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부산으로의 도피 (9/20)

9. 부산으로의 도피

그 시각, 서울에 있던 지환은 난리가 나 있었다. 하빈과 연락이 통 되질 않아 집으로 찾으러 왔더니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집안에 놀란 얼굴로 곳곳을 살폈다. 이 작은 집에 찾을 곳이 얼마나 된다고 열심히도 불러 보았지만 하빈은 보이지 않았다.

“김하빈 대체 어디를 간 거야!”

아무리 전화를 해도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들려왔다. 그저 앉아서 하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머리를 쥐어뜯던 지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강세원에게 갔나?

그러면 진짜 멍청한 새끼지. 설마 네가 그럴 리가. 그러면서도 지환은 씩씩거리며 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왔다. 세원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지난번 제 부탁으로 하빈이 얼마나 힘든 일을 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 지환이었다. 안내데스크에 강세원 이사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누구냐 묻는 말에 지환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김지환입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아실 거예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세원 성격상 자신을 들여보내 주기는 할 것이다. 하빈 때문에 왔을 거란 걸 대충 짐작하고 있을 테니. 하빈이 있을지도 모르고.

지환은 하빈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있다면 머리채를 붙잡아서라도 질질 끌고 나올 작정이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원의 허락이 떨어지고 지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지환은 하빈이 지나간 길을 그대로 지나쳐 비서가 있는 문 앞까지 다다랐다. 비서가 문을 열어 주기 전 지환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열린 문 안쪽 멀리에, 홀로 앉아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세원이 보였다.

혼자 있다고? 지환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이길래 여기까지 왔나.”

세원은 지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지환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잠시 당황하다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김하빈 어디에 숨겼어.”

“뭐?”

“김하빈 어디에 숨겼냐고!”

“무슨 말이야.”

하빈을 언급하니 그제야 세원이 지환 쪽을 바라보았다. 단숨에 상황 파악을 마친 듯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환에게 손을 뻗어 앉으라 명령했다.

지환은 싫다며 난리를 쳤지만 세원이 자리를 옮긴 탓에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앉은 지환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다시 하빈의 행방을 물었다.

“하빈이 어디 있는지 알지? 순순히 말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하빈이가 왜. 없어지기라도 했어?”

“없어졌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찾고 있는 거잖아!”

“그렇게 나한테 성질부린다고 해결되는 일 하나도 없어.”

자신과는 다르게 침착하기만 한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빈은 임신한 상태였으니 몸을 조심해야 했다. 더욱이 세원의 아이였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둘이 짜고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세원은 고개를 저었다.

“난 진짜 몰라.”

“어쩔 거야. 너 때문에 하빈이 집 나갔어.”

“그게 왜 내 탓이야? 무고한 사람 잡지 마.”

“그야, 네가!”

말하려던 입을 순간 다물었다. 어차피 하빈을 찾아 애를 지우라 말할 작정인데 굳이 모르고 있는 그에게 아기의 존재를 말해 좋을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선을 피하고 자리를 빠져나가려 하자 세원이 지환을 붙잡았다.

“뭔데. 말을 꺼냈으면 다 하고 가야지.”

“뭐가. 내가 뭘. 됐어. 말하기 싫어.”

“또 이렇게 제멋대로 굴래? 왜 늘 그런 식이야?”

“내가 언제! 재수 없게 굴지 마!”

세원의 손을 뿌리친 지환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자기 때문에 하빈이 인생 망한 줄도 모르고……. 쓰레기 같은 새끼.”

“나 때문에 하빈이가 뭐. 무슨 일인데 그렇게 욕을 해 대?”

“됐어. 간다.”

“말하고 가라고. 뭔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날 이렇게 싫어하는 네가 여기까지 왔을 거 아냐.”

“말하라고 한다고 내가 말할 것 같아? 그냥 모르는 채로 살아. 그게 마음 편해.”

“야, 김지환.”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지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멈춰 서서 다시 물었다.

“진짜 김하빈 여기 안 온 거 맞지?”

“모른다니까. 하빈이가 왜.”

“아냐. 별 얘기 들은 거 없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알아야 하는데.”

“……모르겠다, 나도.”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지환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세원에게 말을 해야 할까. 하빈이라면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만한 동생이 아니었다. 지환은 입술을 달싹이다 세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만약, 하빈이가 임신했다고 하면 어쩔래.”

“뭐?”

“김하빈 임신했다고 하면 책임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세원이 지환을 쳐다봤다. 지환은 이런 세원을 잘 알고 있었다. 어휴, 너랑은 그냥 말을 말자. 다시 나가려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하빈 임신했어?”

“……임신했으면.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살아. 넌 그런 놈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거야.”

“똑바로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임신한 거 맞아? 내 애야?”

“왜, 안 믿겨? 네 애가 아니면 누구 애일 것 같은데? 걜 알고도 그런 질문이 나와?”

화를 내며 쏘아붙이는 지환에 세원은 말이 없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지환은 점점 열이 받는지 온갖 난리를 피워 댔다. 하빈이 없어진 마당에 세원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빈을 찾아내라는 말에 세원이 고개를 들고 지환을 쳐다봤다.

“김지환.”

“왜!”

“그래서 하빈이 어디 있길래 찾아다니는 건데.”

“나도 몰라. 내가 알면 여기까지 왔겠어? 나는 너한테 왔을까 싶어서 와 본 거란 말이야.”

“나한테?”

“그래! 너한테 간 줄 알았다고.”

“나한테 안 왔는데.”

“그런 것 같네……. 얜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지환이 끄덕이며 팔짱을 끼고 세원의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숨을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원 역시 숨겨 주지 않은 눈치였다.

하빈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세원과 말씨름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환은 한숨을 푹 쉬며 알겠다 말하고 나가려는데 세원이 다시 말을 붙여 왔다.

“경찰에는 신고했어?”

“경찰? 경찰에까지 말할 게 있나. 너한테도 안 왔으면 저녁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뭘 해 주겠어?”

“안 들어오면?”

“그거야 그럼 그때 가서 내가 생각해 볼 문제고. 김하빈이 애도 아니고 잠깐 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넌 신경 꺼.”

“같이 가자. 걱정돼서 안 되겠네.”

“어딜?”

“하빈이네 집.”

“네가 거길 왜 가는데? 너네 헤어진 거 아니야? 마음도 없으면서 거길 왜 가?”

“가고 싶으니까 간다는 거지.”

“뭐, 하빈이가 신경 쓰이기라도 해?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너 진짜 웃긴다. 하빈이한테 연락 한 번 안 했으면서 임신했단 소리에 보고 싶다고 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너는 내가 화난다고 그렇게 갔는데 아무렇지 않게 다시 보자고 연락하는 게 안 이상해?”

“그게 뭐 어때서.”

“퍽이나 네가 가만히 있겠다.”

“내가 가만히 있고 아니고 할 문제야? 너네끼리 해결했어야지.”

“네가 사사건건 끼어들고 있잖아. 저번처럼 또 지랄하려고.”

“내가 언제!”

“시끄러워. 일단 지금은 하빈이 찾는 게 우선이니까 집에 가 보고 없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해.”

“……알았어. 근데 나 너랑 다니기 싫은데.”

“왜 또.”

“남편이 알면 싫어할 수도 있단 말이야.”

“나도 너 싫어.”

세원이 짜증스럽게 지환의 어깨를 밀쳤다. 지환은 그런 세원을 잠시 노려보다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각자의 차를 타고 하빈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한 하빈의 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 * *

하빈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시간은 이미 오후 여덟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한 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더 잘까…….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제야 제 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하빈이 벌떡 일어났다.

“아, 여기 우리 집 아니지…….”

형도 보고 싶고, 세원 씨도 보고 싶고. 집을 나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변덕스러운 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기분 전환도 할 겸 하빈은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가까이 있다는 해변도 걷고 먹을 것도 사 올 생각이었다.

날은 아직 쌀쌀했다. 겨울은 언제 다 지나가려나.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 아쉬웠다. 눈이 보고 싶은데.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품을 하며 모래 위를 걷던 하빈이 계단으로 올라와 신발에 붙은 모래를 탈탈 털어 냈다.

도로로 올라와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멀리서 아기가 모래사장 위를 열심히 뛰어다니며 엄마, 아빠와 함께 놀고 있었다. 참 귀엽고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하빈은 그대로 계단에 앉아 그들을 한참 지켜보았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나도 아기 낳으면 이런 데서 저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

“세원 씨 보고 싶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그와 함께했던 부산 여행이 떠올랐다. 처음 와 본 부산이었는데. 정말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하빈이 쌀쌀해진 밤공기에 정신을 차렸다. 하빈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봐 두었던 슈퍼로 향했다. 과일이 잔뜩 먹고 싶었다.

포도부터 시작해 귤, 딸기까지 각종 과일을 사고 밥으로 먹을 삼분 짜장을 골랐다. 몸에 좋은 걸 먹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요리를 하기에는 비위가 약해서 무리였다. 될 수 있는 대로 그냥 삼분 짜장으로 때울 작정이었다. 먹을 수 있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먹지 말아야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자 너무 배가 고파졌다. 방금 사 온 삼분 짜장을 돌리고 햇반도 함께 전자렌지에 데워 밥을 차렸다. 생각보다 냄새가 괜찮은 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숟갈을 떠 입으로 가져왔을 때 무리 없이 밥이 넘어갔다.

한 공기를 다 비우자 배가 불렀지만 과일도 먹고 싶었던 터라 과일을 집어 들었다. 뭐부터 먹지…….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고른 과일은 우선 딸기였다. 딸기를 깨끗한 물에 싹 씻어 꼭지를 따고 작은 접시에 담아 가져와서는 티비를 틀어 놓고 하나둘 찍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보다 편안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비록 혼자 도망쳐 왔지만 그리 외롭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다. 오늘이 첫날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이대로라면 아까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과는 또 다르게 제법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내가 사 먹으면 되는 거지! 누가 사 주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하빈이 씩씩하게 생각했다.

“벌써 다 먹었다……. 딸기 엄청 맛있었는데.”

포크를 쪽쪽 빨고 있던 하빈이 이번에는 귤을 까서 입으로 가져왔다. 포도는 당장에 먹으려면 씻어야 하는데 움직이기 귀찮았다. 귤은 앉아서 까기만 하면 되니까 먼저 먹어야지.

그렇게 먹기 시작한 귤은 순식간에 다섯 개가 사라졌다. 봉지에는 대여섯 개가 남아 있었다. 남은 귤을 보던 하빈이 고민하다 봉지를 여몄다.

“나머지는 내일 먹어야지. 이제 포도 차례다.”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간 하빈이 물에 포도를 깨끗하게 씻어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하나둘 따먹는 동안 티비에서 하는 프로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포도를 반쯤 먹자 더는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내일 마저 먹어야지. 하빈은 과일들을 치워 두고 다시 허해진 방안에 웅크려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지금은 임신 초기라 이 정도로 괜찮겠지만 점점 배가 불러 올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도 견뎌 내야 했다. 엄마는 강해야 하니까.

“먹는 것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할 수 있으면 매일 조금이라도 해야지…….”

작은 공책에 할 일을 적어 내려가는 하빈의 손이 분주했다.

“병원에도 가 봐야 하는데. 그래, 내일 당장 병원부터 가는 게 좋겠어.”

볼펜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하빈이 하품을 하며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 이불을 몸에 말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까 잤는데도 또 졸리다……. 오늘은 부산에 내려온 것만으로도 큰일을 한 날이었다.

* * *

서울에서는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하빈에 지환과 세원이 날을 세우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 네 탓이라며 싸움을 하다 지친 세원은 손을 내저으며 경찰에 신고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경찰에 얼른 신고부터 해. 실종신고. 아니면 가출신고를 하던가.”

“신고한다고 찾아 줘? 걔 성인이라 신고한다고 안 찾아 줄 텐데.”

“없어졌다고 하면 찾아 주겠지.”

“성인은 원래 잘 안 찾아 준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일단 신고부터 하고 말해.”

“아이씨, 알았어…….”

미심쩍은 표정의 지환이 방을 빠져나갔다. 세원은 혹시 모르니 하빈의 방에 남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늦은 시간에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원은 거실에 앉아 하빈의 집을 둘러봤다. 전에도 몇 번 와서 봤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디 있냐, 하빈아. 그 몸을 하고 어디로 갔어.”

세원이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하빈을 불러 보았지만 부산에 있는 하빈이 서울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러 간 지환 역시 소식은 없었고 세원에게는 지환의 연락처도 없었다. 세원은 그저 가만히 앉아 아무나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벽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던 세원은, 도어락 버튼이 눌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곧이어 지환이 성이 난 목소리로 욕을 마구 내뱉으며 들어왔다. 하는 얘길 들어 보니, 경찰이 성인은 실종신고를 해도 본인의 동의 없이는 위치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집 나갔다가 금방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 기다려 보래.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기다리기만 하라고?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라고!”

“내가 갈 걸 그랬네.”

“그래! 네가 갔으면 나보다 더 나았을 텐데 왜 나보고 가라고 시켜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하지만 가족은 너잖아. 그러니까 너보고 가라고 했지.”

“……그건 그렇지.”

“어쨌든 알겠고, 하빈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김하빈 이놈의 새끼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내가 아기 지우라고 난리 피웠더니 도망친 게 분명해. 하여간 막무가내지…….”

“네가 아기 지우라고 했다고?”

“그래! 그럼 뭐, 걔 혼자 아기 낳아서 키우냐? 말이 돼?”

당당한 지환의 말에 세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런 중요한 문제를 너희들끼리 정하는데?”

“너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랑 하빈이랑 결정할 문제지,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왜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너 김하빈 책임질 거야? 책임질 수 있어? 그것도 아니잖아! 그럼 내가 김하빈 책임져야 하는데 난 그 애까지 책임지기 싫어. 너야말로 생각하고 말해!”

지환이 악을 썼다. 세원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하는 꼴 보니까 하빈이가 왜 도망갔는지 알겠다.”

“내가 뭘!”

“그렇게 지랄을 해 대는데 애가 무서워서 도망 안 가고 버티겠어?”

“닥쳐.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불대지 마. 너보다 내가 하빈이 더 아끼고 사랑하는데 누가 누구 앞에서 훈계하고 있어?”

끊임없이 잔뜩 짜증을 내는 지환에 세원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지환 역시 세원을 바라보다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는 두 사람이 하빈 때문에 억지로 붙어 있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강세원 너는 그냥 가라. 하빈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 혼자 뭘 어떻게 알아서 하겠다고.”

“여태까지 너 없어도 나 혼자 잘 알아서 해 왔어. 지금 너 있다고 도움 되는 것도 없잖아.”

쏘아붙이는 말에 세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 무시를 해도 정도껏 해야지.”

“왜, 무시당하니까 기분 나쁘냐? 너도 나 무시하고 살았잖아.”

“내가 언제. 대체 나한테 왜 그렇게 자격지심을 갖고 사는 거야?”

“자격지심이라고?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생각도 안 나지?”

“지금 우리 이야기할 때 아닌 것 같은데.”

“거봐. 또 이렇게 피하려고 하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러면서 하빈이를 기다리겠다고? 네가 뭔데. 기다려서 뭘 어쩌겠다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 나도 기다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가려면 네가 가.”

“아, 너랑 붙어 있기 싫다고! 내가 하빈이 오면 너한테 연락해 줄 테니까 얼른 꺼져.”

“그걸 어떻게 믿어. 너 내 연락처는 있어?”

“없어. 안 궁금해.”

“없는데 뭘 어떻게 연락을 해 주겠다는 거야?”

“하빈이 오면 걔가 알겠지!”

그건 그렇네. 세원이 끄덕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잠시 고민하던 세원은 그럼 난 가 볼까, 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던 세원이 천천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지환이 나직이 말을 걸었다.

“혹시라도 하빈이한테 희망 고문할 생각이면 그만둬.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희망 고문이 뭔데.”

“쓸데없이 결혼하자는 둥 책임지겠다는 둥 그딴 소리.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린데? 내 마음이 어떤지 네가 알아?”

“안 봐도 알아. 그리고 너랑 결혼해서 걔가 행복할 것 같아? 난 하빈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냥 제발 애 좀 건드리지 마.”

애원하듯 내뱉는 말에 세원은 물끄러미 지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네가 나한테 김하빈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네 실수야. 세원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지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 * *

아침부터 배가 쿡쿡 쑤시는 게 느낌이 이상했다. 하빈은 끊이지 않는 복통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서둘러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병원에 사람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눈초리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례를 기다리다 금세 불리는 이름에 얼른 진료실로 들어가자 인자해 보이는 의사가 웃으며 하빈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무슨 일로 오셨나?”

“아, 저, 임신했는데 배가 콕콕 쑤시고 아파서요…….”

“임신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제 두 달 조금 넘었다고 들었어요.”

“그럼 임신 초기에는 그럴 수 있어요. 어디 초음파 좀 볼까요.”

하빈을 침대에 눕히고 상의를 걷어 올린 의사는 초음파기로 하빈의 배를 문지르며 찬찬히 설명을 늘어놨다.

“아기집은 잘 자리 잡고 있네요. 이대로만 자라면 되겠어요.”

그 말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의사는 그런 하빈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하빈에게 아기는 건강하다는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초기에는 조금씩 배가 아플 수 있는데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가요……. 큰일 난 줄 알고 놀랐어요.”

“그랬구나.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나저나 혼자 오셨어요?”

“네? 네.”

“아직 어린 아기 엄마가 씩씩하네. 나가면 초음파 사진도 주고 산모 수첩도 줄 테니까 밖에서 받아 가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의 말에 신이 난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생글생글 웃음꽃이 피어났다. 초음파 사진이라니. 나도 드디어 그런 걸 받아 보는구나.

하빈이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며 진료실을 나왔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간단한 질문을 한 뒤 초음파 사진과 함께 산모수첩을 건넸다. 제일 앞장에는 김하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와…….”

“신기해요?”

“네!”

“뭐가 그렇게 신기해요?”

“아기랑 나랑 관련된 거잖아요. 처음이라서 그런지 신기해요. 정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하빈 씨 배 속에 정말 아기가 있잖아요.”

“맞아요, 그치만 실감이 잘 안 나는데 지금은 실감이 좀 나요.”

데스크에 기대 수첩을 구경하는 하빈의 모습이 제법 귀여워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수납하고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빈은 다시 해변을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집세를 내고 남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야 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구나……. 걱정이 쌓이고 쌓였다.

“돈을 무턱대고 다 쓰면 안 되고 한 달에 얼마씩 정해서 써야 할 것 같은데…….”

또다시 배가 콕콕 쑤셨다. 하빈이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서서 계단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넓고 푸른 바다를 보고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복통은 금세 잠잠해졌지만 하빈은 몸을 웅크렸다.

이상하게도 아기에게 애착이 갔다. 처음 임신이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은 아기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낳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물론 형의 말대로, 부모님 없이 자라 온 자신인 만큼 앞으로 이 아기가 자신의 밑에서 자라나려면 얼마나 힘들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다를 바라봤다. 하염없이.

“나중에는 여기서 일이라도 구해야 하나?”

집으로 돌아온 하빈이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통장에 남은 금액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잔고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두어 달 생활비는 될 것 같은데 병원비까지 하자니 빠듯할 것 같기도 했다.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계산하다 지쳐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알바라도 하자, 알바라도.”

하다못해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빈이 다시 핸드폰을 들고 아르바이트 공고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간섭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했다. 자유로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이렇게 조용한 집안에서 하빈은 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원 씨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그럴 때면 세원이 보고 싶었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뒤척였다. 세원은 자신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지 궁금했다. 나는 세원 씨만 떠올리고 있는데. 지난번 연락했을 때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다시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거절당할까 두려웠다.

어쩌면 그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상상을 해 보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대단한 세원이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에게 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하빈이 눈을 감았다. 그래도 세원을 생각할 때면, 즐거운 상상을 할 때면 이렇게 소소하게나마 행복했다.

아가야, 너도 아빠가 보고 싶지? 네가 아빠를 만날 날이 있을까?

아직 배가 불러 오는 티도 나지 않았지만 아기는 잘 자라고 있다고 했다. 어서 배가 더 불러 아기를 만나고 싶었다. 초음파 사진에서도 더 자란 아기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건강한 아기를 만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했다.

* * *

그 시각 세원은 안절부절못하며 세원대로 나서서 하빈을 찾고 있었다. 다니던 직장에도 가 보았지만 어디로 갔다는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 친하다던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떠난 모양이었다. 경찰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젠장.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욕을 내뱉으며 짜증스럽게 술을 들이마신 세원이 잔을 쾅 내려놓고 머리를 헤집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서울에서 하빈이 홀로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보라 시켰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서울에 있지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다시 잔을 채운 세원이 찌푸린 얼굴로 잔을 휙휙 돌리다 말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져 있는 상태였다. 사라진 첫날부터 지금까지 쭉.

“도망갔더라도 나한테는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세원은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독한 알코올이 꿀꺽꿀꺽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무리 우리가 헤어졌다고 해도…….”

긴 한숨이 흩어졌다. 하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날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온 이후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전화할 수 없었겠지. 헤어진 상태에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연락을 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은 아기의 아빠였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세원은 다시 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꺼져 있다는 통화 연결음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 테이블에 엎어져 하빈을 찾았다. 며칠 사이에 술주정이 늘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하빈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었는데.

회사 일로 너무 바빠서 받지 못했다. 그리고 받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빈에게 실망하고 있던 상태에서 통화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 더 조심하고 싶었다. 그래서 피했던 것뿐인데.

다시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아 한참 하지 못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게 정말 후회가 됐다. 전화 한 통이라도 해 볼걸. 목소리라도 들을걸.

하빈을 찾을 수는 있을까. 그는 집으로 돌아올까. 아니, 자신에게 돌아올까. 다시 찾는다 해도 하빈의 마음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잠들었던 세원은 다음날 일어나 핸드폰 통화 기록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렇게나 많이 했다고? 하빈에게 전화를 거의 열 통은 걸어 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보면 질린다고 하겠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던 세원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 전화는 꺼져 있었다.

하빈에 대한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보내고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연락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에게서는 연락이 오질 않았다.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입맛이 없어 먹고 싶지도 않았던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우고 집으로 들어왔다. 맛있다는 가게에서 회식을 했건만 무슨 맛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었지만 자신의 시야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무미건조한 세계에 홀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빈이 없으니 이렇게나 사람이 변할 수가 있구나.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된 세원이었다. 자켓을 대충 던져두고 소파에 앉아 머리를 쓸어올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자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네. 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나약해진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면서 비참했다. 하빈을 찾고 싶었다. 그가 옆에 있다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세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숨을 고르고 마른 세수를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회사 일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하빈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물론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조금 화를 내실지도 모르지만 당장에 중요한 일은 하빈이었다.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아내 꼭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다고.

약을 먹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자다 깨어 샤워를 하고 나오자 개운한 기분에 몸이 한결 나아진 느낌이었다. 술이라도 마실까.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티비를 틀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 * *

하빈은 오늘 그동안 너무너무 먹고 싶었던 고기를 잔뜩 사 와 구워 먹을 생각이었다. 산부인과에 갔는데 아기가 잘 자라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들어 기쁜 마음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가끔 이렇게 몸보신도 하고 살아야지. 얼굴은 밝아지고 입꼬리가 올라가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입덧을 줄여 주는 약도 타 오고, 겸사겸사 장을 봐서 들어온 하빈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맛있게 찌개도 끓이고 고기도 구우니 배가 슬슬 고파 왔다. 입덧 약을 먹어서 그런가 울렁거리는 증상도 덜한 것 같았다.

혼자 거실에 상을 펴 놓고 티비 앞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조금 처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이랬는걸.

“세원 씨는 뭐 하고 지내려나. 밥은 잘 먹고 있을까…….”

늘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세원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 슬슬 핸드폰을 켜 보아야겠다. 하빈은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고 기다리는 동안 화면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원 씨한테 전화를 할까…….”

“아냐, 괜히 해서 마음 복잡하게 하는 걸지도 몰라.”

“전화했는데 아무 신경도 안 쓰면 정말 나 혼자 쇼한 건데…….”

망설임이 혼잣말로 줄줄 새어 나왔다. 하빈이 고민하는 사이 핸드폰이 충전됐는지 지잉, 진동과 함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하빈이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비행기 모드를 풀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들어와 있었고 문자며 카톡이 수없이 들어왔다.

전부 지환과 친구들이었다. 그중에 눈에 익은 이름이 있었다. 세원 씨? 하빈이 제 눈을 의심했다.

왜 연락한 거지. 시간을 확인하니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떨리는 마음이 반, 걱정되는 마음이 반. 조마조마한 마음에 하빈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세원의 이름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 끝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전히 섹시한 그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하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 정적이 소름끼치도록 두려웠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까.

[김하빈]

“세원 씨?”

[너 어디야. 괜찮아?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세원 씨가 왜 전화를…….”

[지금 어디냐고. 왜 사람이 전화를 하는데 연락이 안 돼.]

“저 그러니까 여기, 지금 지방에 있는데, 세원 씨는 왜, 전화를…….”

하빈은 불안한 마음에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횡설수설했다. 세원은 제법 무서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잔뜩 얼어붙은 하빈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 화났어요?”

[지금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

“왜, 왜요?”

[네가 집 나가서 연락 안 된다고 하는데 사람 걱정되게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형이……. 형이 그랬어요?”

[그래. 김지환이 찾아왔었어.]

하빈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사라진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설마 형이 이야기를 다 했을까…….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하빈이 울음을 꾹 참은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세원은 가만히 하빈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저는 신경 안 써도 돼요. 여기서 혼자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을 어떻게 안 해. 집 나가서 혼자 지낸다는데 너 같으면 걱정 안 할 수 있어?]

“제가 애도 아닌데 뭘요. 괜찮아요.”

[아니야, 어디에 있는데. 응?]

“네?”

[어디에 있어, 하빈아.]

“저, 저…….”

뜸을 들이는 하빈이 답답하다는 듯이 세원은 재차 이름을 불러 왔다. 하빈은 여전히 대답을 망설였다. 말하면 정말 찾아오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장은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 잘못으로 헤어져 놓고 다시 이렇게 어영부영 만나 달라고 붙잡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기 때문에 그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김하빈.]

“그냥,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왔어요.”

[무슨 옛날 생각?]

“세원 씨랑 놀러 왔던 생각…….”

[그랬어?]

“네에…….”

[그럼 부산에 있는 거야?]

금세 누그러진 목소리에도 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 세원은 하빈을 붙잡듯 어디 있는지 다시 물었지만 하빈은 잘 지내라고 말하고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마음이 아팠다. 속이 쓰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그를 만나기가 너무 두려웠다. 만나고 난 후에 벌어질 일들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만난다면 아기를 가진 것을 말해야 하는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마음을 전하려 해도 두렵기만 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전히 무서운 마음뿐이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한 하빈이 침대에 엎드려 다리를 버둥거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허기가 싹 가라앉고 그저 세원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하빈은 일어나 먹으려고 했던 식사를 싹 정리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 모든 일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한참 눈을 깜빡였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괜히 전화를 해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평온하게 유지하고 있던 마음에 돌멩이를 던진 듯 작은 물결이 일었다.

* * *

같은 시각, 세원은 한숨을 내쉬며 자켓을 집어 들었다. 하빈을 찾으러 직접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정확하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내려가서 그를 찾아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작은 단서라도 생겼으니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숨통이 트였다.

키를 들고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타자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히터가 켜지는 동안 세원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빈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데 찾아가도 될지. 하지만 당장에 그가 보고 싶었다. 걱정돼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마음 하나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장 큰 욕구이자 사랑이었다. 어떻게 되든 만나서 해결할 수 있겠지.

차는 빠르게 부산을 향해 달려갔다. 어느새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거센 빗줄기를 뚫고 움직인 세원은 하빈을 찾아 끝없이 달려갔다.

부산에 도착하자 날씨가 맑게 개었다. 새벽 동이 터 오는 시간, 세원은 일단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하빈을 찾기 위해 전에 하빈과 갔던 곳을 서성였다. 제발 어디선가 마주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서성이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세원은 목적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하빈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하빈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실망하긴 일렀다. 하빈과 만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그는 또다시 발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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