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금 더 가까워지기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밀려들어 오는 주문을 받아 내고 있었다. 단체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아이를 데려온 가족들로 가게가 붐볐다. 주말은 항상 이렇게 사람으로 가득했다. 정신없이 음료를 만들던 하빈이 다른 알바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디저트를 준비하러 몸을 돌렸다.
“여기요.”
“네?”
“물티슈 좀 주세요.”
“아, 잠시만요.”
아기를 품에 안은 남자 오메가 손님의 부탁에 하빈이 허둥지둥 서랍을 뒤적여 물티슈 두어 개를 꺼내 내밀었다. 아기는 해맑게 웃으며 하빈에게 손을 뻗었다. 예쁘다.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아기도 덩달아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제 엄마 품에 안겨 들었다.
“감사합니다.”
“네. 또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엄마랑 많이 닮았네. 아빠는 누굴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데 오메가 남자의 뒤로 조금 더 키가 큰 알파 한 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갈까? 묻는 다정한 세 가족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거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에 집중하는 손이 바빠졌다. 한창 바쁠 시간이 지나가자 가게가 텅 비어 버렸다.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금이 그나마 한가하게 쉴 수 있는 때였다.
카운터 안쪽에 놓인 작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자 세원과 정운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하빈은 우선 세원의 연락부터 확인했다. 일은 잘하고 있냐는 물음에 막 답장을 쓰려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형.”
“응?”
함께 일하는 알바생 성우였다.
“오늘 끝나고 한잔할래?”
“오늘?”
“응. 형 내일 오후 출근이잖아. 나 쉬니까 같이 놀자.”
그럴까, 고민하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에 놀자. 오늘은 누구 만나야 해서 안 되겠다.”
“아, 그래? 알겠어.”
순순히 돌아서는 성우를 바라보다 하빈이 서둘러 세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빈이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대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잉 진동이 울렸다.
전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본 하빈이 후다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어.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요…….”
[근데 어쩐 일로 먼저 만나잔 얘기를 다 했어?]
“그, 그냥,”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하빈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세원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보고 싶었냐는 말을 먼저 꺼내 왔다.
“네? 아, 네에…….”
[대답이 영 시원찮은데.]
“그런 거 아닌데!”
[그럼 뭔데? 진짜 보고 싶어?]
“네. 보, 보고 싶어요.”
[나도. 네가 먼저 만나자고 해서 기분 좋다. 지금 뭐 하고 있어?]
“저 지금 일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통화 못 하는 건가?]
끊으려는 기색에 하빈이 서둘러 아니라 대답하고 창밖을 살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간 거리는 한가했고 가게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아뇨! 지금은 손님 없는 시간이에요.”
[다행이네.]
“세원 씨는 뭐 하고 있어요?”
[나는 출장 갔다가 아침에 집에 들어와서 쉬고 있었어.]
“그렇구나…….”
[왜?]
그의 물음에 하빈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꽉 붙잡은 채로 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
“혹시 일 끝나면 만날 수 있어요?”
거절하면 어떡하지? 찰나 동안에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겁먹은 하빈에게 세원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만날 수 있지. 몇 시에 어디로 데리러 갈까?]
“저 오늘은 일이 좀 늦게 끝나서, 같이 알바하는 동생한테 먼저 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편한 대로 해.]
세원의 허락이 떨어졌다. 바로 다시 전화하겠다 말한 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스태프 룸으로 뛰어들어갔다.
“야, 이성우!”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자 그는 구석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몰래 까먹고 있었다.
“성우야!”
“어?”
“너 오늘 마감 혼자 해도 돼?”
“혼자? 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조금 빨리 오겠다고 해서……. 형이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로?”
“진짜.”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을 하자 성우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고 흔들었다. 그리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빼앗아 먹은 하빈이 투덜거리는 성우를 데리고 나와 다시 손님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아홉 시 반이 넘어서자 손님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마감이 다가오면 손님이 더 많아지는 거지? 하빈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믹서기를 돌려 주문받은 메뉴를 만들었다. 찬물에 계속 손을 담그고 있어 발갛게 튼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 아프다…….”
중얼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나가는 건지 들어오는 건지, 인사를 하려 돌아보자 세미 정장을 잘 차려입은 세원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게 안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오늘따라 더 멋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울상이 된 하빈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제 마음도 모르는 성우는 해맑게 웃으며 세원을 반겼다. 세원 역시 옅게 웃으며 카운터로 다가와 하빈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김하빈 씨 데리러 왔는데 언제쯤 퇴근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하빈이 형 열 시쯤 끝날 것 같아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세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하빈은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잘생긴 건 알아 가지고…….
“딸기 스무디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영업용 미소와 함께 손님에게 음료를 건넨 하빈이 세원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하빈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다 몸을 홱 돌려 버렸다.
“형 지금 퇴근해. 저 사람이 기다리잖아.”
“열 시까지는 하고 갈게.”
“됐어. 이제 서너 명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냥 가.”
“진짜?”
“어. 대신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알았어!”
하빈이 성우를 한번 꼭 안아 주고 스태프 룸으로 쏙 들어왔다. 밖에서는 분명 사람들이 세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가서 세원 씨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데……. 세원 씨 내 건데…….
마음이 급한데 유니폼 단추도 잘 풀리지 않았다. 아이씨! 하빈이 짜증스럽게 유니폼을 벗어 사물함에 대충 쑤셔 넣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웬 오메가 하나가 세원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고 는 광경이었다. 저게 뭐야? 인상을 확 찌푸리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오메가는 살살 눈웃음을 치며 세원에게 번호를 알려 달라 애교를 부렸다.
세원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바로 거절 안 하고? 하빈이 토라진 얼굴로 쿵쾅거리며 세원에게 다가갔다. 오메가는 힐끗 하빈을 보고 다시 조르듯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몸을 빼내는 세원의 행동에 닿지 못하고 멀어졌다.
“그냥 번호만 알려 주세요.”
“그쪽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래도…….”
관심 없다는데 왜 자꾸 치근덕거리고 난리야……. 중얼거리며 슬쩍 자리를 옮겨 세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오메가의 질투 어린 시선이 하빈을 향했다. 똑바로 눈을 마주한 하빈이 일부러 생긋 웃어 주고는 세원을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뭐 해요?”
“갈아입었어?”
“네.”
“갈까?”
“네.”
누가 봐도 질투가 가득한 표정에 세원은 제게 다가왔던 오메가와 하빈을 번갈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빠르게 앞서가는 하빈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빈은 투덜거리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미 열 시가 넘어 달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고, 거리에는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지, 하고 난처한 얼굴로 세원을 돌아봤다. 이대로 만나자마자 집에 가야 하나? 서운하고 아쉬워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가로등 밑에 서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자 세원이 다가와 하빈의 얼굴을 붙잡고 물었다. 하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세원은 다 알겠다는 듯이 하빈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가게에 사람 많더라. 힘들었지.”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자 세원이 하빈의 팔을 들어 제 허리를 감싸게 만들고 이번에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지금요?”
“어. 나는 내일 쉬는 날이라 상관없는데, 너는?”
“저는……. 저도 내일 오후 출근이라 괜찮아요!”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일단 차에 타자.”
세원이 하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쫄래쫄래 뒤를 따르는 하빈의 입꼬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피곤했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신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 갈까?”
“아무 데나 다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 어려운데.”
핸들을 꾹 붙잡고 고민하는 세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빈이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가 보고 싶은 곳 있는데…….”
“어딘데?”
말해도 되려나?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자 세원이 손을 뻗어 하빈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어디가 가고 싶은데. 다정한 목소리에 하빈이 고개를 기대 볼을 비비적거리며 눈을 감았다.
“고양이 같다.”
“저요?”
“어. 귀여워.”
뺨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올라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분위기가 조금씩 묘해지고 시선이 얽히며 하빈이 천천히 세원을 향해 몸을 숙이자, 귓가에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유혹하네.”
“……유혹한 거 아닌데.”
“유혹하고 있잖아.”
세원이 웃으며 하빈의 귀를 잡아당겼다.
“유혹한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그냥 본능적으로 막 유혹해? 타고났어?”
“아니라니까!”
“반말도 하고?”
“으이씽…….”
입을 꾹 다물고 몸을 홱 돌려 세원의 손을 뿌리쳤다.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데?”
“몰라요.”
“삐졌어?”
“안 삐졌어요.”
“넌 진짜 뭘 해도 다 귀여워.”
세원이 하빈의 목덜미를 확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으읍……. 밀고 들어오는 혀에 놀란 하빈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입안을 헤집는 혀를 느끼고 스르륵 눈을 감아 버렸다. 간간이 앓는 듯한 하빈의 콧소리가 들리며 키스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후으…….”
“자, 이제 어디 가고 싶은지 말해 봐.”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함은 사라지고 그저 기분이 좋아졌다. 이대로라면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빈이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세원 씨 집에 가 보고 싶어요.”
“어디? 내 집?”
“네에…….”
“맛있는 거 먹고 싶다며.”
“세원 씨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 되잖아요.”
당돌한 말에 세원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하빈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이야?”
“왜요?”
“이 오밤중에 알파 혼자 사는 집에 가자고?”
“우리가 뭐, 한두 번 잔 사이도 아니고…….”
“그거야 그런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그러니까, 하아…….”
하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세원을 쳐다봤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순수하게!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 순수하게 맛있는 거 먹자.”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쓰읍, 하며 세원을 가리킨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쳐다본 세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너야말로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저 이상한 생각 안 했어요!”
“아까도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
“결국에는 세원 씨가 했잖아요!”
“그래서 싫었어?”
“그, 그건 아니지만!”
“또 할까?”
“싫어요!”
“귀여워 죽겠네, 진짜.”
집으로 가는 내내 그는 장난을 치며 하빈을 놀려 댔다. 부끄러워서 하지 말라 소리쳤지만, 재미가 들린 세원은 귀여워서 하는 말이라며 계속해서 하빈의 볼을 건드렸다. 그렇게 알콩달콩한 시간이 이어졌다.
시가지를 벗어난 차는 고급 아파트가 몰려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곳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밖을 구경했다. 사람들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고 지나다니는 차들도 모두 고급 외제 차였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구나……. 세원을 힐끔 돌아보자 운전을 하던 그가 왜? 하고 물어 왔다.
“아니, 그냥요…….”
“뭐가 그냥인데?”
“동네가 엄청 좋아 보여서…….”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세원의 태도가 부러웠다.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하겠지. 집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엄청 넓겠지? 우리 집보다 얼마나 클까.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넋을 놓고 있는데 세원이 어서 내리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아, 아뇨!”
후다닥 세원의 뒤를 쫓아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카드키를 대고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자, 제 상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입을 떡 벌리고 세원과 집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얼른 들어와.”
먼저 실내화로 갈아신고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하빈이 자신의 집 거실 반만 한 신발장에 눈이 휘둥그레져 신발을 벗었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일단 집에 복도가 있는 것부터 생소했다.
현관과 바로 이어진 복도 벽에는 알 수 없는 꽃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참을 걷다 마침내 다다른 거실의 한쪽 구석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파트에 이층집이라고? 혼자 이렇게 큰 집에 살아? 하빈이 눈을 껌뻑이다 세원을 돌아봤다.
집안에는 온갖 최신 가전제품과 비싼 가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누군가 관리를 해주는 듯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난장판이었는데……. 하빈이 입술을 꾹 깨물고 두리번거리며 조금 더 집을 살폈다.
그사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며 뭘 먹고 싶냐 물어 왔다. 이제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떠오른 하빈이었다. 대기업 막내 아들이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준 덕분에 잊고 있던 터였다.
“김하빈?”
“네, 네?”
“왜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어.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아직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쭈뼛거리는 하빈에게 세원이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머뭇머뭇 다가가 소파 끄트머리에 슬쩍 엉덩이를 걸치는 순간 세원이 하빈의 허리를 감싸고 몸을 확 끌어당겼다. 품에 안긴 하빈의 얼굴 앞으로 세원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지금 만들어 먹기엔 너무 귀찮으니까. 시켜 먹어도 괜찮지?”
“네에…….”
얌전해진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세원에게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제 오만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빈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넓게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밑으로는 사람들과 차들이 어두운 거리를 밝히며 움직이고 있었다.
세원은 이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저 밑바닥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내가 정말 세원 씨를 만나도 될까? 내 주제에? 보잘것없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빈이 시무룩해 앉아 있자 세원이 힐끗 눈치를 살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피곤해?”
“아니요…….”
“집에 가고 싶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비교를 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는 것마저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같이 굴지 말아야지. 숨을 크게 내쉬고 세원을 돌아보자 그는 잔뜩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하빈의 이마를 짚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에요.”
“갑자기 그러니까 걱정되네.”
한 손으로 턱을 붙잡은 세원이 하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프면 말해, 집에 데려다 줄게. 그의 말에 하빈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목을 끌어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집에 가기 싫은데…….”
“싫다고?”
“네에.”
“왜?”
“세원 씨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하빈이 세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의 페로몬 향기가 느껴졌다. 잠시 안고 있던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겹쳤다. 하빈이 세원의 위로 올라타 안기자, 뜨겁고 커다란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분위기갸 야릇해졌다.
허리를 쓸어올리는 야릇한 손길에 하빈이 낮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으응, 하빈이 세원의 목을 앙 깨물자 머리 위에서 귀엽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하빈은 또 쪽쪽거리며 세원의 얼굴 여기저기로 입술을 가져갔다.
하빈의 몸을 지분대던 세원은 천천히 옷을 벗겨 하빈의 어깻죽지부터 시작해 가슴팍까지 잇자국을 내며 키스 마크를 새겨댔다. 새하얀 살결 위로 울긋불긋한 자국이 생겨났다. 그렇게 거친 숨결이 흩어졌다.
세원이 긴 손가락 끝으로 하빈의 유두를 살살 문지르자 하빈은 세원의 어깨에 쓰러지듯 기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유두를 꾹꾹 누르는 세원의 엄지에 온몸이 찌릿거렸다.
하빈이 움찔대며 세원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등을 토닥이며 반대쪽 손을 내려 엉덩이를 움켜쥐고 속삭였다. 다 벗자.
“네…….”
세원의 말대로 얌전히 옷을 벗은 하빈이 그의 앞에 서서 입술을 꾹 깨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원은 옷을 모두 차려입은 채 가만히 앉아 하빈의 벗은 몸을 주욱 훑어내리며 감상했다. 그의 시선이 제 몸 곳곳을 지나칠 때마다 흥분이 일었다.
“세원 씨.”
“응?”
“세원 씨도, 응?”
하빈의 재촉에 세원도 일어나 옷을 벗었다. 둘은 함께 거실 중간에서 맨몸을 비비적거리며 장난을 쳤다. 하빈이 잔뜩 발기한 세원의 페니스를 만지작거리자 그가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원은 하빈의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며 귓가에 야한 말을 속삭였다.
“벌써 젖었어?”
“아, 앙…….”
손가락 하나가 입구를 간지럽히며 들락날락 장난을 쳤다. 하빈이 몸을 배배 꼬아 대며 세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다시 쪽쪽거리고 몸을 더듬으며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점점 고조되는 흥분에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떼었다.
세원의 발기한 페니스가 꺼덕거리며 하빈을 찔렀다. 그 감촉에 하빈은 세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선단을 입에 물고 혀로 핥아 대며 기둥을 흔들자 세원이 하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 목소리가 좋아 하빈은 조금 더 깊게 제 입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점점 움직임이 빨라지자 세원이 하빈의 머리채를 붙잡고 조금 강하게 흔들며 눈을 맞췄다. 아직까진 버틸 만한 느낌에 하빈이 춥춥거리며 그의 페니스를 입에 담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한참 펠라티오를 하는데, 갑작스레 세원의 페니스가 입속을 빠져나갔다. 하빈이 세원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왜요?”
“입에 쌀 것 같아서.”
“해도 되는데…….”
“됐어.”
“그럼 얼른 넣어 줘요.”
당돌한 말에 세원이 하빈을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냅다 던져 버렸다.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이고 하빈이 재밌다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가지런히 깔려 있던 이불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재밌어? 묻는 그의 말에 하빈이 끄덕이며 다리를 벌렸다. 세원은 제 페니스를 살살 흔들며 다가와 하빈의 밑으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흐앙, 앗…….”
꾹꾹 안을 눌러 주자 하빈이 몸을 들썩이며 앙앙대기 시작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내려다보며 짙게 미소지었다.
“하빈아.”
“하으……. 네에…….”
“손으로만 해도 좋아?”
“세원 씨, 세원 씨 걸로 해 주세요.”
하빈이 팔을 뻗으며 세원에게 조르는 표정을 해 보였다. 야한 얼굴과 유혹하는 목소리에 세원이 작게 욕을 내뱉으며 하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입구에 페니스를 비비며 꾸욱 밀어 넣자 하빈의 숨이 턱 막혀 들었다.
“으, 흐아, 아흑, 아앙, 앗,”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는 세원에 하빈이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붙잡은 채 바들바들 떨며 그를 바라봤다. 마주한 세원의 눈에는 자신을 집어삼킬 듯 욕망이 가득했다.)
미치도록 황홀해 당장에라도 가 버릴 것 같았다. 아으, 읏! 깊숙이 느끼는 곳을 찔러 오는 세원에 하빈이 교성을 내지르며 안을 바짝 조였다. 세원이 하빈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좁은 안쪽을 억지로 벌리듯 퍽퍽 쳐 올려 댔다.
“하앙, 아, 앙! 아흐, 흣!”
세원은 말없이 계속해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안을 파고들었다. 흐읏, 흐으, 으응……. 하빈의 신음이 점점 커졌다. 갑자기 세원이 쑥 빠져나가 하빈의 몸을 뒤집어 엉덩이를 벌렸다. 이불에 머리를 콕 처박고 엎드린 하빈이 몸을 들썩이며 숨을 들이켰다.
세원이 하빈의 등 뒤로 몸을 겹쳐 밋밋한 가슴을 움켜쥐고는 거칠게 주물럭거리며 귓바퀴를 깨물었다. 으흣! 온몸에 소름이 끼칠 만큼 아찔했다. 한참 정신을 놓고 흔들리며 쾌락에 젖어 있는 하빈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은가 보네.”
네, 좋아요……. 하빈이 중얼거리며 히끅였다. 굵은 페니스가 안을 자극하는 느낌이 좋았다.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던 세원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빠르게 허리 짓을 이어갔다.
찔꺽찔꺽 소리가 방을 울리고 애액과 정액이 뒤섞인 액체가 하빈의 다리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힘든 자세에 끙끙거리면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황홀했다.
“하아, 흐응, 읏, 세원 씨, 세원 씨이…….”
“힘들어?”
“응, 으응, 힘들어요.”
투정을 부리자 다시 자세를 바꿔 준 세원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하빈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그의 입술에 하빈이 다급하게 목을 끌어안고 쪽쪽이며 가지 말라 붙잡았다. 하빈의 애교 아닌 애교에 세원은 멈칫하다 웃음을 보이며 그대로 푹 엎어졌다.
“샤워할까?”
세원의 물음에 하빈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이 훌쩍 들려 욕실로 옮겨졌다. 으리으리한 욕실 내부에 놀라는 것도 잠시, 욕조 안으로 들어간 하빈은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노곤노곤 몸이 풀려 눈을 감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좋아?”
“네…….”
축 늘어져 있는 와중에도 몸을 더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힐끔 눈을 떠 옆을 쳐다보자 따라 들어온 세원이 제 몸을 끌어안고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어쩐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예쁘지?”
“몰라요.”
고개를 돌리고 슬쩍 시선을 피하며 하빈도 세원의 등을 만지작거렸다. 판판한 근육이 느껴졌다. 세원은 하빈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향기를 맡으며 다시 키스 마크를 새겼다.
이렇게 있으니까 연인 같네. 하빈이 생각했다.
세원과 사귈 수 있을까? 사귀어도 될까? 아까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틈을 타 세원의 손이 은밀하게 하빈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앙……. 흣, 으응…….”
신음이 깊어지고 세원의 손이 농밀하게 하빈의 구멍을 헤집었다. 그의 손이 들어오기 편하도록 슬쩍 자세를 바꿔 무릎을 세우자 손가락이 하나둘 늘어나고, 세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찰박거렸다.
격해진 손짓에 허리가 들썩이고 욕실 안은 하빈의 신음으로 가득했다. 세원은 절정에 다다르는 하빈의 표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느슨하게 풀린 얼굴에는 색기가 가득했다. 세원은 웃으며 하빈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하앙, 흐, 아앙, 앗, 후으, 읏,”
“넣어 줄까?”
“네, 네에, 아흑!”
안을 콱 찌르는 손가락에 하빈이 다급하게 세원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가 버릴 뻔했어……. 세원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삼 부끄러워 그의 품에 안겨 들자 세원이 자신을 마주 안고 천천히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페니스를 삽입했다. 서서히 그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출렁이며 욕조 밖에 흘러넘치고 하빈은 몸을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가슴을 핥다가도 키스 마크를 새겨 대며 제 마음껏 하빈의 몸을 집어삼켰다. 쾌락에 젖은 하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허리를 흔들고 또 흔들렸다.
“흐, 아앙, 앗!”
품에 안긴 채 들썩이던 몸이 공중에 붕 뜨자 하빈이 놀라 세원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세원은 하빈을 들어 벽으로 밀치고 강하게 허리 짓을 이어 갔다. 굵은 페니스가 내벽을 긁어내릴 때마다 아찔한 자극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욕조를 붙잡고 뒤에서 박아 넣기까지 한 세원의 몸짓에 견디지 못한 하빈이 주저앉았다. 놀란 그가 하빈을 번쩍 안아 들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하빈은 울상을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힘들어요.”
“조금 쉴까?”
“네…….”
세원이 손에 바디워시를 짜내며 말했다.
“씻겨 줄게.”
“괜찮은데.”
“여기 앉아 봐.”
하빈을 욕조에 앉혀 몸 곳곳을 깨끗하게 닦아 주던 세원이 입을 맞추며 하빈을 끌어안았다. 미끌거리는 몸이 마주 닿자 곳곳이 간지러웠다. 하빈이 꿈틀거리며 피하려 하는데 세원은 그런 하빈을 놓아 주지 않고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다.
“아, 힘들다니까요!”
“맞다, 그랬지.”
수건으로 몸까지 닦아 준 세원이 하빈을 다시 번쩍 안아 들고 다른 방으로 들어와 깨끗한 시트 위에 하빈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느낌 좋다……. 부드러운 감촉에 허우적거리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원이 웃으며 다가와 입을 맞췄다.
“무슨 생각해?”
그리고는 옆에 누워 하빈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하빈은 우물쭈물 망설이다 고개를 젓고 품을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해?”
“네…….”
“배는 안 고프고?”
묻는 말에 하빈이 세원의 가슴팍을 콱 깨물며 말했다.
“세원 씨 잡아먹어서 괜찮아요.”
“네가 나 잡아먹은 거야?”
“네.”
“내가 널 잡아먹은 게 아니라?”
“네!”
당돌한 대답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네, 김하빈.”
“세원 씨도…….”
“응?”
하빈이 세원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세원 씨도 귀여운데……. 중얼거리자 세원이 눈을 깜빡이다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그래? 하고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우리 안 하기로 해 놓고 해 버렸다…….”
하빈이 중얼거리자 세원이 볼을 톡톡 두드리며 하빈의 탓을 했다.
“그러게 누가 유혹하래?”
“내가 언제 유혹했어요!”
“다 네가 유혹했잖아.”
“안 했어요!”
아냐, 네가 했어. 세원이 하빈의 코를 살짝 잡아 흔들며 장난을 쳤다. 하빈이 하지 말라고 칭얼거리며 손을 떼어 내자 세원이 다시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 모두 웃음이 터져 버렸다. 다정한 한때였다. 밤은 더욱 깊어 갔다.
* * *
다음 날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세원의 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앞에 음식이 놓이고 하빈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세원을 바라봤다. 그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며 연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샐러드와 함께 나온 토마토를 포크로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전화를 받던 세원이 먼저 먹으라며 접시를 앞으로 밀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토스트를 잘라 입으로 가져왔다. 무슨 일이지……. 들리는 이야기로는 어머니와 통하를 하는 듯 했다.
“기다렸지, 미안해.”
“아니에요. 세원 씨도 드세요.”
미리 잘라 둔 소세지를 콕 찍어 세원에게 내밀자 그는 웃으며 입을 벌렸다.
“맛있네. 너 많이 먹어.”
“네. 근데 무슨 전화였어요?”
“아, 어머니. 별일 아니야.”
가족 일이라면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하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달걀 프라이 한 조각과 함께 샐러드를 쿡 찍어 먹었다. 입안에는 발사믹 소스 맛이 가득했다. 엄청 맛있네. 다시 나이프를 들어 토스트를 썰고 있는데 세원이 말을 걸었다.
“하나 더 시켜 줘?”
“아뇨, 이거면 됐어요. 세원 씨 더 먹고 싶으면 시켜요.”
“나도 됐어.”
별로 먹지도 않았으면서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모습에 하빈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이 썰어 놓은 음식들을 열심히 그의 입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세원이 괜찮다며 웃었지만 하빈은 얼른 먹으라며 손을 흔들었다.
“팔 떨어진다, 빨리요.”
“내가 먹을게.”
“먹여 준다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재촉에 못 이겨 열심히 받아먹은 세원이 배가 부르다 말하고 나서야 하빈은 만족한 모습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둘은 오후 두 시쯤, 하빈이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빈의 집으로 향했다.
“이따 일 잘하고, 연락해.”
세원이 하빈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네. 얼른 가서 쉬세요.”
“가기 싫다.”
“이러다 나 출근 못하는데…….”
“안 하면 안 돼?”
“그러다 잘려요.”
“우리 회사에 취직시켜 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빈이 작게 웃으며 세원을 밀어냈지만 그는 다시 하빈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힘이 쭉 빠졌다. 다시 그 품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고 먼저 현관 안으로 들어온 하빈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세원은 여전히 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있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흔들어 보이자 세원이 웃으며 얼른 올라가라 손짓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집 안에서 티비 소리가 들려왔다. 형인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자 지환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형 언제 왔어?”
“아침 일찍. 근데 넌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아침부터 없더라?”
“나? 어, 그게…….”
바짝 다가와 꼬치꼬치 캐묻는 지환에 애써 시선을 피하며 신발을 벗던 하빈이 말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 좀 갔다 왔어. 근데 그 옷 내 거 아냐?”
“좀 입으면 어때서. 어디 갔다 왔냐고.”
“으응?”
“빨리 와서 앉아 봐. 너한테서 강세원 페로몬 향 나는데, 걔랑 있었어?”
날카로운 질문에 하빈이 얼어붙어 지환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날 밤부터 지금까지 함께 있어 그의 페로몬이 몸에 배어 있던 모양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하빈의 모습에 지환은 맞네, 맞아.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빈은 그에 울컥해 소리쳤다.
“뭐가 어때서!”
“니들 사귀는 거 아니라면서 그렇게 밤새 만나고 돌아다녀? 이제는 사귀냐?”
“사, 사귀어야만 같이 놀아? 우리 그 뭐야, 그거, 썸! 썸타는 거야!”
“지랄하네.”
“아, 왜에!”
“혼자만 썸타는 거 아냐? 걘 그냥 너랑 엔조이 아니고?”
“아냐! 비켜!”
냉정한 반응에 하빈이 잔뜩 삐진 얼굴로 방에 들어가려 하자 지환이 다가와 손목을 확 붙잡고 돌려세웠다. 지환은 하빈과 눈을 맞추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사인데.”
“……모, 몰라.”
“몰라?”
지환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했다. 움츠러든 하빈의 어깨가 평소보다 유독 작아 보였다.
“그, 그래도 우리 엄청 잘 만나고 있는데…….”
“뭘 엄청 잘 만나는데.”
“그야 데이트도 하고…….”
데이트라 해 봤자 여기저기 밥 먹으러 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하빈이 세원의 생각을 하며 싱글벙글 입꼬리가 올라가자 지환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지환이 하빈을 쥐어박은 뒤 식탁으로 끌어다 앉혔다. 지환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말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왜, 왜에.”
“내가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더라…….”
“뭐라고 했더라? 장난하냐?”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눈치를 살피자 볼을 주욱 잡아 늘리며 지환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꼬시라고 했지, 누가 넘어가라고 했어?”
“안 넘어갔어! 아파!”
“넌 좀 아파야 돼!”
“아, 진짜 아프다니까아!”
“그럼 아프라고 하지 좋으라고 하냐?”
볼을 잡아당기는 지환의 손을 떼어 내자 이번엔 양손으로 볼을 꼬집었다. 하빈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손이 떨어져 나가고 하빈은 아픈 뺨을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넌 진짜 멍청이냐?”
“내가 왜!”
“걔랑 왜 진도를 못 빼?”
“진도를 못 빼다니! 나 이미,”
잠시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지환은 그런 하빈을 빤히 바라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뭐.”
“이, 이미 다 진도 나갔는데…….”
“그러니까 멍청이라는 거 아냐. 사귀지도 않는데 왜 그런 진도는 다 빼고 지랄이야.”
“그럴 수도 있지!”
“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언제 사귀는 건데?”
“모른다니까! 재촉하지 마.”
“재촉 안 하게 생겼어? 이러다 평생 썸만 타고 섹스 파트너만 하다 헤어지게?”
“그런 거 아니야!”
하빈이 발끈해 소리쳤다. 지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신이 정말 그런 것 같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온했던 마음에 불안이 요동쳤다.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오메가라 그냥 심심할 때 만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빈이 울상이 되자 지환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조만간 꼭 사귀자고 해.”
“내가 먼저?”
“누가 먼저인 게 뭐가 문제야.”
“……싫다고 하면?”
“야, 그러면 그냥 끝인 거야. 그만 만나.”
“형은 나쁜 새끼야.”
“뭐? 너 이 새끼가, 내가 왜 나빠?”
“형 때문에 세원 씨 만나기 시작했는데 날 차이게 만들다니…….”
“무슨 벌써 차일 생각을 해. 강세원이랑 사귀면 되지.”
“내 마음이랑 세원 씨 마음이랑 같냐!”
“너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됐다, 됐어. 백 번 말해도 해 봐야 알지. 그냥 싫다면 거기서 끝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툭 내뱉는 말에 하빈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제 마음은 이제 세원을 보기만 해도, 그리고 생각하기만 해도 미친 것처럼 심장이 뛸 만큼 커져 버렸는데.
알겠냐며 대답을 재촉하는 지환에 하빈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겁이 났다. 그가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까 봐, 자신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봐.
“근데 내가 봤을 때 걔 너 백 퍼센트 좋아해.”
이어진 지환의 말에 하빈이 떨리는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들려오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걔가 얼마나 돌부처였는데. 아, 물론 그 당시에 약혼하기 싫다고 핑곗거리로 나랑 사귄 거라 우리가 애정이 별로 없긴 했지만.”
“형은 세원 씨 안 좋아했어?”
“난 걔 돈 많아서 좋아했는데.”
“……세원 씨는? 세원 씨는 형 안 좋아했어?”
“글쎄다. 나야 모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딴청을 부리는 모습에 하빈이 좀 더 말해 보라며 지환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뭐 재밌는 얘기라고 말을 해 보래.”
“궁금해, 빨리.”
“아, 별거 없다니까.”
“그래서 뭔데. 어떻게 만났는데.”
하빈이 팔짱을 끼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지환을 쳐다봤다.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눈빛에 헛웃음을 내뱉은 지환은 알겠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어.”
“형 아는 사람 누구?”
“나 그때 당시 일하던 회사 팀장님이 소개해 줬었어. 자기 친구라고.”
“아아…….”
“사람이 매너도 있고 꽤 괜찮았는데 알고 봤더니 약혼하기 싫어서 나랑 만난 거였더라?”
“뭐?”
“배신감에 헤어지자고 하려다가 나름대로 복수를 해 보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음……. 그냥 이런저런 일 있고 헤어졌어.”
“그게 뭐야.”
“그래서 강세원이 나 좋아했던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난 걔 좋아한 기억은 별로 없고, 사문 씨가 더 좋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과거가 있었구나. 근데 돈만 보고 좋아한 것도 딱히 좋은 건 아니지 않나? 하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형.”
“왜.”
다시 눈이 마주치고 하빈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세원 씨랑 진지하게 만나면…….”
“너 강세원 좋아하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형이 세원 씨가 나 좋아하는 것 같다며. 그럼 진지하게 만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허둥지둥 둘러대는 말에 지환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뭐. 애초에 꼬시라고 한 건 나였으니까 진지하게 연애는 해도 돼. 결혼만 안 하면 돼.”
“응?”
“결혼은 안 돼.”
“왜?”
“왜긴 왜야, 그 집안사람들하고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버티냐? 생각만 해도 무섭네.”
“그, 그런가…….”
“그렇지.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형 말 들어라.”
지환이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하빈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런 지환을 쳐다봤다. 결혼은 무슨,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이내 피식 웃으며 턱을 괸 하빈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수다를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