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자버렸다. 형의 전 남자친구와. (2/20)

2. 자버렸다. 형의 전 남자친구와.

토요일 아침이 밝고, 평소보다 더욱 신경 써서 차려입은 하빈이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며 카페 문에 달린 종이 딸랑대는 소리조차 듣기 좋았다. 자리를 잡으려 둘러보는데 순간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스쳐 지나갔다.

고개가 다시 돌아가고 멀찍이 앉아 있던 세원과 눈이 마주쳤다. 헉.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빈이 자리에서 꾸벅 인사를 건넸다. 세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앉으라 손짓했다.

“일찍 오셨네요?”

“근처에 일이 있었는데 금방 끝났길래 바로 왔어.”

“연락하시지, 그럼 제가 더 빨리 오는 건데…….”

뻣뻣한 동작으로 세원의 맞은편에 앉은 하빈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약속에 늦은 건 아니었지만 본인보다 늦게 왔으니 기다리는 동안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데 세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 그러니까, 혹시 화가 나셨나 싶어서…….”

“내가 왜?”

“제가 늦게 와서…….”

“약속했던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세원은 살짝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는 값비싸 보이는 손목시계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너도 일찍 온 거잖아. 그치?”

“네? 네…….”

“그럼 됐어. 김지환 올 때까지 기다리자. 밥은 먹었고?”

여전히 느긋한 그의 모습에 하빈은 바짝 긴장했던 몸을 풀고 의자에 푹 기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왜 안 먹었어.”

“귀찮아서…….”

“그렇다고 끼니 거르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니까 그렇게 마른 거 아냐.”

세원의 말에 멀뚱멀뚱 제 몸을 내려다보고 곧이어 그를 쳐다봤다. 탄탄해 보이는 몸이다. 처음 만난 날 얼떨결에 저 품에 안긴 기억이 떠올랐다. 엄청 놀랐는데……. 한참 생각에 빠져 멍하니 있자 세원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연락하면서 얼굴 다시 보고 싶었는데.”

“네, 네?”

“한두 번 보고 계속 연락만 하니까 얼굴 까먹을 뻔했다고.”

그의 말에 하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지금 나 보고 싶었다고 한 거지?

입술을 콱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세원처럼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빈말일 거다. 혹은 농담, 인사치레. 하지만 자신은 사심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고개를 홱 돌려 문을 바라봤다. 지환이 어서 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긴장한 하빈은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벌컥벌컥 들이켜며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약속 시각이 다 되어 가는데 제 형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빈이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지만, 지환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일이 많이 바쁜가…….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세원이 입을 열었다.

“연락 안 돼?”

“저, 전화해 볼게요.”

“천천히 해.”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며 달래 왔지만 이미 애가 타기 시작한 하빈은 세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호음만 이어졌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안 올 모양인데.”

“어떡하지, 아, 미쳤나…….”

하빈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툭 내던지고는 거칠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데, 숙이고 있던 머리 위에서 요란하게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자 그렇게나 기다리던 지환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형!”

[어, 난데.]

“왜 안 와?”

[나 지금 회사에 급한 일 터져서 못 나가.]

“뭐?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다음에 다시 만나든가……. 네가 말 좀 잘해 봐. 네, 지금 가요.]

멋대로 전화가 뚝 끊겨 버렸다. 형, 형? 하빈이 전화를 붙잡고 열심히 지환을 불렀지만, 대답 대신 끊긴 신호음만 들려왔다.

“김지환 못 온대?”

“네? 네. 일이 바쁘다고…….”

울상을 하고 세원을 바라봤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모습에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죄책감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됐어.”

“정말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하염없이 죄송하다며 사과하자 세원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덩달아 하빈도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일부러 시간까지 내주고 제게 커피도 사 줬는데 정작 약속을 잡자고 한 우리 쪽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니. 무엇보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 네 잘못도 아닌데.”

“……네?”

“김지환이 못 오는 거지, 네가 안 온 게 아니잖아.”

끝까지 다정한 그의 말에 하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송해할 것 없어. 사람 일이 다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주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속 깊이 남았다. 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그래도…….”

입을 꾹 다물고 세원을 바라보던 하빈이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보낸다면 후회할 게 뻔했다.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당장에 없는 재주라도 부려야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차 키를 챙겨 일어나려는 세원에 하빈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세, 세원 씨.”

이름을 부르자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저랑,”

침을 꿀꺽 삼키고 하빈이 말했다.

“밥 먹을래요?”

세원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에 덜컥 겁을 먹은 하빈이 떨리는 손을 감추듯 맞잡고 횡설수설했다.

“그, 그러니까……. 밥 사 드릴게요! 형도 안 나와서 죄송하고, 배도 고프고, 이건 제가 배가 고픈 건데, 음, 세원 씨는 배가 안 고프시면, 차라도……. 아, 지금 우리 커피 마셨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부끄러워져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 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빈이 위를 올려다보자 세원이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눈을 살짝 휘고 큭큭거리는 모습이 잘생기면서도 귀여워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떡하지, 진짜 멋있다. 하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안 그래도 밥 사 주려고 했어.”

“지, 진짜요?”

“어. 맛있는 거 사 줄게.”

일어나라며 손짓하는 세원에 하빈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내려다보고 다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손도 막 잡아?”

“네? 아, 자, 잡으라는 줄 알고…….”

후다닥 손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마음만 앞서서 민망한 짓만 잔뜩 하고 있었다. 나 진짜 멍청이 아니냐…….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제 머리를 콩콩 때렸다. 정신 차려, 정신.

고개를 휘휘 저은 하빈이 눈을 부릅떠 앞을 바라봤다. 널찍한 그의 등이 참 듬직하다는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았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신이 나지? 마지막에는 형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잠시, 아주 잠시 해 버린 하빈이었다.

세원을 따라 차에 올라탄 하빈은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구경했다. 생전 처음 타 보는 고급 외제 차였다. 그냥 자가용을 타는 것도 오랜만인데 이렇게 비싼 차라니, 어느 하나 손이라도 잘못 댔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절로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세원은 시동을 걸지도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창문에 기대어 허둥대는 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빈이 어쩔 줄을 모르고 얼어붙어 버리자, 세원이 몸을 숙여 다가왔다.

“왜, 왜요?”

“안전벨트 해야지.”

“아, 제가,”

“해 줄게.”

코앞까지 다가온 세원에게서 전에 맡은 페로몬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아아, 기분 이상해…….

흐읍. 하빈이 숨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보며 작게 웃고 다시 몸을 일으켜 운전대를 잡았다. 그제야 숨을 후우 내쉬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잡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래? 그럼 내가 고른다?”

“네.”

이미 반쯤 홀려 정신이 없는 하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뭘 사 줄까……. 중얼거리며 세원이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매끄럽게 도로를 달려나갔다.

“내려야지.”

세원이 문을 먼저 내려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창밖을 구경하던 하빈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굼뜬 동작에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하빈을 에스코트하며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번쩍이는 내부에 눈이 부셨다.

“어서 오세요. 몇 층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바짝 옆을 따라붙어 묻는 직원에 세원은 레스토랑이라 대답하고 하빈을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하빈이 세원의 곁에 쪼르르 다가가 그를 올려다봤다.

“여기 와 봤어?”

“아니요…….”

1년 365일 뚜벅이 신세인 자신에게 이런 호텔은 사치를 넘어 환상과도 같은 장소였다. 하빈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세원을 돌아봤다. 그가 올라탄 뒤에야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원은 하빈에게 먼저 타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 말에도 하빈은 불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릴 뿐이었다. 결국, 세원이 하빈의 등을 감싸 안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뭘 그렇게 벌벌 떨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함께 탄 직원은 레스토랑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러 준 뒤 문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조용해진 엘리베이터에 덩달아 입을 다물고 바닥만 바라봤다. 오직 세원만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머리를 매만지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모양이었다.

“바쁘시면 저녁 안 사 주셔도 되는데…….”

“그런 거 아니야.”

핸드폰을 집어넣은 세원이 하빈을 마주 보고 손을 뻗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씩 닿아 오는 그의 손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빈은 세원을 따라 내리며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짙은 쌍꺼풀, 이마부터 시원하게 뻗은 콧대에 도톰한 입술까지. 훤칠하게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지환이 세원의 외모를 자랑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진짜 잘생겼다…….

“뭘 그렇게 봐?”

“네?”

“하도 빤히 쳐다봐서.”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한 하빈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몰래 쳐다보던 것을 들키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더 보고 싶은데……. 자꾸 세원 쪽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고정하고 앞만 본 채 걸어갔다. 주먹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리에 앉는 동시에 레스토랑 직원은 메뉴판을 건네고 세원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자리를 떴다. 찬찬히 메뉴를 훑어내리는 모습이 어쩐지 기품 있어 보여 하빈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봤다. 익숙하겠지, 이런 자리는…….

자신과 다른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멋있다는 생각이 또다시 머릿속을 지배했다.

세원의 얼굴부터 넓은 어깨와 비싸 보이는 슈트, 시야에 들어오는 곳곳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이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만이 제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손톱마저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골라?”

세원이 턱짓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하빈은 쭈뼛거리며 메뉴판을 펼쳐 들었다. 뭐라 쓰여 있긴 한데 하나도 모르겠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음식들에 그저 메뉴판 뒤에 숨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세원이 주문하면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하고 대충 상황을 넘길 생각이었다.

“골랐어?”

“네?”

그가 팔을 뻗어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메뉴판을 쏙 빼 들었다.

“뭐 먹을래.”

“아, 저는…….”

하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꼭 내가 골라야 하나? 진짜 하나도 모르겠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하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게요.”

“응?”

“저 이런 거 잘 모르는데…….”

“잘 모르겠어?”

“네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빈이 세원을 빼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빈은 그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앉아 있었다. 모를 수도 있지 왜 웃고 그래…….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세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귀엽냐.”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움찔, 몸이 굳었다.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시킬게.”

“네? 네.”

“고기 좋아해? 아니면 생선?”

“아무거나 다 좋아하는데…….”

“둘 다 좋아해? 두 개 다 먹을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요.”

당황해 손을 내젓자 세원이 조금 더 크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하빈이 입을 삐죽거렸다. 뭐야, 사람 놀리나. 그 뒤로도 이것저것 메뉴에 관해 물어왔지만 대답할 의욕을 잃은 하빈은 대충 고개만 끄덕거렸다.

주문을 마친 세원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삐졌어?”

“……안 삐졌어요.”

“잔뜩 삐진 얼굴인데.”

“아니거든요!”

“얼굴에 다 티나.”

세원이 손을 뻗어 하빈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세원은 웃으며 말했다.

“눈 엄청 크네.”

“뭐, 뭐가요.”

“예쁘다고.”

얼굴을 꾸욱 잡아당긴 세원이 손을 거둬들였다. 그에게 잡혔던 볼이 화끈거렸다. 분명 아파서 그런 거겠지. 그럴 거야. 뒤늦게 제 마음을 무시해 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불에 덴 듯 뜨거운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곧이어 테이블 위로 식전 빵이 놓였다.

“배고플 텐데 먹고 있어.”

세원이 빵이 든 접시를 하빈 쪽으로 밀어 주었다. 빵을 집어들고 이름 모를 소스에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세원은 금세 다시 미소를 지으며 하빈을 바라봤다.

“다음에 다시 자리 만들어야겠다.”

“다시요?”

“어.”

“……왜요?”

“김지환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꼭 알아야겠어. 어딘가를 멀찍이 바라보며 말을 꺼낸 그의 모습에 하빈은 먹던 빵을 내려놓고 입을 달싹였다. 무어라 물어보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둘 사이의 일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앞에 놓인 수프를 호 불어 입으로 가져왔다. 양송이 수프가 맛은 있는데 방금 빵을 먹어서 그런지 영 입맛이 없었다.

혹시 세원 씨가 아직도 형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자 숟가락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쓰며 수프를 푹 떠 입으로 가져왔다.

“앗, 뜨거.”

“괜찮아?”

“아, 괜찮아요.”

“얼른 물 마셔.”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다 들이켜자 세원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물 말고 마실 것 좀 시키자. 와인 어때?”

묻는 말에 하빈은 그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원이 사 주는 와인이라면 좋은 와인일 게 분명했다. 비싼 건 뭐 특별한 맛이 나려나? 와인은 어떨 땐 텁텁하기도 하고 달달하기도 한 게, 마실 때마다 맛이 달라 재미있는 술이라 생각했다.

비록 자신이 마셔 보았던 와인은 이곳의 와인에 비하기도 민망한 싸구려겠지만.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직원이 들고 온 병을 바라봤다.

“건배해야지.”

“아아, 네…….”

바로 잔을 입으로 가져오려 하자 세원이 건배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빈은 멋쩍게 웃으며 잔을 마주 대고 짧게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울리며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예쁘다. 작게 웃은 하빈이 와인을 입에 머금고 세원을 바라봤다.

그는 잔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예쁘게 웃길래.”

뭐야……. 하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와인은 어때? 가벼운 거로 시켰는데.”

“적당히 달달해서 좋아요.”

“와인 좋아해?”

“네. 이렇게 좋은 건 안 마셔 봤지만…….”

“더 시켜 줄까?”

세원의 물음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아차했다. 나도 모르게……. 그러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정한 눈빛으로 하빈을 바라보고 말했다.

“솔직해서 귀엽다.”

“가, 갑자기 왜요…….”

“그냥. 그동안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관찰하는 그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왜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피하고 싶어도 피할 곳이 없었다. 둘만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좋으면서도 어색하고, 이렇게 마주하고 있자니 오만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또 뭘 그렇게 생각해?”

“아, 아니에요.”

“궁금한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충 둘러대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고기를 힘있게 쓱쓱 썰어 내는 세원을 힐끗 쳐다본 하빈이 크게 숨을 내쉬고 그를 따라 열심히 칼질했다.

스테이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던 세원이 따라 웃으며 물었다.

“맛있어?”

하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맛있어요.”

“다행이네. 내 것도 먹어.”

자신의 것도 먹으라며 접시를 옮겨 주는 다정함에 어쩐지 온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술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식사와 함께 대화가 계속되었다. 술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두 사람은 점점 취하고 있었다.

세원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하빈이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덜컹대는 소리에 세원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려고?”

“그게 아니라…….”

손을 뻗어 세원의 얼굴을 감싼 하빈이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확인했다.

“괜찮아요?”

“너야말로 괜찮아? 얼굴 엄청 빨간데.”

“저 완전 멀쩡한데!”

“그게 멀쩡한 거야?”

세원이 하빈의 손을 맞잡았다. 큰 손이 겹쳐 오자 그렇지 않아도 취기가 올라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네에.”

손을 빼내려 낑낑거렸지만 세원은 놓아 주는 대신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하빈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자.”

“벌써요?”

“휘청거리는 것 봐라. 얼른 들어가야지.”

“싫은데…….”

하빈이 꿍얼거리며 세원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다. 칭얼거리는 행동에 세원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계산하는 세원을 바라보던 하빈이 고개를 홱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이 위는 호텔이에요?”

“어.”

“나 호텔에서 안 자 봤는데…….”

천장을 보던 하빈이 고개를 내리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빈을 잡아끌었다.

“얼른 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하빈은 눈치를 살피다 세원을 불렀다.

“세원 씨…….”

“왜.”

“진짜 그냥 가요?”

더 놀고 싶다는 뜻에서 물은 말이었다. 어디 다른 곳을 가든 무엇을 하든, 그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아쉬워서……. 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즐거웠고, 그래서…….”

하지만 제 마음과 달리 세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짜증이 난 듯한 모습에 하빈은 기가 죽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일 층으로 내려와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올라갈래?”

“네?”

“방 잡을까?”

“방이요?”

“나 어차피 술 많이 마셔서 너 못 태워다 줘.”

자고 갈래? 세원이 물었다. 하빈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자고 갈 거냐니……. 세원 씨랑, 나랑? 당황한 표정으로 세원을 바라보자 그는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뜻으로 한 말이지? 한참 대답이 없는 하빈에 세원은 대리를 부르겠다며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자, 잠깐,

“잘래요!”

“응?”

“저 호텔에서 자 보고 싶어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마주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러자. 허락이 떨어졌다. 와, 와아…….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로 하빈이 세원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신의 집보다 커 보이는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아……. 커다란 거실과 그 옆으로 딸린 두 개의 침실에는 각각 욕실이 있었고 심지어 욕조까지 있었다. 우리 집엔 욕조 없는데. 부러움에 한숨을 쉬며 다시 밖으로 나오자 세원이 넥타이를 당겨 끄르고 있었다. 헉. 하빈이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

태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세원의 태도에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씻을 건데.”

“네? 네…….”

“넌 안 씻어?”

“저, 저도 씻어야죠!”

하빈이 대답하며 냅다 옷을 벗어 던졌다. 벗은 티셔츠를 든 채 뒤를 돌아보자 세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게 왜? 하빈의 시선이 세원의 얼굴에서 목으로 주욱 내려갔다. 그는 그저 단추 몇 개를 풀어 놓은 것뿐이었다. 어떡해, 쪽팔려…….

“미쳤어, 미쳤어.”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욕실로 뛰어들어와 문을 닫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샤워가운 문 앞에 둘게.”

“네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하빈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주저앉아 있던 하빈이 일어섰다. 거울을 보자 제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술기운과 쪽팔림이 한꺼번에 올라와서 그런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하빈은 더욱 혼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밖에 있을 세원에게 온통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친 하빈이 욕실을 나와 팔랑거리며 방안을 돌아다녔다.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홱 몸을 돌리자 세원이 잠시 하빈을 바라보다 웃으며 다가왔다.

응? 고개를 갸웃하는데 세원이 손을 뻗어 제 샤워가운의 허리께에 달려 있던 띠를 묶어 주며 말했다.

“잘 차려입어야지.”

“아, 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하빈이 슬쩍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봤다. 저보다 한 뼘은 큰 세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딱 이마에 입술이 닿을 듯한 느낌이었다.

눈이 마주치고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진득하게 시선이 엮이고, 하빈은 고민하다 세원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자 하빈의 등허리에 머무르던 세원의 손이 바짝 다가와 하빈의 허리를 감쌌다.

“김하빈.”

“……네.”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하빈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세원이 더욱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코가 닿을 듯 밀착된 채로 그가 속삭였다.

“괜히 묶었나?”

“풀어 주세요…….”

하빈이 중얼거리자 세원이 단숨에 입술을 집어삼키며 입을 맞춰왔다. 그렇게 키스가 시작되었다. 하빈은 끙끙거리며 세원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려 애를 썼다. 입안을 잔뜩 헤집는 혀에 짜릿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 응…….”

입을 벌리자 숨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틀어 입을 막았다. 흐응, 읏,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바짝 붙은 두 사람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페로몬이 뒤섞이기 시작하고 자극적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세원이 살짝 떨어져 나가자 하빈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젖은 입술을 핥았다. 세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우읏, 짓이겨지고 빨아 당겨지는 입술이 아프면서도 좋았다. 그저 좋았다. 세원의 손이 하빈의 옷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흐응, 응…….”

천천히 자리를 옮긴 세원이 소파에 앉아 하빈을 무릎 위에 앉히고 가운을 벗겨 냈다. 가운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세원은 하빈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다가도 쪽쪽 빨고 가슴을 지분댔다.

“으, 앙…….”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감각에 하빈이 홀린 듯 몸을 들썩였다. 온몸이 그의 손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빈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그저 그에게 모든 걸 맡긴 채 신음했다.

“하아, 흐……. 좋아, 좋아요…….”

세원의 입술이 내려와 돌기를 빨다 살짝 깨물며 잡아당겼다. 아흑, 하빈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다리를 움찔거렸다. 세원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하빈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몸을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몸을 밀착시킨 채로 애무가 이어졌다. 세원은 하빈의 가슴 주변을 끊임없이 물고 빠는 와중에도 허리를 지분대며 하빈을 괴롭혔다.

자신은 지금 그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이미 꼿꼿하게 선 페니스를 어찌할 줄 모르고 허벅지를 달달 떨던 하빈이 몸을 들썩이며 세원에게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귀여운 행동에 세원은 피식 웃으며 얼굴을 들고 하빈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안달이 났을까.”

“세, 세원 씨…….”

“응.”

“세원 씨…….”

손을 멈춘 세원에 애가 탄 하빈이 제 앞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세원은 큰 손으로 하빈의 등을 쓸어 주며 속삭였다.

“그러고 있으니까 더 예쁘네.”

“흐으응……. 아앙, 앗.”

세원의 손이 드로즈 속을 파고들었다. 하아, 흐, 아응……. 하빈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세원이 제 페니스를 잡고 조몰락거리자 하빈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울망울망한 눈빛이 세원을 향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하빈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하빈은 쪽쪽거리며 그에게 짧게 키스했다. 두 입술이 맞닿고 격하게 혀가 얽히며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흐읏, 흐, 으응.”

“갈 것 같아?”

“네, 네에, 흐윽, 으.”

“일어나 봐.”

그의 말을 따라 하빈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속옷과 가운을 벗고 전라로 올라앉은 채 하빈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해 본 적 있어?”

“아니요…….”

“아플 텐데.”

망설이는 눈빛에 더욱 몸이 달았다. 자신은 이미 잔뜩 뒤가 젖은 느낌인데 뭐가 더 필요할까, 세원의 허벅지 위로 살포시 올라앉은 하빈이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며 손으로는 세원의 페니스를 슬쩍 움켜쥐었다.)

이렇게 하면 되려나……. 세원의 허벅지 위로 하빈의 애액이 묻어나며 길게 늘어졌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 막…….”

이렇게……. 무릎에서 내려온 하빈은 몸을 숙여 세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페니스를 붙잡아 입으로 가져왔다. 어마어마한 크기에 잠시 숨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벌려 끝을 물었다.

혀를 살살 굴리며 세원의 것을 핥던 하빈이 목구멍닿도록 깊이 머금고 빨아 대며 나름 세원을 흥분시켜 보겠다고 애를 썼다.

“기둥도 빨아 봐.”

그의 말에 하빈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자 세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아……. 이상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짜릿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걸까.

기둥을 핥아 올리며 여전히 눈을 마주치고 있자 세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하빈을 보며 살짝 신음을 흘렸다. 낮은 음성에 하빈은 히죽 웃으며 빠르게 페니스를 빨아올렸다.

그렇게 턱이 아프도록 움직이고 있는데, 세원이 됐다며 하빈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뒤는 얼마나 젖어 있나 볼까.”

“네에? 흐, 앙.”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하빈의 손목을 잡아챈 세원이 손가락 하나를 하빈의 뒤로 쑥 밀어 넣었다. 이미 질척하게 풀려 한 개쯤은 수월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하빈이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세원이 하빈을 품에 안고는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으며 거칠게 쑤시기 시작했다.

“하, 으항! 아! 자, 잠깐, 하앗!”

다리를 바들바들 떨던 하빈이 세원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들썩이자 세원이 하빈의 페니스를 잡아 흔들며 또 다른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앞뒤로 몰아치는 자극에 절정을 맞은 하빈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고,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어떡해……. 세원의 손에 가 버리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정의 여운에 젖은 하빈이 축 늘어져 눈을 감고 있는데, 그새 하빈을 소파에 눕힌 세원이 다리 사이로 들어와 제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하빈에게 말했다.

“넣는다.”

“하아……. 잠깐, 세원 씨.”

“응?”

“처, 천천히, 아, 아파, 으, 흐읏.”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아픔에 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위로 몸을 겹치며 천천히 삽입을 시도했다. 꾸물꾸물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아……. 안을 가득 채우는 그의 페니스에 하빈은 입술을 꽉 깨물고 팔을 뻗어 세원을 끌어안았다. 정말 이상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정도로. 온몸이 간질거리고 아래가 뻐근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많이 아파?”

“조금, 아파요…….”

“움직여도 될 것 같으면 말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세원의 말에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다리로 세원의 허리를 감았다. 몸을 찰싹 붙이고 있자 심장이 콩닥거렸다. 물론 제 심장만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긴장했던 내벽이 점점 풀어지며 페니스와 찰싹 달라붙은 느낌이 들었을 때, 하빈이 세원을 바라봤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부끄러운데. 그를 바라보자 기다리고 있다는 듯 입을 맞춰 왔다. 잠시 망설이던 하빈이 세원을 당겨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세원 씨…….”

“어.”

“바, 박아 주세요.”

그는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멋쩍은 느낌에 우물쭈물하다 다른 말을 꺼내려 하는데 세원이 갑작스럽게 퍽 쳐 올리자 아흑! 하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아 줘?”

거친 움직임에 놀라 눈을 뜨고 그를 돌아봤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예뻐서 미치겠네.”

“자, 잠깐, 우으, 읍.”

과격한 키스에 입이 틀어막히고 빠른 추삽질이 이어졌다. 맞붙은 입술 안에서 하빈의 신음이 응응 울리고, 세원은 허리를 흔들며 하빈의 안을 파고들었다. 퍽퍽 쳐 올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대로 싸 버린 탓에 앞뒤로 정액과 애액이 줄줄 쏟아져 나왔고 하빈은 제 안을 채우는 페니스와 정액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앙앙댈 뿐이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아찔한 느낌은. 머릿속이 온통 이상하고 황홀했다.

“하앙! 아! 흐앙, 아앙.”

눈물을 매달고 흔들리며 우는 하빈에 세원은 입맛을 다시며 골반을 붙잡았다. 진득하게 허리를 돌리다 빠르게 안을 파고드는 몸짓에 하빈은 녹아내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벗어나려 했지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세원은 아예 하빈의 몸을 뒤집어 엎어트리고는 엉덩이를 활짝 벌려 안에 흥건한 정액을 손가락으로 빼내며 말했다.

“다시 채우자.”

“후으, 흐, 읏……. 아앙……. 하지, 마, 하지 마요…….”

“하지 마?”

“으응, 응, 흐응…….”

하빈이 고개를 푹 처박고 끙끙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좋았다. 그와의 섹스가.

발끝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몸을 바르르 떨며 뒤를 돌아보자 세원이 다시 페니스를 붙잡고 삽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 몸이 짓누르는 적당한 무게감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아래에 깔린 채로 흔들리면서도, 죽을 듯이 신음을 내지르면서도 하빈은 머릿속을 지배하는 쾌락에 눈이 멀어 버렸다. 안을 파고드는 세원의 큰 페니스에 다리를 버둥거리며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쥐어뜯었다.

“흐, 으흣…….”

“아직도 더 할 수 있지?”

“하아, 흐앙, 아, 흐, 읏, 몰라요, 몰, 라.”

하빈이 끅끅거리며 숨이 넘어가도록 울자 질펀하게 사정한 세원이 천천히 빠져 나와 하빈의 몸을 다시 돌려 눕혔다. 얼굴을 마주하자 잔뜩 흥분에 젖은 그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세원은 하빈을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으며 뺨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울며불며 좋다고 하니까 예쁜데?”

“후으, 하으……. 세원 씨…….”

“응?”

“세원 씨…….”

하빈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세원은 알겠다는 듯 다가와 하빈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천천히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하빈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제 페니스에 맞춰 삽입을 시도했다.

“하아, 흐, 앙…….”

느릿하게 들어오는 페니스에 하빈이 고개를 젖히고 세원의 어깨를 꽈악 붙잡았다.

“움직여봐.”

“시러요, 못, 해, 하, 앙,”

“얼른.”

“으응, 싫어, 시러,”

“하빈아.”

세원의 부름에 하빈은 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몸을 들썩이며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작은 자극이 이어지자 아쉬운 마음에 점점 몸짓이 격렬해졌다.

세원은 그런 하빈의 허리를 붙잡아 제 마음대로 흔들며 이리저리 찔러 넣었다. 호리호리한 몸이 그의 손에 붙잡혀 마구 휘둘렸다.

“흐, 으앙! 앗!”

“미치겠네…….”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푹 내쉰 세원이 하빈을 그대로 다시 눕혀 추삽질을 시작했다. 강하게 끝까지 박아 넣으며 빠르게 쳐 올리는 그의 몸짓에 하빈의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하빈이 바들바들 떨며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커다란 손이 하빈의 허리를 붙잡아 다시 쑥 끌어당기고는 계속해서 허리 짓을 이어갔다. 눈앞이 번쩍이는 느낌이었다. 하빈은 이제 정신을 반쯤 놓은 채 힘을 빼고 세원에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하빈이 힘겹게 다시 샤워하고 방으로 들어와 폭 엎어지자 세원이 따라 들어왔다. 왜요? 반쯤 감긴 눈으로 이불을 끌어 올리는데 세원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같이 자자고.”

진심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다정하게 제 머리 밑으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 준 세원은 잠시 얼굴을 마주하다 말없이 자신을 확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게서는 호텔 바디워시 향기가 났다. 제게서도 나는 향기가.

“잘 자.”

그의 목소리에 하빈은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있어야지. 좋으니까…….

* * *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세원의 가슴팍에 놀란 하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온몸의 근육이 아려 왔다. 낑낑 소리를 내며 웅크리자 뒤따라 잠에서 깨어난 세원이 하빈의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주물렀다.

여기저기 닿는 손길이 간지러워 슬쩍 몸을 빼내려 했지만, 세원은 하빈을 바짝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많이 아파?”

“괘, 괜찮아요.”

그가 하빈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맞닿은 몸으로 전해져 오는 뜨끈한 체온에 하빈은 오히려 바짝 얼어붙었다. 하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숨만 들이켰다 내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세원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걸까…….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직도 졸리네.”

하빈은 움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졸려? 하고 묻는 말에 잠시 고민하다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좀 더 잘까?”

몸을 누이며 하는 말에 하빈은 세원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다시 잘 수 있을까.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원은 그런 하빈을 품에 꼭 끌어안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 틈에 하빈이 빼꼼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봤다.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몸, 돈도 많고 성격도 좋고 어느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게는 과분하다 못해 쳐다보지도 못할 존재인데…….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슴에 괜히 헛바람이 든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뜨거웠던 지난 밤이 떠올라 어쩐지 가슴이 부풀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세원 씨는 자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는지 다시 일어났을 땐 이불이 목까지 덮인 채였고, 옆은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 옷을 다 차려입은 세원이 테라스에서 통화 중인 것이 보였다. 하빈은 멍하니 세원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었다.

“목마른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을 두리번거리다 물이 반쯤 남아 있는 페트병이 눈에 띄었다. 이거 마셔도 되겠지? 하빈은 의자에 푹 늘어져 물을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세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힐끗 침대를 돌아보던 순간 인상을 찌푸리고 홱 뒤를 돌았다. 무언가 찾는 듯한 모습에 도와주려 몸을 반쯤 일으키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세원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와 말을 걸었다.

“분명히 자는 거 확인하고 나왔는데, 없어서 놀랐네.”

“아, 방금 깼어요.”

“잘 잤어?”

“네.”

세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하빈의 머리를 쓰다듬다 손을 내려 뺨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뭐 하는 걸까, 멍하니 세원을 올려다보며 그 손길을 받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자다 깨서 그런가, 더 귀엽네.”

“……아, 아닌데.”

“아니야?”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중얼거리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세원이 뒤에서 재빨리 허리를 감싸 안았다. 스킨십에 당황한 하빈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무, 무슨……?!”

“어젯밤에 힘들었을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는 다정했다. 너무 다정해. 제 생각보다 더, 그 이상으로. 하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세원의 손을 풀어 내며 집에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원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어제는 계속 같이 있자고 하더니 한 번 하니까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야?”

“그게 무슨!”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하빈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세원은 웃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면 내가 태워다 줄게.”

몸 아프잖아. 응? 유혹하듯 속삭이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하빈은 결국 입을 다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사는 동네에서도 저 꼭대기에 처박혀 있어 부끄러운 마음이 컸지만, 세원이라면 자신이 어디에 살건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하빈이 먼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세원이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배는 안 고파?”

“조금 고파요.”

“뭐 먹고 갈래?”

“……네.”

“솔직해서 좋다니까.”

기분 탓일까 그가 자주 웃는 것 같았다. 명치 부근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하빈도 그만 히죽 웃어 버렸다. 그러자 세원이 하빈의 볼을 붙잡아 주욱 늘리며 말했다.

“예쁘네.”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왜?”

“그냥…….”

하빈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도망치듯 먼저 밖으로 나갔다. 마른 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세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자신에게 예쁘다, 귀엽다, 해 대는 건지……. 하빈은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세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밑에서 간단하게 조식 먹을까?”

시간을 확인한 세원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하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식이요?”

“어.”

호텔 조식 안 먹어 봤는데……. 기대에 부풀어 그를 따라가자 아침 식사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한 뷔페가 펼쳐져 있었다. 하빈이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 앉아 세원을 바라봤다.

“먹고 싶은 거 갖다 먹어. 난 잠깐 전화 좀 하고.”

“네!”

각종 빵부터 시작해 밥과 반찬, 그리고 햄과 달걀까지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접시를 들고 쏘다니며 먹고 싶은 것들을 주워 담고 있는데 어느새 세원이 옆으로 다가와 하빈의 접시를 대신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속 안 쓰려?”

“우응?”

입에 잔뜩 소시지를 넣고 있던 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세원을 쳐다봤다. 그의 앞에는 오렌지 주스 한 잔만이 놓여 있었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잘 먹네 싶어서.”

“아아…….”

입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콜라를 한껏 들이켠 하빈이 대답하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제가 원래 술은 조금 약한데 숙취는 별로 없어요.”

“술 약하면 어제 조금만 마셨어야지.”

“조금 약한 거지 엄청 약한 건 아닌데…….”

세원의 타박에 고개를 푹 처박고 깨작거리자 많이 먹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운한 마음에 그만 먹겠다 할 법도 했지만 하빈은 알겠다며 냉큼 다시 손을 움직여 해시 브라운을 입으로 가져왔다.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엄청 맛있다…….

“앞으로 너는 술 적게 마시는 게 좋겠다.”

“왜요?”

“그야 그렇게 취해서…….”

주스를 마시던 세원이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하빈을 바라봤다. 하빈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슨 행동을 할지 어떻게 알아.”

“저 아무 짓도 안 하거든요?”

당당하게 말하자 세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아무 짓도 안 한다고?”

“네!”

“어제 나랑 한 건 뭔데.”

그의 말에 하빈이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시선을 피했다. 그, 그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아니라…….”

“김하빈 너무한데.”

잔뜩 당황해 포크를 내려놓고 옆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목을 축이려 했지만 방금 마셔 버린 탓에 텅 비어 있었다.

“저, 저 콜라 좀 따라 올게요.”

“갔다 와.”

키득거리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어쩐지 얄미웠다. 세원 씨는 저렇게 태평한데 나는 왜 당황한 거지? 어리둥절해선 도망치듯 음료수기에 다가갔다. 콜라를 채우는 동안 뒤를 힐끔거리면 세원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거봐, 나 신경 안 쓰고 있잖아……. 시무룩해진 하빈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콜라를 들이켰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세원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하빈에게 물었다.

“정말 술 약한데도 아무 데서나 마시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어제는 진짜, 그냥, 기분이 좋아서…….”

홧김이었다. 저도 그렇게 세원에게 들이댈 줄 몰랐는데. 하빈이 멋쩍은 얼굴을 하자 알겠다며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었다. 그의 투박한 손길에 조금 서운했던 마음이 금세 풀린 하빈이었다.

호텔을 나온 세원은 하빈이 찍어 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허름한 빌라촌으로 들어서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세원의 차를 돌아봤다. 세원에게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웠지만 그 반대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채 버렸다.

하빈이 괜찮다며 이쯤에서 내리겠다 했지만, 그는 문을 열어 주는 대신 계속해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 위까지 버스가 다녀?”

“아, 아니요…….”

“그럼 걸어 다니는 거야?”

“네.”

“진짜 힘들겠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세원에 하빈은 뻘쭘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매일같이 걷던 길이 어쩐지 더 낡아 보였다.

늘 걸어 다녀서 길게만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도 짧은 건지, 차를 타고 오르자 금방 집 앞에 다다랐다. 하빈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지만,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뭐 할 말 있어?”

“아니, 그게요…….”

“어.”

세원은 핸들에 몸을 기대고 하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를 또 만나고 싶었다. 연락이라도 조금 더 하고 싶은데……. 이대로 차에서 내린다면 세원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빈은 고민하다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혀, 형이랑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제, 제가 형한테 다시 물어볼까요?”

“그럴래?”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형보고 꼭 나오라고 할게요.”

“어제도 갑자기 바빴다니까 뭐, 사정이 있으면 어쩔 수 없는데…….”

“제가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눈을 반짝이며 세원을 바라봤다. 마주한 두 눈에 세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알겠다며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잘생겼다…….

이 와중에도 그에게 설레는 자신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런 제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세원은 연락하라며 마냥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차가 멀어져 가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빈 골목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하빈은 세원을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향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마음을 빼앗기게 될 줄이야. 천천히 뒤를 돌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당장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지난밤의 꿈만 같던 시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갔다.

“아…….”

집으로 들어온 하빈이 신발을 벗고 무너지듯 주저앉아 제 얼굴을 감싼 채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가득하던 마음이 푹 꺼져 버리자 외로움이 사무쳤다.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하빈은 침대에 늘어져 오후 내내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떨어지고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혹시나 연락이 왔을까 싶어 핸드폰을 확인하자 지환에게서 전화가 몇 통 와 있었을 뿐 세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하빈이 시무룩한 얼굴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낮에 뭐 했길래 전화를 안 받았어?]

“잤어.”

[아, 잤어?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일은 무슨, 아무것도 아니야.”

대충 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빈이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컴컴한 하늘에 희미하게 뜬 달이 예뻤다.

[어제 엄청 바빴어. 그냥 걔한테 빌리는 건 포기해야겠다.]

지환의 말에 하빈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한 번만 더 만나 보자.”

[왜?]

“그, 그 사람이 형 만나 보고 싶다는데…….”

[뭐하러 만나는데. 아, 싫어. 됐어.]

“그래도…….”

[나 요즘 바빠서 시간 못 내.]

단호한 지환의 대답에 하빈은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원과도 이대로 끝인 건가……. 한숨을 푹 내쉬자 지환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너 혹시 걔랑 무슨 일 있었어?]

“응?”

[왜 그렇게 만나자고 하는데?]

“아니…….”

날카로운 질문에 하빈이 방을 서성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둘러댈 말을 찾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기엔 지환이 됐다고 했고, 세원이 보자고 했다기엔 방금도 싫다고 했고…….

[김하빈.]

“왜, 왜에…….”

[똑바로 말 안 해?]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나, 나 잤어.”

[뭐?]

정적이 흘렀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자, 잤다고…….”

[누구랑? 강세원이랑?]

“어, 어.”

[언제? 어제?]

“으응.”

니가 미쳤지! 지환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빈이 질끈 눈을 감고 핸드폰을 살짝 귓가에서 떼어 냈다.

[둘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강세원 이 새끼 진짜 죽여버려, 아무것도 모르는 애 데리고 뭔 짓을 한 거야?]

“그게,”

내가 하자고 한 건데……. 하빈이 중얼거리자 어이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뭐라고?]

“내가 하자고 한 거야…….”

[하자고 했다고 진짜 해?]

“엄청…….”

말하고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엄청 했지, 진짜 엄청.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흠…….]

“왜?”

[강세원 성격에 그럴 놈이 아닌데.]

“어제 둘 다 너무 취했었어.”

[술 취했다고 아무하고 잘 새끼가 아니야. 그놈이 너 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지환이 고민하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지금 하빈은 지환이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도 않는 상태였다. 마음에 든 것 같다고? 진짜? 내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연락해 봐도 되지 않을까……. 속으로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통화에 집중했다.

[하빈아, 김하빈.]

“으응, 왜?”

[순진한 애 꼬드겨서 나쁜 짓 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하지만 나랑 뭐 할래?]

“뭔데? 나 하나도 안 순진하거든?”

당당한 말에 지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안 순진해? 나빠? 애 취급을 하자 하빈이 뾰로통해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알았어, 알았어. 아니, 강세원이 너한테 마음 있으면…….]

“있으면?”

[네가 꼬셔서 걔랑 사귀라고.]

“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빈이 중얼거렸다. 지환은 왜 말이 안 되냐며 소리쳤다.

[들어 봐. 네 외모면 강세원 홀리고도 남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사귀고 뭐 하는데…….”

[이용해야지.]

“나쁜 짓이잖아.”

[그래서 나쁜 짓이라고 했잖아.]

“나쁜 짓 하는 것 같다고 했지 나쁜 짓이라고는 안 했잖아.”

[거봐, 순진하네.]

“아니거든!”

[그럼 할 거야?]

“뭐어?”

이상하게 흘러가는 대화에 잠시 당황한 사이 지환이 살살 하빈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에 하빈이 침대에 걸터앉아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하면 형이 걔한테 당한 게 있어. 복수하고 싶은데.]

“뭔데?”

[사귀면서 강세원이 나 상대도 안 해 주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형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진짜?”

[걔가 얼마나 무뚝뚝한 새낀 줄 알아?]

“안 그런 것 같던데…….”

제겐 한없이 다정한 세원이었다. 하빈이 그저 갸우뚱하자 지환은 짜증을 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사문 씨랑 결혼했는데. 지금 네 형부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 줄 모르냐?]

“아, 알지…….”

[너도 그러니까 강세원이랑 연애만 좀 하다 결혼은 다른 놈이랑 해. 연애만. 연애하면서 형한테 돈도 빌려주라고 하고.]

“아, 형!”

키득거리는 지환의 반응에 하빈은 장난치지 말라며 소리쳤다. 처음에야 진심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지.

[다음 달에 나랑 같이 만나자고 하고 그동안 네가 유혹해 봐.]

“됐어……. 이상한 소리 그만해.”

[그럼 만나 줄게. 걔가 나 만나고 싶다 했다며.]

세원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지환의 말에 솔깃해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세원은 지환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 했으니 도와줄 수 있었고, 자신은 몇 번일진 몰라도 그와 더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환은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아니, 뭐. 그냥 한 말이니까 싫으면 말고. 난 진짜 혹시나 해서 한 말이야. 강요하는 거 아니고.]

금세 빼는 듯한 그의 말에 하빈이 서둘러 대답했다. 알겠다고.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러면 형 진짜 세원 씨 만날 거야?”

[어. 다음 달 말쯤에 시간 내 볼게.]

“알았어…….”

[그때까지 강세원 열심히 꼬셔 봐.]

“아, 몰라…….”

[뭘 몰라. 재주껏 해 봐. 그냥 얼굴로 들이대도 넘어오겠다.]

아니라며 대충 대답한 하빈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세원의 번호를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시간을 보자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전화하기엔 너무 늦었나? 메시지를 남기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왔다.

거울을 보던 하빈이 제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지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얼굴로 들이대면 넘어오겠다는.

나 좀 잘생겼나? 예쁘게 생겼나?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눈을 껌뻑이며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하빈이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옷을 벗었다.

몸을 씻는 동안 계속 지환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세원은 정말 지환에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그렇게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사람이었다고? 나에겐 그렇게 다정하면서?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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