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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31화 (31/40)
  • chapter 31

    #31

    다음 날이 되자 효원은 울상이 되었다. 작업실 침대가 엉망이었다. 얼마나 많은 정액을 토했는지, 시트를 모두 걷어야 했다.

    “발정 난 개가 따로 없네…….”

    효원은 혀를 차며 시트를 휙휙 걷었다. 당장 세탁해야 할 빨래가 산처럼 쌓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그때, 유리가 눈을 비비며 작업실로 건너왔다.

    “마마… 히잉…….”

    “어, 우리 공주님 일어났어?”

    유리는 작은 발로 후다닥 뛰어와 효원의 품에 안겼다. 효원은 아기 띠를 찾아 등에 유리를 업고 서둘러 아침을 준비했다.

    * * *

    온갖 잡동사니와 볼품없이 얹어진 책들이 꼭 쓰레기 같았다. 한 번 작업에 몰두하면 작업실을 치우지 않는 효원은 의뢰받은 작품을 끝날 때까지 청소하지 않았다.

    더럽고 어지러운 내부를 훑어보며 스스로가 참 한심하다고 생각되었다. 환기하지 않는 작업실은 퀴퀴하고 눈은 시리다.

    『리, 후우… 고양이털 봐. 이러다 또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려고 해?』

    등 뒤에서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의 냄새를 맡은 페티가 문을 열어 준 듯했다.

    페티는 귀신같이 사람을 구분했다. 베이비시터와 필립이 냄새를 맡는 것인지 그들의 냄새가 나면 문 앞에 있다가 펄쩍 뛰어올라 두 발로 문을 열었다. 그때마다 신기했다.

    『벌써 다 한 거야?』

    『네. 이제 그늘에서 건조하면 완성이에요.』

    『흠… 어디 좀 볼까?』

    효원은 초상화를 감상하는 필립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벨기에 왕족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진 속 남자가 누군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필립의 얼굴과 무척 흡사했다.

    둥근 이마와 높은 콧대와 콧날, 그리고 얇은 입술이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형제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왕족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빛의 표현이 강조되었네? 잘 그렸어.』

    전에 그렸던 그림과 달리 이번 초상화에서는 빛의 효과를 조금 발휘해 보았다. 의뢰한 그림이 워낙에 거물급 초상화인지라, 완전히 어둡게 그릴 수는 없었다. 필립은 몇 번이고 감탄사를 토해 냈다.

    겨우 후광에 빛을 강조했을 뿐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이지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온 듯했기에, 효원 또한 흡족했다.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리의 그림은 빛이라고 했잖아?』

    필립은 활짝 웃으며 효원의 어깨를 가볍게 마사지를 했다. 필립의 칭찬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엊그제가 크리스마스였는데 나무마다 벌써 파릇파릇한 연둣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파리의 봄은 빨랐다. 곧 이 거리는 풍성한 나무들과 꽃향기로 넘실거리는 따뜻한 봄이 시작될 것이다. 여전히 겨울인 효원의 가슴과 달리 봄은 세 번째로 찾아왔다.

    필립을 배웅한 뒤 맨션으로 돌아왔다. 불이 꺼진 해질녘 오후의 어스름한 복도를 걸으며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야옹, 야옹.”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는 고양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끔찍한 어둠이 효원을 덮쳤다.

    효원은 어렴풋이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업실 문틈으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효원은 채색 작업까지 완성된 작품을 바라보다 오른쪽 구석에 세워 놓은 이젤 앞에 섰다.

    잠시 머뭇거리다 검은색 천으로 씌워 놓은 이젤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그러자 그곳에는 필립이 그렇게도 원하던 빛을 강조한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작품은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한 빛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 얼굴은 그릴 수 있었어요… 웃기죠?”

    서범익의 초상화였다. 3년간 틈틈이 그렸던 그림은 어느덧 완성되어 있었다.

    효원은 작품이 마치 서범익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터치를 했다. 손끝에 작은 떨림과 기묘한 쾌감이 덮쳤다. 그림 속에도 우성 알파 지배자의 아우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범익 씨… 잊어요. 나도 잊을 테니까…….”

    * * *

    남 비서가 헐레벌떡 복도를 뛰었다. 이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하고 싶어 정신없었다. 특별 비서실에 모인 서범익과 화백들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 비서가 숨을 헐떡거리며 외쳤다.

    “찾았습니다, 회장님!”

    “……!”

    순간 서범익의 맥박이 빨라졌다. 심장이 망치질하는 듯 맹렬하게 뛰었다.

    “프랑스 한 도시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남 비서가 사진을 내밀었다. 코트 깃을 세워 입이 가려져 있었지만, 효원이었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눈매와 콧날이 효원이 확실했다. 서범익의 가슴이 찢어질 듯 조여 왔다.

    “어디서… 단서를 찾았습니까?”

    “최근 한 무명 화가가 벨기에 왕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작품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초상화입니다.”

    화백들이 하나둘 사진을 들어 작품을 확인했다.

    “맞습니다! 사진으로 봐도 이효원 화가와 같은 채색법으로 색을 장식했습니다. 특히 후광의 빛을 보니 확실하게 빛의 화가란 칭호를 얻을 만큼 훌륭합니다.”

    “프랑스였어… 역시… 프랑스에.”

    서범익이 심장이 조여 오는 아픔에 제 가슴을 쥐자 남 비서는 깜짝 놀랐다. 서범익은 휘청거리는 몸으로 다른 사진을 바라봤다.

    효원의 옆에 선 남자, 그리고 아이…….

    아이?

    충격을 받았다.

    “아이라니… 이 아이는 누구지?”

    “그게…….”

    남 비서가 서범익의 눈치를 살폈다.

    “이 남자는 누구고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야? 설마, 알파인가? 이자도 알파야?”

    “네… 알파입니다. 지금 그가 누구인지 찾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효원 씨 옆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효원이…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은 건가? 그런 건 아니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라니…….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에 서범익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남자를 만나 임신할 녀석이 아닌데…….

    서범익의 몸이 휘청휘청했다. 피폐한 정신으로 효원의 곁에 선 남자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아이를 바라봤다.

    “누구인지 당장 밝혀. 그리고 전세기 준비해.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게 잘 감시해야 할 거야. 놓치지 않아.”

    * * *

    오늘 잔금을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번 벨기에 왕족이 값을 지급한다고 했기에 서둘러 상점으로 갔다.

    겨울이 지났건만, 여전히 추웠다. 효원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상점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샤즈멜랑의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갑갑한 기분에 마스크를 벗고 싶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 미스터 리,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어.』

    상점 주인의 입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효원은 빨리 그림 값을 받고 나가고 싶었다. 후끈한 공기도 공기지만, 이상하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조했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효원이 약간 눈을 치켜뜬다.

    『그림 값을 받으러 왔어요.』

    『오오, 오케이, 그 전에. 이거.』

    남자가 효원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 보자 그곳에는 그림 값이 아닌 초대장이 나왔다.

    『의뢰인이 직접 값을 지불하고 싶다고 했어.』

    『네? 직접 오라고요?』

    『꼭 얼굴을 보고 고맙다고 말을 하고 싶다고 하니 어쩌나. 안 된다고 해도 끝까지 만나고 싶다고 해.』

    『아…….』

    난감한 제안에 효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림을 그린 화가와 직접 대면하겠다니… 물론 종종 그림을 그린 화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효원은 거절했었다.

    작업하기 전에 말했다면 작업 자체를 거절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림을 완성한 뒤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반인도 꺼려지는데 왕실 관계자를 만난다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꼭, 만나고 싶다고 했어.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되었다고, 값은 두 배를 주겠다고 하는데…….』

    잠시 고민이 되었다. 상점 주인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혹시나 효원이 거절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효원이 거절하면 이 남자가 곤란한 것일까? 앞으로 프랑스에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을 찾아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효원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후…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이번 한 번뿐이에요.』

    『오케이, 꼭 약속해, 리!』

    효원은 곧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가방에 초대장을 넣고 주인에게 인사를 한 뒤 상점을 빠져나갔다.

    효원이 상점을 나가자 주인은 뒤를 힐끔거렸다. 곧이어 별실로 연결된 커튼이 열렸다. 그곳에서 키가 큰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존재감에 주인의 흠칫 떨었다. 그가 주인에게 현금 5만 불을 건넸다.

    『아이고,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다니…….』

    주인은 돈다발을 안고 별실로 냉큼 들어갔다.

    남자의 시선이 창 너머를 응시했다. 창밖으로 그리운 효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의 입술에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찾았다… 이효원.”

    * * *

    효원은 무언가 강렬한 눈빛이 제 뒤를 쫓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봄바람에도 몸을 한껏 움츠리며 뒤주르벨트역 부근을 걸었다. 잠시 갓길에 멈춰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맨션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이마를 손끝으로 쓸어 내자 땀이 맺혀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안도감이 들어 눈이 스르륵 감겼다. 땀에 젖은 이마를 티슈로 닦아 털어 내고 고양이를 안았다.

    “야옹~ 야옹~.”

    “응, 아무 일도 아니야. 걱정했다면 미안.”

    땀이 흥건한 채 들어온 효원이 걱정스러웠는지, 고양이가 작은 혀를 빼내어 효원의 뺨을 핥았다. 윤기가 번들번들한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터져 나오려는 숨을 참으며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넣어 주었다. 속절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효원은 한쪽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후…….”

    효원은 베이비시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리 잘 놀고 있어요?”

    - 물론이에요.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금세 친구를 사귀었답니다.

    며칠 전부터 베이비시터와 유리는 키즈 카페를 다녔다. 자신은 숨어 산다고 해도 아이까지 숨겨 놓고 아무것도 못하게 할 수는 없었기에 베이비시터에게 부탁했다.

    “다행이네요. 동양인이라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했어요.”

    - 인기가 많아요. 금방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답니다.

    효원은 시계를 봤다. 집에서 10분쯤 떨어진 키즈 카페는 한창 아이들이 붐빌 시간이었다. 카페에 간 지 1시간이 안 되었으니 앞으로 2시간 정도는 혼자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눈이 감겼다. 어제 밤을 샜더니… 저녁을 준비해야 했지만, 가물거리는 잠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효원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야옹, 야옹, 귓가에 들리는 고양이 울음이 사나웠다. 누군가를 경계하는 듯 잔뜩 날이 섰다.

    ‘페티 조용히 해… 그만…….’

    효원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몸이 무거워졌다. 육체가 아래로 푹푹 꺼지는 느낌에, 정말 이대로 바닥을 파고 땅속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복도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아닌가? 옆집은 결혼한 젊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데, 오늘은 손님이 오는 듯했다. 효원은 심장의 고동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렇게 효원의 몸은 소파와 하나가 되었다.

    잠시 후,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광택이 도는 구두코가 소파 주위를 맴돌았다. 남자들은 바삐 움직였다. 커튼을 닫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집 전체를 채운 가스를 거두었다. 가스는 멀쩡한 사람을 억지로 잠을 재웠다.

    그때, 효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 넓게 포위망을 펼쳤다. 그 한 사람이 독보적인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준비하십시오.”

    “네.”

    의사와 간호사가 시술을 위해 탁자 위를 정리했다. 깨끗하게 소독된 흰색 천을 깔고, 그 위로 초록색 천에 날카로운 매스를 꺼내었다. 잠시 후, 효원의 옷을 벗겨 낸 서범익이 그의 몸을 소중히 안아 침대에 눕혔다.

    동그랗게 뚫린 초록색 천을 시술할 부위에 깔았다. 효원의 흰 팔뚝이 침대에 떨어지자 그 손을 슬며시 잡았다.

    당장 입을 맞추고 싶지만, 급한 건 시술이었다. 언제 또다시 도망칠지 모를 효원이라 보험을 들어 놔야 했다. 의사가 메스로 얇은 살 살을 갈랐다. 서범익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쓸어내렸다.

    “부작용은 없습니까?”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피부에 시술해도 문제없었습니다.”

    의사는 재차 안전하다고 말을 했다. 이에 서범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서범익은 턱을 추어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의료진을 바라보았다. 혹여 의료진들이 효원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내지 않을까 뚫어지게 그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런 서범익을 곁눈질로 훑어보며 의료진은 긴장감에 시술을 강행했다. 피부 조직을 갈라 그 사이로 위치 추적기를 심어 넣었다.

    이 위치 추적기는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위성으로 추적할 수 있는 기계였다. 초소형이라 환자가 의식할 수 없다. 마취가 깨어나도 전혀 모를 것이다.

    서범익은 효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파르르… 손끝에 정전기가 흘렀다. 3년 만에 만난 연인의 심장이 날뛰었다.

    * * *

    효원의 시술은 빨리 끝이 났다. 앞으로 1시간 후면 깨어나기에 의료진은 서둘러 그의 집을 빠져나갔다. 효원의 팔뚝에 심어진 위치 추적기로 효원은 두 번 다시 서범익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서범익은 효원을 찾았음에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건 바로 효원의 곁을 맴도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그의 정식 작위는 필립 데이비드 대공으로, 왕위 서열로는 열두 번째인 벨기에 왕자였다.

    왕족이라……. 이번에는 더 큰 라이벌이 등장했다.

    “효원아… 설마, 그 남자에게 마음을 허락한 것은 아니겠지?”

    서범익은 쥐죽은 듯 누워 있는 효원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발끝까지 쩌릿쩌릿한 전기가 오는 듯 전신에 쾌감이 전해졌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서범익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토록 원하던 효원을 찾았는데,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강제로 한국으로 데려갈 수 있지만, 또다시 효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마를 맞대고 있자 코앞에서 가늘게 숨을 쉬는 연인의 살 냄새가 전해졌다.

    서범익은 부드럽게 효원의 입술 끝을 쓸었다. 3년간 그를 원했던 갈증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턱을 벌려 혀를 밀어 넣어 휘저었다. 뜨거운 살덩이들이 엉켰다. 타액과 타액이 섞이며 서범익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발기하기 시작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 효원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츄읍- 츱…….”

    농밀하고도 야한 젖은 소음이 초조함을 더했다. 맞잡은 두 손에 진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효원의 몸도 뜨거워졌다.

    희고 흰 백지처럼 깨끗한 효원이 아닌 상처로 얼룩진 연인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 아픔을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주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효원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안아 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결국 범익의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렸다. 효원이 떠난 뒤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그를 찾게 되자 흘러나왔다.

    “사랑해, 효원아. 사랑해… 사랑해.”

    눈앞에 아찔한 쾌감이 밀려왔다. 애무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서범익의 눈동자는 탁해졌다. 불규칙적인 호흡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하아, 하… 효원아.”

    흥분한 탓에 평소보다 더 빳빳하게 선 페니스를 효원의 팔뚝에 묻고 비볐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난 3년간, 범익은 효원의 사진을 보고 자위를 했었다.

    허상이 아닌 실체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를 탐할 수 있는 건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뿐이다. 혀로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으며 들썩였다. 이미 정액을 토했음에도 페니스는 아직도 꼿꼿했다.

    “효원아…….”

    뜨거운 숨을 뱉으며 허리를 들썩였다. 제 음성에 머릿속에 파고들어 강한 울림으로 퍼졌다. 효원의 몸 깊숙이 지독한 소유욕을 박아 넣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단단히 발기한 페니스를 쑤셔 넣고 제 마음껏 열망을 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혀로 입 안을 정신없이 핥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야릇한 감각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절박함과 아련한 한숨이 동시에 터졌다. 서범익은 손가락으로 효원의 허리를 더듬거리며 젖꼭지를 빨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입술에 힘을 뺐지만, 계속해서 핥는 통에 피부 곳곳엔 약간의 붉은 기가 돌았다.

    “넣고 싶어, 네 몸속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효원아. 으읏, 하아…….”

    서범익은 마취 가스로 인해 잠든 효원을 내려다보며 거친 호흡을 골랐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페니스를 효원의 뺨에 붙여 비볐다. 답답했다. 효원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장난스럽게 서로의 몸을 만지고 정원을 거닐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데이트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비밀 연애를 하느라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효원은 서범익의 정부라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

    비겁했다. 그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버지의 계략으로 효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을 늘 자책했다. 이제는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효원을 되찾기 위해 3년 간 미친놈처럼 일을 해서 권력을 쥐었다.

    “우리 사랑은 지금부터야.”

    다시금 서범익은 효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운 향기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아직 시기가 일렀다.

    “효원아… 이제 헤어지지 않을 거야. 다만, 그 전에 확인할 것이 필요하니까.”

    다시 한번 범익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개를 돌려 집안 곳곳에 걸린 사진을 확인했을 때, 서범익은 혹시,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애 아빠는 없었다. 효원과 아이 둘이 찍힌 사진뿐. 집에 있는 사진들 속에 그를 돕는 필립이라는 남자는 없었다.

    아기가 태어난 병원에 확인했더니, 임신 시기가 놀랍게도 저와 효원과 자신이 사귀던 시기였다. 다른 남자와 찍힌 사진을 봤을 땐, 결혼을 했을지 모른다고 오해했지만, 아니었다.

    그래… 다른 남자의 애를 낳을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그 아이는 제 아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어째서 혼자 아이를 낳고 숨은 거야?

    나를 못 믿어서? 내 사랑을 의심해서? 아직도 내가 미운 거야?

    서범익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잠깐이야. 아주 잠깐이니까…….”

    눈가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당장 으스러지게 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했다.

    범익은 효원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가슴이 절절 끓어올랐다. 그리고 억지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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