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휴식」
오늘 아침 7시. 눈을 뜬 영인을 반긴 것은 규화의 짤막한 문자였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액정 위에 한참을 머물던 손가락이 보낸 메시지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답지 않게 일찍 뜨인 눈에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한번 달아나 버린 졸음은 환한 시야 덕분인지 재차 찾아오지 않았다. 그 길로 일어난 영인은 엉망이었던 집도 말끔히 청소하고 세탁물도 가지런히 바깥의 빨랫줄에 걸었다. 오늘도 가을볕은 청명했다. 옥탑방의 최고 장점을 느긋이 누리다, 영인은 선선한 바람을 등지고 학교로 향했다.
평소대로라면 규화가 연습해야 할 오전 10시. 혹시나 싶어 교수동에 들러 봤지만 규화는 정말로 오지 않았다. 선율이 없이 적막한 방이 묘하게 적적했다. 이유 모를 허탈감을 지우기 위해 영인은 마음먹고 청소를 시작했다. 잡음을 유발하는 여타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페달부터 건반과 뚜껑까지 야무지게 닦고 나니 조금은 개운해졌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한낮이었다. 오전과 밤, 각기 4시간씩. 도합 8시간을 규칙적으로 쓰던 일과가 생각보다 큰 존재감을 차지했다는 것을 영인은 새삼 깨달았다. 여전히 반나절은 남은 하루에 영인은 여태껏 미뤄 왔던 일들을 처리하자 마음먹었다.
우선 은행에 들른 영인은 딱 이달분의 생활비만 입금해 두고 학교로 돌아와 학식으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리포트도 작성하고 조율하다 빼먹은 수업의 필기 노트까지 빌렸다. 리포트 메일 전송을 마친 영인은 중앙 도서관에서 책을 두 권 빌렸다. 열람실에서 볼까 하다가, 창밖의 날씨가 독서의 계절다워서 그는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문대의 외진 카페테리아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서 빌려 온 책을 내려 두고 나서야 영인은 문득 규화의 생각이 났다.
혹여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주치의도 있으니 걱정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너른 호텔방에서 혼자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연락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전화를 거는 건 좀 오버겠지 싶어 몇 번이고 메시지 창을 켜고 끄던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새 휴대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데?”
“…가영 누나.”
“잘했어. 안 그래도 너 휴대폰 골동품이어서 언제 좀 바꿨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가영이었다.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재주는 서투른 영인은 어설프게 숨기느니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며 넘겼다. 액정이 큰 탓에 잘 숨겨지지도 않는 최신형 휴대폰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영인은 지갑을 꺼내 들고서 어설프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누나, 커피라도 사 드릴게요. 저도 주문해야 하거든요.”
“왜, 어제 그 일 때문에?”
“사실 더 맛있는 거 사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해서요. 식사하셨죠?”
“난 누구 씨하고 달리 벼룩의 간 빼 먹는 취미는 없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충분해.”
“비싼 거 드시지.”
“그럼 사이즈 업으로 부탁하지.”
영인은 계산대로 향했다. 복잡한 메뉴판 앞에서 짧게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과일 여럿이 섞인 스무디를 골랐다. 며칠 전 규화의 심부름 덕에 처음 맛본 음료였는데 의외로 입에 잘 맞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알록달록한 과일 스무디가 쟁반에 얹혀 나왔다.
“오, 그런 취향이야? 의외로 너 아기자기하네.”
가영이 그가 가져오는 쟁반 위를 보고 의외라는 듯 물었다. 별다르지 않은 말에 괜히 귀 끝을 붉힌 영인이 콧잔등을 매만지며 변명처럼 덧붙였다.
“저도 보통 커피 마시는데, 병원에서 카페인은 최대한 자제하라고 해서요.”
“아…. 요새는 어때?”
“…늘 같죠, 뭐.”
턱없이 짧은 답변에도 가영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도 영인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다. 환경도, 장애도.
영인의 기구한 사정을 들은 사람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그 사정을 충분히 가련히 여기는 사람과, 사정을 알기에 더욱 아니꼽게 보는 시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연민일지라도 전자의 시선이 영인에겐 좀 더 버티기 쉽다는 정도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그녀는 매끄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센스까지, 영인에게 충분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들었어? 다음 주에 홀에서 뭐 있나 보던데.”
“…아뇨? 금시초문인데요.”
“그래? 흠, 너도 모른다면 이건 또 예상 밖이네.”
차가운 잔 속 빨대를 휘휘 돌리며 가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영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왜요?”
“조교실로 연락이 왔거든. 다음 주 금요일에 행사 있으니까 애들 최대한 다 참석시키라는 공지 내리라고. 권 교수님 지시여서 뭔가 너는 알까 싶었지.”
“행사요?”
“응. 아트센터 홀에서. 적어도 졸업반 애들이랑 대학원생 애들은 다 참여하라고 지시 내리셨네?”
“이번에 세미나 가셔서 뭔가 좋은 기회를 잡으신 건 아닐까요.”
“그러게. 뉴욕에서 뭔가 저명한 인사라도 섭외하신 걸까? …아무튼,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대단하다 못해서 애들이 죽어나지만. 황새 따라가던 뱁새 이야기 알지? 완전 그거.”
영인은 웃으며 가영의 짓궂은 비유에 동조했다.
권 교수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으며, 그 표현 방식 또한 독특해 많은 학생의 원성을 샀다. 그가 단순히 피아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율사로서 음향 공학적인 면모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특히 제자들이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식이나 자세에 머무는 것을 경계했다.
지금 아트센터 홀의 피아노를 가와이로 바꾼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물론 내부의 반발은 심했다. 어느 대학교든 스타인웨이 그랜드는 고급의 상징이고 기본이었다. 하지만 권 교수의 고집을 꺾진 못했고 불현듯 3년 전, 아트센터 홀의 피아노는 지금의 가와이 그랜드로 바뀌게 되었다.
“괜히 새우 등 터지는 거지 뭐, 그냥 스타인웨이로 바꿔 주시면 간단할 텐데.”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응. 기계에 기대지 말라고. 대학교니까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 보라고. …어찌 보면 그분답지만, 뭐. 연주자 입장에선 짜증 나는 것도 이해는 가. 졸업 연주회 같이 중요한 자리에서 되도록 최고의 환경을 원하는 건 당연한 마음이지 않겠어?”
피아노는 대다수 천연 소재를 이용하기 때문인지 같은 공정을 거치더라도 각 악기마다 미묘한 음색의 차이를 보인다.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피아노는 때론 피아니스트에게 걸림돌이 되고, 조율사는 그 간극을 최대한 메꾸어 주는 중매쟁이와도 같다. 그러나 그 역할에도 한계는 있다. 조율사의 정음 작업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아예 다른 피아노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피아니스트는 최고의 환경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 작은 둔덕을 사회에 나가기 전, 대학교 졸업 연주회에서 경험시키겠다는 게 권 교수의 의도였다. 의도는 바람직하나 연주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안형준의 히스테릭도 같은 이유였다. 그렇다고 권 교수에게 직접 항의할 수는 없으니 그 불똥이 괜한 영인에게 튀게 된 것이다.
“그래도 같은 곳에서 저명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짠, 멋있게 해 버리면 대박이겠는데. 문제의 ‘재수 없는 천재 예술가’도 아무래도 닥치지 않겠어?”
“하하, 누나 말이 심해요.”
“뭐가 심해. 네가 너무 물러 터진 거야.”
영인은 타박하는 가영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가정으로 가득 찼다. 권 교수는 마침 뉴욕에서 개최되는 세미나에 참석했고, 뉴욕에는 스타인웨이 본사가 있다. 함부르크산을 좀 더 선호한다지만 유명한 마이스터1)들은 본사에서 교육과 세미나를 받는다. 국제 전화로 제 고생을 토로한 영인으로서는 자기 탓에 조율사를 초청한 게 아닐까 지레 찔리는 구석이 생겼다.
하지만 가영에게 그것까지 알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마스터 클래스는 피아니스트를 부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래저래 가늠을 하면서도 함부로 단정은 지을 수 없는 이야기에 영인은 얌전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무튼 너도 알고 있으라고. 애들 참석 강요할 정도로 좋은 강연이면 너도 들어 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감사해요, 누나. 또 빚을 졌네요.”
“아이고, 또 무슨 빚이래. 애초에 나 아니어도 교수님이 으레 너 부르실 거 같은데?”
“그럴까요….”
가영의 말이 맞았다. 피아니스트든 조율사든, 누구의 강연이든 지금의 영인에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대뜸 가겠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마침 규화와 계약된 시간이 겹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래서 권 교수도 언질해 두지 않은 터. 영인은 애석했지만 금세 미련을 떨쳤다.
원칙은 원칙이었다. 지금 영인에게 규화보다 더 중요한 일정은 없었고, 없어야만 했다.
***
오늘의 규화는 모든 게 달랐다. 어제 하루 쉰 것을 오늘 다 쏟아붓겠다는 것처럼, 눈빛도 지시도 태도도. 평소와 하나같이 달랐다. 농담처럼 ‘피아노에 자신을 맞추던’ 그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좀 더 날카롭게. 소리의 명도가 떨어져.”
오전 연습은 음을 조정하는 데만 온전히 두 시간을 썼다. 다행히도 영인의 준비성이 빛을 발했다. 가방 속에 챙겨둔 오만 도구들이 시의적절하게 쓰였다. 해머부터 플랜지 코드, 작게는 펀칭 클로스까지. 원하는 음색에 맞추려는 모양이었다.
“왼손의 터치 조금 가볍게. 레벨 봐 줘.”
수제로 만들어 둔 매우 얇은 펀칭 클로스 몇 개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서스테인 페달도 다시 맞춰 끼웠다. 고음부와 차고음부의 건반의 깊이를 하나하나 따졌다.
물론 영인은 불평 한마디 없이 지시에 따랐다. 다만 규화가 지시하는 표현을 피아노에 적용하는 것에는 간극이 있어 적잖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안 든다며 막무가내로 시비를 거는 형준보다는 나았지만, 그가 말하는 맑음, 혹은 소리의 명료함을 반영하는 데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의문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소리까지 지시하게 된 바는 무엇일까. 어차피 방음재로 가득한 이 방에서 반사되는 소리는 극히 들리지 않을 텐데도, 규화는 실전에 가깝게 영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미처 묻지 못한 의문은 오후 연습이 다 되어 가도록 영인을 맴돌았고, 그 해답은 오후에 와서 나름의 답을 찾은 듯했다.
레퍼토리가 바뀌었다. 한 달 넘게 리사이틀의 레퍼토리만 반복하던 규화가 처음으로 다른 곡들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곡들은 모두 ‘쇼팽’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규화는 내후년 있을 쇼팽 콩쿠르에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 전까지 부상을 치료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늘 그랬듯 피아노 앞에서의 규화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진지해 보였다. 암보했던 이전과 달리 스스로 사보해 둔 악보를 펼쳐 놓고서, 규화는 하나하나의 페이즈를 섬세하게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곡은 발라드 1번이었다. 비장하게 시작하는 도입부가 몸을 경직시키다, 이어 숨을 죽인 모데라토에 긴장을 풀면 이내 친숙한 서정적인 주제부가 흘러나온다. 영화에서도 자주 쓰여 귀에 익숙한 곡이었다. 제 템포보다 느리고 섬세한 연주는 다소 규화답지 않기도 했다. 초견일 리는 없건만 그는 마치 처음 발라드를 배우는 사람처럼 하나하나의 프레이즈를 섬세하게 다뤘다.
그리고 질리도록, 하나씩 꼽아 반복하고, 다시 반복했다. Presto con fuoco, 말 그대로 빠르고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화성에 규화는 몇 번이고 거리낌 없이 제 양손을 내리쳤다. 보호구 하나 없이 전신의 힘을 이어받아 저음부를 내리치는 왼손의 궤적에, 영인의 시선도 그 뒤를 따랐다. 절로 입술이 깨물렸다.
“…무슨 할 말 있어?”
거의 한 시간을, 쉬지도 않고 내려친 규화가 물병으로 목을 축였다. 물을 건넨 뒤 먹먹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영인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규화가 운을 뗐다.
“…오른손은 몰라도, 왼손 연주는 조금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기다렸다는 듯 영인이 말을 이었다.
“백 선생님도, 그리고 교수님께서도. …다들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1년간 쉬기로 한 이상, 지나친 연습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굳이 권 교수나 백 선생이 제안하지 않았어도 영인 스스로가 당부하고픈 말이었다. 여태껏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다.
두 달 남짓 규화를 지켜보면서, 영인은 실로 혀를 내둘렀다. 체력적으로 지칠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정해진 시간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그 정도 하면 되겠지 싶은 것도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 연주했다. 듣는 사람이 지겹다 싶을 정도였다.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 권 교수의 표현에 영인 역시 동의했다. 그 부단한 노력이 문규화를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했을 것이다. 영인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감탄했으며, 좀 더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노력이 늘 긍정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인이라면 더욱, 잘 안다. 그는 그 부작용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가 있었다.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조금 돌아가는 게 현명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게 지름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손목에 무리가 갈 정도의 연습은 독이 될 거예요.”
이어지는 말에도 규화는 대답이 없었고, 그저 실내엔 불길한 정적이 맴돌았다. 연주를 마치고 땀을 닦고 난 뒤에도 규화는 피아노 앞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치 영인의 말을 곱씹는 듯했다.
“내 목표가 뭔데?”
뒤늦게 건네는 질문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내후년에 있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게 우선의 목표 아닌가요.”
“누가 그래? 내 목표가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고.”
읊조리듯 작은 목소리에 영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권 교수님이? 평론가들이?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뜨내기 클래식 동호회 사람들이?”
“…….”
“아니면 그 잘난, 너희 대학원생들이 그렇게 말했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비해 높낮이 없이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였다.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규화의 호박색 눈동자가 영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
쇼팽 콩쿠르는 영인의 독단적인 억측이 아니었다. 쇼팽 콩쿠르는 개최 주기가 5년으로 무척 긴 편이었다. 지금 스물셋인 규화로서는 2년 뒤인 스물다섯 때가 전성기의 실력을 선보일 유일한 기회였다. 이전의 콩쿠르에서 아쉬웠던 만큼 가장 권위 있는 쇼팽 콩쿠르를 목표로 하는 것은 비단 문규화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문하는 규화는 그 이상을 말하는 듯해 영인은 얼떨떨했다. 앞만 바라보던 규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영인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에는 분노도 경멸도 또 서운함도 없었다.
“네가 걱정해 주는 마음은 알아. 누구나 다 늘 그렇게 걱정했으니까. 하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
한순간에 영인의 용기는 그저 흔한 격려와 위로가 되어 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규화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리 걱정이 되면 나중에 마사지나 제대로 해 줘.”
“…귀한 왼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배운 겁니다. 별건 아니지만, 정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두 달 가까이 영인은 규화의 연주를 수없이 들었다. 분명 아름다웠고, 귀의 피로를 감수해서라도 더 듣고 싶을 정도였다. 조율사인 그에게 콩쿠르 심사 위원처럼 객관적인 평가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영인은 규화에게는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나온 15년이 마법 같았다. 피아노에 몰두한 규화를 보고 있자면 영인에겐 연주의 감흥 그 이상의 무언가가 밀려들었다. 질투, 시기, 혹은 동경….
영인이 규화에게 갖는 여러 가지 감정은 단순한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언어로 구획되기엔 실로 아까운 감정의 향연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부디 음악이 끝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그러니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누군가한테는, 죽었다 깨나도 가질 수 없는 손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세한 잡음처럼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 생겼다. 규화의 왼손이었다. 베이스의 음형이 커질 때마다 자연스레 시선이 몰렸다. 혹여 아프지 않을까, 괜찮을까 싶은 마음에 영인은 완벽한 관객이 될 수 없었다.
이 주제넘은 참견 또한, 영인 스스로의 괴로움을 토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왜?”
“네?”
“내가 왜 그 누군가를 고려해야 하지?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만으로도 벅찬데.”
하지만 아무래도 규화에게는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는 냉정한 말에 영인은 문득 거리감을 느꼈다. 두 달여 애써 좁혀 들었던 두 사람의 사이가 단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버렸다.
“그리고 말해 두는데. 난 콩쿠르 우승이 목표였던 적이 없어. 내 평생 단 한 번도. …쇼팽 콩쿠르도 마찬가지야.”
“…….”
“반가웠던 적 없어. 오히려 고통스럽다면 모를까.”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긴 시간 꼬리를 이었다. 규화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작은 한숨이 홀을 울릴 정도였다. 영인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규화의 반응은 하나도 짐작하지 못한 영역이라 그는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영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규화는 마치 무언가를 떨치려는 듯 고개를 잘게 흔들고서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써 준 건 고마워. 하지만 방금은 확실히 주제넘었어.”
참담했다. 고맙다는 말이 오히려 영인의 마음에 쉽게 금을 냈다.
“이만 가 봐. 연습에 방해돼. …교수님 오셔서 봐 주시기로 했어.”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영인은 더 이상의 항변을 포기했다. 짐을 챙겨 나간 영인의 뒤로 홀의 문이 무겁게 닫혔다. 얼마 안 가 건반이 마음대로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지만, 영인은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막상 들어간다고 해도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쭙잖은 위로는 화를 부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영인은 살며시 떨리기 시작한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누군가가 당신 앞에 있다고. 적어도 나라면, 당신처럼 험하게 쓰지 않을 거라고 항변하려다 참았다. 다른 사람인 척 내세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 보잘것없어 영인은 쓰게 웃었다.
쇼팽 콩쿠르보다 더 소중한 목표가 있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꿈이길래.
지금의 영인으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음악을 수치화시켜서 재단하고 등수를 매기는 콩쿠르가 즐거울 예술가는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의 문규화는 충분히 우승을 노려 봄 직했고, 그 우승은 여태껏 그를 폄하했던 사람들의 코를 눌러 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콩쿠르 없이도 충분히 문규화는 훌륭했지만….
“…….”
콩쿠르의 우승이 다 고통이었다니. 당차게 자리에 올라섰던 여덟 살 아이의 그림자를 본 듯해 영인은 입술을 짓이겼다. 여덟 살에도 지금에도, 결과적으로 그는 문규화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단정한 입가에 자조가 물들었다.
존재 자체가 연주자에게 방해되다니, 최악의 조율사 아닌가. 안형준이 괴롭힐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자괴감이 그를 덮쳤다.
한참을 교수동 입구에서 서성이던 영인은 안에서 선율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오기로 했다던 권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이리저리 발길을 돌리던 영인은 이내 마음을 먹고 빠르게 움직였다.
미안함의 표현도, 사죄의 표현도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
딱히 ‘신정훈’ 때문이 아닐지라도 문규화의 여덟 살은 무척이나 가혹했다. 친엄마의 품을 떠나 낯선 타지에서 살게 된 아이는 이곳이 본디 제 고향이라는 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들려오는 영어는 마치 외계인의 대화처럼 들렸고, 쉽게도 아이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무대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아이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만나게 된 낯선 세상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피아노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피아노는 언어나 기분에 구애받지 않고 늘 같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규화가 슬픈 날에도 기쁜 날에도 늘 C 장조의 온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는 마이너와 메이저를 배웠다. 기쁘고 신나는 날엔 모차르트의 F 메이저를, 서글픈 날에는 울기보다는 A 마이너를 연주했다. 아이의 말로는 어눌하기만 한 수많은 감정은 음악의 장단조가 대신 전해 주었다.
몇 마디 서툰 말보다, 이제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유창해진 언제쯤에도. 늘 음악은 몇 마디 말보다 우위에 서 있었다. 오감에 따라 말보다 더욱 수월하게 기분을 표현해냈고,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아이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그런 일상이 축적된 결과일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게 ‘신정훈’의 탓만은 아니었다. 신정훈에 못지않은 연주를 해내겠다는 다짐은 가끔의 원동력이 되어 줄 뿐, 결국 그 길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책임 전가로 얻어 온 비굴한 안식은 이제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무조건 신정훈의 핑계를 대는 것도 슬슬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
문규화가 기다려 온 신정훈은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애초부터, 남아 있던 것은 오직….
“…….”
마음처럼 이어지지 않은 셋잇단음표에 원망스러운 듯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던 규화는 뻐근해진 목을 젖혔다. 레퍼토리에 넣은 적은 없으나 모두 다 오랫동안 쳐 온 곡들이었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에 익히는 과정은 필요했다. 그건 머리로 될 것이 아니었다. 단시간 내에 손끝에 선율이 달라붙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연습만이 해답이었다. 영인의 말대로, 그것이 설마 독이 될지라도.
밤이 깊도록 오기로 했다고 둘러대었던 권 교수의 모습은 연습이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관객 하나 두지 못한 외로운 연주는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연습실의 문을 잠그려고 돌아선 규화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문 앞에 놓인 비닐 봉투에 규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채고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대학 이름과 같은 약국 이름이 적힌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은 별것 없었다. 싸구려 파스와 비타민 캔디. 그리고 영인에게 곧잘 주문했던 생과일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다만 마실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층 분리가 된 데다 눅진하게 녹아내린 내용물 덕에 봉투 속은 물기로 흥건했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낸 규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표라.”
한숨을 내쉰 규화는 씁쓸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이제는 맹물이 거의 다 된 음료수를 빨대로 뒤섞은 뒤 그 궤적을 살피던 규화의 호박색 눈이, 문득 따스하게 물들다 눈꺼풀 뒤로 숨었다. 입 안을 가득 메운 음료수는 묘한 맛을 냈다. 하지만 규화는 묵묵히 그 음료수를 들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몰래 쥔 왼손의 주먹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 영인의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모습을 나타낸 규화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안심한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리 3시간 이어진 연습의 강도는 역시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날을 거듭할수록 연습은 점차 격렬해졌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규화는 쉴 새 없이 연습했다. 영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도 연습이 끝난 뒤 간단한 말 몇 마디뿐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재차 끝난 이야기로 간섭할 수는 없었다.
용기를 내 본 참견은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일까. 씁쓸했지만 인정할 것은 해야 했다. 규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찌 됐든 선택은 규화의 몫이었고 다만 영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평소처럼 피아노를 손보고 연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마사지뿐.
“내일 연습은 다른 곳에서 하려고 해.”
“…어디요?”
“아트센터 홀? 잠시 빌리기로 했어.”
연습실에서만 하니까 감이 좀 오지 않아서, 라고 규화는 잠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영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 다 학교에서 나가고 난 뒤인 10시 반 이후부터 짧게 한 타임 할 생각이야. 시간은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중간에 시간 빌 때 거기 피아노 좀 확인해 줘. 음색도 맞추면 좋고.”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트센터 홀이라면 다행이었다. 영인은 안심했다. 마침 내일 아트센터에서 권 교수 주최의 마스터 클래스가 있어 며칠 전 전문 조율사가 방문해 작업을 마친 뒤였다. 기본적인 상태는 보장된 데다가 권 교수의 배려로 그 조율 현장을 견학했기 때문에 야마하와 다른 구조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커버할 자신이 있었다.
피아노의 메이커나 사이즈에 따라 음색이 다르고, 또 같은 모델 중에도 피아노마다 각기 소리가 다르다. 영인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가와이 그랜드의 조율을 통해 내부의 액션 구조와 재질의 차이가 귀에 들리는 음색의 차이로 변환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새삼 놀라웠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귀로써 다르게 들린다는 그 당연하고도 신비한 사실을 재삼 깨닫고 만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형준이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머릿속과 마음에 기준이 되는 최상의 소리가 있는 이상 그것에 가까워지고픈 마음은 연주자와 조율사 모두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규화가 야마하와 스타인웨이가 아닌 가와이로는 어떤 음색을 낼지가 궁금했다.
때문에 영인은 더욱 공들여 피아노를 손봤다. 그래 봤자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건반의 레벨을 손보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오후엔 내일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할 인원 몇몇이 리허설 겸 홀을 썼다. 여전히 안형준은 영인을 이모저모 괴롭혀 댔지만, 이후 규화가 칠 것을 고려하면 자잘한 투정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저녁은 먹었어?”
“네. 음료라도 사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리고 한참이나 늦은 시각 규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 그는 바로 무대 위의 피아노에 시선을 주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건만 공간이 다르기 때문일까, 영인은 유독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간단히 에튀드의 앞부분을 연주하자 피아노는 매끄럽게 현을 울려 제 목소리를 퉁겨 냈다.
확실히 홀은, 홀이었다. 여태껏 흡음재로 둘러싼 벽에 먹혀들었던 규화의 음색이 기세 좋게 홀의 사방을 타고 날아올랐다. 그 짤막한 프레이즈에도 순간 등 뒤가 시큰할 정도로 전율이 돋았다. 규화의 소리는 좁은 홀을 가득 채우고도 여유로웠다.
다만 규화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아트센터 홀의 허공 곳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소리의 궤적이라도 그 눈에 들어오는 듯 보였다. 무대의 중앙과 왼쪽을 번갈아 살피던 그가, 다시 한 번 짤막한 프레이즈를 연주했다. 고개를 갸웃한 규화는 영인을 불렀다.
“…소리가 좀 더 멀리 나갔으면 하는데.”
“아 네. 잠시만요.”
무대 뒤에 서 있던 영인이 이내 눈치를 챘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의 앞쪽 다리를 간단히 조절하는 것만으로 소리의 방향이 바뀌었다. 뒤이어 다시 같은 프레이즈를 연주한 규화가 만족스러운 듯 드물게도 미소 지었다.
“…좋아. 파일링 작업은 한 거야?”
“네, 낮에 했습니다.”
“흠. 나쁘지 않아. 좀 더 건반이 무거웠으면 좋겠지만….”
이어 몇 개의 유니즌을 쳐 보인 규화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래야 손끝에 잘, 달라붙는 느낌이 오거든. 특히 가와이는 좀…. 동글동글하기도 하고.”
무겁게 내리치던 몇몇 화음을 떠나 규화는 자연스럽게 익숙한 멜로디를 쳐 냈다. 바로 요사이 연습 중이던 쇼팽 발라드 1번이었다. 분명 근래 질리도록 들었음에도, 울림의 차이는 영인을 쉽게 매혹해 버렸다.
공간뿐이 아니었다. 야마하 그랜드와 달리 가와이 그랜드만의 음색은 색다른 맛을 선보였다. 리사이틀 때 스타인웨이처럼 화려하게 색채가 돋보이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보다 부드러웠다. 소리가 뻗어 나가기보다는 안개처럼 주변을 뿌듯이 채우며 머무르는 느낌.
어찌 보면 형준의 말대로 탁할 수도 있겠지만, 몇 번 쳐 내던 규화는 이내 피아노의 소리를 듣고 페달을 섬세히 밟기 시작했다. 맨 처음 연주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에튀드를 완주해 낸 뒤, 규화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영인도 의욕이 생겼다. 피아노 옆에 있던 그는 울림에 방해되지 않게 가방을 치우고 대신 스툴 밑에 생수를 내려 두었다. 그리고 자리를 피하려다 이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사방을 기웃거리는 덩치 큰 사내에 규화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그래?”
“…어디서 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율사는 당연히 무대 뒤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영인의 자리는 늘 무대 뒤였다. 욕심을 접은 영인이 걸음을 무대 뒤로 옮기려는데, 규화가 짧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봐줄게. 저 C석 중간, 스피커 뒤쪽으로 가 봐.”
장난스러운 말투에 영인은 한편으로 안도했다. 이토록 온건한 분위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규화가 연습에 몰두한 만큼 의도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딱히 없었고, 연습을 마치고 나서라도 그를 쉬게 놔두기 위해 영인은 굳이 쓸데없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마 사람이 없어서 울림이 좀 장황하게 들릴 거야. 감안하고 들어.”
영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니스트의 손은 보이지 않는 관객석의 우측 자리. 피아노의 커다란 입이 벌어진 그 궤적을 따라 소리가 닿는 첫 번째 위치에 영인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규화는 피아노 뚜껑에 가린 시야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영인의 착석을 확인한 뒤 연주를 시작했다.
평소의 레퍼토리도 있었고, 아닌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태껏 대기실 뒤에서만 들었던 규화의 연주를 제대로 만끽하는 경험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도 이상의 감흥이 밀려들었다. 연주하는 이의 얼굴이나 손목은 보이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게 영인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혼자 만끽하기에는 지극히 호사스러운 공연이었다. 배가 부르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피아노에서 흘러나온 거대한 음파는 하나뿐인 관객의 머리 위를 온전히 덮었다. 그 섬세하고도 풍부한 소리는 단순히 피아노만의 몫이 아니었다. 여느 학부생의 연주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음색이었다. 소리는 조율사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제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귓불까지 붉히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피아노 너머에 있는 규화가 보고 싶었다. 어떤 얼굴로 이러한 연주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말대로 ‘제 원래 자리’는 규화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무대 뒤임에도 불구하고 불쑥 욕심이 났다.
F장조를 연주할 때는 이 선율처럼 밝고 싱그러운지, C단조를 연주할 때는 이토록 비통하고 괴로운지. 무표정한 연주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규화라면, 장조든 단조든 늘 같은 표정일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그가 보고 싶었다.
소리가 아닌, 그가 보고 싶었다.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영인의 가슴에 범람하는 것은 음악이 아닌 문규화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대기실에서 헐떡거리며 괴로워하던 그 이면을 눈치챈 순간부터? 서툴게 붕대가 감긴 왼손을 본 순간부터?
아니, 언제는 ‘문규화’를 제외한 음악을 제대로 들어 보기는 했던가?
여덟 살 난 꼬맹이를 걱정하던 그 순간부터, 문규화의 음악은 문규화를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영인은 쓰게 자조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도 그는 샅샅이 문규화를 찾아내고 헤집고 떠올리고 궁금해했다. 소리가 아름다울수록 그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넘실거리는 감정을 참기 어려워 한숨을 내쉬었다. 압도하는 음압에 멍해진 귀도, 충혈된 눈도 이를 악문 턱도. 그를 걱정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토록 열렬히, 문규화를 생각했다.
몇 곡을 연달아 친 연주는 30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연주를 끝낸 규화가 의자 밑에 있던 생수를 따서 마시자 객석에 머물러 있던 영인도 서서히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야 속에 든 규화는 유독 힘들어 보였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땀에 푹 젖은 머리칼. 젖은 속눈썹이 느리게 깜박이며 다가온 영인을 주시했다.
“괜찮으세요?”
“또. 감상이 그거야?”
규화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 어떤 명곡을 연주해 내도 영인의 관심은 음악이 아닌 규화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관심의 저의를 알기에 규화는 쓴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내 리사이틀 티켓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단독 공연에 감상이라곤 그런 표정이라니, 허무한데.”
반 농담조의 말에도 영인은 여전히 무거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옮겨 무대 위로 올라온 그는 불현듯 규화가 앉은 스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덩치 큰 그가 제 앞에 쪼그려 앉자 규화는 잠시 당황해 눈을 깜박이다, 이내 그 의도를 파악하고 제 손을 내밀었다. 받아 든 손을 으레 그래 왔듯이 마사지를 할 것이다.
하지만 영인은 규화의 예상에 어긋나게 움직였다.
충동적이었다. 순간 왼손 약지가 움찔 굳었지만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 자국을 지우듯 자연스레 두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이 닿았던 부위를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안에 감긴 가느다란 손가락이 안쪽으로 오므라드는 게 느껴졌다.
“아….”
“아무래도 저로서는 모르겠네요.”
연주 내내 릴렉스를 유지하던 어깨가 바짝 굳었다. 부드럽기는커녕 메마르고 까칠했던 입술의 감촉에 규화는 긴장했다. 손등이 입술 안쪽처럼 예민해졌다. 그래서인지 닿은 부위마다 뜨거웠다. 두 엄지도, 입술도. 시선도. 촉감이 느껴질 리 없는 목소리마저.
“그냥…, 그냥. 모르겠습니다.”
“…….”
문규화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장영인에게 문규화는 남다르다. 다른 어느 피아니스트도 건드리지 못할 영역을 문규화는 쉽게 침범해 버린다.
처음엔 예쁜 것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 의외를 넘어선 경탄. 그리고 그를 넘어서고 싶은 치기까지. 심지어 피아니스트의 꿈이 꺾이고 난 지금까지도 미련스럽게 피아노의 주변을 맴돌게 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만난 지금에서도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유를, 영인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문규화에게는 지금의 만남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짧은 대기실의 만남 이후 둘의 길이 갈라져 멀어졌듯, 규화는 여기에서 머무르면 안 됐다. 쇼팽 콩쿠르가 아니어도 좋다. 적어도 이런 누추한 대학교 작은 홀에서, 연주를 마치고 찬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그런 인재는 아니었다.
“그냥 제발…, 소중히 다뤄 주세요.”
그리고 그 경애에 가까운 감상을 받은 규화의 입술은 묵묵히 닫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연신, 규화의 왼팔을 쓸고 주무르는 손길도 마찬가지로 영 떨어지지 않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흰 팔에 스친 붉은 손자국이 여러 번,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
아트센터에서의 연습은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이제껏 꽉 막힌 곳에서 연주하다 오랜만에 울림을 느낀 규화는 좀처럼 피아노를 떠날 줄 몰랐다.
다만 영인의 간곡한 부탁이 그나마 효과를 발휘했는지, 집에 돌아가던 길 규화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연습은 하루 쉬도록 할게.’
그래서 금요일 오늘, 영인은 휴무였다. 덕분에 그는 오랜만에 한산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때마침 오늘 학교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휴무가 확실시된 뒤, 어젯밤 영인은 권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해도 되냐고 물었다. 영인의 질문에 권 교수는 크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당연히 꼭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나저나, 누구의 마스터 클래스인가요?’
- 글쎄, 그건 자네가 직접 와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대내외 비밀인지 자신에게도 굳게 함구하는 권 교수에 영인은 길게 묻지 않았다.
‘아 참, 오늘 피아노를 썼었는데. 내일 그럼 행사 전에 가서 제가 손을 좀 볼까요?’
- 음…. 아니, 그대로 쳐도 별말은 없을 게다. 문제가 있으면 내가 봐 보마.
‘알겠습니다.’
마스터 클래스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영인은 조교실로 향했다. 권 교수야 괜찮다고 했지만 혹여 사전에 일손이 필요할까 싶어서였다. 때마침 조교실에서 무언갈 분주히 준비하던 가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영인을 보고 마침 잘되었다는 식으로 소맷단을 부여잡았다.
“들었어? 영인아.”
“…네? 뭐가요?”
“마스터 클래스, 누구인지 말이야.”
경직된 표정의 가영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늘 침착한 그녀가 이렇게 다급한 모습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다 싶어 영인 역시 긴장할 정도였다. 상체를 낮춘 영인의 귓가에 그녀는 가능한 한 작은 소리로 말했으나, 흥분된 소식을 전하는 긴박함은 소리의 크기와 상관없이 영인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영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명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환청이 들릴 리는 없었으니까.
“문규화래.”
“네…?”
“오늘 마스터 클래스, 문규화라고!”
그의 이름을, 오늘 이렇게 들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
비단 반나절 만에 찾은 공간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지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영인도 아는 얼굴 몇몇이 아트센터 홀 입구부터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영인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홀 안에 들어갔다.
영인은 어제 앉았던 자리부터 찾았다. 당연하겠지만 다들 앞자리에 몰린 덕분에 점찍어 둔 어제의 자리는 아직 주인이 없었다. 들어오면서 받은 유인물에는 문규화의 이름은 없이 간단한 활자 몇몇이 적혀 있었다.
마스터 클래스의 순서인 각기 연주자 이름과 연주할 곡들이 전부였지만 영인은 그 곡의 목록을 보고 확신했다. 규화가 나오리라는 것을.
Chopin - Ballad no.1, Scriabin - Sonata no. 2, Bach, Busoni – Chacon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