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울로 돌아가자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아기는 꽤 많이 자라 배가 제법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부산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지. 꽤 임산부 같은 느낌이 드는 자신의 자태에 하빈은 샤워를 할 때마다 놀랍고도 신비한 느낌이 들어 배를 쓸어 보며 감탄했다.
“그래도 아직 작은데.”
세원이 다가와 하빈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하빈은 세원을 흘겨봤다.
“아기가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이 컸는데요. 이제 단지 머리도 엄청 커졌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고요. 그런 말 하면 단지가 자기 흉보는 줄 알고 다 들어요.”
“그치만 작은걸. 이 작은 몸에 작은 아기가 들어있다니 믿기지 않네. 허리는 안 아프고?”
“조금 아파요. 욱신거리는데 참을 만해요.”
“다행이다. 서울 올라가면 마사지 받으러 다니자.”
자나 깨다 세원은 그저 하빈의 걱정뿐이었다. 하지만 하빈은 그저 서울로 올라갈 걱정뿐이었다. 서울로 올라갔을 때 형이 난리를 쳐서 아기한테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고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세원은 자신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큰소리를 쳤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아기 걱정은 엄마가 제일 많이 하는걸…….
“우리 아기 잘 자라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이대로 쭉쭉 자라서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겠다.”
“알파일까요, 오메가일까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건 나보다 네가 더 감이 오지 않을까. 아기랑 뭔가 통하는 게 없어? 아기는 네 감정 느끼고 그런다며. 넌 아기 감정 느끼고 그런 거 없어?”
“모르겠는데…….”
갸우뚱하며 하빈이 배를 문질렀다. 사실 5개월이 다 되도록 아직 태동도 시작하지 않은 아기였다. 곧 태동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데 어서 움직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세원과 하빈이었다.
매일 저녁마다 세원이 정성을 들여 마사지 크림도 발라 주고 사랑스러운 말도 속삭여 주고 있었지만 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언제쯤 대답을 들려주려나.
“태동 빨리 했으면 좋겠다.”
“천천히 기다리면 하겠지.”
“그래도 조급해지는 게 있어요. 다른 집 아기들은 했는데 우리 아기만 안 한다고 하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하빈을 달래는 세원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것보다 얼른 준비해야 나가지.”
“아, 네. 지금 준비 다 했어요.”
“나갈까?”
“네!”
먼저 문을 열고 나서는 하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신이 난 하빈이 예쁘게 차려입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세원을 돌아봤다.
볼록 튀어나온 배 때문에 옷매무새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세원이 사 준 옷이라 뭔들 좋았다.
“이 영화 엄청 감동적이래요.”
“너 우는 거 아냐? 요즘 엄청 감성적이잖아.”
“제가요? 아닌데!”
“아냐, 맞아. 너 요즘 티비 보다가도 잘 훌쩍이고 그래. 임신하고 많이 변한 건지 모르겠는데 원래도 이랬었어?”
“원래도 이랬던가……. 안 이랬던 것 같은데…….”
갸우뚱한 하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영화 소개를 읽어내려 갔다. 고아가 엄마를 찾아간다는 스토리에 벌써부터 가슴이 몽글거렸다. 엄마랑 아이가 만난다니, 얼마나 감동적일까. 하빈이 잔뜩 기대한 채 영화관에 들어섰다.
오늘은 평일인 덕분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수월하게 팝콘과 콜라를 사고 나초까지 산 하빈이 나초 칩을 깨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저런 영화 포스터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영화가 나올 동안 영화를 한 번도 안 보러 오다니. 문화생활을 정말 안 했구나. 새삼 자신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시간 다 되어가는데 화장실 다녀올래?”
“네. 저 요즘 화장실 너무 자주 가요.”
“임신해서 그래. 다녀와.”
세원에게 먹을 것들을 맡긴 하빈이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빠르게 다녀왔는데도 그새 세원의 옆에 오메가가 붙어 번호를 알려 달라 조르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하빈이 다가가 세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세원 씨…….”
“왔어? 갈까?”
“네…….”
“이거 마저 먹어야지.”
세원이 들고 있던 과자를 건넸다. 하빈은 기운 없이 나초를 받아 들고 입으로 가져왔다. 오메가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아쉬운 눈빛을 남기고 멀어졌다.
영화 시작 전부터 기분이 나빠진 하빈은 영화 볼 맛이 나지 않아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 하빈을 알아챈 세원은 팝콘을 먹다 말고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아까 그 오메가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결혼할 사람 있다고 했어.”
그의 말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원을 쳐다봤다.
“나랑 결혼해야지. 응?”
생긋 웃는 모습이 멋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이렇게 멋진 거야……. 하빈이 울상을 하고 고개를 푹 숙여 다리를 동동거렸다. 짜증 나. 나는 못났는데!
“왜 그래.”
“세원 씨 너무 멋있어서 짜증 나요.”
“뭐 그런 걸로 짜증이 나.”
“나는 못났는데!”
“누가 못났어.”
“……내가.”
“누가 그래.”
“내가.”
“미운 말만 하네.”
세원이 다가와 쪽 입을 맞추며 정신 차리라 말하고는 볼을 꼬집었다.
“영화 시작하겠다.”
“이 정신으로 영화를 어떻게 봐요.”
“안 볼 거야?”
“볼 건데…….”
“재밌게 봐.”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이 조금 얄밉게 느껴졌다. 하빈은 짜증을 내며 과자를 와그작 씹어먹었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주인공 남자아이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엄마를 찾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동이 몰려와 하빈은 결국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울었어?”
“……아니요.”
누가 봐도 운 얼굴로 울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하빈에 세원은 웃으며 그렇구나, 하고 남은 쓰레기를 받아 들었다.
“영화 어땠어?”
“그냥 재미있었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린 하빈이 먼저 영화관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삐쳐 있나. 세원이 뒤를 따라 나가자 하빈은 서둘러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저래서 피했구나. 귀여운 행동에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울 정도는 아니었지?”
세원의 말에 하빈은 그러게요, 하고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세원은 뒤따라 올라타서는 다른 탑승객들을 막아서며 하빈을 구석에 몰아넣고 쪽쪽 입을 맞췄다.
“뭐해요!”
하빈이 좁은 공간에 찰싹 달라붙어 세원의 가슴팍을 짚고 짜증을 냈다. 세원은 여전히 제멋대로 하빈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예뻐서 그러지. 눈가에 입을 맞추자 하빈이 하지 말라며 세원의 얼굴을 밀어냈다.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내려야죠!”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세원과 하빈도 함께 내려 다시 차로 돌아왔다.
“밥은 뭐 먹을까.”
“세원 씨 먹고 싶은 거로.”
“초밥 먹을래?”
“초밥 좋아요.”
초밥집으로 향하는 동안 하빈은 영화 내용을 다시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하빈과 지환은 힘들게 자라 온 과거가 있었다. 턱을 괴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자 세원이 하빈을 불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영화 생각이요.”
“왜?”
“그냥. 나였으면 어땠을까 해서…….”
“그랬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세원이 좋았다. 하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기를 내가 낳고 책임지지 못한다면 보육원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을까. 끔찍한 상상이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를 지켜 내고야 말 것이라 생각했다.
지환은 자신이 겪은 일이 너무 힘들어 아기를 반대했지만 자신은 그랬기에 더욱 가족이 갖고 싶었다. 단란한 엄마와 아기가 있었으면 했다. 자신의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갖지 못했던 아기와 엄마의 관계를 가지고 싶었다. 내가 아기의 좋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하빈은 굳이 다시 묻지 않았다. 얼마 뒤 세원이 입을 열었다.
“넌 뭐든 잘할 거야.”
믿어 주는 사람이 있기에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빈이 생각했다. 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도 느낀다고 했지. 지금 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아가야.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을까.
세원이 알아 둔 초밥집은 고급 식당이었다. 역시나. 하빈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세원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식당 주인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이동했다. 초밥을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앞에 앉아 먹게 되자 잔뜩 긴장이 된 하빈은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저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그래?”
“네…….”
“먹어 보고 맛있으면 다음에 또 오자.”
코스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하빈은 신기한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둘 직접 만들어 주는 초밥을 열심히 집어 먹고 있는데 세원이 맛있냐며 물었다.
“와…….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다음에는 서울에서 가자.”
“좋아요, 좋아요.”
다 좋다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는 동안 음식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빈은 배를 채우는 건 물론 맛도 좋은 음식에 홀려 열심히 식사에 빠져 있었다. 세원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잘 먹으니까 좋다.”
“저야 뭐 늘 다 잘 먹죠.”
“임신했는데 더 잘 먹어서 좋아.”
“더 잘 먹어야죠. 아기한테도 영양분이 가지.”
주먹을 꽉 쥐고 하는 말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진지하게 할 말이야?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 씨가 물어봤잖아요!”
“귀엽다, 귀여워.”
“씨잉…….”
“얼른 더 먹어. 맛있으면 내 것도 더 먹어. 더 만들어 달라고 해.”
“부끄러운데…….”
“뭐 더 먹고 싶은데? 내가 말할게.”
하빈이 세원에게 먹고 싶은 것을 소곤거렸다. 식욕이 이 정도로 왕성한 편이 아니었는데, 추가 주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가볍게 드라이브를 나왔다.
해변을 달리자 기분 좋은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와, 좋다. 이래서 바닷가에 사는 걸까. 하빈은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세원 씨랑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에요.”
“나랑 만난 게 행운이라고?”
“네. 정말 행운이에요. 저는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지금 돌아보면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게 생각해서 좋다.”
세원의 말에 하빈은 그저 웃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서울로 가는 길이 두려웠지만 지금 당장 부산에서의 하루하루가 행복했으니 즐거웠다. 행복하고 또 좋았다. 세원을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내 삶의 다시 없을 최고의 행운.
“서울 가면요.”
“어.”
“회사 다시 다니는 거죠?”
“그래야지. 넌 내 집에 들어와야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세원에 순간 알겠다고 대답할 뻔한 하빈이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싫어요!”
“왜 싫어. 이만큼 좋은 유혹이 어디 있다고.”
“좋지만 그래도 안 돼요.”
“왜.”
“내 집이 있는데 왜 세원 씨네 집에서 자요. 나는 내 집에서 살 거예요.”
“그럼 방 빼.”
단호한 말에 하빈이 입을 삐죽였다.
“맨날 세원 씨 멋대로지.”
“내가 무슨 멋대로야. 다 네 멋대로 하잖아.”
잠시 티격태격 다투던 두 사람은 서로 반대쪽 창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싸운 건가.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하빈이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세원이 말을 꺼냈다.
“하여간 화도 안 난다니까.”
“뭐가요?”
“싸워도 화가 안 난다고.”
한숨을 푹 쉬고 다시 하빈을 돌아보는 세원에 하빈이 배시시 웃으며 세원의 팔을 붙잡았다.
“화 안 났어요?”
“어. 내가 왜 화가 나.”
“화났나 싶어서 속으로 무서웠어요.”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빨간불에 멈춰선 차량은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동안 세원은 하빈에게 연신 입을 맞췄다. 헤헤. 하빈도 좋아서 세원을 껴안고 키스를 했다.
“세원 씨, 서울 가도 집에 자주 놀러 와요.”
“아예 같이 살자니까 그러네.”
“안 돼요.”
“이렇게 애태우는 것도 다 계획이야?”
“그게 뭐예요!”
하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볼을 꼬집으며 으이그,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 없을 때 큰일 나면 어떡해.”
“무슨 큰일이요.”
“너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병원 가면 되죠.”
“갑자기 아프면?”
“구급차가 있잖아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이번엔 제법 삐쳤는지 세원은 대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운전만 하는 모습에 하빈이 잠시 바라보다 달래듯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 난 필요도 없다 이거지.”
“세원 씨가 왜 필요가 없어요.”
“난 그냥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아니에요!”
핸들을 돌리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흡사 잔뜩 뿔이 난 아이 같아 웃음이 나는 하빈이었다. 세원은 왜 웃냐며 장난이 아니라는 듯 조금 더 투덜거리다 입을 닫았다.
“세원 씨네 집에 자주 놀러 갈게요.”
“그냥 와서 살아도 돼.”
“가서 살 정도로 놀러 갈게요.”
“그래, 그럼 되겠다. 그러다 결혼하면 같이 사는 거지 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세원에 어이가 없어진 쪽은 하빈이었다. 결혼이라니. 세원은 진심이었다. 웃겨, 진짜. 결혼이 자기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됐어요. 얼른 집에나 가요.”
“왜 못 믿어?”
“그냥 말도 안 되잖아요.”
“진짜 내가 너랑 결혼한다.”
“네네, 그러세요.”
이미 장난처럼 넘기게 된 하빈이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보고 핸들을 꽉 붙잡았다. 내가 결혼하고 만다. 너랑.
* * *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세원과 하빈은 짐을 모두 챙기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꼭 끌어안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하빈은 반쯤 졸고 있었고 세원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자야지. 자신을 아기 돌보듯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려는 것도 잠시, 뱃속에서 기포가 뽀르륵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났다.
“어……. 어?”
“왜?”
“방금 이상했는데.”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문질렀다.
“뭔데, 왜. 아파?”
“배가 이상해요.”
“뭐가.”
“움직인 것 같은데.”
뱃속이 꼬르륵거리며 아주 작게 움직였다. 미세한 움직임이 배에서 느껴졌다. 하빈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세원을 바라봤다.
“태동인가 봐요!”
하빈의 말에 세원이 냉큼 옷을 올리고 배에 귀를 가져갔다. 또다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리며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와……. 신기하다.”
“그쵸. 신기하다…….”
이제 막 초보 아빠 엄마인 두 사람이 아기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놀라움은 곧 기쁨이 되었다. 하빈은 배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예쁜 말을 줄줄이 속삭여 주었다. 우리 예쁜 단지, 너무너무 사랑하고 너는 진짜 소중해. 아빠 엄마의 보물이야. 하빈의 말에 세원은 웃으며 배에 입을 맞췄다.
“맞아. 내 보물이야. 하빈이도 단지도.”
특별한 날인 만큼 하빈은 자려던 마음을 접고 일어나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아기를 가진 뒤부터 써 온 다이어리였다. 하루하루 적어 나가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태동한 이야기를 써야겠다. 하빈의 일기가, 엄마의 일기가 늘어나고 있었다. 하빈은 단지가 태어나면 매일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내가 널 이만큼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폈단다. 그만큼 소중한 존재니까 넌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하빈의 보물 같은 아기였다, 단지는.
세원은 하빈의 옆에 엎드려 다이어리를 훔쳐보며 미소지었다. 가끔 삐뚤빼뚤한 글씨가 나올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씨 진짜 못 쓴다, 하빈아.”
“……어쩌라고요!”
“왜 화를 내.”
“글씨 못 쓴다고 놀렸잖아요.”
“놀린 거 아닌데.”
“히잉…….”
하빈이 다이어리를 팔로 가리고 쓰자 세원이 보여달라며 팔을 떼어 냈다.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져 버린 하빈이 다시 가리던 팔을 치우고 일기를 썼다.
오늘의 일기는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 가는 짐을 싸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었는데 단지 덕분에 힘든 건 싹 사라지고 행복해졌다고. 어쩌면 하빈에게 단지는 두 번째 행복일지도 몰랐다.
일기를 마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난 하빈은 세원에게 치킨이 먹고 싶다며, 오늘 같은 날은 치킨을 먹어야 한다고 졸랐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임신 이후 함께 지내며 아주 잘 먹은 덕분에 하빈은 얼굴에 살짝 살이 붙어 귀여워진 상태였다. 하빈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다이어트를 하겠다 난리를 쳤지만 그러면서도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 살 빼야 하는데…….”
“말로만 하면서? 그냥 먹고 나중에 해. 나중에.”
“나중에 언제 해요.”
“애 낳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돼. 네 마음대로 해. 애 낳으면 다 빠지겠지.”
“히잉…….”
세원이 달래 주자 마음이 풀린 하빈이 칭얼거리며 그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나 살쪘다고 싫어하면 안 돼요.”
“안 그래.”
“살쪘어…….”
“아냐, 귀여워, 예뻐.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이리 와.”
번쩍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는 세원에 하빈이 놀라 다리를 버둥거렸다. 가만히 있어. 아기 다루듯 하는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무슨 아기예요?! 하빈의 말에도 세원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랠 땐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뭐야, 내려 줘요.”
“싫어. 가만히 있어.”
둥기둥기하자 하빈이 꺄르륵 웃으며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하빈의 변덕에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세원은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었다.
“세원 씨는 진짜 착한 것 같아요.”
“내가?”
“네.”
“왜?”
“그냥……. 내가 막 짜증 내고 그래도 받아주고 그래서…….”
“그게 왜 착한 거야. 애인이 짜증 좀 내는데 그거 못 받아주겠어?”
“멋있어…….”
“멋있어?”
“네!”
“그럼 됐어. 네 눈에만 멋있으면 돼.”
“헤헤. 진짜 좋아요.”
그렇게 치킨과 함께한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오랜만의 귀가에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그래도 제법 지환이 들락날락했었는지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빈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
“몰라요…….”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느낌이라 좋으면서도 어딘가 불안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세원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빈이 손을 뻗자 세원은 그를 안아 주었고, 하빈은 그를 꼭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자신을 품어 주는 온기가 좋았다.
지환과의 재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하빈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는 이미 많이 지친 듯 보였다.
몹시 상한 형의 얼굴에 하빈은 미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화를 내려던 것도 잊어버린 듯 하빈을 보자마자 달려와 안색부터 살피는 지환에 결국 하빈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형…….”
“야, 너 진짜!”
“혀엉…….”
“괜찮아?”
“응. 나 잘 지냈어.”
“너 그렇게 하루아침에 도망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치만 형이 아기 지우라고 자꾸 그러니까 무서워서 그랬지…….”
“내가 그런다고 도망까지 가냐?”
지환이 하빈의 등을 찰싹 내리치자, 세원이 단호하게 그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아프잖아. 하지 마.”
“장난해? 이 정도로 큰일 안 나거든. 왜 이렇게 유난이야?”
투덜거리며 손을 확 빼낸 지환이 하빈의 몸을 살피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 배…….”
“많이 불렀지. 아기 엄청 컸어. 이제 태동도 하고 그래.”
“진짜 답이 없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지환의 모습에 기가 죽은 하빈은 눈치를 살피다 세원을 돌아봤다. 그가 손을 잡아 오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세원 씨랑 함께 있으니까 괜찮겠지. 하빈은 당당하게 지환을 보고 말했다.
“나 아기 낳을 거야.”
“낳아서 어쩌려고. 그리고 이제 지우기도 어려울 거 아냐.”
“안 지울 거야.”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지환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형, 형. 봐봐. 아기랑 인사 좀 해. 응?”
“됐어.”
지환이 하빈의 손을 밀어내고 팔짱을 꼈다. 단단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래 봤자 자신이 아기를 포기할 리는 없었다. 포기하는 쪽은 지환이 되어야 했다. 하빈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말했다.
“앞으로 태교도 더 열심히 할 거니까 나 도와줄 거 아니면 집에 오지 마.”
“넌 그게 오랜만에 본 형한테 할 소리냐?”
“내가 뭐!”
“내가 널 어떻게 돌봐 가며 키웠는데 형한테 그런 소리가 나와?”
“그치만!”
잔뜩 실망한 형의 표정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끝까지 단호해야 했다.
“강세원이 나보다 더 좋다 이 말이지.”
“세원 씨도 좋고 형도 좋은데 아기는 더 좋단 말이야.”
“너는 진짜 애가 왜 그러냐?”
“하빈이한테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마.”
세원이 옆에서 지환을 막아섰다. 하빈은 슬쩍 그 뒤로 숨어들며 눈치를 살폈다. 미워 죽겠다는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지환은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 말하고 자리를 떴다. 금세 나가 버린 형이 야속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거라 오래 보고 싶었는데.
“형 가서 아쉬워?”
“네.”
“다시 불러 줘?”
“아니요. 그냥 쉴래요. 피곤해요.”
하빈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세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런 하빈을 바라보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자.”
“갈 거예요?”
“자고 갈까?”
“그럼 출근하기 힘들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냥 가요.”
“옆에 있어도 되는데.”
세원이 옆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하빈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이마를 붙인 채 중얼거렸다.
“나 잠들 때까지만 있어 줘요.”
“알았어.”
“잘 자요.”
하빈이 눈을 감았다. 오늘 밤에는 꿈에 단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태몽을 한 번도 안 꾼 것 같네. 단지 태몽은 뭘까…….
그날 밤, 하빈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까치 한 마리와 행복하게 그네를 타는 꿈을 꿨다. 제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새는 쏟아지는 태양 빛을 향해 날아가 버렸고, 눈을 뜨자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하빈은 멍하게 누워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잤다고?
세원은 회사에 가고 없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오랜만에 라면을 끓였다.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뜨끈한 국물을 한 숟갈 입으로 가져오자 라면 스프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세원 씨는 회사 잘 갔으려나.”
라면을 먹던 하빈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휘휘 저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때 타이밍 좋게 세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하빈이 입꼬리를 귀에 걸다시피 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나야. 뭐해?]
“저 지금 밥 먹고 있어요.”
[무슨 밥 먹는데? 맛있는 거 먹어?]
“라면 먹고 있어요.”
[몸에 좋은 거 먹어야지 왜 라면을 먹어.]
“아, 그러게요. 몸에 좋은 거 먹어야 하는데 간단하게 먹으려다 보니까 라면 먹게 됐어요.”
통화하는 동안 라면이 퉁퉁 불어 가고 있었지만 이제 라면은 뒷전이었다. 하빈은 아예 젓가락도 내려놓고 통화에 집중했다.
“세원 씨는 뭐 해요?”
[나는 점심 먹고 좀 쉬고 있어. 오늘은 회사가 늦게 끝날 것 같아서.]
“아아, 그렇구나. 그럼 못 만나겠다.”
[집으로 가 있을래? 사람 보내줄게.]
“아니에요. 나중에 봐요.”
[그럼 내가 끝나고 네 집으로 갈까?]
“피곤할 텐데…….”
[괜찮아.]
“그래도. 근데 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하빈이 조잘조잘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꺼내 놨다. 세원은 귀찮지도 않은지 열심히 이야기를 들으며 반응을 해주고 있었다. 태몽 같은 이야기에 신기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쵸, 신기하죠. 엄청 생생했어요. 하빈이 말하자 세원은 자신도 꿈을 꾸고 싶다면서 부럽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세원 씨도 그런 거 하고 싶어요?”
[당연히 나도 하고 싶지, 아빤데.]
“신기하다.”
[뭐가 신기해.]
“그냥요.”
웃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기분이 좋아진 하빈도 따라 웃으며 배를 문질렀다. 병원은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서울에 올라오니 바꿔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빈은 고민하다 세원에게 물었다.
“산부인과는 어떡하죠? 집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다닐까요?”
[아냐, 내 주치의한테 물어서 잘 하는 의사한테 가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뭐가 무리야.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달라도 뭐가 다른 세원이었다. 주치의까지 있다니. 하빈은 신기하다는 마음 반, 놀라움 반으로 대답을 하고 언제 병원에 갈까 물었다. 빨리 병원에 가서 또 진찰을 받고 싶었다. 갈 때마다 신기한 것들이 늘어났다. 아기가 얼마만큼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랑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가자. 예약해 놓을게.]
“네! 좋아요.”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가 이따 시간 되면 갈게. 너무 늦으면 내일 갈 수도 있어. 내일은 만날 수 있을 거야.]
“내일은 일 일찍 끝나요?”
[아마도. 오늘 야근하니까 내일은 일찍 끝나야지.]
“힘들겠다…….”
대답하는 하빈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되려 세원이 괜찮다며 하빈을 달랬다.
“내일 꼭 만나요. 보고 싶어요…….”
부끄럽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세원이 나도 보고 싶어, 하고 말을 해 왔다. 조금은 쑥스러운 말들에 하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들어가요. 끊을게요.”
[그래. 내일 봐.]
전화가 끊기고 아쉬운 마음으로 한참이나 핸드폰을 바라봤다. 검은 화면에 비친 제 얼굴은 제법 살이 올라 있었다.
언제 이렇게 살이 쪘지? 진짜 다이어트 해야겠는데. 하빈이 적잖이 놀라 요리조리 얼굴을 살폈다. 임신이 이게 안 좋구나……. 아기를 낳고 나면 다 빠진다는 인터넷의 이야기를 믿고 싶었다.
요즘은 날씨가 풀려 난방을 빵빵하게 틀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신을 한 탓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했다. 오늘도 집에서 옷을 단단히 껴입고 있었다.
몸은 따뜻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시렸다. 한 달이 넘도록 매일 보던 세원을 보지 못 한 지 겨우 하루가 됐는데 이토록 보고 싶을 줄이야.
“세원 씨 보고 싶다.”
침대에 들어가 누운 하빈이 중얼거리며 세원을 찾았다. 만날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내일은 만날 수 있겠지. 애써 마음을 다독이고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빨리 자야 내일이 빨리 오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저녁도 굶어 가며 세원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하빈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세원의 일이 많이 밀려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하빈은 괜찮다 대답하고 옆으로 푹 쓰러지듯 누워 궁시렁거렸다.
“보고 싶었는데 왜 일이 많아가지고는…….”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하품도 나오고 배도 고프고 졸린데 세원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잠시 잠들었다가 벨을 누르는 소리에 깨어나 문을 열었다. 세원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하빈을 끌어안았다.
“많이 기다렸어?”
“네.”
“미안해.”
토닥이는 손길에 서러웠던 감정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가자는 말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그대로 세원을 따라 나온 하빈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차를 탔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 말에도 세원은 대답이 없었다.
“우리 어디 가는데요?”
“내 집.”
“왜요?”
“내일 쉬기로 해서 같이 있으려고.”
“진짜요?”
“어.”
금세 신이 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일 쉰다니, 그렇다면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겠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오랜만에 보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이 동네도 정말 오랜만이네. 세원의 집도 꽤 오랜만에 가는 길이었다.
그의 집은 예상대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푹 쉬고 있으라는 말을 한 세원은 샤워를 하러 들어가고 거실에 하빈 혼자 남아 티비를 틀었다.
뭐 재미있는 거 안 하나. 별 재미도 없는 채널을 한참 돌리다 리모콘을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허리를 쭉 폈다. 배가 나온 만큼 허리도 전보다 조금 더 아픈 것 같았다.
“배가 너무 많이 나와서 허리가 아픈가…….”
나중이 되면 배가 더 나올 텐데 그땐 지금보다 더 아프려나.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두려운 마음이 커져 갔다. 솔직히 조금 무서운 것도 있었고. 아기를 낳을 땐 어떡하지.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세원이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배 안 고파?”
“고파요.”
“뭐 먹을래?”
“모르겠어요.”
여전히 누워 있는 채로 세원을 바라보자 소파 옆 바닥에 앉은 세원이 하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뭐 맛있는 게 없으려나. 그러게요,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입맛을 다시는 하빈의 모습에 세원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배달 어플을 켰다.
“단지는 뭐가 먹고 싶대?”
“글쎄요.”
시큰둥한 대답이 이어지자 세원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동안 하빈은 하품을 하며 다리를 흔들었다. 뭘 먹지. 별생각도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빈이 세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원 씨.”
“응?”
“혹시 가족들은 안 만났어요?”
“왜?”
“그냥…….”
하빈이 눈치를 살피자 그는 만나지 않았다며 하빈의 손을 꼭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행동에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세원의 가족들은 아직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걸까.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결혼을 반대할까, 찬성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들은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세원 씨 가족인데.”
“서울로 올라왔으니 네 건강에만 집중해야지. 아프지 않고 잘 있는 게 가장 좋은 거야.”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쪽쪽대는 그의 행동에 하빈이 목을 끌어안고 세원에게 매달렸다. 볼록한 배가 닿아 불편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배고프다며.”
“고프기도 하고 안 고프기도 하고.”
“그래? 그럼 우리 장난이나 칠까?”
세원이 다시 입을 맞추며 옷 속으로 손을 슬금슬금 집어넣었다. 그의 손길에 헤실헤실 웃으며 하빈은 몸을 꼼지락거렸다.
으응, 읏……. 위로 올라가 팔걸이에 머리를 베고 누워 제 위에 엎드린 세원을 바라봤다. 배 위로 입을 맞추는 모습이 참 좋았다. 하빈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원 씨가 너무 좋아요.”
“내가 좋아?”
“네.”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원은 배를 쓰다듬다 말고 위로 올라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나도 너 좋아.”
사랑을 속삭이는 시간이 행복했다. 하빈은 배를 감싸고 다리를 들어 세원의 다리를 비벼 대며 애교를 부렸다. 그 행동에 그는 다가와 옷을 벗기며 가슴팍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아프지 않도록.
부어오른 배만큼 이제 가슴도 슬슬 젖이 나올 준비를 하는 듯싶었다. 몽글몽글 무언가 잡히는 느낌에 하빈이 아프다며 낑낑거리자 세원이 조심스럽게 주무르며 물었다.
“많이 아파?”
“아뇨. 그렇게 하니까 좀 시원해요.”
“그럼 주물러 줘야겠다.”
세원이 가슴을 애무하며 입으로 젖꼭지를 살살 깨물었다. 유두를 이 끝으로 물어 당기다가도 꾹 눌러 핥아 올리는 행동에 등골이 오싹했다. 흐으……. 읏……. 눈을 감고 세원을 느끼던 하빈이 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빨아들이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아…….”
세원의 혀가 가슴 주변을 핥다가 다시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유두를 공략했다. 가슴을 계속 어루만지는 세원에 하빈이 몸을 들썩이며 그를 기다렸다.
그의 손이 아래로 향할수록 기대감이 짙어졌다. 바지춤을 잡고 슬쩍 끌어내리려 하다가도 다시 입을 맞추는 행동에 안달이 났다. 하빈은 장난치지 말라며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세원은 웃으며 몸을 일으켜 하빈의 바지와 속옷을 마저 벗겼다. 그리고 자신 역시 옷을 모두 벗고 하빈의 밑에 앉아 살짝 엉덩이를 벌렸다가 다시 앞으로 손을 가져왔다.
“왜요?”
“펠라 먼저 하게.”
“안 해도 되는데…….”
“하기 전에 잘 풀어야지.”
세원이 하빈의 페니스를 붙잡고 끝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만져지는 느낌이 좋아 눈을 감고 가만히 기다렸다.
서서히 하빈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 나오고 세원은 고개를 숙여 하빈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었다. 혀로 페니스 끝을 핥아 올리면서 흔들자 위아래로 자극되는 느낌에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으, 읏…….”
쭙쭙 빨고 있는 적나라한 소리가 들려오자 하빈은 더욱 흥분해 제 몸을 더듬으며 꼼지락거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엉덩이를 붙잡아 벌리고 조몰락거리며 장난을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입구 주변을 맴돌던 세원의 손가락이 들어올 듯하다 말고 다시 빠져나가 엉덩이를 주물렀다.
“아응, 으앙.”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이 몰려오자 하빈이 세원의 어깨를 밀어냈다. 기어이 하빈의 페니스를 흔들어 자신의 손에 파정하게 만든 그는 정액으로 끈적거리는 손을 하빈의 뒤로 가져갔다. 세원의 손가락이 이미 질척하게 젖은 하빈의 뒤를 파고들었다.
“아, 하으, 아앙!”
손가락을 세워 안쪽을 긁듯이 살살 간지럽히자 하빈이 어찌할 줄 모르고 배를 감싼 채 바들바들 떨며 세원을 불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손가락은 늘어나 제 안을 헤집었다.
하나둘 늘어난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가 되어 뒤를 쑤시고 있었다. 하빈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꼭 감고 무릎을 붙잡아 다리를 벌렸다.
“얼른, 해 줘요…….”
“급해?”
“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빈의 모습에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들어가기 전, 준비 운동을 하듯 페니스를 붙잡고 흔들던 세원은 천천히 그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 앙……. 아흣……. 아픔이 섞인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오고 세원은 그런 하빈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괜찮아?”
“후으, 하, 앙……. 앗……. 괜찮아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하빈이 세원의 허리에 다리를 감쌌다. 찰싹 달라붙은 몸에 배가 닿자 기분이 묘했다. 하빈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고 어서 하라며 가슴을 주물렀다. 장난스러운 손길에 세원이 웃으며 몸을 숙여 다가가서는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아응, 읏, 흐응, 으앙! 앗!”
천천히 치고 들어가는 페니스를 하빈은 오물오물 잘도 받아들였다. 꽉 물고 달라붙은 내벽이 이리저리 밀리고 당겨지는 느낌이 좋아 세원의 움직임이 자꾸 빨라지고 있었다.
하빈은 응응거리는 소리를 내며 세원을 향해 안아 달라 팔을 뻗었다. 세원은 하빈을 번쩍 일으키고는 마주 앉아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안 아파?”
“네.”
“네가 해 볼래?”
“뭘요?”
“위에서 할래?”
“싫은데…….”
“위에서 해 봐.”
세원이 눕고 하빈이 그 위에 올라타 판판한 배에 손을 올렸다. 아흐, 윽.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놀란 것도 잠시, 하빈은 황홀한 느낌에 앞뒤로 허리를 흔들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앙! 아, 응! 읏, 하앙! 핫!”
신음이 이어지고 세원은 하빈을 바라보며 허벅지를 문질렀다. 임신 기간 동안 잘 먹어 보얗게 살이 오른 허벅지가 손에 가득 들어왔다.
“좋아, 후으, 흣, 좋아요.”
“더 해 봐.”
“좋아요, 아앙, 아흐, 흣.”
세원이 살짝 몸을 일으켜 퍽퍽 찍어 내리듯 움직이는 하빈의 허리를 받쳐 주고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제 입술을 따라오며 쪽쪽거리는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난 세원이었다.
세원의 위에서 움직이던 하빈이 사정해 버리고 지쳐 늘어졌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며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 못 해?”
“못 해요.”
“더 해야지.”
“못 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하빈을 본 세원이 알겠다며 천천히 빠져나와 하빈을 안아 들었다. 어디로 가요? 묻는 말에 세원은 씻으러 가야지, 하고 욕실로 들어섰다.
욕조에 물을 받고 하빈을 앉힌 세원은 천천히 몸에 물을 뿌려 주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자신이 이렇게 한없이 소중하다는 듯이 대해 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 자고 가도 되는 거죠.”
물을 찰박이며 하빈이 물었다. 세원은 당연한 걸 묻냐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세원 씨 핸드폰으로 게임 하다가 자야지.”
하빈의 말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배는 안 고파?”
“아, 배도 고파요. 나가면 빨리 뭐 시켜 먹어요.”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