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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32화 (32/40)
  • chapter 32

    #32

    맨션 앞에 검은 롤스로이스가 서 있었다, 서범익이 차에 타자 차는 곧장 키즈 카페로 향했다.

    아이의 뒤를 밟던 가드가 사진을 전송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예뻤다.

    “조심스럽게 하십시오. 아프지 않게, 머리카락을 뽑지 말고 흘러내린 것을 주워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체액이 묻은 빨대나 물건 중점으로 체취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빠르면 24시간 안에 나올 것입니다.”

    “돈이 몇 배가 들어도 좋으니 빨리 확인하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지금쯤 아이 근처에 심어 둔 사람들이 유전자 감식에 필요한 샘플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24시간 후, 아이가 내 아이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차가 키즈 카페 앞에 섰다. 적당한 거리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곧이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효원의 아이도 섞여 있었다. 서범익의 가슴이 지끈했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콧노래가 불렀다. 베이비시터의 손을 잡고 나오는데 아이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반짝반짝한 고급 차를 본 아이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차로 달려온 아이는 신기한 듯 커다란 차에 얼굴을 비추고 폴짝폴짝 뛰었다. 당황한 베이비시터가 아이의 손을 잡고 가려고 하는데 창문을 스르륵 열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창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요.”

    “아닙니다.”

    서범익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더욱 놀랐다. 아이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우와… 멋져!”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범익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자,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면 안 돼.”

    “나쁜 사람 아닙니다.”

    서범익의 외모에 잠시 시선이 빼앗겼으나, 베이비시터는 빨리 이성을 찾았다. 바로 낯선 이를 경계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니 경계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귀엽네. 몇 살?”

    “세 살요.”

    아이가 손가락을 세 개를 펴고 귀엽게 웃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예뻤다. 서범익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사한 웃음꽃이 폈다.

    범익은 아이를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검사를 의뢰하지 않아도 이 아이는 제 아이였다.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심장이 멈출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슬픔을 삭이는 범익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 비서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효원 홀로 아이를 낳고 키웠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좀 더,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했는데…….’

    아이가 작은 몸을 꼬물거리며 눈을 맞춰 왔다. 서범익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다음에 보자. 아저씨가… 꼭 다시 올게.”

    * *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옆으로 누운 채 잠이 들었던 터라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효원은 창문 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온몸이 욱신욱신하네. 몸살이라도 났나?”

    효원은 목을 좌우로 꺾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데 뭔가 하체가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찝찝한 느낌에 고개를 숙여 바지를 보자 발기한 페니스가 눈에 들었다. 헉! 몹시도 놀랐다.

    흡사 몽정이라도 한 것처럼 축축한 것을 보니 창피했다. 더 놀라운 건 속옷이 온통 정액으로 질척질척해진 걸 발견했을 때였다.

    “으아… 이게 뭐야?”

    ‘이 나이에 몽정이라니…….’

    효원은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했다. 집에 아무도 없어 누가 보는 이도 없건만 창피한 마음에 서둘러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섰을 땐, 더 가관이었다. 기절한 듯 옆으로 누워서 잔 탓인지, 한쪽 가슴의 피부가 벌겋게 변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애무를 한 것처럼 자국이 남았다. 오해를 받기에 딱 좋았다.

    “후… 많이 쌓이긴 쌓였겠지.”

    효원도 다른 남자처럼 정액이 쌓이면 배출해야 한다. 여자를 사귀거나 남자를 사귀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 스스로 열을 식히고 자위를 했다.

    요즘 왜 이러는지. 자꾸만 섹스가 하고 싶었다. 다른 것이 아닌 삽입 섹스… 아마도 애널 섹스에 익숙해진 몸은 자위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효원은 샤워를 하는 것으로 열을 식혔다. 그리고 저녁을 만들기 위해 거실로 나와 보이지 않는 페티를 찾았다.

    “페티? 페티… 어디 있니?”

    효원은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집 안을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페티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을 집 안을 뒤적이며 고양이를 찾았을 때, 식탁 구석에서 페티를 발견했다.

    “페티? 이리와… 밥 줄게.”

    효원이 웃으며 고양이 이름을 불렀는데도, 고양이는 좀처럼 식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했다.

    “왜 그래? 추워?”

    벌벌 떠는 모습이 공포에 질린 눈동자였다. 고양이는 무엇인가에 놀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끊임없이 떨었다.

    그때 효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떨어진 거즈였다.

    왜… 여기에 이런 게 있는 거야?

    의아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이런 거즈가 나올 곳은 없었다.

    ‘혹시, 뭔가를 소독했나?’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 베이비시터가 에탄올로 뭔가를 소독한 것으로 생각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고양이가 놀란 것 같아 효원은 고양이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고양이를 보자 왠지 효원 또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어떤 냄새가 효원의 코끝을 자극했다. 효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향이 너무도 그리웠던 향기였기에 고양이를 품에 더 끌어당겼다.

    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베이비시터와 유리의 목소리에 효원은 힘껏 소리를 질렀다.

    “저, 여기 있어요!”

    아이는 한껏 들뜬 상태였다. 확실히 바깥에서 같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니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수고하셨어요.”

    “아뇨.”

    “그만 가 보세요.”

    “네. 아, 잊을 뻔했네요. 오늘 누군가와 마주쳤는데, 혹시 아시는 분인가 해서요.”

    “유… 리와요?”

    누구와 마주쳤다는 걸까? 베이비시터의 말에 흠칫 놀란 효원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이상하네요. 마치 아는 사람처럼 반가워하던데요?”

    효원은 가슴이 떨렸다.

    “혹시 생김새가 어떻던가요?”

    “한국인이었어요. 엄청 키가 크고 미남이던걸요?”

    한국인? 미남? 누가! 누가 여기까지.

    설마! 서범익이 저를 찾은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일이 없어. 어떻게 찾아. 신분도 가짜였고, 여권도 가짜, 불법체류자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지나치다 우연히 아이를 보고 말을 걸었을지도. 아이의 외모는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정도로 예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길을 지나가다 아이가 예쁘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꽤 있었다.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머리도 어지러웠지만, 왠지 초조했다. 효원은 6개월 렌트비를 미리 지불한 것을 후회했다.

    ‘만약, 한국에서 저를 찾는 사람이라면… 도망쳐야 해.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효원은 울상을 지었다.

    * * *

    미리 입금한 렌트비는 두 번째고, 당장 돈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다. 정든 곳을 떠나는 건 서운했지만, 한국에서 저를 쫓는 사람들에게 꼬리가 밟혔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효원은 당장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디로 갈 것인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프랑스를 완전히 뜨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상점으로 향했다. 기다린 듯 상점 주인이 효원에게 뛰쳐나왔다.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를 보아 그 또한 의뢰인을 직접 만나기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리무진을 타고 온 왕실 보좌진에 의해 꺾여 버렸다. 그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효원을 배웅했다.

    효원은 푹신한 차량에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불편했다. 보좌진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도, 가드도, 운전자도… 다 불편했다. 노블레스의 표본인 서범익을 피해 프랑스로 왔는데, 이곳에는 더 귀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였다.

    차가 시원하게 뻗은 가로수를 지나 30분쯤 달리자, 벨기에 깃발이 걸린 커다란 대사관이 보였다. 차는 검열을 하지 않고 통과했다.

    “미스터 리, 이곳은 대사관에 위치한 에메랄드궁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 이걸 목에 걸어요. 당신 신분을 보장하는 신분증입니다.”

    남자가 주는 신분증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효원은 시선을 돌려 화려한 궁전을 바라보았다. 프랑스에도 따로 궁전이 있다니… 벨기에 본국만큼 큰 궁전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차가 멈추자 말끔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효원은 멍한 정신으로 궁전을 훑어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금색으로 된 커다란 문이 열리더니 파티를 해도 될 만큼 넓은 홀이 등장했다.

    2층 높이의 중앙 계단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록 등을 돌리고 있지만, 뒷모습이 척,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그림의 주인일까? 그렇다면, 왕족이라는 뜻인데…….

    그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효원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었다. 효원의 눈동자가 크게 치켜떠졌다.

    『피, 필립?』

    * * *

    효원은 뭔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빛을 강조하라는 필립의 말, 누구도 효원만큼 빛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단언… 효원은 손에 들고 있는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초상화의 의뢰인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의뢰인이 필립의 형제였다니. 그건 즉, 필립이 현 벨기에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라는 소리다.

    효원은 무척 놀랐다. 필립은 효원이 프랑스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신분도 숨길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런 그가 왕족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가 효원에 대해 도와주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것에 비해 효원은 그의 사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가 보여 준 상냥함과 따뜻한 마음을 읽었기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왕족이라니…….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요?』

    입 안이 온통 까끌까끌한 게 모래를 씹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색이 된 효원의 안색에 필립은 조용히 손을 잡았다. 타인의 접촉에 효원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필립은 재빨리 손을 놔 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속일 마음은 없었어. 그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고나 할까? 리도 알다시피, 나, 리에게 관심 많아. 그저 친구처럼 곁에 있었어도… 내 마음은 알지?』

    『…저 뻔뻔한 놈이지만, 당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입술을 아득 물었다. 그에게 갚을 빚이 넘치고 넘쳤지만, 효원은 냉정하게 그를 외면했다. 나쁜 남자라고 욕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효원은 예전처럼 착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존재가 있기에 강자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자신은 지금껏 필립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원해서 한 거야. 양심의 가책을 주려고 한 말 아니었으니까.』

    필립은 답답한 듯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3년이면 잊었다고 생각했고, 그만 새로운 사랑을 해도 될 거 같아서 이렇게 용기를 낸 거야. 나, 처음 리를 봤을 때 반한 남자거든.』

    그의 밝은 웃음에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그의 마음을 이용한 제 자신에게 구역질이 치밀었다.

    『…….』

    『말은 그렇게 해도, 리도 아주 마음에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1%로의 가능성도 없는 거야?

    『내 사정을 보고 말하는 거예요? 난, 애 딸린 미혼부예요.』

    『알아. 그거 내가 모두 안고 갈 수 있어.』

    『필립…….』

    필립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아무리 봐도 훤칠한 미남이었다. 왕족 특유의 고고한 분위기는 많은 오메가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자신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

    제 마음은 하나인데.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곳은 없는데.

    눈가로 열이 몰렸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목이 메었다.

    필립은 방어하듯 잔뜩 굽은 효원의 어깨가 안쓰럽게 보였다.

    『내가 그동안 리 곁에서 본 게 얼마인데… 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 그 남자와 완전히 헤어질 수 있는 기회는 나야. 나를 잡아.』

    『피, 필립?』

    효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에게 내 신분을 밝힌 이유는 따로 있어. 이것을 좀 봐…….』

    필립은 효원에게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사진을 본 순간 효원은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

    『사흘 전,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진이야. 서범익이 프랑스에 입국했어.』

    서범익의 얼굴이었다. 블랙 슈트에 코트 깃을 세운 그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화보 속 한 장면처럼 찍힌 서범익의 모습이 너무도 멋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긴 했음에도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쑤셨다. 아무리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었던 그를 향한 마음이 지칠 법도 한데,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했다.

    『괜찮아?』

    『네… 아무렇지 않아요.』

    괜찮다는 말과 달리 효원의 미련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단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흔들리는 효원을 눈치챘는지 필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서, 나는 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제안을 하나 할까 해. 더 이상 프랑스에 살 수 없게 되었으니…….』

    『네?』

    『리의 첫사랑, 과거 연인에게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나와 함께 벨기에로 가자. 내 모국에서는 리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생활고로 고생할 일도 없어. 왕실 어른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그간 방탕했던 삶이 리를 만나고 많이 달라졌거든. 유리라면 내 딸처럼 키울 수 있고, 사랑으로 가족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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