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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 함께 살까요? (14/20)
  • 14. 우리 함께 살까요?

    산책도 하고 체조도 해 주라는 의사의 말에 하빈은 요즘 집에서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으면 좋겠으니 뭐든 해야지. 티비에 나오는 요가 자세를 보며 나름 따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에 하빈이 인상을 쓰고 전화를 받았다.

    “왜 또.”

    [너는 전화 받는 게 왜 그러냐.]

    “내가 뭘. 형이 전화를 너무 많이 하잖아.”

    [그럼 형이 동생 걱정돼서 전화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

    “그건 아닌데, 아무튼 왜.”

    [나 이따 너희 집 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사갈게.]

    “온다고? 언제? 이따 세원 씨 오기로 했는데.”

    [야, 걔는 뭐 맨날 온대? 오늘은 나 갈 거니까 오지 말라고 해.]

    투덜거리는 지환의 말에 하빈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차마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 맨날 걔 만나느라 나랑 안 만났잖아. 너 보고 싶단 말이야.]

    “알았어. 그럼 형 만나서 저녁 먹고 세원 씨는 밤에 보지 뭐.”

    [그래, 그러든가. 그러면 저녁에 뭐 먹을래. 아니다, 그냥 나가서 먹을까?]

    “귀찮게 뭘 그래. 집에서 먹자.”

    [집에서 먹고 치우는 게 더 귀찮지 않겠어?]

    “그런가…….”

    [그럴 것 같은데. 나가서 먹자.]

    “알았어. 이따 봐.”

    전화가 끊기고 한숨을 푹 내쉰 하빈이 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도 일찍 만나고 싶었는데……. 차마 형을 내칠 수 없었던 하빈이었다. 긴 신호음이 이어지고 받지 않나 싶던 순간 전화가 걸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세원 씨. 아니요, 무슨 일은 딱히 없는데…….”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시무룩해서.]

    “내가 시무룩했어요? 아니……. 방금 형한테 전화가 왔는데…….”

    [김지환한테? 왜? 또 뭐라고 잔소리했어?]

    “그건 아니고요. 형이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해서 저녁에 못 볼 것 같아요.”

    [그래? 아쉽네. 그럼 저녁 먹고 만날까?]

    “네. 형이랑 금방 저녁 먹고 들어올게요.”

    [천천히 먹고 들어와. 기다릴 테니까.]

    “세원 씨도 저녁 맛있는 거 먹어요.”

    [알았어.]

    제 마음을 금방 알아채는 세원이 참 신기했다.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잘 알지. 히죽 웃으며 전화를 끊은 하빈이 자리에 누워 배를 문질렀다. 이제 배도 많이 단단해졌고 볼록하게 나와 임신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할 텐데.”

    눈을 감고 배를 만지작거리던 하빈이 그대로 잠시 잠들어 버렸다.

    “김하빈, 야, 김하빈. 얼른 일어나 봐.”

    “……어?”

    눈을 뜨자 지환이 앞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을 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몇 시야. 핸드폰을 꺼내는데 지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잔뜩 와 있었다. 인상을 쓰고 있는 형의 모습에 눈썹을 축 내리깔고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자면 잔다고 얘기를 해야지. 연락이 안 돼서 놀랐잖아.”

    “어쩌다 보니까 잠들었어…….”

    “으이그. 어떻게 벨 소리에도 한 번도 안 깨고 잘 수가 있냐?”

    “몰라. 잠이 더 늘었어.”

    지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하빈이 그대로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나 배고파. 형의 말에 하빈은 얼른 저녁을 먹자며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

    “고기 먹자. 너 몸보신도 해야지.”

    “무슨 고기?”

    “백숙 이런 거 어때.”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하빈이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이제 제법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갔을 줄이야.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지환이 말을 걸어 왔다.

    “강세원하고는 잘 지내고 있어?”

    “응.”

    “하긴 내가 물을 걸 물어야지.”

    쯧쯧, 혀를 차는 지환의 모습에 하빈이 힐끗 제 형을 바라봤다.

    “형은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나? 내 사정도 궁금하긴 하냐?”

    “당연하지.”

    “나야 늘 지내던 대로 지내지.”

    한숨을 쉬며 핸들을 돌리는 모습에 하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도 돈이 많이 필요한가……. 눈치를 살피며 하빈이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지환이 도착했다며 어서 내리라고 말하고는 먼저 훌쩍 내려 버렸다. 뒤따라 내린 하빈이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혹시 아직도 돈 많이 필요해?”

    “왜. 돈 필요하면 구해 주게?”

    “아니, 나 돈 모은 거 있으니까 남은 거 다 주게…….”

    “남은 거 다 주면 넌 어쩌려고. 그거 가지고 택도 없거든.”

    “그치만…….”

    “됐어.”

    손사래를 치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간 지환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밑반찬과 함께 물이 나오고 지환은 서둘러 주문을 넣었다. 배가 많이 고프긴 고팠던 모양이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형을 보기만 하고 있던 하빈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세원 씨한테 물어볼까?”

    “뭘 물어봐.”

    “돈…….”

    “미쳤냐?”

    “왜?”

    “너 그 새끼랑 결혼하고 싶다면서.”

    “응.”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반찬을 집어 먹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안 그래도 없는 집이라고 무시할 것 같아서 짜증나는데 돈까지 빌려 봐. 그 집에서 얼마나 널 물로 보겠냐? 됐어!”

    “결혼할 수 있긴 할까 몰라.”

    “결혼 안 하면 애는 어떻게 키워.”

    “나 혼자…….”

    “너 혼자 어떻게.”

    “모르지…….”

    아무 대책도 없는 상태였다. 그저 낳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세원 씨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빈이 반찬을 깨작이며 눈치를 보자 지환이 하빈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강세원이 다 책임진다고 했어도 너무 믿지 말고.”

    “왜?”

    “걔만 믿고 어떻게 살아. 야 사람 그렇게 쉽게 믿는 거 아니야.”

    “그래도 세원 씬데…….”

    “아휴, 답답해 죽겠다. 너희가 그렇게 좋아 죽으면 일단 결혼부터 하라니까? 왜 아직도 결혼도 안 하고 이러고 있는 거냐고.”

    “일단 내가 임신 중이잖아. 그래서 결혼을 못 하는 거지.”

    “그럼 애 낳으면 결혼한대? 부모님한테는 말 했어?”

    “아마 그렇겠지……. 부모님한테는 말씀 안 드린 것 같은데…….”

    “왜 또 말이 그렇게 돼.”

    “그야 나도 잘 모르니까…….”

    “애 낳아서 강세원네 집에 뺏기고 싶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뺏기다니. 내가 어떻게 키워 온 아긴데. 씩씩거리는 하빈을 본 지환은 알겠다며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늘 좋지 않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지환이 나빴다. 하빈도 하빈대로 삐진 티를 내며 앉아 있는데 백숙을 가져온 직원이 임신한 하빈을 알아보고는 많이 먹으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많이 먹고 아기 건강하게 낳아요.”

    “감사합니다. 거봐, 형만 나보고 뭐라고 하잖아.”

    하빈의 말에 지환은 입이 다물렸다. 덕분에 식사하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지환이 먼저 국을 떠 하빈에게 내밀고 하빈이 그걸 받아먹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형은 내가 세원 씨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랬을 거야?”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세원은 어떤 인간인지 아니까 그렇지.”

    “형이 아는 세원 씨랑 내가 아는 세원 씨는 다른 것 같아.”

    고기를 잘게 찢으며 하빈이 중얼거렸다. 지환은 뭐가 다르냐며 투덜거렸다.

    “그냥……. 다른 것 같은데…….”

    “사람이 뭐 얼마나 바뀌겠냐? 다 똑같지 뭐. 야, 너 내 말 잘 들어라. 강세원이 너한테 나쁜 소리 하면 나한테 당장 일러. 내가 혼내 줄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난 진짜 걔 못 믿어. 너랑 결혼한다는 것도 못 믿겠어.”

    불신으로 가득 찬 지환의 모습에 하빈은 입을 다물었다.

    “그치만 형도 잘한 것 없다고 했으면서.”

    “너 진짜 걔 편들래?”

    “아니, 이건 사실이잖아.”

    “사실은 뭐가 사실이야, 아니야. 나 잘못한 거 없어. 걔가 먼저 잘못한 거야.”

    뻔뻔한 지환의 말에 하빈은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물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과 만나게 된 세원은 지환을 무시하고 하빈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지환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봤다.

    “하여간 둘이 붙어서 지랄하는 꼴 보면 아주…….”

    “형, 애가 다 들어.”

    하빈이 배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지환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 몸을 홱 돌려 집으로 가 버렸다. 세원은 하빈을 끌어안고 저녁은 맛있게 먹었냐며 물어왔다.

    “형이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무슨 잔소리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그냥 잔소리…….”

    “또 내 얘기 했나 보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세원은 한숨을 푹 쉬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지환이 무슨 얘기 해도 믿지 마. 알았지?”

    “형은 자기 믿으라고 하고 세원 씨는 세원 씨 믿으라고 하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누구 믿을 건데.”

    세원의 말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당연히 세원 씨 말 믿어야죠.”

    “잘했어.”

    하빈의 볼에 입을 맞춘 세원이 차 문을 열고 하빈을 태웠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세원의 집으로 향했다.

    “하빈아.”

    “네?”

    운전을 하던 세원이 힐끗 하빈을 쳐다보고 이름을 불렀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하빈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세원을 돌아봤다. 왜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같이 살 때도 되지 않았어?”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지. 내가 서울 오기 전부터 얘기했잖아. 같이 살자고.”

    “그래도…….”

    망설이는 하빈의 모습에 세원은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을 감싸 왔다. 하빈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랑 같이 살자.”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세원의 한마디에 하빈은 고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같이 살아도 될까……. 힐끗 세원을 쳐다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결혼은 어떻게 해요?”

    “결혼? 너 아기 낳고 해야지. 지금은 힘들어서 어떻게 해.”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에 하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혼해서 함께 살며 가족이 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걸 알아챘는지 세원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기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랑 다 하자.”

    다정한 한 마디 한 마디에 하빈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하빈은 집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새삼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 그리고 믿음직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짐은 옮길 거 많아?”

    “웬만한 건 여기 다 있어서 가져올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옷 같은 건?”

    “그것도 뭐……. 임신하기 전 옷은 지금 안 맞아서…….”

    “그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살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전부 다시 사자는 그의 말에 멍하니 바라보던 하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냐, 몸만 와. 다른 건 필요 없어.”

    예쁘다며 입술을 가져오는 세원의 행동에 하빈이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지금도 다 세원 씨가 사 준 건데.”

    “더 사 주지, 뭐.”

    “조만간 짐 옮겨요.”

    “그래, 좋아. 최대한 빨리 옮기자.”

    서두르자며 조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으니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마주 본 두 사람은 배를 쓰다듬으며 마사지를 했다. 세원이 하빈의 부른 배에 마사지 크림을 듬뿍 발라 문지르고, 하빈은 그저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프진 않아?”

    “네.”

    “태동 요즘도 많이 하지?”

    “네! 저 혼자 있을 땐 엄청 자주 해요.”

    “나랑 있을 때도 많이 하면 좋은데.”

    “그러게요……. 지금도 하면 좋은데!”

    신이 나서 대답하자 세원이 웃으며 고개를 숙여 하빈의 배에 귀를 가져갔다. 태동 또 하려나. 기다리는 세원에게 태동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지만 원할 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기다렸지만 미동도 없는 배에 세원은 포기하고 다시 마사지를 했다.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하빈의 얼굴을 살폈다. 찌푸렸던 인상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좀 괜찮아?”

    “네. 뻐근했던 것도 풀리고 좋아요.”

    “자주 뭉치니까 풀어 줘야 해.”

    “세원 씨가 해 주니까 좋아요.”

    헤헤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마사지가 끝나고, 잘 준비를 마친 하빈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무슨 꿈을 꾸려나. 세원이 옆으로 다가와 하빈을 꼭 끌어안았다. 배가 불러 찰싹 달라붙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잘 자.”

    세원이 하빈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하빈은 사르르 미소지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세원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회사에 갔나, 운동을 갔나. 멍하니 누워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다. 배고파…….

    냄새에 이끌려 식탁으로 온 하빈은 세원이 만들어 놓고 간 듯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입맛을 다시며 식탁에 앉은 하빈은 샌드위치에 우유를 곁들여 먹고 마셨다. 하나를 먹어치우자 배가 불렀다. 요즘 들어서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임신을 하게 되니 이런 부분들이 참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위가 눌려 먹는 양도 줄어들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폐도 눌려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 왔다.

    식기세척기에 대충 접시를 집어넣은 하빈이 손을 씻고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나왔다. 핸드폰을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원 씨가 핸드폰도 새로 사 준다고 했었는데. 하빈이 제 핸드폰을 찾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세원 씨가 해 준다고 한 게 참 많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건가.

    입을 삐죽 내밀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발걸음이 시무룩했다. 세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한 하빈이었다. 난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뭘 해 주지…….”

    핸드폰을 찾은 하빈이 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세원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세원 씨. 어디에요? 일어났는데 없어서…….”

    [나 지금 회사 왔어. 일어났어?]

    “네. 벌써 출근했어요?”

    [벌써가 아니지. 시간이 몇 신데.]

    그제야 시간을 보자 열한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헉, 내가 이렇게 늦게 일어났단 말이야? 놀란 상태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전화했어? 나 보고 싶어?]

    “네, 보고 싶어요.”

    [지금 갈까?]

    “일해야 하잖아요. 일 끝나고 봐요.”

    [지금 오라고 하면 지금 갈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일 끝나고 와요!”

    도움은 못 줄망정 방해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빈은 열심히 하고 저녁에 보자는 인사를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오늘 할 일을 계획했다. 티비에서 해 주는 요가를 따라 해 보고 세원 씨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 놔야지. 나름 완벽한 계획이었다.

    계획은, 그랬다.

    요가를 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실컷 자 버린 하빈은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나 끔뻑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팅팅 부은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이게 뭐야…….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자 부기가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하빈은 처음 계획을 포기하고 요리로 넘어갔다.

    “저녁을 뭘로 해 먹지.”

    냉장고를 뒤적거리자 요리 재료가 이것저것 나오긴 하는데 할 줄 아는 요리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볶음밥인가…….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불고기용 고기가 들어 있었다. 불고기 할까? 나 불고기 할 줄 아는데.

    하빈이 눈에 불을 밝히고 고기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해 볼까.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본 양념 조리법 을 켜 두고 열심히 불고기를 만들었다. 움직이다 힘이 들 때면 의자에 앉아 헥헥대며 쉬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번, 마침내 식탁 위에는 밥과 반찬이 제법 풍성하게 올라가 있었다. 하빈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세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면 좋을 텐데. 하빈이 언제 들어오냐고 전화하려는 찰나 도어락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원 씨?”

    하빈이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밖의 세원이 웃으며 하빈을 반겼다.

    “하빈아, 뭐야? 맛있는 냄새 나는데.”

    “밥했어요. 얼른 들어와요.”

    “네가 밥했어? 힘든데 쉬고 있지.”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따스해 기분이 좋아졌다. 하빈은 세원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커다란 식탁 반이 꽉 찰 정도로 푸짐한 저녁에 세원은 잘했다며 하빈의 볼에 입을 맞췄다.

    “밥 식기 전에 빨리 먹어요, 빨리.”

    하빈의 재촉에 세원은 얼른 손만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왔다.

    “배고프다. 맛있는 냄새 나니까 더 배고파졌어.”

    “맛있을 것 같아요?”

    “어. 집밥 먹고 싶었는데.”

    세원의 말에 뿌듯해진 하빈이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웃으며 세원이 먼저 한 입 먹기를 기다렸다.

    “왜 넌 안 먹고.”

    “먼저 먹어 봐요.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임신한 뒤로는 입맛이 오락가락해서…….”

    “고생이 많네. 근데도 요리했어? 다 맛있겠지, 뭘 걱정해.”

    말하며 불고기를 집어 든 세원이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세원이 음미하듯 고기를 씹는 동안 잔뜩 긴장한 하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맛있네.”

    “그래요? 맛있어요? 헤헤.”

    세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 한 마디에 힘들었던 것들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하빈도 웃으며 한 젓갈 집어 숟가락 위로 고기를 가져왔다.

    “나도 먹어 봐야지.”

    “많이 먹어, 많이. 고기 많이 먹어야 아프지 않지.”

    “고기 많이 먹고 있어요.”

    우물우물 고기를 먹으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입맛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하빈은 다른 걸 집어 먹으며 세원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물었다.

    “오늘은 회사에서 뭐 했어요?”

    “오늘 회사에 오랜만에 어머니 오셔서 이야기 나눴어.”

    “헉……. 어머니…….”

    “왜?”

    “아니, 무서워서…….”

    “뭐가 무서워.”

    아무렇지 않은 세원의 표정에도 지레 겁을 먹은 하빈은 젓가락만 우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마어마하다는 세원의 집안은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어머님은 얼마나 무서울까. 고개를 젓자 세원은 별것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회사 일 잘 돌아가는지 묻고 나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셨어.”

    “그,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래서 뭐……. 회사 잘 돌아간다고 얘기하고 네 얘기도 좀 하고.”

    “제 얘기요?!”

    하빈이 놀라 소리쳤다. 세원은 왜 그렇게 놀라냐며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너 만나고 있다고 얘기한 거야.”

    “이, 임신한 건 얘기 안 했죠?”

    “아직 말씀 안 드렸어. 곧 말씀드려야지.”

    “사, 사고 쳐서 싫어하실 것 같은데…….”

    하빈이 눈을 내리깔고 밥을 헤집으며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세원은 아니라며 하빈을 달랬다.

    “우리 부모님 그런 사람 아니야, 괜찮아. 안 무섭다니까?”

    “세원 씨한테만 안 무서운 거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은 다 무섭다고 했는데……. 하는 말에 세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그래?”

    “그냥 사람들이…….”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안 무서워.”

    턱을 괴고 다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원이 따스해서 하빈은 잠시 마음을 놓을 뻔했다. 세원이 이리 다정하다면 그의 가족도 이렇게 착하고 따스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하빈은 걱정 반, 기대 반인 상태로 세원을 바라봤다.

    “걱정되는데…….”

    “걱정하지 마. 우리 엄마는 너 만난다고 하니까 잘 만나 보라면서 축하도 해 주셨는데.”

    “지, 진짜요?”

    “그럼.”

    “제가 누군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거야 잘 모르시겠지만.”

    세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지……. 하빈은 시무룩해서 맨밥을 깨작거리며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까. 세원의 가족들과 만나지 않고도 결혼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 아마 없겠지. 그걸 떠나서 내가 세원 씨랑 결혼할 수는 있을까? 궁금해졌다. 내 주제에 세원 씨랑 만나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세원 씨, 저 진짜 세원 씨랑 만나도 되는 거예요? 아니, 세원 씨가 저 만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마저 밥을 먹는 태연한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원 씨만 믿을게요…….”

    “나만 믿어.”

    당당한 그의 모습에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아기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빈이 배를 꼬옥 감싸고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기만은.

    * * *

    세원과 집을 합치기로 한 날이었다. 이삿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집에 있는 짐들은 대부분 버려졌고 간단한 짐만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지환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저지르고 본 상태였다. 나중에 통보할 생각이었다. 하빈은 세원과 만나고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나도 몰라…….”

    “괜찮아. 우리 어차피 같이 살 건데 뭐. 아기도 키워야 하고.”

    “맞아요.”

    그날 저녁, 하빈이 지환에게 전화로 통보했을 때 지환은 난리를 피우며 온갖 소리를 했고 하빈은 시끄럽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세원의 집을 모르는 지환에게 하빈의 이사는 꽤 충격이었다.

    그렇게 하빈이 세원의 집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은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해 와인을 땄다. 하빈은 주스를 따랐다.

    “싸우지 말고 잘 지내는 거야.”

    “우리 싸우면 어떡해요?”

    “한 명이 먼저 화해하자고 해야지.”

    “그게 누군데요?”

    “글쎄.”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아마 그건 내가 되겠지, 생각하는 하빈이었다. 동시에 세원 역시 자신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며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음료를 마시며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틀었다.

    “기분 좋아요.”

    “그치.”

    “세원 씨랑 있으면서 신기한 거 많이 체험하는 것 같아요.”

    “좋아?”

    “네.”

    “그럼 됐어.”

    가벼운 대답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마주 잡아 오는 그의 손이 따스했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를 타던 두 사람이 자리를 옮겨 소파에 마주 앉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쪽쪽 입을 맞추는 행동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아, 흐응……. 하빈이 몸을 들썩이자 세원이 하빈의 엉덩이를 받쳐 제 위로 올리며 허리를 지분댔다.

    “괜찮겠어?”

    “흐으, 응……. 네에…….”

    좋다며 하빈이 세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침대로 갈까?”

    “으응, 여기서, 응?”

    “소파에서 해?”

    “응…….”

    고개를 끄덕이며 하빈이 다리를 벌렸다. 다리 사이에 선 세원은 하빈의 바지를 끌러 내리고 긴 상의를 벗겨 냈다. 순식간에 전라가 된 하빈은 부끄러움도 없이 제 배를 받치고 앉아 다리를 벌렸다.

    “세원 씨…….”

    “핥아 줄까?”

    “하, 앙……. 아흣!”

    세원이 고개를 숙여 하빈의 뒤로 입을 가져갔다. 주위를 혀로 핥아 주자 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그 안으로 손가락도 함께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자 찔꺽이며 애액이 흘러나왔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뒤를 잡아 벌리며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안을 자극하자 하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흐, 흐앙! 앗! 흐윽, 후으, 윽, 흐, 응.”

    “여기가 좋아?”

    “거기, 응, 하으…….”

    세원의 혀가 빠져나오더니 뒤따라 들어온 손가락이 익숙한 곳을 찔러 왔다. 하빈이 몸을 마구 들썩이며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온몸이 자극으로 물들었다. 짜릿하게 전율이 일고 푹푹 쑤셔 대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세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빈의 페니스 끝을 물고 혀로 장난을 쳐 댔다.

    “하응, 으앙, 앙!”

    쭙쭙 빠는 소리와 함께 흥건하게 젖은 하빈의 뒤에서 애액이 흘러 넘쳤다. 세원은 옷을 벗지 않고 페니스만 꺼내 흔들며 하빈의 뒤로 가져갔다. 하빈아. 부르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야했다. 하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세원에게 손을 뻗었다.

    “세원, 씨, 후으, 흑…….”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는 페니스가 안을 가득 채웠을 때, 세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침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빈의 허리를 붙잡아 단단히 고정한 뒤 허리 짓을 하는 세원의 몸짓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하앙! 아흐, 흐앙! 아! 앙! 아흑, 후앙, 앗!”

    쑥쑥 쳐올리는 페니스가 깊은 곳에 닿아 오자 하빈이 자지러지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오르가슴에 젖어 바들바들 떠는 몸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발끝이 오그라들고, 하빈은 세원의 목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세원, 씨, 흐읏, 흐, 응, 으앙……!”

    아래가 뚫리는 느낌에 하빈은 세원의 밑에서 울며불며 매달렸다.

    자세를 바꿔 하빈의 옆으로 온 세원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뒤에서 허리 짓을 해 댔다. 긴 페니스가 쑥 빠져나왔다가 치고 들어갈 때마다 하빈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세원의 페니스를 절박하게 물어 댔다.

    소파 위로 끈적한 정액과 애액이 낭자했고, 하빈은 정신을 놓은 채 흔들리며 제 배를 감쌌다.

    “우흑, 흣, 아흐, 앙, 앗, 아흑…….”

    “하……. 하빈아…….”

    세원 역시 잔뜩 흥분한 채로 하빈에게 피스톤 질을 해 대고 있었다. 세원이 박차를 가해 오자 하빈은 바들바들 떨며 더욱 힘을 줘 그를 받아들였다. 꽉 물어 대는 하빈의 뒤를 세원이 있는 힘껏 퍽퍽 쳐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질펀하게 사정한 세원이 하빈의 위로 쓰러지듯 엎어져 귓가에 입을 맞췄다.

    “아……. 후으…….”

    “좋았어? 응?”

    “네…….”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움직이는 세원에 하빈은 눈을 감고 다리를 벌렸다. 정자세로 박아 넣는 세원에 하빈은 제 허리를 붙잡은 손을 마주 잡고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교성을 내질렀다.

    “아앙! 아! 흐앙! 하, 아, 흐읏, 아흑, 하앙!”

    세원의 허리 짓에 하빈은 눈물을 쏟아 내며 절정에 올랐다. 몇 번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땀과 정액, 그리고 애액으로 가득한 소파는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었다.

    하빈은 주먹을 꽉 쥐고 안으로 퍼져 들어오는 세원의 정액에 함께 사정하며 고개를 떨궜다. 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섹스를 마치고 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하빈을 세원이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옮겨 주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뭐가 미안해요. 같이 좋아서 한 건데. 하빈이 세원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잠시 뒤, 뒷정리를 하고 온 세원이 하빈의 곁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살게 되어서 너무 좋아.”

    “저도요. 솔직히 걱정은 되는데 너무 좋아요.”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모르겠어요……. 멀어지고 그럴까 봐.”

    “가까워지면 더 가까워졌지 멀어지진 않을 것 같은데.”

    쪽, 입을 맞추는 세원에 하빈은 그럴까요? 하고 웃었다. 자신이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원의 가족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소개받고 싶지도 않은데 언젠가는 만나야 하겠지. 그 시간이 최대한 늦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아기 낳고 나서…….

    “세원 씨네 가족 만나는 날이 온다면…….”

    “언젠간 만나야지. 결혼도 해야 하니까.”

    “나중에 아기 낳고 나서 만나면 안 돼요?”

    “왜?”

    “임신했을 땐 위험하니까…….”

    “그런가?”

    “네. 위험할 것 같아요.”

    무슨 일 당할지 어떻게 알고……. 오들오들 떨며 하빈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세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알겠다며 하빈의 가슴팍을 토닥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든 들어주는 세원은 참 좋았다. 하빈은 그의 품을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나중에 세원 씨랑 결혼 못 해도 후회 안 해요.”

    “나랑 결혼 안 하면 누구랑 할 건데.”

    “아니, 결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왜 못 해.”

    “가족들이 반대해서…….”

    “누가 반대를 해. 반대 못 해.”

    단호한 말에 하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럴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가족들 눈에는 제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요.”

    “가족들 마음에 안 드는 게 왜 중요해. 내가 마음에 든다는데.”

    “세원 씨는 가족들 상관 안 하고 마음대로 해요?”

    하빈이 물었다. 세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마음대로 하는데?”

    “역시, 괜히 막내아들이 아니네.”

    “내가 막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세원에 하빈이 웃으며 가슴을 콕콕 찌르고 놀려 댔다. 그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빈의 장난에 세원은 코웃음을 치다 입을 맞추고는 얼른 자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으니까 할 말 없어서 자라고 하는 거죠.”

    “아니야. 얼른 자.”

    “에이…….”

    “아니라니까.”

    볼을 붙잡아 늘리는 세원에 하빈이 아프다며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하빈은 다시 세원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길 바랐다. 피곤이 싹 사라지길…….

    다음날, 하빈은 조금 찌뿌둥한 몸으로 눈을 떴다. 세원의 집에서 맞이하는 첫날이었다. 하빈은 떨리는 마음으로 거실에 나와 집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이렇게 넓은 집에서 나 혼자 종일 있어야 한다고? 말이 안 되는데.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세원 씨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원은 출근한 상태였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함께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피곤한 탓인지 배가 뭉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어떻게 풀어 주지……. 하빈이 혼자 마사지를 해 보겠다며 낑낑거렸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안 되는데…….”

    늘 세원이 해 주던 터라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도 세원이 집에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하빈은 포기하고 커다란 침대에 철푸덕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높은 천장이 하늘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좋은 집에 다 살고. 출세한 건가……. 팔자 핀 건가……. 하빈이 멍하니 생각했다.

    “세원 씨는 나랑 만나서 뭐가 좋지?”

    몸을 뒤척이며 하빈이 중얼거렸다. 세원은 자신과 만나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생긴 거야 이렇게 생긴 사람은 나가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때마침 세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타이밍 진짜 좋다. 하빈은 고민하다 세원의 전화를 받았다. 이왕 전화하는 김에 한번 물어볼까?

    [하빈아, 뭐해? 일어났어?]

    “세원 씨. 회사에 있어요?”

    [응. 회사에 있지. 너는 집 아니야?]

    “아까 일어나서 계속 집에 있어요.”

    [혼자서 안 심심해? 뭐 하고 있어?]

    “낮에 배가 너무 뭉쳐서 마사지하고 싶었는데 혼자라서 잘 못 했어요…….”

    [그랬구나. 이따 내가 가서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야 해요. 세원 씨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칭얼대며 애교를 부리자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은 고민하다 말을 꺼내 놨다.

    “세원 씨.”

    [응?]

    “세원 씨는 나 왜 만나요?”

    [왜 만나냐니?]

    “그냥……. 내가 뭐 조건도 좋을 것도 없고 예쁜 것도 아니고 임신한 것뿐인데, 임신해서 만나 주는 거예요? 궁금해서요.”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좋아하니까 만나지.]

    “왜 내가 좋지…….”

    [좋아하는데 이유가 많이 필요한가. 너니까 좋아하는 거지. 그리고 네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데.]

    세원의 속삭임에 하빈이 붉어진 얼굴로 홱 몸을 돌려 누웠다.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참나.

    “알았어요……. 집에 빨리 와요. 오늘 병원도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어. 조금 이따가 나가려고.]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어.]

    “네.”

    하빈이 전화기에 쪽쪽 뽀뽀 소리를 내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럽게 왜 웃는 거야. 짜증을 내려다가도 됐다, 싶은 마음에 전화를 휙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세원을 찾아 댔다.

    “으응, 세원 씨 보고 싶어!”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까지, 완벽하게 자신도 주책바가지였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이제 퇴근한다는 세원의 메시지를 확인한 하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것저것 찍어 발랐다. 세원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 왔어.”

    현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빈이 엉성한 걸음새로 달려 나갔다.

    “어어, 뛰지 마. 뛰지 마.”

    “그래도!”

    좋아서 그런 걸 어떡해요. 하빈이 소리치며 세원을 끌어안았다. 배가 불룩 튀어나와 품에 꼭 안길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하빈은 안아 달라며 조르는 목소리를 냈다. 세원에게 꼭 안기고 싶었다. 배 마사지도 받고 싶었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리광이 심해?”

    “그냥……. 세원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빈이 눈치를 살피며 세원의 시선을 피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다 턱을 확 잡아 눈을 맞췄다. 뭔데, 또 쓸데없는 생각했지. 정곡을 찔러 오는 세원의 촉에 하빈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아니긴, 맞잖아. 뭐야. 오늘은 또 뭐가 걱정이야.”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수준이었다. 하빈이 걱정이 많아 늘 혼자 땅을 파고 있다는 걸 안 뒤로 세원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고 있었다. 그런 면까지 너무 완벽하게 좋은 그였다. 하빈은 세원에게 푹 빠진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그냥 세원 씨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그런 고민이라면 괜찮아.”

    “왜요?”

    “나를 더 좋아하면 돼.”

    “너무 뻔뻔하다!”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원은 맞는 말 아니냐며 볼을 꼬집었다. 아닌데요! 애써 부정했지만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갈수록 더더욱 좋아지는 그였다.

    “얼른 나가요. 예약 시간 늦으면 안 돼요.”

    “아, 그러자. 예약 늦겠다.”

    하빈이 세원과 함께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가 보는 병원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예약하지 않았으면 오늘 안에 진료를 못 봤겠는데? 하빈이 새삼 세원을 향해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또 반했어?”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제는 웃음이 나오는 하빈이었다.

    “뭐예요, 그게.”

    “아니. 그냥, 네 눈빛이 그래서.”

    “웃긴다, 진짜!”

    하빈이 세원을 퍽 때리고 자리에 앉아 잡지를 집어 들었다. 육아 잡지에는 남편과의 관계라든가 아이와의 유대감에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한창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이름이 불리고 하빈은 세원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의사에 하빈이 인사를 하자 의사도 세원과 하빈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초음파도 하고 피검사도 하고 오랜만에 이것저것 다른 검사도 할 예정이에요.”

    하빈은 그 말에 놀라 세원을 쳐다봤다.

    “갑자기요?”

    “네. 간단한 검사만 할 거니까 괜찮아요.”

    달래는 말에 하빈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의사와 세원을 번갈아 보았다. 그동안 세원은 간호사에게 이끌려 방을 빠져나갔다. 어어, 뭐지……. 옷을 갈아입은 하빈은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아픈 곳이 있는지 걱정이 된 세원이 예약해 놓은 일이었다.

    “세원 씨, 검사 예약을 했으면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럼 안 한다고 할 수도 있잖아.”

    “내가 왜 안 한다고 해요?”

    “너 주사 무서워한다며.”

    “주사 무서워하니까 말을 해 줘야죠!”

    “그런가?”

    세원이 웃으며 피를 뽑은 흔적이 선연한 하빈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아파……. 채혈의 충격에 눈물까지 찔끔 흘린 하빈은 아직도 뭘 해야 하나 눈치를 살피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 끝났대. 세원의 말도 믿지 못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 하빈이었다.

    “얼른 와.”

    “싫어요.”

    “얼른 와야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하지.”

    그건 또 중요했는지 하빈이 뒤따라 쪼르르 들어가서는 의사 앞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이제 7개월 정도 됐는데 곧 있으면 임신 후반기에 들어서니까 조심해야 해요, 라는 말로 시작된 의사의 말은 잔소리가 되어 줄줄 이어졌다.

    “이제 쉽게 배도 많이 당기고 손발도 많이 저리고 부종도 생길 거니까 관리 잘해 주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피로가 많이 쌓여서 더 아플 수 있어요.”

    “아아……. 배가 자주 뭉쳐요.”

    “배가 뭉쳤어?”

    “네. 낮에도 그랬었어요.”

    “맞다, 그랬었댔지. 내가 마사지해 준다고 하고 깜빡했네.”

    하빈이 시무룩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다 웅얼거렸다.

    “어디 안 좋진 않겠죠……? 손발도 저리고 그러면 어떡해요?”

    의사는 괜찮다며 하빈의 손을 토닥였다.

    “그렇게 심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아기가 엄마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까 동화책 같은 것도 많이 읽고 노래도 듣고 그러세요.”

    “진짜요?”

    “육아용품도 준비해 두시는 게 좋아요.”

    “네!”

    육아용품을 준비해 두라는 말에 하빈의 눈이 반짝였다. 아기와 관련된 것들은 모두 좋았다. 울상을 했다가도 금세 웃어 보이자 세원이 귀엽다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료실을 빠져나와 세원이 수납을 하는 동안 하빈은 대기실에 있었다. 찬물도 안 좋을까 싶어 정수기로 조금 따스한 물을 받아 마시는데, 아이 한 명이 다가와 하빈의 배를 가리켰다.

    “아기!”

    “동현아, 이리 와. 그러는 거 아니야.”

    “여기 아기 있어!”

    “쓰읍, 얼른 이리 와.”

    동현이라는 아이는 병원 안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둘째를 임신한 듯한 아이 엄마가 활발한 아이를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하빈은 동현이라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제 배 위로 가져댄 뒤 속삭였다.

    “아기가 느껴져?”

    “우와…….”

    “여기 아기 있다?”

    “신기하다…….”

    눈만 깜빡거리며 자신과 배를 번갈아 쳐다보는 동현에 하빈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귀여워. 아이 엄마가 허둥지둥 다가와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고 아이를 질질 끌고 갔다. 아이는 신기하다며 또 하고 싶다는 발버둥을 쳐 댔다.

    “뭐 했어?”

    “저 애가 와서 장난치길래 배 만지게 해 줬어요.”

    “어허, 아무나 만지게 해 주면 안 되는데.”

    세원이 제법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 맘이지! 하빈이 말하자 세원은 안 된다며 옷깃을 여미고 하빈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하빈이도 단지도 아무도 건드리면 안 돼.”

    “웃겨,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세원이 말했다. 어쩐지 든든한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하빈이 웃는 얼굴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산부인과를 나온 두 사람은 바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나온 김에 바로 육아용품 쇼핑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두 사람이었다.

    “신발 봐봐. 엄청 작다.”

    “너무 귀엽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신발에 하빈이 시선을 빼앗긴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세원은 그 옆에 서서 작은 사이즈의 아기 옷을 만지작거리며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었다. 무슨 색이 좋을까? 세원의 물음에도 하빈은 그저 넋을 놓고 구경을 했다.

    “하빈아.”

    “네, 네?”

    “뭐 사고 싶어. 사고 싶은 거 다 골라.”

    “너무 많이 사도 안 좋을 것 같아요.”

    “왜?”

    “단지 태어나고 나면 또 사고 싶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조금만 사 두고 그때 가서 또 사면 되지 않을까요.”

    “그럴까?”

    “네.”

    하빈이 하늘색 옷 한 벌과 분홍색 옷 한 벌을 골라 세원의 앞에 내보였다. 세원은 둘 다 괜찮다며 다 사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하나만 골라 봐요.”

    “딸이라고 했으니까 분홍색으로 할까?”

    “음……. 그럴까요?”

    “그러자.”

    분홍색 옷과 신발을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은 하빈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세원이 계산을 마치고 정성스럽게 포장한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제가 들래요!”

    “그래, 그래.”

    “너무 좋다. 빨리 아기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이제 단지가 듣기도 잘 듣는다니까 좋은 말도 많이 해 줘야겠네.”

    “그러니까요.”

    배를 쓰다듬으며 생긋 미소지었다. 소중한 보물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갈까?”

    “네!”

    “뭐 먹을까? 고기 먹을까?”

    “좋아요.”

    세원이 자주 데려가는 고깃집으로 향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고기를 구웠다. 지글지글 고기 익어 가는 소리에 하빈은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맛있어?”

    “네.”

    “많이 먹어.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그래야 아프지도 않고 튼튼하지.”

    “맞아요. 아프면 안 돼요.”

    고기를 하나 더 입에 집어넣으며 하빈이 대답했다. 야무지게 집어먹는 하빈의 모습에 세원이 작게 미소지었다.

    “아기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께 말씀드릴까 하는데, 어때?”

    “태어나기 전에요? 그건 너무…….”

    “너무, 왜?”

    “그냥……. 너무 놀라실 것 같은데…….”

    “아기 낳고 나서 말씀드려도 놀라시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긴 한데 좀 무서워요. 갑자기 그런 얘기 하니까.”

    “그래? 나중에 집 가서 얘기할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빈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세원을 바라봤다. 세원은 더 먹으라며 고기를 앞접시에 놓아 줬지만 하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세원의 가족들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린다면 어떻게 상상하기 무서웠다.

    “솔직히…….”

    “응?”

    “우리 형도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세원 씨 가족이라고 가만히 있을까요?”

    세원이 말이 없어졌다. 하빈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저한테 뭐라고 하시든지 상관없는데 아기한테 뭐라고 하시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아요.”

    “뭐라고 못 하게 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세원 씨 못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요즘 세상이 많이 무섭잖아요.”

    우울하게 말끝을 흐리는 하빈에 세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임신 초기에 말했으면 더 나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지금 후회를 해 봤자 돌이킬 수 없었다.

    세원의 가족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받아 줄지 걱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아기를 낳고 세원과 둘이 키우면서 둘만의 결혼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알려야 했으니……. 세원의 말대로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아기 태어나고 말씀드릴래?”

    “아니요. 아기 태어나기 전에 말씀드려요.”

    “그럴까? 괜찮겠어?”

    “네.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겠어요.”

    “그래. 난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세원은 하빈을 기다릴 수 있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을 따를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세원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리라 믿고 있었다. 부모님을 막아 주겠지. 겁도 나고 많이 두려웠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막연한 환상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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