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계획된 만남 (1/20)

1. 계획된 만남

스산한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밋밋한 디자인의 회색 코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펄럭였다. 하빈은 벌벌 떠는 모양새로 커다란 유리문 앞에 서서 높은 빌딩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창문이 쏟아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붉디붉은 입술에서 긴 한숨이 흩어졌다.

빌딩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한 번씩 그를 힐끗거리며 지나쳤다.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하빈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이 모든 것은 가족을 위한, 나를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회전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인테리어의 넓은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중앙에 있는 안내 센터의 양옆으로는 출입을 통제하는 차단기가 세워져 있었다.

그저 빌딩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면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하빈은 바로 마주하게 된 장애물에 당황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자 경비원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 네?”

“방문객이시면 안내 센터에서 안내를 받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친절한 그의 말에 하빈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넸다. 안내 센터로 향하는 동안 하빈은 위로 올라가 무슨 말을 꺼낼지 곰곰이 생각했다. 본인이 직접 왔어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신이 대체 어떻게 대신 말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안내원의 말에 하빈은 입을 벙끗거리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사님을 뵙고 싶습니다…….”

“정확히 어떤 분을 말씀하시나요?”

“강세원 이사님…… 계신가요?”

들려온 이름에 안내원은 잠시 하빈을 주욱 훑어내리고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빈의 입이 바싹 말라 들어갔다. 점점 마음이 초조해지고 무의식중에 엄지의 지문이 닳도록 잘근잘근 씹어 댔다.

“누구라고 말씀드릴까요?”

“그, 어…….”

제 이름을 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김지환 씨 동생이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잠시만요.”

안내원이 비서실과 연락하는 동안 하빈은 지환을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자신의 형.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며 신발 밑창으로 대리석 바닥을 박박 긁고 있는데 옆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있자 나름 신경 쓴다고 챙겨 입은 자신의 옷이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19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잠겨 있던 차단기가 스르륵 열리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온 하빈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 네 대가 한쪽 벽면에 일렬로 붙어 있고 맞은 편 벽면에도 네 대가 나란히 총 여덟 대가 운영되고 있었다. 밖에서 볼 때도 컸는데 안은 더 크네.

어쩐지 압박감이 몰려왔다. 숨이 턱 막혀 오는 느낌에 하빈은 애써 주먹을 꽉 쥐고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 확인 등만 쳐다보며 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세원이 있는 19층은 올라오며 얼핏 보던 다른 일반층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검은색과 짙은 와인색을 포인트 컬러로,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꾸며진 실내에 하빈은 다소 위축되었다.

그의 취향인 걸까, 하빈이 생각하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실 입구로 보이는 커다란 문 옆으로 불투명한 유리에 둘러싸인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비서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나와 인사를 하며 하빈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정중하게 묻는 말에 하빈은 잠시 머뭇거리다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럼 우선 이사님께 오셨다고 말씀드리고 여쭤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안으로 들어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빈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가만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이며 그를 기다렸다. 올라오는 사이에 마음이 변했으면 어떡하지, 만났는데 싫다고 하면 어쩌지, 형 대신 나한테 화내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하빈의 앞으로 다시 나타난 비서가 자리를 비켜서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들어가시지요.”

“네?”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하빈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댔다. 안으로 걸어가자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저 남자가 강세원이구나. 하빈이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지환이 몇 번 보여줬던 사진에서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세원이 천천히 눈을 떠 하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썹을 작게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김지환 동생?”

“네, 네?”

“비서 말로는 김지환 동생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아, 아아…… 네, 네. 맞아요.”

어리숙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빈이 시선을 피하며 팔꿈치를 만지작거렸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빤히 쳐다보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앉아.”

“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비서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는 작게 웃고 이사실을 빠져나갔다.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네…….

하빈이 커피를 홀짝이며 슬쩍 세원을 힐끔거렸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지?”

먼저 정적을 깬 쪽은 세원이었다. 하빈은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세원은 별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배려에 길게 숨을 들이마신 하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그게요…….”

돈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점점 숙인 고개는 마침내 바닥을 향해 콕 처박혔다. 수치심에 얼굴이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하빈도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절할 게 분명했지만 한 마디라도 꺼내 봐야 했다.

세원은 한참 말이 없었다. 하빈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기나긴 침묵은 싸늘하기까지 했다. 두려웠다. 무슨 호통이 떨어질까, 공포에 심장을 졸이고 있는데 드디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시켰어?”

예상치 못한 물음에 하빈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네?”

“형이 시켰냐고.”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가지가지 한다.”

“그, 그렇죠……. 죄송합니다…….”

“전 애인한테 돈 빌려오라고 동생을 보내는 미친 새끼가 어디 있어?”

여기 있네요……. 하빈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차마 얼굴을 바라볼 염치가 없었다. 세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끼며 물었다.

“김지환은 뭐 하고 사는데?”

“네?”

“나랑 헤어지고 그 뒤로 뭐 하고 사냐고.”

“아, 그게…….”

세원은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지환이 세원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했는데…….”

결혼했다는 것을.

“뭐?”

순식간에 구겨진 표정에 하빈은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언제?”

“그, 그쪽이랑 헤어지고 얼마 안 지나서요.”

“……그래?”

더 따지고 들 것 같았던 세원은 별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하빈은 속이 타들어 갔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그에 맞추어 죄송하다 빌었을 텐데, 그저 알았다는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돈 많은 부잣집의 성격 나쁜 막내아들이라 생각했건만.

세원은 어떤 사람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형의 말로는 싸가지가 없다느니 매정하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것 같은데, 세원은 제법 배려심이 있었고 오히려 자신보다 더 차분한 성격으로 보였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에 하빈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을 달싹이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 돈은 빌려주실 거예요?”

“아 참, 그것 때문에 온 거지.”

잊고 있었다는 듯 세원이 피식 웃으며 하빈을 바라봤다.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하빈이 뒤늦게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커피가 다 식어갈 때 즈음에 입을 열었다.

“김지환보고 나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라고 해.”

“……네?”

“돈 필요한 사람이 말하게 시키라고.”

쓸데없이 동생 귀찮게 하지 말고. 세원의 말에 하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알을 굴렸다. 지환의 성격상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세원을 제법 원망하고 있는 상태였다. 망설이는 하빈을 보던 세원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

“하지만…….”

“김지환을 꼭 좀 봐야겠어.”

흔들림 없는 눈빛에 하빈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걱정하지 마. 다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냥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빌리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지환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 김지환보다 훨씬 예쁘네.”

“아, 저, 그러니까…….”

얼굴로 쑥 다가온 손에 당황한 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가 볼게요. 가만히 바라보던 세원도 함께 일어나 그 옆으로 다가왔다. 키는 한 뼘 정도 차이가 났지만 슈트 위로도 느껴지는 탄탄한 몸에,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기까지 하자 기가 팍 죽은 하빈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으, 앗,”

테이블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 세원이 빠르게 하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품에 폭 안겨 버린 상황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안겨 있으려고?”

“아, 아아, 죄송합니다…….”

후다닥 떨어져나온 하빈이 옷을 여미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세원은 그런 하빈을 훑어내렸다. 그의 시선에 더욱 부끄러워진 하빈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려 서둘러 걸어가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따라오는 거지.

힐끔 뒤를 돌아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정장 재킷을 풀어헤치며 다가온 세원이 문을 열어 주고는 몸을 숙여 하빈의 귓가에 속삭였다. 김지환보고 전해, 꼭 직접 찾아오라고. 낮은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하빈은 자리에 우뚝 얼어붙은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하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바짝 붙어 속삭이는 세원의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자신을 뒤흔들었다.

형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지환을 만나게 해 주면 돈을 빌려주겠다는 건지 아닌 건지 확답도 듣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울상을 하고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에 뜬 이름은 형, 지환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빈이 한숨을 푹 내쉬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왔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아니, 그것보다 만나긴 했어?]

“어. 만나긴 만났는데…….”

말하는 도중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서도 전화가 터지려나, 고민한 하빈이 올라타 문을 닫자 역시나 통화가 뚝뚝 끊겼다. 지환도 마찬가지였는지 참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여보세요? 야, 왜 대답을 안 해? 뭐 하길래 이렇게 끊겨?]

“지금 엘리베이터 타서 그래.”

[뭐라고? 안 들려!]

“엘리베이터 탔다고!”

[엘리베이터 타면 탄 거지 왜 소리치고 난리야!]

“안 들린다고 먼저 짜증낸 게 누군데!”

[아, 됐어. 나중에 다시 전화해.]

통화가 끊겼다. 하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지환을 욕하는 것도 잠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층층마다 멈추며 사람들이 점점 들어차기 시작하자 하빈이 구석으로 바짝 붙어 몸을 웅크렸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다.

건물을 나와 정류장에서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길가에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하빈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환과 마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는 사이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옷을 정돈하고 차의 뒷자리 문 앞에 차렷 자세로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기사 딸린 차라니 대단한 사람인가, 하고 쳐다보자 몇몇 직원을 거느린 세원이 유리문을 빠져나와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세단 쪽으로 향했다. 하긴, 세원이라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금세 시시해진 하빈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차에 올라타려던 세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봤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그의 시선을 쫓아 이쪽을 돌아봤다.

“뭐, 뭐야…….”

당황한 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류장 판넬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형.”

[어. 지금 어디냐?]

“나 이제 버스 정류장인데…….”

힐끗 고개를 빼고 세원이 있던 곳을 바라보자 그는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모습에 넋을 놓은 사이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새끼가 안 빌려준다고 하지? 그럴 것 같았어. 돈도 많으면서.]

“아니, 안 빌려준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그럼 빌려준대?]

“형이 직접 와서 말하면 생각해 본대.”

[내가 미쳤다고…….]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그의 반응에 안심이 된 하빈이 피식 웃으며 그럼 뭐 어쩌라고, 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정류장에 있는 안내판을 올려다봤다. 버스가 곧 온다는 표시에 도로로 고개를 쭉 빼고 차를 기다렸다. 지환은 여전히 불퉁한 소리를 했다.

[아니,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그렇게 말해, 고민되게.]

“고민이 되긴 해?”

[내가 지금 돈이 얼마나 급한 줄 알아?]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돈이 없는 거야.”

[애들은 알 거 없어.]

무시하는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안 알려줄 거면 왜 말을 꺼냈냐며 투덜거리자 지환은 잠시 고민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지금 집 올 거야?]

“응, 아, 버스 온다.”

[집 오면 얼굴 보고 말하자. 술 한잔해야겠어.]

“술 마신다고?”

[어. 너도 마실래?]

“응.”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던 하빈이 볼 사람도 없는데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창밖으로 커다란 빌딩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런 동네는 좀처럼 올 일이 없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지환은 알겠다며 바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서 술을 사 가야 하는 거야, 아닌 거야? 메시지를 보내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내릴 때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깨어난 하빈이 서둘러 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사이 지환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집에 있는 걸 마시자는 말에 알겠다 말하고 비몽사몽 한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오르막을 쳐다봤다. 흐아…… 이걸 언제 올라가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서울 끝자락에 있는 하빈의 집은 언덕을 따라 빽빽하게 세운 빌라촌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매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불만이 많을 법도 했지만, 지환이 결혼한 지금은 함께 살던 전과 달리 혼자 지내며 그래도 나름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겁나 높네…….”

종아리 근육이 터질 듯 땅겼다. 거의 다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한숨 돌리고 있는데 지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아…… 여보세요…….”

[오고 있냐?]

“어, 거의 다 왔는데…….”

헥헥 숨이 차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갔다. 지환은 어쩌냐, 하고는 말을 꺼냈다.

“왜?”

[안주 좀 사 오라고 하려고 했지.]

“죽을래? 아, 싫어!”

[과자 좀 사 와라.]

“그냥 술만 마셔!”

[그거 뭐 얼마나 멀다고, 조금만 갔다 오면 되잖아. 수고해.]

짓궂게 킬킬대는 제 형이 얄미워 발을 동동 굴렀다. 김지환 이 새끼! 하빈이 짜증을 내며 한 걸음 내딛다 결국 뒤를 돌았다. 저 밑으로 보이는 편의점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은 누가 봐도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자 지환이 반가운 얼굴로 봉지를 받아들었다.

“나 기다린 게 아니고 술안주 기다렸지?”

귀여운 동생의 투덜거림에 지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하빈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악, 아파! 잘 닿지 않는 곳을 어루만지며 낑낑거리는데 지환이 하빈의 볼을 주욱 잡아 늘이고 말했다.

“가서 술이나 가져와, 형이 상 꺼낼 테니까.”

“형은 맨날…….”

“내가 맨날 뭐.”

홱 돌아보며 쏘아보는 눈빛에 입이 합 다물렸다.

“형 말 잘 들어라. 알았냐, 몰랐냐.”

“알았어어…….”

까불고 싶어도 까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환이 집값을 대신 내주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은 생활비만 벌면 되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하빈이 맥주를 꺼내 쪼르르 달려와 상에 올려놓고 맞은편에 앉아 잔을 집어 들었다.

“너 술 못 마시니까 많이 마시지 마.”

“응.”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지환은 뭐가 좋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쯤 채워진 잔에 하빈이 실망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더 줘!”

“안 돼.”

“집에서 먹는 거니까 괜찮거든?”

“안 된다고 했다.”

단호한 표정에 하빈이 꿍얼거리며 잔을 집어 들었다.

짧게 잔이 부딪치고 시원한 맥주가 목을 넘어갔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크으, 맛있다.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고개를 내저은 하빈이 과자를 집어 먹으며 지환을 바라봤다. 아까 한 이야기를 이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돈이 그렇게 필요해?”

“나 결혼할 때 사문 씨랑 재테크한다고 좀 무리해서 여기저기 돈 빌려가지고 집 산 거 알지.”

“응.”

“근데 집값 조금 오르는 것 같더니 전보다 더 떨어져서 큰일 났어. 빌린 돈도 갚아야 하는데 너무 벅차서 팔려니까 팔리지도 않고.”

“천천히 갚으면 되잖아.”

“갚기로 한 날짜가 있는데 어떻게 그러냐. 돌려 막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대출받아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어렵고…….”

“……그럼 내 이름으로 대출해 줄까?”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자 잠시 고민하던 지환이 벌컥벌컥 잔을 비우고 고개를 저었다.

“야, 됐어.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도 돈 벌고 그러니까 괜찮은데…….”

“네 이름으로 대출 뭐 얼마나 나온다고. 됐어.”

“왜! 나도 은행 가서 알아보면 꽤 나올 텐데!”

“됐다니까. 그냥 월급이나 잘 모아 뒀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써. 아니면 나중에 내가 하다, 하다가 정말 그 돈까지 필요하면 너한테 빌려 달라고 할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지환이 중얼거리며 잔에 술을 채웠다. 하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어쩐지 불쌍해 보이는 제 형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세원에게 돈을 빌리러 갈 때까지만 해도 그저 밉기만 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물론 무리해서 집을 산 건 잘못했지만 형도 수습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응?”

상 위로 술잔을 쾅 내려놓은 지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강세원 만나러 가자.”

“……뭐?”

“나 혼자서는 절대 못 가.”

“왜? 형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까 형이 가야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강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같으면 갈 수 있겠냐? 사문 씨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예전 애인을 혼자 만나러 가.”

“그, 그거야,”

“바람났다고 오해받을 일 있어?”

“그렇지만 그 사람이 다른 뜻으로 만나자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걔가 아니라고 했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잖아. 세상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누구 눈에 띄어서 무슨 말을 들을지 어떻게 알아.”

듣고 있자니 맞는 말이었다. 멍하니 있자 지환은 슬쩍 술을 따라주며 속삭였다.

“다 같이 만나면 사문 씨한테 뭐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 어때?”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냥 형이 하자는 대로 해.”

“알았어.”

하빈이 맥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내일 강세원한테 연락해서 만날 날짜 좀 잡아.”

“왜 내가 해?”

“애초에 네가 돈 빌리러 갔으니까 약속도 잡아야지. 그래야 안 이상하지.”

“그런 거야?”

“당연히 그렇지.”

“그렇구나…….”

당연하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알겠다 대답한 하빈이 뭐라고 약속을 잡을까 생각하는데, 문득 제게 세원의 연락처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나 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약속을 잡지?”

“나도 번호 몰라.”

“그럼 어떡해?”

“다시 찾아가야지 뭐.”

“헉, 싫은데…….”

“힘내라.”

장난스레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형에게 하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썹만 일그러트렸다. 한참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잔뜩 얼굴이 달아오른 하빈이 헤롱거리며 거실에 뻗어 버렸다. 지환은 그런 하빈을 보고 재킷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가려고?”

눈을 껌뻑이며 올려다보는 하빈에 지환은 발로 배를 건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사문 씨도 올 텐데.”

“자고 가지…….”

“너나 방에 들어가서 자라.”

“귀찮아…….”

“지금 일어나서 들어가.”

“시러어.”

몸을 홱 돌리자 지환이 한숨을 푹 내쉬며 상을 치우고는 방에서 이불을 가져왔다. 그 사이 하빈은 벌써 고롱고롱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 * *

다음날, 하빈은 날이 밝기 무섭게 다시 세원의 회사로 찾아가 그의 출근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번거롭게 사무실로 찾아가지 않고 출근길에 그를 낚아챌 작정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출근하는 여덟 시, 여덟 시 반, 아홉 시가 지나고 열 시가 다 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품은 끊이지 않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시간만 더 자고 나올걸…… 괜히 일찍 나왔네. 속으로 생각하며 벽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고급 외제 차 한 대가 매끄러운 드라이빙으로 들어와 건물 입구 앞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다들 조용히 하시고.”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주자 어제 봤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원의 비서였다. 그렇다면 저 차에 있는 사람은…….

“오셨습니까, 이사님.”

역시나 세원이었다. 하빈이 몸을 튕기듯 벌떡 일으켰다. 무심하게 끄덕이며 차 키를 건네 그대로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 안 돼……. 서둘러 세원을 쫓아 들어갔다.

“자, 잠깐만요!”

다급한 외침이 로비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곧이어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리를 질러 놓고 놀란 나머지 하빈이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모든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자 세원이 하빈을 빤히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본 김지환 동생이네.”

“아, 네…….”

“무슨 일이지? 내가 분명 김지환보고 직접 오라고 했을 텐데.”

“그게요, 그러니까, 형이…….”

손을 마주 잡은 채 머뭇거리며 주변을 살피자 세원이 먼저 하빈의 어깨를 감싸고 몸을 돌렸다. 그에게서 페로몬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시원하면서도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느낌에 하빈의 정신이 멍해지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세원의 일행과 멀어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어왔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형이 셋이서 보자고 해서…….”

“셋?”

“저, 저랑 형이랑 그쪽이랑…….”

떠듬떠듬 전한 말에 세원이 몸을 떨어트리고 하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잠시 눈을 마주하고 있자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니까 이건 방금 맡은 페로몬의 영향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맞아, 그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하빈이 한 발짝 물러나 시선을 피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언제가 좋은데?”

“네?”

“약속 잡으러 온 거 아니야?”

“마, 맞아요.”

“내 번호 줄 테니까 이리로 연락해.”

세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핸드폰을 달라며 재촉하듯 까딱거렸다. 하빈이 허둥지둥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괜찮은 시간 알려주시면 저희가 다 맞출게요.”

“그래. 아, 근데 그것보다 너. 넌 이름 뭐야.”

“저요?”

“김지환 동생이라는 것만 알지, 아직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야?”

빠르게 번호를 저장한 세원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다정한 말투와 행동에 하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하, 하빈. 김하빈이요…….”

“김하빈?”

“네.”

이번에는 세원 쪽에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얼른 받아들고 번호를 찍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형보다 훨씬 예쁘네.”

하빈의 손이 우뚝 멈춰 버렸다. 또 예쁘다니……. 고개를 살짝 들고 그를 힐끔 쳐다봤다. 세원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여, 여기요.”

핸드폰을 내밀자 그는 알겠다며 받아들고는 다른 쪽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다가 귀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스킨십에 놀란 하빈이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원은 그저 피식 웃으며 조금 더 하빈의 머리를 헝클다 손을 거둬 갔다.

나한테 왜, 왜 이러는 거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세원은 뒤를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이번 주 주말에 보자.”

“네? 아, 네.”

“자세한 시간이랑 장소는 메시지 줄게.”

“네…….”

“잘 들어가.”

멍한 상태로 세원을 바라보던 하빈이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의 얼굴에 파드득 고개를 떨구고 인사를 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 안녕히 계세요.”

세원은 하빈을 잠시 바라보다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하빈의 심장이 팔딱팔딱 미친 듯이 뛰어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주먹을 꽉 쥐고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하빈은 창밖을 바라보며 세원을 떠올렸다. 그의 다정한 행동 하나에 이렇게 가슴이 떨릴 줄이야. 심장이 찌릿거렸다. 아무리 내가 연애를 안 해 봐서 잘 몰라도 그렇지, 어떻게 겨우 두 번 본 사람한테 이렇게 설레고 난리야…….

하빈이 속으로 한탄을 하며 핸드폰을 꼬옥 붙잡았다.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아냐, 페로몬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런 거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형의 전 남자친구인걸…….

* * *

그날 저녁.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한가하게 침대에 널브러져 핸드폰을 만지던 중, 세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토요일에 만날 수 있냐는 별것 없는 내용에도 괜히 반가운 마음에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답장을 보내지?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되려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 윤정운, 너는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해.”

[무슨 전화를 그렇게 섭섭하게 받냐?]

“종일 같이 일하면서 얼굴 봤는데 나랑 또 대화가 하고 싶어? 지겹지도 않아?”

[친구끼리 뭐 어때. 야, 치킨 사 줄게. 나와.]

“싫어, 잘 거야.”

[뭐? 벌써 잔다고? 나와. 술 마시고 놀자.]

“싫다니까…….”

술은 잘 마시지도 못할뿐더러 정운을 만나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했다. 하빈의 단호한 거절에 정운이 그럼 이건 어떠냐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주 주말에 놀자.]

“나 주말에 약속 있는데.”

[약속? 무슨 약속? 너 나 말고 친구 없잖아.]

“아니거든!”

장난스러운 정운의 말에 하빈이 투덜거리며 짜증을 냈다.

“나 친구 엄청 많거든?”

[누구 있는데.]

“누구 있는지 알아서 뭐하게.”

[거봐, 없으니까 말 못 하지.]

“아이씨, 끊어!”

홧김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다시 정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잠시 핸드폰을 노려보던 하빈이 한숨을 푹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넌 장난인데 그렇게 끊어 버리냐?]

“나도 장난으로 끊은 건데?”

한참 티격태격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서로를 놀리며 떠들던 두 사람의 통화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끊어졌다.

아……. 문자 답장하는 거 까먹었다. 바로 보이는 메시지 창에 하빈이 인상을 찌푸리고 서둘러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금 답장해도 되려나. 늦은 시간에 실례려나? 읽고 씹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이게 다 윤정운 때문이야…….”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한숨을 푹 내쉬는데 지잉, 진동이 울렸다. 후다닥 확인하자 세원에게서 알겠다며 잘 자라는 답장이 와 있었다. 헉.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직 안 잤구나……. 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늦은 시간에 방해해서 미안하다 사과하자 세원은 괜찮다는 말을 해 왔다.

그렇게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지고 하빈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뿐이었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주로 말을 하는 쪽은 하빈이었고 세원은 맞장구를 쳐 주며 간간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둘의 대화는 새벽 세 시 무렵, 하빈이 핸드폰을 쥔 채 잠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눈을 뜬 하빈은 제 바보 같음을 한탄하며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왜 잤어! 왜! 발을 버둥거리며 짜증을 내던 하빈이 다시 세원에게 잠들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 안 오겠지…….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데 화면이 번쩍거렸다. 설마? 놀란 마음에 서둘러 확인하자, 다름 아닌 세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잘 잤냐는 물음에 하빈은 활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평소라면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내내 졸며 왔을 테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세원과 연락하기 바빴다. 그도 자신과 연락하는 게 제법 재미있는지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카페로 들어와 사장님과 친구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스태프 룸에서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

정운이 옆으로 다가와 하빈의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보지 마! 벽에 기대 서 있던 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애인 생겼냐?”

“아니이…….”

대충 대꾸하며 다시 세원의 메시지에 집중하는데 정운이 등 뒤로 슬쩍 달라붙으며 칭얼거렸다.

“너 요즘 딴 데만 신경 쓰고 나랑 안 놀아 준다.”

“혼자 가서 놀아.”

“너무한 거 아니야?”

“왜, 나 바빠.”

어깨에 둘린 팔을 툭툭 털어내며 하빈이 정운을 돌아봤다. 정운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

“누군데.”

“뭐가?”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하는데?”

“알 거 없잖아.”

“궁금하니까 그렇지!”

“몰라도 돼.”

진짜 치사하다. 잔뜩 삐진 표정을 한 정운이 투덜거리며 스태프 룸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내가 좀 심했나? 하빈은 걱정과 미안함 섞인 얼굴로 정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세원과 연락이 끊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돈을 빌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맞아, 돈 때문에 그래, 돈.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그렇지만 정운이도 중요하고…….

결국 하빈은 정운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저 녀석은 덩치는 산만 해서 왜 저렇게 잘 삐지는 거야? 투덜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스태프 룸 안에는 여덟 개 정도 되는 사물함과 테이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정운은 안으로 들어온 하빈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야아, 윤정운…….”

하빈이 멀찍이 서서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간 하빈이 정운의 몸을 살살 흔들었다. 굳게 감긴 눈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삐졌냐…….”

대답이 없었다. 하빈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 애인 생긴 거 진짜 아니야.”

그제야 실눈을 뜨는 정운에 하빈이 이거다,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그냥, 음……. 새로 친구 생겨서 그래.”

“친구?”

벌떡 일어나 하빈을 쳐다보는 정운의 눈썹이 요란하게 일렁였다.

“어! 친구!”

“무슨 친구랑 닭살 돋게 연락을 종일 하고 있어.”

“그, 그럴 수도 있지.”

“나랑은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귀찮아 하면서.”

“아, 저번에 말한 게 그렇게 서운했어?”

피식 웃자 정운이 아니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나 보네, 내가 그렇게 좋냐?”

실실 웃으며 정운을 놀리자 발끈해서는 왜 딴소리를 하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 또다시 투닥거리는 대화가 이어졌다.

“아무튼 너, 지금 옆에 있는 사람한테 더 잘해야 돼.”

제법 진지한 말에 하빈이 알았다 대답하고는 정운의 손목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다. 오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지금 정운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진동이 울린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세원일 게 분명했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슬쩍 자리를 비운 하빈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열심히 하고 토요일에 보자는 세원의 메시지에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내가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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