 너 혼내거나 욕하려고 하면 내 뒤에 숨어. 알았지?”
“네. 저 진짜로 세원 씨만 따라다닐 거예요.”
“그래.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있어. 그럼 돼.”
“저리 가라고 해도 안 가야지.”
“내가 왜 저리 가라고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귀찮다고 좀 가라고 할 수도 있지.”
“절대 안 그래. 그러니까 옆에 찰싹 붙어 있어.”
“알았어요.”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세원은 조금 귀여웠다. 하빈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금세 식탁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를 마치자 긴장도 풀어지고 배가 불러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어 버리기 전에 후다닥 샤워를 하고 나온 하빈이 침대에 누워 세원을 바라보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책 읽어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줘.”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 세원이 옆에 누워 하빈의 배를 문지르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한 단어 한 단어가 감미로웠다.
하빈은 세원이 읽던 책을 가져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는 듯 세원의 품을 파고들어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따스한 세원의 가슴팍이 좋았다. 이대로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많이 졸려?”
“네…….”
“낮에 안 잤어?”
“낮에 안 잤어요. 형이랑 통화했어요.”
“김지환이랑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세원 씨 가족 만날 거라는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자 세원은 하빈의 이마를 쓸어주며 다정하게 얼굴에 입술을 가져왔다. 좋다, 흐흥. 하빈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세원의 가족을 만나는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날. 세원은 출근하는 대신 하빈과 함께 백화점으로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가족들을 만나러 갈 때 입을 옷을 볼 생각이었는데 임산부 복이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아 고민이었다.
예쁜 옷을 사고 싶은데……. 하빈이 어디서 옷을 사야 걱정하고 있는 사이, 세원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명품관으로 향했다. 명품관이라니, 이런 곳에는 난생 처음 와 보는 하빈은 어색한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이렇게 비싼 데서 옷을 산다고요?”
“그럼 어디서 사게? 부모님 만나러 가는데 좋은 옷 입고 가야지.”
“그래도 너무 비싼 것 같은데…….”
“괜찮아.”
세원은 익숙하게 특정 브랜드의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몇십, 몇백만 원은 하는 비싼 옷이 즐비한 매장안에 들어서니 눈이 어지러웠다.
정말 여기서 골라도 되는 거야? 넉넉한 사이즈의 옷으로 고르라는 세원에 하빈이 우물쭈물하며 옷을 대충 보고 있는데, 점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놀란 하빈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세원은 하빈에게 옷을 찾아주라 시키고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찾아볼게요.”
“이게 제 일이니까 괜찮아요. 이건 어떠세요? 사이즈가 맞을 것 같은데.”
“이거요? 예뻐요. 괜찮을 것 같아요.”
점원이 큰 남방 하나를 골라 하빈의 몸 위로 걸쳐 주었다. 단추를 채우니 딱 맞는 사이즈에 뒤를 돌아보자 세원은 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일에 입을 거니까 이거 하나면 될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원은 몇 개 더 사, 하고 팔짱을 꼈다.
“하나면 되잖아요.”
“하나만 주구장창 입고 다닐 거야? 옷 더 필요하잖아.”
“그래도 집에 세원 씨가 사 준 옷들 많이 있는데…….”
“이건 어떠세요?”
옆에서 계속 추천을 해 주자 어쩔 줄 모르고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옷을 골랐다.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닌가……. 눈치를 봤지만 세원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고르기에도 지칠 때쯤, 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어? 그만 갈까?”
“네…….”
“고른 거 다 결제해 주세요.”
세원이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서둘러 받아 가고 하빈은 눈치를 살피며 제 팔을 주물렀다.
“많이 피곤해?”
“조금……. 그것보다 저 옷 너무 많이 산 것 같은데…….”
“뭐가 많이 사. 그래 봤자 서너 벌 산 게 다 아니야?”
“그래도 하나같이 전부 비싼 것들이잖아요.”
“안 비싸. 됐어.”
됐다는 말에도 하빈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휘황찬란한 매장 내부가 멋있었다. 세원은 지갑과 벨트도 사 주겠다며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하빈은 정말 됐다며 세원을 말리려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결국 양손 가득히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나오게 되었다.
“너무 부담스러워요.”
“뭐가 부담스러워.”
“그냥, 이렇게 많이 산 게…….”
“괜찮다니까. 어차피 너 사 주려고 했었어.”
“저는 받기밖에 못 하는데…….”
“난 바라고 사 주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
세원의 말에 하빈은 울상을 하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세원도 하빈을 품에 안고 다시 차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세원이 사 준 것들을 다시 챙겨 놓은 하빈은 내일모레로 바짝 다가온 세원의 가족들과의 만남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세원은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나만 이렇게 긴장을 했나……. 너무 걱정한 탓인지 자꾸 배가 뭉쳐 세원에게 마사지를 부탁하게 됐다. 세원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마사지 크림을 가져와 하빈의 배를 마사지하며 단지에게도 예쁜 말을 해 주고 있었다.
그의 사랑이 가득 담긴 행동에 늘 가슴이 설렜다. 가족 일만 아니면 이렇게 좋은데.
“단지가 엄마 닮아서 예쁘게 태어나면 좋을 텐데.”
“나 닮으면 예뻐요?”
“그렇지, 예쁘지.”
“안 예쁜데…….”
“안 예쁘긴 뭐가 안 예뻐.”
세원은 하빈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아빠 닮아도 좋을 것 같아요.”
“나 닮아도 좋을 것 같아? 왜?”
“세원 씨도 잘생겼잖아요.”
“나 잘생겼어?”
“네. 엄청 잘생겼어요.”
“네 입으로 나 잘생겼다고 듣는 일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진짜요? 내가 말 안 해 줬나? 세원 씨 잘생겼다고.”
“어. 말 안 했어.”
왜 그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빈이 세원의 얼굴을 붙잡았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말하며 입술에 뽀뽀를 하자 세원이 웃으며 진득하게 입을 맞춰 왔다. 긴 키스가 이어지고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세원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안겨 들었다. 세원은 하빈을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어. 진짜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세원 씨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세원 씨만 믿을게요.”
“그래. 만약 너 반대하면 내가 싸울게.”
“싸울 것까진 없는데…….”
“싸워야 이기지.”
“알았어요. 세원 씨 이기라고 옆에서 응원할게요.”
하빈이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이자 세원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가에는 모레 간다고 말씀드려 놨으니까 그때 가면 다들 모여 있을 거야.”
“벌써 떨린다…….”
“떨지 말고. 얼른 자자.”
“네.”
* * *
세원이 사 준 옷을 곱게 차려입은 하빈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차에 올라탔다.
세원의 본가로 향하는 길이 멀고도 험한 것만 같은 건 왜일까. 잔뜩 땀이 나는 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문지르며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굳어 있는 제 얼굴만이 반사되어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하빈이 얼어붙어 있을 동안 세원은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몇 시에 갈 예정이라 말을 해 두고 가족들이 모두 모였는지 재차 확인을 하고 있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을 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알았어요. 금방 가니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는 세원의 모습에 하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세요?”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다 모이게 하냐고 물어보시는데 집에 가서 말씀드린다고 했어.”
“으아……. 너무 걱정된다.”
“많이 떨려?”
세원이 하빈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큰 손이 제 손을 덮자 콩닥거리는 심장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떨리는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마구 뛰어 대는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해 낼 것만 같은 느낌에 하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아, 알겠어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집에 가서 갑자기 임신한 오메가 애인 데려오면 다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알았지?”
“네, 당연하죠. 저 같아도 당황해요……. 차라리 미리 언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까 싶어요.”
“아냐, 이렇게 부딪치는 게 좋아.”
“그럴까요?”
“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다면야……. 하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정면만 바라본 채 다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자기 소개를 해야 할 땐 무슨 말을 하고, 뭐라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을 해 뒀지만 실전에서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빈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세원의 집은 고급 주택 단지에 있는 커다란 단독주택이었다. 단독주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궁전같은 집이었다.
이렇게 좋은 집은 드라마에서나 봤는데……. 반쯤 넋이 나간 하빈이 차에서 내려 세원의 뒤를 따라갔다.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펼쳐졌다.
잔디와 자갈이 깔린 마당은 곳곳에 잘 가꿔진 화초며 정원수가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이렇게 예쁜 집은 처음이야……. 세원이 넋을 놓고 구경하던 하빈의 손을 잡아 왔다. 하빈이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아, 정신 차려야지. 불러 온 배를 조심히 받치고 자갈길을 걸어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벽에는 각종 그림이 붙어 있어서 마치 전시회장을 보는 듯했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거실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다들 차를 마시고 있었는지 향긋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하빈은 차마 그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어서 오렴.”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던, 세원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세원도 웃으며 어머니와 가볍게 포옹을 하고는 곁으로 다가오는 아버지를 불렀다.
세원의 가족들은 성대하게 세원을 반기고 나서야 하빈을 돌아봤다. 세원은 하빈을 제 곁으로 데려와 손을 붙잡고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여기는 내 애인인데, 인사 드려. 우리 가족들이야.”
“아……. 안녕하세요. 김하빈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하빈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주로 불룩 튀어나온 배에 가 있는 듯했다.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하빈은 슬쩍 배를 감싸며 세원에게 바짝 붙어 손을 꽉 붙잡았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눈치 채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단, 다들 인사부터 하세요.”
“그래. 나는 세원이 아버지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나는 세원이 어머니예요.”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어머니의 시선은 하빈의 배를 향하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른 형제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자리를 잡은 하빈과 세원은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세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고?”
“결혼하려고요.”
“갑자기 결혼을?”
세원의 아버지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세원을 바라보자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대답했다.
“네. 하빈이 임신한 거 보이시잖아요. 아기 태어나고 나면 하빈이랑 결혼할 거예요.”
“……사고 쳤니?”
세원의 어머니가 나직이 물었다. 하빈은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세원은 당당하게 말했다.
“네. 제가 사고 쳤어요. 그래서 책임지려고요.”
“넌 애가 어떻게 된 게……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세원의 어머니는 화가 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언성을 높여 쏘아붙였다. 싸해진 분위기에 하빈은 눈치를 살피며 세원을 바라봤다.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나 지금 말하나 달라질 건 없는데요, 뭐. 그냥 받아들이세요.”
“이렇게 통보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니.”
“이미 임신한 지 8개월이 다 되어 가요. 아기 태어날 때 다 됐어요.”
“……내가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이마를 짚은 세원의 어머니는 고개를 내저으며 하빈을 노려봤다. 그녀의 시선에 하빈은 움찔하며 입을 열려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봤다. 세원의 아버지는 애써 상황을 중재하려 해 봤지만 세원과 그의 어머니의 기 싸움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정들 하고, 손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손님? 지금 장난해요? 저게 불청객이지 손님은 무슨.”
“어머니, 저희 장난처럼 결혼한다고 말씀드리러 온 거 아니에요. 그리고 함께 사는 건 우리지 어머니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금 내 의견은 필요도 없다 이거야? 그러면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알려 드리려고 온 거예요.”
“이럴 거였으면 알려 주러 올 필요도 없었어.”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하빈은 조금 실망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세원 역시 단호했다. 굳은 표정으로 어머니와 싸우는 모습은 평소에 보지 못하던 모습이었다.
부모님하고 싸울 거라더니 정말 싸우고 있네……. 하빈이 세원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세원은 맞잡은 손을 잠깐 내려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 허락 안 해 주셔도 우리끼리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어떻게 할 건데. 누구 맘대로.”
“애도 있는데 안 시켜 주시겠다고요?”
“그냥 돈 주고 애 혼자 키우라고 하면 되잖아. 저 애가 확실히 네 애인지는 어떻게 알아. 그냥 아무 애 가지고 와서 네 애라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니…….”
“하빈이 앞에 두고 지금 말씀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내가 실수했구나. 어찌 됐든 난 허락 못 하니 그렇게 알아라.”
“허락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두 사람 사이에 강한 스파크가 일었다. 세원은 세원대로, 세원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하빈과 세원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저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자의 신경전 끝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자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하빈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위기에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부족한 건 알지만 그래도 일부러 세원 씨 아기도 아닌데 세원 씨 아기라고 거짓말하고 그러진 않아요…….”
모든 시선이 하빈을 향했다. 하빈은 슬쩍 사람들을 둘러보다 시선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제가 맘에 안 드시는 건 아는데 그래도 아기는 세원 씨 아기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하빈의 말을 끝으로 거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세원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세원의 가족들은 다정하게 하빈을 토닥이는 세원의 모습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세원의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리고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세원의 아버지는 하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김하빈이라고요?”
“네.”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나.”
“위로 형 한 명 있습니다.”
“다른 가족은?”
“……없습니다.”
“그렇군.”
새삼 부끄러워진 자신의 가족 관계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 게 지금껏 이토록 안타까웠던 적이 없었는데.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하빈은 더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원의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습니다.”
“대학은 안 갔고?”
“형은 어떻게 대학까지 갔는데 저는 돈이 없어서 못 갔습니다…….”
“그랬어. 힘들게 지냈겠네.”
세원의 어머니보다는 퍽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는 세원의 아버지에 하빈이 한시름 놓은 마음으로 대답을 이어 갔다. 세원의 가족들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세원의 어머니는 제외하고, 세원의 형제들도 하빈에게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입을 달싹이다 결국 세원의 큰형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기 태명 같은 것도 있어요? 딸이래요, 아들이래요?”
“딸이에요. 단지라고 지었어요.”
“단지……. 왜 단지에요?”
“그냥, 바나나 우유가 맛있어서……. 단지 우유 할 때 단지…….”
“아아. 귀엽네.”
큰형에게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빈은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형에게 자랑을 늘어놨다.
“지금은 태동도 자주 한다? 그리고 많이 커서 우리가 하는 얘기도 들을 수 있고 그렇대. 그러니까 예쁜 말만 해, 좀.”
“야, 나도 애들 다 키워 봤어. 어디서 자랑이야.”
큰형의 말에 세원이 웃으며 하빈을 꽉 끌어안았다. 하빈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여전히 세원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하빈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세원의 누나는 가만히 하빈을 바라보다 물었다.
“피부가 엄청 좋네. 따로 관리 받아요?”
“아, 아뇨…….”
“그럼요?”
“그냥…….”
“타고난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젓자 세원의 누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빈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노골적인 시선에 하빈은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 말라는 세원의 말에도 누나는 멈출 줄 모르고 질문을 퍼부었다.
“세원이 어디가 좋아서 만난 거예요?”
“네? 어……. 다정하고 멋있고 그래서…….”
“다정해요? 멋있어요?”
“네…….”
“와, 세상에. 네가 다정하고 멋있대.”
“그게 뭐.”
“우리한테는 마냥 재수 없게 구는 막내인데.”
“내가 언제.”
놀리듯 말하는 세원 누나의 말에 세원이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하빈은 작게 웃으며 그런 세원을 돌아봤다.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야……. 마냥 어른 같기만 하던 세원이 가족들 앞에서는 장난스런 막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째 형은 과묵한 성격인지 여전히 말없이 하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먼저 말을 걸 자신이 없어 가만히 눈치만 살피며 앉아 있었다. 그때 세원이 둘째 형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둘째 형은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내가 형보다 먼저 결혼하게 생겼는데.”
“……그러니까. 넌 위아래도 없냐.”
“그러게 일찍 가라고 할 때 갔어야지 왜 아직도 안 갔어.”
“그게 왜 내 탓이야. 지금 네가 사고 친 거잖아.”
“사고 쳤다니. 아니거든.”
“그럼 뭐, 계획하고 애 만들었냐? 어쩌다 애 생겨서 지금 결혼하겠다고 하는 거잖아.”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세원도 입을 다물었다. 하빈은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굴렸다. 이때다 싶어 세원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 너네 어쩌다 애 생겨서 결혼하겠다고 하는 거잖아. 그래서 결혼 생활 잘할 것 같아?”
“저희 원래 만나다가 아기 생겨서 결혼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아니래? 그렇게 무계획으로 결혼하면 잘 살겠냐 이 말이야.”
“앞으로 계획해서 잘 살면 되잖아요.”
“떼쓴다고 될 일이 아니야.”
한숨을 푹 내쉬는 세원의 어머니의 모습에 제 가슴이 쿵 내려앉는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속이 상할까……. 괜히 자신 때문에 세원이 가족들과 싸우게 된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앞에 놓인 찻잔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 결혼 허락 안 해 주신다는 거예요?”
“애까지 가졌는데 결혼 허락 안 해 주면 어떻게 할 건데.”
“알아서 애 낳고 키울 거예요.”
“그렇게 나올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허락받으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 결혼 허락해 줄 거냐고는 왜 물어보는데.”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어머니 엄청 화나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치를 보아하니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았지만 세원은 멈추지 않았다.
“저도 예의상 여쭤 보는 거예요. 결혼식은 크게 안 해도 상관없어요. 우리끼리만 조촐하게 해도 되니까 나중에 할 생각이에요.”
“강세원, 너 정말!”
“곧 있으면 아기 태어나는데 어머니께서 좀 하빈이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원의 말에 세원 어머니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고 세원의 큰형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자자, 다들 그쯤 하면 됐으니까 손님 오셨을 때 밥이라도 먹자고. 엄마가 세원이 온다고 점심 식사 준비해 뒀으니까 다 같이 밥 먹자.”
“뭐가 예쁘다고 밥을 줘.”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세원의 어머니는 주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고 남아 있는 가족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입을 벙끗거렸다. 어떡하지……. 하빈이 눈만 깜빡거리다가 슬쩍 배를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가족들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갈까?”
“네…….”
세원이 하빈을 이끌고 커다란 식탁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부잣집은 다르구나…….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세원이 앉혀 준 자리에 앉아 식당을 둘러보는데 세련되게 꾸며진 식당이 커다란 주방과 연결되어 있어 뻥 뚫린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하빈이 힐끗거리며 보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세원의 누나가 말을 걸어 왔다.
“집이 좀 크죠?”
“네? 네……. 집이 멋있어요.”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있어요? 세원이랑 같이 살아요?”
“네. 세원 씨 집에서 지내고 있어요.”
“같이 살면 안 불편해요?”
“안 불편하고 좋아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세원의 누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게 아주 예쁘네.”
“그치?”
누나가 중얼거리는 말에 세원은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팔불출이냐며 세원의 누나가 핀잔을 주자 하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원을 쳐다봤다. 뭔데요? 묻는 말에 세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하빈의 등을 쓰다듬었다.
“차린 건 많이 없는데 그래도 많이 들어요.”
“……이렇게 엄청난 밥상은 처음 봐요.”
세원 어머니의 인사치레에 하빈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식탁 가득한 반찬이 놀라웠다. 이게 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반찬인가? 사 먹는 게 아니고?
놀라운 한편으로 잔뜩 긴장해서 그랬는지 금세 배가 고파진 하빈이 어서 먹고 싶은 마음에 식탁 밑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리고 있자 세원이 빨리 먹으라며 손을 당겨 숟가락을 쥐여 줬다.
가족들이 먼저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하빈도 밥을 한 숟갈 퍼 입으로 가져왔다. 하빈이 좋아하는 찰진 밥이 입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반찬으로 너비아니 한 조각을 베어 물자 고기 육즙이 퍼지면서 맛있는 갈비 향이 느껴졌다.
맛있다……. 홀린 듯 먹던 하빈이 퍼뜩 생각났다는 듯, 세원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눈을 빛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너무 맛있어요.”
“……그래요.”
하빈의 행동에 세원 어머니는 까칠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식사를 계속했다. 하빈은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음식에 집중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체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옆에서 하빈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놔 주며 밥을 챙겨 주고 있었다.
“맛있어?”
“네!”
“많이 먹어.”
“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다시 밥을 푹 퍼먹으며 금세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잘 먹었다. 하빈이 행복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훔치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주변을 둘러봤다.
가족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밥을 먹는 하빈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예의 없이 굴었나? 뒤늦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세원은 하빈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
“가, 감사합니다……. 밥이 맛있어서 너무 잘 먹었어요.”
세원 아버지의 칭찬에 하빈이 대답하자 세원의 어머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가볍게 디저트로 과일을 먹으러 다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하빈은 배가 불러서인지 솔솔 졸음이 몰려와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며 자리에 남아 있었다.
“졸려?”
“조금요…….”
하빈이 제 허벅지까지 꼬집어 가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세원의 어머니는 그런 하빈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하빈 씨는 만약 세원이가 결혼하기 싫다고 해도 혼자 아기 키울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하빈은 파드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지금 아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혼자서라도 아기 키울 거예요. 처음부터 혼자 키울 생각이었어요.”
“처음부터 혼자 키우려고 했었어요?”
“네. 근데 세원 씨가 같이 키우자고 해서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임신한 건 언제 알았어요?”
“중간에 잠깐 헤어졌었는데 그때 알았어요.”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모습에 세원의 어머니는 말없이 하빈을 바라봤다. 더 물어보셔도 되는데……. 하빈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오물거리자 세원의 어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하빈 씨한테 뭐라고 말을 못 하겠는데.”
“네…….”
“난 그쪽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요.”
“저도 당연히 그러실 것 같아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세원 씨에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니까…….”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지만 갑자기 이렇게 사고 쳐서 결혼하겠다고 나타나면 어느 부모가 좋다고 하겠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내 아들 때문에 하빈 씨 인생을 힘들게 한 것도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이 녀석만 아니었어도 임신할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 나한테 결혼 허락받으러 온 것도 아니라고 하니 내가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세원 어머니의 행동에 하빈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그냥 하빈이랑 인사할 겸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가족이 될 거니까.”
“너희 정말 결혼할 거니?”
“네. 아기 낳고 잘 살 거예요.”
“잘 살 것 같아?”
“당연하죠.”
자신만만한 세원의 말에 세원 어머니의 얼굴에 있던 작은 주름이 깊어졌다. 하빈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기도 좋아해 주시면 좋겠는데…… 지나친 욕심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족들을 둘러보다가 둘째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하빈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8개월 다 되어 간다고요?”
“네? 네.”
“몸조심해야겠네요.”
“네…….”
“건강 관리 잘 하세요.”
둘째 형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의 어머니는 하빈을 보고 연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결국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하빈 씨.”
“네, 네?”
“딸이라고 했던가요?”
“네, 맞아요.”
“세원이는 닮으면 안 되겠네.”
“왜요?”
“애가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세원 어머니의 말에 하빈이 세원을 바라봤다. 세원 씨가 싸가지 없다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세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짜증을 부렸다. 지금도 싸가지 없지 않냐며 세원의 어머니는 하빈에게 투덜거렸다. 하빈은 눈치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세원의 누나가 분위기를 풀며 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빈은 맞잡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한테 말 놓으세요…….”
“그래도 될까?”
“네, 네!”
“그럼 편하게 할게.”
“네……. 다른 분들도…….”
하빈이 눈치를 살피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하빈을 바라봤다.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치고는 꽤 수확이 좋은 하루였다.
그렇게 세원의 집에서 하루가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빈은 지쳐 반쯤 쓰러진 상태로 의자에 늘어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나오기 무섭게 하빈은 소파에 누워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빈의 전화를 받아 속사포처럼 오늘 있었던 일을 물었다. 하빈은 일단 진정하라며 되려 지환을 달래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어땠어? 어땠어?]
“세원 씨 어머니가 좀 날 안 좋아하시긴 했는데 그래도 괜찮았어.”
[다른 사람들은?]
“세원 씨 어머니도 그렇고 다들 착했어.”
[정말? 너 괴롭히고 그런 거 없었어?]
“응. 세원 씨가 너무 단호하게 우리 결혼할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해서 가족들이 당황했어.”
[결혼한다고 막무가내로 나갔어?]
“어. 결혼할 건데 허락받으러 온 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니까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시던데…….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긴 했어.”
[이야, 나 같아도 어이없긴 하겠다. 갑자기 아들이 애 생겼다고 데려와서는 결혼한다고 하면.]
“그치?”
하빈이 옷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괜히 세원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세게 나가니까 우리가 너무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하빈도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세원과 하빈의, 그리고 단지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
세원의 가족들이 모든 걸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정하고 넘어가 주길 바랐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 상상보다는 유한 반응에 다행이라고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지환은 그런 하빈에게 힘이 되어 주려는 듯 말했다.
[가족들이 너한테 뭐라고 했으면 내가 혼내 주려고 했는데.]
“그렇잖아도 형이 그렇게 말해 줘서 든든했어.”
[강세원이 잘 막아 준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 새끼가 너한테는 잘하는 모양인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는 진짜 잘한다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바뀌지? 나한테는 전혀 안 그랬었는데? 널 진짜 좋아하나 본데.]
“그래? 나 엄청 좋아한다고? 형 말 들으니까 좋은데…….”
하빈이 헤헤 웃으며 몸을 돌려 누웠다. 때마침 샤워를 하고 나온 세원이 다가와 하빈에게 짧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누가 널 엄청 좋아해?”
“세원 씨가요.”
“내가?”
“네.”
“누가 그러는데?”
“형이요.”
“지금 김지환이랑 통화 중이야?”
“네.”
[뭐야, 강세원 옆에 있어?]
“응.”
[끊어!]
“내일 통화해, 잘 자.”
[어.]
전화가 뚝 끊기고 하빈이 팔을 뻗어 세원에게 안겨 들었다. 하빈을 번쩍 안아 든 세원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조심히 눕히곤 옆에 누워 하빈의 배를 쓰다듬었다. 볼록 튀어나온 배가 단단하게 솟아 있었다.
이제 임신 8개월로 들어서자 잠자기도 힘들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때가 많아져 힘이 들었다. 세원은 피로와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로 예민해진 하빈의 옆에서 말동무를 해 주며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세원은 괜찮다며 하빈이 잘 때까지 곁을 지켜 주곤 했다.
“오늘도 잠 잘 못 잘 것 같은데 먼저 자요.”
“본가도 다녀와서 힘들 텐데 어떻게 먼저 자.”
“아니다, 오늘 피곤해서 빨리 자려나…….”
“일찍 자면 좋겠네. 피곤한데 잠 못 자면 더 힘들잖아.”
“네. 배도 뭉치고 해서 아파요.”
“팔이랑 다리 주물러 줄까?”
“좋아요.”
세원이 하빈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며 하빈의 손등이며 발등 곳곳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움직이자 세원이 귀엽다며 장난을 쳤다.
“세원 씨 어머니가 저 싫어하셔서 조금 무서웠는데 그래도 나중에는 좋게 봐 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치? 나도 그런 생각했어.”
“네. 솔직히 걱정 많이 했거든요.”
“내가 뭐랬어. 걱정할 거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저라면 싫어했을 수도 있는데 세원 씨 가족들이 착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고 모르는 애를 이렇게 받아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니까 받아주는 거지.”
“역시 세원 씨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추켜세워 주는 하빈의 말에 세원이 웃으며 발등에 입을 맞췄다.
“예쁘다, 하빈이.”
세원의 말에 하빈은 부끄러워져 붉어진 얼굴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저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빈은 이불을 폭 덮어쓰고 눈을 감은 채 주물러 주는 손길을 느끼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