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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37화 (37/40)

chapter 37

#37

그날 이후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바뀐 건 없었다. 회장은 여전히 효원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철저하게 배척했다. 병석에 누워 있음에도 효원의 병문안을 받지 않았다.

효원은 오늘도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제 딴에는 병실에 걸어 둘 그림을 가지고 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했다.

효원은 집에 들어온 범익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싶어 가드에게 보고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역시나 그에게 오늘 제 일정을 보고한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효원…….”

화난 얼굴을 보기 싫어 효원은 그대로 등을 돌려 버렸다.

“우리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한데, 왜. 자꾸만 병원을 가는지 모르겠군. 매번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

“그래도요.”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절대 바뀌지 않을 테니까.”

“…….”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작은 다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그 다툼의 원인은 범익의 아버지였다. 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효원은 매번 병원을 갔다. 효원은 소원해진 두 부자 사이를 다시 이어 주고 싶었다. 저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놓고 싶지 않았다.

범익은 아버지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얻고 싶은 법이다.

“그만해. 몸도 만삭이면서…….”

서범익은 효원의 배를 만지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랬다. 둘째를 임신한 효원은 현재 임신 9개월째로 만삭이었다.

“아직 멀었어요.”

“너, 임신 초기에 전시회 연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안 되겠어. 애 낳을 때까지 외출 금지야.”

“범익 씨.”

“지금 너 엄청 바쁜 거로 아는데 아니었나? 안 바쁘면 우리 다른 일할까?”

범익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효원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의 눈빛에 욕망이 이글거렸다. 효원은 식겁했다.

“막달이에요. 조심해야 하는 거 몰라요?”

“그래. 막달이니까 그런 곳에 가서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

효원은 입을 앙다물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절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고집을 피우면 범익은 진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전시회도 우겨서 겨우 치렀는데…….

효원은 생애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임신 중이라 조율하고 있지만, 출산하고 나면 다시 바빠질 예정이었다. 첫 전시회 때 큰 성공을 거둔 것을 표본으로 삼아 두 번째 전시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의 말처럼 눈코 뜰 새 없었다.

“키스해.”

그가 효원의 입술을 덮쳤다. 입술을 찍어 내리는 듯 깊게 혀를 넣고 휘저었다. 너무도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는지라, 효원의 허리가 뒤로 휘었다. 그에 범익은 효원이 넘어지지 않게 허리와 등을 잡고 혀를 넣어 휘저었다. 오금이 저릴 만큼 야한 키스였다.

효원의 얼굴은 벌겋게 변하다 못해 터지기 직전까지 열이 올랐다. 육체가 뜨거워졌다. 동시에 치미는 성욕은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열기였다. 아무래도 범익의 러트사이클이 임박한 것 같았다.

하복부가 밀착되자 그의 성기가 발기한 것이 느껴졌다. 맹렬하게 뛰는 성기는 곧 뚫고 나올 듯 팽팽했다.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농밀한 키스는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촉, 마지막으로 베이비 키스를 떨어트린 그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척 봐도 행복함에 젖은 눈동자였다.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걸까?

“그건 결정했어? 갤러리 네가 맡아도 된다니까. 고집은… 츳.”

“아직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요. 좀 더 나이 들면… 그때 작은 갤러리 하나 운영해 볼까 생각했어요.”

그는 효원에게 서울 외곽에 한 미술 갤러리를 운영해 보라고 넌지시 떠봤다. 그러나 효원은 단번에 거절했다. 효원은 자신의 돈으로 건물을 지어 갤러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 언제든 말해.”

“네.”

열꽃이 꺼지지 않은 수컷의 향기가 남았다. 효원의 목덜미에는 밤새 애무를 한 흔적이 만연했다. 그가 짐승이긴 했지만 만삭의 부인을 덮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 참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효원만 바라봤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행복함을 느꼈다.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역시 아버님이었다.

곧 아버님의 생일이 다가온다. 하필 아이가 태어날 예정일인지라 먼저 인사하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극구 사양이니…….

올해도 서범익은 그냥 넘기겠지? 하나뿐인 자식이 아버지 생일을 나 몰라라 하니 병석에서 얼마나 서러울까?

효원의 목 안에 가시가 걸린 듯 아파 왔다. 곧이어 효원의 머릿속이 산만해졌다.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효원은 답답했다. 이럴 때는 담배를 피우며 초조함을 달래 보곤 했는데, 아쉽게도 효원은 만삭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어도 담배를 많이 좋아하지 않았지만…….

효원은 캘린더를 봤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그때, 유치원에 갔던 유리가 돌아왔다. 효원은 유리를 무릎에 안고 캘린더를 쳐다봤다.

“엄마, 할아버지 생일이야?”

“응.”

“근데, 왜 안 가? 친구들은 막 파티도 하고 그러는데?”

“아빠가 싫어해.”

“아빠 나쁘네. 아빠의 아빠잖아?”

“…그러게.”

효원은 작고 귀여운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아이의 시선에서 봤을 때, 어른들의 사정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 언제 할아버지 봐?”

“곧.”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할아버지가 나 싫다고 해?”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데, 한국에 와서 왜 안 보여 줘?”

“그건…….”

할 말을 잊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비록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올해 다섯 살, 유아기를 지나자 슬슬 알파의 기운이 느껴졌다.

유리는 알파였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피가 흐르는… 배 속의 아이도 알파였는데 의사의 말로는 배 속의 아이는 우성 알파가 될 확률이 68%라고 했다. 그만큼 태아 때부터 특별한 아기였다.

아들이라고 하던데…….

“엄마, 나 혼자 갈까? 할아버지 병실 비서 언니와 함께 가도 돼.”

“어? 어어?”

효원은 아이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갈래. 케이크 사 줘.”

“유, 유리야.”

“응? 이번에는 꼭 할아버지 볼 거야. 축하해 주고 싶어.”

“그건… 안 돼.”

“왜? 병균 옮기는 거 아니잖아? 나 다 들었어. 할아버지 그냥 몸만 불편하다고.”

“…어, 어디서?”

“아빠랑 남 비서 아저씨가 하는 말 들었어. 근데, 할아버지 너무 아프데.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했어.”

“뭐야? 그런 말을 했어?”

“응.”

효원은 깜짝 놀랐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남 비서와 서범익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라면…….

효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깜빡이는 아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이 아이는 받아들일까?

하나뿐인 손녀잖아?

다를 거야. 나와 달리… 그의 피가 흐르는 손녀니까…….

효원은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반대를 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멈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효원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유리의 드레스 룸을 열어 가장 예쁜 옷을 꺼내 입혔다.

“미안, 엄마가 용기가 없어서…….”

“내가 잘할 수 있어. 엄마. 걱정 마!”

절로 입술이 열렸다.

“케이크도 직접 만들래.”

“그럴까?”

“응!”

효원과 아이는 나란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한동안 반죽과 씨름을 한 뒤 작은 케이크를 완성했다.

효원은 수제 케이크를 가지고 아이와 손을 잡고 걸었다. 오후 4시, 병실 복도는 한산했다. 특히 VIP 병실 복도라 몇몇 의료진을 비롯해 가드뿐이었다.

효원을 본 가드가 깜짝 놀랐다.

“또 왔네요.”

“…네. 그런데 오늘은…….”

그가 효원의 손을 잡은 유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듯했다. 하긴, 저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이는 서범익을 빼다 박았다. 누가 봐도 서범익의 딸로 보였다.

“닮았죠?”

“네… 놀랐습니다.”

“아버님 오늘 생신이잖아요? 아이가 꼭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

그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님 건강 좋지 않은 거 알아요. 실장님 곤란하게 안 할게요.”

“…네. 그럼 잠시만요.”

유리가 효원의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받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유리는 홀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효원은 슬며시 열린 문틈으로 병실 안을 바라봤다.

놀란 서 회장이 몸을 세웠다. 그러더니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 유리가 뭔가를 말하자 회장이 간병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간병인은 유리의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받아 상에 올렸다.

효원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가에 열이 몰렸다. 유리가 큰 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자 서 회장이 작게 손뼉을 쳤다.

감격에 북받쳤다. 놀란 효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마저도 쫓아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오히려 손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효원은 등을 돌리고 벽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삼켰다.

‘됐어… 이렇게 한발 다가갔으니…….’

* * *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효원은 병원에 다녀온 후, 한 가지 마음을 먹었다. 그건 곧 퇴원할 회장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직 효원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유리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었다.

“뭐라고 지금 저택으로 들어가겠다고?”

“네.”

범익은 타이를 벗으려다 효원을 휙 돌아봤다. 이미 유리와 병원을 찾아간 것도 그의 귀에 보고가 된 후였다.

“안 돼.”

“왜요?”

단번에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셔츠를 벗어 효원에게 안겼다. 그 뒤를 효원이 계속해서 졸졸 쫓아다니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끼리 살아.”

“아뇨. 오늘 저 확실히 느꼈어요. 아버님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실상은 외로운 것이 아닐까 하고요. 유리를 보고 행복해하시는 걸 봤는데, 퇴원해서 혼자 지내시게 할 수 없어요.”

“혼자 아니야. 사람은 많아.”

“가족이 없잖아요?”

“난 반대야.”

“범익 씨…….”

범익은 효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더 같은 말을 듣기 싫은 듯 바로 샤워기 꼭지를 가장 크게 돌렸다.

솨- 솨-.

빠르게 쏟아지는 물소리는 효원과의 대화를 차단했다. 그러자 효원은 샤워기 꼭지를 내리며 샤워기를 빼앗았다. 거품이 흥건하던 머리칼에서 흰 거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래 내.”

“허락하세요. 그럼 줄게요.”

“이효원… 생고집 부리지 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 시집살이 시키는 건 싫어.”

“시집살이 안 해요. 아버님 건강 안 좋다면서요…….”

효원은 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

“제가 원하는 게 바로 저택으로 들어가 아버님과 부딪치면 사는 거예요. 당신도 아이들을 그 저택에서 키우기를 바랐잖아요?”

“…….”

“저 하나로 인해 두 부자의 관계가 깨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제가 모자란 부분은 그곳에서 채울 테니 허락해 주세요.”

“효원아…….”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어요. 만약, 하나뿐인 자식이 저를 외면한다면 몹시도 가슴이 아플 거예요.”

어린 시절 효원은 늘 외로웠다. 부모의 정이 그리웠다. 아픈 아버지와 일찍 엄마를 여윈 효원에게 가족이라는 의미는 특별했다. 이설에게 심적으로 의지를 한 계기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넌 자꾸만 착각하는 게 있어. 네 행복을 깬 사람은 그 사람이야. 너에게서 나를 빼앗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봤잖아? 그런데도 그런 천사표 같은 마음이 드는 거야?”

“이미 지난 일이에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시 이렇게 만나 함께 살게 되었잖아요?”

효원은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범익은 효원의 답이 어이가 없었던 듯 그가 입을 다물었다. 한 번 결심이 서자 효원은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 * *

서 회장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꾸렸다. 큰 트렁크를 꺼내 필요한 옷과 그림 도구를 챙겼다. 놀란 가드가 달려왔다. 한 사람은 효원의 행동을 말리고 다른 사람은 서범익에게 보고하느라 정신없었다.

“사, 사모님… 이건.”

“죽어도 허락 안 할 사람이에요. 행동으로 보여 줘야 말을 들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후우, 그렇게 말을 한 뒤 허리를 세웠다. 아침부터 옆구리가 쿡쿡 쑤셨다. 그때, 베이비시터의 손을 잡고 유리가 밖으로 나왔다. 효원은 아이와 작전을 짰다.

바로 서범익 몰래 본가로 들어가기.

효원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아빠 미워. 할아버지 아픈데. 엄마, 우리 둘이 가면 아빠도 우리에게 올 거야.”

“그래… 그래. 우리 딸이 아빠보다 백 배 효녀야.”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효원은 아이와 뒷자리에 탔다. 배가 남산처럼 불러 앉는 것도 힘들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했다. 비서가 차에 시동을 걸고 시내를 내달렸다.

효원이 갈 곳은 하나였다. 이 꼬여 버린 관계를 해결할 곳. 피하는 건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끝났던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효원은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 거리… 수없이 다녔던 곳이다.

그때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행복했다.

곧이어 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웅장한 저택 대문이었다.

지잉-.

문이 열렸다.

차고에 차가 주차되자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저택으로 가는 길은 두 개였다. 효원은 일부러 별채로 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전히 싱그럽고 꽃이 만발한 담, 밤새 내린 비에 씻긴 풀잎이 아름다웠다. 곧 콧속이 화끈할 만큼 코끝이 찡해졌다.

이곳이야……. 그래… 나는 이 집으로 돌아왔다.

효원의 걸음이 별채의 앞뜰로 향했다.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리운 냄새에 효원은 벅차올랐다.

‘나는 그리웠던가? 이 별채가… 그와 사랑을 키웠던 내 방이… 그리웠구나!’

효원은 그제야 저도 이곳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곳곳에 새겨진 추억들이 효원의 입술에 미소를 피게 했다. 키스를 했던 장소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서로의 몸에 정신없이 빠졌을 때, 두 사람은 마주치기만 하면 키스를 했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효원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담과 꽃을 스치며 발을 옮겼다.

바스락-.

그때, 마른 가지가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이 보인다. 아침에 바짝 세웠던 머리칼이 바람에 의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젖은 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 모습에 효원은 피식 웃었다. 서범익은 효원과 나란히 선 별채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웠나 봐요, 여기.”

“…….”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다가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진한 감정이 가슴속에 확 퍼졌다.

그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일까?

추억이 깃든 곳에서… 이곳에서 다시 사랑을 키우고 싶은 그런 마음.

서범익은 효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그러자 효원은 서범익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한들한들 불던 바람은 만개한 꽃나무를 스쳐 꽃잎들이 눈꽃처럼 날렸다. 자연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냈다. 세 사람은 한데 엉켜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는 꽃잎을 함께 바라보았다. 아이의 등 뒤에 서서 두 연인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이 행복이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효원의 뺨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의 수줍은 고백에 서범익은 재빨리 입을 맞추고 곧바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래… 한번 견뎌 보자. 그 끝이 어디든 우리는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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