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우리 무슨 사이예요? (5/20)

5. 우리 무슨 사이예요?

오늘따라 가벼운 복장을 한 하빈이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고 집을 나섰다. 정운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번부터 놀기로 약속했던 걸 잊지도 않고 조르고 졸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차에 기대 있던 정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손을 들어 여유롭게 하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를 발견한 하빈이 우뚝 멈춰서 고개를 갸웃했다.

“왔냐?”

“뭐야?”

“뭐긴 뭐야, 데리러 왔지.”

“차는 어디서 났는데?”

“형 차 빌렸어.”

문을 탕탕 두드리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에 하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겉멋만 들어 가지고, 그냥 버스랑 지하철 타면 되지 뭘 차까지 빌려서…….

얼른 타라며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는 정운을 바라보다 하빈이 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러운 세원의 차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세원 씨도 점심 먹으러 갈 시간 되지 않았나? 문득 그를 떠올린 하빈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넣었다. 지난번 세원의 집에서 본 이후 도통 만날 시간이 나질 않아 이렇게 연락만 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통화도 했지만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야. 친구 만나서, 거, 그거만 보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옆에서 들려오는 짜증 가득한 소리에 잠깐 정운을 돌아본 하빈이 무어라 답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답장이 온 참이었다.

“야, 김하빈!”

“알았어, 알았어. 이것만 하고.”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하고 있거든?”

“미안. 진짜 다 했어.”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 세원의 메시지에 맛있게 먹으라는 답장을 보내고 드디어 화면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타이밍 좋게 빨간불에 차가 멈춰 서고 불퉁한 얼굴을 한 정운이 옆을 돌아봤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을 오롯이 받아내던 하빈이 쭈뼛거렸다.

“왜, 왜애…….”

“나랑 오랜만에 노는데 이럴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나랑 헤어질 때까지 핸드폰 안 만진다고 약속해.”

“그건 좀…….”

“안 그럼 그냥 집에 가고.”

단호하게 말을 끝맺은 정운이 다시 핸들을 붙잡았다. 하빈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알았어!”

“뭘 알았어?”

“핸드폰 안 볼게.”

“진짜지?”

“어. 진짜.”

격한 끄덕임에도 미심쩍은 눈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운은 믿어 보겠어, 하고 다시 빠르게 차를 몰았다. 주머니에서 울린 진동이 너무 신경 쓰였지만 보지 않기로 했으니 참아야 했다. 이따 화장실 가서 몰래 봐야지……. 하빈이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도착한 곳은 서울 도심에 있는 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운을 바라보고만 있자 정운은 얼른 내리라며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훌쩍 앞장서 가 버렸다. 하빈이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여기 비싼 데 아니야?”

“오늘 이 형님이 쏜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온갖 멋진 척을 다 해?”

“멋진 척 아니고 멋진 건데.”

목에 힘을 주는 정운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은 하빈이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거울을 살폈다. 삐죽삐죽 뻗친 머리를 정리하며 세원을 떠올렸다. 보고 싶다…….

그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같이 호텔에 갔을 때를 생각하며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정운이 어서 내리자며 하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검은색 위주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세원의 사무실이 생각났다.

아…….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와 연관짓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하빈의 눈썹이 축 처졌다. 흘러나온 한숨에 옆에 있던 정운이 하빈의 눈치를 살피며 하빈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야, 여기 스테이크도 맛있고 다 맛있대. 아무거나 골라. 내가 사 줄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나 어차피 알바하는 것도 모으고 있고 용돈도 따로 받으니까 상관없어.”

으쓱이며 메뉴판을 휙휙 넘기는 정운을 잠시 바라보던 하빈이 그를 따라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세원과 함께 레스토랑에 갔을 땐 그가 시켜 줬었는데…….

하빈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주욱 읽어 내리며 세원을 떠올리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

“뭐? 왜?”

그곳에는 세원이 있었다.

“아, 아냐.”

재빨리 아무것도 아니라며 메뉴를 고르는 척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먹고 싶다 가리키자 정운이 메뉴를 읽으며 설명을 늘어놨다.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는 쪽을 살폈다. 어떻게 봐도, 누가 봐도 세원이 분명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앞에 앉은 오메가는 얄밉게도 수줍은 얼굴을 하고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세원은 무슨 생각인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누굴까……. 설마 다른 사람이 생긴 건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 심장이 아려 왔다.

“그러니까 스테이크로 시킬…… 야, 뭔데?”

“어?”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너 지금 울기 직전인데.”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제 눈은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번 알아차리고 나자 눈가가 더욱 시큰거렸다. 붉어진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하빈은 울컥하는 마음을 꾸욱 억누르고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괜히 지나치게 속단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근데 여기 평일인데도 사람 많네. 사실 여기 선보러 오는 사람들 많대.”

“선보러 온다고?”

“어. 여기가 분위기도 좋고 고급스러운 곳이라 맞선 보거나 데이트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더라고.”

“아…….”

하빈의 시선이 다시 세원이 있던 쪽을 향했다. 그 잠깐 사이에 세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디로 갔지? 당황한 하빈이 눈을 껌뻑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멀리 화장실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나 화장실 갔다 올게.”

“그래. 내가 시켜 놓는다?”

“어? 어…….”

대충 손을 휘젓고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세원은 손을 씻고 있었다. 하빈이 우두커니 뒤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문을 닫았다. 끼익거리는 소리에 세원이 고개를 돌렸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김하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러는 세원 씨는 여기서 뭐 해요?”

“나야 점심 먹으러…….”

“아아. 회사에서 점심 먹는다는 게 이거였어요? 저 오메가랑?”

따지듯 묻자 세원이 당황해 축축한 손을 대충 옷에 닦으며 성큼 다가왔다. 그에 하빈이 한 발짝 물러나며 입을 다물었다. 다시 벌어진 간격에 세원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하빈을 바라봤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우리는 딱 이 정도 거리의 관계였다. 세원과 자신은 사귀는 사이도, 그렇다고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여기서 무어라 말을 얹는다면 주제넘은 행동이 되겠지. 아니, 이미 주제넘은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원은 이마를 짚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

한참 답이 없던 하빈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오해 안 해요. 제가 뭐라고 오해를 해요.”

“뭐?”

“방금은 주제넘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하빈이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하빈.”

세원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듣기 좋은 음성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품에 안겨 묻고 싶었다. 저 오메가는 누구고 지금 뭘 하고 있었고 나한테 왜 말해 주지 않았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뒤에서 익숙한 향기가 풍겨왔다. 세원의 페로몬이 제 몸을 덮쳐 왔다. 뒤이어 세원이 하빈을 와락 끌어안았고, 하빈은 눈을 감고 그대로 온몸의 힘을 풀었다. 바라면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그가 좋았다.

“저 사람이 세원 씨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다른 오메가를 만나고 있었는걸.

“저 먼저 나가 볼게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 내고 살짝 뒤를 돌아보자 복잡한 표정의 세원이 눈에 들어왔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서둘러 자리로 돌아간 하빈이 정운의 손을 붙잡았다.

“나가자.”

“뭐?”

“나가자고.”

“뭔데, 갑자기?”

“여기서 먹기 싫어졌어.”

“아, 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한 정운을 질질 끌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냐 묻는 말에 하빈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발끝만 바라봤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정운의 차를 찾아가던 중 세원의 차를 보게 된 하빈은 그 앞에 잠시 멈춰섰다. 저 차 멋있지 않냐? 분위기를 푼답시고 슬쩍 말을 걸어 오는 정운을 무시한 하빈이 성큼 다가가 발로 차를 뻥 걷어찼다.

“미쳤냐?”

“왜!”

또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모습에 옆에 있던 정운이 호들갑을 떨며 하빈을 끌어냈다.

“남의 차는 왜 발로 차고 지랄이야?”

“이거 놔!”

버둥거리다 정운의 차로 질질 끌려간 하빈은 결국 조수석에 꾸겨 넣어졌다. 여전히 씩씩거리며 세원의 차를 노려보고 있자 시동을 건 정운이 식은땀을 닦으며 하빈에게 투덜거렸다.

“넌 애가 요즘 왜 그러냐?”

“집에 갈래.”

“뭐? 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음에 다시 만나면 되잖아. 진짜 오늘은 이대로 못 놀 것 같아서 그래…….”

“무슨 일인데?”

“나중에 얘기해 줄게.”

잔뜩 울상을 한 얼굴에 정운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결국 다시 하빈의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말없이 축 늘어져 창문에 기댄 채 앞만 바라보던 하빈은 집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미안…….”

“됐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모두 사라진다는 것 같았다. 온 신경이 그 사람에게 쏠리고 모든 감정이 그 사람에게 향하고, 작은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하지만 그마저도, 그 모든 것들이 좋았는데. 잘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내 착각이었던 걸까. 방금 본 세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하빈은 멍하니 앉아 아까부터 울려 대는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세원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메시지며 전화며 온통 자신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혹시라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될까 봐.

그의 말대로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무슨 이유가 있다 해도 날 만날 시간은 없으면서 그런 사람 만날 시간은 있는 거야? 서러운 마음과 함께 온갖 질투가 끓어올랐다.

그를 빼앗긴 것 같았다. 세원의 앞에 앉아 있던 오메가는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그의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꾸 자괴감이 몰려오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눈물마저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세원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하빈이 핸드폰을 덥석 집어 들었다. 지환에게 전화할 생각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다 지환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시키지만 않았어도……. 열심히 속으로 지환을 욕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 손잡이를 붙잡고 묻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아. 문 열어 봐.”

하빈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얼어붙었다. 세원의 목소리였다. 이 너머에 그가 있었다. 바보 같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 문을 열어 그를 보고 싶었고, 야속한 그에게 문 따위 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상반되는 마음이 동시에 들며 자신을 괴롭혔다.

“왜, 왜 왔어요.”

“보고 싶어서 왔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뭐 그리 대단한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런 나긋한 목소리 한 마디와 부드러운 손길 한 번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하빈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내고 코를 훌쩍이며 나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세요. 별로 보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럼 기다릴게.”

“……가시라니까요.”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뭐.”

그리고는 말이 없어진 세원에 하빈은 잠시 머뭇거리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진짜 기다린다고? 믿을 수 없는 말에 망설이던 시간은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하빈이 참다 못해 슬쩍 손잡이를 돌렸다. 간 거 아냐?

살짝 문을 열자, 바로 앞에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세원이 있었다.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하빈과 세원의 눈이 마주쳤다. 세원이 피식 웃었다. 이제 들어가도 돼? 그 말에 하빈이 홀린 듯 문을 열었다. 그는 하빈의 어깨를 감싸고 품에 끌어안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익숙한 손길에 온몸이 간질거렸다.

“울었어?”

“네? 아니요? 안 울었는데요?”

전혀 안 울었는데?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격하게 흔들어 보이자 세원은 그렇냐며 손을 뻗어 하빈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하빈은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세원의 품에 안겨 그를 마주했다.

“운 것 같길래.”

“아, 아니에요.”

“그래?”

부끄러운 마음에 하빈은 세원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지만, 세원이 오히려 그런 하빈의 손을 붙잡고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네가 오해하는 거야.”

“……뭔데요?”

“아까 그 사람이랑 만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근데 왜 거기서 밥 먹고 있었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빈이 물었다. 세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네 앞에서 통화하던 거 기억하지? 그때부터 자꾸 부모님이 선을 보라고 하셔서.”

“아…….”

“거절하러 나간 거야.”

입을 꾹 다물었다. 선을 보라고 했다고……. 그러고 보니 세원 씨가 형하고 만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하빈이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알고 보면 나도 그런 거 아냐? 내가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이용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심장 소리가 머리를 울릴 정도로 크게 뛰어 댔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세원과 이렇다 할 사이도 아니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특별한 사이는 무슨 사이지?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말이 없는 하빈에 세원은 가만히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저도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하빈을 보던 세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선을 피했다. 하빈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있잖아요.”

“어.”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간 그의 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이 손아귀가 느슨해지고, 세원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당연히 만나고 싶었지. 내일 시간 되면 얼굴 보자고 하려고 했었어.”

“진짜요?”

“진짜로.”

누그러진 분위기에 세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누구랑 왔던 거야?”

“어디를요?”

“레스토랑. 아까 누구랑 같이 나가던데.”

“친구요.”

“친구? 누구?”

“윤정운이라고 전에 말했던 그…….”

“아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하빈은 다시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세원은 여전히 하빈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와 세원의 겹쳐진 손을 보던 하빈은 생각했다. 우리는 무슨 사이라서 이런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세원 씨.”

“응?”

눈이 마주치고, 하빈이 물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에요?”

“뭐?”

“우리는 무슨 사이라서 이런 걸 설명하고 있는 건데요…….”

웅얼거리며 묻는 말에 세원은 대답이 없었다. 실망한 하빈이 잡혀 있던 손을 빼내려 하는데 세원이 다시 확 붙잡고 말했다.

“넌 무슨 사이라고 생각해서 묻는 건데?”

“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묻는 거야?”

세원의 물음에 하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특별한 사이도 아니지 않나……. 친한 사이인 건가, 가까운 사이인 건가?

“하빈아.”

나직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하빈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세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시작은 이상했잖아.”

“네…….”

정말 이상한 시작이었다. 지환의 말도 안 되는 심부름을 시작으로 어쩌다 보니 섹스부터 하고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관계. 무엇보다 세원은 제 형의 전 남자친구였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만나 볼까?”

담백하고 직설적인 세원의 고백에 하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꽈악 붙잡았다. 그러자 세원은 하빈의 손을 확 당겨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제대로 연애해 보자.”

그의 말에 이유 모를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하빈이 울기 시작하자 세원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며 귓가에 입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페로몬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하빈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세원의 품에 폭 안겨 눈을 감았다.

* * *

첫 연애.

하빈에게 세원은 처음 사귀는 상대였으니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연락만 이어 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요즘 세원이 회사 일로 바쁜 상태였다. 혹여라도 그의 답장이 올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하빈의 눈에 오늘 날짜가 들어왔다. 곧 정운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원 씨랑도 영화 보러 가고 싶다…….”

하빈이 중얼거리며 영화 예매 앱을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세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밝은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하빈의 어깨까지 함께 축 처질 정도였다.

“피곤해요?”

[아니, 괜찮아.]

“요즘 너무 많이 바쁜 것 같은데…….”

[이번 주만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래요? 다행이다.”

[뭐 하고 있었어?]

세원의 물음에 냉큼, 같이 영화가 보고 싶다고 대답하려던 입을 다물고 그저 누워 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영화보다 세원이 더 보고 싶은 하빈이었다. 만나고 싶은데…….

[일찍 자야지.]

“아, 세원 씨 피곤하죠.”

[나야 괜찮은데 너도 일하러 가야 하잖아.]

“저는 뭐……. 내일도 오후 근무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내일모레 친구랑 놀기로 했어요.”

[친구랑? 친구 누구?]

“정운이라고 왜 저번에 말했었던 친구요.”

[아아…….]

세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당황한 하빈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노는데?]

“영화 보고 밥 먹고 그러기로 했어요.”

[둘이서?]

“네.”

또다시 답이 없는 세원에 하빈은 불안한 마음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왜 이러지?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많이 피곤한가? 전화 끊자고 할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세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나랑은 데이트 안 하고 친구랑 놀아?]

“네?”

[나랑 데이트해야지 왜 친구랑 데이트하는데.]

이어진 세원의 말에 잠시 사고회로가 정지되고, 천천히 그의 말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왜 윤정운이랑 데이트하냐고, 아니, 윤정운이랑 데이트하는 거 아닌데……. 세원 씨랑은 왜 안 하냐고……. 세원 씨가 나랑 데이트하고 싶다고?

[하빈아? 김하빈?]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당연한 거 아냐?]

“저도요!”

좋다고 소리치자 세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신났나……. 뻘쭘해진 하빈이 이불을 잡아 뜯으며 소리 없이 좋아하고 있는데 아쉬운 말이 들려왔다.

[이번에 쉬는 날은 친구랑 놀기로 했다며. 다음에 놀아야겠네.]

“아, 근데, 어……. 세원 씨가 바쁘니까 저는 그것 때문에…….”

[나? 너한테 맞추면 되지.]

“진짜요?”

[그럼.]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하빈이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붙여 놓은 제 근무 일정을 확인하며 세원에게 재잘거렸다.

아무리 봐도 제일 빠른 날이 내일 모렌데 정운과의 약속을 또 미루자니 양심이 없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세원을 못 봤으니…….

“친구한테 다음에 보자고 말할까요?”

하빈의 말에 세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어.]

그의 말은 또 잘 듣는 하빈이었다. 무슨 영화를 보고 싶냐 묻자 자신이 예매하겠다며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오라는 숙제를 냈다. 숙제라니, 귀엽다……. 하빈이 속으로 생각하며 좋다고 신나서 대답했다. 정운과의 약속은 이렇게 또 파토가 나고 말았다.

세원과 긴 통화가 끝나고 근무 일정을)다시 확인하자 내일은 다른 알바생과 함께 근무하는 날이었다. 정운과 함께 근무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얼굴을 보고 말했다면 한 대 맞았을지도…….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정운에게 전화하자 그는 단박에 눈치를 챈 듯 짜증부터 내며 전화를 받았다.

[아 왜!]

“……미안.”

[너 또 약속 취소하려고 그러지!]

“어떻게 알았냐…….”

[이 밤에 전화할 일이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냐?]

“아, 진짜 미안!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넌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돼. 아직도 친구 해 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

“감사합니다, 정운님.”

잔뜩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세원을 볼 생각에 신이 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세원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떠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내일은 왜 존재하는 거지? 내일이 없어야 빨리 세원 씨를 보는 건데! 울컥 치미는 화에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던 하빈이 시간을 보고 얌전히 누워 중얼거렸다.

“열두 시 넘었으니 내일 본다…….”

* * *

오랜만에 온 영화관은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아기를 데리고 온 가족들도 눈에 들어왔다. 하빈은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옷매무새를 예쁘게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봤다. 세원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에, 무엇보다 그는 후광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 세원과 사귀고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하빈이 싱글벙글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중,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원인가 싶어 해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자 덩치가 산만 한, 처음 보는 알파 한 명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딱 봐도 이상한 모습에 한 발짝 물러나자 알파는 따라서 한 발짝 다가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묻자 그는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하빈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제, 제 스타일인데 번호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아, 잠깐만요…….”

손을 빼내려 해 봤지만 단단히 붙잡힌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빈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젓자 알파는 한 번만 봐달라며 손에 들린 핸드폰을 뺏어 가려 힘을 줬다. 하지 말라고요! 소리쳤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짜증나게 왜 이래요?”

한 마디 욕이라도 내뱉으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하빈을 끌어안고 손을 뻗어 알파의 손목을 확 붙잡았다. 어찌나 손아귀 힘이 강했던지, 손목을 붙들린 알파가 비명을 지르며 하빈의 손을 놓았다.

하빈이 풀려나기 무섭게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원의 페로몬 향기가 제 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파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세원을 노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꼬리를 내렸다. 세원도 적잖이 화가 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이어지고 알파가 꽁지 빠지게 도망쳐 버리자 하빈은 기가 살아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욕하려고 했는데!”

“그랬어?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얼굴을 붙잡고 요리조리 살피는 세원에 생긋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그는 하빈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행이라며 등을 토닥였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큰일이네.”

“세원 씨만 할까…….”

“내가?”

“네에.”

제 눈에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세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티켓을 내보였다.

“제가 팝콘 살까요?”

“됐어.”

“왜요!”

“내가 늦었으니까 팝콘도 사 줄게. 뭐 먹을래?”

영화도 팝콘도 세원의 카드로 해결하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오자 받기만 했다는 생각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빈이 슬쩍 세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세원이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오자 하빈이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이따가 밥 사 줄게요.”

“밥? 뭐 사 줄 건데?”

“음……. 뭐 먹고 싶은데요?”

“글쎄.”

세원의 웃는 얼굴이 가까웠다. 하빈이 빤히 바라보다 그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멍하니 쳐다보다 얼굴을 붙잡고 급하게 입술을 가져왔다. 진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주변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고요했다.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팝콘을 먹다 그대로 손이 멈춘 채 영화에 집중할 때도 있었고 중요한 장면이 지나가면 다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봐서일까, 기대했던 그 이상이었다. 힐끗 옆을 돌아보자 세원은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자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 안 봐요?”

“보고 있어.”

“안 보는 것 같은데…….”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세원은 얼른 영화나 보라며 제 볼을 콕콕 찔러 왔다. 하빈은 다시 영화에 집중한 채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세원은 한참 동안 하빈을 구경했다.

“재미있었어?”

“네. 재미없었어요?”

“나도 재미있었어.”

“근데 왜 제대로 안 봤어요?”

“봤는데.”

“무슨 내용인데요?”

“뭐……. 주인공이 이기는 내용이겠지.”

대충 대답하는 세원에 하빈이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손등을 탁 때리고 소리쳤다.

“거봐요! 제대로 안 봤네!”

“너 보는 게 더 재밌어서.”

“내가 뭐가 재밌다고.”

“아주 영화에 푹 빠져서 표정이 너무 재밌던데.”

“으이씨…….”

놀리는 말에 손을 홱 놓고 앞서가자 세원이 바짝 따라오며 다시 손을 붙잡았다. 삐졌어? 묻는 말에 하빈은 놔요! 하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단단히 잡힌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밥 사 준다며. 세원의 말에 하빈이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났어요?”

“비싼 거 사줘.”

“비싼 거요? 세원 씨한테 비싼 건 우리 집 팔아도 못 사 주는데…….”

진지한 하빈의 대답에 세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하빈의 볼을 꼬집었다.

“아…… 귀여워 죽겠다.”

“아파요!”

“귀여워.”

“아프다니까!”

하빈이 투정을 부렸지만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장난이었어.”

“장난 같지 않았는데…….”

“내가 사 줄게. 뭐 먹을래?”

“저도 비싼 거.”

“그래, 나도 집 팔아서 사 줄게.”

“세원 씨 집 팔아서 사 주는 거면 진짜 비싼 거겠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이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세원 씨가 이런 것도 먹어요?”

저녁을 먹자며 데려온 곳은 웬 골목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치킨집이었다. 하빈이 세원과 치킨집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자, 세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취해 보였다.

머뭇거리며 들어선 가게 안에는) 치킨 튀기는 냄새가 가득했고, 작은 테이블 몇 개와 오픈 주방이 보였다.

“먹지, 그럼. 내가 친구랑 가끔 오는 곳인데 너랑도 오고 싶어서.”

“나랑도요?”

“어.”

세원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자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익숙하게 인사를 하며 메뉴판을 내려놨다.

“먹던 대로 줘. 술은 됐고 콜라로.”

“오오, 이쪽은 애인?”

호들갑스런 반응에 하빈은 뻘쭘한 얼굴로 세원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세원이 그런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 애인.”

헉, 애인이래……. 하빈의 얼굴에 광대가 뽈록해질 정도로 진한 웃음이 피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모습을 감추려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고개를 푹 숙이자 남자는 예쁘게 생겼네, 하며 하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들었어요?”

“뭐가?”

“예쁘게 생겼대요.”

헤죽 웃는 하빈에 세원은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영 시원찮은 그의 반응에 금세 축 가라앉은 하빈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냅킨을 죽죽 잡아 뜯으며 세원을 흘겨봤다. 여전히 메뉴판을 읽고 있었다. 주문도 했으면서 뭐 그리 볼 게 많다고…….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네에. 없어요.”

세원의 눈길이 닿는 느낌에 하빈이 눈을 홉뜨고 그를 바라봤다. 냅킨을 휙 내던지자 그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봤다.

“왜 갑자기 삐졌어?”

모르겠다는 눈치에 하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할 일도 없이 이것저것 누르고 있는데, 가만히 기다릴 것만 같았던 세원이 주저 없이 하빈의 핸드폰을 확 빼앗아 들고 눈을 마주한 채 다시 물었다.

“왜 그러는데?”

“내, 내놔요.”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려 주면.”

“그냥 별거 아닌데…….”

다시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제 말에 관심이 없어 보여 삐졌다니 애도 아니고. 한숨을 푹 내쉬자 세원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정말 무슨 일이 있냐며 하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뭔지 말을 해 줘야 걱정을 안 하지.”

“어, 그러니까, 세원 씨가 자꾸 딴 것만 보니까…….”

뭐?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세원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하빈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테이블을 벗어났다.

아이씨, 이게 뭐야……. 너무 애처럼 군 거 아냐? 부끄러운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았다.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눈가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세원은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쪼르르 다가가 그를 부르려는데 다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하빈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세원은 핸드폰을 넘겨주지 않았다.

“응? 전화…….”

“안 받아도 될 것 같은데.”

“누군데요?”

“네 친구.”

“아아, 윤정운이요?”

“어. 얜 왜 자꾸 전화하는데?”

“심심한가 봐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자 바로 치킨이 나왔다. 하빈은 세원을 슬쩍 바라보다 콜라를 따랐다. 보글보글 올라온 거품이 잔 끝까지 차올랐다. 호로록 음료를 마시고 있는 내내 세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제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어? 아니…….”

신경 쓰여서. 이어진 말에 하빈이 눈을 껌뻑이다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걔 그냥 같이 알바하는 앤데…….”

“많이 친한 친구야?”

“일하는 곳에 동갑인 애들이 얼마 없어서 친하긴 한데 그렇다고 엄청 친한 건 아니에요.”

으쓱이며 대답하자 세원은 알겠다며 그제야 핸드폰을 돌려줬다. 화면에는 왜 전화를 받지 않냐며 짜증 가득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몇 마디 답장을 해 주고 고개를 들자 세원이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아냐, 얼른 먹어.”

세원은 웃으며 하빈 쪽으로 치킨을 밀어 주고는 생각에 잠긴 듯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하빈도 치킨을 뜯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넋을 놓고 있길래.”

“아니, 세원 씨가 말이 없길래…….”

하빈이 뜯던 치킨도 내려놓고 세원을 올려다봤다. 그랬어?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뻗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다음에 놀러 갈래?”

“어디로요?”

“글쎄. 해외도 좋고, 아니면 국내도 좋고.”

“해외 가 보고 싶은데 돈도 없고 여권도 없어요.”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턱을 괴고 쳐다보던 세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권부터 만들어.”

“돈은요?”

“나 돈 많아.”

“세원 씨만 돈 쓰면 좀 그런데…….”

웅얼거리며 치킨을 쭉 뜯자 세원은 뭐가 어떻냐며 대꾸했다.

“여권 나오기 전에 국내 여행 한번 갔다 올까?”

“어디로요?”

“부산이나 뭐, 그런 곳 어때?”

“부산! 저 부산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하빈이 고개를 번쩍 들며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좋냐며 날짜를 잡는 세원에 하빈은 오프인 날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당장에라도 계획을 짤 기세였다.

여행이라니. 자신의 삶에는 여행을 다닐 만큼 시간적, 금전적, 그리고 심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세원의 제안이 더욱 기대가 되었고, 하빈의 마음이 잔뜩 들떠 요동쳤다.

살면서 형하고도 여행을 가 본 적 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하빈이 세원을 쳐다봤다. 그는 핸드폰으로 부산에 가서 뭘 할지 찾아보는 중이었다.

“있잖아요.”

“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우리 형은 왜 만나고 싶다고 한 거예요?”

세원이 꼭 만나고 싶다고 했던 만큼 하빈도 꼭 알고 싶었다. 어째서 만나고 싶다 했는지.

하빈의 물음에 세원은 가만히 하빈의 눈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하빈도 턱을 괸 채로 그를 마주했다. 한참 정적이 흐르고 하빈이 포기했다는 듯이 몸을 일으킬 때쯤이 되어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바람피운 건지 궁금해서.”

“네?”

“나랑 사귀다 헤어지기 전에, 지금 결혼한 상대랑 바람피웠던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지.”

“그럴 리가 없는데…….”

“넌 김지환을 믿어?”

“네? 네, 믿죠……. 형이니까…….”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원은 그저 작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바람을 피웠다니. 바로 결혼한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저 마음이 급해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원의 말대로 사귀던 중 바람을 피웠다면 교제 기간도 그리 짧지 않을 거고, 빨리 결혼한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빈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자 세원이 볼을 톡톡 건드리며 괜찮냐 물어 왔다.

“아, 그냥 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나도 추측일 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제가 나중에 형한테 물어볼게요.”

“아냐, 됐어. 신경 안 쓰기로 했어.”

“……왜요?”

“별로 안 중요하거든.”

세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콜라를 한 모금 넘겼다. 그 모습에 하빈이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고 싶은데……. 한참 눈치를 보던 하빈이 슬쩍 입을 열었다.

“왜 안 중요한데요?”

“응?”

“왜 안 중요해졌어요? 왜 신경 안 쓰기로 했는데요?”

“그런 게 왜 궁금해?”

“그냥…….”

자신은 세원의 모든 게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등등 전부 다. 좋아하면 원래 이런 건가? 그에 대한 관심이 끊이질 않았다. 종일 보고 있어도 관심이 갔고 낮에 내내 연락을 해도 밤이면 또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세원을 만나고 있는 오늘도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내일 출근만 아니었어도 밤새 같이 있는 건데…….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원은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더 신경 쓰기로 했으니까.”

“음?”

“김지환한테 신경 쓸 시간에 너랑 더 만나려고.”

심장에 콱 박혀 드는 세원의 말에 하빈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저렇게 맘에 드는 말만 하냐……. 또다시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형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 하빈이 떠보듯 세원에게 물었다.

“그럼 형한테 관심 없다는 말이네요?”

“내가 김지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어?”

“아니, 계속 만나고 싶다고 해서…….”

“처음부터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보네, 완전히.”

놀리듯 하는 말에 하빈이 발끈해 몸을 들썩였다.

지환과의 문제도 이렇게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환은 세원을 달갑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하빈은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지만 지금 당장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행복을 누려야지.

* * *

잘 들어가라는 인사는 십 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끌어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모르는 두 사람은 사람이 지나갈 때면 슬쩍 멀어졌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다시 꼭 붙어 입술을 쪽쪽대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중얼거리면서도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 가득했다.

“얼른 가서 쉬어.”

“조금만 더…….”

하빈이 놓아주지 않자 세원은 굳이 떨어트리지 않은 채 하빈을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또 한참 시간이 흘러갔다. 밤이 깊어가고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하빈은 억지로 세원에게서 떨어져 나와 손을 흔들었다.

“잘 들어가.”

“네에.”

“씻고 전화해.”

“네.”

자리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가라며 세원이 등을 떠밀었다. 억지로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며 일 층 현관 안으로 들어온 하빈이 몇 계단을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세원은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올라온 하빈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눈앞에는, 지환이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한 하빈이 손잡이를 붙잡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뭐야?”

“뭐긴 뭐야, 네 형이다.”

“여기 왜 있어?”

“휴일이니까 왔더니 뭐 하는 거냐?”

“아니, 나는, 그게, 그러니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지환은 뒤를 졸졸 쫓아오며 세원과의 관계를 캐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지만 들어먹지 않는 통에 하빈은 결국 몸을 홱 돌려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사귀기로 했어!”

“……진짜로?”

“어!”

“걔가 너 좋아한대?”

“그래!”

“좋았어. 그대로 꼬시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뻥 차서 엿 먹이는 거지.”

차 버리라며 한껏 신이 나 있는 모습에 이상하게 열이 받은 하빈이 불만스런 어조로 저녁에 세원과 했던 이야기를 꺼내 물었다.

“근데 형, 세원 씨랑 사귀면서 바람 핀 거야?”

“뭐?”

“아니, 나보고 묻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버럭 소리치는 지환에 놀란 하빈이 큰 눈을 껌뻑이며 딸꾹질을 했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잔뜩 얼어붙어 있자 금세 풀어진 지환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내젓고 자리를 떠 버렸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형부랑은 언제 만났는데?”

“몰라도 돼.”

“세원 씨랑은 소개로 만났다며. 형부랑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응?”

자꾸 들러붙자 지환이 얼른 씻기나 하라며 하빈을 욕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설마 진짜 바람피운 건가……. 형을 의심하고 싶지 않은데,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만약 세원 씨랑 사귀다 형부랑 바람을 피운 거라면 형 편은 못 들어 줘. 세원 씨 편들어 줄 거야.

하필이면 형이 있어 세원 씨랑 통화하기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평소라면 형이 와서 좋다고 신이 났을 텐데. 정말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구나……. 어쩐지 지환에게도 미안해지는 하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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