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데이트? (3/20)

3.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데이트?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집어 들자 세원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도 금세 하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너무 피곤해서 바로 쓰러질 것 같았는데 잠이 홀딱 깨 버렸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무어라 답장을 보낼지 고민하고 있는데 세원에게서 잘 자라는 메시지가 왔다.

“아, 안 자는데…….”

하빈이 시무룩해져 답장을 보내고 푹 엎어졌다. 씻지 말고 기다릴걸. 후회하며 베개에 머리를 콩콩 박던 중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벌떡 일어나 발신인을 확인하자, 애타게 기다리던 세원의 전화였다.

“여, 여보세요?”

[안 잤어?]

“네에…….”

[왜 안 잤어.]

“저 아까 낮에 잤어요.”

[그랬어? 어제 많이 피곤했었나 보네.]

“아……. 그런가 봐요.”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세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세원 씨?”

[어? 아, 미안. 그래도 일찍 자야지.]

“네. 근데 잠이 안 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렸던 건 물론 비밀이었다. 하빈이 벌러덩 몸을 돌려 누우며 핸드폰을 고쳐 잡고 세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감미로운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고, 그러면 그럴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져 갔다.

“세원 씨는 졸려요?”

[아니, 나도 아직. 그럼 좀 더 통화할까?]

“네. 좋아요.”

[낮에 뭐 했어?]

“어……. 잠만 잤어요.”

[그래서 잠이 안 오나.]

지금 세원과 통화를 하고 있어서 잠이 안 오는 게 분명했지만, 하빈은 그저 맞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내일은 일 안 나가?]

“내일 오후에 가요.”

오후……. 세원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 때문에 연락한 줄 알았는데 제 일에 관심을 가져 주는 그가 좋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언제 쉬는데?]

“목요일에 쉬어요.”

[그 전에는?]

“월요일에 오후 근무 빼고 계속 풀로 근무해요.”

[그럼 어쩔 수 없네.]

“왜요?”

[안 바쁘면 밥이나 먹을까 했지.]

헉. 하빈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세, 세원 씨 언제 시간 되는데요?”

[내가 출장이 있어서 목요일에 시간이 안 되거든. 아쉽네.]

“제, 제가 바꿀게요! 언제가 좋아요?”

[괜찮아?]

“네! 언제로 바꿀까요?”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세원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수요일은 어떠냐며 물었다.

“수요일, 알겠어요!”

[정말 괜찮아?]

“네, 제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요.”

[좋아. 금방 다시 보겠네.]

세원의 말에 하빈이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아싸, 세원 씨 만난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 없이 좋아하던 하빈이 문득 지환의 말을 떠올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형은 세원 씨가 무뚝뚝하다고 했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그의 태도에 조금씩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날 마음에 들어하는 게 아닐까? 나한테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솔직히 이렇게 보자고 하는 걸 보면 그럴지도 몰라.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럼 좋겠다……. 이미 세원을 유혹한다, 꼬신다 어쩐다 하는 일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하빈이었다.

[너무 늦었다. 자야지.]

“아, 네. 잘 자요.”

[너도 잘 자고 내일 연락해.]

내일 연락하라니……. 하빈이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이미 사귀는 것 같은데?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는 하빈이 무엇 하나 알 리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아직도 설레는 기분에 잔뜩 들떠 잠들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아……. 잔뜩 긴장했던 몸이 축 늘어져 한꺼번에 잠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내일 눈을 뜨자마자 정운에게 전화해 근무를 바꿔 달라 할 생각이었다. 분명 싫다고 하겠지만……. 뭐로 꼬셔야 하지. 세원보다 정운을 먼저 꼬셔야 할 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 세원 씨 유혹하기로 했지. 다시금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하빈이 눈을 감았다. 이불을 쭉 끌어 올리고 몸을 웅크리자 세원의 품에 안겼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뜨거운 숨결과 손길, 그리고 달아오른 몸…….

“아, 못 자겠어.”

다시 벌떡 일어난 하빈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고 방을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어쩐지 밤을 새울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일은 오후 근무였다.

* * *

세원을 만나러 갈 때면 안 하던 짓을 하는 하빈이었다. 옷장에 붙은 거울 앞에 서서 이게 어울릴까, 저게 어울릴까 대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찍 일어났건만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무리 이 옷 저 옷 대 봐도 그게 그거 같아서,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제일 처음 고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시간이 아슬아슬한 만큼 서둘러야 했다. 만나기로 한 곳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했다.

“빨리 나가야겠다…….”

계단을 내려가며 세원에게 출발한다고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일 층 현관에 도착해 고개를 들자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차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갸웃하는 사이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세원 씨?”

“준비 다 했어?”

“언제 왔어요?”

“글쎄.”

세원이 대충 둘러대며 웃어 보였다.

“연락하시지……. 그럼 더 빨리 나오는 건데.”

“됐어. 얼른 타.”

“네? 네.”

잠시 허둥거리다 세원의 옆자리에 탄 하빈은 눈치를 보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데리러 오실 줄 몰랐어요.”

“준비했는데 시간이 남길래.”

“그러셨구나…….”

고개를 끄덕이곤 세원을 힐끔 쳐다봤다. 오늘도 잘생겼네.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데 시선을 눈치챈 세원이 운전을 하다 말고 왜 그러냐며 말을 걸어 왔다.

“아, 아니에요.”

깜짝 놀라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그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친구가 휴무 바꿔 준 거야?”

“네.”

“잘됐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그냥 아무거나…….”

다 좋다는 말에 세원이 잠시 고민하듯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차는 빠르게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빈은 고개를 돌려 세원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늘 오가는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한정식 어때?”

“한정식이요?”

“어. 내가 자주 가는 한정식집 있는데, 갈래?”

“좋아요.”

활짝 웃어 보이는 하빈에 세원은 다행이라며 핸들을 돌려 방향을 틀었다.

“요 며칠 동안 많이 바빴어?”

“일이요? 그냥 좀…….”

이벤트 기간이라 그런지 유난히 손님이 많은 시기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저녁에 일이 많았다고 말하자 세원이 손을 뻗어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락이 잘 안 되길래.”

“아…….”

얼떨떨한 얼굴로 세원을 바라봤다. 지금 나 신경 썼다는 거지? 가슴속이 설렘과 기대로 잔뜩 부풀기 시작했다. 하빈이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도심을 벗어나 서울 외곽에 있는 커다란 한옥이었다. 하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갈이 가득 깔린 마당을 바라보고 서 있자, 세원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섰다.

얼떨결에 세원의 품에 안긴 하빈이 슬쩍 그를 올려다보고는 그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서둘렀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실내를 둘러보는데 그사이 주문을 마친 세원이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하빈을 불렀다.

“너는 뭐 좋아해?”

“뭐 좋아하냐고요?”

뜬금없는 물음에 갸웃하자 세원이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무거나 좋다고만 하니까 모르겠네.”

“아아, 저 안 가리고 잘 먹어서 괜찮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고?”

“특별히는…….”

딱히 생각나는 음식이 없었다. 뭘 잘 챙겨 먹는 성격도 아니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지도 않았으니.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 다정한 눈빛으로 하빈을 바라보고 있던 세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으면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 나랑 이것저것 먹어 보면서 찾으면 되지.”

“세원 씨랑 같이…….”

하빈이 중얼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물을 마시는 모습마저도 멋있어 보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뭘 해도 좋았다.

세원 씨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 그만큼 자주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야? 하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괜찮아?”

“네. 같이 찾는 거 너무 좋아요.”

“귀엽네.”

그는 두근거릴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잘도 해 댔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랬을까 싶었지만 내색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빈은 그저 세원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가야 할까,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는데 세원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하빈아.”

“네?”

이름을 부르는 세원에 놀라 눈을 마주치자 그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

“그럼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왜요?”

세원의 말에 하빈이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각한 얼굴이길래.”

그가 살짝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하빈의 손목을 붙잡아 떼어 내고 뺨을 살살 만져 주던 세원의 손이 예고도 없이 콱 꼬집는 바람에 하빈이 악 소리를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문지르며 눈을 뜨자 세원이 팔짱을 낀 상태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꼬집어요!”

“정신 차리라고.”

“정신 놓은 적 없어요!”

물론 세원 씨한테 정신이 팔린 건 맞지만……. 그래도 꼬집는 건 아니지! 하빈이 속으로 꿍얼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아파?”

“하, 하지 마요.”

하빈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또 꼬집으면 어떡해. 미심쩍은 눈빛에 하빈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세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왜? 안 꼬집어. 미안해서 그래.”

“……거짓말.”

“나 못 믿어?”

웃으며 하는 말에 하빈의 마음이 흔들렸다. 몸은 가지 말라 말하고 있지만, 마음이 동했다. 아무리 그래도 두 번이나 꼬집진 않겠지. 잠시 고민하다 슬쩍 다가갔다.

세원은 양손으로 하빈의 볼을 감싸 쓰다듬더니 하빈이 생글생글 웃으며 방심한 틈을 타 뺨을 살짝 움켜쥐었다. 놀라 온몸을 움찔거리자 세원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치지 말아요!”

“아, 진짜 귀엽네.”

씨이……. 몸을 홱 빼내고는 뺨을 가린 채 세원을 노려봤다. 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한참을 큭큭거리며 웃어 댔다. 웃지 말라고요! 앙칼진 소리에 세원이 살짝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엄청 예쁜 거 알아?”

“뭐, 뭐가요…….”

예쁘다는 말에 슬쩍 탁자 밑으로 두 손을 내려 꽈악 맞잡았다. 심장이 벌렁거려 금방이라도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세원 씨를 꼬셔야 하는데 어째 세원 씨가 날 꼬시는 느낌이야. 이러면 안 되는데…….

시선을 푹 내리깔고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때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업원 몇 명이 줄지어 손에 음식을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우와아……. 하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식 잘 먹어?”

“밥을 잘 안 해 먹어서…….”

“왜?”

“혼자 사니까 잘 안 해 먹게 되더라고요.”

“혼자 살아?”

“네. 형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형 결혼해서 나간 뒤로 혼자 살아요.”

“혼자 살아도 잘 챙겨 먹어야지.”

다정한 말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부터 먹어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먼저 집게를 든 세원이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며 어서 먹으라 손짓했다. 잘 먹겠습니다. 하빈이 꾸벅 인사를 하고 손을 움직였다.

“이것도 먹어봐.”

“우응, 배부른데…….”

“그거 먹고?”

“엄청 많이 먹었어요.”

세원이 챙겨 주는 음식을 먹기에도 벅찰 정도였는데 직원은 끝없이 새로운 메뉴를 가지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누룽지까지 해치운 하빈이 의자에 푹 늘어져 배를 톡톡 두드리자 세원이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차, 싶은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켜 멋쩍은 얼굴로 물을 들이켰다.

“진짜 잘 먹은 모양이네.”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꿍얼거리던 하빈이 이내 입을 닫아 버렸다.

“왜, 잘 먹었으면 좋지.”

“그, 그쵸?”

달래는 말에 하빈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세원은 미소 짓는 하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배도 부르겠다, 이제 뭐 할까?”

“그러게요. 세원 씨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너는?”

“저는 글쎄요…….”

세원 씨랑 하는 거면 뭐든 좋은데, 하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과 정반대의 말이 들려왔다.

“나랑 있는 거 재미없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계속 아무거나 하자고만 하고 딴 데 정신 팔려 있는 것 같길래 혹시 재미없나 싶어서.”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하빈이 놀라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만남인데.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세원이 제 마음을 알 리가 없다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알려줄 수도 없었던 하빈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 우리 카페 가요!”

“카페?”

“네! 커피 마시고 이야기해요. 세원 씨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자신을 따라 일어난 세원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헉.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정면을 쳐다본 채로 로봇처럼 뚜벅뚜벅 걸어갔다. 옆에 선 세원은 자연스럽게 하빈을 제 쪽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카페는 어디가 좋아?”

“이 근처에는 카페 없겠죠?”

“사람 별로 없고 한적한 곳 아는데.”

“거기로 가요!”

하빈이 신이 나서 팔짝거렸다. 그런 하빈을 보던 세원은 웃으며 반대쪽 손으로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길들여지는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가슴팍에 안겨 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싶었다. 그럼 향기가 코를 파고들어 정신을 마비시키겠지. 황홀한 상상을 하는 사이 계산을 마친 세원이 하빈을 차로 이끌었다.

문까지 열어 주며 조수석에 하빈을 앉힌 세원이 운전석으로 향하다 말고 전화를 받으며 조금 심각한 표정을 했다. 설마 일하러 가야 하나? 내일이 출장이라고 했었지……. 입술을 짓이기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문이 열리고 그가 올라탔다.

“……바빠요?”

“응?”

“회사에서 온 전화 아니에요?”

“아아, 아니야. 어머니한테서 온 전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세원이 걱정하지 말라며 시동을 걸었다.

“출장 내일이니까 오늘은 괜찮아.”

“네에.”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회사 일이 바쁘다 해도 그를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온종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시계를 확인한 하빈이 세원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세원 씨.”

“어?”

짧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그에게 하빈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세원의 어깨를 살살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카페 말고, 우리 집 가서 커피 마실래요?”

세원은 운전 중에는 앞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하빈을 바라봤다.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은 그가 창문을 내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너네 집에 가서?”

“네!”

해맑게 대답하자 그는 알 수 없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왜냐니…….”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요. 사람들 틈에 섞여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러다 금방이라도 바쁘다며 회사로 가 버릴까 걱정이 됐다. 집에 있으면 붙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집 청소를 했던가…….

생각이 멋대로 흘러갔다. 그사이 세원은 빨간불에 멈춰 서서 고민하는 듯 핸들에 턱을 기대고 으음, 소리를 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고요…….”

풀 죽은 얼굴로 꿍얼거리자 세원은 그런 게 아니라며 하빈을 달랬다.

“그럼요?”

“내가 이상한 생각 하는 건가 싶어서.”

“무슨 이상한 생각이요?”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세원이 알겠다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

“집으로 가요?”

“어. 커피는 네가 타 주는 거야?”

“네!”

금세 다시 신이 나 몸을 들썩이자 세원이 피식 웃으며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밥만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하빈은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세원이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허, 비밀번호 들키면 안 되지. 물론 보지 않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빈은 작은 손을 뻗어 세원의 눈을 가렸다.

“뭐해?”

“비밀번호 보면 안 되니까.”

“안 보는데.”

“그래도.”

치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하빈의 손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헤헤,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집 안으로 몸을 들이는 순간 잊고 있던 집의 풍경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아……. 왜 초대했지? 급격히 후회가 밀려왔다.

“아, 좀 치워 둘걸…….”

“나는 깨끗하게 살길래 부른 줄 알았지.”

키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온 세원에 하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실부터 방까지 옷으로 난장판이었다. 오늘 아침 이 옷 저 옷 꺼내 보다 그대로 나온 탓이었다. 그나마 아무것도 해 먹지 않아 깨끗한 주방은 구석에 처박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후다닥 거실에 늘어놓았던 외투를 집어 방으로 들어온 하빈이 문을 닫고 침대를 정리했다. 애써 웃으며 거실로 나오자 세원은 팔짱을 끼고 앉아 집을 빙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집안 곳곳에 닿을 때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몰려왔다.

세원 씨는 훨씬 좋은 집에 살겠지. 머쓱하게 목을 만지작거리며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웃어 보이자 세원 역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옷 늘어놓은 것 말고는 깨끗한데?”

“다, 당연하죠…….”

“커피는 안 줘?”

“아, 드릴게요!”

“무슨 커피 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하빈이 멀뚱멀뚱 대답했다.

“어……. 믹스커피밖에 없는데.”

“그래? 그거 줘, 그럼.”

“믹스커피 말고도 마실 거 있어요!”

“뭐 있는데?”

하빈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온 세원이 냉장고를 열고 주욱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저 집에서 밥 잘 안 먹어서…….”

“챙겨 주는 사람 없어?”

“네에.”

고개를 끄덕이자 세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반찬 같은 것 좀 갖다 줘?”

“괜찮아요.”

냉장고 문을 닫은 하빈이 서랍을 뒤적여 믹스커피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거 탈까요? 아니면 주스도 있고 술도 있는데!”

“술은 왜 있어?”

“친구한테 선물 받았어요.”

“친구?”

“윤정운이라고 저랑 같이 알바하는 친구가 있는데…….”

싱크대에 기대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자 세원이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그의 모습에 신이 난 하빈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 술이 뭔데?”

“이거요! 근데 그냥 마시니까 엄청 맛없던데…….”

“보드카네? 무슨 주스 있어?”

“오렌지 주스 있어요.”

“칵테일 만들어 줄까?”

칵테일! 하빈이 눈을 반짝이며 얼른 주스를 꺼내 들었다. 세원은 피식 웃으며 하빈을 식탁 앞에 앉혀 두고 맞은편에 서서 텀블러에 보드카, 오렌지 주스를 따라 흔들었다.

우와아…….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하빈이 얼음 컵에 채워지는 노란색 음료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마셔 봐. 스크류 드라이버라고 하는데 오렌지 주스를 많이 넣어서 맛있을 거야.”

조심스럽게 호로록 한 모금 넘기자 달콤한 맛과 함께 알콜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하빈이 고개를 번쩍 들고 세원을 바라봤다.

“맛있어요. 세원 씨도 마셔 봐요.”

벌떡 일어나 입 앞으로 컵을 들이밀자 얼떨결에 받아든 세원이 칵테일을 몇 모금 마시고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엄청 맛있어요.”

하빈이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칵테일을 모조리 들이켰다.

“아, 맞다.”

“네?”

“차 가져왔는데 술 마셔 버렸네.”

“그럼 어떡해요?”

“사람 부르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세원이 하빈을 보고 웃으며 텀블러에 남은 칵테일을 모조리 들이켰다. 그리고 두 번째 칵테일 제조가 이어졌다. 몇 잔을 더 마시고 나자 잔뜩 붉어진 얼굴의 하빈이 저도 해 보겠다며 세원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세원은 웃으며 하빈을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렸다. 겹쳐 잡은 손이 후끈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귓가에 그의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랫도리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온몸이 간지러웠다.

하빈이 다리를 배배 꼬며 안달을 내다 결국 들고 있던 컵을 탁 내려놓고 살짝 옆을 돌아봤다. 세원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하빈의 허리를 감싸 왔다.

“세원 씨.”

“응?”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세원에 하빈이 손을 올려 천천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뜨거웠다. 취했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키스해도 되나? 살짝 다가가 입을 맞추자 세원이 팔에 바짝 힘을 줘 자신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진득하게 비비는 입술에 심장이 콩닥거렸고,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제 혀를 얽어내는 세원의 뜨거운 혀에 머릿속이 마비됐다. 야릇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뒤꿈치를 들썩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하빈이 몸을 돌려 세원을 꼭 끌어안았다.

“흐으, 응, 으읏,”

둘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원의 커다란 손이 옷 위로 하빈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고, 하빈의 손은 세원의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다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빈의 손에 웃옷이 벗겨진 세원이 피식 웃으며 하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벗어.”

명령과도 같은 말에 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벗을게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은 하빈이 세원의 앞에 전라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올라가.”

그의 말에 하빈은 살짝 뒤를 돌아보고 식탁 위에 올라앉았다. 세원은 버클을 끄르며 하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유두에 입을 가져갔다. 돌기를 콱 씹어 비틀자 하빈이 작게 교성을 터뜨렸다. 하아, 앙, 하빈이 세원의 어깨를 붙잡고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벌써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황홀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밑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하빈이 테이블 위로 두 발을 올려 앉자 회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세원도 바지와 속옷을 벗고 잔뜩 발기한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하빈을 바라봤다. 하빈은 그런 세원을 보며 제 손을 쪽쪽 빨고 있었다.

“세원 씨…….”

“야하네. 계속 해 봐.”

“세원 씨이,”

몸을 눕히고 다리를 더욱 벌린 하빈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세원은 입맛을 다시며 다가와 손가락을 하나둘 찔러 넣었다. 좁은 곳을 어거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느낌에 하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파? 그의 물음에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 요…….”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더 풀어 주고 하지.”

“그치만, 빨, 리,”

마음이 조급했다. 저녁이 되면 헤어져야 할 텐데. 고개를 홱 젖히고 천장을 바라봤다. 세원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흐, 읏…….”

식탁 위에서 하다니,

“아, 하앙, 앗,”

나쁜 짓을 하는 느낌에 더욱 흥분이 몰려왔다. 아무도 모르겠지. 세원 씨랑 나만 아는 거야……. 하아, 흐읏, 손가락 하나가 더 밀고 들어와 꾸물거리며 안을 이리저리 헤집어댔다.

“세원, 씨, 흐앙!”

길쭉한 손가락이 안쪽 어느 곳을 콱 찌르며 자극했다. 페니스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사정해 버린 하빈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다리를 오므렸다. 세원은 웃으며 하빈의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렸다. 좋았어? 그의 물음에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싫었어?”

“그런, 거, 아니, 흣……!”

예고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세원에 하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굵은 페니스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아흐, 윽, 하빈이 눈을 가리고 끅끅거리자 그는 몸을 숙여 입을 맞추며 달래는 말을 속삭였다.

괜찮다, 예쁘다, 사랑스럽다는 말들이 귓가에 달콤하게 쏟아졌다. 하빈은 그저 홀린 듯 세원을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내며 어서 안아 달라 졸랐다.

깊숙하게 파고든 페니스가 천천히 움직이며 길을 내기 시작하고, 하빈은 다리를 뻗어 세원의 허리에 감았다. 느릿하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퍽퍽 쳐 올리자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앙앙대는 소리도 함께 집안을 채워 갔다.

“앙! 아앗, 흐앙! 아흑, 세, 원 씨! 아, 하앙!”

“후……. 하빈아, 좋아? 왜 이렇게 예뻐?”

“아응, 읏, 좋, 아아, 흐윽……. 끄흣,”

안에 파정하는 느낌이 이어졌다. 후으, 흐으, 읏,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하빈을 세원이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하빈을 돌려 세워 식탁을 붙잡게 하고는 엉덩이를 쫙 벌려 다시 뒤를 파고들었다.

“하아앙, 흐아……!”

하빈이 자지러지며 식탁을 가까스로 붙잡고 늘어졌다.

세원은 얄쌍한 하빈의 허리를 꽉 붙잡고 거칠게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양손에 꼭 들어맞는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움직였다. 식탁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하빈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으려다가도 안을 확 찔러 오는 페니스에 신음을 내지르며 그대로 무너졌다.

하빈의 무릎에 힘이 풀려 꺾였다. 그러자 세원이 하빈을 가볍게 안아 들고 쳐 올렸다. 찔꺽거리는 소리와 철퍽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빈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흐아, 앙, 아흑, 쉬어, 그만, 잠깐,”

“힘들어?”

식탁 의자에 앉은 세원이 하빈을 제 위에 겹쳐 앉히고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목덜미를 쪽쪽거리며 등을 핥아 대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에서는 세원의 페니스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쿡쿡 찔러 오는 느낌에 바르르 떨며 주먹을 꽉 쥐고 세원을 불렀다.

“세, 세원 씨…….”

“응?”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은 살짝 돌아보며 몸을 움직였다. 아흑……. 신음이 새어 나오자 세원이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 하빈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자, 잠깐, 몸을 폭 기대고 낑낑거리며 세원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피식 웃으며 입을 맞춘 세원이 빠르게 페니스를 흔들어 댔다.

“아, 아응, 읏,”

“엄청 조이네?”

앞을 자극하며 야한 말까지 속삭이는 통에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제 허벅지를 짚은 채 바짝 힘을 주자 세원의 말대로 뒤가 조여들었다. 세원은 하빈의 허리를 감싸고 흔들며 천천히 추삽질을 이어 갔다.

“아앙, 앗, 흐앙…….”

“신음 예쁘다.”

세원이 볼에 연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낯간지러운 느낌에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빈이 끙끙대며 주먹을 쥐고 앓다 못해 결국 세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안아주세요, 박아주세요, 얼른 해 주세요, 애걸하는 하빈의 머리에 입을 맞춘 세원이 벌떡 일어나 하빈을 다시 식탁에 눕히고는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꽈악 조이는 내벽을 거칠게 뚫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하빈은 온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아흐응, 으응, 읏, 아앙, 하앙, 핫, 세원 씨, 좋아, 아, 좋아요, 하빈이 눈을 가린 채 엉엉 울부짖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내려다보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맞추며 숨을 틀어막았다.

“후으, 흣, 으흣,”

계속해서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몸짓은 한참을 멈출 줄 몰랐다.

어느덧 저녁이 지나 밤이 깊고, 작은 침대에 붙어 누운 세원과 하빈이 지친 숨을 내쉬며 얼굴을 마주했다. 좁은 욕실에서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온 뒤였다.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기가 났다. 비록 싸구려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었지만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집에 가야 하는 걸 잊은 걸까. 자고 갈 생각인 건가. 하빈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드는 순간만이라도 그와 함께이길 바랐다. 눈을 뜨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잠에 빠져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세원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자 세원이 눈을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나 때문에 깼어요?”

“아니, 아직 안 잤어.”

“안 졸려요?”

“조금 피곤해. 너는?”

“저도…….”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자꾸 감기는 눈을 애써 참고 있는데 허리를 감싸는 손이 느껴졌다. 움찔하는 하빈을 세원이 제 품 안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그를 보다가 하빈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하빈은 여전히 누운 채로 세원의 눈치를 살피다 살짝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먼저 눈을 뜬 세원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갔어야 했는데 안 가서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건가……. 괜히 제 탓인 것만 같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이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세원이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잘 잤어? 몸은 어때, 머리는 안 아파?”

“잠은 잘 잤는데 머리가 조금 아파요…….”

지끈거리는 부분을 꾹꾹 누르자 그가 다가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아? 부끄러워진 하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세수를 핑계로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꼭 닫고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니 뒷머리에 새집이 지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이런 꼴을 하고 세원 씨 앞에 있었던 거야?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푹 쉬다 찬물을 틀어 세수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화끈거리는 얼굴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세원은 거실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빈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바쁘게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에 우물쭈물 하다 입 모양으로 밥을 하겠다고 말하자 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욕실 좀 쓸게.”

“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완성한 볶음밥을 그릇에 옮기고 그 위로 달걀 프라이까지 얹는데,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세원이 바짝 다가와 어깨 너머로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맛있는 냄새 나네.”

“그, 그래요?”

“어. 요리 잘해?”

“아니요…….”

“그럼 맛있는지 한번 볼까?”

세원이 손을 뻗어 접시 두 개를 들고 식탁으로 가져갔다. 하빈은 싱크대를 붙잡고 크게 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 너무 떨린다……. 얼른 오라는 소리에 수저를 들고 쪼르르 달려가 그의 접시 옆에 놓아 주었다. 세원은 잘 먹겠다며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 피로가 사르륵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 어때요?”

볶음밥을 한 입 떠먹은 세원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빈이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맛이 없나?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 세원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엄청 맛있는데?”

“진짜요?”

“진짜로. 어떻게 만든 거야?”

“비법이 있는데요, 파 기름을 내서…….”

맛있다며 연신 칭찬을 해 주자 신이 난 하빈이 쫑알쫑알 볶음밥 만드는 법을 늘어놓았다. 세원은 밥을 먹다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으며 하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반응에 더욱 신이 난 하빈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밥도 먹어 가면서 얘기해야지. 아, 해.”

“네? 제, 제가 먹을게요.”

“얼른.”

숟가락이 하빈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하빈이 당황해 세원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벌렸다. 세원은 오물오물 볶음밥을 씹는 하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물도 마시고.”

“네, 네에…….”

세원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물도 마시고 밥을 먹으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데 방에서 요란하게 벨 소리가 울려 댔다. 화들짝 놀란 하빈이 잠시만요, 하고 방으로 달려가는데 그사이 전화가 뚝 끊겼다.

“누군데?”

발신인을 확인하며 식탁 앞으로 돌아오자 세원이 하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빈은 울상을 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알바 사장님이요…….”

오늘 알바 가는 날이었지, 맞다……. 나 잘리는 거 아니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세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토닥였다.

“너도 오늘 일 가는 날이었지?”

“네…….”

“많이 혼나려나?”

“모르겠어요, 저 일단 전화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해 봐. 옆에 있을게.”

세원이 하빈의 한쪽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든든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사장님’이라 저장된 번호를 꾸욱 눌렀다. 짧게 신호음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하빈!]

“네, 네에…….”

[목소리가 왜 그러냐! 너 오늘 일 왜 안 나와? 어디 아프냐!]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일이 생겨서…….”

[그럼 미리 연락해야지!]

버럭 소리치는 사장님 뒤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움츠러든 하빈이 죄송하다고 웅얼거리며 지금이라도 갈까 묻자, 사장은 됐으니 내일 나오라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하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진짜 잘리는 줄 알았네…….

“괜찮대?”

“네? 네. 내일 나오래요.”

“내일 가서 혼나는 거 아니야?”

“그럴 것 같아요.”

“혼나면 안 되는데.”

인상을 쓴 세원에 하빈이 푸스스 웃으며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세원은 하빈의 손을 마주 잡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살짝 눈을 찡긋거렸다. 귀엽다……. 하빈이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배시시 웃자 세원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원 씨는 가야 해요?”

하빈이 울상을 하고 물었다. 세원은 고민하는 듯이 턱을 매만지며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출장 미뤄서 오늘은 더 있어도 돼.”

“진짜요?”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팔짝거리는 하빈을 세원이 엉덩이를 토닥여 거실로 밀어 냈다.

“어.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가서 쉬고 있어.”

“왜요! 제가 할게요.”

“요리도 네가 했는데 설거지까지 하면 안 되지. 내가 할게.”

“그럼 같이해요!”

“설거지 같이하자고?”

“네!”

하빈이 후다닥 움직여 식탁에 있던 그릇을 모조리 싱크대로 나르고는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쉬라고 해도 싫어?”

“손님한테 다 시킬 순 없죠.”

얼른 와요. 하빈이 손짓하자 세원이 옆으로 다가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빈은 세원을 힐끔 쳐다보고 그릇을 닦아 건넸다. 그러면 세원이 그릇을 받아 헹군 뒤 가지런히 받침대에 올려놓고 다음을 기다렸다.

가끔 손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빈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릇에 집중했다.

“엄청 열심히 하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 더욱 설렜다. 하, 미치겠다……. 침을 꿀꺽 삼킨 하빈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게.”

“네?”

“귀엽다고.”

싱크대에 살짝 몸을 기댄 세원이 웃으며 말했다. 와, 진짜 멋있다……. 하빈이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 안 하냐는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저 접시에 퐁퐁을 문질렀다. 맨손으로 한참 설거지를 하자 피부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핸드크림 좀 발라야겠어요.”

“나도 발라 줘.”

하빈이 방으로 들어가자 세원이 뒤를 따라왔다. 귀엽게만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하빈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귀엽다는 말을 참으려 애를 썼다. 저 키에, 저 덩치에 귀엽다고 하는 건 실례겠지……. 멋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제 손에 핸드크림을 가득 짜낸 하빈이 세원에게 다가가 양손을 맞잡고 비비적거리며 로션을 발랐다. 깍지를 껴 손가락 사이사이를 만지작거리던 세원이 손을 활짝 펴 하빈에게 내밀었다. 대봐. 그의 말에 하빈은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 손을 펴 마주 댔다.

“내가 더 크네.”

“당연한 거죠.”

제 손가락이 귀엽다는 그의 말에 부끄러워져 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세원이 고개를 들어 하빈을 바라봤다. 왜 그러냐는 표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좋아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어차피 시간 많잖아.”

“그, 그렇죠.”

“그럼 이러고 있자.”

세원이 하빈의 허리를 확 당겨 무릎에 앉히고 이마를 맞댄 채 손을 조몰락거리며 장난을 쳤다. 놀란 하빈이 뻣뻣하게 굳어 있자 세원은 작게 웃으며 하빈을 놀려 댔다.

“우리 어제 그렇게 몸도 섞었는데 이렇게 내외할 거야?”

“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공사구분이 확실한 스타일이네.”

장난스럽게 한 말에 하빈이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몸도 섞었는데, 우리 섹스도 하고 이렇게 다정하게 장난도 치는데 대체 무슨 사이지? 하빈이 고개를 돌려 세원을 쳐다봤다.

“왜?”

눈치 빠르게 무슨 일이냐 묻는 그를 보고 하빈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적막했다. 무슨 사이냐 묻고 싶었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란 대답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빈이 아린 가슴을 견디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찌릿한 아픔이이 온몸으로 번졌다.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세원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그는 알고 있을까. 알면서 묻는 걸까. 하빈이 세원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두 번 안 물어볼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만나고 싶었다. 입술만 달싹이며 말하지 못하고 있자 세원이 알겠다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이대로 멀어지는 건 아닐까. 난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거지? 혼란 속에 빠져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하빈은 세원이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너른 등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놓치면 안 돼. 잡아야만 했다. 하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와락 끌어안은 채 물었다.

“나, 나랑 한 거 안 싫었죠?”

“……뭐?”

“나랑 한 거 좋았어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던 하빈이었다. 세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하빈이 주먹을 꼭 쥐고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하빈의 손을 풀어 내고 뒤를 돌아 얼굴을 마주했다.

“왜 그런 게 궁금했어?”

“아, 아니, 그냥…….”

“그냥?”

대충 둘러대듯 얼버무리자 세원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하빈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으며 말했다.

“바보네, 완전히.”

바보야, 김하빈. 세원이 말했다. 어쩐지 울컥 마음이 일렁였다. 내 속도 몰라주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하빈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가를 벅벅 문지르다 다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요!”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근데 왜 바보라고 해요!”

“바보 같은 질문만 하니까 그렇지.”

“내가 언제 바보 같은 질문했어요? 나는…….”

“너 예쁘고 좋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하빈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알았어? 되묻는 목소리에 하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고 좋으니까. 푹 꺼져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벅차올랐다. 그가 맞았다. 난 정말 바보 같아.

* * *

세원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가 된 하빈은 허전해진 마음에 저녁도 거르고 티비 앞에 앉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또 보고 싶네……. 시무룩한 표정 위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옆에 둔 핸드폰을 힐끔거리며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때마침 전화 벨이 울렸다.

“세원 씬가?”

후다닥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액정 화면에는 제 형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정말 타이밍도 못 맞추는 지환이었다. 받지 말아 버릴까……. 한참을 고민하던 하빈은 전화가 끊기기 직전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왔다.

“아, 뭐야, 왜에…….”

[전화 받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 무슨 일 있어?]

“아니이, 왜 전화했어?”

[잘 있나 궁금해서 했지.]

“못 있을 게 뭐가 있어. 잘 지내.”

[강세원이랑은? 그때 이후로 별일 없어?]

형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려던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했다. 지환은 자신보다 연애 경험도 많고 세원에 대해 더 잘 알 테니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김하빈? 부르는 목소리에 하빈이 으응,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어제 만나서 집에 왔었어.”

[집에? 누구 집에?]

“여기, 내 집…….”

[집에서 뭐 했는데?]

“음, 그냥 세원 씨 와서 자, 자고 갔는데.”

[니들 벌써 사귀냐?]

불쑥 치고 들어온 목소리에 하빈의 입이 합 다물렸다.

[그러고도 안 사귄다고 하는 건 아니지?]

“왜, 왜?”

[왜냐고? 너 설마 진짜 안 사귀냐?]

대답하지 않고 있자 지환이 답답하다는 듯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맨날 연락하고 만나서 밥 먹고 집 가서 섹스하고, 이게 사귀는 사이에 하는 거 아니면 뭔데?]

“모, 모르지…….”

[모르긴 뭘 몰라?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잖아. 야, 안 사귀는데 이러는 거면 그것도 웃긴 거야. 무슨 섹스 파트너냐?]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둘이 만나는 거 잘하고 있는 거 맞아?]

“맞다니까아!”

계속해서 타박하는 지환의 목소리에 투덜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사이가 틀어질까 두려워 다가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으면서 동시에 더욱 가까워지고 싶었다. 한참 말이 없자 지환은 푹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봐. 어?]

“왜에…….”

[몇 번 안 만났고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지금 사귀는 건 조금 이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그렇지. 몇 번이나 만났다고. 기껏 해봤자 서너 번밖에 더 만났어?]

“맞아. 그럼 어떡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 끝으로 방바닥을 문지르며 전화를 받는 하빈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두어 번 더 만나면서 엄청 들이대면 되지.]

“여기서 더?”

[지금 뭘 얼마나 했다고…….]

“나 그래도 엄청 열심히 했거든!”

무시하는 듯한 말에 하빈이 울컥해 소리쳤다. 형이 시킨 대로 나름 세원의 마음에 들려 노력을 해 온 터였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고생까지 하고 있는데 섭섭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서운한 마음이 몰려왔다.

물론 오롯이 지환 때문에 그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 건 아니었지만…….

[알았어, 알았어. 알겠으니까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더 잘 해봐.]

“……응. 근데 세원 씨가 나 싫다고 하면 어떡해?”

[강세원이? 지금껏 잘 만나 놓고 갑자기 싫다고 하면 그 새끼가 나쁜 놈이지. 완전 너 이용한 거잖아.]

“물론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에…….”

[그래, 만약에. 그러니까 바보처럼 이용당하지 말고 네가 이용해. 멍청이같이 굴지 마.]

“알았어.”

[대답은 잘하지, 어? 근데 네가 잘하는 꼴을 못 봤어.]

“나도 잘하거든?”

다시 시작되는 잔소리에 하빈이 대충 알겠다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길어져 봤자 피곤할 뿐이었다. 잠깐인 줄 알았건만 통화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다. 늦어진 시간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으로 폭 파고들었다.

제 몸 하나만 들어가도 꽉 차는 이 침대에서 세원과 딱 붙어 함께 잔 지난밤을 떠올렸다. 세원의 향기가 다시금 코끝에 어른거리는 듯싶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잠이 들었던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이불을 붙잡고 있는데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하며 알람이 울렸다. 와, 알람 울리기 직전에 깼나 보다.

하빈이 샐쭉 웃으며 화면을 누르는데 세원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 잤냐는 가벼운 아침 인사에 입꼬리가 날아갈 듯 하늘로 치솟았다.

“세원 씨는 결국 오늘 출장 갔구나…….”

출근하는 동안 계속 세원과 대화를 나누던 하빈은 가게에 도착해서야 아쉬운 손짓으로 이제 그만 일하러 가 봐야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홀을 닦고 있던 정운이 달려와 볼을 붙잡고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괜찮아?”

“어? 뭐가?”

“아팠다면서!”

“나? 안 아팠는데?”

“사장님이 아파서 못 나왔다고 하셨는데.”

“아니야, 일 있어서 못 나온 거야.”

대답한 하빈이 정운의 손을 떼어 내고 스태프 룸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뒤를 쫓아온 정운은 그럼 무슨 일이 있었냐며 끝없이 캐물었다. 그 행동에 하빈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야, 너 그만 좀 해라.”

“네가 말을 안 해 주잖아!”

“내가 왜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친구 사이에 그런 것도 말 못 해 주냐?”

“친구면 다 말해 줘야 해?”

점점 언성이 높아져 가고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그냥 넘기면 될 일을 굳이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정운이 답답하고 귀찮았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세원과의 일이라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너 섭섭하게 이럴 거냐?”

“애처럼 굴지 마. 왜 이래, 진짜…….”

그대로 방을 나와 버리자 뒤에서 짜증을 내는 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라지 뭐, 누가 신경이나 쓸 줄 알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무언가 할 일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카운터에 있던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얼어붙어 있자 이리 와 보라 손짓하며 하빈을 불렀다.

“사장님 왜요?”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팠던 건 아니지?”

“네? 네……. 집에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그랬어요.”

“그래,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안 나오길래 놀랐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라. 일 있으면 미리 이야기하고.”

“네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넘어가 주는 사장에 하빈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정운을 제외한다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던 정운의 짜증은 점심시간이 넘어가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작작 좀 해.”

“내가 뭐.”

“너 지금 계속 짜증 내잖아. 옆에 있으면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알아?”

“아 그래? 그럼 신경 쓰던가.”

쿵쾅거리며 믹서기를 헹구는 정운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얼른 집에 가버리고 싶은데 퇴근을 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카운터에 서서 멍하니 손님을 기다리는데 문이 딸랑거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딱 봐도 몇 번 왔던 알파였다.

“어서 오세요.”

하빈이 해맑게 웃으며 주문을 받자 잠시 힐끔거리던 알파 손님이 슬쩍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저, 저기…….”

“네?”

“버, 번호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번호요?”

“핸드폰 번호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하빈이 죄송하다 대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사귀는 사람 있으세요?”

“네? 아, 그건 아닌데…….”

“그럼 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아뇨, 그건 좀…….”

난처하다는 얼굴로 하빈이 뒤를 돌아보자 정운은 멀찍이서 인상을 쓴 채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투덜거리며 커피를 내린 하빈이 손님에게 컵을 내밀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커피 나왔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는 번호 알려주시면…….”

정말 끈질기게 들이대는 사람이었다. 망설이던 하빈도 결국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저 사귀는 건 아닌데 요즘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 있어서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아……. 그래요?”

“네. 이런 거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아쉽다는 표정으로 카페를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빈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말이든 제게 거절은 참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있는데 정운이 삐죽거리며 다가와 하빈에게 말을 걸었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 오늘은 거짓말했네? 평소에는 내가 안 도와주면 못 쫓아내더니.”

으스대며 말하는 정운에 하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말 아닌데?”

“뭐?”

“나 만나는 사람 생겼어.”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하빈의 말에 정운이 얼어붙은 채로 눈을 껌뻑였다. 왜 그러고 서 있어?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툭 건드리자 이마를 짚고 잔뜩 인상을 쓰고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가 뭐. 나는 알파도 못 만나냐?”

하빈의 대답에 정운은 잠시 말이 없다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누군데?”

“응?”

“네가 만난다는 사람이 누군데?”

말해 줘도 되려나……. 고민에 빠진 하빈이 발끝으로 바닥만 직직 긁고 있는데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후다닥 일어나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는 동안 정운은 계속해서 누구냐 물어 왔고 하빈은 또다시 귀찮게 하는 정운을 무시하며 손님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너 오늘따라 진짜 귀찮게 한다.”

“내가 뭐. 네가 말해 주면 되잖아.”

“꼭 알아야겠어?”

“어. 누군데?”

“그러니까 왜 전에 친구 생겼다고 했었잖아.”

하빈이 세원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세원을 이용하기로 지환과 모의한 내용을 쏙 빼놓고 평범한 제 짝사랑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정운의 인상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마지막으로 어제 일까지 듣고 난 뒤, 정운은 하빈에게 잔뜩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넌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내가 뭐.”

“만날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형 전 남자친구를 만나?”

“그게 어때서. 만날 수도 있지. 형이 그 사람하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된 애가 생각이 없어, 걔가 너 진짜 좋아서 만나는 것 같아?”

“아닐 건 또 뭐야!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다 너 정신 차리라고 이러는 거지.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해서 아무나 쫓아다니다가 바보처럼 당하기만 할까 봐 그런다. 넌 어떻게 친구가 좋은 말을 해 줘도 곱게 못 듣냐?”

“네가 언제 좋은 말 해 줬어? 나한테 연애 조언 같은 거나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

다시 다툼이 시작되고, 정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빈도 단단히 열이 받아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하여간 김하빈 맨날 생각 없이 행동하지.”

“너보다는 생각 많이 하고 살거든.”

“나중에 당하고 나서 울지 말고 지금 정신 차려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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