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28
인자하고 부드러운 눈빛, 그 속에 가득한 야망. 서 회장은 다시 범익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다행히, 신부의 집안이 서범익의 실수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만큼 민성 그룹은 서범익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문제는 녀석의 곁에 버티고 있는 이효원을 어떻게 치워 버리느냐였다.
어렵지 않았다. 행운은 제 손에 있었기에 그 기회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윽고, 빌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회장과 마주선 그녀를 보며 미소 짓는다.
“좋네, 자네가 톱스타가 되게 지원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잘 했네.”
“서초동에 자네가 살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앞으로 그 집을 쓰면 되겠네. 그래도 자네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군.”
“그럼요. 어울리지 않은 옷은 탐하지 않는 법이지요.”
호탕하게 웃는 여자는 바로 이설이었다. 회장은 이설을 이용했다. 그녀를 이용해 둘을 이간질했고, 결국 제 작전이 먹혀들었다.
회장은 둘이 몰래 결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러 출장을 떠나는 척 꾸몄다. 그리고 총각 파티에 초대된 서범익의 친구 한 명을 매수했다.
그에게 와인을 건네고 서범익의 잔에만 약을 탔다. 그 약은 특수한 약으로 미약하게 환각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환각 상태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에 노출되면 그것으로 게임 끝이었다. 다만, 예상 외였던 점은 서범익이 그 상태에서도 끝까지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삼 서범익의 정신력에 놀랐다.
그날, 서범익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키스와 애무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상대가 효원이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낀 것 같았다. 잠시 멈칫하던 서범익은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환각이 아닌 잠에 빠진 것이다. 나머지는 이설의 연기였다.
배우가 꿈인 이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문 틈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효원이 기겁을 하며 도망칠 정도였으니까.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둘을 떼어 놨다고 생각하니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이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서범익의 주치의가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나?”
“다행히 병이 고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하하하! 이거야 말로 기다렸던 결과 아닌가? 억제제만 통해도 만족하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좋아! 다 좋네. 하하하.”
주치의는 축하한다고 했으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 오메가 없이 오랫동안 지속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될 거네. 그렇다고 봐. 그럼!”
“당분간 예민할 것입니다. 첫 이별인 만큼…….”
“원래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잊히는 법이지. 특히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되네.”
회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넓은 빌라에 크게 울렸다.
* * *
서초동 HR 빌딩타워. 이설은 50층이 넘는 고층 오피스텔 앞에 섰다. 이렇게 비싼 집이 제 것이라니… 더군다나 앞으로 톱스타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행복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슴이 설렜다. 그곳에는 평소 이설이 갖고 싶었던 명품 백과 옷이 한 가득이었다. 50평이 넘는 오피스텔을 채운 가구는 모두 명품이었다.
“이게 다 얼마야?”
이설은 명품백을 팔에 주렁주렁 매달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넓은 소파에 풀쑥 누웠다.
그때, 누군가 벨을 정신없이 울렸다. 신경질적인 벨소리에 좋았던 가분이 가라앉았다.
“누구야? 신경질 나게.”
이설이 잔뜩 날이 선 얼굴로 문을 열자마자 팔목이 잡혔다. 팔목을 잡은 사람은 서범익이었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이설의 팔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순간, 이설은 공포심에 질렸다. 핏발 솟은 그의 눈빛은 공포 영화 속에 살인자와 같았다.
“…네가 아버지와 작심해 날 엿 먹여?”
“누가 엿을 먹였다고 그래요? 실수한 건 그쪽이에요.”
“뭐야?!”
쾅!
서범익은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이설은 바들바들 떨며 경악에 찼다.
“효원이 어디로 빼돌렸어?”
“몰라요.”
“너에게는 말을 하고 떠났을 거 아니야?”
“전혀요. 저와도 인연은 끊을 각오로 갔거든요.”
그의 표정이 볼 만했다. 제 앞에서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그와 저는 잤다. 그것은 효원이 도망친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빠진 서범익은 괴로움에 소리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벽을 쾅쾅 치며 욕설을 뱉었다.
“…씨발! 씨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모두 다 각오해!”
* * *
효원이 눈을 뜬 건 다음 날이었다. 효원은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나를 구했던 것 같은데. 누구지? 그 금발의 푸른 눈의 남자는.’
그때, 병실 문이 슬며시 열렸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효원이 보았던 그 남자였다.
『깼어요?』
『누구시죠?』
『이거, 서운하네요. 생명의 은인인데.』
『아, 그럼 당신이.』
『맞아요. 자살하려는 당신을 살렸어요.』
『자, 자살이라뇨?』
효원은 깜짝 놀랐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었나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때, 당신 표정이 꼭 죽을 것처럼 보였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은혜 꼭 갚아요.』
『…네?』
효원은 설핏 웃는 남자의 미소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다정한 남자였다. 그가 효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정식으로 인사하죠. 제 이름은 필립이에요. 그쪽은 이효원, 맞죠?』
그때,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시원한 금발의 미남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쳤다.
효원은 그의 손을 잡아야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그가 효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네요.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으려면 지금이 바로 그때예요.』
* * *
프랑스 파리 12월의 겨울.
상점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화려한 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프랑스 날씨는 한국과 달리 영상 3도에서 4도를 왔다 갔다 했다. 일교차 폭이 작아 한국의 겨울처럼 춥지는 않았지만, 추위에 약한 효원에게는 매서운 겨울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두터운 점퍼를 입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렇기에 적당한 두께의 점퍼를 입고 모자를 썼다. 두꺼운 털실로 짠 목도리를 칭칭 감자, 얼굴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건 갈색눈동자 뿐이었다.
“후… 추워.”
파리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추위에 근육이 경직되며 몸이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오늘따라 옆구리에 낀 캔버스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걸었다.
『리, 오랜만이야-.』
『어? 필립! 언제 왔어요?』
『오늘 아침에 도착했지.』
필립이 효원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효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3년이 지나도 유럽식 인사법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효원은 필립과 나란히 상점을 거닐었다.
『전시회 축하해요. 기사 뜬 거 봤는데, 꽃이라도 보낼 걸 그랬나 봐요.』
『꽃은 무슨. 난 이렇게 리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
그가 웃자 화려한 금발이 빛났다. 필립은 효원을 파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리라며 생활비를 벌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태평양 한 섬에서 만난 새롭운 인연은 3년간 이어졌다.
『이번에는 대충 팔지 말고 꼭 제값을 받아. 그 능구렁이 영감, 작품 보는 눈이 전혀 없어서… 쯧.』
『아직 제 실력이 여기까지예요… 칠천 유로면 충분해요.』
『리, 네 맨션은 너무 낡았어. 이번 기회에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글쎄요. 돈을 좀 더 모은 후에요.』
파리의 물가는 한국보다 높았다.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도망쳐 온 상황이라 고급 맨션을 얻기에는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림을 그려 팔고 있지만 당장 먹고사는 것이 바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효원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가지고 있던 돈으로 작은 맨션을 얻었지만,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다행히도 상업 화가로서 빛을 봤지만, 정식 데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아주 화가로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꾸준히 작품을 그리고 중간중간 의뢰를 받아 생활비를 벌었다. 1년에 서너 작품은 팔고 나머지 작품은 모아 두고 있었다.
『언제까지 다른 이름으로 살 거야? 작품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
『계속요.』
이렇게 작품을 팔기 위해 작품을 들고 왔지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단서는 남겨 두지 않았다. 서범익이 저를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3년 간 많은 것이 변했다. 서범익은 JK 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설은 자신이 떠난 지 1년 만에 톱스타가 되었다. 그 후로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어느 날은 두 사람이 공개 석상에서 찍힌 사진을 봤는데,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자신이 떠나자 여러 사람이 행복해진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손목이 욱신거렸다. 2년 전, 효원은 팔목을 심하게 다쳤다. 그로 인해 하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라 봐야 겨우 5시간 남짓이었다. 그 이상 그림을 그리게 되면 이틀 내내 팔목이 끊어질 듯 아파 오기에 나름 규칙을 정해 놓고 작업에 몰두했는데도… 아팠다.
『리, 네 그림은 어둠보다 빛이 더 어울린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분명 또 검은색이 많이 배합된 색채겠지?』
『빛은 어울리지 않아요. 아니… 저는 빛을 표현할 수 없어요.』
화가에게는 자기만의 특징이 있었다. 효원의 그림은 빛에 강하다. 누구도 효원만큼 빛을 표현할 수 있는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효원은 서범익을 떠나면서 빛을 잃었다. 두 번 다시 과거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신분을 속이고 파리로 숨어들었기에 더더욱 제 색채를 숨겨야 했다. 과거를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해서라도 빛을 표현해서는 안 됐다.
『오늘 저녁 식사 어때?』
『미안해요. 아이가 아파서… 오늘도 겨우 외출을 했어요.』
『흠. 또 아픈 거야? 어디가?』
『감기예요.』
효원에게 생각지도 못한 가족이 생겼다. 효원은 이곳까지 와 그림을 지킨 것처럼 그 아이를 지켜야 했고, 온갖 정성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불현듯 그때가 떠올랐다.
그를 떠난 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임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마지막 섹스를 했던 날 임신이 된 모양이었다.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던 건 입덧 초기 증세였다. 임신을 확인한 후 얼마나 놀랐던지.
효원은 배 속에 그와 제 아이가 자란다고 생각하니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범익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효원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장이 효원의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장 아기를 빼앗아갈 것 같았다. 확실했다. 몇 번이고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효원은 아이의 존재를 밝히지 않고 이름 없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상업 화가로 성공했다.
『음. 몇 개월만이라 보고 싶네. 그럼 집으로 맛있는 거 사 가지고 갈게. 괜찮지?』
필립이 효원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효원은 제 신분을 감춰 주는 필립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도움받는 입장에서 단호하게 잘라내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친구 그 이상을 넘지 않고, 효원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손을 내밀었다. 착한 남자였다.
『리… 나, 유리 보고 싶어. 응?』
그가 귀엽게 졸랐다.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는 늘 그 자리에서 효원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도 푸른 눈을 반짝이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요, 7시쯤에 오겠어요?』
『오케이.』
그렇게 필립과 저녁 약속을 한 뒤 헤어졌다. 효원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프랭클린 뒤주르벨트역 부근을 걸었다. 시원하게 뻗은 가로수 길과 몽테뉴거리의 불가리 매장에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우아한 정원이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프랑스 및 전 세계의 명품 브랜드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패션의 본고장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조금 후미진 골목으로 돌아가면 ‘샤즈멜랑’이라는 상점이 보였다. 이곳은 주로 상업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에게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작품을 매입하는 곳이었다.
짤랑, 아름다운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효원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주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헤이, 미스터 리!』
손가락 열 개에 각기 다른 보석을 끼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효원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효원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그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그림을 감싼 갈색 포장지를 뜯은 덩치는 이번에도 효원의 작품을 흡족해했다.
『오오!! 뷰리풀…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풍만한 나신을 그린 효원은 작품 속 여자를 보며 침을 흘리는 덩치를 쳐다보았다. 효원은 한국을 떠난 이후로 풍경화를 그리지 않았다. 인물화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고 의뢰를 받았다.
효원의 작품을 보며 극진한 호평을 한 덩치는 곧 효원에게 그림 값을 지불했다. 약속했던 금액보다 천 유로 더 많은 8,000유로였다.
『많은데…….』
『미스터 리, 작품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많아! 천 유로는 팁!』
주인은 슬며시 윙크를 날렸다. 곧이어 그가 서랍을 뒤적거려 다음 작품을 의뢰했다. 사진 속에 남자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은 듯 했다.
『이번에는 잘 그려줘야 해. 중요한 분이거든… 후후후.』
『귀족이에요?』
왕정 통치 시대가 아니더라도 귀족은 여전히 존재했다. 특히 유럽 곳곳에서 귀족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사진 속 남자도 높은 귀족으로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푸른빛과 녹색빛이 적절하게 섞인 귀족의 전통 의상과 흡사했다.
『아주~ 귀한 의뢰야. 흠흠… 솔직하게 말할 게. 벨기에 왕족이라고…….』
『그렇게 귀한 분의 초상화를 제가 그려도 되는 거예요?』
이름도 없는 화가인 효원이 의뢰받기에는 너무도 거물급 작품 의뢰였기에 꺼려졌다. 그러나 그런 효원의 망설임은 선급으로 지급된 만 유로에 쉽게 꺾여 버렸다. 떠밀리다시피 왕족의 사진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효원은 쫓겨나다시피 상점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매몰찬 바람이 불었다. 그에 효원의 머리칼이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렸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