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Op. 3 Moderato (上) (4/12)

동향으로 난 커다란 창문은 갓 난 해를 가장 먼저 알렸다. 머리맡을 적신 흐린 볕이 어슴푸레한 손길로 영인의 눈썹뼈 밑의 짙은 그늘을 닦아 냈다. 빛이 촘촘히 내리깐 속눈썹을 비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인이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미처 다 떠오르기도 전, 아침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늘 마을의 꼭대기는 조금 일찍 아침맞이를 한다. 지금 지내는 옥탑방도, 또 그가 스무 해 가까이 살아왔던 희망원도. 영인이 힘든 귀갓길 대신 얻는 특권이었다.

남들보다 수 분, 혹은 수 초라도 먼저 다다른 볕에 몸을 일으킨 영인은 어느덧 몸을 씻고 선풍기를 켜 그 앞에 앉았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그는 조율 가방 속에서 장비들을 꺼냈다.

매일 아침, 그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여유였다. 영인은 장비들을 볕 아래 늘어놓은 뒤 마른 수건으로 하나씩 닦았다. 마치 이름 높은 세공 장인이라도 된 것처럼 영인의 큰 손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처음 조율을 배울 때부터 쥐었던 튜닝 해머는 이제는 많이 닳아 손잡이 부분의 나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이를 본 권 교수가 출장길에 독일제 최고급 해머를 사다가 그에게 선물로 주었을 정도다.

하지만 영인은 여전히 그 낡은 해머를 조율 가방 속에 넣어 다녔다. 그에게 버린다는 것, 그것도 애착을 가진 무언가를 버리는 것은 무언가를 갖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튜닝 해머와 드라이버, 나무 웨지와 하다못해 튜너까지 닦고 난 뒤에야 그는 가방 속 부속 자재를 살폈다. 학교에서 그가 손보는 피아노는 야마하가 대다수이기에 그에 관련된 부속품 일정량을 가방 속에 챙기고 다녔다. 공구들과 달리 부품들은 온통 나무로 된 것들이라 지퍼를 열면 특유의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영인은 그 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가장 고운 것은 맨 마지막까지 아껴 두는 법이다. 소리굽쇠는 그의 가방 속 물건 중 가장 섬세하고 미려한 존재였다. 요새는 기준음을 보통 조율기로 잡지만, 그는 전자음보다 소리굽쇠를 직접 울려 듣는 것을 좋아했다.

영인은 공들여 닦고 난 뒤 말끔하게 빛나는 소리굽쇠를 허공에서 한 번 쳤다. 49번째 건반, 440Hz의 맑은 ‘라’가 울린다. 여든여덟 개의 건반, 그 모든 소리의 기본음. 아무리 피아노가 습도와 기온에 뒤틀려 있더라도 그 온음만 찾게 되면, 나머지 불협화음도 어렵지 않게 교정할 수 있다.

사람에게도 그러한 소리굽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사 조금 치우치더라도 금세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기도하듯 영인은 다시 한 번 소리굽쇠를 친다. 그리고 은은히 울리는 ‘라’를 제 오른쪽 귀 뒤에 한 번, 그리고 머뭇거리며 왼쪽에도 갖다 대어 봤다. 왼쪽은 진동조차 없이 그저 고요뿐이다. 아무래도 오래전 끊긴 왼쪽의 현은, 도저히 이을 수 없도록 멀리 날아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쪽짜리 ‘라’라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메마른 눈으로 하늘을 흘낏 한 번 쳐다볼 뿐, 영인은 이내 자신의 궤도를 찾는다. 구심력과 원심력, 서로 반대되는 힘을 버티며 필사적으로 돌기 시작한다. 지체할 새는 없었다. 벅찬 한 주의 시작이었다.

***

굳이 꼽자면 영인에게도 ‘후천적 소리굽쇠’가 있었다. 양부에게 구타당한 후유증으로 그의 오른손엔 원인 모를 수전증이 생겼다. 하지만 오직 튜닝 해머를 쥘 때만큼은 떨린 적이 없다. 이와 반대로 건반 위에만 올라가면 약지와 중지 사이의 근육이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건반을 거부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 만했다. 조율 전, 소리 확인 차 간단한 연주를 마친 영인의 오른손 약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영인은 상념을 떨치듯 서둘러 가방을 열어젖혔다.

이곳의 방음 시설은 완벽에 가깝다. 그리고 완벽한 방음이란, 세상과의 격리를 뜻한다. 이를테면 가을 아침의 서늘한 공기, 서늘한 공기 중을 가르는 따사로운 볕, 하늘의 끄트머리를 물들이기 시작한 노을로부터.

혹자는 악기에 끼치는 악영향 때문에 이것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피아노도 악기이기 이전엔 나무였다. 볕을 싫어하는 나무는 없을 것이다. 붉은 방 안에 잠긴 두 대의 검은 나무들을 보며 영인은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볕을 주지 못하는 대신, 충분히 가꾸어 줄게.

조율은 나무를 가꾸는 일이다. 뚜껑을 열고 보면대와 건반 뚜껑을 분리하고 나면 드러나는 속내를 보자면 더욱 그랬다. 88개의 가지런한 건반과 튜닝핀 사이를 이어 주는 강철의 현. 그 현 위로 정렬된 해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간단히 도, 미, 솔을 누른 것만으로 액션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애틋하다. 사랑스러운 움직임에 미소를 지으며 영인은 펠트 웨지11)를 꺼내 끼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천천히 나오라니까 왜 또 일찍 나왔어.”

방에 들어선 규화는 가벼운 볼멘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침 연습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 표시였다. 이제는 놀란 척도 않는 영인의 반응에 그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한창 작업 중이었는지 주변이 부산했다. 사실 작업을 방해한 쪽은 규화였다.

“오히려 늦은 셈이네요. 오시기 전에 마치려고 했는데.”

“중간에 빌 때 하라니까.”

“오늘은 그때 볼일이 좀 있어서,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무심히 웨지를 끼우던 영인이 고개를 들어 규화를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몸에 달라붙는 트레이닝복 차림, 트랙톱 위에 재킷을 하나 더 걸쳤다. 어느덧 가을은 무르익었고, 한낮의 볕은 여전히 따사로웠지만 새벽과 밤은 슬슬 겨울의 그림자를 두르는지 공기부터 싸늘했다.

공연이나 연습 때 무리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공백기의 규화는 몸 관리에 철저한 편이었다. 오늘도 간단한 아침 운동을 마치고 레슨실에 나온 차였다. 그의 왼 손목을 흘낏 본 영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들어오시지.”

“…알고 있었어?”

“귀가 한쪽만 들린다고 너무 무시하지는 마세요.”

말하면서도 영인의 시선은 여전히 건반에 꽂혀 있었다. 49번째 건반. 440Hz의 기준 음인 ‘라’가 연속해 공간을 메웠다. 그 옆모습을 흘낏 올려다보며 규화는 옆 뵈젠도르퍼의 스툴에 털썩 앉았다. 운동을 마치고 온 머리칼은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어 끄트머리가 검게 윤이 났다. 마치 그랜드 피아노의 표면처럼.

“작업 중엔 예민하게 듣다 보니까, 바깥 소리에도 예민해요. 마침 대리석은 잘 울리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게 내 발자국인 줄은 어떻게 알아?”

“이 시각에 여기 올 사람은 우리 둘밖에 더 있겠어요?”

“…….”

계면쩍은 듯 규화는 입을 다물었다. 시야 가장자리에 걸친 그 얼굴에 웃음을 삭인 뒤, 영인은 다시금 표정을 지웠다. 퉁명스레 말했지만, 사실은 규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터치가 있듯이 걸음걸이도 그렇다. 규화의 걸음은 보폭이 일정하고 보통보다 조금 빠르다. 운동화를 신을 때는 덜하지만, 구두를 신으면 마치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렸다. 그 리듬은 스케일 연습에도 곧잘 쓰이곤 해서, 영인은 쉽게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규화만의 템포였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렇게 전부를 말할 필요는 없겠지.

“죄송한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떡할까요?”

“…별수 없지.”

“죄송합니다.”

“어차피 내 대답은 상관없던 거잖아? 중간에 멈출 것도 아니고.”

반문하는 목소리에 그저 말없이 웃고 만다. 옥타브를 치던 왼손이 이제는 4도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화음이 둘 사이를 메웠다. 두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잇따른 맥놀이에 집중하면서도 사이사이 영인은 말을 이었다.

“금방 끝내 드리겠습니다. 터치나 불편하신 곳 있나요? 액션을 전체적으로 손보는 건 교수님 오셔야 가능하겠지만, 간단한 건 맞춰 드리겠습니다.”

“…말했잖아. 피아노에 날 맞춘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퍽 슬퍼지는데요.”

섭섭하단 말투와 달리 해머를 돌리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규화는 멀리서 그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건반 악기인 피아노는 타악기와 현악기 모두의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다. 보통 ‘현’이라고 하면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의 현을 상상하기 쉽지만 피아노의 현은 차원이 달랐다. 양털을 잘 깎아 압축한 해머가 아래에서 올려 치는 현은 금속 재질이다. 조율은 기본적으로 현을 감은 튜닝핀에 튜닝 해머를 꽂아 좌우를 돌리며 음높이를 잡는 작업을 말한다.

소리를 듣는 것은 귀의 역할이지만, 결국 튜닝 해머를 쥔 손목의 힘이 튜닝핀을 조이거나 풀어 올바른 음을 만든다. 귀가 아닌 손이, 그리고 미세한 감각을 축적할 경험이 필요했고 다행히도 영인은 절대음감보다 귀한 손재주 또한 타고난 편이었다. 그의 영민한 두뇌는 최소한의 착오를 거쳐 제 신체 말단을 훈련시켰고, 이 학교에서 야마하 그랜드만 3년 넘게 다룬 지금, 그는 평균율12)을 맞추는 작업만큼은 어떤 숙련자보다도 능숙하고 신속하게 해내게 되었다.

규화는 계약을 맺기 전 권 교수가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무엇을 했어도 성공했을 법한 사람. 두뇌의 명석함은 물론이고 몸으로써 체득하는 모든 일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제자 사랑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체구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 눈에 띄었다. 유난히 드넓은 어깨, 그 끝에 도드라진 팔뚝의 근육은 과격하기는커녕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홀린 듯이 그 간결한 동작을 바라보던 규화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뒤늦은 고해성사였다.

“…나쁘지 않아.”

“…….”

“방해 그만할게.”

얼버무린 말을 끝으로 규화는 입을 다물었다. 영인의 얼굴에 흐릿하게 미소가 떠올랐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영인은 무표정하게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영인이 타고난 절대음감은 조율 작업에 한정하자면 별 쓸모가 없었다. 순정률이 아닌 평균율 작업은 음 본래의 고정된 높이를 맞추는 게 아닌 88 건반 간의 음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을 중점으로 두기 때문이다. 전조가 잦은 현대의 악곡을 연주하기 위해 절대음보다 화음을 중시한 평균율 작업은 음높이에 따른 주파수 간의 간섭, 즉 맥놀이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소리는 곧 공명이며, 공명의 파동은 진동을 낳는다. 맥놀이는 두 음파 간의 불일치가 낳는 진동이며, 기준음만 확실하다면 이 맥놀이를 이용해 완벽에 가까운 조율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진동은 너그럽게도 청각 외의 다른 감각의 참여를 허용해 주었다. 이를테면 촉감부터 직감, 사소한 기분까지. 정음이 아닌 잡음. 불협화음에서 느끼는 미묘한 짜증. 그 감각들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영인의 과제였다.

다행히 그 시도는 순행하고 있었다. 영인이 타고난 민감한 감각은 전신으로 맥놀이를 감지해 냈다. 맥놀이에 대한 민감도 덕분에 영인은 다른 이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음을 맞출 수 있었다. 다만 피로감은 배로 컸다. 하지만 조율사로서 영인의 목표는 크고 높았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보험이기도 했다.

베토벤도 완전히 귀가 먹고 난 뒤에는 지휘봉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으로 음을 파악했었다고 한다. 영인은 제게 그만큼의 천재성은 없을지라도 베토벤만큼 열악하지 않다면, 적어도 한쪽 귀가 살아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베토벤이 살던 시대에 비해 지금은 건반의 수도 많을뿐더러 조성도 까다로워졌지만, 해볼 만한 시도였다.

지켜보는 이로서는 놀라울 뿐이었다. 규화로서도 영인의 조율 작업을 온전히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마주친다고 해도 보통 마무리 작업 즈음이었다. 나무 조각을 털거나 펠트를 깎거나. 기껏해야 해머의 펠트를 바늘로 찌르는 모습 정도. 그것도 늘 연습 시간보다 일찍 오기 때문에 가끔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그 빠르고 정확한 작업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반복되는 미진한 화음의 연결에 피로한 귀를 감싼 규화는 조율과 연주 사이 메꿀 수 없는 간극을 깨달았다. 멜로디가 아닌 의미 없는 화음들은 예민한 피아니스트의 귀를 쉽게 지치게 했다. 난무하는 불협화음에 규화는 흐린 눈을 깜박이며 버텨 냈고, 다행히 그 인내심이 끊기기 전, 영인은 규화를 불렀다.

“한번 쳐 보시겠어요?”

실로 반가운 제안이었다. 대답 대신 규화는 스툴 앞에 앉았다. 방금 닦아 반질반질한 건반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 연이어 에튀드 세 곡을 쳤다. 늘 그렇듯 10-1, 10-8, 그리고 25-10. 초가을에 듣는 겨울바람은 갓 조율을 마친 영인의 귀에 가혹하리만큼 제 선율을 빼곡하게 채웠다.

하지만 귀의 고통보다 영인의 관심사는 제 시야에 있었다. 보란 듯이 왼손을 혹사하는 규화의 연주에 영인의 눈썹 사이로 한 가닥 주름이 잡혔다. 과감히 프레스토를 연주하는 손가락 관절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사이, 장엄한 울림과 함께 에튀드가 끝이 났다.

“소리 좋아. 좀 더 고음이 선명해진 것 같아.”

만족스럽게 평을 내린 규화에게 감사의 응대 대신, 영인은 옆 피아노의 스툴에 앉아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는 규화의 시선은 늘 그렇듯 무던했다.

“잠시만요.”

영인이 자연스레 그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기 전까지는.

“지금 뭐 하는….”

규화는 손가락이 긴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손바닥은 넓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의 손 모양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손가락이 가늘면 그리 유리하지 않다. 팔이 아닌 전신의 힘을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고, 그만큼 하중을 견디며 테크닉을 구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손, 크다….’

오히려 영인의 손 정도가 좋았다. 규화는 제 팔을 문지르기 시작하는 큼지막한 엄지손과 나머지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적당히 두께가 있어 힘을 받기 좋을뿐더러 기본적으로 손바닥이 넓어 쫙 펼치기만 해도 새끼손가락이 다음 옥타브의 파 정도는 가뿐히 닿을 정도였다.

그 두껍고 힘 있는 손가락이 제 손바닥 아래를 부드럽게 문지른 순간, 규화는 나지막이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만약 규화가 영인의 손가락을 가졌더라면 지금의 부상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언제 이런 걸 배웠어?”

“이러라고 절 호텔에 초대한 것 아니었나요?”

“아니었… 어.”

“…농담이에요.”

커다란 엄지 둘이 손바닥 가운데를 뭉근히 문지르기 시작한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별다른 노동도 하지 않은 손가락들이 영인의 손아귀 안에서 묘한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한다.

“주치의 선생님이 알려 주셔서, 연습 좀 했죠.”

“음….”

샐쭉이 바라보던 연갈색의 눈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끝내 별다른 말을 않는 것을 보니 효과는 있는 듯했다. 동생 둘을 데리고 실컷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규화의 초대를 받아 호텔에 갔던 날. 제가 도울 것이 없냐고 물어 온 영인에게 백인환은 마사지를 하나 일러 주었다. 문제가 되는 왼쪽 손목보다 그 손목 때문에 영향받는 주변의 근육을 풀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마사지였다. 주환도 건초염과 손목 부상을 물었을 때 비슷한 말을 했다. 손목 그 자체를 바로 고칠 순 없겠지만, 계속 써야 한다면 주변 근육을 더 혹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근육 뭉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혈액 순환이 중요했다. 손재주와 기억력 하나는 따를 이 없는 영인은 그 짧은 순간에 인환이 지시한 것들을 모두 외워 익혔다. 실로 비상한 재능이었다. 무엇이든 척척 따라 하는 모습에 인환은 진지하게 물리 치료사의 길을 권유했을 정도였다.

웃으며 거절하긴 했지만, 마치 치료사라도 될 것처럼 영인은 진지하게 그 모두를 수행했다.

그리고 지금, 배운 대로 규화의 팔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는 살의 감촉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은혜처럼 가늘지는 않았지만 민성처럼 딱딱하지도 않았다. 그 탄력 있고 부드러운 살결에 연습했던 것보다 더 실력 발휘를 했다.

손에 감기는 살성이 좋았다. 뭔가, 좀 더 계속 만지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힘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조율할 때보다 더 진땀이 났다. 코끝에 송골송골 맺힌 땀에 규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프면 말해요.”

“…….”

문지르는 손길마다 뜨겁게 자취가 남았다. 상대적인 체온이 훨씬 더 뜨거운 탓일까. 피아니스트들의 고질적인 근육통 부위인 새끼손가락에서 팔꿈치, 그리고 어깨 부근까지 영인의 손이 부드럽게 문지르자 규화는 절로 노곤해졌다. 언제 이런 걸 배웠나 싶을 정도로 능숙했다.

방금 전까지 피아노를 매만지던 손이 자신을 만진다 생각하니 규화는 한편으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심스럽지만 매끄러운 손길은 마치 자신도 ‘조율’하는 듯했다. 하나의 피아노가 된 기분이었다.

튜닝핀을 돌리던 손길이 새끼손 아래를 따라 손목 밑을, 그리고 팔꿈치까지의 근육을 쓸어내린다. 호텔에서 받곤 했던 마사지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더라도 맹인 안마사의 능숙하고 노련한 솜씨를 따르지는 못할 터였다. 차이점은 하나뿐이었다. …눈.

영인의 두 눈이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규화의 미미한 표정을 감지하고 강도를 조절해 내고 있었다.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드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인의 날카로운 눈은 가차 없이 즉각 그 반응을 읽어 내고 그에 맞춰 손의 힘을 조절했다.

“어때요.”

가방에 챙겨 온 로션을 꺼내 바르며 영인은 마사지를 마무리했다. 걷어 올렸던 규화의 옷 소매를 내려 주는 차분한 손길에 규화의 두 눈이 잠시 흔들렸다. 타인의 체온, 늘 받곤 했던 마사지인데 촉감 하나하나가 묘하게 간지러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나쁘지 않아.”

영인은 그저 미소 지었다. 이 또한 알고 있었다. 문규화의 나쁘지 않다는 말은 무척 좋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

졸업 연주회가 코앞으로 닥쳤다. 연주자들의 예민함은 슬슬 극에 달하고 있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리허설을 위해 학교 측은 날짜를 정해 연주회가 열릴 장소인 교내 아트센터 홀을 개방해 주었고 덕분에 홀은 늦게까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졸업생들의 학위 연주회는 보통 교내에서 이뤄지고, 연주자 본인의 의지에 따라 외부에서 한 번 더 공연하기도 한다. 교내 공연의 관객은 교내 관계자들과 연주자가 초청한 몇몇이 전부다. 그 살벌한 가운데 독주회를 끌고 나가는 것은 큰 체력 소모와 거나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게다가 아트센터의 피아노는 울림도 악기 자체도 연습실과 완전히 다르다. 영인도 홀의 조율은 아직 담당하지 않고 있었고, 아무래도 심사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기에 권 교수가 참여하지 않고 외부의 조율사를 부른다. 다만 그것은 최종 리허설 때의 이야기이며, 그 전의 조율은 온전히 영인의 차지가 되었다. 보통은 좋은 기회로 생각해 받아들였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연주자가 안형준이라는 게 문제였다.

“터치가 엉망이잖아.”

“죄송합니다. 어떻게 바꿔 드릴까요.”

“그걸 내가 말해야 하나? 조율사는 넌데?”

“…….”

형준의 히스테릭도 연주회가 가까워질수록 가파르게 상승세를 탔다. 오늘 하루의 일이 아니었다. 연습실에서도 그를 걸핏하면 불러 대는 통에 수업도 몇 번 포기해야 했다. 청강생인 데다가 어련히 과의 사정을 아는 교수들이 당연히 양해를 해 주었지만, 문제는 규화와의 약속 시간도 아슬아슬하다는 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교수동으로 이동했어야 할 시각에 아직도 영인은 형준에게 붙들려 있었다. 권 교수와 영인이 규화의 리사이틀 때 그랬던 것처럼, 실제 공연에서야 콘서트 튜너가 비상시를 위해 연주 내내 대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작해야 리허설. 그리고 영인은 콘서트 튜너도 아니었을 뿐더러 더욱이 안형준의 개인 조율사는 아니었다. 문규화의 조율사라면 모를까.

“생각해 봐. 네가 만약에 내가 아닌 문규화였다면 이딴 식으로 조율했겠어?”

“…….”

그렇게 조율하고 있다, 는 말이 혀 밑뿌리까지 닿았다 사라졌다. 목울대가 뜨거웠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문득 규화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있어요. 그쪽. 특히 남의 성질 돋우는 기질이. …꼭 다른 때는 뭐라도 숨기려는 것처럼. 보는 사람이 답답해지거든,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화를 내는 게 인간적으로 느껴지네요.’

규화마저 그랬다면, 아마 안형준도 마찬가지 아닐까. 권 교수는 영인에게 과분한 기회를 선사했고, 분에 넘치는 기회는 늘 그에 대한 반작용이 따른다. 다만 형준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표현하는 이유는 영인에게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규화의 말대로 영인이 형준의 성질을 돋우기 때문이겠지.

슬프게도 영인은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 데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호흡을 달랬다. 규화에게라면 몰라도, 안형준에게는 제 진심을 들여다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영인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이 갈렸다. 가영이 대기실 뒤에서 영인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 좀 급한데. 아직 끝나려면 아직 멀었니? 계속 기다리다가 왔어.”

가영의 말은 표면상으로는 영인을 향해 있었으나 사실상 형준을 저격한 것이었다. 형준이 시간 이상으로 영인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영과도 감정이 좋지 못한 형준은 그 말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지만 그녀는 꿋꿋이 무시했다. 엇갈리는 시선에 형준은 못마땅한 듯 대답했다.

“…가 봐.”

영인은 고개를 대강 숙이고 미련 없이 무대를 내려왔다. 대기실 뒤편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영의 안색이 밝아졌다. 오른손을 들어 보이는 동작에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영인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응. 아무 일도 아냐.”

“네?”

“구해 준 거야. 너 불쌍해서.”

“…누나.”

“이거, 아까 계속 울리고 있었어. 네 거 맞지?”

그녀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은 제 것이 맞았다. 그리고 새삼, 영인은 그의 번호를 저장해 두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면에 뜬 시각과 부재중 내역을 확인한 영인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레슨 시작 시각을 훌쩍 넘어 있었다.

작업 내내 시계가 없어서 몰랐다. 무대 위에는 시계가 없고, 작업하는 동안 방해되는 다른 도구들은 늘 멀리해 두었으니까. 낯빛이 바뀐 영인을 눈치채곤 가영이 그의 너른 등을 떠밀었다.

“여긴 내가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까 빨리 넌 네 볼일 보러 가.”

“…고맙습니다, 누나.”

사양할 사정이 아니었다. 마치 그 속을 빤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쫓아내는 듯한 손길에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영인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은 가팔랐다. 숨이 턱 끝에 찼다. 아트센터에서 교수동은 정문과 후문 사이의 거리나 마찬가지였고 버스로도 두 정거장일 만큼 멀었다. 경사도 심해 택시를 잡아탈까 했지만 대로변으로 나가기도 여의치 않아 영인은 무조건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덥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벌써 11월, 가을이란 이름이 여름보다 겨울에 가까워지는 시기이다. 마침 건물 앞에 들어섰을 때 휙 불어닥친 바람에 목덜미가 쭈뼛 섰다. 이상했다. 복도로 들어서도 그저 고요했다. 피아노 소리는 들려오지 않게 된 복도에 깃든 고요가 낯설었다. 해진 운동화가 터벅터벅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리만이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규화는 피아노 앞이 아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인이 건네는 인사말에도 묵묵히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밀폐된 연습실엔 피아노 소리 없이 오로지 영인의 거친 숨소리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규화는 사보13)를 하고 있었다. 출입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영인은 어느 곡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와 연필을 번갈아 가며 섬세하게 이어지는 음표와 악상들에 그의 가팔랐던 숨도 차츰 가라앉았다. 턱 아래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영인은 출입문 근처에 우두커니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30분쯤 지났을까, 영인의 귓가에 스몄던 열기가 가라앉았을 때쯤. 페이지의 마지막, 오른쪽 귀퉁이를 채운 규화가, 손을 가볍게 털며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예의 아름다운 호박색 눈에는 아무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영인은 먼저 담담히 운을 뗐다.

“죄송합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근래 영인은 살인적인 일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졸업 연주회가 가까워진 탓에 규화와의 연습과 청강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형준에게 붙들려 있는 신세였다. 물론 규화의 업무가 주가 되어야 할 것은 당연했고, 최대한 그러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식사 시간까지 쪼개고 건너뛰면서 일정을 맞췄다. 하지만 그 노력을 굳이 내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고요한 규화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영인은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가 봐.”

“…….”

“오늘 저녁 연습은 됐어. 이걸로 대신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아까 점검은….”

“다른 연주를 실컷 듣고 귀를 쓰고는, 내 소리 뭘 듣겠다고.”

규화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오히려 영인의 입이 달싹거렸다. 침착해질 수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이어지는 말에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최대한 빨리 그만둬.”

“…이번 달까지입니다.”

다시금 고개를 든 규화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계약 이전에 이야기된 부분입니다.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그럼 피해가 가지 않게 알아서 ‘조율’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내 계약이 그 이전 계약보다 중요한 건 줄은 몰랐어.”

“아닙니다.”

“적어도 전화라도 받았어야지. 업무용 휴대폰을 적어도 장식품으로 쓰라고 사 준 게 아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규화의 문책은 감정적인 논박이 아니었다. 형준과의 작업 중에 전화를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언질도 없이 마음대로 시간을 어긴 것은 명백한 영인의 과실이었다. 그렇기에 영인은 제게 온전히 쏟아지는 질책 앞에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스멀스멀 기어올라 드는 통증에 영인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오늘 실망했어. 이런 기초적인 문제로 다시는 말 꺼내기 싫어.”

“…….”

“이만 들어가. 난 더 할 이야기 없으니까.”

나가 보라는 손짓에도 영인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사실 규화의 말대로였다. 지금의 영인은 규화의 피아노를 온전히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장시간 형준의 음색에 노출된 데다 자꾸만 음정이 안 맞다 항의하는 바람에 맥놀이에 귀를 심히 소모한 탓이었다. 아무래도 이명이 도질 낌새가 보였다.

하지만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어금니 쪽을 악물던 영인이, 밭은 숨을 토해 내듯 물었다.

“한, 곡만.”

“……?

“딱 한 곡만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농담인가 싶어 돌아봤지만 마주한 영인의 두 눈은 웃음기라고는 없이 진지했다.

지각한 주제에 뻔뻔하기는.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면서도 규화는 나가려던 발길을 순순히 돌렸다.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에게 벌은커녕 리퀘스트라니. 피아노 앞에 앉은 규화는 내심 한탄했다. 무어라도 들려 달라는 영인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떨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조하는 속마음과 달리 규화는 표정 없는 얼굴로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가 순순히 양쪽으로 벌어졌다. 종전까지 연필을 쥐고 있었던 손이 가볍게 중앙부의 흑건에 향하고, 이어 작은 트릴이 시작되었다.

내림 라장조의 선율은 영인의 귀에도 친숙했다. Op 64-1, 쇼팽의 <강아지 왈츠>. 쇼팽이 연인의 강아지가 꼬리 물기를 하느라 뱅뱅 도는 모습을 보고 작곡해 붙은 곡의 부제. 2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내 작은 강아지가 뛰노는 것처럼 발랄한 리듬이 이어졌다. 평소 규화가 연습하는 곡들과 비교하자면 심히 가볍고 경쾌한 곡이었다.

규화의 주특기가 파워풀한 타건과 정교한 테크닉인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선곡이었다. 왜 굳이 이 곡이었을까. 옥타브를 넘나드는 그의 왼손을 바라보던 영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침울해 있는 주인을 위로하느라 주변을 맴맴 도는 강아지처럼, 특유의 경쾌한 박자가 넘나들수록 스며드는 이명은 어리광을 부리듯 점차 커졌다.

하지만 자욱한 이명 가운데도 영인의 두 입술 끄트머리는 살며시 올라가 있었다. 귀가 멍해져 와도 두통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리듬을 따라 춤을 추듯 오가는 규화의 왼 손목은 정말 강아지처럼 탄성이 가득했다.

…분명, 아플 텐데도 거뜬하게 친다. 유연히 움직이는 등과 팔, 어느 한구석. 투정 하나 없이.

공간도, 피아노도, 사람도…. 모두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권 교수의 말이 옳았다. 문규화는 지금의 자신에겐 최상급의 클라이언트다. 아니, 평생을 가도 이 이상 가는 사람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생 한 번 같은 선상에서 섰던 과거가 오히려 영인을 달아오르게 했다. 우여곡절과 사정은 변명일 뿐이다.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다. 피아니스트가 아닌, 피아노 그 자체로.

짧은 <강아지 왈츠>가 끝났다. 연주 내 그나마 부드러워졌던 규화의 얼굴은 금세 표정을 지웠다. 그대로 일어서려 했던 몸이 얼마 가지 못해 왼팔을 당기는 힘에 저지당했다. 자연스레 팔뚝과 손목 어귀를 문지르는 손길에 규화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 화 안 풀렸어.”

“이거라도.”

“…….”

“이거라도, 하게 해 주세요.”

주눅이 든 목소리에 규화는 문득 왜, 언제 화를 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달싹이던 입술이 날카롭게 쏘아져 나가려던 목소리를 가뒀다. <강아지 왈츠>를 쳤더니, 정말 귀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영인은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린 채 제 왼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규화는 그를 차마 떨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영인의 그 정갈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짓씹었다.

뜨끈한 체온에 날카로웠던 규화의 신경 그 끄트머리도 어느덧 노곤해졌다. 고작해야 딱 한 곡 쳤을 뿐인데도 공들여 팔뚝과 어깨 부근을 문지르는 손끝은 뜨거웠다. 말로써 전해지면 화가 날 것 같은 그 변변찮은 변명과 사과가 살과 살의 감촉, 그 온기로는 교묘하게도 규화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나른하게 깜빡이는 규화의 호박색 눈 위로 흐린 얼굴이 맺혔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얄밉다.

그 무미건조한 시선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묵묵히 제 임무를 다했다. 아무리 문지르고 매만져도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하게도 그는 내내 규화의 손을 놓지 못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세미나 참석으로 뉴욕에 머물고 있는 권 교수에게서 영인에게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규화와의 연습을 허무하게 마치고 난 영인이 답답한 마음에 메일을 보내 둔 것을 확인하자마자 권 교수는 답신을 보내왔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2시쯤 짬을 내 전화를 걸 테니 받으라고. 영인이 걱정하기도 전에, 으레 국제 통화료는 당신이 부담할 테니 부담 없이 받으라는 친절한 추신을 읽고 그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저인데, 제가 부담할 것까지 교수에게 부담을 지우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 그래, 형준이 녀석이 또 말썽이었나 보구나.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요.”

- 미안하다. 내가 하필이면 나와 있을 게 뭐니.

통화감은 좋지 않았다. 그가 원래 쓰던 휴대폰은 요즈음 자신을 홀대하는 주인에게 항변하듯 배터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규화와의 약속을 어기고 업무용 휴대폰 번호를 알려 줄 수는 없어 영인은 지끈거리는 머릴 대고서 멀리 들리는 권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지금 아트센터 홀에 있는 게 가와이 거였지?

“네, 가와이 그랜드요.”

- 가와이는 액션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터치감이나 울림이 특이하지. 건반도 좀 무거운 편이고. 하지만 그건 연주자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야. 지난 졸업 연주회 때 크게 손을 봐 둬서 아예 부품까지 손대야 할 건 없을 텐데….

“네. 확인했습니다. 청소까지 완벽히 한 상태입니다.

- 흠….

“터치 부분 이야기하셔서 우선 너클에 파우더 처리만 해 봤습니다.”

- 그래, 잘해 주었구나.

가와이의 액션은 영인이 주로 다루고 있는 야마하의 액션과 구조가 다르다. 원리 자체야 흡사하지만 함부로 손댔다가는 오히려 악기를 망칠 수도 있다. 영인으로서는 간단한 펀칭 클로스로 터치감을 조절하거나 정음 과정에서 해머를 살짝 손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우선 내 아는 사람을 불러서, 최대한 빨리 한번 손봐 보라고 하마.

“…죄송합니다.”

-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안형준이가 성질부리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녀석이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지만, 결론적으론 억지일 수밖에 없네. 연습실 야마하와 비교하면 홀의 가와이는 울림이 좀 다르지. 형준이 녀석 레퍼토리에는 좀 안 어울리는 구석도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문제지. 그 울림까지 가늠해서 표현해야 하는 게 피아니스트의 역할이야. 자네 책임의 문제가 아니야.

수화기를 통해, 멀리 미국에서 보내는 권 교수의 따스한 성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영인은 몇 번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신경 쓰시게 만들어서.”

- 아니야. 자네야말로 무보수인데, 너무 과도하게 일을 하는 경향이 있어. 자네 실력은 지금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규화도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

- 말했지? 자네는 충분히 규화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반문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규화의 만족은 만족이라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영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 그러니 만족할 수밖에.

그 와중에 시간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한 저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영인의 마음을 헤아리듯 권 교수의 따스한 음성은 이어졌다.

- 그 녀석 성깔 알지 않나. 일상적인 부분에선 허술해도 자기 음악 관련해선 완벽주의자라는 거. 자네가 이해하게. 내가 이번에 늦은 것은 잘 일러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규화도 그리 서운한 건 아닐 거야.

“…감사합니다.”

- 잘하고 있네. 응?

30분 내내 영인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긴 통화에 오래된 휴대폰은 귀까지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무딘 손끝으로 오른쪽 귓불을 비비던 영인은 내려놓은 그 곁에 충전 중인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 오후, 제가 받지 못했던 규화의 전화를 알리는 부재중 표시가 여전히 떠 있었다.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액정을 바라보던 영인은 자신을 달래던 권 교수의 말을 떠올리고 작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마 답하지 못한 말을 품고서.

‘녀석이 너무 냉랭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응? 진심은 아닐 테니까.’

아뇨, 선생님. 저는요, 차라리 그가 좀 더 냉랭하게 굴었으면 좋겠습니다. 문규화는, 너무 물러요. …제게 위험할 정도로.

***

오전 여섯 시. 호텔 내 실내 수영장이 개방되자마자 규화는 첫 손님으로 그곳을 찾았다. 사람 하나 없는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정신이 금세 맑아졌다. 피아노 연주를 대신한 아침의 통과 의례였다.

사생활 보호 측면과 괜찮은 식단, 설비. 그중 규화는 이 실내 수영장을 가장 만족스러워했다. 큰 규모의 수영장은 총 셋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규화가 사용하는 이 풀은 전문가용으로 수심이 가장 깊은 부근은 2m 정도였다. 그래서 수영장이 붐비는 오후 시간대에도 묵묵히 레인을 오가는 사람들만이 이용해 한적했다. 그들 소수하고도 마주치기를 꺼리는 탓에 규화는 꼭 남들의 손이 타지 않은 가장 이른 시간을 골라 딱 삼십 분 수영을 했다.

염증은 습도와도 관련이 높다. 피아니스트에게 수영은 분명 좋은 운동이었지만 지금의 규화에겐 권할 수 없다. 백 선생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수영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규화를 잘 모르고 한 처사였다. 규화는 피아노든 무엇이든 연습에 있어서는 ‘무리’의 적정한 선을 잘 몰랐다. 유산소 운동이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강도를 높여야 제대로 운동이란 인식을 했다.

주어진 한 시간은 쉼 없이 레인을 돌다가, 일주일 만에 쭉쭉 살이 내리는 것을 보고 인환은 경악하며 규율을 정했다. 안 그래도 체중이 덜 나가 아쉬운 판이었다.

주 2회, 30분. 타협안이었지만 규화에겐 몹시 못마땅한 지시였다. 애석한 마음과 별개로 규화는 지정한 바는 지키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월요일과 금요일은 규화가 손꼽아 기다리는 요일이 되었다. 귀마개를 꼼꼼히 점검한 규화는 물살을 가르며 깊게 잠수했다. 손목에 무리가 갈까 봐 다이빙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시야 가득한 푸른 세상은 규화를 잠시 쉬게 해 주었다.

허리와 다리 힘으로만 레인 절반을 가로지른 그가 서서히 팔을 움직였다. 길고 유연한 팔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물살을 갈랐다. 매끄럽게 턴을 돈 규화는 순식간에 절반에 이르렀다. 빠른 속도로 왕복하던 규화는 마지막 편도에서 숨을 참고 한 번에 반대편까지 도달했다.

폐가 터질 듯한 아찔한 감각을 느끼고서야 그는 물 밖으로 나왔다. 물 밖 세상의 중력이 순간 버겁게 느껴졌다. 착각은 아니었다.

“…운동하느라 못 받았어요.”

- 또 수영했구나.

“…네.”

- 거짓말이라도 하면 뭐라 혼을 낼 텐데.

“뻔히 알 걸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고작 30분이었는데, 귀신같이 날아든 부재중 전화가 원망스러웠다. 국제 전화 특유의 신호음이 간 뒤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고, 물론 시작부터 잔소리였다.

규화는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무리 식욕이 없는 그라도 수영 뒤에는 늘 허기가 졌다. 전화를 끊고 시킬 룸서비스를 고르며 그는 재형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백 선생님하고 합의한 거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 안 그래도 앤더슨 박사가 너 아주 골치 아파해.

“그럼 자르셔도 되고요.”

- 아주 갑질 나셨어.

“…전화 왜 하신 거예요?”

재형과는 벌써 8년, 물론 매니저로서 단순한 안부를 묻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는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휴가인 이상 사적인 안부로 서로의 시간을 빼앗은 적은 없다. 단순한 감시의 뉘앙스도 아니다. 규화는 그 화제를 직감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직감이 틀리기만을 바랐다.

- 어제 아버지 뵈었다.

“…….”

- 그분도, 너 많이 걱정하고 계셨어.

그리고 슬프게도, 직감은 적중했다. 이미 예상해 온 바였다. 매니지먼트의 본사는 뉴욕이고, ‘본가’도 마찬가지로 뉴욕이었으니까. 생수를 들이켠 규화의 두 눈동자의 빛깔은 더는 따스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분이라는 말에 금속성을 띠는 구릿빛으로 차갑게 식어 버렸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예상은 간다. 어쩌면 재형이 자처해서 ‘그들’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나, 아직 여기 호텔 지하예요. 방에 이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요.”

- 규화야.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으려는 규화를 아는 재형이 수화기 너머로 질책하듯 다시 이름을 불렀다. 격양되려는 마음을 추스르려 규화는 턱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신도 모르게 쥔 왼손 주먹에 손목에 아릿한 통증이 왔다.

“더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면 메시지 남겨 주세요. 제가 나중에 다시….”

- 여기 너희 집이야. 가족이면 널 걱정할 권리는 당연히,

“내 집은 프랑스에 있어요.”

- …규화야.

“뉴욕에 갈 일정이 잡히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

딱딱히 굳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규화의 목소리에는 어느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소소한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말투에 재형의 한숨 소리가 깃들었다.

늘 이렇게 규화는 벽을 세운다. 아버지는 규화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성공한 한인 사업가 아버지를 둔 외동아들. 남부럽지 않게 자란 아이는 세계적인 수준의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모두가 부러워할 법한 가족이겠지만 속내는 달랐다.

그 아픔을 모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콩쿠르 준우승에 빛나고, 진로에 위기까지 끼친 부상을 입었다면 최소한의 연락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규화는 완강했다.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는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

“…준비 잘하고 있어요. 뉴욕까지 갈 만큼 위급하지도 않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요.”

- …나 12월 첫 주에 한국 들어갈 거다.

“…….”

재형의 귀국이 생각보다 일렀다. 고작해야 보름 남짓 남았다는 이야기에 규화의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들려오는 재형의 목소리는 마치 그런 규화를 짐작이라도 한다는 것처럼 냉정했다.

- 그때 한번 네 말대로인지 확인해 보면 알겠지.

“…….”

-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연락할게. 잘 쉬고 있어라.

“…네.”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전화를 끊은 규화는 금세 몰아닥친 한기에 몸을 옹송그렸다. 크고 따스한 손길이 그리웠다. 단지 팔 부근만 문질렀는데도 심장을 간질거리게 했던 손. 하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다. 규화는 어쩔 수 없이 차선을 택했다.

“…네, 백 선생님. 네. 아뇨, 아프진 않은데 어깨가 좀 뻐근해서요. 네. 부탁드릴게요.”

순식간에 꿩 대신 닭이 되어 버린 안마사에 미안했지만, 그것이라도 급했다. 끊긴 전화의 통화 내역을 살피던 규화는 문득 지난밤 걸려 온 전화번호에 멈춰 섰다. 미국에서 걸려 온 권 교수의 전화번호였다. 문득 통화 내용이 떠올라 규화는 혼자 볼멘소리를 했다.

“…입이 없나.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당황하며 받은 전화에 권 교수는 친히 사과를 건넸다. 영인 대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장영인이 늦은 이유, 그가 학교에서 하던 조율 작업들. 기타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까지. 규화가 예상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체, 계약금은 다 어디 썼길래. 그만큼의 돈도 있으면 왜 그런 성가신 일들에 휘둘리고 있는지 여전히 규화는 영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금으로 큰돈을 부른 것은 그만큼 온전히 저와의 계약에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정 그렇게 바쁘다면 다른 조율사를 붙여 주면 되지 않겠냐 물은 말에 권 교수는 차분히 답했다.

‘규화야,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영인이 그 녀석에게 조율은 자존심이잖니. 네 배려를 오히려 자신의 기회를 박탈해 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녀석은 그래도 맞춰 보이고 싶은 거야. 그게 어떤 클라이언트든 간에.’

“…왜 그딴 일에 자존심을 세우는 거야.”

막연히 애절하게 굴던 눈빛에 규화는 상대 없는 힐난을 읊조린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연주자 때문에 자신과의 약속에 늦었다는 그 사실은.

이 정도의 피아니스트인데, 감히.

그 오만함은 정정당당했다. 음악에는 답도 없고 정도도 없다. 하지만 억지로 답을 내고 정도를 내는 게 바로 콩쿠르였다. 그 얼마나 잘난 졸업생이든 간에, 규화는 자신 있었다. 제가 더 우월한 연주자라는 자신이.

“…시간이 얼마 없는데.”

계약 기간은 1년. 그 아래 무심히 써진 정자체의 장영인, 그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규화는 이내 휴대폰을 들었다. 지난밤의 통화 내역으로 주저 없이 밀어낸 손가락 끝이 이내 두 번 터치를 했다.

재형의 잔소리가 나름대로 쓸모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각, 뉴욕 현지에서 충분히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덕분에 규화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권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생님. 저 규화입니다. 하나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서요.”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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