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이방인 (12/12)

낯선 도시의 아침에 그는 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선을 이루는 빛의 각도 때문일까. 머리맡을 또렷이 비추는 볕의 동쪽 나라의 하늘과는 다르다. 그 높다란 방은 좀 더 이르게 볕이 돋았었다. 그 밤을 떠올리며 규화는 제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마주한 거리는 여전히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도통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밤새 퍼붓던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도로는 아직 젖어 있었다. 긴 자전거 바퀴 자국을 따라 걷는 구두 위에도 물방울이 맺혔다.

규화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냈다. 마지막, 딱 한 개비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외투를 뒤졌다. 의아한 일이었다. 어제 마트에서 산 담배의 행방이 묘연했다.

물이야 아쉬울 것 없다지만 담배는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없는 것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 마른 입술이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 치익

부연 새벽안개 가운데 작게 불길이 일었다. 규화는 숨을 깊이 머금었다. 담배 끝이 붉게 머리를 빛내며 그의 얼굴을 밝혔다. 이제는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이목구비의 결은 변함없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Morgen.”

조깅하던 금발 남자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살가운 인사에도 규화는 죄라도 지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제 얼굴을 가리려는 것처럼 연기를 빨아들이고, 또 연거푸 내뿜었다.

불투명한 시야 가운데에서도 도시의 평온만은 선명했다. 저답지 않게 낮잠이라도 늘어지라 자고 싶을 정도였다. 이내 떠나야 한다는 현실마저 잊고 싶을 만큼.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사람 말소리보다 새의 지저귐이 더욱 시끄러울 만큼 적막한 곳. 이곳이라면 영인 또한 안전할 터였다.

다만, 자꾸만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은 아마도 낯선 독일어 때문일 것이다. 분명 그래야 했다.

…그가 보고 싶다.

규화는 벽에 내걸린 재떨이에 서둘러 꽁초를 버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서성거리다 실내에 들어왔다.

몸은 새벽바람에 싸늘히 식은 뒤였다. 이불 속의 따스함과 그보다 뜨거운 체온이 그리웠지만, 규화의 걸음은 침대가 아닌 화장실로 향했다.

한참을 바깥에서 서성거렸음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서도 규화는 제 손목에 연신 코를 대고선 냄새를 맡았다. 온몸에 비누를 칠하고 나서야 표정이 한결 풀렸다. 샤워를 마칠 즈음에는 뿌연 거울 속, 몸에 얼룩진 울혈에 콧노래까지 부를 정도였다.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욕실에서 나온 규화는 바깥의 찬 공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수건으로 허겁지겁 물기를 닦은 그는 침대를 향해 뛰었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죽이려다가도, 이내 깨달았다.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널 깨울 수 없을 텐데.

그를 증명하듯, 출렁거리는 침대에도 너른 등은 여전히 무방비했다. 나직한 한숨이 벗은 등 위를 매끄럽게 스쳤다.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던 손가락이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단단한 등, 그 옆구리와 어깻죽지엔 지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규화는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손톱이 조금 자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는 일생을 피아니스트로 살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손톱이 자라나면 깎아 버리는 게 평생의 버릇이었다. 그래 왔던 손톱을 언제 이렇게 길렀을까. 요 며칠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증거물이었다.

자조하는 한편으로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 덕분에 영인에게 멋들어지게 제 흔적이 남았으니까.

‘호텔에 돌아가면 손톱부터 깎아야지.’

규화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 흉터가 아물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 돌아와 그를 데려가겠노라고.

“음….”

손끝이 분홍빛으로 부풀어 오른 흉터 근처를 쓸었다. 쓰라렸을까. 낮은 신음에 규화는 손을 내빼려 했지만 그 전에 영인에게 저지당했다. 그의 왼쪽 손목을 쥔 커다란 손바닥은 어젯밤 규화를 괴롭히던 체온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눈으로 내려다본 얼굴은 아직 비몽사몽.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그는 자유로운 나머지 손을 뻗어 제가 남긴 흉터 사이로 동글동글한 글씨를 남겼다.

가 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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