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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33화 (33/40)
  • chapter 33

    #33

    효원은 필립에게 아무런 약속도 못하고 도망치듯 궁을 나왔다. 베이비시터와 교대를 해야 한다고 변명했지만, 거절의 의미로 느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자고 하는 건…….

    그가 저를 보는 시선이 단지 친구의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밀었다고 덥석 잡는 건 그를 속이는 것이었다.

    제 마음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서범익을 잊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었음에도 효원은 서범익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파리에 왔다면… 이미, 나를 찾았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어제 유리를 보러 온 남자가…설마!”

    아찔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듯 콱 막히며 아팠다. 머리에 열이 나며 윗배가 쿡쿡 쑤셔 왔다.

    어떻게 해. 이미 주거지를 들켰다면 벗어나는 건 힘든 거 아닐까?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어디로…….”

    효원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새파란 하늘은 효원을 다 품어 주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그러나 정작 효원은 저 하늘에 안길 수 없었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 또다시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가 가진 배경, 그의 주변의 수많은 장애물…….

    그리고 이설과 저… 두 남매가 한 남자와 섹스를 하고 사랑하는 건 끔찍했다.

    머리기 핑핑 돌았다.

    ‘뭘 고민해! 필립의 손을 잡아! 그라면 너를 서범익에게서 지켜 줄 거야!’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자아가 쉼 없이 소리쳤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필립의 손을 잡고 벨기에로 가는 것이지만, 마냥 그를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친구가 아닌 연인인데…….

    다른 남자와 섹스할 수 있나? 사랑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렇게 계속 도망쳐도 되는 것인지…….

    효원은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맨션 앞에 닿았다.

    그래… 우선 서범익을 피해 생각을 정리해 보자.

    그렇다면 하루빨리 살던 곳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효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갔다. 늦은 오후가 되면 어두워지는 복도는 어깨가 으슬으슬할 만큼 을씨년스럽다. 본능적인 떨림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페티? 페티… 야옹~.”

    지금은 유리가 키즈 카페에 있을 시간이었다. 혼자 있었을 고양이 이름을 불렀다. 평소 같으면 바로 달려와 다리를 휘감고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페티, 페티.”

    초조함에 여러 번 이름을 부르자, 작업실에서 야옹-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업실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작품이 직사광선을 받으면 안 되기에 늘 암막커튼을 쳐 놨던지라 작업실은 어두웠다. 그런데, 그곳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효원의 가슴이 몹시도 두근두근했다. 음침한 빛으로 둘러싸인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비스듬히 열린 작업실 안을 보았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꺼졌다. 등을 돌린 채 서범익의 초상화를 보고 있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놀람과 동시에 당황한 효원은 그만 테이블을 건드려 물건이 떨어졌다.

    둔탁한 소음이 들렸음에도 서범익의 눈길은 여전히 그의 초상화에 못이 박혀 있었다. 야옹, 야옹, 그의 품에 페티가 안겨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발견했다.

    겉으로는 고양이털을 쓰다듬고 있지만, 실상 고양이 등가죽을 잡아 위협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꼬리가 바짝 말린 페티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이효원.”

    눈앞이 캄캄했다. 느릿하게 뒤를 돌아서 효원을 바라보는 서범익의 눈에는 시뻘건 실핏줄이 돋아 있었다.

    효원은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두 다리가 굳어 버렸다. 순간 강렬한 시선과 욕망이 효원의 몸을 불살랐다.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해 봐.”

    * * *

    천천히 효원의 앞으로 다가온 서범익의 가슴이 맞닿았다. 마주 닿은 가슴이 흉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 효원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뇨! 이미 당신을 잊었어요.”

    “내 초상화를 그려 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걸 알아야지, 이효원.”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의 숨결이 얼굴 위로 뿌려졌다. 고개를 돌려 부정을 해도 도발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입술이 비틀렸다.

    “지난 3년 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말해 줄까?”

    “아.”

    그는 눈빛이 매서웠다. 강한 페로몬이 효원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루하루가 끔찍했지. 어떻게 3년을 버텼는지 모를 만큼 미친놈처럼 일을 하고 복수를 꿈꿨지.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모두 박살 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거든.”

    “…….”

    그가 복수하고 싶었다는 말에 한 기사가 떠올랐다. 2년 전, 서 회장이 비리 사건으로 기사에 실린 건 그저 우연이 아닌가?!

    “왜? 그런 얼굴로 봐? 설마 내가 이설과 정말 잤을 거라고 생각해?”

    “무슨!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이설의 연기는 훌륭했지. 덕분에 조금만 도와줘도 톱스타가 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나가… 연기를 했다니.”

    “다 조작이었다면? 네가 본 거, 네가 들은 거 모두 거짓이었다면? 믿겠어?”

    “……!”

    무슨 소리야?

    거짓이라니? 어떻게… 거짓일 수가 있어? 분명, 봤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두 사람이 키스를 하고 알몸으로 섹스를 하는 것을…….

    효원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처음에는 그저 화가 나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어. 그때마다 너는 더 먼 곳으로 숨어들더군.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넌 나를 떠났지. 그 후로 내가 어떻게 살았을 거 같아? 하루하루가 지옥의 구렁텅이 같았어.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나를 떠난 네가 미웠지. 그렇게 믿어 달라고 말을 했는데…. 나는 매일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이설을 죽이려고 했지. 몇 번이고 이설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면 믿겠어? 그 얇고 흰 목을 똑 꺾어 장례식을 치르면 혹시나 네가 찾아올까… 몇 번이고 상상했지…….”

    서범익은 무서운 눈으로 마치 이설의 목을 잡는 듯 효원의 목을 슬며시 잡았다 놓았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음습했다.

    서범익의 손이 가슴으로 올라오며 재킷 안으로 파고들었다. 뺨에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며 그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속살을 만지며 음미하는 듯 숨을 뱉었다.

    “내가 이설의 목을 조이지 않고, 톱스타로 만든 이유가 뭔지 알아? 웃기게도, 그 나쁜 짓을 했는데도 죽일 수 없더라고… 단지 너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얇은 셔츠 사이로 온기가 그대로 가슴속으로 전해져 온다. 미끄러지듯 가슴을 쓸어내리던 서범익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보고 싶었어.”

    “……!”

    서범익의 고개가 약간 비틀리더니 그대로 입 안으로 혀가 침입했다. 부드러웠던 손길과 달리 거친 숨결이 입술 가득 담겼다. 뒤통수가 단단히 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다가오는 서범익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 뒤는 벽에 막혀 있어 도망칠 곳이 없었다.

    “하, 하지… 마요. 으읍-!!”

    호흡이 거칠어지자 더욱 몰아붙이는 듯 타액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정렬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가슴에서 복부로 내려온 손이 허리를 강하게 잡으며 청바지 버클에 손가락이 끼워졌다.

    바지를 벗기려는 서범익의 완력과 거부하는 효원의 움직임에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와르르 이젤들이 무너져 뒤엉키고, 그 사이로 효원의 몸 또한 무너졌다. 두 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며, 서범익은 더욱 거세게 키스를 했다.

    “아윽…….”

    감추려고 해도 서범익이 주는 자극 때문에 페니스가 조금씩 머리를 들었다. 담백했던 지난 3년 간 참아 왔던 욕정이 서범익의 손길에 어쩌지 못하고 폭발했다. 감추고 싶었던 욕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쓸어 내듯 허리로 내려온 손이 기어코 바지를 벗겨 냈다. 진득하게 키스를 하며 브리프도 찢을 듯 벗겨 버렸다. 범익의 것과 함께 발기한 페니스가 꺼떡였다.

    “으읏… 이러지 마세요. 잠깐만!”

    겨우 숨을 고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입에서 하는 말과 달리 육체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와 흥분에 들썩이는 숨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넌, 나를 속였어. 내 아이를 임신한 채 연락도 하지 않다니.”

    “헉!”

    효원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어떻게… 어떻게…….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없어. 유전자 감식까지 모두 끝났으니까.”

    “악!”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너무도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맥박이 빨라졌다. 고작 그의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프리컴이 흘러나왔다. 서범익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손톱으로 귀두를 꾹 눌렀다.

    “이렇게 빳빳하게 세우고 거짓말 하지 마. 너도 원했잖아?”

    “아니, 아니에요.”

    효원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주어진 쾌락을 거부했으나, 부질없는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활짝 열린 허벅지로 단단한 손가락이 비부로 이동했다. 효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입구가 움찔움찔 떨었다. 몸은 그의 손길을 열렬히 환영하며 애널은 스스로 젖어 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서범익의 곁을 떠나고 난 뒤, 간혹 자위로 열을 식혔지만 이런 쾌감은 오랜만이었다. 입술 위로 전해지는 전율과 유혹적인 그의 시선에 기절할 것 같았다.

    “빡빡해.”

    서범익은 손가락으로 길을 넓히면서 눈가가 미세하게 찡그려졌으나 입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효원은 복잡한 심경으로 숨을 골랐다.

    어째서 내 몸은 아직도 이 남자에게만 열리는 걸까?

    필립의 구애와 다정함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가슴이 또다시 뛰고 있을까? 왜 사랑하는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때, 단단한 귀두가 구멍에 닿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키스를 하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서범익의 손길은 착실하게 길을 넓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 외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 은밀한 부위에 도달했다.

    긴장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시선을 떼지 않고 강렬하게 마주하는 눈동자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도 같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자, 곧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아픔에 낮은 비명을 질렀다.

    “아윽, 아…….”

    “크읏, 조여… 읏.”

    효원의 몸을 품에 안고 서범익은 자신의 페니스를 삽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효원은 그의 페니스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젖어 가는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흐으으응… 아앗-!”

    끝까지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우겨 댔다. 그런 효원의 말에도 서범익은 더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통째로 넣어 빨아 당겼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수 없이 빨며 혀를 넣어 타액을 삼켰다.

    혀뿌리가 얼얼할 만큼 강하게 흡입을 하며 한 번에 포인트를 잡아 박아 넣었다. 척추 뼈가 뻐근할 만큼의 충격이 닿았다. 전립선을 찌르며 그곳만을 문지르는 감각에 눈앞에 섬광이 번쩍번쩍하며 터졌다. 효원의 머릿속에서 연달아 폭죽이 터졌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흑! 으윽-! 앗-!”

    입술에서 나오는 신음을 삼키듯 서범익은 빠르게 입술을 덮치며 밀고 들어왔다. 온몸으로 저릿저릿한 쾌감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손길 하나 몸짓 하나 그 자체만으로도 강렬한 쾌감이 증식했다. 이미 서범익에 의해 길들여진 효원의 육체는 온몸으로 반응했다.

    “아윽, 읏-! 아윽.”

    “크읏, 헉, 학, 하, 하… 효원아… 하, 하.”

    욕망에 사로잡힌 그가 애타게 제 이름을 불렀다. 육체는 욕정에 굴복하고, 갈 곳 잃은 두 손은 그의 목에 매달렸다.

    서범익은 효원의 몸을 번쩍 들어 침실로 옮겼다. 그리고 효원의 몸 곳곳을 애무를 하며 피스톤 운동을 했다. 거친 숨소리가 울러 퍼지고 꺾일 듯 하늘로 치솟은 허리에 조바심 났다. 입을 맞추며 더 성나게 왕복을 하는 하체로 인해 퍼지는 음란한 젖은 소음이 야했다.

    당연한 결과라는 듯 두 육체가 엉켰다. 진득한 키스를 하며 정액을 토해 내고, 또다시 성난 중심을 깊게 박았다.

    처음은 강압적이었으나, 효원은 서범익의 육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는 더더욱 서범익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욕망에 지금 육체를 허락했다고 해도, 되돌아온 정신은 그를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다. 서범익과 다시금 연인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배경 또한 가슴으로 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두 육체는 영혼까지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서로를 원하고 갈구하는 마음이 그저 육체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끔찍한 현실과 운명 앞에서 효원은 울부짖었다. 그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서러웠다. 그를 갖기에는 이설과 그의 관계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그를 따라 한국으로 되돌아갈 용기가 없다. 회장직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서 회장과 이설이 있는 한국이 싫었다.

    문득, 서범익의 애달픈 눈빛과 닿았다. 그 눈빛에 효원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토록 좋은데… 너무도 좋고 좋아서,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데…….

    그를 따라 그가 속한 삶 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으니…….

    비겁했다. 그의 세상에서 내 자리가 없다는 게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바보 같고 병신 같았다.

    좀 더 이기적이라면, 타인이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제 욕심만을 채우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얼떨결에 그와 섹스를 했다. 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그를 억지로 집에서 나가게 했다. 효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으나 효원을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다.

    효원은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바로 필립의 음성이 들렸다.

    『필립,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필립의 웃는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울렸다. 효원은 전화를 끊고 유리를 기다렸다. 필립이 곧 오기로 했으니, 서범익이 붙여 놓은 가드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효원은 미디어를 틀었다. 그러자 한 싱어가 노래를 불렀다.

    [… 당신의 길을 따라가고 있어요.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거 알잖아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삶은 쉽지 않네요.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침묵 속에 남아 있겠어요.

    기다릴게요. 당신이 돌아온다면 난 여기 있을 거예요. 당신은 제 영혼의 음악이니까요.

    당신과 함께라면 난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인생이 한 순간도 힘들지 않은 것은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의 두 눈을 바라보고 싶고 매 순간 당신이 나와 함께라는 걸 느끼고 싶어요.

    그럼 당신은 나의 길이 되어주고 당신이 원하시면 당신 안으로 날 이끌어 줄 거예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태양이 쉬지 않고 빛을 내는 것은 당신이 있어서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어요…….]

    잠시 후, 필립의 모습이 보였다. 효원은 아이를 안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필립은 효원에게 왜 울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뒤이어 따라 나오는 페티를 품에 안고 세단 문을 열었다.

    그때, 효원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서범익은 손을 아득 쥐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도망칠 건 예상했지. 효원이 짐 모두 빼. 그가 쓰던 건 하나도 남김없이 한국으로 보내고, 움직여.”

    아직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확인했다. 절대 놔주지 않을 마음이었다. 아직 풀어야 할 오해가 산처럼 쌓였으나, 시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가 아팠다.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됐어. 출발하지.”

    * * *

    파리의 오성급 스위트룸, 한화로 하루 수천에 달하는 비싼 룸이었다. 이곳에 JK 그룹 회장이 머문 지 일주일째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연인을 찾았고, 곧 프랑스를 떠날 예정이었다. 단, 그의 예정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그는 저 멀리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빛을 노려보았다. 그곳은 바로 이효원이 피신한 프랑스 내 벨기에 왕궁이었다.

    남 비서의 등골이 서늘했다. 그 이유는 책상위에 놓여 있는 은색 총 한 자루 때문이었다. 베레타 92… 소음기가 장착된 총이다.

    저 총으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거기까지 상상한 남 비서는 입술을 꽉 물었다.

    “상대는 벨기에 왕족입니다. 무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효원 씨도 그런 상황 원하지 않을 테고요.”

    남 비서는 절대 무력은 안 된다는 말 대신 효원이라는 이름을 꺼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무력을 사용할 내가 아니지. 어떻게 이룬 기업인데…….”

    “아마도 잠시 쉬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의 상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효원이 도망치듯 벨기에 궁으로 들어간 뒤 48시간이 지났다. 서범익은 눈을 부릅뜨고 궁의 방향을 노려봤다.

    “필립 대공이 왕가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과거 골칫덩이에 가깝지. 지금 벨기에 왕세자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나?”

    “곧 있을 대관식을 위해 해외순방중입니다. 어제 독일에 입국하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독일이라… 좋아, 독일로 간다.”

    “네?”

    눈앞에 효원을 두고 독일로 향하겠다는 서범익을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남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서범익이 물도 없이 약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마치 전쟁을 치르기 전 기사처럼 거침없이 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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