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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29화 (29/40)
  • chapter 29

    #29

    효원은 은행으로 가 집 주인에게 6개월 렌트비를 선지불을 했다. 그리고 간단한 생필품을 사 집으로 걸어갔다.

    은행 한 블록 뒤에 있는 화려한 주택들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나름 편안한 맨션이었다. 조금 낡았을 뿐 도둑이 들거나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호호, 추위에 입김을 불며 문을 열자 검은 물체가 문 앞에 누워 있었다.

    “야옹~~ 야옹~.”

    “배고프지? 알았어, 우유 줄게.”

    효원은 생필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서둘러 패티의 간식을 준비했다. 패티는 고양이였다. 집 앞에서 추위에 떠는 녀석을 데리고 와 가족이 되었다.

    고양이는 효원의 다리에 부드러운 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녀석의 털을 쓰다듬어 준 후 먹이를 주었다.

    “많이 먹어, 패티.”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효원은 침실로 들어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일과 살림을 병행하면서 아기를 키우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한 번 작업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5~6시간을 앉아 작품을 그리는지라 아기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효원은 필립의 소개로 페이가 싼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수 있었다. 베이비시터는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효원이 모르는 것을 옆에서 잘 가르쳐 주었다.

    오늘은 병원 예약 시간에 효원도 나가야 했기에 그녀 혼자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효원은 베이비시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병원이면 제가 갈까요?”

    - 아뇨. 지금 진료 마치고 약국이에요. 추운데 선생님은 집에 계세요.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고용한 사람이었던지라, 저보다 아이에 대해 잘 아는 베이비시터였다. 그래서 효원도 마음 놓고 그녀에게 아이를 맡겼다. 효원은 기지개를 활짝 펴며 몸을 세웠다.

    아이가 오기 전에 청소를 할 생각이었다. 효원은 창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소에 신경 쓰는 건 작업실이었다. 이 맨션을 얻은 이유가 작업실로 쓰일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과 작업실은 문 하나를 열면 이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물감 냄새가 아기에게 유해하지 않을까 싶어 특별히 별도 공간이 있는 집을 찾았다.

    집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지만, 작업실은 먼지가 수북했다. 한 번 작업을 마치면 늘 이 모양이었다.

    “쯧… 애 키우는 곳인데 이렇게 더러워서야.”

    이곳저곳 쓸고 닦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효원은 서둘러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에 넣고 시트의 먼지를 털어 냈다.

    퍽퍽-!

    먼지가 코로 들어와 기침이 났지만, 한참을 털고 쓸고 닦았다.

    한동안 청소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효원은 집으로 건너와 소파에 털썩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벌떡 일어났다. 효원의 입가가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베이비시터의 품에 안긴 귀여운 아이를 보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구, 우리 유리! 추웠어? 이리 와.”

    “마마.”

    유리가 효원에게 손을 뻗었다. 효원은 베이비시터의 허리에서 아기 띠를 빼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늦었죠? 퇴근하세요.”

    “아뇨. 조금 시간이 남았어요.”

    “괜찮아요. 손님이 오실 거라. 그만 퇴근하셔도 되요.”

    “손님요?”

    “필립이 올 거예요.”

    “어, 저도 필립 보고 싶은데요.”

    베이비시터는 한국인이었다. 안 그래도 가급적 한국인을 고용하고 싶었는데, 마침 프랑스에 거주 중인 한국인을 필립이 소개해 준 터라 다행이었다.

    그만큼 그녀도 필립을 잘 알고 있는지라 무척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기에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할 수 없었다.

    “저도 식사를 하라고 하고 싶지만, 다른 분들 굶을까 봐…….”

    “에휴, 그러게요. 저만 바라보는 다 큰 애기들이 넷이나 되죠.”

    “푸웃. 아저씨도 아기예요?”

    “흰머리가 날 때까지 밥 한 번 하는 것 못 봤어요.”

    그녀가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푸웃, 효원은 웃고 말았다.

    “어서 가세요. 기다리시겠어요.”

    “네. 그럼, 내일 올게요. 유리 약은 여기에 두고 가요.”

    효원은 유리를 품에 안고 토끼 모자를 벗겼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자 유리는 작은 발로 쉼 없이 뛰었다.

    “유리, 넘어져.”

    “마마! 마마! 저거. 저거.”

    “응?”

    유리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인형을 달라는 것이다. 오전에 세탁한 터라 말랐을 것 같진 않았다. 역시나 인형을 만져 보니 아직 털이 덜 말랐다.

    “축축해. 안 되겠다, 유리. 다른 인형 줄게.”

    “히잉… 싫어.”

    매일 물고 빠는 애착 인형이라 이이가 없는 틈에 세탁했는데 아직 마르지 않았다. 효원은 시무룩해진 유리를 품에 안고 뺨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을 쳤다. 금세 유리는 까르르 좋다고 웃었다.

    “예쁜 내 아기… 엄마는 유리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나 몰라.”

    “마마, 유리 좋아?”

    “그럼, 엄청 좋지.”

    “얼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우하하. 나도! 나도 사랑해, 맘.”

    눈에 넣어도 안 아팠다. 사랑스러웠다. 유리의 눈이 가늘게 접힐 때, 그의 모습과 꼭 닮아 범익이 보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유리를 보면서 그리움을 삭힐 수 있었다.

    효원은 지금 행복했다. 새로운 곳에 정착을 했고, 큰 부자는 아니어도 충분히 돈을 벌 능력은 있어 만족스러웠다.

    아이는 병원을 다녀오느라 피곤했는지,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효원은 아기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옆으로 패티가 훌쩍 뛰어와 아기의 등에 등을 붙였다. 귀여운 녀석이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추울까 봐 온기를 나눠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효원이 부르는 자장가가 침실에 조용히 울렸다.

    * * *

    JK 그룹 본사의 특수 비서실.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들을 특수 검사라고도 불렀다. 지난해 서범익은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손을 댄 사업마다 큰 성과를 얻은 것은 물론이고, 제일 크게 추진하고 있던 IT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비상한 머리와 타고난 사업 수단은 모든 이들의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났다.

    올해 서른.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되었지만 그를 고깝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든 직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본사 로비를 가로지르는 서범익의 훤칠한 외모에 사람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향해 존경을 표현했다.

    다만 그가 회장이 되고 신설된 특수 비서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가 회장의 명패를 달자마자 신설된 부서는 비밀스러웠다. 직원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알려진 것은 외부에서 초청된 인사 열 명으로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하루에 한 차례, 서범익은 특수 비서실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주관했다.

    “보고 하십시오.”

    책상 가운데에는 온갖 서적과 자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책상 앞에 열 명의 남자들이 서서 긴장하고 있었다.

    “흠… 우선, 이 작품을 보십시오.”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겹겹이 쌓아 놓은 자료들 중앙에는 LED 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으로 몇 개의 작품을 비추자 커다란 그림이 하나씩 나왔다. 그것은 모두 인물화였다.

    “인물화가 아닙니까? 이효원은 인물화가 아닌 풍경화를 그립니다. 그리고 이 화법은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어도, 빛이 아닌 어두운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있는데… 무엇이 의심스럽다는 것입니까?”

    서범익은 제 앞에 보이는 인물화를 내려다봤다. 강렬하고 어두운 색채가 효원의 화법과는 정반대의 성질이었다. 그의 섬뜩한 눈빛에 잔뜩 겁을 먹은 남자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을 한 이유입니다. 보시다시피 과거 이효원의 화법과 지금 화법은 완전 정반대의 성질의 갖고 있죠. 빛이 아닌 어두운 색이 많이 혼합된 색이지만, 이곳에 약간의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뭡니까?”

    서범익은 효원이 그를 떠난 이후로 계속해서 찾았다. 범익을 비롯해 친구, 하물며 이설에게까지 연락을 끊은 무심한 연인을 찾는 중이었다.

    서범익이 이설을 톱스타로 키운 건 어디선가 효원이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목을 죄고 죽이고 싶었지만, 벌하는 것은 효원을 찾은 후였다.

    효원을 찾으려면 이설을 감시해야 했다. 하나뿐인 혈육이니 언제든 그녀에게 연락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하니 초조했다. 몇 년을 추적해도 효원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효원이 지금껏 신분 세탁을 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분명, 누군가 조력자가 있었다. 그것도 거물급의 사람이 효원을 돕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효원을 돕는 사람에게 질투심이 솟았다. 매번 허탕을 치게 하는 걸 보니,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효원을 찾지 못하게 방해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효원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사업으로는 승승장구를 하고 있으나 서범익의 가슴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렸다.

    하루라도 술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가 그리워 술을 마시고 러트사이클이 되면 억제제를 두 배로 맞았다.

    단 6개월간의 치료로 억제제 부작용은 사라졌다. 그러나 반대로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억제제 부작용보다 몇 배로 고통스러웠다.

    수많은 밤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그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한심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고, 먹어도 먹는 게 아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지만, 서범익의 가슴은 시커멓다 못해 문드러지고 진물이 흘렀다.

    그는 미친놈처럼 일에 몰두했다. 가장 정상에 오를 때까지 일에 파묻혀 살았다. 효원을 다시 찾는 날, 누구도 그를 건들지 못하게 최고가 되어야 했다. 회장보다 더 높은 권력을 쥐어야 했다.

    결국 서범익은 회장을 뛰어넘었다.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것에 몇 배를 갚아 주었다. 서범익은 아버지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가 사적으로 빼돌린 비자금을 정식으로 문제를 삼았고, 그 결과 스스로 회장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른 이들과 당당하게 겨루어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다.

    이제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서범익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헛다리를 짚고 있는 화가들을 쏘아봤다.

    “화가들에게는 각자의 색채에 맞게 작품을 표현하지만, 버릇은 감출 수 없습니다.”

    “버릇이라…….”

    “지금껏 이효원의 고유의 채색법을 찾는 방식으로는 모두 허탕을 쳤습니다. 다만, 회장님이 주신 정보에 따르면 2년 전에 이효원은 손목 부상으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하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 예상합니다. 거기다가 화법도 손목에 힘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과거 그림들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그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죠. 그래서 지난 2년간 그것에 중점을 두어 조사에 착수했고요. 한데 조사를 진행하면서 그래도 화가라면 그만의 버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 자료들을 훑어보던 중 인물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빛이 아닌 어둠이 강조된 그림이라고 해도 힘을 빼고 그리는 채색법이 같습니다. 또한 보기에는 그냥 그저 흔한 인물화처럼 보이지만, 초반 밑그림을 스케치를 한 뒤, 색을 입혔습니다.”

    효원도 밑그림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만 명의 화가가 있는데, 같은 버릇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효원은 아니다.

    “흠…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뭔가… 이효원만의 표현법이 있을 법한데…….”

    단 하나뿐인 특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인력을 동원해도 정보를 모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범익은 몇 개의 초상화를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효원은 서범익의 인물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회장이 그의 앞에서 찢었지만, 집에서 나온 후 그는 다시 한번 서범익의 초상화를 그렸었다.

    그때, 범익은 자신을 그리는 효원을 빤히 바라봤었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보이는 몰입감을 지켜보았다.

    범익은 여러 가지 추리를 해 봤다. 효원의 성격상,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추적을 피한다고 해도, 경제적으로는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가 전에 효원의 뒷조사를 했을 때 느낀 건 생활력이 강한 남자라는 것이었다. 혼자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알바와 공부를 멈추지 않았었다.

    그는 분명 지금도 스스로 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던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까… 효원은 그림을 팔아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면 정식 화가로 데뷔하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백이면 백 상업 화가일 것이다. 그리고 상업 화가로서 돈을 벌기에는 프랑스가 적합했다.

    프랑스로 간 것까지는 유추했지만, 사람을 찾는 건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화가의 얼굴을 일일이 대조해야 했다. 지금껏 허탕을 친 게 백 명에 가까웠다.

    서범익은 깍지를 끼던 손을 풀어 턱에 걸쳤다.

    ‘상업 화가라… 초상화…….’

    그러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은 상업 화가들 중에서도 누드를 그리는 화가들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상업 화가들 중에 인물화만 그리는 화가를 찾아보십시오. 그것도 최근 3년 안에 작품을 많이 그려 낸 화가를 집중적으로 찾아 분석합니다.”

    “네, 대표님.”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특수 비서실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서범익의 연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빛의 화가 이효원…….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에 사람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둘둘 말린 자료들을 펴 화법을 분석했다. 무서운 침묵을 뚫고 서범익은 차갑게 읊조렸다.

    “기필코 찾는다. 이효원…….”

    * * *

    오후 5시가 되었다. 효원은 필립을 기다리며 그가 어떤 한국 요리를 사 올지 기대감에 흠뻑 젖었다. 요리에 소질 없는 효원을 위해서였지만, 필립도 한국 음식을 잘 먹었다.

    숙성된 김치와 찰밥, 불고기, 때론 빈대떡을 사 오기도 했다. 어디서 그렇게 한국 음식을 잘 구하는지… 찌개까지 끓여 와 저녁을 먹기도 했다.

    ‘아… 유리, 한국 식당에도 데려가 봐야 하는데…….’

    효원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을 피했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여기로 오기 전에 머물렀던 도시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기웃거린 적도 있어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효원은 철저하게 제 신분을 숨겼다. 이설은 물론이고, 승주와 우혁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새롭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도 제 사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제 목숨을 구해 주고 지금껏 곁에서 도움을 준 필립에게도 왜 한국을 떠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밖으로 제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도와주었다. 신분 세탁을 할 때마다 새로운 여권을 주었다.

    그렇다 보니 파리에서 효원의 과거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과거 효원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았던 빛의 화가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필립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의심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림의 화법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빛이 아닌 어둠으로 바꾸고, 어두운 슬픔과 고독으로 채워 넣었다. 풍경화가 아닌 인물화만 고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후… 피곤하다.”

    새벽에 마무리를 한답시고 조금 무리를 했더니 손목이 욱신거렸다. 팔목에 힘을 너무 줬던 탓일까? 파스를 붙이려는 생각에 효원은 서랍을 뒤적거렸다. 복잡한 서랍을 한참을 뒤적거리자 손에 익숙한 물건이 잡혔다.

    “휴대폰…….”

    이제는 단종된 휴대폰이 효원의 손 안에 잡혔다. 이 휴대폰은 승주의 것이었다. 승주가 억지로 쥐여 준 그의 휴대폰. 지금은 해지를 한 상태라 영영 울리지 않을 전화이기도 했다.

    효원은 전원을 켰다. 그리고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사진을 쳐다보았다. 대부분 승주와 우혁의 사진이었다. 그의 셀카로 도배가 되어 있었지만, 간혹 제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범익의 약혼녀 생일 파티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유일하게 서범익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진이었다.

    서범익과 효원이 찍혀 있는 사진도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 싫다고 하면서도 반달처럼 휜 효원의 눈… 사진 속 두 사람은 너무도 행복한 연인이었다.

    효원은 화면의 크기를 확대해 서범익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투투툭… 이제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야옹~ 야옹~~.”

    어느덧 패티가 다가와 효원의 뺨을 핥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복받쳐 오는 그리움에 고양이를 품에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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