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의 늪-35화 (35/40)

chapter 35

#35

파리 공항에 전용기가 준비되었다. 효원은 전용기에 오르는 내내 마음의 짐이 무겁기만 했다. 하룻밤 섹스를 했다고 뭐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싶어도 확실히 서범익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웠다.

3년의 공백 기간을 채우는 듯 두 연인은 밤새 몸을 겹쳤고, 그만큼 거리를 좁혔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한 건 저만은 아니었던 듯 마른 그의 몸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효원은 그의 몸에 여전히 새겨진 이니셜을 보며 눈물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 박힌 피어싱을 보자 차가웠던 마음이 더욱 누그러졌다.

서범익은 아이의 자리를 봐준 다음 효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뭔가를 꺼내 효원에게 넘겼다.

“그걸로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이건.”

“아버지가 이설과 계약한 계약서.”

“네?! 뭐, 뭐요?”

효원의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그가 내민 서류를 서둘러 펼쳐 봤다.

“넌 내가 변명을 해도 믿지 않을 거잖아? 거기에 답이 있으니 백 마디 말보다 더 믿을 만하겠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정말 회장과 이설의 계약서였다. 이설이 서범준에게서 저를 떼어 내는 조건으로 맺은…….

“이럴 수가… 어떻게 누나가 나에게…….”

“네 누나의 인격,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보는데. 아니었나?”

효원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설이 어떻게 저를 가지고 회장과 계약을 할 수 있는지……. 손으로 입을 막아 비명을 삼켰다. 마구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쌌다.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녀의 이중성에… 치가 떨렸다. 어떻게 같은 혈육을 팔아먹고 이런 오해를 사게 했는지… 참담했다.

“언제 알게 되었어요. 이 사실…….”

“네가 떠나고 3개월 후.”

“…이런.”

“그 후로 너를 찾아 온 세계를 이 잡듯이 추적했지만, 그때마다 난 허탕을 쳤어. 아시다시피 네가 철저하게 나를 피하려고 필립의 도움까지 받았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아팠던 게 모두 거짓으로 꾸며진 일 때문이라니…….”

가슴이 들썩거렸다. 동시에 위가 쿡쿡 쑤셔왔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주춤하며 입을 뻥긋만 했다.

서범익은 품에서 다른 몇 개 사진을 꺼냈다.

놀라운 것이 펼쳐졌다. 그 사진은 3년 전, 그때였다. 결혼식 전날. 도망쳤던 그날 밤의 영상이었다.

효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CCTV가 있더군. 물론 내가 설치한 건 아니야. 아버지가 덫을 놓으려고 한 것이지만, 지금은 내 억울함을 증명할 단서가 되었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봐. 내가 정말 이설과 잤는지 안 잤는지…….”

그걸 본 순간, 또다시 안면 근육과 턱이 경직했다. 문제로부터 도망만 쳤던 효원은 드디어 가려진 진실을 보게 되었다.

“모두… 회장님의 계략이었어요, 이게?”

* * *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둑한 저녁이 되었다. 전용기가 인천 국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계절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같았다. 같은 북반구의 위치에 비슷한 계절의 봄은 인천 국제공항에서도 느껴졌다. 프랑스보다 조금 더 서늘한 봄바람이 효원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국은 아직 좀 추워. 자, 입어.”

추위에 약한 효원이 걱정되었는지, 제법 따뜻한 코트가 어깨에 걸쳐졌다.

어느새 친해진 건지 아이는 범익의 어깨에 찰싹 붙어 있었다. 효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 먼저 나갈게요.”

“왜?”

“우리 셋이 함께 나간다면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유리, 이리 와.”

“마마.”

효원은 서범익에게서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만약,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나는 이미 각오했어. 언론에 노출될 거 알고 이미 떡밥을 뿌려 두었으니까. 프랑스 출장이 길어진 이유를 굳지 둘러대고 싶지 않아.”

“아직 일러요. 저는 상관없지만…….”

효원은 아이를 바라봤다. 동그랗게 뜬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그제야 효원의 뜻을 이해한 범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드들이 보호할 거야.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지.”

“네.”

효원은 서범익과 다른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그때, 게이트 앞에서 진을 친 기자들을 발견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아니야. 당시 내 작품이 주목을 받았다고 해도, 벌써 몇 년 전인데…….

필시 연예인을 취재하기 위해 저렇게 상기된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효원이었다. 삽시간에 기자들은 효원의 주위를 둘러싸며 길을 막아섰다.

“이효원 화가 맞으시죠? NBA 유동석 기자입니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대상을 받자마자 갑자기 프랑스행을 결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 기업의 스폰을 받았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아…….”

아이가 많은 인파에 겁을 집어먹었다. 효원은 아이의 품에 꽉 안았다.

“극비리에 유학을 결심하신 이유가 버림받아서라는 설도 있던데. 그겁니까? 또한, 톱스타 이설 씨와 남매라는 게… 사실입니까? 서범익 회장과 무슨 관계입니까?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할 말 없어요. 비켜 주세요. 이것 보세요. 아이가 놀라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프랑스에서 결혼을 하신 겁니까? 아이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혹시, 서범익 회장의 프랑스 출장과 관계된 겁니까?”

당황스러웠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취재진에 진땀이 흘러나왔다. 가드들이 기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길이 텄으나 앞으로 걷는 내내 힘들었다.

“으앙!”

결국 놀란 유리가 울고 말았다.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다른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서범익이 기자들 앞에 등장했다. 기자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더니 곧장 서범익에게 몰렸다.

서범익은 아이를 대신 안고 기자들을 쏘아봤다.

“그 아이, 설마 서범익 회장님의 아이! 회장님께서 한마디 해 주십시오! 회장님 아이가 맞습니까?”

“기자들 치워.”

서범익의 지시에 가드들이 세 사람을 호위했다. 효원에게 집중했던 기자들이 이번에는 서범익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우왕좌왕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쓸려 다니자 효원은 눈을 감아 버렸다. 갑작스럽게 언론의 주목을 받자, 효원은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겨우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세단에 올랐다. 효원은 차가 출발할 때까지 떨리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내… 내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유리, 놀랐어?”

다행히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그래도 꽤 겁을 먹었는지 효원의 옷깃을 꼭 쥐고 있었다. 서범익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후… 아무튼 파파라치들은…….”

서범익 또한 예상을 못 했는지, 당황했다.

“사실은 좀 유명해졌지. 너, 대상을 받고 시상식에도 나타나지 않아서 몇 번 입방아에 올랐어. 덕분에 파파라치가 냄새를 맡고 너와 내 관계에 대한 기사를 냈으니까.”

“회, 회장님께서 막지 못했어요?”

“그러게, 그게 참 아이러니하더군. 네가 생각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으니, 한동안 고약한 소문이 이어졌지.”

몰랐다. 한국을 떠나면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은 꽤 시끄러웠던 것 같았다.

떠오르는 화가와 그를 스폰하던 서범익의 관계가 세상에 떠돌았다고 했다. 법적 소송을 피하고자 직접적인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증권가 찌라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우리… 셋 다 사진에 찍혔어요.”

“뭘 어떻게 되겠어? 결혼을 해야지.”

“네?”

“아니, 사실 우리 이미 결혼한 사이야.”

서범익이 자신의 호적 등본을 꺼냈다. 효원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서범익의 처와 자식으로 효원과 유리가 올라갔다. 그 날짜가 일주일 전이었다. 아마도 저를 찾은 후에 서류를 정리한 것으로 보였다.

“미, 미쳤어요? 제 동의도 없이 이게…….”

“결혼하기 전날 떠난 건 너야. 동의는 충분히 얻었다고 보는데. 더군다나 임신까지 했으니 더는 뺄 수 없지.”

“그래도 회장님께 안 통할 거예요.”

임신으로 결혼을 허락할 회장이었다면, 벌써 3년 전에 임신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 문제는 차후야.”

마냥,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이렇게 호적 정리를 한 것을 회장도 알게 되었을 텐데…….

“그간 네가 한국은 떠난 건 유학으로 해 뒀어. 언론은 그룹 측에서 철저하게 막고 있었으니 문제될 건 없지. 어쨌든 빛의 화가가 돌아온 것은 밝혀야 해. 그렇다고 네가 미디어에 많이 드러날 필요는 없어. 넌 지금처럼 계속 신비주의로 가는 게 좋겠지. 그게 네 그림 값을 올리고 미술인들의 애를 태우는 길이거든.”

“…신기하네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제 주가가 높아지다니…….”

“원래 JK 그룹이 선택한 유망주였어. 조금 늦었지만, 제자리를 찾아야지.”

효원은 서범익에게 3년의 공백 기간에 이루어진 이야기를 듣고 입을 맞췄다. 놀랍게도 ‘21세기 빛의 화가 이효원’의 주가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전에 효원이 그린 그림 한 점에 5억이 호가할 정도의 호평을 받았고, 실제로 낙찰로 이어졌다고 했다.

돈은 모두 효원의 명의로 된 통장으로 재단이 입금을 해 두었다. 손에 쥐어진 통장 잔액을 본 효원은 입을 떡 벌렸다.

‘…13억?’

“놀랐어?”

“이, 이게 제 돈이라고요?”

효원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대학 시절에 그려 놓은 작품 몇 점을 공개 매각해 봤지. 그랬더니 세 작품이 고가에 낙찰되더군.”

이렇게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니… 효원은 너무 놀라웠다. 효원이 통장을 보며 또다시 멍청한 표정이 짓자, 범익은 그의 손에서 통장을 다시 빼앗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코트 속에 쏙 넣어 버렸다.

“왜요……?”

“넌 순진해서 안 돼. 돈은 내가 보관할 거야. 필요하면 내 카드를 써.”

그의 표정은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의미보다 또다시 효원이 도망칠까 봐 미리 방지하려는 뜻이 다분했다. 그가 지갑에서 골드 카드를 빼낸 뒤 효원에게 건넸다. 골드 카드 하단에는 그의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앞으로 바쁠 거야. 작품도 더 그려야 하고. 한국에 귀국한 기념으로 전시회를 열려고 하니까.”

“전시회요?”

“그래, 전시회 열어 주기로 약속했잖아? 그 전에 네가 도망쳐 버려서 무산되었지만. 그려 놓은 그림들은 다 옮겨 뒀어.”

어리둥절했다. 차는 계속 외곽을 달렸다. 문득 밖을 보자 저택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차는 한적하고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깨끗한 동네에 멈췄다. 푸르른 나무와 꽃, 그리고 작은 숲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향기를 물씬 느꼈다.

“여기… 어디에요?”

“우리가 살 집.”

“네……?”

효원은 순간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집은 당연히 회장님이 계시는 저택일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 알았다면 저택으로 가는 일 없었을 거야.”

“…….”

“저택은 천천히 들어가도 좋으니까.”

“네.”

“앞으로 경호원 붙일 거다. 파파라치 때문에 시끄러우니까. 유리, 파파에게 와. 여기가 집이야.”

서범익은 미소를 지으며 유리의 손을 잡았다. 집은 아담했다. 작은 서양식 주택으로 지어진 2층 집이었다. 위, 아래 평수를 합쳐도 80평이 되지 않을 듯했다.

안성맞춤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의 가정들이 사는 집들이 촘촘히 붙어 있었다. 삭막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간혹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부부가 많은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침실. 그리고 2층은 내 서재와 네 작업실로 만들어 놨어.”

“아…….”

효원은 다시금 범익을 돌아봤다. 그는 아이를 안고 집 곳곳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아이도 새로운 보금자리가 꽤 마음에 든 듯 까르르 웃었다.

멍하니 서 있는 효원에게 다가온 서범익이 그의 허리가 꽉 안았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효원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 * *

어린 아기를 데리고 사는 외국 생활은 녹록치 않았지만, 어느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편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한국은 낯설기만 했다.

입국 다음 날, 효원의 기사에 실렸다. 그룹 쪽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두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서범익이 은근히 제 사생활을 흘리는 것으로 보였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제 의지와 관계없이 효원의 입술 사이로 낮은 숨이 쏟아졌다.

그때, 효원은 등과 허리를 스치는 손가락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떨었다. 당연히 서범익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단지,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장은 펄떡펄떡 뛰었다.

“이미, 시작된 게임이야. 받아들여.”

“그렇게 쉽지 않겠죠.”

“다른 것도 아닌 우리 아이를 위해서야.”

“알아요.”

출근하기 위해 완벽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그는 멋졌다. 섹스를 나눌 때에는 퇴폐미를 발산했다면 슈트를 입으면 금욕적인 남성미가 돋보였다.

유명 배우 뺨을 몇십 대 후려쳐도 모자랄 잘난 외모와 큰 키, 그리고 그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는 효원의 가슴을 항상 두근거리게 했다.

괜스레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턱이 슬며시 잡혔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범익의 눈길에 농밀함이 감돌았다.

“출근해요. 늦었잖아요?”

“네 얼굴을 봐, 가고 싶겠냐?”

“제 얼굴이 어때서요?”

“함께 있고 싶다는 표정.”

그 얼굴을 숨기고 싶었지만, 예리한 그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그가 깊게 혀를 넣었다. 키스하는 통에 허리가 비틀어지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유두를 희롱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유두를 비틀며 효원의 성감대에 불씨를 붙였다.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날 지각을 하게 되면 사주로서 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만… 회의 있다면서요…….”

옷을 입은 채 두 육체가 포개졌다. 옷감 너머로 팽팽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느껴졌다. 흥분한 그는 효원의 목을 촘촘하게 혀로 쓸어내렸다. 키스로 효원의 페니스도 점점 모양이 부풀기 시작했다.

“아윽. 그만해요…….”

“네가 유혹했잖아?”

“언제요…….”

“가기 싫어 미치겠어. 이렇게 온종일 물고 빨면 소원이 없겠다.”

그가 장난스럽게 효원의 머리통을 잡고 와그작 씹는 행위를 했다. 당장 침대로 갈 것 같은 행동에 그를 밀어냈다.

억지로 쥐어짠 행복이지만, 귀국한 뒤로 한동안 평화로움은 지속되었다. 언제까지 이 행복이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효원은 그때까지 견뎌 보기로 마음먹었다. 출근하기 싫다는 범익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사이 일어난 아이가 우다다 달려와 서범익에게 안겼다.

“일어났어? 공주님.”

“웅, 파파. 회사 가?”

“금방 올 거야. 저녁에 선물 사 올게.”

“정말? 꺄르르. 이만큼 큰 선물.”

아이가 작은 팔로 커다란 선물을 말하자, 범익의 입술이 환하게 벌어졌다. 그는 한참을 유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안아 주었다. 딸 바보가 따로 없었다. 때때로 아이의 안아 직접 밥을 먹여 주기까지 했다.

“정말 늦었는데요.”

몇 번이나 말해야 그는 겨우 몸을 세웠다. 효원은 그의 뒤를 따라가 배웅했다. 다른 부부들처럼 대문 앞에서 키스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를 보낸 후, 커피를 가지고 작업실로 향했다. 잡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서는 그림 작업에 몰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범익이 고용한 베이비시터가 육아를 책임졌기에 효원은 주로 집 안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오늘도 변함없이 쓱쓱 스케치를 했다. 스스로도 놀랐던 점이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힘들던 터치가 지금은 가벼웠다.

더 놀라운 건 채색이었다. 그토록 빛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쉬웠다.

작품을 구상하는 범위도 넓어졌고, 붓을 쥐자마자 채색 터치가 자유롭게 움직였다. 효원은 문득 제 마음만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그에게 돌아오니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식사하세요.”

듣기 좋은 울림이 등 뒤에서 들렸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남 비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서범익은 자신의 수석 비서를 효원의 곁에 두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효원이 너무 작업에만 몰두하지 않는지를 살피곤 했다.

서범익의 시선은 어디서든 존재했다. 거실, 방, 욕실, 하다못해 정원에도 있었다. 왜 저토록 많은 경호원을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파라치가 걱정되어도 집 안에서 사진이 찍힐 일은 없다.

어떤 위협에서 효원을 지키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역시 한 사람… 어르신이다.

서범익을 그저 두고 볼 어른이 아니었다. 팔목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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