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세원, 김하빈 그리고 김지환
늦게 출발한 만큼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빈의 집에 도착한 탓에, 세원은 자고 가야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에 하빈은 자다 깨 신이 난 얼굴로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은 오후 출근이었고 세원과 조금이라도 더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세원 씨는 내일 출근 안 해요?”
“나는 내일 늦게 출근해도 돼.”
“역시 이사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는구나.”
“꼭 이사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막내아들이라서?”
세원이 잠시 하빈을 쳐다봤다. 정말 악의 없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표정에 그는 피식 웃으며 글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하빈은 집으로 들어가며 슬쩍 세원을 돌아보고는 투덜거렸다.
“그게 뭐예요.”
“늦어도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하던데?”
“그래요?”
“어. 그래서 가끔 늦어.”
“가끔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도 늦게 오셨잖아요.”
“내가?”
“네.”
“그랬나…….”
모르는 척인지 모르는 건지, 세원이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피우자 하빈은 제 말이 맞다며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알았어, 알았어. 근데 그런 것도 다 기억해?”
“당연하죠.”
“왜?”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입을 다물었다. 왜 당연하다고 했지? 당연할 일은 아닌데……. 왜 기억하냐며 뒤를 졸졸 쫓아오는 그를 피해 방으로 들어와 옷을 벗었지만 세원은 어떻게 기억하냐며 계속해서 하빈을 괴롭혔다.
몸을 끌어안고 쪽쪽 입을 맞추며 장난을 치는 통에 하빈은 결국 항복을 하며 대답했다.
“그, 그때부터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렇죠!”
“그랬어?”
“네에…….”
“귀엽다.”
“뭐가 귀여워요, 부끄러운데……”
하빈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둘러 옷장을 열었다. 잔뜩 들어찬 옷 중 잠옷을 찾아 손을 휘적이는데 뒤에서 세원이 몸을 끌어안으며 배를 감쌌다. 그러자 이상하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뭐지? 이상한데…….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세원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어 올리자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피곤해?”
“아니요.”
“그럼 하고 잘까?”
“……네.”
그의 페로몬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하빈에게서도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페로몬이 뿜어져 나온 페로몬이 뒤섞이고, 격정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 거친 숨결이 합쳐지며 입맞춤이 이어지고 세원은 집어삼킬 듯이 하빈의 입을 빨아들였다.
“우응, 읏, 으응.”
비좁은 방에서는 몇 발짝 움직이지 않아도 바로 침대에 닿을 수 있었다. 하빈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종아리쯤에 침대가 느껴졌다. 하빈이 주저앉으며 천천히 몸을 젖혔다. 어디에 벽이 있을지 몰라 입술을 떼어 내고 뒤를 돌아보려 하는데 세원의 손이 머리를 받쳐 왔다.
조심스럽게 눕혀진 하빈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세원은 웃으며 팔을 잡아 내리고 다시 짧게 입을 맞췄다. 바지만 입고 있던 하빈과 단추를 반쯤 끌러 내리고 있던 세원은 서둘러 자신들의 옷을 마구 벗어 던졌다.
살짝 짭짤한 맛이 살결에서 느껴졌다. 하빈은 세원의 목덜미를 핥아 올리며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는 하빈의 옆구리를 어루만지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페니스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자극적인 손길에 하빈이 허리를 뒤틀며 몸을 들썩였다. 몸이 달아올랐다.
“아아, 으앙, 앗,”
“좋아?”
“네, 아흑, 읏,”
하빈의 고환까지 장난스레 조몰락거리던 세원이 하빈과 코끝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제 입술까지 앙 깨물어 버리는 그의 귀여운 행동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하빈이 작게 웃자 세원도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몸을 탐하는 데 열중했다.
유두를 콱 깨물다가도 혀로 끝을 살살 굴리며 자극하자 하빈의 입에서는 아찔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번쩍거리는 느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쾌락에 허덕이던 하빈이 다리를 접어 올리고 발끝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불을 잡아 뜯자 세원이 가슴을 확 잡고 강하게 유두를 빨아들였다.
“아흐, 아앙! 아!”
제 성감대를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세원의 손에서 녹아내리는 하빈이었다. 다리를 벌린 채 달달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고 있자 세원이 몸을 일으켜 하빈을 내려다봤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작게 미소지었다.
“어떻게 해 줄까?”
“너, 넣어 주세요…….”
하빈의 말에 세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겹쳐 왔다. 커다란 페니스 끝이 입구를 살살 문지르며 자극하고 있었다.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자극이 전해져 올 것이란 긴장감이 더해지자 알 수 없는 쾌락이 온몸을 지배했다.
아……. 더 큰 자극을 원했다. 어서 세원이 안으로 들어오길 원했다.
“빨리, 세원 씨, 빨리요.”
조르는 목소리에 세원은 만족한 얼굴로 하빈을 번쩍 안아들고 삽입을 시도했다. 그에게 매달린 하빈은 아슬아슬하게 그를 끌어안고 흔들리며 신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깊숙하게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아아. 좋아……. 아흑, 좋아, 세원 씨……. 몇 번이고 갈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하빈에 세원은 더욱 강하게 움직였다.
“흐, 으앙, 앗, 하윽!”
침대에 걸터앉은 세원의 위에서 하빈이 무릎을 꿇고 열심히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냘픈 하빈의 허리가 세원의 단단한 팔에 꽉 들어차 안겨 있었다.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하빈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세원의 위에 앉아 그에게 기대 입을 맞췄다.
세원은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바로 하빈을 침대에 눕히고 허리를 움직였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하빈이 다리를 달달 떨며 파정했다. 하지만 세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추삽질을 이어 갔다. 박고 또 박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끝없이 하빈의 안을 파고들었다. 하빈은 그의 밑에서 그렇게 쾌락에 젖어 울부짖었다. 잘 만난 한 쌍의 커플이었다.
“괜찮아?”
“네…….”
“힘들지.”
“조금?”
“이리 와.”
세원의 부름에 하빈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워 가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장난치는 손짓에도 세원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으며 하빈을 바라봤다.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하빈이 움직일 때마다 뒤에서 허여멀건 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땀으로 젖은 몸이 찝찝했고 시트는 모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욕실로 들어와 샤워기를 틀고 함께 물을 맞았다.
“세원 씨랑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나도.”
“결혼한 것 같아요.”
“그래?”
“네.”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세원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입을 맞췄다. 결혼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제 입으로 한 소리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지환이 세원과 절대 연애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소리가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샤워 부스 안에 서 있자 세원이 엉덩이를 토닥이며 하빈을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아니, 형이 세원 씨랑 연애는 해도 되는데 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어요.”
“왜?”
“저야 모르죠…….”
“너는 김지환 말을 믿어, 아니면 내 말을 믿어?”
“그건…….”
“아무래도 형이니까 김지환 말을 믿으려나.”
세원의 말에 하빈이 잠시 뜸을 들였다. 지환이 제 형이라서 믿는 건 아니었다. 그저, 세원의 배경이 자신과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으니까. 어쩌면 지환의 이야기가 더 현실성 있으니까. 그래서 믿는 것뿐이었다.
“형이라서 그렇기보다는, 형 말이 더 그럴듯하니까…….”
“그래?”
“네.”
“그렇구나.”
더는 별말을 않는 세원에 하빈이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왜요?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니야.”
“뭔데요. 하고 싶으면 해도 돼요. 믿을게요.”
진짜로요. 팔을 붙잡자 세원은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리고 머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꼭 네 형 말이 다 맞는 건 아니라고.”
“네?”
“김지환이 나랑 사귀다 바람피우고 헤어진 게 맞을 수 있다는 이야기야.”
“……형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치, 근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나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결혼했다고 하면 바람피우다 결혼한 것 말고는 뭐가 더 있겠어. 선이라도 봐서? 네 형이 그럴 사람으로 보여?”
세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난 아니라고 본다. 그냥 바람피우다가 내가 자기 마음대로 안 해 주니까 헤어지고 그 알파랑 결혼한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네 형 말을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마.”
지금껏 지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아왔던 하빈이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자 그는 새 수건을 꺼내 다가와서는 하빈의 머리와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수건을 받아 든 하빈이 스스로 몸을 닦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저는,”
“응?”
“저는 세원 씨 믿어요.”
오후 출근까지 시간이 꽤 남아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하빈의 집에서 출근하기로 한 상태였다. 둘은 주방에서 찰싹 달라붙어 함께 식사를 만들었다.
집에서 워낙 밥을 해 먹지 않아 재료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된장찌개며 계란 프라이에 지환이 사다 놓은 낙지 젓갈까지 제법 맛있는 한 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저번에 이거 먹어 봤는데 꽤 괜찮았어요.”
“그래?”
“밥이랑 계란 프라이랑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기대할게.”
세원이 웃으며 접시를 건네받았다. 식탁 위로 이것저것 반찬이 놓이고 마지막으로 밥을 나르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올 사람 있어?”
“네? 아뇨.”
“방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김하빈!”
그리고 거실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놀라 재빨리 세원을 홱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지환은 하빈을 찾는 듯 다급한 발걸음으로 이곳저곳을 서성이다 주방으로 걸어왔다.
“자, 잠깐!”
서둘러 지환을 막아서려 했지만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 하빈의 집 주방에서.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지환의 말에 세원이 들고 있던 밥그릇과 주걱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못 올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김하빈. 아무나 들이면 돼, 안 돼.”
“내가 왜 아무나야.”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하빈은 중간에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채로 눈치를 살폈다. 둘을 번갈아 보며 주춤주춤 진정하라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하빈은 울상을 하고 세원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세원 씨 일단 진정하고 출근부터 해요.”
“쟤가 왜 네 집에서 출근을 하냐고!”
“여기서 잤으니까.”
“뭐? 미쳤어!”
쩌렁쩌렁 울리는 지환의 고함 소리에 세원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더 화가 난 지환이 다가와 하빈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내가 저 새끼랑 적당히 하라고 했지.”
“형!”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한발 빠르게 지환이 입을 열었다.
“꼬시라고 했더니 아주 강세원한테 홀렸냐?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뭘 꼬시라고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방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하빈은 입술을 꾹 깨물고 지환을 노려봤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어? 눈으로 말을 해봤지만 세원을 직접 마주친 상황에서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 화를 내도 내가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가장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세원이었다. 그의 말에 지환은 눈썹을 요란하게 꿈틀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화를 내!”
“나랑 사귀면서 바람까지 피웠으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어야지.”
“내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있어?”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겠다 이거지.”
팔짱을 끼고 지환을 내려다보는 세원의 표정이 싸늘했다. 하빈은 안절부절못한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 중재에 나서려 했지만 지환의 다음 말에 고개를 떨궜다.
“너야말로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 것처럼 구는데, 너도 나 이용했잖아.”
“내가?”
“그래. 네가 결혼하기 싫어서 나랑 연애한다고 말하고 다녔잖아. 덕분에 온갖 소리 다 들었는데 나 좋아한다는 것도 결국 거짓말이었고…….”
“너도 나 안 좋아한 건 피차일반이었잖아.”
이쯤 되자 하빈은 싸움 말리기를 아예 포기해 버렸다. 이건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풀지 못한 앙금이 둘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숨을 푹 쉬며 홀로 자리를 옮겨 식탁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렇게 힘들지……. 속이 울렁거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으르렁거리며 제 할 말들만 내뱉고 있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랑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세원 씨랑 형이랑 사귀는 것 같지. 와중에도 질투가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눈을 깜빡이다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에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저었다.
“됐고, 이제 둘이 그만 만나.”
“네가 뭔데 만나라 마라야.”
지환이 하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얼른 말해.”
“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서 있자, 지환이 답답하다며 하빈의 손목을 잡아끌어 세원의 앞에 내세웠다.
“그만 만나자고 해.”
“형.”
“지금이 복수하기 딱 좋겠어.”
하빈이 지환을 돌아보려 했지만 단단히 어깨를 붙잡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세원은 잔뜩 인상을 쓰고 무슨 말이냐며 하빈을 바라봤다.
“복수가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라…….”
“하빈이가 나 도와서 복수하기로 하고 너 꼬신 거야.”
“형!”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무섭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세원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매섭게 손목을 잡아채는 지환의 손에 막혀 버리고, 세원은 한 발짝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진짜 그런 거야?”
“아니…….”
“얘가 너 좋아한 것 같아?”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지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랑 처음부터 짜고 너한테 복수하려고 꼬신 거라고. 모르겠어? 내가 왜 너한테 얘 보낸 건지?”
“형,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빈이 지환을 돌아봤다. 하지만 지환은 하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세원을 향해 계속해서 소리쳤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얼마나 상처받는 일인지 너도 한번 당해 보라고 복수한 거야.”
“대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사람 이용한 것도 모자라서 내 동생인 줄 알면서 얘까지 만나?”
“네 말대로 너한테는 마음 없었고 얘한테는 마음 있었는데.”
그의 말에 떨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빈은 발끝만 바라본 채로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나 무슨 말을 해 주길…….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하빈이 고개를 들어 세원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하빈은 고개를 저으며 다가갔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요, 변명을 해 보려 했지만 뒤에서 지환이 하빈을 잡아당겼다. 걸리적거리는 손길을 떼어 내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하빈이 너도 쟤랑 한패였다는 말인거네.”
“……세원 씨.”
“나 꼬셔서 이용하려고 했다고?”
“이, 이용하려고 한 적 없어요.”
“그럼 뭔데?”
“그냥, 그냥…….”
말을 잇지 못하자 그에게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여기까지 하자.”
세원의 말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여기까지 하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빈이 그를 바라봤다. 지환은 당장 나가라며 소리쳤고 하빈은 그만 좀 하라며 반대로 지환을 떠밀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세원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세원 씨, 잠깐만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의 뒤를 맨발로 쫓아 나가자 세원이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냥 들어가.”
“저 진짜,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네 형이랑 짠 게 아니라고?”
“그, 그건 맞지만…….”
“다 맞는데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야?”
말문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원을 붙잡았지만 그는 하빈을 두고 가 버렸다. 아니, 그는 그저 떠난 것뿐이었다. 모두 제 잘못이었다.
세원 씨! 하빈이 신발을 구겨 신고 뛰쳐나가 그를 붙잡으려 하자 세원은 일층에 서서 하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서 있었다.
먼저 입을 뗀 쪽은 세원이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세원 씨.”
“정말 아니야?”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
“미안해요, 미안한데 나 진짜…….”
좋아한다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튀어나가지 않았다. 하빈은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말아요. 가지 마. 손을 뻗어 세원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세원은 한 발짝 물러났다.
“진심이길 바랐는데.”
“진심이었어요, 정말 진심이었는데…….”
“진심이었는데 네 형 말대로 날 가지고 놀았다는 얘기가 나와?”
“그건…….”
“나는 상처도 안 받을 것 같지.”
“아니에요. 세원 씨 미안해요.”
세원이 작게 화를 내다 몸을 돌려 차를 타고 그대로 자리를 떠 버렸다. 하빈은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제 형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모두 형 때문이었다. 형이 찾아오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행복한 일상이 무참히 깨져 버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환은 씩씩거리며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빈은 달려가 손에 들린 옷가지를 뺏어 들고 뭐 하는 짓이냐고 어서 나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환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고 하빈에게 말했다.
“잘된 거야. 어차피 너한테도 금방 흥미 떨어져서 헤어지자고 했을 거야.”
“형 때문이야…….”
“뭐가 나 때문이야? 애초에 너도 좋다고 같이 한 일이었잖아!”
“내가 언제 좋다고 했어? 형이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한 거잖아! 그리고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는 게 어디 있어!”
“너 진짜 쟤한테 마음 있냐?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지 말라고 했지!”
“그게 마음대로 돼? 사람 좋아하는 게 마음대로 되냐고!”
하빈이 울부짖었다. 지환이 멈칫하고 하빈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형 때문이야! 다가가 팔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미 가 버렸고 잡을 수 없었다.
“정 그러면 가서 미안하다고 빌기라도 해 보든가.”
무책임한 지환의 말에 하빈은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가 왜! 사고는 형이 쳐 놓고 수습은 나보고 하라는 거야?”
“왜냐니, 화해하고 싶은 건 너잖아. 난 쟤랑 이대로 영영 안 봐도 아무 상관없어.”
하도 열을 낸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렁거리는 속에 하빈이 싱크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자 지환이 달려와 얼굴을 살폈다.
“놔!”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몰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형도 집에 가.”
밀쳐 내자 순순히 물러난 지환이 걱정스런 얼굴로 하빈을 바라봤다. 하빈은 그런 제 형을 무시하고 비틀비틀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으로 파묻혔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할 뿐이었다. 세원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