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원과 시간 보내기
다음날 아침. 하빈이 눈을 뜨자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디를 갔나 싶어 둘러보니 세원은 오늘도 역시 먼저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하빈은 조용히 일어나 물을 마시고 다가가 뒤에서 세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어났어?”
“네.”
“더 자지,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안 졸려요.”
“그래? 그럼 일찍부터 놀러 다닐까?”
“네!”
하빈도 얼른 샤워를 하고 나와 함께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푸짐하게 차려져 있는 뷔페에 하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이것저것 집어다 먹던 하빈이 오늘은 뭘 해야 하냐며 물었다.
“회사 일은 어제 대충 다 해 뒀으니까 이제 놀아도 돼.”
“와, 정말요?”
“그럼. 며칠 동안 좀 쉬다가 가자.”
“신난다. 뭐 할까요?”
“넌 뭐 하고 싶은데?”
“저는 세원 씨랑 하는 거면 다 좋은데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세원은 그럼 산책이나 하러 가자며 물을 마셨다. 아직 한창 먹고 있는 하빈과 다르게 세원은 다 비운 접시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있었다.
“산책이요?”
“추천받은 휴양림이 있는데 꽤 좋다네. 너랑 같이 가보고 싶어서. 어때?”
“좋아요, 좋아요.”
“그래, 그러면 거기로 가자.”
목적지가 정해지니 출발 준비도 금방이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찬호가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우와. 뭐든 신기한 하빈은 그저 웃으며 세원을 따라 차에 올라타고 휴양림으로 향했다.
“가면 삼나무가 많아서 좋대.”
“그래요? 공기도 맑고 운치 있어서 좋겠다.”
“다니다가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사 줄게.”
“내가 무슨 먹기만 하는 줄 아나!”
“근데 너 요즘 잘 먹잖아.”
“그렇긴 하지만…….”
할 말이 없어진 하빈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맞는 말만 하니 뭐라 대답할 수가 없네. 쩝. 창밖으로 우거진 숲이 보이고 문득문득 커다란 말도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풍경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가자.”
“와, 신난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음료수를 하나씩 사고 안으로 입장했다. 평상 같은 곳에 사람들이 누워 편하게 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나른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네. 공기도 좋고 날도 그렇게 춥지도 않고.”
“그러게. 추울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네.”
세원의 말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음료수를 홀짝였다 둘은 숲속을 걷는 동안 보이는 이런저런 조형물을 구경했고, 그러다 다른 사람들처럼 빈 평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수다를 떨었다.
이런 한가한 시간이 참 소중하고 재미있었다. 이렇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제가 세원 씨랑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뭐가?”
“그냥, 몰라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바라보자 인상을 찌푸리며 볼을 꼬집었다.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 세원의 말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하지 말라 해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없는 생활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라 생각해야 떠나간대도 힘들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불안함에 생각이 두서없이 떠돌았다.
“공기가 좋으니까 마음도 편해지는 것 같아.”
그의 말에 하빈은 손을 붙잡고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원 씨랑 있어서 더 좋아요.”
“나도.”
“단지가 빨리 커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왜?”
“이런 곳도 데려와 보고 싶고 이것저것 같이하고 싶어요. 빨리 보고 싶어요.”
단지만 생각하면 기대감이 가득했다. 어느새 볼록한 배는 제 존재감을 뽐내듯 단단해져 있었다.
“배도 좀 불렀으니 이제 더 조심해야지.”
“맞아요. 배가 불러서 옷도 작아졌어요.”
“어디 만져 보자.”
옷 위로 배를 쓰다듬는 세원의 손길에 하빈이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며 숨을 골랐다. 따뜻한 손이 배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신기하다.”
“그쵸. 저도 신기해요. 씻을 때마다 막 거울로 혼자 쳐다보고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제가 그 정도로 오래 씻어요?”
“농담이야.”
농담 같지 않은 그의 장난에 하빈이 놀랐다가도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팔뚝을 퍽 때리며 칭얼거리듯 손을 잡아 흔들었다. 세원은 웃으며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운 것 같다. 너 지금 볼이 빨개졌어.”
“조금요. 근데 아직 괜찮아요. 더 있고 싶은데.”
“그러면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네!”
하늘을 바라보자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삼나무가 신기했다. 서울에 있는 고층빌딩도 저렇게 높이 서 있는데 느낌이 다르네. 새삼 느끼는 자연의 신비였다. 그렇게 다시 산책로로 돌아와 차에 탄 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게 식사까지 마치고 난 뒤 제주도에 와서 빼놓을 수 없는 바닷가 산책을 하기 위해 해변으로 향했다. 대로변 근처로 향하던 도중, 망고주스 가게가 하빈의 눈에 들어왔다. 하빈이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망고주스!”
“저거 사 줘?”
세원의 물음에 하빈이 끄덕이며 먹고 싶다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세원이 고민하는 듯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맛있으려나.”
“먹고 싶은데…….”
“그래,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대충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 세원과 하빈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스를 주문했다. 주스가 나오는 동안 매대를 구경하는데 이번에는 말린 망고 과자가 눈에 띄었다. 하빈은 이거 맛있을까, 하며 만지작거렸다.
“그것도 사 줘?”
묻는 말에 하빈이 괜찮다 대답했지만 세원은 사 주겠다며 덥석 집어 함께 계산해 버렸다.
“아무거나 다 사면 어떡해요.”
“뭐 어때, 네가 다 먹으면 되지.”
“하여간…….”
살짝 밉지 않게 그를 노려보자 세원이 싱긋 웃으며 하빈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삐죽이던 입술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맛있는 망고주스가 나오고 하빈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주스를 받아 한껏 빨아들였다. 세원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아서 마셔.”
“슬러시 같아요.”
“맛있어?”
“네!”
“내 것도 마셔.”
“세원 씨는 왜 안 마셔요?”
“난 괜찮아.”
신이 난 하빈이 한 잔을 금세 비우고 세원의 컵을 받아 들었다.
“실컷 마셔.”
“진짜 맛있어요.”
갈수록 식욕이 폭발하고 있는 하빈이었다.
요즘 살이 찐 것 같은데……. 가게를 나오며 배를 문지르던 하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로 먹는데 살이 안 찌는 게 신기하지. 세원이 왜 그러냐며 하빈을 살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원은 금세 다시 시무룩해진 하빈의 기분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세원이 옆에서 따라오며 물었다.
“기분이 오락가락해?”
“네?”
“기분이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그래?”
“네……. 기분이 엄청 좋았다가 또 나빴다가 그래요. 지금은 살찐 것 같아서 너무 슬퍼요.”
“호르몬 분비 때문에 기분이 왔다 갔다 하나.”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는 모습에 하빈이 하지 말라며 세원을 밀치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세원은 뒤를 따라오며 하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배가 좀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 살이 쪘다 싶을 정도는 아닌데. 뭘 걱정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한 세원이 따라와 하빈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예쁜데 왜 그래.”
“안 예뻐요!”
“누가 그래.”
“내가!”
짜증을 부리자 세원이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난 진지한데 왜 웃어요! 하빈이 화가 나서 뒤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짓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렇지.”
“뭐가 귀엽다고!”
“예뻐 죽겠다, 진짜.”
“세원 씨 눈이 삐었어.”
“내 눈이 왜 삐었어. 자꾸 그렇게 삐딱선 탈 거야? 나쁜 말 할래?”
엄한 척 말을 하자 하빈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배에서 아기도 듣고 있는데 자꾸 그럴 거야? 세원이 혼내는 척 엉덩이를 툭 치자 하빈이 세원을 꽉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
“망고주스 마시고 기분 좋았다가 또 왜 이래. 다시 주스 마시러 갈래?”
“몰라요. 기분 좋았다가 나빴다가 막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야.”
“신기하네. 김하빈 구경하는 거 진짜 재밌네.”
“누가 동물원 원숭이인 줄 아나!”
하빈이 삐죽거리며 세원을 밀쳐 냈다. 한 발짝 물러난 세원은 나한테 안 올 거야? 하고 팔을 뻗었다. 하빈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세원에게 안겨 들며 고개를 들었다. 뽀뽀해 줘요. 드물게 먼저 밖에서 뽀뽀를 조르는 모습에 세원은 웃으며 입을 맞췄다.
“좋아?”
“좋아…….”
“난 네가 그렇게 반말할 때마다 귀여워 죽겠어.”
“반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음, 마음대로 해.”
“그럼 그냥 존댓말 할래요.”
“왜?”
“이게 편해요.”
세원에게 말을 놓아 버리면 그를 너무 편하게 대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세원 씨한테 조심해야지.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는 하빈이었다. 반면 세원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하빈이 좋다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존댓말 해.”
어깨를 으쓱인 세원이 다시 하빈의 입술에 뽀뽀를 이어 갔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시선이야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바다의 파도 소리가 철썩이며 귀를 때렸다. 하빈은 뒤를 돌아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면 서울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환을 만나면 담판도 지어야 했다. 아기를 지우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다.
지환이 자신을 생각해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기를 낳고 싶었다. 이건 누구를 위한 일일까, 아기를 위한 일일까, 나를 위한 일일까. 알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빈은 눈을 감고 잠시 파도 소리에 집중했다. 세원은 그 옆에서 가만히 하빈을 바라봤다.
“안 추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원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멍하니 저 끝에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던 하빈이 정신을 차리고 세원을 돌아봤다.
“네?”
“안 춥냐고.”
그의 물음에 하빈은 그제야 으슬으슬 떨려 오는 몸을 느끼고 옷깃을 여몄다.
“추워요.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감기약도 못 먹는데 감기 걸리면 안 되지. 이리 와.”
세원이 겉옷을 벗어 하빈에게 걸쳐 주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차로 돌아와 난방을 뜨끈하게 틀고 다시 호텔로 향했다. 오늘 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집에 갈 생각을 하니 하빈은 마음이 또 복잡해졌다.
“집에 가면 마음 좀 정리해야겠어요.”
“왜?”
“서울 올라갈 정리…….”
“부산 가면 서울로 올라가려고?”
“네……. 이대로 평생 부산에 있을 수도 없고 집 계약한 날짜도 다 되어 가니까요.”
하빈이 중얼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세원은 손을 꼭 잡고 괜찮다며 말했다.
“같이 가면 되잖아. 우리 집으로 가자. 네 집 정리하고 이제 같이 사는 거 어때?”
“그건, 어…….”
“왜, 싫어?”
“그냥 좀 부담스러워요.”
“뭐가 어때서.”
“그래도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저는 서울에 있는 집도 괜찮아요. 그리고 형이 난리 칠 게 분명해요.”
고개를 돌려 버리자 세원이 조르듯이 하빈의 손을 당겼다. 하지만 버티는 하빈 역시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세원은 할 수 없다며 일단 움직이자 말하고 차를 출발했다. 세원은 이미 부산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 뭐가 어떻냐는 입장이었지만 불안한 하빈은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짐을 대충 풀어 놓고 침대에 앉아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세원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하빈은 정신없이 볼을 붙잡고 혀를 빨아들였다가도 빨리면서 키스를 이어 갔다. 춥춥거리는 소리가 방을 울리고 세원은 하빈의 머리칼을 잡아당겨 머리를 떼어 냈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
“몰라요…….”
잔뜩 퍼진 페로몬 향기에 세원이 달아오른 얼굴로 셔츠를 벗었다. 하빈 역시 옷을 벗어 던지고 세원의 품에 안겼다.
하빈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벼 대는 통에 세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피식 웃은 세원은 하빈의 어깨를 콱 깨물고 쪽쪽 빨아들이며 키스 마크를 새겼다.
“하앙, 앗…….”
하빈의 몸이 절로 들썩이며 아래를 문대 왔다. 세원이 하빈의 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집에 오자마자 이렇게 야하게 노는 거야?”
섹시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빈이 몸을 반쯤 일으켜 서둘러 버클을 풀고는 제 속옷과 함께 바지를 휙 벗어 던졌다. 세원이 키득거리며 장난치듯 하빈의 엉덩이를 벌려 주물럭거렸다. 하빈은 비음 섞인 교성을 내며 몸을 배배 꼬아 댔다.
“내 것도 만져 봐.”
세원이 제 페니스를 꺼내 하빈의 손에 쥐여 주곤 제 손을 포개어 함께 흔들었다. 하빈은 손을 덮은 커다란 세원의 손이 좋아 페니스를 흔들면서도 그에게 쪽쪽 입을 맞췄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입맞춤에 맞춰 뒤를 파고들었다. 구멍을 살살 만지작거리다가도 주변을 자극하고 만지작거리다가 또 장난을 치면서 간을 봤다.
“제발, 앙, 아흐…….”
엉덩이를 살살 흔들며 유혹하는 하빈에 세원이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며 하빈에게 명령했다. 네가 혼자서 박아 봐.
하빈은 주저하지 않고 세원의 위로 올라타 제 구멍에 페니스를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커다란 페니스가 꾸물꾸물 안을 채워 들어오는 감각이 생경했다. 이 느낌은 할 때마다 매번 새롭고 좋았다.
“으아, 하앙……. 하으…….”
반쯤 들어갔을까, 세원이 갑자기 하빈의 허리를 붙잡고 팍 내리찍었다. 하빈이 아흑! 소리를 지르며 세원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러자 세원은 하빈을 단단히 받쳐 안은 채 벌떡 일어나 큰방 안을 돌아다니며 추삽질을 해 댔다.
“아, 아앙, 아응, 읏, 흑, 흐읏, 하앙, 앗.”
쑥쑥 파고드는 페니스가 깊은 곳을 찔러 대며 정신없이 하빈을 자극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하빈은 고개를 흔들다가도 푹 숙여 세원의 귓가에 신음을 흘렸다. 가볍게 들어 올려진 하빈은 다시 벽에 바짝 붙여져 거칠게 몰아붙여졌다.
푹푹 쑤시고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가 미칠 듯이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황홀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소름이 돋고 오르가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아아……. 흐으…….”
“느꼈어?”
“네에…….”
하빈이 세원의 어깨에 축 늘어져 헉헉거렸다. 세원이 그 등을 쓰다듬다가, 다시 침대로 자리를 옮겨 하빈을 바로 눕혔다. 배가 보이는 자세에 부끄러워진 하빈이 가리려 하자 세원은 그 손을 떼어 내고 배를 쓰다듬어 주며 눈을 마주쳤다. 그 다정한 눈빛에 또다시 흥분이 일었다.
“후으, 흐읏.”
“오늘따라 더 심하게 느끼네.”
“몰라요.”
고개를 저으며 팔을 뻗자 세원이 다가와 하빈을 끌어안았다. 다시 깊숙이 쑤시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하빈이 교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흐, 으앙! 앗! 아앙, 흐앙, 아, 앙, 응, 읏.”
섹스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집착하게 됐다. 하빈은 세원의 등을 절박하게 붙잡으며 끌어안았다.
“하아, 흐으, 세원 씨.”
“응, 하빈아.”
“세원, 씨.”
헉헉거리며 이름을 부르는 하빈의 목소리에 세원이 대답하며 쪽쪽 입을 맞췄다. 하빈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그에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끝없이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에 세원이 거친 키스로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 짓을 했다.
윽윽거리며 신음이 먹혀 들어갔다.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고 주체할 수 없었지만 사랑한다 말한다면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 바보같은 짓일까.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가 내 곁에 있어 주길. 하빈은 그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 * *
집에서 한가하게 티비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세원은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빈이 눈치를 살피며 채널만 돌리고 있는데 세원이 갑자기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지, 저렇게 짜증 난 거 처음 봐…….
“세원 씨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어머니가 회사에 오셨다가 왜 자꾸 안 나오냐고 나 찾는다고 하시길래.”
“큰일 난 거 아니에요? 회사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냐, 아냐. 괜찮아.”
“그래도…….”
눈치를 보는 하빈에 세원은 괜찮다며 옆에 앉아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말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빈은 알겠다며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앉은 세원의 한숨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말하기 좀 그런 건가……. 하빈이 눈치껏 세원을 살폈다. 세원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계속해서 가족들과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세원 씨 서울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날 오후. 하빈이 저녁을 먹다 말고 말을 꺼냈다. 세원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하빈을 쳐다봤다.
“너 두고 나 혼자?”
“그럼 나도 같이 가자고요?”
“나 혼자 안 간다니까?”
“저는 아직 올라가기 싫어요……. 계약 기간 좀 더 남아 있기도 하고…….”
“그래. 그럼 계약 기간 끝나면 올라가자.”
“그래도 가족들이 찾는다면서요. 세원 씨는 먼저 올라가요.”
“됐어.”
오늘따라 세원이 제 옆에서 속을 태우는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나 때문에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하던 하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같이 올라갈까요?”
결국 세원 때문에 제 고집을 꺾고야 마는 하빈이었다.
“너도 올라간다고?”
“……네. 세원 씨가 자꾸 안 올라간다고 하니까 저도 올라갈게요.”
“언제?”
“근데 바로는 못 올라가고 산부인과 정기검진 한 번 더 받고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그러자.”
세원은 뭐든 좋다며 생긋 웃었다.
“난 너랑 서울 올라가고 싶어.”
“왜 그렇게 서울을 좋아해요.”
“여기 작은 집에 있으면 좁고 생활하기도 힘들잖아. 큰 집 가서 살면 좋은데.”
“나 서울 올라가도 세원 씨 집에 가서 안 살 건데…….”
중얼거리는 말에 세원은 물끄러미 하빈을 쳐다봤다.
“왜?”
“네?”
“왜 우리 집 와서 안 살 건데?”
“그냥요.”
“우리 집 와서 살자.”
또 조르기 시작하는 세원에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안 돼요. 쳇, 하고 혀를 찬 세원이 삐진 척 고개를 숙이고 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나와? 나 지금 삐쳤는데?”
“세원 씨 삐쳤다고요?”
“어.”
“세원 씨가 삐치기도 해요?”
“그럼 난 삐치면 안 돼?”
“와, 귀엽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네가 더 귀엽지.”
“내가 뭐가 귀여워요.”
“네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왜 아닌데? 우리 둘이 있는데 무슨 말을 못 해.”
세원이 웃으며 하빈에게 말했다. 하빈은 못 말린다는 듯이 세원을 따라 웃었다.
“하여튼 세원 씨 가끔 보면 진짜 주책맞아.”
“내가 내 새끼 예뻐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는 하빈도 포기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앉아 있던 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께 다시 전화 드려야겠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부산 내려와 있다고 말씀드리세요.”
“아니야. 그냥 일 있어서 잠깐 어디 나와 있다고만 하면 돼.”
“걱정 많이 하실 것 같은데…….”
“내가 애도 아니고. 괜찮아.”
세원은 태연했지만 하빈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았다.
들키면 어떡하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가득했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통화를 마친 세원이 무슨 생각을 하냐며 다가와 물었다.
“아니, 그냥…….”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까부터 너무 걱정하네.”
“걱정스러우니까 그렇죠. 서울 빨리 올라가야겠어요.”
“그럼 난 좋은데 네가 괜히 나 때문에 싫은 거 할까봐 미안해서.”
“그럼 세원 씨 혼자서 올라가요.”
하빈의 말에 세원이 그건 또 절대 안 된다며 하빈을 꼭 끌어안았다.
“널 두고 내가 어딜 간다고.”
“그게 뭐예요.”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자신을 챙겨 주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하빈이었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어서 자라고 하빈을 침대에 눕히곤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하빈은 침대에 누워 현관문을 바라봤다. 별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 그대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세원과 함께 가볍게 운동을 나왔다. 해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내리쬐는 햇빛이 따가웠다. 날이 점점 더워지네. 하빈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 손에 들었다. 더워? 세원이 옷을 받아 들며 하빈에게 물었다.
“네, 조금 더워요.”
“그래도 옷 벗었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니에요, 지금 날씨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그래도 걷다 추우면 말해.”
“네.”
하빈을 바라보던 세원이 안 되겠는지 결국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괜찮대도. 하빈은 제 어깨를 쓰다듬는 손을 붙잡고 걸었다.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앞으로 세원과 갈 길이 이렇게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아기를 잘 키웠으면 좋겠는데, 힘들지 않게 내가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빈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세원은 세원대로 생각에 잠겨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길을 걷던 하빈은 멀리서 달려가는 개를 보고 놀란 눈으로 가리켰다.
“강아지다!”
“엄청 크네. 대형 견인가 봐.”
“저도 강아지 키우고 싶었었는데. 형이 돈도 많이 들어가고 귀찮다고 못 키우게 했어요.”
“옛날에 강아지 키우고 싶었어?”
“네!”
“그럼 우리 나중에 강아지도 키울까?”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 아기 키우는 것만 해도 정신없을 것 같아요.”
하빈의 말에 세원이 웃으며 그건 그렇네, 하고 대답했다.
“솔직히 아기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돼요.”
“뭐가 걱정이야, 나랑 같이 잘 하면 되지.”
“세원 씨는 아무 걱정이 없는 거예요?”
“나도 걱정은 되지. 근데 나까지 걱정된다고 하면 넌 얼마나 더 걱정되겠어.”
“그건 그렇지만…….”
맞잡은 손을 맞지작거리자 세원이 꼭 붙잡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다 해 줄게. 그리고 나머지는 같이 해 가면 되잖아. 안 그래?”
“……네.”
그는 늘 이렇게 믿음을 주려 하는데도 불안해하는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 그냥 다 터놓고 믿으면 안 되는 걸까.
하빈은 세원과 맞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며 걸어갔다. 함께 걷는 길이 즐거웠다. 산책은 조금 귀찮고 힘들었지만 그가 있다면 늘 이렇게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온 하빈은 세원과 언제 서울로 돌아갈지 날짜를 잡았다. 정기검진이 며칠 뒤에 있었다. 하빈이 검진일을 알려주자 세원은 알겠다며 핸드폰에 날짜를 저장했다. 이것도 형에게 말해야 할까, 하빈이 고민하고 있는데 세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김지환한테도 말할 거야?”
“형한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그쵸.”
“어. 근데 너무 빨리 말하면 또 참견하고 귀찮게 할 테니까 나중에 하자.”
“네. 저는 세원 씨가 하자는 대로 할래요.”
그저 세원의 말을 잘 듣는 하빈이었다. 서울에 올라가기로 약속하자 전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부산에만 평생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세원을 부산에 잡아 두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서울에 올라가서 함께 살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빈은 단단히 각오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면 지금처럼 함께할 수 없을 테니까,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자는 마음이었다.
반면 세원은 별생각이 없는 듯 그저 서울에 가면 병원은 어디로 가고 또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갔던 식당에 다시 가고 싶지 않냐면서 물어보는 모습이 해맑아 그저 귀여웠다.
“세원 씨.”
“어?”
“아니에요.”
“왜?”
문득 생각난 장소가 있었다. 세원과의 추억의 장소. 하빈은 차마 제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부끄러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세원은 왜 그러냐며 하빈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저…….”
“응.”
“세원 씨랑 처음 같이 갔던 호텔 다시 가 보고 싶어요.”
“거기 레스토랑도 다시 가 볼래?”
“네.”
“그래, 그러자. 나도 거기 좋아.”
“거기서 밥도 다시 먹고 호텔도 다시 가고 싶어요.”
함께 누워 속삭이는 말에 세원이 알겠다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호텔에서 우리가 뭘 했더라.”
속삭이는 말에 하빈이 흐흥, 웃으며 품을 파고들었다.
“내가 서울 올라가면 데려가 줄게. 또 어디 가고 싶어?”
“음…….”
세원이 물었다. 하빈은 고민하다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며칠 뒤, 병원에 정기검진이 있던 날. 데스크에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자 자료를 보내 주겠다며, 서울에서 다니는 병원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말에 세원이 나서서 처리를 하고 있었다. 하빈은 대기실에 앉아 그런 세원을 지켜보며 제 차례를 기다렸다.
“김하빈 씨.”
“네.”
“진료실 들어가세요.”
하빈이 세원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그동안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네. 괜찮았어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의사는 다행이라며 초음파를 하자고 침대를 두드렸다. 초음파기를 대고 진찰을 하는 동안 하빈은 조잘조잘 제가 한 일에 대해 떠들었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며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하는 모습에 세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산책도 자주 하고 있고요, 먹는 것도 잘 먹고 있어요. 아기는 잘 크고 있을까요?”
“그럼요. 잘 크고 있네요. 태동은 했나요? 이제 태동할 때가 됐는데.”
“태동이요? 태동 아직 안 했어요…….”
“그래요? 이제 곧 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은 거예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태동 이야기에 하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봤다. 아직 태동한 적 없는데 태동할 때가 지났는데 안 한 건가……. 불안한 마음으로 의사만 쳐다보고 있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고는 하빈에게 설명했다.
“이제 태동 막 시작할 때가 된 거예요. 태동할 때가 됐는데 혹시 했나 싶어서 물어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구나……. 갑자기 태동 이야기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불안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하빈이 의사를 쳐다봤다. 의사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하빈의 배에 묻은 젤을 닦아 냈다.
“아기는 잘 자라고 있으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안심되는 말에 하빈이 가슴속의 걱정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원이 다가와 하빈을 부축했다.
“서울로 올라가신다고요.”
“네.”
“서울에서도 검진 잘 받으시고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게 아기 낳으세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하빈이 의사의 손을 꼭 붙잡고 연거푸 감사하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의사는 괜찮다며 덩달아 인사를 했다.
“잘 들어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 하빈이 세원에게 태동 이야기를 꺼내며 아기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무서웠다는 말을 꺼냈다. 세원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하빈을 안심시켰다.
“아기 잘 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걱정돼서…….”
“으이그, 걱정이 그렇게 많아서 어떡하려고.”
“힝…….”
하빈이 울상으로 세원의 팔을 붙잡았다. 세원은 괜찮다며 하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 아기도 곧 움직일 테니까 기다리자.”
“네.”
안심시켜 주는 말에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집에 가는 길에 하빈은 편의점에 들러 단지 우유를 사 마시며 돌아왔다.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 때 우유를 사 마시면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기와 연결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유가 그렇게 좋아?”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그리고 단지도 생각나서 좋고요.”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왜요?”
“더 좋은 거 사 달라고 안 하나 싶어서.”
“더 좋은 게 뭔데요?”
“그냥, 이것저것.”
그의 말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하빈이 그를 바라봤다.
“저는 세원 씨한테 바라는 거 별로 없는데…….”
“왜?”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당연한 게 왜 고마워. 내가 옆에 있어야지 누가 옆에 있어.”
“그런가?”
“그렇지.”
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빈은 그를 바라보다 우유를 마저 마시고 빈 우유병을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 넣었다. 그가 자신의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서울에 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금 두려워지고 있었다.
세원의 부모님이 하빈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반대할 게 분명했다. 내가 마음에 들 리가 없지. 한숨을 푹 내쉬자 세원은 힐끔 바라보고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며 하빈을 끌어안았다. 그의 다정함에도 풀리지 않는 불안감이 있었다.
“세원 씨는 부모님하고 친해요?”
“나? 부모님하고 잘 지내지. 왜?”
“그냥, 저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어떤지 잘 몰라서 궁금했어요.”
하빈의 말에 세원은 대답이 없었다. 부모님도, 그리고 돈도 없는 애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 나 같아도 마음에 안 들 텐데……. 코를 훌쩍이자 세원이 우냐며 하빈을 쳐다봤다.
“안 울어요.”
“우는 줄 알고 놀랐네.”
“제가 왜 울어요.”
“그러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나도 같이 좀 하자.”
“저는 그냥…….”
“그냥?”
입을 잠시 다물고 있던 하빈이 말을 돌렸다.
“서울 올라가면 뭐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랑 병원부터 가야지. 그리고 또 우리 집으로 이사 들어오면 더 좋고.”
“이사는 안 간다니까요! 또, 또 그 소리.”
지겹다는 듯이 귀를 틀어막자 세원이 다가와 손을 떼어내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오면 좋겠는데.”
“세원 씨 혼자 살아요.”
“지금 이렇게 같이 살아 보니까 더 같이 살고 싶어.”
그의 말에 솔직히 마음이 동하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도 세원과 함께 살아 보니 서울에 올라가서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얹혀 사는 것도 싫었고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께 살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 결혼을 먼저 하고 싶었다. 단지를 낳고 결혼을 한 뒤라면 세원과 함께 살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면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걱정하지 않고 함께 살아도 되겠지. 이런 생각도 그저 너무 멀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