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Op. 6 Tempo Giusto (下) (9/12)

녹초가 된 몸은 물기까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여전히 실내는 차갑다. 샤워를 마친 영인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고 나와, 바깥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버릇처럼 들었다. 여전히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은 연락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치료 잘 받고 있어야 해. 내가 연락할게.’

규화에게서 등을 돌린 다음 날, 계약 조건이었던 휴대폰은 해지가 되었는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다른 휴대폰으로 규화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다를 바 없었다. 차가운 기계음이 그를 없는 번호라고 안내하며 영인을 비웃었다.

모든 것은 환상이었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영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휴대폰 속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바깥의 계절은 이미 봄이었다.

저녁에 한 번 몰아친 비로 오늘 밤공기는 제법 맑았다. 그러나 요즈음 계속 탁했던 공기 탓인지 이명이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따스한 물로 몸을 잔뜩 데우고 나니 몸 상태가 한결 개운해졌다. 영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 열 시가 가까웠다. 몸을 뉘고 그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후에 권 교수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쪽으로만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영인은 되도록 바깥에서의 통화를 피했다. 주변 소음에 둔감해져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영인은 작업 중이어서 통화가 어렵다 답했고, 그러자 그는 물어볼 게 있으니 집에 도착하면 전화를 해 달라고 했다.

문자 마지막에, 늦더라도 상관없으니 꼭 전화를 달라고 강조하던 말이 기억났다. 어떤 일이실까 궁금해할 기력도 없이, 영인은 물기 어린 뺨을 닦았다. 그가 제 낡은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때마침 정확히 열 시가 되었다.

신호가 길게 이어졌다. 좀처럼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여 주무시나, 끊고 내일 전화할까 그가 고민하던 찰나.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늦었습니다.”

입을 열자 가볍게 편두통이 일었다. 영인은 눈을 찌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귓가에는 이명뿐, 다른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귀 상태가 좋지 않은가. 관자놀이를 누르는 사이에, 늦은 응답이 돌아왔다.

- …나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권 교수의 중후하고 따사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젊은 남자의 나른한 무척이나 낯익고도 그리운 음성. 영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명도 그럭저럭이었는데, 이제는 환청까지 듣게 될 줄이야.

- …잘 지냈어? 귀는, 좀 괜찮아진 거야?

“…….”

-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위에서…. 응, 회사에서 다 내 거랑 네 것까지 해지하는 바람에. 막상 네 다른 연락처를 알아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지금 이것도….

“…….”

-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응? 설마, 안 들려?

환청이 아니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영인의 몸이 스르르 바닥에 뉘어졌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영인아.

“응. 나예요. 잘 들려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영인은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아 실감할 수 없었다. 권 교수에게 어떤 말로 감사를 표해야 할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유추할 정신도 없었다.

집이라서 다행이었다. 목소리를 듣기만 했는데도 몸이 달아올라 영인은 때아니게 웃음 지었다. 허탈했다. 영인은 집을 둘러보았다.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이 작은 옥탑방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 겨울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미안해. 연락을, …못 했어. 미안. 나는….

규화의 말 한마디에, 그날 밤 모든 감흥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나고 말았다. 잔인했다. 목소리 하나에, 애써 쌓아 온 다짐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다니.

단 한 번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규화를 안다니. 그 몸 안에 제가 넣게 되다니.

감히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차마 내려놓지 못했어도, 말 대신 몸으로 그를 느끼고 어루만지며 영인은 생각했다. 또 섣부른 욕심이 났다. 이토록 저를 어루만지고 흐느끼며, 놓지 못하는 그를 영원히 품 아래 가두고 싶다고.

하지만 꿈은 언젠가 깨기 마련이고, 현실은 늘 냉혹하다. 과한 꿈을 꾸면 꿀수록 돌아가는 길은 냉엄할 것이다. 규화의 두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제 옆에 놔두고 싶은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그는 피아노를 만지고 있었다. 그게 규화에게 도움이 되며, 또 훗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애써 자위하며.

“계속해요. …듣고 싶었어.”

- …나도.

하지만 수화기 건너편,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규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영인은 생각했다. 애초에 피아노 같은 건 어찌 되든 좋지 않았을까. 당신이 이렇게 나를 찾아 준다면.

장인 정신도, 열의도. 해내겠다는 그 무엇도, 얄팍한 핑계일 뿐이다. 울 것처럼 자신에게 속삭이는 규화의 목소리 앞에서 영인은 이제 무어가 되든 상관없겠다고 현실에서 눈을 돌려 버리고 만다. 온몸이 달아오른다. 마치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오한이 일었다.

- 나도, 듣고 싶었어. …미안해.

감각 정서적으로 지극히 충족되자 잇따른 말초적 흥분에 휩싸였다. 자연스럽게 아래가 섰다. 희미해졌던 하룻밤이 순식간에 선명해지는 듯했다. 고작해야, 부르는 목소리 하나에.

“왜 사과를 해요.”

…내가 미안해지게.

영인은 뒷말 대신, 제 손으로 느슨한 바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길이 닿자 반갑다는 듯 아래가 온전히 발기하기 시작했다. 치미는 흥분은 도를 넘었다. 영인은 나직이 눈을 감았다.

“어떻게, 지냈어요….”

들뜬 목소리가 혹여나 들킬까 영인은 이를 악물었다. 자괴감이 들었지만, 스미는 충동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일까. 그는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달아오른 아래를 어루만졌다.

- 그냥. 연습하고, 밥도 잘 먹고.

“살은 좀…. 쪘어요?”

- 오랜만에 잔소리부터 하는 거야? 너야말로 귀는.

“…괜찮아요. 지금도, 너무 잘 들려서 고생이니까.”

진심이었다. 흘러나오기 시작한 쿠퍼 액에 완전히 발기한 성기 기둥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샤워 후 갈아입은 상의 아랫단이 체액에 젖을 정도였다. 영인은 느슨히 다리를 벌리고서는 혹여 수화기를 넘어 규화에게까지 들릴까 봐 제 성기를 힘주어 쥐었다.

하지만 어떤 힘을 내어도 그때 자신을 압박하던, 몸 전체에 이르는 쾌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자신을 마찰하는 제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온 세상에 규화의 목소리만이 들리는 지금 이 순간의 통화가 그에게는 생명수였다. 놓칠 수 없었다.

- 나는, 모자라.

“…….”

- 네가, …만져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영인은 깨달았다. 그도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성욕에 눈이 멀어 짐승 같았던 자신이, 순식간에 면죄부를 받은 기분이었다.

당신도 내가 그립다니. 그런 마음을 내게 갖는다니.

- 영인아. 손목이… 아파. 추워.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말끝을 흐리는 달뜬 신음을, 그 표정을 장영인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한순간 대기실에서 만났던 기억으로 십수 년을 살아왔던 그에게, 고작해야 한 달 남짓 지난 규화의 기억은 데일 듯이 선명했다.

영인은 눈앞이 점멸하듯 깜박이는 쾌감 앞에서 거칠게 손을 누볐다.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팽팽히 달아오른 고환마저도 체액으로 흠뻑 젖었다. 가만히 다리를 벌리고서 누운 게 전부인데도, 영인의 심장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내가, 안아 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는 애써 이를 악물었다. 심히 노골적인 그 물음에 규화는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대답하듯 쌕쌕거리는 숨이 전부였다.

- …응.

“내가, 안아 주기만 하면 돼요?”

- 이러지, 마….

“지금 어디예요.”

- 그때, 너한테 소개해 줬잖아. 2층에…. 가운도 준비해 뒀는데. 그 침대 위에 있어. 날이 따스해져서 춥지 않아.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여기서 자면, 널….

규화는 도중에 흐느끼며 잠시 잇던 말을 멈추기도 했다. 영인은 눈을 감고 제 반푼어치 귀로 집중하려 했지만, 들려오는 건 들뜬 신음이 전부였다. 잇새로 흐느끼는 탓에 뭉개지는 발음이었지만,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영인으로서도 제 이름만은 똑똑히 잡아챌 수 있었다.

- 흐윽. 영인아….

영인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규화는 스스로 영인의 이름을 부르고, 또 흐느꼈다. 영인은 차라리 수화기를 잠시 막고 싶었다. 어두운 방 허공 위에 스스로 다리를 벌린 채 제 아래에서 흐느끼던 규화가 온전히 되살아났다.

그 좁은 틈을 벌리고 저를 품에 넣고 싶었다. 끌어안으면 손자국이 그대로 나던 하얀 몸에 콧대를 비비고 이를 박아 물고 싶었다. 제 가슴을 스스로 매만지며 고통스러워하던, 아프다 못 해 고갯짓을 하면서도 저를 밀어내지 못하던 사랑스러운 몸까지. 마치 눈앞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결국, 몸은 미련하게도 사정 직전까지 달아올랐다. 목 뒷덜미가 달아오르듯 따끔거리는 촉감과 더불어, 제 것은 연신 흥분하다 못해 놓칠 정도로 굵고 단단해졌다. 영인의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왼손의 휴대폰에서 규화가 그를 불러댔다.

- 나도 이름, 불러 줘.

“…….”

- 빨리. 응? 영인아….

울먹이듯이 보채는 목소리. 입 안을 가득 채우던 체액마저 달콤했었다. 머리를 밀어내면서도 연신 요분질을 하던 판판한 배, 매끈하고도 탄탄한 허벅지. 소중한 손가락 끝의 체온까지 모두. 문규화는 달았다. 잔뜩 달기만 한 그의 어리광에 영인은 잠긴 목소리로 절정을 맞이했다.

“규화야.”

- …….

“규화야. …보고 싶어.”

아주 작게 부른 이름에도, 높다란 절정이 먼 곳 사이의 두 사람 위에 퍼부어 내렸다. 온몸이 아플 정도로 거센 소나기를 닮은 쾌감에 영인은 한참을 제 기둥을 쓸며 빼내야 했다. 규화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만지지 못해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해도, 듣는 것만으로도 이를 수 있는 쾌감 앞에 영인은 처음으로 덜컥 겁을 먹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공포가, 무력해진 그의 등 위로 내려앉았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영인이 지푸라기를 잡듯 낡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수화기 너머 여전히 쾌감에 저를 부르짖는 규화의 목소리를, 애써 뇌리에 새기려는 듯이.

***

잠들었던 이성은 열락이 걷히고 난 뒤에야 부스스 일어나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숨소리가 나직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멀리서도 마치 하나인 듯, 두 사람은 느리게 깜박이던 눈 끄트머리나 흥건해진 속눈썹을 비볐다.

그뿐이었다. 음성 통화였지만 영상으로 낱낱이 모습을 보는 이들처럼 서로의 상황을 묻지 않았다. 그러고도 한참 침묵 끝에 영인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달떠 있었다.

“괜찮아요?”

- …응.

규화의 대답은 조금 느렸다.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인의 청력으로는 자칫하면 

- …그거면 됐어.

“…무슨 말이에요?”

되묻는 영인의 말 앞에 규화는 머뭇거리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나도 좋다고.

“…….”

-네 목소리 들으니까. …그냥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순순히 내뱉는 말들이 지독히 사랑스러워서 영인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다시 절로 몸이 달아오른다. 이 말을 제게 내뱉는 규화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다는 게 한스러웠다.

- 그동안 별일 없었어?

다만 안부를 물어오는 규화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영인은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네. 없었어요.”

- 정말,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규화는 의심스럽다는 투로 거듭 물었다. 그에게 성실히 답하는 영인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이 섞여 있었다. 작게 떨리는 한쪽 가슴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불안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첫 진찰을 받으러 갔을 때 주치의 얼굴이 어두웠으나 영인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않았다. 그 뒤로는 약을 타러 한 번 다녀온 날이 마지막이었다.

실은 떳떳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는 신 씨에게 반쯤 협박을 일삼아 타협하고서 매일같이 공방에 드나들었다. 규화의 조율을 맡았을 적엔 거리 때문에 주말에 한 번 정도 들렀지만, 이제는 온전히 공방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선을 감는 작업은 귀를 자주 쓸 일이 없기에 청력에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았다. 부드러워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멍들고 터져 딱지가 앉은 손끝을 매만지며, 영인은 뜨거워진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 안은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여전히 뜨거웠다.

- 나도 아무 일도 없었어.

“다행이네요.”

-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

“…….”

- 이상한 소리지. …알아.

규화는 조소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일상은 평온했고 평탄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정해진 연습 시간에 맞춰 피아노를 친다. 나머지 시간엔 음악을 듣거나 편히 쉰다. 악상을 연구하기도 하고, 해석용으로 서적을 읽다가 눈을 비비면 날이 어두워져 놀랄 때도 있었다.

주에 한 번 방문하는 조율사. 주에 두 번 방문하는 주치의. 그중 한 번은 내원. 단조롭지만은 않다. 고작해야 한 달,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무언가 삐걱거렸다. 평범하고 별 감흥 없던 일상이 이제는 못 견딜 만큼 갑갑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규화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고서 한참을 하소연했다.

흥분에 젖어 말초적 쾌감에만 집중하던 방금까지만 해도, 영인을 떠올리며 답을 내었던 모든 감정은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했다. 하나 막상 그 모두를 말로 내뱉으려니 부끄럽기만 했다. 한참을 미적거리던 규화가 불현듯 딴소리했다. 창피한 모양이었다.

- 아,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괜찮아요. 무료 통화 많아요. 나 전화 거의 안 쓰다 보니까.”

- 아….

순간 당황했는지 규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당황했을 얼굴이 눈을 감아도 보일 듯 훤했다. 

- 미안해. 귀 많이 아파? 

“아니. 안 아파요.”

- 아프면 끊을….

“끊지 말아요.”

-…….

“응? …조금만.”

거꾸로 애원하는 낮은 목소리에 규화는 작게 웃었다. 귀를 간지럽히는 그 새털같은 웃음소리에, 영인은 나른히 눈을 감고 뜨거워진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배터리가 다 되어가는지 띄엄띄엄 통화가 끊겼다. 그는 서둘러 충전기를 꼽고, 큰 덩치를 모아 들려오는 모든 말들에 집중했다.

- 다음 진료, 언제야?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요.”

- 나는 내일모레 예약이 잡혀 있어. 보통 아침 열 시 정도에 도착해.

“어디 아파요?”

따져 묻는 말에 이제는 제법 큰 웃음소리가 깃들었다. 모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특유의 어리광이 영인의 오른 귀를 촉촉이 적셨다.

- 안 아파. 그냥. …보고 싶어서.

“…….”

- 너는 몰라도, 나는 너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절절한 내용과 다르게 규화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 간결한 말투에서 비롯된 진한 행복에, 영인은 제 코끝이 뾰족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를 듣는 감각은 청각만이 아닌 듯하다. 그날 새벽도 그러했다. 정사를 마치고 난 뒤, 기절한 듯 잠든 규화를 품에 안고서 영인은 수없이 많은 말들을 했다. 제가 지나온 어린 시절부터 규화를 만나고, 그 이후 자라났던 과정들을. 규화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잠결에 흘린 신음만이 영인의 가슴을 잔잔하게 물들였다.

살아있는 몸이 울릴 때 느껴지는 그 작은 따스함. 전화 진동으로는 대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영인은 부러 귓바퀴가 다 눌리도록 수화기를 가져다 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행여 누군가 들을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

규화가 그 말에 웃었는지 울었는지는, 안타깝게도 영인의 귀로는 들을 수 없었다. 그조차도 무척 작고 여렸기 때문이었다.

***

기분 좋게 병원에 가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산부인과라면 모를까, 그가 병원에서 연상하는 이미지는 차가운 백색뿐이었다. 제법 따스해진 날씨였지만 병원 문 앞에 내려선 영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차분히 걸어가던 그의 한쪽 귀에 쨍한 사이렌 소리가 다가섰다. 비틀거리며 자리를 비킨 영인 뒤로 황급히 구급차가 섰다. 대원들과 의료진에 이어 들것에 실린 환자가 내렸다. 이어 가장 마지막에 내린 사람이 오열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마도 보호자일 것이다.

얼굴도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며, 영인은 잔상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털었다. 그는 병원에 들어서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화 기능은 쓸 수 없어도 시계 역할만큼은 준수한 휴대폰이 약속한 시각보다 정확히 30분 전을 표시했다. 낡은 전화기도 흘낏 확인했지만 그저 고요했다. 규화는 아직인 듯싶었다.

다행이었다. 교수동에서 연습하던 시절, 규화는 늘 정해진 시각보다 한참 이르게 도착하고는 했으니까. 다만 오늘은 동행인이 있어 예상외로 늦을 수도 있을 테니 넉넉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영인은 간이 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이라는 장소에 걸맞게 아픈 사람들이 복도에 가득했다. 평일에도 병원은 분주했다. 온통 백색 시설뿐임에도 어딘가 탁한 빛이 맴돌았다. 의료진은 하나같이 바삐 오갔다. 환자들의 얼굴엔 때론 지루함이, 대부분은 고통이, 드물게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잠시 영인은 넋을 놓았다.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들기 마련이다. 아픈 사람은 나약해지고, 그 나약해진 틈 사이로 쉽게 부정적인 생각이 깃든다. 세상에 보호받지 못했다면 더욱 그 모두를 긍정하기란 어렵다.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한다면 빛은 더욱 더 멀게만 보일 뿐이다.

사람의 삶은 드라마처럼 흐르지 않는다. 위태로운 벼랑 앞에 난데없이 찾아올 해피엔드는 없다. 늪에서 지푸라기를 잡아 봐야 그대로 빠져드는 것이 삶이다. 살려 달라고 목청을 돋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힘만 빠질 뿐, 서서히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 절망에 익숙해져야 그나마 삶을 견디기 편하니까.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무척이나 어렵고 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침잠은 안락한 데다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영인은 그 주변머리를 맴도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아직은, 그는 마음 편히 빠져들지 못했다. 고아에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이 가난하고, 한쪽 귀에 장애까지 얻고도 그는 나름대로 온건히 자라나 살아왔다.

수녀님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호가 그를 보살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영인 자신이 꼽는 이유는 지극히 세속적이었다. 그래서 영인은 자신이 대견할 새가 없었다.

좀 더 잘 살고 싶었다. 좀 더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부디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하지만 한 번이면 될 것 같았던 만남은 수를 거듭해도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또 다음 한 번을 낳고, 다시 더 큰 욕심을 갖게 했다. 그래서 결국 영인은 오늘 이 자리에 왔다. 한순간만이라도 그를 보기 위해서.

어쩌면 이토록 기대하며 병원에 온 마음부터가 불온할지 모른다. 온통 무기력한 인파들 속에서 영인은 홀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눈을 빛냈다. 언제든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가장 조그마한 그림자부터, 눈앞에 들이찰 모습까지를 생생히, 한 조각이라도 빠지지 않도록 담기 위해서.

“…장영인 씨?”

하지만 귀는, 이 서글픈 운명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불린 이름에 순간 이명이 깃들었다. 사이렌 탓이었다. 멍멍해지는 귀에 한쪽 눈을 찌푸리며 영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주한 금빛 눈동자에, 잠시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입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

규화는 아침부터 내내 불만이 가득했다. 일이 하나같이 풀리지를 않았던 탓이다. 아침 일곱 시면 눈을 뜨는 그가 날이 흐린 탓에 한 시간을 늦게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 먹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출발하자며 허겁지겁 재촉했거늘, 재형은 그저 엄한 얼굴이었다. 규화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침부터 고기를 입에 욱여넣어야 했다. 고기가 고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급한 자신과 달리 세상 모두 여유롭기만 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뒷좌석에서 그가 내내 고개를 내밀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왜 이렇게 차가 막히는 거예요.”

“글쎄. 이유는 모르겠는데 막히네.”

가기 싫을 때는 쏜살같이 달리던 차가 오늘따라 유독 굼벵이같이 느렸다. 규화는 다급히 차 안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열 시까진 채 7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조마조마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긴장감은 싫었다. 규화는 불길한 느낌에 연신 창밖을 확인했다.

“왜. 늘 가기 싫다더니 오늘따라 난리네. 배라도 아프냐?”

“…그냥. 멀미가 좀 나서요.”

규화는 제가 평소와 다르게 굴었음을 깨닫고 새삼 입술을 깨물었다. 재형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우연을 빌미로 그를 만나야만 했다.

“내 운전 실력에 새삼? 그럼 좀 눕든가.”

“싫어요. 머리 망가져.”

“그러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

“그냥, 그러고 싶어서…. 형, 얼마 남았어요? 얼마 더 걸려요?”

그 뒤 겨우 열 시 하고 일 분이 지났을 무렵, 규화를 태운 차가 병원 정문으로 매끄럽게 들어섰다. 그러나 규화가 다급하게 로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인을 태운 차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

고급 세단이 매끄럽게 도심을 질주했다. 그 부드러운 주행만큼 차 안에는 내도록 침묵만이 깃들었다.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행선지도 알려 주지 않은 드라이브에 영인은 허벅지 위 두 손을 자연스레 주먹 쥐었다. 작게 떨리는 그 오른손을 넌지시 바라보던 문규진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지 않은 영인은 미처 그를 알아채지 못하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보조석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내 세단은 호텔 로비에 멈췄다. 다행히 영인도 아는 장소였다. 규화가 묵고 있던 호텔이었다. 영인과 문규진이 내리자 자연스럽게 수행인 둘이 주위를 엄호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딱딱한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서늘한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체격이라면 남 아쉬운 적이 드문 영인이었지만, 단순히 타고난 것을 넘어 단련된 몸이 간절기 얇은 옷 너머로도 드러났다.

때마침 영인도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한 차림새였기에 위화감이 덜했다. 영인은 흡사 수행원의 일원인 것처럼 그들 무리에 섞여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도어맨의 사뭇 다른 태도가 눈길을 끌었다.

도착한 룸마저 낯이 익었다. 매니저 재형의 이름으로 장기 대여를 한 덕분에 계속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재회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공기가 달랐다. 봄이라는 계절과도 관계없이.

“앉아요.”

어설프게 문가에 서 있던 영인에게 문규진이 말했다.

“이전에 흔한 차 대접도 못 한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음료를 시켜도 됩니다. 허기가 지면 식사도 괜찮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착 시각에 맞추어 준비된 티포트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간단한 차 한잔이라던 말과는 달리 꽤 호화로운 상차림이었다. 규화가 초대했던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바깥에서 들여온 간이 테이블 위에는 신선한 과일과 빵을 비롯한 다과가 가득했다.

영인은 문규진의 건너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먼저 차를 받아 한 모금 맛을 본 문규진이 영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차림새가 멋진데. …어디 약속이라도 있었나 보지요.”

그 나직한 질문에 불쑥 수치감이 들었다. 지금 영인은 그의 아들 문규화에게 선물 받은 것들로 치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원하던 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취향에 맞는 옷을 선물했던 규화가 여전히 선명했다. 부디 이번에도 그때처럼 기분 좋게 웃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일부러 차려입은 복장이었다.

“…아닙니다.”

정당하게 선물 받은 옷임에도 마치 훔친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옷뿐이 아니었다. 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불편했다. 극도로 긴장한 탓일까. 청각을 비롯해 후각이나 미각마저 잃은 것처럼 영인은 향기로운 홍차의 향도 맛도, 그 어느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문규진만이 익숙하게 차를 비우고서는 제 비서로부터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다. 안경 너머의 금안이 유독 날카로이 빛났다.

“그래. 의료진으로부터 진료 결과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 고작 한마디 말에 내려앉은 것은, 가까스로 입술만 대었던 찻잔만이 아니었다.

“담당 주치의가 확신하더군요. 아무래도 가망이 없다고. …일상생활에도 불편이 있을 정도라던데, 지금 이야기는 잘 들립니까?”

“…….”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도 잘 들리는 모양이군요.”

공고히 다지려 했던 자존심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영인은 차마 수긍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제 장애가 부끄러웠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허벅지 위로 쥔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귀를 가지고 조율업에 종사하다니. 대단합니다. 그 근성만은 악성 베토벤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싶던데. …칭찬입니다. 우리 아이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텐데.”

“…….”

“하지만 그건, 그 시대에서나 가능했던 이야기이고.”

돌연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듯 영인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일전에 말한 대로, 내가 수술비를 마련해 줄 용의도 있습니다.”

“그건.”

“물론 지금처럼 듣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다른 일을 하기엔 무리가 없는 최신식의 수술입니다.”

수술이라는 말에 애써 무표정을 일관하던 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능성이 없는 길은 일찍 포기하는 게 현명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좀 더 편히 누리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건, 다른 길이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완곡하게 제안을 거절한 영인의 말에, 문규진 또한 표정을 지웠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만들어 주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문규진은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귀결에 영인은 숨을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저에게 그렇게까지 해 주시려는 의도는, 그 저의는 뭡니까.”

“나는 지금 불우 이웃 돕기를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장영인 씨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으니.”

“그렇다면, 왜….”

“그런 협잡꾼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엄밀한 거래로 보장한 거니까.”

위화감 있는 단어에 영인이 표정을 굳힌 채 되물었다.

“거래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규화와 거래를 했지요. 장영인 씨의 귀에 대해서는, 내 보장해 주겠노라 하고.”

거래. 적어도 부자간에 쓰일 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영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제가 입원했을 때 매일같이 병실에 드나들던 규화의 모습을 떠올렸다. 병실을 바꿔 달란 말에 곤란해하던 직원들의 표정까지도. 지나치게 호화로운 병실. 극진한 대접. 환자식이 아닌 음식들을 섭취해도 무어라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던 의료진의 모습까지.

모두가 규화의 과업인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제가 어리석다 못해 한심해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들었다. 거래라면 양자가 모두 이득을 거둬야 한다. 문규진이 못해도 천 넘게 들여, 그리고 그 이상을 들여 자신의 수술까지 보장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대가로 그가 얻는 이득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서는 그 거래에서 무슨 이득을 얻으셨습니까.”

문규진은 눈썹을 꿈틀할 뿐, 영인이 고른 단어에 대해 별다른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거래는, 늘 공정성을 잃기 마련이라서.”

“…….”

“만약 그렇지 못해도, 거래 내용의 보안 유지는 당연하니까요. 알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말만은, 반칙이었다.

영인은 그 중후한 얼굴 위로 문득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다. 겨울이 아닌 가을. 아직은 경계 어린 눈빛이 선연했던, 사무적인 표정으로 일관하던 문규화를.

이러한 점마저 부자간에 닮아 버리면, 장영인은 완벽히 타인이 되고야 말았다.

“사람의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압니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문규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오히려 사업은 철저히 계산으로 추이 가늠이 되었으니까. 가끔 직감도 필요하지만, 손해가 있으면 다른 이득으로 메꿀 수 있었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지 못해. 한 번 마이너스가 나면, 다른 것으로는 메꿀 수가 없어.”

마치 달래려는 듯이, 그의 말투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깍듯한 경어체를 버린 말투에는 꽤 진심이 어려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흡사 다른 차원의 일이었지. 분명 나의 아이인데, 아이는 내가 아니라서. …도무지 미래가 예측되지 않아서. 나는 포기할 순간에는 손을 떼 버려서 많은 이득을 거둬 왔었고, 그대로 하려 했어.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찰나, 다른 길에 집중하려 해 봐도.”

“…….”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더군.”

들여다보인 색이 엷은 홍채는 그 안의 동공까지 고스란히 내놓고 있었다.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명확하다. 그 앞에서 영인은 마치 벌거벗겨지기라도 한 듯이 부끄러웠다.

“녀석은 제 엄마를 닮아서인지 마음이 무척 여려. 아마 자신의 친구가 다치고 아프다면, 충분히 슬퍼할 테고. 나와는 달리, 말이야. 그러니 나는 규화의 ‘친구’에게 쓸데없는 위해를 가하고 싶지는 않아. 자네의 노력이야 충분히 치하하고 있어. 내 부탁을 잘 들어주었고, 최선을 다해 주었지. 덕분에 규화도 생각보다 손목 상태가 좋아졌고…. 그뿐이야. 그거면 나의 거래는 성공적이지.”

나직한 목소리는 비록 부드러웠으나 일관적인 감정에 깃들어, 다른 협상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협의 혹은 거래는 문규진과 그의 아들 문규화에 한정한 것이었다.

분명 장영인은 장외의 인물. 즉, 그는 영인을 거래 대상으로 두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칩 하나 정도 몫일까. 아니, 어쩌면 그 협상 테이블에 칩으로서 놓인 것 자체가 과분한 셈임을 영인은 살며시 깨달았다.

“이 또한 잘 부탁하는 범주에 들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요. 큰 경연을 앞두고,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비로서 부탁하는 말입니다.

“…….”

“마침, 재형이로부터 전해 들은 바도 있고 해서.”

다행히도 영인은 제 말을 잊고 있지 않았다. 초겨울이었다. 바로 이 방에서 규화와 재회하기 전. 규화의 매니저에게 과거의 영인은 단언했었다.

만일 제가 규화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물론 그 마음은 지금이나 과거나 달라진 바가 없었다. 다만 몸이 달라졌으며, 그로 인해 욕심이 생겼다. 영원히 같이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영인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적어도, 적어도 계약 기간인 가을 도입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그 시간만큼은 가져야 했다.

설사 규화를 포기하게 된다 할지라도.

“만약에.”

다른 겁박도 아닌, 스스로 한 말로 궁지에 몰린 영인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절박함을 애써 감춘 단어 끄트머리마다, 가쁜 숨결이 흐드러졌다.

“만약에 제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쾌한 빛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코에 걸쳐 둔 안경을 느슨히 벗은 문규진은, 제 아들이 닮아 간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 질문에 못을 박았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0시를 기해 주간지와 연예 뉴스에는 한 가지 소식으로 도배되었다. 특종이었다. 다름 아닌 문규화의 스캔들이었다.

***

그리고 기사가 뜨기 하루 전.

은혜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역사 화장실에 들렀다. 퇴근 시간대보다 한두 시간 전이어서인지 역내 화장실은 한산했다. 그녀는 파우치를 꺼내 서둘러 화장을 마무리했다.

“알겠으니까, 보채지 좀 마.”

그 와중에도 눈치 없는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약속된 출근 시간까지는 30분도 더 남았는데, 오늘따라 매니저가 유달리 난리였다. 이렇게 보채다니 분명 호출이 있다는 뜻이다. 은혜는 공들여 입술을 바른 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 중에 어느 쪽을 닮았을까.

얼굴도 모르는 부모. 자신을 버린 그들에게 은혜가 유일하게 감사하는 하나는 사지 멀쩡하고 건강한 몸에 덤으로 얹어 준 예쁘장한 외모였다. 덕분에 그녀는 수월하게 주변의 호감을 샀고, 지금의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

머리를 말끔히 틀어 올려 하나로 묶은 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허망한 감사를 표하고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처음 얻은 일자리는 은혜의 처지를 뻔히 안 고등학교 은사가 소개해 준 단순 사무직 자리였다. 고졸인 데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녀 처지에는 보수가 적어도 무난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해 견디지 못했다.

수습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다음부터는 직접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졸 신분에 별다른 자격증 없는 그녀에게 사회는 험난할 뿐이었다. 괜찮은 직장이라고 소개해 주는 곳마다 하나같이 함정뿐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파견 업체를 통해 겨우 이 호텔의 주방 보조 자리를 얻었다.

다행히 주방 일은 학력과 상관없었다. 요리 실력을 묻기보다 외모를 보았다. 은혜는 성실하게 보조 일을 수행했다. 그러던 도중 매니저의 눈에 들어 운 좋게 와인 서버로 바뀌었다. 술 시중이 아니라 와인을 어설프게 따르기만 해도 충분한 보직이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탓일까, 호텔을 오가는 손님은 모두들 준수했다. 보는 눈들이 있기 때문인지 기본 매너가 있었다. 간혹 손님이 주정을 부릴 때면 호텔 가드가 먼저 보호해 주었다. 그녀로서는 여러모로 만족스럽고 안전한 아르바이트였다.

다만 로비에서 영인을 마주쳤던 날은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걱정을 살까 봐 사무직에서 잘린 뒤로 대강 둘러댔던 게 완전히 탄로 났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당시의 영인은 규화에게 온 신경이 쏠려 은혜 사정을 캐물을 새가 없었다. 서운함과 별개로 덕분에 그녀는 추궁을 피해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서운할 만큼 무탈한 일상이 이어졌다. 따분한 사무직에 비해 훨씬 적성에 맞았고, 만족도도 컸다. 내내 서 있느라 조금 붓는 다리 외에는 힘든 곳도 없었다. 은혜는 간혹 상상하기도 했다. 여기서 자리를 잡아 이곳 매니저가 되면 어떨까, 하고.

“무슨 일이에요?”

“VIP. 룸으로 올라가야 해.”

“또 거기요? 32층?”

대답 대신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를 점검한 뒤 동료 직원과 엘리베이터에 탄 은혜는 거울 속 말끔하고 단정한 자신의 차림새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32층은 프라이빗 플로어다. 일반 엘리베이터로는 접근할 수 없고, 한 층에 방 다섯 개가 고작이다. 게다가 이 32층은 아무나 투숙할 수 없는 층이었다. 1년 중 대부분이 빈방이어도 호텔 측에서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VIP로 지칭되는 고객들이 돌연 투숙할 경우를 대비해 일부러 비우기도 하는 방이다.

그런 32층의 가장 안쪽 방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VIP의 호출이었다.

소문에는 미국의 한 갑부가 통 크게 1년을 빌렸다고 했다. 하지만 은혜가 들어갈 때마다 마주치는 투숙객은 흔한 한국인 남성 몇뿐이었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믿을 만한 소문인지, 그들은 간혹 저들끼리 영어로 지껄이기는 했다. 직원은 투명인간 취급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어와는 담을 쌓았고 관심도 없었던 그녀 역시 그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나르면 그뿐, 딴생각에 골몰하느라 바빠 기분 나빠할 새도 없었다.

그런 구석이 마음에 들기라도 했는지, 32층 투숙객은 줄곧 은혜를 서버로 지정했다. 은혜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매너 또한 미국식이었다. 단순히 와인을 서빙하는데도 분에 넘치는 팁을 챙길 수 있었다. 가끔 생활에 쪼들릴 때면 그 32층 손님이 자신을 매일같이 부르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많으면 주에 두 번, 적을 땐 주에 한 번 정도였던 기회가 마침 오늘 찾아왔다. 문을 세 번 노크한 뒤, 은혜는 트레이를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방 안에 있는 누구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새삼 서운할 일은 아니었다. 은혜는 능숙하게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간다는 거지?”

“우선 주간지와 연예 뉴스. 0시를 기해서 모든 포털에 뜨는 건 기본이고.”

“골치 아프게 됐네.”

낯이 익숙한 투숙객과 그의 방문객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논의 중이었다. 테이블 위는 여러 자료로 수북했다. 은혜는 테이블 위에 안줏거리를 놓으며 그 종이들을 가지런히 모아 정리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야?”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규화를 어떻게든 뉴욕으로 내보내려고.”

그릇을 옮기던 도중, 은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문득 이 호텔에서 영인을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를 경계하며 바라보던 화려한 얼굴의 남자. …분명 그 이름이 문규화였는데.

은혜는 흘낏, 방금 제가 정리한 종이의 큰 글자를 훔쳐보았다. 김규화도, 이규화도 아닌 문규화가 맞았다. 얼핏 보이는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까지.

“언제까지도 한국에 머물 상황도 안 되니까. 데리고 들어가겠다는 거 아닐까.”

“만만치 않을 텐데…. 차라리 손목이 더 아팠어야 했어. 괜히 사이에 껴서. 상상도 하기 싫다.”

“바나흐 건도 결국 골치 아프게 됐잖아.”

은혜는 직원 중에도 손이 야무지고 빠르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손은 유독 느긋하고 조심스러웠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잔머리 하나 없이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칼 아래, 길고 흰 목덜미 뒤로 진득한 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서, 그 귀머거리는 어떻게 하시겠대?”

“뭐, 그 장영인이라는 놈 말이야?”

그녀의 긴 손가락이 무거운 와인 병을 힘주어 다잡았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모든 것을, 가까스로 쥐었다. 불투명한 병 속 진득한 액체들이 불길하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

규화는 소파에 느슨히 기대앉아 자신의 스캔들 영상을 확인했다. 재형에게서 건네받은 태블릿에서는 연예 속보가 재생되고 있었다. 막상 건네준 장본인은 심히 좋지 못한 얼굴빛으로 규화의 의중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난 또 뭐라고.”

감상평은 뻔했다. 심히 허무맹랑한 내용이었다.

문규화가 돌연 사랑에 빠져 리사이틀을 열다 못해 한국에 장기 투숙 중이라고 한다. 상대로 지목된 여성 연예인은 꽤 잘나가는 여배우로, 때마침 리사이틀에 참석했던 모양이다. 하필 그녀는 평소에도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었으며 화원대 예술학부에 재학 중이다. 심지어 자택까지도 지금 규화가 머무는 동네와 지척이란다. 애석한 우연의 일치였다.

스캔들 속 문규화는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주거지인 파리를 등지고 한국까지 와 밀회를 했으며, 심지어 그녀를 만나기 위해 화원대에서 마스터 클래스까지 열었다. 아예 집을 구매한 것도 밝혀져 그녀에게 프러포즈한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이어졌다.

하나같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규화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었다.

스캔들대로라면 리사이틀 대기실에서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틈도 없었다. 기자 회견이 끝난 뒤엔 영인에게 한판 쏟아붓느라 난리였고, 그 뒤에는 권 교수와 최종 리허설을 치렀다.

공연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 유명인사 몇몇이 인사를 건네러 왔었다. 그 인파 속에 간혹 그런 얼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도가 되짚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규화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창을 꼭꼭 덮은 암막 커튼을 흘낏 바라보았다. 재형이 알려 주기 전엔 까맣게 몰랐다. 마침 휴대폰도 없을 뿐더러, 취재진 열기가 집까지 덮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문규진이 고용한 가드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사전에 언론사로부터 언질은 없었어요?”

“소식 없이 떠서 나도 몰랐어.”

재형의 말에 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캔들 보도부터가 미심쩍었다.

문규화는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작년 9월, 딱 한 번 내한 공연을 했다. 리사이틀을 연 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대중의 호기심이 닿을 만큼 제 이름값이 높은가? 그래 봤자 클래식 마니아에 국한될 주목도였다. 언론 매체를 장악할 정도로 문규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을 리 없었다.

게다가 적정선을 지키는 것도 거슬렸다.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연 사랑에 빠졌고, 그 여성을 위해 한국에 거주하며 청혼한다는 이야기. 흔해 빠진 클리셰다 못해 제 부모의 러브 스토리와 무척이나 전개가 흡사했다.

대중에게 자극적으로 먹힐 불쏘시개라면 문규화보다 부모의 연애사를 골랐어야 한다. 문규화로 시작할지라도 결국 화살을 부모에게로 돌리기 좋은 먹잇감인데, 모든 보도가 하나같이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마치 금기라도 걸린 것처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처는 짐작이 갔다. 문규진일 것이다.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규화는 억울할 뿐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느끼는 바도 있었다. 상대를 애꿎은 그 여성 연예인 대신 ‘다른 누군가’로 바꾸고 다시 보면, 스캔들 골자에는 딱히 틀린 말도 없었다.

‘…막상 찾으러 온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규화는 쓰게 웃었다. 그 차가운 미소에 재형은 걱정스러운 듯 몇 마디 말을 보탰다.

“너 오늘 저녁, 굶었다면서.”

“먹고 토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규화야.”

“수액 맞아서 괜찮아요.”

이틀 사이, 규화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권 교수가 가져다준 운 좋은 만남은 불발되었다. 영인과 엇갈리고 난 뒤, 그는 결국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스캔들까지 터진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서 난 연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출처 없는 스캔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식기 마련이었다. 어떤 돈으로 언론을 휘둘러 호도하든지 길게 갈 이야깃거리는 아니라는 게 규화의 생각이었다.

다만 단 하나 걱정되는 게 있었다. 혹여나 영인이 이 스캔들을 본다면…. 다름 아닌 ‘당사자’인 그가 오해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남이 불발된 상황 때문에 규화는 더욱 마음이 쓰였다.

“권 교수님하고 통화하고 싶어요.”

“권 교수?”

“네.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어서요.”

규화의 말에 재형이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한 해명 대신 규화는 다시 태블릿을 켜 화면을 돌렸다. 그리고 스캔들 증언 인터뷰의 어떤 구간을 짚어 재생했다.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처리가 되었지만, 인터뷰 영상 속 남자는 분명 낯이 익었다.

“…좀 확인할 게 있어요.”

***

규화가 제안한 통화는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닷새만의 방문이었다. 집 근처로 몰린 취재진에 진을 뺀 권 교수가 혀를 내둘렀다. 규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직접 우려내 대접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다기는 총 셋. 자리에는 늘 그렇듯 재형까지 함께 셋이었다.

그를 흘끗 바라본 규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었다.

“그 대학원생 기억하시죠? 제 마스터 클래스에도 참여했던 남자분.”

“…안형준이 말인가.”

권 교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찻잔을 드는 손이 잔주름으로 가득했다.

“안 그래도 나도 소식을 궁금해하던 차였어. 그 녀석, 잠적했거든.”

“잠적이요?”

권 교수는 목을 축인 뒤 찻잔을 내려두었다. 뒤이어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형준의 졸업 연주회는 엉망이었다. 평소 실력 절반밖에 안 되는 연주에 모두가 실망하기를 넘어 당황할 정도였다. 그 여파인지 학위 수여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안형준은 동대 박사 과정 이후 교수직을 맡기로 진로를 내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2월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결국 이번 신학기에 박사 과정을 등록하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도 사적으로 연락하는 지인이 없어 행적을 모르던 와중, 난데없이 스캔들 증언 인터뷰로 그의 생사를 확인한 셈이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네. 그런 날조를 굳이 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 허무맹랑한 일화를 생생하게, 또박또박한 말투로 전하던 형준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권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외를 장식한 스캔들 보도치고는 흔한 투 샷 하나 없었다. 그나마 리사이틀 대기실에서 언뜻 스친 모습이 전부였다. 하필 비슷해 보이는 현관문을 나서는 영상이랄 게 동거 스캔들의 증거. 그에 덧붙여, 증언자의 인터뷰 영상이 그 시시한 자료들을 재해석해 주었다.

“제가 원한을 사기는 했죠.”

“…원한?”

규화는 어렵지 않게 그 눈빛을 떠올렸다. 마스터 클래스에서 전교생이 보는 와중에 그의 자존심을 뭉갰던 날, 모욕감에 들끓던 눈을. 예상치 못한 구석에서 돌아온 대가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위기는 아니었다.

“뭐, 큰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뜬소문이니까.”

“그래도 자네 이미지에는 해가 될 텐데.”

한국에 머물던 문규화가 화원대 연습실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사랑의 밀회를 일삼았다는 말은 단순한 우스갯소리를 넘어 그의 이미지를 손상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규화는 실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저야 어차피 여기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본업도 따로 있으니…. 학교 측이야말로 여러모로 위신이 서지 않을까 봐 제가 죄송스럽죠.”

“아닐세. 자네의 의도도 아닌 것을. …그래서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뭔가.”

본론에 돌입했다. 규화는 조금 식은 차를 기울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우선 그 안형준의 연락처가 궁금합니다.”

“규화야.”

“…그냥 궁금하다는 거예요. 알려 주세요. 저 말고 제 매니저에게 전달해 주셔도 됩니다. 그 학생이 단독으로 이 일을 꾸몄을 리는 없으니까요. 출처를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심쩍은 얼굴의 재형과 단호한 규화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권 교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학사 쪽에 연락해 보겠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뭔가.”

규화는 마치 무언가 뜨거운 것을 삼키는 듯,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지웠다.

“선생님을 회유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무슨.”

“몹시도 친절하게, 피아노 속에 선생님의 휴대폰을 놓고 가게끔 일러둔 사람이 누구냐고 여쭙고 있는 겁니다.”

놀라 눈을 부릅뜬 권 교수가 말을 잃고 규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형이 자신을 바라보는 규화의 시선에 눈썹을 치켜떴다.

“이 사람인가요?”

“규화야.”

“왜 그러셨는지, 그 이유까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저도 당연히,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까요.”

문규진의 아들로 자랐고,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떤 식으로 사람을 조여드는지, 또 위협하는지.

권 교수가 베푼 호의를 곡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호감이란, 그 단순하고 이유 없는 감정은 다른 물질적 이해 앞에서 곧잘 무너지기 쉽다. 새삼스럽게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낳아 준 어미도 수억대 위자료를 받고 순순히 아이를 아비에게 넘겼다. 자신도 그의 자산에 기대어 피아니스트로서 원하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아마 한 대학교의 학과장인 권호영 교수 또한, 위치에 걸맞은 여러 유혹과 고민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결백하고 맹목적인 애정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규화는 바란 적이 없었다.

“…그건.”

“다만 선생님. 제게 큰 빚, 한 번 지신 겁니다.”

권 교수는 말을 섣불리 잇지 못했다. 오히려 규화가 슬며시 웃었다. 그가 대답하지도 못하고 오해라며 부인하지도 못하는 것까지, 모든 침묵이 자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규화의 추리가 맞았다고. 그래서 그날 병원까지 가는 길이 유독 험했고 멀미가 났으며, 자신이 그를 결국 마주칠 수 없었노라고. 고작 1, 2분 늦었다고 사라질 리 없을 영인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다 같은 까닭임을.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영인이 갑자기 사고가 나서 사라진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훼방을 놓았다면 최악의 경우는 아닐 테니까. 아니, 가까스로 규화는 그렇게 자신을 추슬렀다. 믿고 싶었다. 영인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리 없다고.

“함정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왜 전화를 받은 건가.”

권 교수가 처음으로 규화에게 되물었다. 그 또한 자신의 모든 과오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궁금해서요.”

보고 싶었다는 말을 규화는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피아노 속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본 순간 먼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권 교수의 호의를 의심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기쁜 마음 한구석에서 샘솟는 의문을 어찌할 순 없었다.

권 교수를 통해 영인을 알게 되었으니 사이가 돈독하다는 사실까지는 아실 터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밝힌 적이 없었다. 서로의 사정을 어떻게 아시고 돕기로 하신 것일까.

처음엔 영인의 부탁이 아니었을까 했다. 하지만 전화를 건 영인마저도 당연히 교수님 용무라고 생각한 듯한 반응에, 문득 규화는 반가움을 앞선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은 무분별한 감성 앞에 무력했다. 귀를 지배하는 그 목소리에 규화는, 모든 가정을 내던지고 그 순간에 몰입했다. 달은 몸이 영인을 보고 싶어 했다. 그에 충실히 따랐다.

결국 진찰만 마치고서 돌아오던 길, 차 뒷좌석에서 눈을 감은 채 규화는 내내 생각했다. 권호영 교수는 규화에게 종속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바나흐 내한 공연을 떠올렸다. 권 교수를 비롯해 규화가 아는 많은 스태프가 그의 일터에 있었다. 그 정보는 재형을 통해 빠져나갔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같은 기획사여서인 줄로만 알았다.

…대기실에서 제 아비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문규진이 이 모든 판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을까. 규화는 뒤늦게 제 경솔함을 탓했다. 하지만 후회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뒤이어 터진 우스꽝스러운 스캔들이 전부가 아닐 것은 예측 가능했다. 고작해야 이 정도로 제 아비가 저를 방해하려 들 리 없었다.

“…안부가 궁금했어요. 잘 치료받고 있는지. 그 사소한 이야기조차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아서 답답했어요.”

그렇다면, 과연 문규진이 원하는 바는 무얼까. 그가 영인에게 바라는 것은….

“…….”

“그게 잘못된 건가요?”

규화의 마지막 질문은, 권 교수가 아닌 제 곁을 지키고 있던 재형을 향해 쏟아졌다.

***

재형은 권 교수를 모셔다드린 뒤 다시 규화에게 들렀다. 집에 돌아오니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유일하게 스탠드 불빛이 켜진 곳은 주방뿐이었다.

규화는 홀로 칼바도스를 마시고 있었다. 재형은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채운 술잔을 뺏었다. 병이 꽤 비어 있었지만, 규화는 취기 하나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내 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규화야.”

“하지만 인정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안주 하나 없이, 글라스가 전부인 너른 식탁에 규화는 홀로 앉아 있었다. 마치 피아노 스툴에 앉은 듯 허리가 꼿꼿했고, 쥐고 있는 왼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재형에게 이르는 호소는 지독히도 나긋한 목소리였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알려 줘요.”

“알잖니, 규화야. 난….”

“그럼 아버지에게라도 데려다줘요.”

“…이미 출국하셨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너른 실내에 공명했다. 차게 식은 규화의 긴 손가락이 스스로 얼굴을 감쌌다. 눈 밑의 여린 살결이 그 손끝에 비벼져 붉게 물들었다. 물기마저 손끝으로 지운 두 커다란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였다.

“…그럼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가만히 있어.”

“…….”

“제발 가만히. …시키는 대로만 해.”

“…형.”

“네가 뭘 하겠다고 움직일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건, 너도 모르지 않잖아. 이번만 해도. 그냥 프랑스에서 조용히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오히려 부탁한다는 듯 지껄인 재형이, 뺏어 들고 있던 칼바도스를 단숨에 삼켰다. 코를 간지럽히는 사과 향이 규화에게는 지독스럽게만 느껴졌다. 아삭거리며 사과를 베어 물던 그 커다랗고 따스한 손길이 불쑥불쑥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신기루처럼,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수술받을 거야.”

“뭐?”

재형의 차가운 말이 규화가 겨우 붙들고 있던 일말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다시 말해 봐요.”

“왼쪽 귀는 가망이 없고, 오른쪽 귀는 아무래도 난청이 나아지질 않아서. 수술을 받기로 한 모양이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청신경을 복원하는 수술은 없다. 결국 수술이 가능한 것은 난청과 이명이 잦은 나머지 오른쪽 귀뿐이다. 하지만 그 귀를 수술받으면 일상생활은 무리 없이 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처럼 조율사의 귀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음악을 음률이 아닌 전기 신호로 변환해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인은 줄곧, 일상에서도 보청기를 끼는 것부터 저어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마지막 남은 빛인 오른 귀를 수술받겠다니. 규화야말로 제 귀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듣고 이해한 말의 자음과 모음 어딘가가 잘못 조립된 듯 고개를 저었다.

“언제예요. 왜. 어디서. 대체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 친구가 원했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한쪽 귀로 조율사를 해 봤자 얼마나 번다고. 차라리 두 귀를 먹기 전에 한쪽 귀나마 살려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어? 현실을 생각해야지.”

“…….”

규화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영인은 분명 계속 저와 같이 있겠다고 했다. 제 곁에 머문다고 했다. 그러니…. 규화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었지 않은가. 아직 제 최선은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니 최대한 연습해, 들려주어야 했는데.

그의 귀가 먹기 전에.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되었는데.

“나중에 너한테도 차차 말하려고 했어. 회장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로 했고. 긴 재활 훈련까지 모든 비용을 전담하기로 하셨어.”

“…….”

“네가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뿐이야. 그러니 넌, 조용히 네 할 일부터 생각해.”

규화는 멍하니 시선을 놓았다 생각했다.

나의 할 일? 콩쿠르 준비? 손목 부상의 완화? 콩쿠르의 우승? 아니면 결선….

그게 더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인이 듣지 못한다면.

***

장사가 늘 그렇듯 손님은 어김없이 특정 시기에 몰렸다. 오늘이 유독 그런 날이었다. 입고가 세 대에 출고가 두 대. 게다가 딱 한 대를 제외하고 모두 그랜드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운반하기는 쉽지 않다. 무게만 해도 상당할뿐더러 단순히 힘으로 옮겨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그 크기와 달리 섬세한 몸체 때문에 숙련자의 요령 없이 운반하다간 기껏 복원한 악기와 그 소리를 망치게 된다. 아침나절부터 피아노를 연신 옮겨댄 탓에 영인은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모든 일엔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기어이 다섯 번째 마지막 피아노까지 무사히 트럭에 실었다. 영인은 녹초가 되어 물을 연거푸 마셨다. 트럭 주인인 ‘서울 피아노’의 사장은 수고를 치하하러 왔다가, 그 얼굴을 살피고 자못 놀란 눈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

하지만 영인은 반응이 없었다. 턱으로 흘러내린 물을 스윽 닦느라 바쁠 뿐.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던 사장의 손길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응?”

“아, 죄송해요.”

영인은 황급히 상대방의 반대편에 가 섰다. 겨우 오른쪽 귀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반쯤은 이명으로 잠긴 귀에, 나머지 반이나마 다른 소리가 잡혔다.

“뭐라고 하셨어요?”

“얼굴이 야위었다고. 응?”

“아, 젖살이 슬슬 빠지나 봐요.”

요 며칠 새 손님들에게 계속 듣는 말에 영인은 계면쩍은 듯 뺨을 긁었다. 목장갑에 배었던 기름때가 홀쭉해진 뺨 위에 묻어났다.

서울에서나마 가끔 목욕탕에 갔지, 요즘은 줄곧 공방에서 지낸 탓에 체중을 잰 지도 오래되었다. 요사이 바지허리가 좀 헐렁해졌나 싶었지만 이렇게 걱정을 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 사장이 하도 괴롭혀서 그러지. 이거 받아서, 맛있는 것 많이 사 먹어. 고기도 좀 먹고.”

건넨 봉투 속엔 대금과 별도의 수고비가 들어 있었다. 거절하려는 사이 도로 낚아채 든 손이 직접 영인의 뒷주머니에 봉투를 쑤셔 박았다. 그 뒤엔 거친 손길이 다가와 영인의 뺨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냈다. 신 사장이었다.

“내가 뭘. 지가 지 팔자 못 꽈 안달인 놈한테.”

“좀 고기도 사 주고 그래. 응? 백날 천 날 라면만 맥이지 말고.”

“…아이 피곤해. 어서 안 가? 지겨워.”

“왜 저래? 새삼 갱년기도 아니고.”

“…글쎄요.”

하려던 말은 많다는 표정은, 애써 말을 짓지 못하고 뒤로 돌아섰다. 애꿎은 사람에게 괜한 신경질을 부리는 신 씨 뒷모습에 대고 영인은 쓴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봄이 무르익었다지만 해는 여전히 짧았다. 아침부터 시작한 운반 작업을 모두 끝내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졌다. 푸른 하늘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하루가 지나갔다. 해가 저물어도 온화한 밤공기에서 그나마 영인은 봄의 흔적을 맡았다.

시간은 쏜살같기만 했다. 지난 두 끼 모두 대강 해치우고 이제야 한다는 식사가 무색하게 저녁 또한 라면이었다. 양쪽이 찌그러진 양은 냄비를 들고 오는 영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 씨는 구석에 신문을 잘 포개어 두었다.

잘 익은 총각무를 가위로 숭덩숭덩 썰어서 앞접시 옆에 놓은 영인이 상에 앉자, 젓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허벅지 위에 종이 하나가 툭, 건네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영인의 시선을 피해 신 씨는 한 국자를 퍼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영인 쪽에 또 먼저 툭, 건네었다.

“내일 올라가 봐.”

“왜 자꾸 저를 내쫓으세요.”

“이제 당분간 운반할 것도 없어. 힘쓸 일두 없고. 그러니….”

이어 자신의 몫을 담은 신 씨는 힘겹게 영인을 마주했다.

“병원이라도 가. 내가 마음이 불편하다. 어?”

“…….”

“젠장맞을. 내 명함을 줄 게 아니라 그쪽 연락처를 받았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받으셨어도 달라질 건 없어요. 연락은 못 하셨을 테니.”

“왜.”

불퉁한 말투에 살며시 웃은 영인이, 애꿎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감고 늘였다.

“…지금 휴대폰 없는 걸로 알아요.”

“요새 거지새끼도 휴대폰이 있다는데. 그치가 그거 하나 없겠어?”

“우리나라 사람 아니잖아요. 외국인.”

“따박따박 말대꾸는…. 어여 내가 던져 준 거나 봐.”

영인은 라면 한 젓가락을 물다 말고, 허벅지 위에 놓인 신문을 펼쳐 보았다. 용케도 구겨지지 않은 페이지 속, 크게 자리 잡은 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낯이 익었다. 영인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 방구석에 숨겨 둔 포스터와 똑같은 규화의 사진이었다.

실물이라곤 만나볼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도록 멀기만 했을 때, 서점 주인 말을 듣고 충동구매했던 그 포스터. 딱 한 번 펼쳐 보고는 그마저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숨겨놓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후로 코앞에서 마주하고 만져 본 덕분일까.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이 사진을 보자마자 그 포스터 속 규화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조악한 흑백 사진 가운데서도 규화의 눈은 옅은 음영으로나마 빛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무채색의 사진인데도 그 본래의 색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불현듯 눈을 깜박이자 금빛 그림자는 이내 사라졌다. 영인은 쓴웃음을 삼켰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인다는 게 이런 걸까. …얼마나 상사가 심하면.

“그 뭐야. 기자 회견을 한 모양이더라. 그리고 뭐…. 고별 공연을 한다잖니. 응?”

그에 홀린 탓에, 사진 아래 글자를 조금 늦게 발견했다. 이 또한 예상 밖이었다.

“내가 그래도 라면 국물은 안 엎질렀지.”

“…….”

영인은 말이 없었다. 묵묵히 한편에 신문을 접어 두고는, 다시 고개를 박고 라면을 먹었다. 후루룩, 후루룩거리는 소리만이 대답이었다. 그 정갈한 정수리에다 대고, 신 씨는 덜어 둔 라면이 부는 줄도 모르고 한 번 더 제자를 재촉했다.

“먹자마자 바로 올라가라. 어? 아직 막차 있지 않니.”

“…….”

“그래. 내 부품도 좀 사 와라. 너 가는 그 병원, 한 정거장 옆에….”

“선생님께서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결정은 달라지지 않아요.”

신 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결국 그는 젓가락을 상에 내려 두었다. 영인만이 이내 그릇을 비우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저한테 해 주셨던 말씀.”

“…….”

“진짜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에 기대어 이렇게 뻗대고 있는 게야? 귀가 먹을 때까지?”

“라면 불어요, 선생님.”

어느새 한 그릇을 다 비운 영인이 씨익 웃었다. 무언가 말을 보태려던 신 씨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면발이 불어 젓가락에 툭툭 끊어졌다.

얼큰한 걸 좋아해 청양고추를 썰어 넣은 탓일까, 코끝이 찡하고 울렸다. 이제는 굳은살이 박여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손끝으로 영인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고개를 든 신 씨의 눈시울도 붉었다.

“라면이 좀, 맵네.”

“그러게요.”

“나 물 좀 다오.”

“…여기요.”

묵묵히 라면을 비우는 데 열중한 두 남자 사이엔 한동안 다른 말이라곤 없었다. 이따금 라면이 매운지 연신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 씨는 퉁퉁 불은 라면이 가득 담겼던 냄비를 비웠다. 그리고 소화도 되기 전에 영인의 등을 떠밀어 자신의 공방에서 내쫓았다. 부품이 정말 간절히 필요해서 그렇다는 말이 그의 주장이었다.

정 그렇다면 내일 올라가겠다는 말에도 신 씨의 고집은 어김없었다. 얼른 올라가되 또 바로 내려오지는 말라는 억지에 영인은 항변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그는 막차를 타고 뒤늦게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보름 만의 서울행이었지만 마음이 실로 착잡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갈아탈 지하철 역시 막차 시간에 아슬아슬했다. 서둘러 지하철 역사로 내려가던 길목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판대 앞 잡지와 신문들을 둘러보았다. 아까 밥상에서 본 사진 속의 규화가 여럿 걸려 있었다.

“…이렇게 주세요.”

영인을 마지막 손님으로 맞이한 매점 주인은 그가 구매한 주간지에 식은 옥수수까지 얹어 주었다. 감사함에 꾸벅 고개를 숙이고 플랫폼으로 내려온 영인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옥수수는 가방 속에 넣고 차분히 잡지 속 규화를 살폈다.

내용은 간단했다. 스캔들에 대한 반박과 출국 전에 감사한 마음으로 공연을 마련하겠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상대 여배우의 얼굴은 아예 사진이 실리지도 않았다.

이런 소소한 주간지에까지 실릴 일인가. 영인은 새삼 문규진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그의 경고는 간결했다. 거절하면 그 결과를 머지않아 알게 해 주겠다는 말은 손쉽게 실행되었다. 영인은 날조뿐일 내용 자체에는 그다지 충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쪽을 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규화와 재회했던 날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공연 몇 시간 전, 대기실. 기자 회견을 마치고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규화는 평소 같지 않았다. 낯선 제 앞에서마저 소리를 지르고 힘겨워했다.

영인에게는 카메라나 시선 앞에서 의연한 규화보다 석상 뒤에서 그 갑절을 고통스러워하던 규화가 더 익숙했다. 그게 더 솔직한 모습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의 안부가 걱정되고 또 두려워졌다.

‘보고 싶어. 응? 나, 늦지 않을게. 꼭 기다려.’

그날 열 시, 병원에서 만나자는 약속마저 어긴 셈이었다. 뒤이은 스캔들까지 제게 무어라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가을까지 이어지기로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서 규화는 멀리 날아갈 모양이었다. 스스로 실망한 걸까. 그래서인가. 아니라면….

…이대로 보내야 하는 건가.

그는 단단히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사진 속 규화의 뺨을 쓸었다. 실물을 절반도 못 담는다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잠시나마 그리움을 해갈하던 영인은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하철에 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취방에 이르기까지 영인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길을 잃고 헤맸을 터였다.

만나러 가도 될까? 아니, 만나러 갈 수 있을까? 권 교수님에게 부탁을 또 드린다고 해도, 아마 매니저가 사전에 그를 알아보고 차단할 것이다. 예정된 공연일은 고작해야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만약 현을 그 안에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의 피아노를 매만질 수는 없을 것이다.

관객으로나마 만날 수는 있지 않을까. 들어갈 수 없다면 로비에서나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니, 그게 맞는 일일까. 과연 어떤 것이….

이명은 점차 그 무게를 늘렸다. 바깥소리와 차단된 그의 머릿속은 온전히 규화가 잠식했다. 온화한 밤공기 사이를 걸어 집에 도착했을 무렵, 손아귀 안의 잡지는 흠뻑 젖어 잔뜩 구겨져 있었다. 텅, 텅, 소리를 내며 오른 철 계단은 이전과 달리 미지근하기만 했다.

그 처량한 울림 끝에 다다른 자신의 집에서 예상 밖의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 갔었어.”

“…오랜만이다. 민성이는?”

영인은 이미 지쳐 있었다. 길지 않은 인사를 건넨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어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그의 옷깃을 붙든 은혜의 두 눈은 이미 젖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초췌한 영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서둘러 영인의 오른쪽에 선 그녀는, 한 자 한 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또렷한 발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수술, 왜 안 받겠다고 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민성이는.”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오빠.”

마지막으로 만난 게 지난겨울이었다. 그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사뭇 따사로웠다. 하지만 달아오른 눈시울에는 역효과를 냈다. 맞부딪히는 시선이 차가웠다. 그 한기에 은혜의 큰 눈과 목울대를 적시는 물기는 연신 그치질 않았다.

“그 회장 쪽에서 수술이랑 사후 비용도 다 대 준다고 그랬다며. 그런데 왜 거절했냐고.”

“…네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

“이 이야기가 사실이긴 하구나?”

모른 척하기엔 이미 늦었다. 영인의 표정이 일말의 감정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은혜는 더는 그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인은 그녀의 올곧은 시선에 대고 거짓말하기를 포기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래.”

“오른쪽 귀, 거의 안 들린다며.”

“그 정도는 아냐.”

“그래도, 수술이라도 받으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 아냐. 맨날 이명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러다가 정말, 정말 하나도 안 들리게 되는 것보다는 수술을 받는 편이 훨씬 나은 거잖아.”

은혜는 자신이 들었던 바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들은 내용부터가 충격이었지만 더욱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건 영인을 이야기하며 시시덕거리던 말투였다.

그들은 영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수술비에 재활 치료비용까지 전부 대 주겠다는데도 제 귀를 안고 가겠다는 그 사명감이, 이해할 수 없는 거렁뱅이의 자존심이라고 헐뜯었다.

은혜는 그들 앞에서 숨을 죽였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이 말하는 장영인이 제가 아는 그 장영인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어리석은 바람이었다. 한쪽 귀가 먹은 조율사, 게다가 문규화와 접점이 있을 사람은 흔치 않음을 알면서도.

“내 귀는 내가 알아서 해.”

“오빠.”

그 미약한 기대를 비웃듯, 지금 눈앞의 영인은 그들이 묘사하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고집을 담은 올곧은 시선. 이미 마음을 굳힌 영인은 그녀의 애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수술이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냐. 지금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는 더욱 아니고.”

“나도, 그건 알아. 하지만….”

인공 와우 수술의 부작용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희망원에 있던 어린 시절만 해도 영인의 오른쪽 청력은 손상된 왼쪽 청력에 비하면 정상 수준이었다. 하지만 돌발성 난청을 거듭하면서 우측 청력마저 쇠퇴하자 문제가 커졌다. 그가 이대로 모든 소리를 잃게 될까 두려워 은혜는 다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봤다. 결과는 회의적이었다.

급여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한쪽 귀를 수술하는 데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인공 와우는 말소리를 기준으로 전파를 인지하도록 개발되었기 때문에 고주파와 저주파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음악을 듣기엔 무리가 따른다. 관련 장비가 개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영인이 얻어 사용할 날이 올지도 불확실했다.

그래서 영인의 판단은 늘 같았다. 청력을 불완전하게 복원하느니 희미하게나마 남는 음악의 파동을 느끼기를 원했다. 오른쪽 귀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는 자신의 귀로 들을 생각이었다. 그 모든 음악을.

그 길을 선택한 의지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었다. 영인의 의사를 확인한 은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경멸스러웠던 그 VIP들과 자신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그만큼 영인의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깟 음악이 뭐라고. 먹고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 대체 왜.

“내 말이라고 안 들을 거 같으면, 당장 수녀님께 말할 거야. 그러면….”

“이미 알고 계셔.”

“뭐?”

“말씀 드렸어, 내가.”

“…안, 말리셨어?”

영인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날 일이 떠올랐다.

문규진의 제안을 거절한 뒤, 그는 곧바로 희망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을 아녜스 수녀에게 전부 털어 두었다. 그녀는 긴말을 건네지 않았다. 차분히 영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너나 나나, 어떻게 누구 손에서. 어떤 이유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

“그러니 이 정도는,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내가 선택한 대로 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러라 하셨어.”

“…오빠.”

“어차피 당신 말씀, 안 들을 거 아셨던 거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타의가 아닌 자의여야만 한다. 그 생각만은 확고했다.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영인은 그 마지막을 느긋이 기다릴 생각이었다.

지극히 초연한 만큼,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기 마련이었다. 영인은 제가 아녜스 수녀에게 크게 불효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에 있는 은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소중함과 별개로, 영인은 타의 앞에 제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람은…. 알아?”

“…….”

“아마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 사람도, …오빠를 좋아한다면.”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영인은 입술을 닫았다.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은혜도 딱히 이름을 지칭하진 않았다. 따스한 바람만이 그 해답을 안다는 듯 두 사람의 옷깃을 연신 들추어 댔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정말… 많이 슬퍼할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은혜야. 그거랑은 전혀 다른 문제야.”

“뭐가 다른데?”

“애초에 난,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거야.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

“너나 수녀님이 덜 소중해서가 아니야. 누구든…. 그래. 규화가 슬퍼해도 상관없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거니까. 내가 한 선택을 믿고, 온전히 책임질 거야.”

처음부터 대화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날 서 있던 눈빛이 지극히 이전의 빛을 되찾았다. 영인의 온후한 눈빛에 은혜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그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영인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는 늘 자신보다 큰 어른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은혜는 제가 자라나면 그를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영인을 돕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서 마주한 실상은 달랐다. 마주 본 영인은 오히려 작게만 느껴졌다. 보이는 덩치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바닥이 없는 늪에 빠져들듯 점차 작아지고 멀어져만 갔다. 그게 싫어 다급히 손을 뻗어 봐도, 그는 은혜의 손을 잡지 않았다. 잡지 않을 터였다.

“이만 들어가. 시간이 많이 늦었다.”

“…….”

“민성이한테 너 마중 나가라고 연락해 둘게.”

대답 대신 은혜는 몸을 돌렸다. 옥탑방을 잇는 철제 계단은 높았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은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려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손잡이를 겨우 움켜쥐었다. 겨우 바닥에 내려선 뒤에야 쇳내 나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대강 훔쳤다. 애써 참아 내었던 울음이 북받쳐 올라, 계단을 내려서고 난 뒤에는 봇물 터지듯 터져 내렸다.

분명 장영인은 변했다.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영인이 아닐 수는 없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은혜는 서둘러 어둠 속을 내달렸다. 급했다. 영인이 늪에 빠져들기 전에,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

은혜가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영인은 집에 들어왔다. 최근까지 민성이 돌본 덕분인지 방은 깔끔했다. 그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접이식 소파 위에서도 좋은 향이 났다.

영인은 가방에 욱여넣었던 찰옥수수와 잡지를 꺼냈다. 옥수수는 이미 진작에 식어 묘하게 비린내가 났지만 개의치 않고 그것을 물어뜯었다. 이에 달라붙는 식감이 불쾌했다. 몇몇 알갱이가 도르르 흘러 바닥에 내려 둔 잡지 위로 굴러다녔다. 그는 구겨진 규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아래의 글씨를 읽었다.

…기자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문규화(24)는 예의 정중한 미소로 시종일관 질문에 대답했다. 다소 곤란한 질문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불거진 스캔들에 대해 “이 또한 저를 향한 좋은 관심의 일종이라 생각하고 싶다.”라고 연일 매체를 뜨겁게 달군 사건을 일축하며 스캔들 상대였던 김유리(21)에게도 사과를 표했다.

기자 회견을 마치며 그는 “환대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예상 밖의 성원에 무척 기뻤고 많은 기운을 얻었다. 부디 더 좋은 성적을 거둔 뒤 한국에 돌아와 인사드리기를 소망한다. 먼 타국에까지 성원을 아끼지 않아 주시는 분들의 면면을 잊지 않겠다. 행복한 기억만 안고 가겠다.”라며 간략하게 한국에서의 소회를 밝혔다.

문규화는 그 모든 감사를 담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선보일 예정이다. 예정에 없던 고별 공연을 개최하는 이유에 대해 그의 매니지먼트는 ‘온전히 문규화 본인의 강한 의지 때문’이라고 밝히며, 긴박한 일정에도 최선의 모습을 선보일 수 있도록 연주자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다 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문규화는 내달 12일, 하루 간의 공연을 마친 뒤 본가가 있는 뉴욕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뉴욕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거점을 옮겨 내년 가을에 있을 국제 쇼팽 콩쿠르 준비에 몰두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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