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의 늪-34화 (34/40)
  • chapter 34

    #34

    심신이 지친 효원은 벨기에 궁으로 들어온 후 몸살이 나 뻗어 버렸다.

    『스트레스가 심해. 의사는 열상보다 신경성이라고 하던데…….』

    난감한 듯 필립이 마른기침을 했다. 오랜만에 삽입 섹스에 어김없이 열상을 입었다. 3년 만에 섹스한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섹스를 했다. 부끄럽지만 이렇게 다른 이에게 들키고 말았지만, 필립은 쿨하게 넘겼다.

    『…리, 생각해 봤어?』

    『…네.』

    필립은 눈을 반짝이며 효원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벨기에로 가자는 그의 제안을 더는 미룰 수 없을 듯했다. 그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효원은 서범익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범익은 집요한 남자다. 남다른 소유욕은 분명 효원을 강제로 한국으로 데려가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아이까지 들킨 마당이라 도망칠 곳이 없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 그저 리, 자신만 생각해. 나를 이용해도 좋아. 계속 작품을 그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을 게. 나와의 사랑은 좀 더 뒤로 미뤄도 돼. 기다릴 수 있으니까.』

    미소가 멋진 남자는 그렇게 효원을 보며 웃음 지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할게요. 함께 가겠어요.』

    흔쾌히 답을 한 효원을 본 필립이 와락 껴안았다.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믿음직스러운 가슴이었지만 효원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번졌다.

    두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없는 제 가슴의 그릇이 너무도 작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그 핑계로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왜, 내 가슴은 하나의 사랑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효원은 그렇게 머스크향이 짙은 필립의 어깨에 기대었다.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잊고 싶은 감정이 툭 터져 버린 둑처럼 쏟아졌다.

    팔목이 욱신거리자 인상을 쓰자 걱정스럽게 팔목을 이리저리 만져 보던 필립이 의사를 불렀다.

    아프다. 제일 아픈 것은 손목이 아닌 가슴인 것을…….

    효원은 팔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혹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가 치료를 마치자, 한참 궁인들과 놀고 돌아온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마, 집에 안 가?”

    “응, 이사 갈 거야.”

    “이사? 우웅… 왜?”

    유리가 효원을 빤히 바라봤다. 효원은 슬며시 웃으며 팔을 벌리자 냉큼 유리가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얼굴에 뺨에 비볐다.

    “사정이 생겼어. 필립 삼촌 나라에 갈 거야.”

    “필립 삼촌? 정말?”

    유리가 필립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후 사정을 모르지만, 효원의 불안감을 느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티가 침대 아래에서 걸어 나와 효원의 다리를 휘감았다. 효원은 고양이털을 쓸었다.

    “너도 걱정했지? 미안… 페티.”

    “야옹-. 야옹-.”

    효원의 몸에 찰싹 붙은 둘을 보던 필립의 웃음을 터트렸다.

    * * *

    5월 대관식을 앞서 벨기에 왕세자는 각국의 정상들과 기업인들을 초청했다.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은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부터 정치인들까지 셀 수 없었다.

    일상을 바쁘게 보내던 차에, 비서로부터 귀한 손님이 참석한 것을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제일 큰 기업의 회장이었고, 그가 경영하는 기업은 벨기에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벨기에가 주력으로 미는 사업이 최근 JK 그룹과 협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세계의 다른 기업들에서 많은 투자 지원도 받았다. 그러므로 JK 그룹의 서범익 회장은 나라 차원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왕세자라 해도 그의 독대를 거부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실상 만나게 되니 무척이나 젊은 청년이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 더불어 매의 눈 같은 강인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특별해 보였다.

    ‘역시 우성 알파다운 페로몬이군…….’

    왕세자는 방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서범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자세가 사뭇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왕세자의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왕세자는 범익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대접했다.

    자칫 거만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시대가 달랐다면 분명 왕좌에 앉을 법한 기세였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굉장히 매력적인 사내였다. 묵묵히 차를 마시던 서범익이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필립 대공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에 왕세자님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 * *

    거리는 봄의 축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파리의 각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일반인에게 일제히 개방하는 ‘프로트 우베르트’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루이 왕조라고 해도 국왕이 주최하던 민속 축제는 계속 이어졌다. 정체를 숨기고 음지에 살았던 효원은 언제나 축제에 관람객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올해는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어쩌면 파리에서 참여하는 마지막 축제가 될지도 몰랐다.

    효원이 서범익을 피해 벨기에 궁전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뭔가 불안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서범익이 아닌데… 너무 조용했다. 그렇다고 효원을 찾기 위해 궁으로 오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 높은 벽을 허물고 들어올 남자가 조용하니 효원은 불안했다. 마치 폭풍 전 고요한 바다 같았다.

    “야옹~.”

    고양이가 꼬리를 하늘 위로 추켜올리고 효원의 옆에서 자리를 잡고 애교를 부렸다. 효원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 목을 살살 긁었다.

    “왜? 페티?”

    그때, 고양이가 귀를 찡긋하더니 우아하게 몸을 세웠다. 그리고 긴 복도를 걸으며 효원을 돌아보았다.

    “야옹, 야옹.”

    효원에게 저를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그에 효원은 일어서서 페티의 뒤를 따랐다. 페티는 당연하다는 듯 효원을 필립이 있을 곳으로 이끌었다.

    오전 내내 필립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함께 찾으러 가자고 하는 느낌이었다. 효원은 제법 익숙해진 궁전 복도를 걷다가 까르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필립은 유리의 베이비시터를 궁으로 불렀다. 매일 출퇴근 하는 베이비시터는 필립의 신분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필립의 신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필립의 부탁에 할 수 없이 그의 신분을 숨겼던 모양이다.

    유리 벽 너머로 즐겁게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며 웃었다. 한참을 아이를 보다 다시 페티와 궁을 거닐었다. 궁은 상상하던 궁들보다 조금 작은 편이었다. 별궁의 목적으로 증축이 된 궁이라 왕족이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지어진 건물인 듯했다.

    “어? 손님이 오셨나 봐!, 여기서 기다려… 페, 페티!”

    페티를 잡으려는 통에 효원은 저도 모르게 별실로 마련된 공간에 발을 넣게 되었다. 냉큼 고양이를 잡았지만, 밖에서만 열리는 중문이 닫히는 통에 효원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넓은 대리석 기둥에 가려져 저쪽에서는 효원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언성을 높이는 쪽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걸 느꼈을 때, 그가 그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효원은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제 이름과 범익의 이름을 듣고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서범익……!’

    효원은 머리가 찡할 정도로 경악을 했다. 언성을 높이던 왕세자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기어이 왕세자는 필립에게 고함을 쳤다.

    『그 사람의 입국을 허락할 수 없다. 지금껏 네가 누구를 사귀던 간섭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 그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거물인 서범익의 아내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녀석이야? 어떻게 서범익의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벨기에로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있지?』

    『형님! 그래도 서범익은 그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의 사정이 어떻든 상관없어. 너는 벨기에의 왕자야. 왕자로 태어난 이상, 국가의 안위를 위해 포기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이다!』

    『…저도 그를 포기할 수 없어요!』

    『우린 그의 그룹과 협업을 하기로 했어! 그 그룹과 협업하면서 투자도 안정적으로 받았다. 그런데 만약 이 협업이 너로 인해 깨진다면 나라의 손해가 얼마인지 아느냐? 경제적인 타격이 얼마나 클지 정말 모르겠느냐? 네 사랑 때문에 왜 우리 국민들이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거지?』

    『저 또한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왕족이기 전에 한 남자라고요!』

    『사랑해! 그래, 누가 말린다고 했나? 이효원만 빼고 해. 그 사람은 절대 안 돼. 절대!』

    『형님!!』

    처음에는 왕세자의 말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JK 그룹이 관계된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 문제의 중심에 효원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했다.

    서범익은 의도적으로 덫을 놓았다. 필립을 견제할 방법으로 그의 그룹을 이용한 것이다. 효원은 바닥에 엎드린 채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사지가 마비된 듯이 온몸이 저렸다.

    겨우겨우 숨을 내쉬며 터져 나오는 화를 삼키는 목이 따가웠다. 겨우 몸을 세우자 온몸이 뻐근했다.

    『리-!!』

    효원과 눈이 마주친 필립과 왕세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효원은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너무도 미안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동시에 그간 쌓아 온 필립과의 우정을 산산조각을 내 버린 서범익이 원망스러웠다.

    민폐였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저로 인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는 상상을 하자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서범익은 단지 경고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효원이 그의 곁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무엇이라도 할 남자였다.

    아마도 다른 해외로 도피한다고 해도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낼 것이다. 효원은 결정을 해야 했다. 결국,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 어이없어 웃음만 나왔다.

    서범익의 집요함이 결국 효원의 삶을 지배해 버린 셈이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필립이 아니더라도 효원은 서범익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왕세자 전하, 필립 대공. 이제야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어요. 멍청하게도… 지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원은 고개를 숙여 왕세자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필립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옹, 야옹-.”

    효원이 혼자 빗길을 헤치고 뛰어나가자 페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굵어진 빗방울이 얼굴을 수차례 때렸다. 눈물과 빗물이 엉켜 효원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자 왕궁 입구에 정차된 흰색 리무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서범익이 있었다. 스스로 뛰쳐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리-! 리!』

    뒤이어 뛰쳐나온 필립에게 손목이 잡혔다. 필립 또한 헝클어진 모습으로 비에 젖어 있었다. 내내 여유로웠던 필립의 얼굴에 조급함이 묻었다.

    『가지 마! 리, 리만 괜찮다면,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다른 곳으로… 함께 가-!』

    금발의 미청년은 그렇게 약간의 희망을 품고 효원의 팔목을 잡고 늘어졌다. 그의 사랑이 와 닿았다. 필립은 정말 효원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눈이 따끔거렸다. 효원은 눈물을 흘리며 필립의 마지막 모습에 안녕을 고했다.

    『당신은 좋은 남자예요, 필립. 분명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될 거예요. 믿어요.』

    『왜… 왜? 저 남자의 곁으로 가려고 하는 거야? 뻔히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왜? 그 구렁텅이로 왜 다시 돌아가려고 해-!!!』

    『…글쎄. 내가 바보라서 그런가 봐요.』

    효원의 입술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자신보다 더 처참한 표정을 지은 필립의 뺨에 키스를 했다.

    좋은 친구였다. 그리고 어쩌면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뺨의 키스가 마지막이라는 걸 느꼈는지 그가 넋이 나간 듯 입술을 깨물었다.

    효원은 입술을 깨물고 서범익을 향해 걸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간격이 좁아졌다. 서범익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영문을 모르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보였다.

    효원은 서범익을 노려봤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무엇을 하려고 했든 그만두세요. 우리 때문에 피해 보는 이는 없도록…….”

    “그러지.”

    * * *

    그는 리무진 두 대를 끌고 왔다. 한 대에는 베이비시터와 유리, 페티가 타고, 앞의 리무진에는 효원과 서범익이 탔다.

    효원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가 그친 것이 무색하게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퍼부을 듯 어두웠다. 효원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비와 땀에 젖은 얼굴을 보면서도 눈은 전혀 감흥이 없다.

    그가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도 멍하니 창밖만을 응시했을 뿐이다.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칼, 젖은 눈동자, 목덜미 키스 마크가 방금까지 두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대변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등 뒤에서 몸 곳곳을 쓰다듬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복부 주위를 배회했다. 좁은 차 안에서 카섹스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릇한 성취감에 젖은 서범익과 달리 효원의 마음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시간 후, 비행기가 뜰 거야. 옷 갈아입을까?”

    “…아뇨.”

    모든 게 귀찮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정액을 씻어 내는 것도 다 귀찮았다. 잔잔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우울한 효원을 위해 음악을 튼 서범익은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효원아…….”

    자신의 이름을 달콤하게 부르는 서범익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날 만큼 마음이 벅찼다. 그러나 효원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처럼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이란 효원에게 이제는 사치와도 같았다.

    음악 소리에 묻힌 심장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이 이내 쾅쾅 큰 음파를 내보냈다. 베토벤 운명의 전주가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소리로 변해 효원의 가슴에 닿았다.

    효원의 마음을 하늘이 알았는지, 순식간에 먹구름을 몰려와 어두워진 하늘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한 번씩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어둠에 잠긴 세상이 꼭 효원의 마음과 같았다. 두렵고 불안한 미래, 고국으로 향하는 길은 이런 암흑과 다르지 않다.

    지나가는 소낙비가 아닌 듯 차창을 강하게 때리는 비를 보며 서범익은 인상을 찡그렸다.

    “회장님, 기상 이변으로 오늘은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 비서의 목소리였다.

    “호텔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비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리무진은 방향을 틀어 호텔로 향했다. 뜨거운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목욕하고 싶었던 참에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효원은 이왕이면 하루라도 더 늦게 한국에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고 등을 묻었다. 여전히 허리에 둘린 강인한 팔뚝이 효원의 몸을 잡아끌었다.

    콘돔을 썼기에 하체의 질척거림은 덜했지만, 몸을 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차 문을 열고 쏟아지는 빗물에라도 몸을 씻고 싶었다. 그 빗물에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과 아픔을 함께 털어 버리고 싶은 욕심이었다.

    “더워?”

    “…아뇨.”

    머리칼에서 뺨과 눈가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냉큼 효원의 뺨을 닦아 흐트러진 머리 위로 쓸어 올렸다. 서범익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범익은 효원의 뺨을 쓰다듬으며 보조개가 파일 만큼 미소를 지으며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 * *

    두 사람은 루이 16세가 머물렀다고 해도 될 법한 화려한 스위트룸으로 안내받았다. 서울에 살아도 남산에 오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파리에서도 에펠탑을 본 게 두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소홀하듯이 파리의 에펠탑은 언제나 지나치기 쉬웠다.

    밤이 되자 화려한 조명들이 에펠탑 주위를 감쌌다. 화폭에 담고 싶은 아름다운 조명들은 보며 효원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탕은 어지러운 효원의 마음을 달래 주는 기분이 들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듯했다.

    커다란 욕조는 작은 수영장 같았고, 벽에서는 뜨거운 물이 마사지를 해 주듯 샘솟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물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정말 몸이 욕조 위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수영은커녕 잠수도 못 하는 효원에게 있어 생소한 기분이었다. 몸에 약간 힘을 싣자 곧바로 육체가 바닥으로 꺼진다. 효원은 크게 숨을 마신 뒤 바닥으로 꺼지는 제 다리를 쳐다봤다.

    방울, 방울, 거품이 하나둘 물속에서 흩어졌다. 한두 방울 입에서 흩어지던 거품들이 이내 수십 개가 되자 효원은 마치 인어공주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상대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해 물거품이 되는 비운의 공주… 그 인어공주가 자신인 것 같았다.

    “…….”

    숨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효원의 입에서는 더 거품이 나지 않았다.

    3년의 순애보… 그때는 혼자만의 사랑이 아님을 깨닫고 기뻤지만, 지금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첨벙-소리가 귓가를 때리며 몸이 붕 떠올랐다.

    “사람 간 떨어지게 할 거야?”

    서범익은 효원의 양팔을 붙든 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손쉽게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같은 남자의 몸을 이렇듯 쉽게 옮길 수 있다니… 괴력의 사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효원이었다.

    “…아읍-!”

    다짜고짜 키스가 쏟아졌다. 탕에 들어오기 전에 샤워를 했는지, 그의 몸에서는 재스민향이 풍겼다. 효원은 왜 그가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저 잠수했을 뿐인데, 혹여 나쁜 마음을 먹은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아니라고 변명을 해야 했지만, 효원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요.”

    “베이비시터가 잘 돌보고 있어.”

    “아직 아기예요. 엄마가 있어야…….”

    “내 아이인데, 그걸 모를 내가 아니지. 우선 너와 나 먼저 풀어야 할 게 있으니까.”

    “아윽… 으… 읏-!”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좁은 항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에 뇌리가 번쩍했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페니스를 박아 넣자, 고환까지 박히는 느낌이다.

    “나를 봐, 이효원…….”

    “…아앗-!”

    입 안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섹스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 주는 건 서범익만의 방법이었다. 일시적일지라도 효과는 뛰어났다. 섹스하는 동안은 오직 쾌락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도피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 섹스가 있었지!!

    그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왜 이제야 이 방법이 생각난 걸까?

    마른침을 삼켰다. 뜨거운 숨이 입술로 집중되며 범익은 강하게 허리를 튕겼다.

    “추읍- 춥…….”

    “아윽, 읏… 윽!”

    “효원아… 효원아… 크읏, 읏.”

    효원은 전립선을 점점 압박해 오는 페니스에 서범익의 어깨에 매달렸다. 양쪽 귀에 붙은 두 다리가 춤을 추었다. 검붉은 페니스가 항문 사이를 빠르게 왕복했다.

    흥분에 취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는 오직 효원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타오르듯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다가왔다. 저절로 숨이 멎었다. 곧 몰아닥칠 쾌감에 몸이 떨리는 건 당연했다.

    새된 신음에 교성을 지르며 효원은 이를 꽉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 와라. 운명아-!, 누가 더 오래 버티게 될지…….’

    * * *

    서범익은 아직 잠들어 있는 효원을 두고, 옆방으로 걸어갔다. 아침잠이 없는지, 아이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서범익은 사랑스러운 제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누구?”

    “파파.”

    “응? 파파?”

    “그래, 파파. 유리 파파야.”

    아이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베이비시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후 사정을 들은 터라 베이비시터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범익이 다시 한번 아빠라고 말을 했더니 아이가 그에게 와락 안겼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서범익은 작은 아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제 품에 폭 안긴 아이의 품은 따뜻했고, 우유 냄새와 함께 효원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눈치가 제법 빠른 아이였던지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이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파파가 있는데… 바쁘다고 했어. 마마가… 파파는…….”

    “그래. 그래…….”

    내내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심장이 멈출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과 이렇게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슬펐다. 아이를 품에 안은 범익의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그의 슬픔을 바라보는 남 비서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제 파파와 마마와 함께 사는 거야. 헤어지지 않아… 내 딸… 예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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