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예상치 못한 임신 (8/20)
  • 8. 예상치 못한 임신

    그렇게 집에 틀어박히길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났다. 일하던 곳에서 연락이 오는 것도 무시하다가 결국은 그만둬 버렸다.

    하빈은 방에 틀어박혀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시간만 하염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지환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 실수로 하빈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환이 자주 들러 챙겨 주곤 했지만 하빈은 도저히 힘을 낼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늘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만 있는 하빈을 돌보기 위해 찾아온 지환에게 하빈이 울며불며 짜증을 부려 왔다.

    “형 때문이야, 이게 다!”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밥 좀 먹고 약 먹어.”

    “싫어, 토할 것 같아.”

    “그래도 먹어야 낫지.”

    “우욱, 나 진짜 토할 것 같다니까…….”

    하빈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마구 내젓다 아예 자리를 떠 버렸다. 지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른 몸이 더욱 왜소해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살이 빠졌는지.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하빈아, 형이랑 병원 가 볼래?”

    “병원은 왜.”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병원 가서 진단받고 약 타서 치료하자. 계속 이렇게 아프기만 할 수도 없잖아.”

    “싫어…….”

    “싫다고만 하지 말고 병원 좀 가자, 어? 강세원 그 새끼가 와서 데려가야 그때 갈래? 그럴 거야?”

    “형은 왜 자꾸 관련도 없는 세원 씨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형 때문에 다 망했는데, 계속 말하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좀 한 번 말했을 때 간다고 대답하라고.”

    “싫다고!”

    “가! 아프다는 애가 집에만 처박혀서 뭐 하는 거야!”

    결국 크게 소리를 내지르게 된 지환이었다. 하빈은 놀란 눈을 껌뻑이며 형을 쳐다보다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움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서둘러 다가가 하빈의 등을 토닥였다.

    “그게 왜 내 잘못이야! 그러게 누가 내 연애 훼방 놓으래?!”

    “미안해, 아, 잘못했어. 근데 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떡하냐.”

    “형 때문이잖아…….”

    하빈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주한 지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려 왔다.

    “그래, 다 나 때문이다.”

    “형이 괜히 그날 집에 찾아와서 세원 씨한테 이상한 소리만 안 했어도!”

    “네 말이 다 맞아. 내 입이 방정이다.”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하는 하빈을 끌어안고 토닥이며, 지환이 슬쩍 물었다.

    “그래도 형이랑 병원 한 번 가 보자. 응? 너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진짜 진찰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형이 걱정되어서 그래.”

    “싫은데…….”

    “네가 이렇게 아파한다고 강세원이 안 알아줘.”

    “또, 또 그 소리! 형, 그만 좀 하라고!”

    “알았어. 자꾸만 걔 얘기가 나오네. 미안해.”

    “이씨…….”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노려보는 하빈에 지환이 미안하다며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하빈은 그런 형의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에라이, 나쁜 김지환 이 새끼야.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큰 병원 내과에 예약해 놓을 테니까 가서 검사라도 받아. 아무것도 못 먹고 그러면 진짜 심각한 거야. 초음파랑 내시경도 다 해 보자.”

    “알았어…….”

    “일단 지금 밥은 먹을 수 있겠어?”

    “아니……. 나 정말 물도 못 마시겠어. 어떡하지?”

    “어쩌냐, 진짜.”

    “속이 너무 안 좋아.”

    “그럼 일단 내가 약국 가서 약 사 올 테니까 집에 좀 있어 봐.”

    “응…….”

    지환이 밖으로 나가고 하빈은 멍하니 앉아 제 배를 쓰다듬었다. 속이 쓰린 것도 아니고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고……. 침대에 풀썩 엎어져 누운 하빈이 가만히 세원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 한 통의 연락도 없는 그가 야속하면서도 이해가 됐다.

    배신감이 들겠지. 내가 미울 거야. 나 같아도 그럴 텐데 뭐……. 그렇지만 그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자꾸 세원을 찾게 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빈은 몸을 뒤척이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큰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받지 않았다. 하빈은 서러운 마음에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줄줄 쏟으며 엉엉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약국에 다녀온 지환이 놀라 하빈을 끌어안고 무슨 일이냐며 다독였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응? 어디 아파?”

    “흐엉……. 세원 씨 보고 싶어…….”

    “야……. 잊어. 어차피 시간 지나면 걔도 너 잊을 거야. 걔가 얼마나 매정한 놈인지 알아?”

    “그치만, 그치마안…….”

    “뭐가 그치만이야. 됐어. 병원 갈 준비나 해.”

    단호한 형의 대답에 더욱 눈물이 흘러나오는 하빈이었다.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당장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영영 헤어져야 하는 걸까……. 오해라도 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지환이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안 되겠지…….”

    풀 죽은 얼굴로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외투를 찾아 걸치고 옷을 여미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런 상세한 증상까지는 알 리가 없는 지환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오라며 하빈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그 와중에도 잔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게 왜 제때제때 밥을 안 챙겨 먹어. 약이라도 먹든가. 하여간 혼자 살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지.”

    “내가 뭐얼…….”

    “뭐얼? 지금 그런 목소리가 나와? 내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형도 너무해. 형 지금 나한테 계속 짜증에 잔소리만 하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형만 아니었으면 난 잘 지내고 있을 거였다고. 왜 형이 거기서 화가 나서 세원 씨한테 난리를 피우냔 말이야…….”

    “아휴, 진짜! 지난 얘기 그만 하고 얼른 오기나 해.”

    “형도 나한테 엄청 뭐라고 했잖아! 왜 나는 말하면 안 되는데!”

    “시끄러!”

    지환이 하빈의 목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어당겼다.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병원으로 가는 내내 뚱하니 말이 없었다. 하빈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지환은 운전에만 집중했다.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걱정보다 세원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많고 속이는 사람도 많아서 아무나 만나기 싫다고 했었는데……. 딱 내가 그런 사람이었네……. 하빈이 한숨을 푹 내쉬자 힐끗 옆을 돌아본 지환이 뜸을 들이다 나직이 불렀다.

    “김하빈.”

    “왜!”

    하빈은 그 목소리에 여전히 눈을 뱁새처럼 매섭게 뜨고 형을 노려봤다.

    “강세원한테 자꾸 뭘 미안해하는 거야. 네 말대로 내 잘못이라면 네가 미안해할 것도 없잖아.”

    “형,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잖아.”

    “너 마음 편하게 생각해. 그냥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넌 잘못 없다고 생각하고 넘겨 버려.”

    “이걸 어떻게 그냥 그렇게 넘겨…….”

    지환의 위로에도 하빈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몇 마디의 말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상처받았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사무쳤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세원의 얼굴에 하빈은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견디기 힘들었다.

    도착한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당황해서 선 채로 굳어진 형제가 한숨을 내뱉었다. 하빈은 다음에 오자며 형을 끌어당겼지만 지환은 절대 안 된다며 오늘 검사 예약이라도 꼭 잡고 가야 한다고 하빈을 멈춰 세웠다.

    어쩔 수 없이 지환에게 붙잡혀 대기실 한구석 의자에 앉은 하빈은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진희야, 뛰지 말아야지!”

    “안 뛰는데에.”

    여자아이 한 명이 대기실 의자 사이를 왔다 갔다 거리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귀여운 모습에 하빈은 작게 웃으며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들은 참 귀엽다는 생각으로 잠시 아픔도 잊혔을 때쯤, 형이 돌아왔다. 지환은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이따가 이름 부르면 들어가래.”

    “으응.”

    “아니, 애가 저렇게 병원에서 뛰어다니면 좀 가만히 있게 시켜야지, 애 부모들은 뭐 하는 거야?”

    “형 그만해…….”

    자신과 달리 지환은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빈은 그런 형의 눈치를 살피다 옷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만하라고 살살 달랬다. 그 말에 지환은 금세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디가 제일 아파?”

    지환이 옆에 앉은 채 하빈의 손을 주무르며 정확히 어디가 아프냐 물었다. 하빈은 제 배를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 속이 많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고 몸도 으슬으슬 떨리고 그래.”

    “몸살감기 걸린 건가? 아니면 위에 문제가 있나?”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내가 몸 관리 잘 하라고 했지. 말을 안 들어.”

    “그치만…….”

    “또, 또. 뭘 그치만이야. 내 말이 틀려?”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말에 하빈은 입술을 달싹이다 끄덕였다.

    “알았어…….”

    “너 오늘 진료받고 약 받으면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해.”

    “알았어.”

    “그리고 또 검사받는 날 나랑 까먹지 말고 와야 하고.”

    “알았대도. 그만 좀 해.”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하빈이 두리번거리며 언제쯤 자신을 부르나 간호사들을 쳐다봤다. 형의 잔소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 이름을 부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모니터에 보이는 대기 명단에는 앞에 사람이 한참 남아 있었다. 다리만 달달 떨며 앉아 있자 지환이 떨지 말라며 허벅지를 덥석 붙잡았다. 깜짝 놀란 하빈이 딸꾹질을 하며 그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놀라?”

    “몰라…….”

    “아직 우리 차례 되려면 멀었어.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 건지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그래도 조금 일찍 와서 다행이다.”

    “그러게 말이야. 늦게 왔으면 검사는커녕 진료도 못 받을 뻔했어.”

    “오늘 검사도 할 거야? 진료만 받는다면서.”

    “진료만 받는데 검사할 수 있는 건 검사도 하고.”

    지환의 말에 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검사?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피검사랑 초음파랑 이런 것들.”

    “피검사? 주사 맞아야 하잖아. 나 주사 싫은데.”

    “네가 애냐? 요즘은 애들도 주사 잘 맞는데 뭔 주사가 싫다고 투정이야.”

    “나이 먹어도 싫어할 수도 있지……. 어떻게 다 좋아하냐?”

    “나이를 헛먹었어.”

    형의 말에 하빈이 투덜거리며 아니라고 중얼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하빈은 손에 들린 접수증과 간호사를 번갈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마른세수를 했다. 입이 말랐다. 왜 이렇게 힘들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고 계속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뛰어다니던 아이가 하빈에게 달려와 콩 부딪치더니 하빈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어, 놀란 하빈이 어쩔 줄 모르고 아이를 만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쳐다만 보고 있자 아이 엄마가 서둘러 달려왔다.

    “진희야! 아이고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얼른 죄송하다고 해!”

    “죄송합니다아…….”

    “괜찮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네에!”

    씩씩한 대답에 하빈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가. 손을 흔들자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엄마 손에 질질 끌려나가고 지환은 짜증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과 눈이 마주친 하빈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그래도 아픈데 남의 집 애까지 신경 써줘야 해?”

    “형 왜 그래. 뭐 얼마나 심하게 부딪힌 거라고. 그냥 아기가 와서 콩 박은 거야.”

    “짜증 나니까 그렇지.”

    예민하게 구는 지환의 모습에 하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보다 더 유난을 떨고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하빈의 이름을 부르며 진료실 문을 열었다. 서둘러 일어난 하빈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환이 뒤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고 옆에 서서 의사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얘가 제 동생인데 속이 많이 안 좋다네요. 스트레스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어서…….”

    “속이 많이 안 좋아요?”

    “네에.”

    “어디 한 번 눌러 봅시다.”

    의사는 하빈의 손을 잡아당겨 배를 꾹꾹 누르고 어디가 아프냐며 물었다. 눌러서는 아픈지 잘 모르겠다며 하빈이 갸웃거리자 의사 역시 갸우뚱하며 팔짱을 꼈다.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어요?”

    “아, 네에…….”

    “그럼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는데 위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어요.”

    “그래요?”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어때요?”

    의사의 말에 지환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오늘 할 수 있는 검사는 당장 하고 싶어요.”

    “그래요? 밥은 먹었어요?”

    “아뇨…….”

    “공복이에요?”

    “네.”

    “그럼 피검사도 할 수 있겠네.”

    “꼭 검사까지 해야 해요?”

    하빈이 울상을 하고 물었다. 의사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하빈 씨가 어디가 아픈지 모르니까 검사를 해보는 쪽이 훨씬 좋죠.”

    “싫은데…….”

    투덜거리는 하빈의 모습에 의사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일단 오늘 하빈 씨 형님 말대로 피검사랑 초음파 같은 것들 하고 가시고, 내시경 검사도 일정 예약해서 하러 오세요.”

    “네에…….”

    결국 싫다던 피검사를 하게 된 하빈이 잔뜩 풀죽은 얼굴로 터덜터덜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지환은 하빈과 달리 한결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초음파 검사도 오늘 할 수 있으면 하고 가자. 내시경은 언제 가능한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형 나 피 뽑으러 갈 때 같이 가 줘야 해.”

    “알겠어. 애도 아니고 진짜…….”

    “아, 왜에…….”

    “알겠다고. 기다리고 있어, 혼자 먼저 가지 말고.”

    “으응.”

    하빈이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꽤 오래 걸리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으니 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의사가 속이 울렁거릴 때 좋다는 약도 지어 줬지만 아직 처방전이 나오질 않아 약국에 가지 못한 상태였다.

    “빨리 약 먹고 싶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아 하빈이 입을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그때 지환이 서둘러 다가와 하빈의 등을 다독였다.

    “많이 안 좋아?”

    “당장 토할 것 같아.”

    “약 먼저 지어 올까?”

    “아냐, 아냐…….”

    “많이 힘든 거 아냐? 형이 갔다 올게.”

    “조금만 더 참아 볼게.”

    하빈이 울상을 하고 형을 꼭 끌어안았다. 지환은 그런 하빈의 등을 쓸어 주다 주사부터 맞자며 주사실로 하빈을 이끌었다. 아파서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가 싫다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에 주사를 무서워하던 하빈이라 제 팔을 찌르기 위해 준비하는 커다란 주사기를 보고 눈을 껌뻑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뭘 그렇게 떨어, 별거 없어.”

    “맞아요. 잠깐 따끔하고 금방 끝나요.”

    “그치만 무섭다고…….”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꽉 쥔 채 팔에 고무줄을 묶는 간호사의 손길을 쳐다봤다. 아, 무섭다……. 나이를 그렇게나 먹고도 아직도 주사를 무서워하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겁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화한 느낌의 알코올 솜이 살결 위를 스쳐 지나가고 하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따끔해요.”

    “으아…….”

    따끔하기만 할까, 많이 아플 것 같은데. 하빈의 불신에도 간호사는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푹 찔러 넣었다. 주삿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자, 간호사가 재빨리 피스톤을 당겨 주사기에 피를 채워 넣었다.

    “별로 안 아팠죠?”

    “아팠어요.”

    “얼마나 아팠는데요? 울 정도로 아팠어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간호사는 키득거리며 주사 맞은 자리에 알코올 솜을 얹어 주고는 꾹 누르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오자 지환은 이제 초음파도 해야 한다며 하빈의 옆에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초음파는 몇 분이나 걸리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검사에 조금 겁이 났다. 아픈 건 아니겠지…….

    “그냥 가면 안 돼? 초음파 하는 것도 아프면 어떡해.”

    “초음파 꼭 하고 가야지. 하나도 안 아파.”

    “초음파는 왜 하는 거야?”

    “혹시 모르니까 하는 거야. 너 속 안 좋은 거 어디 아픈지 걱정되니까.”

    “뭘 혹시 몰라?”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뭐? 말이 돼, 그게?”

    하빈이 코웃음을 치며 지환의 팔뚝을 퍽 밀쳐 냈다. 지환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네가 관계를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아, 됐어. 그럴 일 없다니까. 그냥 가자.”

    대수롭지 않은 하빈의 반응에도 지환은 조금만 기다렸다 하고 가자며 볼을 꼬집었다. 하빈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알겠다 대답하고는 멍하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하빈 씨, 김하빈 씨. 초음파실 들어가세요.”

    “네? 네!”

    정신을 놓고 있던 하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환이 잘 하고 오라며 등을 두드렸다. 응, 잘 하고 올게. 손을 몇 번 흔들어 주고 안으로 들어가자 의사가 침대에 누우라며 베드를 툭툭 두드렸다.

    “젤을 바를 건데 조금 차가울 수 있어요.”

    “네에.”

    “초음파는 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러면 하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하빈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고 화면을 쳐다보자 의사가 위쪽 모니터를 가리키며 저 화면을 봐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초음파기로 부드럽게 누르는 느낌이 아프지 않고 시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플까 봐 무서웠는데 그런 공포들은 금방 가라앉았다.

    검은색 바탕 화면에 허여멀건한 무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의사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하빈의 아랫배를 꾹꾹 누르며 진찰했다. 흐음……. 길어지는 그의 진료에 하빈이 겁을 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선생님…….”

    “네?”

    “저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픈 건 아닌데.”

    “아픈 건 아닌데요?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네요.”

    “뭔데요?”

    “하빈 씨, 마지막 히트사이클이 언제예요?”

    “그건 그야…….”

    대답을 하려다가 입이 턱 막혀 버렸다. 언제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빈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의사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여 초음파를 관찰했다. 의사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알아볼 수 없는 영상이 왔다 갔다 눈앞을 어지럽혔다. 하빈은 혼란스러워하며 답했다.

    “그게 아마, 어……. 저번 달에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같은 거죠, 한 게 아니라?”

    “네? 네, 네에…….”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울상이 된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옷자락을 꾹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덜컥 겁이 났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 사고 친 것 같아. 어떡해.

    “임신하신 것 같은데 산부인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 임신이요?”

    “네. 여기 보면 아기집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고 이게 아기예요.”

    “그럴 리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하빈이 의사를 쳐다봤다. 의사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한 채 배에 묻은 젤을 닦아 주며 물었다.

    “가족들하고 같이 왔죠?”

    “네? 네.”

    “그럼 오늘 산부인과에 들렀다가 가요. 이 옆에 있으니까 바로 가 보면 되겠다.”

    “아, 네에…….”

    일으켜 주는 손길을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빈이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지환이 벽에 기대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막상 뭐라고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뭐래?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많이 안 좋대?”

    “어? 아니…….”

    둘러대려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괜찮냐며 다가와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까. 고민이 됐다.

    “아무 이상 없대지?”

    그의 말에도 하빈은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자 이상함을 느낀 지환이 대답을 재촉하며 하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하빈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형…….”

    “어어.”

    “큰일 났어…….”

    “뭐가? 왜 큰일 났어?”

    고개를 뚝 떨군 하빈이 지환을 끌고 밖으로 나와 구석에 서서 뜸을 들였다. 답답해진 지환은 빨리 좀 말하라며 닦달했지만 하빈은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말하려고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지환이 결국 자기가 가서 물어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하빈은 말을 꺼냈다.

    “나 임신했대.”

    “……뭐?”

    “임신이래……. 어떡해?”

    “말도 안 돼. 누구, 누구 앤데? 야 너 진짜 미쳤어?”

    “누구 애긴. 당연히 세원 씨 애지……. 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정신 안 차려?!”

    지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빈이 놀라 귀를 틀어막고 지환을 쳐다봤다. 지환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임신을 할 수가 있는 거야? 하여간 그 나쁜 새끼 진짜!”

    “아냐, 세원 씨 잘못 없어. 내가 자자고 해서 잔 건데…….”

    “너도 바보냐? 피임을 제대로 했어야지! 콘돔 뒀다 뭐 해!”

    형의 말에 입이 합 다물렸다. 그렇게 화를 내 봤자 이미 들어선 애를 어쩌겠는가. 하빈이 배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이제야 왜 그토록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하나둘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지환은 하빈을 다시 대기실 의자에 끌어다 앉혀 두고 말했다.

    “기다려, 수납하고 올 테니까. 처방전 받아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그다음에 바로 산부인과 가서 애 떼는 약 달라고 할 거야.”

    “뭐? 말이 돼?!”

    “말이 왜 안 돼! 그럼 애 키울 거야?”

    두 사람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하빈과 지환은 개의치 않고 말싸움을 벌였다. 아기 지우는 약을 받겠다는 형과 싫다는 하빈의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기를 가지는 것도 무서웠지만 지우기는 더 무서웠다.

    “김하빈 님, 김하빈 님.”

    “너 아무튼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 가서 검사도 다시 받아 볼 거니까.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씨이…….”

    간호사가 하빈의 이름을 불렀다. 지환이 수납하러 자리를 뜬 틈을 타 하빈은 재빨리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대로 형에게 잡혀 산부인과에 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아이던 당장에 지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뭐가 됐든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지환은 그저 빨리 지우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당장에 지우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침착하게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아냐…….”

    여전히 임신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뱃속에 작은 생명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환은 당장에 지워 버리라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거리로 나온 하빈이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비틀거리며 가로수를 붙잡았다. 욱욱, 금방이라도 토가 올라올 것 같았다.

    “야, 김하빈!”

    뒤따라 달려온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힐끔 뒤를 돌아보고 히익, 놀라 걸음을 서둘렀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 새끼야! 는 지환이 무섭진 않았지만 이대로 산부인과에 끌려갈까 봐 겁이 났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알고는 있냐? 야, 거기서 그렇게 사라지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어?!”

    “그렇지만 형이 다짜고짜 산부인과 데려가서 아기 지우는 약 먹인다고 하니까 나는…….”

    “그럼 축하한다고 박수라도 쳐 주랴? 동생이 사고쳤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제정신이야?”

    지환의 목소리에 하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뚱한 얼굴로 손목을 붙잡혀 다시 건물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산부인과에 가기 싫다며 우는 소리를 내자 집에 간다고 달래는 형을 믿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엘리베이터는 주차장이 아닌, 위를 향하고 있었다.

    “뭐야? 왜 위로 올라가?”

    “산부인과 갔다가 집에 가게.”

    “싫다니까!”

    “네가 싫다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

    “아, 형!”

    “부르지 마. 안 그래도 짜증 나니까.”

    매서운 눈빛이 하빈을 향했다. 움찔, 차가운 시선에 겁을 먹은 하빈이 형의 시선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곳은 없었다. 지환은 한숨을 내쉬며 어서 내리자고 하빈을 잡아 끌었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가면서도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형은 왜 다 형 마음대로 하는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알아서 할 수 있다는 새끼가 임신을 해? 결혼한 것도 아니고 너 지금 걔랑 헤어진 상태야, 정신차려!”

    “……나도 알아. 그치만.”

    “네가 이런다고 강세원 너한테 안 돌아온다.”

    “세원 씨 돌아왔으면 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왜 이러는데. 대체 뭐 때문에 애 지우기 싫다는 거야?”

    “그냥……. 일단은 당장 지우는 건 고려를 해 보자는 거지…….”

    “됐어. 그딴 거 없고 빨리 지우면 지울수록 좋으니까 가서 약 받고 애 지우자.”

    “싫어!”

    대기실에서도 하빈이 떼를 썼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배가 많이 부른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홀쭉한 배를 하고 앉은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지환에게 말했다. 지환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하빈은 들어 보기라도 하라며 형의 손을 꽉 붙들었다.

    “형, 그럼 이건 어때.”

    “뭐.”

    “일단 약은 타 오고 먹는 건 내가 조금 진정이 되면…….”

    “왜.”

    “약 먹으면 몸 안 좋아진다고 하는데 나 지금도 건강 많이 안 좋잖아. 이러다가 더 안 좋아져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한 주 늦게 먹는다고 큰일 안 나.”

    하빈의 설득에 지환은 고민하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제발, 응? 하빈은 주먹을 꽉 쥐고 제 형이 말을 들어주길 바랐다.

    “몸 많이 안 좋아?”

    “어? 어. 안 좋아.”

    “일단 의사 만나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본 다음에 결정하자.”

    “알았어.”

    “너 애 혼자 못 키워. 절대 안 돼. 꼭 지워야 돼. 알았지.”

    “……응.”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지환이 알겠냐며 하빈을 붙잡고 거듭 물었다. 알겠다며 고개까지 끄덕이고 나서야 지환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아 대기자 명단을 지켜봤다. 하빈의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앞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제 차례가 다가오자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가 안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빈은 의사 앞에 앉아 시무룩한 얼굴로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제, 제가 임신을 해서요…….”

    “임신이요? 혹시 임신 테스트기나 초음파 검사 같은 걸로 확인한 상태인가요?”

    “네. 저 초음파 검사 방금 전에 하고 왔는데 거기서 임신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의사 선생님, 애 지우는 약 있죠?”

    지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빈이 지환을 밀어내며 하지 말라 말렸지만 말을 들을 그가 아니었다. 지환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얘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사귀는 사람도 없어서 임신하면 안 되거든요. 애 지울 건데 지울 수 있죠?”

    “약을 먹을 수도 있고 기간이 좀 더 지나면 수술로 하는 방법도 있는데요. 아기 아빠는 누군지 모르는 건가요?”

    의사의 물음에 하빈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긴 뭘 몰라!”

    “아니, 아니라고……. 안다고……. 세원 씨잖아.”

    “그래, 강세원. 그 새끼가 애 아빠잖아.”

    “응…….”

    고개를 푹 숙이고 세원을 떠올렸다. 자신이 임신한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할까. 형처럼 당장 지우라는 말을 할까, 아니면 혹시라도 책임지겠다는 말을 해 올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자 지환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응, 어?”

    “지금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네. 밥도 못 먹고 그래서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이래도 약 먹을 수 있나요?”

    “그러면 일단 푹 쉬고 다시 병원에 오실래요? 하빈 씨도 아기 지우고 싶어요?”

    “아니요……. 좀 쉬고 와도 돼요?”

    “일단 환자분이 원하는 대로 해 드리는 게 중요해서.”

    “안 된다고요! 아 진짜, 미치겠네…….”

    지환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의사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빈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기 가진 사람은 김하빈 씨고, 그러다 보니 결정권도 하빈 씨한테 있죠. 조금 지나다 보면 아기를 지우고 싶거나 책임지기 무서워져서 병원에 오고 싶어질 수도 있어요. 가족분도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으휴, 이 바보 같은 새끼야…….”

    머리를 콩 쥐어박는 손길에 눈물이 찔끔 튀어나왔다. 매정해도 너무 매정한 형의 모습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냥 다독여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도 지금 무서운데.

    콧잔등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환이 하빈을 나무라며 잔소리를 해 왔다.

    “그러니까 형 말 잘 들으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이것도 다 형이 시킨 거잖아.”

    “내가 시키긴 뭘 시켜!”

    “형이 그 사람 만나라고 시켜 놓고!”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임신하라고 떠민 줄 알겠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간호사가 진정하라며 둘을 끌고 밖으로 나와 대기실에 앉히고 찬찬히 설명을 늘어 놨다. 당분간 몸조심도 해야 하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에 지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하빈을 노려봤다. 하빈은 그런 형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셨죠?”

    “네.”

    “그럼 다음에 내원하실 때 어떻게 하실 건지 마음 정해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다음까지 갈 것 뭐 있냐. 그냥 애 지우라니까.”

    계속해서 지우라며 종용하는 지환의 목소리에 하빈이 귀를 틀어막았다.

    “애 아빠도 없이 오메가가 혼자 애 낳고 키우겠다는 소리는 안 할 거지? 애한테도 못 할 짓이야.”

    “……나도 알아.”

    “아는 애가 그래?”

    “그래도 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형 마음대로 그럴수록 난 더 반감만 들어.”

    “넌 애가 왜 그러냐? 형 말 좀 들으면 어디가 덧나?”

    “몰라…….”

    제가 형의 말솜씨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빈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을 빠져나왔다. 수납하던 지환이 서둘러 뒤를 따라와 엘리베이터를 잡고 옆에 서서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형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알아…….”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기 꼭 지우자.”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너 진짜 혼자 애 키울 생각이야?”

    “아, 나도 모른다니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지환은 계속해서 아기를 지우라며 닦달을 해 댔다. 근데 이상하게 형이 말하면 말할수록 더 하기 싫은 이상한 마음이 샘솟았다. 이건 또 무슨 반항심인가. 내가 애도 아니고.

    아기가 보고 싶었다. 배에 있는 내 아기를.

    집으로 돌아와 대충 외투를 벗어 던진 하빈이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깜빡였다. 피곤해서 이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환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방문에 기대 팔짱을 꼈다.

    “김하빈.”

    제 이름을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하빈이 이불을 살짝 내려 눈만 빼꼼 내어놓고 형을 바라봤다.

    “왜.”

    “너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나 지금 뭐 먹으면 토할 것 같은데…….”

    “입덧 가라앉는 약 받아 왔잖아. 그거 먹고 밥 먹으면 되지.”

    “아아……. 근데 나 치킨 먹고 싶어, 치킨.”

    “치킨?”

    “후라이드 치킨.”

    “알았어. 또 없어?”

    “콜라도…….”

    “그래, 지금 먼저 약부터 먹어.”

    지환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방을 빠져나가고 하빈은 돌아누워 벽을 바라본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세원과 함께였다면 그는 뭐라고 했을까?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그도 지우라고 했을까. 반복되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세원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 번만 보고 오면 안 될까…….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하빈이 다시 뒤척이며 눈을 감는데 지환이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빈은 움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환을 맞이했다. 왜 그러냐며 묻자 지환은 이야기 좀 하자며 침대에 걸터앉아 하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뭔데 이래, 징그럽게.”

    “요즘 통 못 먹어서 얼굴이 이렇게 상한 거야?”

    “그런 것 같아.”

    “아이고, 안쓰러워서 어떡하냐.”

    “나도 몰라. 안 그래도 힘든데 형이 더 힘들게 하잖아.”

    “내가 더 힘들게 해?”

    “어…….”

    “나는 너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이게 도와주는 거야? 뭐가 도와주는 건데?”

    “그야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형으로서 도와주고 있는 거지.”

    “이게 왜 잘못된 선택이야. 내 나름대로 현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일인데 내가 결정해야지 왜 형이 판단하고 시키는 건지. 내가 내 맘대로 하지도 못해? 하빈이 짜증을 내자 지환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메가 혼자서 아기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내가 당장 키우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혼자 키운다고 해도 할 수 있거든.”

    “그래. 만약 키우겠다고 하면 돈은 어떻게 할 건데.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어. 일하면서 돈 벌면 어떻게든 되겠지!”

    당당하게 말하는 하빈의 모습에 지환이 피식 웃으며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네 맘은 다 알겠는데 그래도 세상에는 의욕만으로 되지 않는 게 있다고.”

    “……그렇지만 세원 씨 아기라서 그런지 지우기 싫단 말이야.”

    “강세원하고 헤어졌잖아. 걘 너 이제 신경도 안 쓴다니까? 뭐가 더 남았다고 이렇게 혼자 질척거려.”

    “질척거리는 게 아니라 그냥…….”

    “그만하자, 어? 우리가 부모님 없이 커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도 알잖아.”

    지환의 말에 하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부모님 없이 지환이 얼마나 고생을 해서 자신을 키워 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생각 같지 않았다. 아기가 있는 영상도 보고 배에 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떼어 놓기가 어려웠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되어 줄 수 있는데…….

    “만약 낳는다 해도 강세원한테 말할 수 있어? 못 말하잖아. 그리고 말하면 걔가 책임진다고 할 것 같아?”

    세원까지 들먹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빈은 시무룩한 얼굴로 이불을 홱 뒤집어쓰고 됐다며 말을 끊었다. 지환은 잘 생각해 보라며 하빈의 등을 한 번 쓸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치킨 먹을 거지?”

    “……어.”

    “그래도 임신은 임신이라고 입덧하니까 안쓰럽다. 얼른 애 떼야 네가 덜 힘들지.”

    “아, 몰라, 됐어.”

    “모르긴 뭘 몰라. 형이 치킨 오면 부를 테니까 좀 쉬고 있어.”

    “알았어.”

    지환이 나가고 가만히 누워 있던 하빈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지환의 성화에 못 이겨 약을 먹게 될 것 같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지방에 있는 방을 보게 되었다. 저렴하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라면 만족이었다.

    “부산이면 세원 씨랑도 갔던 곳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부산으로 방을 알아보는 동안 치킨이 도착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드득 놀란 하빈이 핸드폰을 집어넣고 찌뿌둥한 몸을 이끌어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치킨이 펼쳐져 있었다. 맛있겠다. 입맛을 다시며 하빈이 다가가자 얼른 오라며 젓가락을 건넸다.

    “형, 형.”

    “어.”

    “나 콜라도 줘.”

    “콜라 주려고 했어. 컵 들어 봐.”

    “여기.”

    잔을 들자 지환이 콜라를 가득 채워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말하고는 자신도 젓가락으로 치킨을 하나 집어 들었다. 닭다리 두 개를 모두 양보한 지환에 하빈은 괜찮다 했지만 지환은 무심한 척 너 다 먹으라는 말과 함께 날개를 뜯었다.

    “좀 들어가?”

    “응. 맛있어.”

    “더 고생하기 전에 얼른 애 지워.”

    하빈은 답이 없었다. 지환은 혼자 줄줄 말을 늘어놨다.

    “그리고 회복하는 동안에는 내가 집에 자주 와서 너 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냐, 괜찮은데.”

    “괜찮긴. 지금도 안색이 이렇게나 안 좋은데. 애가 얼굴이 창백해서는 진짜 파리하게 질려 있어. 입술도 말라 있어서 그런지 엄청 아파 보여.”

    “나 그렇게 못생겨 보여?”

    “못생겨 보인다는 게 아니라, 아무튼 예쁜데 아픈 사람 같다고.”

    대충 둘러대는 말에 시무룩해진 하빈이 깨작거리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지환은 콜라도 마시라며 손에 컵을 쥐여줬다.

    형이 이렇게나 잘해 줬지만 그래도 아직 아기를 지우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키울 수 있다면 키우고 싶기도 한데……. 힐끗 지환의 눈치를 보다가 열심히 치킨을 뜯었다. 언제 또 먹게 될지 모르니 이럴 때 먹어 둬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문득문득 구역질이 올라오고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먹고 싶었던 거라 그런지 꽤 입에 맞아 다행이었다. 치킨을 먹고 지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시간이 늦어져 있었다. 형은 집으로 돌아가고 하빈은 혼자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배에 세원과 자신의 아기가 있다니. 이 놀라운 일을 그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다. 세원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핑계라면 핑계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받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해도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우라고 하겠지……. 무서워. 그의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다.

    “지우기 싫은데…….”

    배를 감싸고 옆으로 돌아누워 벽을 바라봤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러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야?

    이런 삶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분수에 넘치는 걸 원해서 그랬던 걸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히끅이던 하빈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자 토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빈은 굳은 표정으로 배낭을 꺼내 들었다.

    충동적이었지만 부산에 갈 작정이었다. 일단 내려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지환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할 계획이었다.

    속옷과 옷을 잔뜩 챙겨 넣고 외투도 챙겨 넣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굽혔던 허리를 펴자 엉망이 된 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서 당분간 오지 않을 테니 집을 좀 치우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빈이 작은 거실을 쭉 둘러보다 대충 청소를 하며 숨을 골랐다.

    확실히 몸이 아프니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었다. 주방까지 정리하고 샤워를 마치자 이제야 떠날 준비가 된 느낌이었다. 내일 새벽이 되자마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형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계획했던 대로 일찍 잠에서 깨어난 하빈은 짐가방을 들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역사 안은 붐볐다. 살면서 처음 와 보는 기차역에 하빈은 가방끈을 꼭 붙잡고 어색한 자세로 쭈뼛쭈뼛 플랫폼을 찾아갔다.

    “사람 엄청 많네.”

    아침부터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어 무섭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 서 있진 않을까 겁이 나 연거푸 화면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열차 번호와 시간을 맞춰 차량 번호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고 근처 의자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지켜봤다.

    다들 익숙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든가 핸드폰을 본다든가 전화통화를 한다든가, 온통 바쁜 사람들뿐이었다. 한가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도망쳐 온 사람도 나뿐이겠지……. 하빈은 시린 코를 만지작거리며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에 서둘러 줄을 서고 기차에 올라탔다.

    생전 처음 타 보는 고속 열차는 시설이 좋았다. 이걸 타고 부산까지 몇 시간을 간다고?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 하빈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창밖을 바라봤다.

    플랫폼에서 다른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실없이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내가 미쳤나…….

    “이렇게 좋아할 일이 아닌데…….”

    너무 철없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밝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살다 보니까 별별 짓을 다 해 보는구나.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형이 있는 서울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자 긴장이 풀리며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았다.

    깜빡 잠들었던 하빈이 눈을 떴다. 배가 고팠다. 가방을 뒤적였지만 먹을 건 보이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밥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푹 엎어져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쉬고 싶었다. 기차는 조용히 달리고 있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형이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기가 보고 싶었다. 세원과 자신 사이의 아기라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에게도 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며 스스로 다잡고 또 다잡았지만 힘들었다.

    고민하는 동안 기차는 어느새 부산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역사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일단 허기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근처에 보이는 밥집으로 들어가 우동 하나를 시키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형에게서 전화가 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우동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시고 면을 집어 들었다. 후후 불어 입으로 가져오자 짭짤한 감칠맛이 돌았다. 허겁지겁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부산에 와 있구나. 온통 처음 보는 곳에 눈이 휙휙 돌아갔다.

    형에게 전화가 올까 싶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와이파이를 켰다. 이러면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미리 알아봐 둔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을 하다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탔다.

    주소를 말하고 편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하빈에게 말을 걸어 왔다. 어디서 왔냐, 나이는 몇이냐, 하는 일은 무엇이냐 등등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드는 택시기사에 하빈은 반쯤 혼이 나간 채로 대답을 해 줘야 했다.

    “감사합니다.”

    “부산에서 잘 놀다 가요.”

    “네…….”

    택시를 타기 전보다 더 지친 얼굴로 내린 하빈이 빌라 단지 안으로 들어가 집을 찾아갔다. 꽤 나쁘지 않은 위치였다. 주변에 슈퍼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기웃거리며 근처를 둘러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원과 함께 부산에 왔을 때처럼 호화로운 호텔 방은 아니었지만 혼자 쓰기에는 충분했다. 괜찮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집안을 돌아보던 하빈은 스르륵 옆으로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피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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