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우연 같은 재회 (10/20)
  • 10. 우연 같은 재회

    “몇 시간을 잔 거야…….”

    하빈이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아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 하빈은 고픈 배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새 세원에게서 전화가 잔뜩 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다시 전화하기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전화를 내려놨다.

    “그나저나 배고프다.”

    전날 그렇게 열심히 장도 보고 요리도 했는데 다 버렸더니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저녁부터 지금까지 굶었더니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나갔다 올까. 다리를 달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던 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갔다 와야지. 대충 씻고 재빨리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코트를 껴입었다.

    하빈이 향한 곳은 근처 편의점이었다.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편의점을 둘러보며 컵라면도 사고 삼각김밥도 사고 간식으로 젤리도 하나 사서 구석에 있는 창가 의자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집 밖으로 나오고 나니 뒤늦게 배가 고팠다. 뭔갈 먹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기도 있고 하니까 더 잘 먹어야 할 텐데……. 이런 걸로 괜찮으려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각김밥을 전자렌지에 넣어 돌리는 동안 후식으로 먹을 아이스크림을 구경했다. 빨리 먹고 싶다.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서성이는데 창밖으로 큰 키의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어디서 본 사람인데. 힐끔거리던 하빈은 신호음을 내는 전자렌지에 서둘러 삼각김밥을 꺼내고 자리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호호 불어 면을 입으로 가져오려는데 앞에 선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하빈이 젓가락을 놓치며 라면을 후두둑 떨어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세원이 있었다. 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았고 그새 세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김하빈!”

    “어, 자, 잠깐……. 어떻게…….”

    “어디 가려고.”

    “그게, 그러니까…….”

    허둥지둥하는 하빈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원이 당장 나가자며 손목을 붙잡고 끌어냈다. 하빈은 질질 끌려나가며 중얼거렸다.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일 때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빈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자 세원은 손목을 더욱 강하게 잡아 왔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잠깐만요, 세원 씨. 잠깐만요.”

    “잠깐만은 무슨 잠깐만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빈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한 세원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는 하빈을 세원이 꽉 끌어안았다.

    등을 쓰다듬는 커다랗고 따스한 손길에 무겁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망설이던 하빈이 세원을 마주 안았다.

    “잘 있었어? 밥은 먹었고?”

    “아니요…….”

    “배 안 고파?”

    대답하지 않고 그저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답답할 법도 한데 세원은 연신 제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지며 자신을 예뻐하고 있었다.

    이런 행동이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제 비밀을 알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만 같아서. 오늘 만났으니 그에게 아기를 가진 것을 말해야 할까 망설여졌다.

    “……세원 씨.”

    “응?”

    “그때 화나서 갔잖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나 안 미워요?”

    하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세원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리고는 다 괜찮다며 자신을 달래 주었다. 세원이 하빈의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일단 어디 갈까? 춥잖아.”

    “……네.”

    “내 차로 가자.”

    함께 차로 들어온 세원이 히터를 틀어 주었다. 차 안에 감도는 따뜻한 온기에도 둘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서로를 향하는 두 쌍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잘 지냈어?”

    “네……. 세원 씨는요?”

    “나는 너 보고 싶었어.”

    거짓말 같은 그의 말에 하빈은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 때문에 실망하고 힘들어했을 게 분명한데도 이리 말해 주다니. 얼마나 어른스럽고 자상한 사람인가.

    하빈은 이런 세원이 너무 좋았다.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자 세원의 큰 손이 하빈의 작은 손 위로 겹쳐졌다. 세원이 다시 물었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저는 그냥 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부산까지 온 거야? 연락도 다 끊고.”

    “별일 없었어요.”

    “말 안 해 줄 거야?”

    “무슨 말이요?”

    하빈이 고개를 들어 세원을 바라봤다. 다 알고 왔다는 듯한 표정에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꼭 붙잡았다. 세원 역시 하빈을 꽉 붙잡고 말했다. 진지한 그의 눈빛이 자신을 향했다.

    “……너, 임신했다면서.”

    그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하빈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들었어.”

    “누구한테요? 형한테 들었어요?”

    “응.”

    말할 사람이 형 말고 또 있나……. 한숨이 나왔다. 하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세원이 잡혀 있던 한쪽 손을 빼내 하빈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무서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어……. 그게 그러니까요…….”

    더듬거리며 입을 열자 세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었다.

    “임신이 맞긴 한데……. 세원 씨는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하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세원은 단호했다.

    “내가 아기 아빠 아니야?”

    무섭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하빈이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 다시 말했다.

    “……맞아요.”

    “근데 나보고 신경 쓰지 말라고? 그게 말이 돼?”

    “그럼 뭐라고 말해요…….”

    “뭐?”

    “임신했는데 뭐라고 말해요?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없어. 왜 피하고 도망가기만 하는데.”

    “그야……. 무서우니까…….”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세원 씨가 나한테 실망하고 화나고 그러는 게 무서워요. 물론 이미 화났을 테지만…….”

    “내가 너한테 왜 화가 나.”

    세원이 한숨을 쉬며 하빈의 머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가 그의 품에 안긴 하빈이 눈을 감고 페로몬 향기를 맡으며 어질어질했던 머리를 진정시켰다. 아빠의 페로몬이 확실히 배 속 아이에게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세원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빈아,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모르겠어?”

    세원의 말에 하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팔뚝을 쓰다듬어 주며 다시 말했다.

    “하빈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않고 이렇게 다시 돌아오겠어?”

    “그래도…….”

    “왜 못 믿어.”

    “화나서 갔잖아요.”

    “그때는 화가 났었어. 미안해. 상처받았어?”

    “그건,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상처받을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세원이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길 바랐는데 그렇게 두고 떠나갔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하빈은 입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우리 서로 싸웠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하빈은 두려웠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전부 아기 때문이 아닐까, 세원이 자신의 아기를 책임지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하빈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묻고 말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세원 씨.”

    “응.”

    “혹시……. 아기 책임지려고 이러는 거면 안 그래도 돼요.”

    “무슨 말이야.”

    “나 혼자서도 아기 잘 키울 수 있으니까 세원 씨는 자유롭게 살아도 돼요.”

    “김하빈.”

    세원이 인상을 쓰고 하빈을 쳐다봤다. 자신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왜 나 같은 걸 사랑할까. 속이기까지 한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가 참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웠지만 두렵기도 하고, 불쌍하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면 어떡하지. 허공에 낀 안개를 휘젓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참담했다. 하빈은 고개를 들지도, 세원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고개 들어 봐.”

    “싫어요.”

    “나 마주 보고.”

    “싫어요…….”

    “김하빈.”

    “싫다니까…….”

    턱을 잡아 드는 세원의 손을 쳐 내려던 하빈이 그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세원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얼이 빠진 하빈이 눈을 껌뻑이자 세원이 말했다.

    “예쁜 눈은 그대로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좀 들어라. 응?”

    세원이 짧게 입을 맞추며 장난치듯 말을 걸어 왔다. 덕분에 하빈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힐끗 시선을 돌려 앞 유리를 보자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원은 누가 지나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 말아요. 하빈이 칭얼거리자 세원은 순순히 놓아 주며 작게 미소지었다.

    “예쁘다.”

    “뭐, 뭐가 예쁘다고…….”

    “하빈아, 너 어디서 살아? 너 있는 곳 가 보자.”

    “싫어요.”

    “왜.”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어디서 지내는지 정도는 내가 알아야지.”

    “세원 씨 얼른 집에 들어가요. 출근 안 해요? 출근해요, 출근.”

    “너 집에 갈 때까지 무단결근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나 출근시키고 싶으면 너도 집으로 돌아가.”

    “싫어요! 혼자 가요!”

    하빈이 소리치며 다리를 버둥거리자 세원이 웃으며 얼른 내리라 손짓했다.

    “빨리 내려.”

    “싫다니까요.”

    “빨리.”

    “싫은데…….”

    결국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내리게 된 하빈은 입을 댓 발 내민 채 그의 손을 잡고 걸어야 했다.

    “가자.”

    “왜 우리 집으로 가는 거예요?”

    “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서울에 있는 집도 봤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집도 궁금하지.”

    “거기보다 여기가 더 안 좋아요.”

    “더 안 좋아도 상관없어. 빨리.”

    “치…….”

    투덜거리면서도 세원의 손을 놓지 않았던 하빈이 우뚝 멈춰섰다. 세원은 하빈을 돌아보며 왜? 하고 물었다. 하빈은 배를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배고파…….”

    “배고파?”

    “네.”

    “그럼 뭐라도 좀 먹고 들어갈까?”

    “좋아요.”

    “근처에 무슨 식당이 있으려나.”

    “뭐 먹을까요!”

    “맛있는 거 먹자. 너 좋아하는 거 사 줄게.”

    금세 기분이 좋아진 하빈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세원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은 칼국수를 한 그릇씩 해치우고 배가 부른 채 다시 하빈의 집이 있는 동네로 돌아왔다. 번잡한 시내와 달리 빌라만 가득한 동네는 조용했다.

    하빈의 집으로 들어온 세원은 텅 빈 집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계속 지내려고 했었다고?”

    “네.”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세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빈을 돌아봤다. 왜 그러냐며 자리를 깔고 앉아 과일 줄까요? 하고 묻는 하빈에 세원은 할 말을 잃었다. 됐다며 사양한 세원이 거실 바닥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좁아터진 원룸 방구석에 있는 것이라곤 티비 하나와 침대 하나, 그리고 냉장고와 싱크대가 전부였다. 여기서 뭘 어떻게 지내려고 했다는 거야. 세원이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툭 내려놓자 눈치를 본 하빈이 다가와 세원의 팔을 붙잡았다.

    “왜요?”

    묻는 말에 세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혼자 짜증이 난 것뿐이었다. 좀 더 좋은 곳에서 좋은 생활을 하게 해 주고 싶은데 이런 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하빈은 그저 세원을 보고 핸드폰을 보길 반복하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뭐가 그렇게 바빠?”

    “형이 자꾸 연락을 해 대서…….”

    “김지환한테 전화 한 통 해. 너 엄청 찾고 다녔어.”

    “그래요? 걱정 많이 했나 보네. 그치만 형 무서운데…….”

    “전화는 해. 나랑 같이 있다고 하면 되잖아.”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은근히 승리감이 생겨나는 세원이었다. 지환보다 빨리 하빈을 찾아내다니. 쉴 새 없이 전화하고 부산까지 직접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피식 웃으며 하빈이 지환과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다가도 엄청 화를 내는 듯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수화기 밖까지 튀어나왔다. 하빈은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고 대충 대답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했더니 뭐래.”

    “미쳤냐고 뭐라고 해요.”

    “임신한 사람한테 미쳤냐가 뭐야. 태교에 도움은 못 줄망정.”

    “태교…….”

    하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사에 세원 역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집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참 말이 없던 두 사람 사이에 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원 씨.”

    “응?”

    “세원 씨는 제가 임신한 거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무슨 뜻으로 묻는 거야?”

    “지웠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제가 키워도 돼요?”

    하빈의 말에는 함께 하자는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세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본 하빈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 갔다.

    “그걸 나 혼자 정할 문제도 아니고, 왜 너 혼자만 키우려고 하는 건데.”

    “그럼요?”

    “나도 같이 아기 키워야지.”

    “나랑요?”

    “그래.”

    “……그런 건 딱히 진지하게 생각 안 해 봤는데.”

    하빈이 중얼거리며 세원을 바라봤다. 세원은 빛을 내고 있는 하빈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리 와 봐.”

    세원이 제 무릎을 두드리며 하빈을 불렀다. 하빈은 홀린 듯 쪼르르 다가가 세원의 품에 기대 폭 안겨 버렸다. 하빈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세원은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기가 잘 자랐으면 좋겠어.”

    “정말요?”

    “그럼. 우리 아기잖아.”

    “저도요…….”

    눈을 감고 기대어 있는 하빈에게서는 페로몬 향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안심하고 있는 그에게서는 제어할 수 없는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원은 헛기침을 하며 하빈의 몸을 쓰다듬다 하빈을 잠시 내려오게 한 뒤 손을 꼭 붙잡았다.

    “하빈아.”

    “네?”

    “지난번에 있었던 일은 그냥 연인들 사이에서 한 번쯤 있을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하자. 우리가 계속 만나려면 어떻게든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잖아.”

    “……그렇죠.”

    “이렇게 넘어가는 게 차라리 좋을지도 몰라.”

    “맞아요. 내가 힘들었던 만큼 세원 씨도 나한테 상처받았을 거 아니에요.”

    “괜찮아.”

    세원이 너그럽게 대답했다. 하빈은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였다.

    “왜 그래.”

    세원이 하빈의 눈가를 쓸어 주며 물었다. 하빈은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냥……. 세원 씨는 엄청 어른스럽고 멋있고 그런데 나는 너무 어린 것 같고 바보 같고 그래서 부끄러워요…….”

    “뭐가 어리고 바보 같아. 전혀 안 그래.”

    토닥여주는 세원의 손길에 하빈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숨겼다. 세원은 얼굴을 좀 보자며 하빈의 턱을 잡아들었다. 싫다는 하빈의 몸짓에도 억지로 볼을 잡아 들고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짧게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예쁘네.”

    그의 말 한마디에 힘들었던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빈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세원 씨 형 때문에 싸운 일은 정말 미안해요. 저는 사정을 잘 모르고 형한테 도와주겠다고 한 거였어요. 그래서 세원 씨한테 상처를 줬어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는데…….”

    “괜찮아. 너랑 헤어져 있는 동안 나도 생각 많이 했어. 내가 김지환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건 여전히 모르겠지만.”

    “우리 형이 좀 이상한 거예요.”

    “그런 것 같아.”

    그의 대답에 하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다 이어 말했다.

    “내가 널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너랑 계속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 세상은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그래요…….”

    “우리 이제 아기도 있잖아. 그냥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아빠, 엄마로 만나는 거니까 더 잘 해야지. 안 그래?”

    “맞아요.”

    “너 혼자 임신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씩씩하게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었네. 기특하게.”

    세원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의 품을 파고들며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빨리 만난 것 같아요.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가?”

    “네.”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은 웃으며 하빈을 품에 안은 채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꺼내놓았다.

    * * *

    세원이 천천히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하빈은 세원의 목을 끌어안고 얼른 올라타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격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세원은 하빈의 몸을 어루만졌다. 하빈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배부터 시작해 가슴, 쇄골을 쓸어올려 옷을 벗긴 세원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 옷도 벗어 던졌다.

    “하아, 아…….”

    오랜만의 관계에 두 사람 모두 잔뜩 흥분해 앞이 불뚝거리고 있었다. 하빈은 끙끙 앓으며 몸을 비틀었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의 몸 곳곳을 혀로 핥아 댔다. 젖꼭지를 쪽쪽 빨다가도 이로 깨물자 하빈이 몸을 들썩이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아, 빨리, 빨리이, 세원 씨, 흐앙.”

    배꼽 근처를 핥던 세원이 하빈의 바지 버클을 끄르고 바지와 브리프를 끌어내리자 제법 발기한 페니스가 쑥 올라왔다. 부끄러운 마음도 잠깐이었다. 이미 한두 번 관계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빈은 제 페니스를 잡고 흔들며 그를 바라봤다.

    “세원 씨, 나, 여기, 으응, 흣.”

    “여기가 왜, 응?”

    장난스럽게 페니스를 쥐고 살살 흔들며 자극하자 하빈이 앙앙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커다란 손에 잡혀 귀두 끝이 자극되자 죽을 만큼 좋아서 머릿속이 짜릿했다. 아흐, 으앙! 발끝이 오그라들고 다시 펴지며 하빈이 무릎을 굽혔다.

    “얼른 해 줘요, 빨리요, 빨리…….”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통에 세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 바지를 벗고 하빈의 밑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구였지만 이미 애액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꼭 다물린 뒷구멍을 벌리며 밀고 들어오는 커다란 페니스가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뚝거리는 핏발이 하빈의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출 때마다 위에서는 신음이 쏟아졌다.

    “아으, 앙! 아, 흐, 읏.”

    “천천히 해 줘?”

    오랜만의 관계에 하빈이 버거워하자 세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달라붙듯 조이는 느낌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해 달라 손을 뻗었다. 세원은 알겠다 말하고는 한쪽 손으로 하빈의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허리 짓을 시작했다. 꾸물거리며 밀고 들어간 페니스가 쑥 빠져나오자 애액이 함께 밀려 나왔다.

    “으응, 읏…….”

    “후우…….”

    “하앙!”

    다시금 팍 찔러 오는 세원에 하빈이 들썩이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세원을 불러댔다.

    “아으, 앙, 세원 씨, 하앙, 하으, 으읏, 윽, 후으…….”

    하빈은 세원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맥없이 흔들리며 정신을 놓고 신음을 줄줄 내뱉었다.

    세원은 하빈의 가는 허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제 위에 앉혔다. 세원은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의 위에 앉은 하빈을 이리저리 흔들며 추삽질을 이어 갔다.

    그러다 세원은, 몸을 일으켜 그대로 제 체중을 실어 하빈을 찍어눌렀다. 하빈의 교성이 더욱 높아졌다.

    “흐으, 읏, 하아, 아앙, 앗, 아응, 우으, 흑…….”

    “좋아?”

    “네, 네에…….”

    자세를 바꿔 엎드린 채로, 들어올린 엉덩이를 세원에게 흔들어 보이는 하빈의 자세가 지독하리만치 색정적이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허리 짓을 반복했다.

    페니스가 안을 쑤시고 들어갈 때마다 하빈의 신음은 높아져만 갔다. 소리를 참기 위해 팔뚝을 꾹 깨물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응응거리는 신음이 터져 나갔다.

    그렇게 한참 섹스를 하고 하빈이 샤워를 하는 동안 뒷정리를 마친 세원이 하빈의 뒤를 이어 욕실에 들어갔다. 맨몸으로 침대에 누운 하빈이 바스락거리며 몸을 비비적거렸다.

    세원은 나와서 옷을 입으려다 말고 하빈의 옆에 누워 뺨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전라의 상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입을 맞췄다.

    “좋다…….”

    “좋아?”

    “네.”

    “그럼 됐어.”

    다시 또 입을 맞춰 오는 세원에 하빈이 키득거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뜨끈뜨끈한 몸이 좋았다. 그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피로가 풀리며 저 멀리에서 파도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때 세원이 없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그는 방 중간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껌뻑이다 고개를 들자 세원이 일어났냐며 웃어 주는 모습에 왈칵 하고 이유 모를 눈물이 터져 버렸다. 나 왜 이렇게 주책이지.

    “왜 울어, 응?”

    당황한 세원이 다가와 하빈을 끌어안았다.

    “몰라요…….”

    하빈은 적잖이 서러웠는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한참 눈물을 뽑아냈다.

    그렇게 몇 분을 울었을까. 코를 잔뜩 풀고 나서야 울음을 그친 하빈은 빨개진 코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바나나맛 단지 우유에 빨대를 꽂아 홀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자꾸 웃는 그의 얼굴에 하빈이 투정을 부렸다.

    “왜 웃어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왜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세원을 노려보는 모습마저 귀여운 하빈이었다. 세원은 결국 웃음을 빵 터뜨리며 손을 뻗었다.

    “나도 우유 한 모금 줘.”

    “싫은데…….”

    “싫어?”

    “아뇨.”

    헤실헤실 웃으며 빨대를 디미는 하빈에 세원이 됐다며 손을 거둬들였다. 삐졌어요? 하빈이 다가가 세원의 옆에 앉아 바나나 우유를 입가에 들이밀었다. 먹어요! 괜찮아요! 괜찮다며 설득하는 꼴이 참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나는 세원이었다.

    “너 집에는 언제 갈 거야.”

    “여기 집 계약한 거 끝나면 갈 생각이에요.”

    “서울에 있는 집은 어쩌고.”

    “거기는 거기고…….”

    우물쭈물 말하는 꼴에 세원이 한숨을 푹 쉬며 하빈의 머리를 마구 흩트려 놓았다. 하빈이 하지 말라며 칭얼거리고, 하빈이 물고 있던 빨대 끝에서 쪼록쪼록,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빈 우유병을 버리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세원이 하빈의 손에서 우유병을 가져가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다정한 그의 행동에 하빈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봤다.

    “세원 씨는 언제 갈 거예요? 지금 밤 다 되어 가는데 얼른 출발해야 오늘 안에 들어가서 잠자고 내일 출근하죠.”

    “아까 한 말 기억 안 나? 너 안 가면 나도 안 간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담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회사도 가야 하는데…….”

    하빈이 멍하니 세원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왜 믿지 못하냐며 어깨를 으쓱이는 세원의 모습은 당당해도 지나치게 당당했다. 정말 자고 갈 건가? 하빈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나 여기서 자면 안 돼?”

    “그건 아닌데…….”

    “그냥 네가 포기하고 서울로 가자.”

    “싫어요.”

    “그래, 그럼 우리 둘이 여기서 살자. 그러면 되지.”

    “아, 세원 씨!”

    “네가 집에 가면 될 일이야. 나 회사 보내기 싫으면 계속 여기 있어.”

    “그게 뭐야…….”

    입을 삐죽인 하빈이 발을 휘휘 내저으며 짜증을 부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이 귀여워 발목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기 초음파 사진 볼래요?”

    “있어?”

    “며칠 전에 산부인과 다녀왔는데 거기서 줬어요.”

    “볼래.”

    서랍장 위에 올려놨던 산모수첩을 집어 들고 세원의 옆에 앉은 하빈이 초음파 사진을 펼쳐 세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아기래요. 신기하죠.”

    “신기하네.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속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가 초음파 하면서 알게 됐어요.”

    “아팠었어?”

    “네.”

    “힘들었겠네.”

    괜찮아요. 대답하며 생긋 웃어 보이자 착하다며 세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며 놀던 두 사람은 다가오는 저녁 시간에 세원이 시계를 확인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녁 먹을 때 다 됐는데.”

    “배고파요?”

    “조금. 너는 배 안 고파?”

    “저도 배고파요. 임신하니까 시도 때도 없이 배고팠다가 또 입맛 없었다가 하는 것 같아요.”

    “고생이 많다.”

    세원이 하빈의 볼을 쭉 눌러 붕어 입술을 만들었다. 뻐끔뻐끔 장난을 치다가 입을 맞추고 함께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르기 시작했다.

    “뭐 먹을까? 시켜 먹을까, 아니면 해 먹을까?”

    “시켜 먹어요. 떡볶이 먹고 싶어요.”

    “떡볶이? 맵지 않겠어?”

    “안 맵게 시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떡볶이 먹고 싶어요…….”

    시무룩한 척 하빈이 품에 안겨들어 조르자 세원은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알겠다 대답했다.

    “그럼 내가 시킬 테니까 가서 쉬고 있어.”

    “네.”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주문을 마친 세원이 다가와 하빈의 옆에 누웠다. 이리 와 누우라며 팔베개를 해 주고는 하빈을 바짝 끌어안았다.

    왜요? 고개를 돌리자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한 세원이 하빈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려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귀여운 행동에 하빈이 웃으며 세원을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세원 씨 귀엽다. 속으로 생각한 하빈이 핸드폰을 휙 집어 던지고 세원을 마주 안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꼭 끌어안고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사이로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배달이 왔다는 초인종 소리에 세원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갔다.

    “배고프지, 얼른 먹자.”

    “네!”

    음식을 깔아 놓고 마주 보고 앉아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매콤한 맛이 식욕을 자극했다. 두 사람이 서로 먹여 주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원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내심 신경쓰인 하빈이 세원의 핸드폰 쪽을 힐끔거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뒤집어 버렸다.

    “왜?”

    “자꾸 연락 오는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쓸데없는 연락들이야.”

    “그래도 계속 전화 오던데…….”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빤히 쳐다보자 세원이 괜찮다며 하빈의 볼을 쓰다듬었다. 진짜죠?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바쁘겠지. 사람들이 세원 씨를 찾고 있겠지. 하지만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빈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여 애꿎은 떡볶이만 뒤적거렸다. 이렇게까지 그를 괴롭혀 가며 함께해야 할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 내가 괜찮다니까?”

    “네? 아니에요. 그냥……. 생각하는 거예요.”

    “너 또 쓸데없는 생각하는 거 다 아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얼른 더 먹어. 나중에 또 배고파서 칭얼거리지 말고.”

    “내가 언제 세원 씨한테 칭얼거렸어요!”

    “너 잘 찡찡거리잖아.”

    “안 그러는데!”

    힝……. 입을 삐죽이며 그를 노려보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알겠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다시 떡볶이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세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어 왔다.

    “아기 태명 같은 건 지었어?”

    “태명이요? 아니요……. 그냥 아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 아기인데 잘 키워야지. 태명은 뭐라고 할까?”

    “글쎄요. 세원 씨는 어떤 게 좋아요?”

    “나는 특별한 거나 특이한 거로 하고 싶다.”

    “뭐가 좋을까요?”

    “흠……. 귀여운 게 없을까?”

    “귀여운 게 뭐가 있지…….”

    “글쎄. 그런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세원이 팔짱을 끼고 하빈을 쳐다봤다. 귀여운 태명이 뭐가 있을까. 하빈은 곰곰이 생각하다 주변을 둘러봤다.

    부르기 편한 이름이 좋을 것 같은데, 귀엽고 예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멍하니 있던 하빈이 문득 한편에 놓인 바나나 단지 우유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세원을 돌아봤다.

    “단지 어때요?”

    “단지? 갑자기?”

    “네!”

    “왜?”

    “……그냥요. 바나나 우유 보니까 생각나서.”

    피식 웃는 그의 모습에 부끄러워진 하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요! 왜 웃어요! 뭐가! 세원 씨가 먼저 나보고 뭐 하고 싶냐고 물어봤잖아요!”

    “그래, 근데 단지라고 하니까 귀여워서 그렇지.”

    “귀여운 거 하고 싶다면서요!”

    “귀엽네. 그래서 귀엽다고 했잖아.”

    “근데 왜 웃었어요?”

    “아니, 귀여워서 웃었다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세원에 할 말이 없어진 하빈이 입을 다물었다. 씨잉……. 입을 꾹 다물고 그를 흘겨보다 투덜거리듯 말했다.

    “근데 저 갑자기 걱정되는 게 있어요.”

    “뭔데?”

    “우리 아기는 어떻게 키우죠?”

    “뭘 어떻게 해?”

    “아기 키운다고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저는 아기 혼자 키워도 상관없는데 괜히 세원 씨 발목 잡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어…….”

    “우리가 결혼을 왜 안 해.”

    “……그럼 나랑 결혼할 거예요?”

    “해야지. 넌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그걸 어떻게 내가 결정해요. 세원 씨 집에서 저 싫다고 하면 어떡해요.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왜 싫다고 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가진 게 왜 없어. 그런 게 뭐가 중요해.”

    “그래도 무서워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치를 살피자 세원은 괜찮다며 손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걸까. 지환의 말로는 무시무시하다는 그의 집안사람들 이야기에 덜컥 겁이 났다. 아기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지만, 그치만……. 하빈이 두서 없이 웅얼거렸다. 세원은 하빈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네.”

    “나랑 있을 땐 우리만 생각해. 알겠지?”

    “그래도 불안한 걸 어떡해요…….”

    손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리자 세원이 피식 웃으며 때에 맞지 않게 귀엽다는 말을 해 왔다.

    “지금 귀여워할 때가 아니라고요.”

    하빈이 말하며 세원의 손등을 찰싹 때리자 그는 알겠다며 다가와 입술을 쪽 부딪쳤다. 짧은 입맞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빨개졌네.”

    “너, 너무 더워서.”

    “창문 잠깐 열까? 난방이 너무 센가?”

    “그런가 봐요…….”

    축 늘어져 뒤로 기댄 하빈이 콧잔등을 긁적이며 세원을 쳐다봤다. 배불러?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정리를 마친 세원이 하빈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임신인 거 알았을 때 어땠어?”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느낌이었지. 지환과 함께 있어 많이 당황했던 기억부터 났다. 그리고 당장 지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덜컥 겁이 났었다.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빈이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세원은 가만히 손을 붙잡고 기다렸다.

    “솔직히……. 처음에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몰랐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그랬어?”

    “네. 근데 형이 다짜고짜 지우라고 하는데 겁이 났어요. 무서웠어요.”

    “왜 무서웠어? 키우는 게 더 두렵고 어려운 일 아니야?”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그 당시에는 아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세원 씨랑 이어진 아기인데……. 제가 세원 씨를 사랑해서 그런지 아기한테 정이 갔어요.”

    마지막 말에 세원은 말이 없어졌다. 사랑해서. 그래. 하빈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볼을 긁적이다 힐끔 옆을 쳐다보았다. 세원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묻는 말에 세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예뻐서, 라며 꼭 안아 주는 품이 좋았다.

    샤워하고 나와 따뜻하게 난방을 틀어 놓고 나란히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두 번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체온을 나누며 세원의 품에 안겨 있던 하빈이 먼저 잠에 빠져들고 그런 하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세원은 하빈의 뺨을 쓰다듬으며 연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네.”

    중얼거리는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빈이 뒤척이자 세원은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 * *

    함께 지낸 지 며칠이 지났다. 세원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고 하빈 역시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작은 방에 틀어박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단칸방에서 함께 살림을 차린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세원은 회사에서 오는 연락을 모두 무시했고 하빈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이러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겨 세원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이런 제 맘을 알긴 하는 건지 세원은 장을 보러 가자며 지갑을 챙기고 있었다.

    “저 오늘 병원 가는 날이에요.”

    “병원? 무슨 병원?”

    “산부인과요.”

    “아, 산부인과.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세원 씨도 같이요?”

    “같이 가야지. 내가 아빤데.”

    아빠라는 말에 침대를 정리하던 하빈의 손이 우뚝 멈췄다. 하빈이 뒤를 돌아봤다. 설거지를 하던 세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단지 사진이랑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을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궁금하네.”

    제법 익숙하게 단지라고 부르는 세원의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두근거리고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떨린다…….

    가만히 서서 눈만 껌뻑이고 있자 세원이 조용해진 하빈을 돌아보고 왜 그러냐며 물어 왔다. 하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피식 웃어 보이고는 다시 침대를 마저 정리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이렇게 제 곁에 있는 게 행복했다.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발 아무도 행복을 빼앗아 가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와 함께 셋이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아프지 않고 잘 자라고 있는 거지? 하빈이 조심스럽게 배를 감싸고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산부인과에 가서 제 차례를 기다리는 하빈의 기분은 지난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때는 남편과 방문한 오메가들을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자신도 세원과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하빈은 실실 웃으며 세원의 손을 잡고 병원의 내부를 둘러봤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저거 봐요.”

    “뭔데?”

    “여기서 무슨 영양주사 같은 것도 맞고 하나 봐요.”

    “맞고 싶어?”

    “아뇨…….”

    “왜?”

    “주사 무서운데…….”

    “근데 왜 말했어?”

    “그냥 신기해서요.”

    하빈이 얼른 말을 돌리려 했지만 세원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장난을 쳤다.

    “저 아기 예쁘다. 그쵸?”

    “주사 잘 못 맞아? 무서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안 중요해. 내가 알아야지.”

    “뭘 알아야 해요, 몰라도 돼요.”

    “난 너에 대해 다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자세로 눈을 맞추며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가만히 있는 모습도 이렇게 멋지고 난리야.

    부끄러워진 하빈이 고개를 돌리자 세원이 하빈의 턱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래서 주사 무서워, 안 무서워? 세원이 물었다. 하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아, 무섭다고요…….”

    “무서워?”

    “네에…….”

    “그랬구나.”

    “그러니까 그만 좀 물어봐요! 쪽팔린단 말이에요!”

    “그게 뭐가 쪽팔려. 그럴 수도 있지.”

    “형이 이걸로 매번 놀려서 쪽팔려요.”

    “네 형이 문제네, 아주 문제야.”

    쯧쯧. 혀를 차는 세원에 하빈이 맞아요, 형이 문제야. 하고 폭 안겨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기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하빈의 시선이 돌아가자 세원도 함께 그곳을 바라봤다. 아기가 두 사람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손짓했다.

    “아기가 예뻐요. 몇 달이나 됐어요?”

    “이제 8개월 지났어요.”

    “그렇구나. 너무 예쁘다. 만나서 반가워, 아가야.”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기가 작은 손으로 하빈의 손을 꼭 붙잡으며 방방 흔들었다. 그 행동에 어딘가 불안했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 너무 예쁘다. 하빈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르고 아기를 바라보자 세원은 뒤에서 하빈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대 아기를 쳐다봤다. 아기는 세원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 웃는 게 진짜 예쁘죠, 세원 씨.”

    “그러게, 너무 예쁘네.”

    “우리 아기도 이렇게 예쁘게 태어났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는 말에 아기 엄마는 웃으며 예쁜 아기 낳으세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가세요. 하빈도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기 엄마의 모습이 어쩐지 부러워 보이기도 하는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예쁜 아기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부러움이 가득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네?”

    “늘 보면 생각이 참 많은 것 같아.”

    “내가 너무 진지해요?”

    하빈이 물었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지하다는 말이 아니라, 음……. 혼자 뭔가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아서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왜요?”

    “왜냐니. 궁금하니까.”

    “……방금은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어요. 저 아기를 보니까 우리 아기도 예쁘게 키우고 싶고 또 내가 잘 기를 수 있을까 싶고 또,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졌어요.”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네.”

    “그런 것 같아요. 이상해요?”

    “이상할 리가. 나랑 같이 나눠서 하면 되는데 왜 혼자서만 해. 같이 해.”

    “같이 해요?”

    “어. 나도 같이 하자.”

    하빈의 어깨를 감싸 온 세원이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내가 함께할 거니까 괜찮아.”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하빈이었다. 눈에 하트를 달고 그를 쳐다보자 뭐가 그렇게 좋냐며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해진 하빈이 고개를 돌리자 세원이 자기를 보라며 또 장난을 쳐 왔다.

    그러던 와중에 하빈의 이름이 불리고, 둘은 함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요? 오늘은 남편이랑 같이 오셨네?”

    “같이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빈 씨는 이리 앉으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오늘도 초음파 검사 하나요?”

    “오늘도 검사해야죠.”

    의사의 말에 하빈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아 세원을 바라봤다. 괜찮을 거라며 등을 쓸어 내리는 손길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바라본 하빈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음파기 옆에 있는 침대에 누운 하빈은 옷을 올리고 배를 내보였다. 의사가 하빈의 배에 젤을 바르고 초음파기를 들어 천천히 문질렀다. 검은 모니터 화면에 하얀색 무늬가 보이기 시작하고 검은 점이 떠올랐다.

    “자, 아기가 잘 자라고 있네요.”

    “정말요?”

    “아주 건강해요. 오늘 심장 소리도 들려 드릴 거니까 나중에 핸드폰 번호 남겨 주시면 동영상도 보내 드릴게요.”

    “우와, 우와. 심장 소리요?”

    “네. 지난번에 오셨을 땐 못 들었죠?”

    “못 들었어요. 신기하다.”

    눈을 빛내며 의사를 쳐다보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하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이제 들려주겠다며 초음파기를 이리저리 만져댔다.

    “세원 씨, 심장 소리 들려 준대요. 신기해요.”

    “그러게. 신기하다.”

    세원이 다가와 하빈의 손을 붙잡았다. 꼭 잡은 두 손이 따뜻했다. 하빈은 웃으며 세원을 바라보다 의사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하빈의 신호에 맞춰 아기의 심장 소리를 틀었다.

    신기한 소리. 하빈의 심장이 요동쳤다. 아기 심장 소리는 이렇구나. 덜컥거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세원 역시 집중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너무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지?”

    기쁜 마음에 히죽 웃으며 세원을 바라봤다. 함께 웃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마다 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세원은 아기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해맑은 하빈의 표정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빈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걱정이 많은 그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잘할 수 있을까. 하빈 앞에서는 자신만만했던 그였지만 조금씩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괜찮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조심해서 들어가고 몸 조심하세요. 입덧 심해지면 병원에 또 들러요.”

    “네!”

    꾸벅 인사를 한 하빈이 진료실에서 나오며 세원의 손을 붙잡았다.

    “세원 씨, 의사 선생님 진짜 친절하죠?”

    잡은 손을 붕붕 흔들며 말하자 세원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제는 괜찮은 건가? 살짝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한 하빈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

    “저 오늘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맛있는 거? 뭐 먹고 싶은데?”

    “고기 먹고 싶어요.”

    “무슨 고기 먹을까. 다 사 줄게.”

    세원이 싱긋 웃었다. 하빈도 마주 배시시 웃으며 고민에 빠졌다. 뭐가 좋지? 한껏 들뜬 얼굴에 세원이 물었다.

    “소고기 사 줄까?”

    하빈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세원은 몸보신도 할 겸 소고기를 먹자며 하빈을 이끌었다.

    얼떨결에 고깃집에 들어온 하빈은 어쩔 줄 모르고 세원만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인데, 어떻게 세원은 이런 곳만 찾아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세원 씨, 여기 너무 좋아 보이는데…….”

    “그래? 좋은 데 와서 맛있는 거 먹고 가서 쉬자.”

    “그래도…….”

    “괜찮아. 뭐 먹을래?”

    메뉴를 고르는 그의 모습에 하빈은 자리에 앉아 다리만 동동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자주 오는 가게가 아니라 그런지 메뉴도 생소했다. 어느 부위가 맛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가격은 너무 비쌌다.

    뭘 어떻게 시키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자,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주문을 마친 세원이 물을 홀짝이며 자신을 바라봤다. 부끄러운 마음에 하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고 있어.”

    “그냥…….”

    “오늘 좋은 날인데 신나게 먹어야지.”

    “맞아요……. 좋은 날인데……. 세원 씨도 아까 단지 심장 소리 들었죠? 엄청 신기한……. 저 그런 소리 처음 들었어요.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제 심장이 두근거리고 빨리 뛰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하빈이 조잘거리자 세원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하빈이 물었다.

    “세원 씨도…… 좋았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세원은 당연한 걸 묻냐며 좋다는 대답을 해 왔다.

    “나도 당연히 좋았지.”

    “그랬구나…….”

    “왜, 안 좋아 보였어?”

    “그냥 표정이 엄청 진지해서 안 좋은가 싶었어요.”

    “아냐, 잠깐 생각이 좀 많아졌었어.”

    “왜요?”

    “아기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나니까 너랑 단지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는데…….”

    달래는 말에 세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지. 네 일은 모두 네가 하잖아. 힘들 텐데도.”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진짜로. 지금도 세원 씨가 옆에서 도와줘서 너무 좋아요.”

    “내가 도와줘서 덜 힘들면 다행인데 어디 아프다거나 짜증 나면 언제든지 말해.”

    “……네.”

    당장이라도 그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충동을 참기 위해 하빈은 주먹을 꽉 쥐고 어깨를 으쓱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세원은 느긋하게 다시 물을 마시다 말고 턱을 괸 채로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저 시선이 제게 닿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왜 매번 그렇게 바라봐요?”

    “예쁘니까 그렇지.”

    “이렇게 부었는데 뭐가 예쁘다고…….”

    “진짜 예쁜데.”

    세원의 손이 뻗어 와 하빈의 이마에 닿았다. 이마부터 시작해 콧등까지 쓱 쓸어내리는 손가락 끝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더 밑으로 내려와 도톰한 입술을 어루만지는 엄지손가락에 하빈은 잠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홀리게 할 작정인가.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세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하지 말아요.”

    “왜. 예뻐서 좀 만지겠다는데.”

    “진짜,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유난이야. 가끔 보면 세원 씨는 팔불출인 것 같아요.”

    “내가?”

    “네.”

    “그럼 그러지 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당당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하빈이었다. 이렇게 나올 줄이야. 헛웃음을 내뱉으며 코를 쓱 매만지자 세원은 키득거리며 왜, 어이없어? 하고 역으로 하빈에게 장난을 쳐 왔다. 하빈은 그를 살짝 노려보며 짜증 난다고 투덜거렸다.

    잠시 뒤 고기가 나왔다. 세원은 자기가 구워 주겠다며 집게를 집어 들었다. 하빈은 설레는 마음으로 젓가락을 쪽쪽 빨며 고기가 익길 기다렸다. 고기는 금세 익었고, 덕분에 배는 금방 불러 왔다. 세원과 함께 먹는 것은 뭐든 맛이 있었다.

    먹다가 먹여 주고 또 먹고. 두 사람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맛있어?”

    “네!”

    “다음에 여기 또 와야겠네.”

    “다음에 오면 우리 냉면도 먹어요.”

    “냉면 먹고 싶어? 시킬까?”

    “겨울인데 지금 냉면 할까요?”

    “물어보자.”

    세원이 집게를 내려놓고 직원을 불렀다. 후식 냉면을 시킬 수 있다는 직원의 말에 하빈이 얼른 외쳤다.

    “그럼 전 비빔냉면이요. 세원 씨도 냉면 먹을 거죠?”

    “물냉면 하나, 비빔냉면 하나 주세요.”

    세원의 주문에 직원이 알겠다 대답하고 사라지고 하빈은 신이 난다며 몸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귀여워.”

    “뭐가요?”

    “냉면 먹는다고 엄청 신났네.”

    “아닌데…….”

    “그럼 왜 그렇게 몸을 흔들었어.”

    “그냥 음, 버릇인데.”

    “버릇이야?”

    “네에.”

    바로 몸을 굳히고 아니라며 시치미를 뚝 떼는 하빈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있으면 웃을 일이 이렇게나 많았다. 하빈도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웃으며 입을 가렸다.

    배부르게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마트에 들렸다. 시끄럽고 번잡한 공간인데도 하빈은 어쩐지 신이 나서 세원과 함께 장을 봤다. 고기도 사고 채소도 사고 과자도 사고. 그와 함께라면 뭐든 더 좋았다.

    마지막으로 단지의 단지 우유도 한 아름 사 들고 나자 마음이 풍성해졌다.

    “우리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 먹어요.”

    “이 겨울에? 안 춥겠어?”

    “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괜찮아요. 사 먹어요. 네?”

    “그래, 뭐 먹을래?”

    “저는 초코로 된 거.”

    “콘? 아니면 다른 거?”

    “콘!”

    낑낑거리며 아이스크림 통을 뒤적이는 하빈의 뒤에서 세원의 손이 쑥 들어왔다. 난 이거 먹을래. 세원은 딸기 맛을 골라 들었다. 나도 저거 먹을까……. 고민하자 세원이 그러면 여러 개 사라며 바구니 속으로 아이스크림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세원 씨는 똑똑해.”

    “내가 똑똑한 거야?”

    “네! 똑똑해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하는 하빈이 한없이 귀여워 세원은 미소를 지었다. 하빈은 그런 세원의 품에 안겨 들어 애교를 부리듯 뺨을 부볐다. 한없이 사랑이 피어나는 와중에 하빈이 고개를 쏙 들자 세원이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으응,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보는데!”

    “보면 어때.”

    당당한 그의 모습에 하빈이 새초롬하게 그를 노려봤다. 얼마나 많이 해 봤으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괜히 과거를 캐 보고 싶다가도 저만 상처받게 될까 봐 꾹 참고 또 참는 일의 반복이었다.

    언젠간 밝혀내고 말겠어. 하빈이 입술을 꾹 깨물자 세원이 또 해 달라는 거냐며 웃어 보였다.

    “아니요!”

    입을 합 가리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세원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뒤를 따라왔다.

    집으로 돌아와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하자 할 게 없어진 하빈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세원은 옆에 앉아 그런 하빈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왜요?”

    “그냥.”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에이씽…….”

    하빈이 갑자기 입을 삐죽이자 왜 그러냐며 세원이 입술을 잡아당겼다.

    “으응! 우으응!”

    고개를 저었지만 놓아 줄 생각을 않는 그에 하빈이 핸드폰을 내던지고 세원을 쳐다봤다. 그제야 제 입술을 놓아 주며 웃는 그가 조금은 얄미웠다.

    “이제야 나 보네.”

    “그게 뭐예요!”

    “하도 게임만 하길래 섭섭해서 그랬지. 나랑 같이 놀아.”

    “게임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요.”

    “집에 온 뒤로 계속 게임했잖아.”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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