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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27화 (27/40)
  • chapter 27

    #27

    서범익은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효원을 떠올렸다. 내일이면 드디어 결혼이었다. 회장이 없는 틈을 타 몰래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가장 믿음직한 친구들을 초대했다. 물론 그중에 효원의 손님들도 있었다.

    뒤늦게 우혁과 승주 커플이 도착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한 녀석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오! 먼저 아버지 뒤통수를 친 승주 등장이요.”

    “오랜만이에요. 형.”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 하하하!”

    서범익은 승주와 꽤 친해 보이는 녀석을 보다 우혁을 힐끔거렸다. 손을 꾹 잡은 커플은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저에게 충고를 하더니, 우혁도 승주를 선택함으로써 많을 것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물론 승주가 포기하는 것이 더 많겠지만…….

    한 녀석이 홈바에서 와인을 하나 들고 나왔다.

    “야, 이거 얼마 전에 유럽에서 공수해 온 건데, 오늘 밤 마셔 볼래? 엄청 비싼 거거든.”

    “뭐야?”

    그가 실실 웃으며 여러 개의 와인 잔에 술을 따라 돌렸다. 그는 마치 와인 잔에 주인이 있다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서범익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났다.

    “향은 나쁘지 않네?”

    “내가 특별히 공수한 거야. 총각 파티에 이게 빠지면 안 되지. 그럼!”

    “뭔데 그렇게 침을 흘려?”

    “연인들이 마시는 와인이야. 신혼여행 때 마시는 것보다 오늘이 좋을 거 같아서 특별히 따는 거다. 이거 마시면 기분 끝내주거든. 엄청 비싸다. 내 오늘 소중한 친구를 위해 가져왔어. 상대가 아주 뿅 갈 거다.”

    “흠… 난 굳이 이런 걸 안 먹어도 훌륭한데.”

    매번 섹스를 버거워하며 금세 지치던 효원을 떠올리며, 서범익은 농밀한 미소를 흘렸다. 투명한 술잔을 보며 한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남자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만 일어나지. 신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거든.”

    “입이 찢어지네. 찢어져. 하하하”

    “그래, 가라 가. 하하하.”

    저를 놀리는 친구들을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윗층으로 발걸음을 올렸다. 제법 술을 마신 후라, 취기가 돌았다. 기분 좋게 오른 취기라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신 술이 효과가 도는지, 점점 단단해지는 페니스를 느꼈다. 빨리 효원을 안고 싶었다. 화르륵 솟는 열기에 서범익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윽고 효원이 잠들어 있을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후끈한 공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몸이 뜨거웠다. 효원을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사물이 흐릿해졌다. 환상에 잠긴 듯 몽롱한 기분으로 불이 꺼진 방을 더듬거렸다.

    그때부터 범익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다. 바닥에 점처럼 떨어지는 바지, 마지막으로 브리프를 던졌다. 달큰한 효원의 향기가 콧속에 훅, 끼쳤다. 불이 꺼진 침대에 누운 그를 보며 범익은 입술을 히죽였다.

    “이리 와. 효원아…….”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서범익이 손을 뻗자 효원이 눈웃음을 치며 제 품에 버럭 안겼다. 피부에 감도는 부드러운 살, 페로몬의 향기에 취해 버렸다.

    작은 입술을 냉큼 베어 물었다. 여자의 젖가슴처럼 볼록한 가슴이 환상처럼 다가왔다. 서범익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서범익은 코를 묻고 그의 향을 깊게 맡았다.

    한 점의 의혹도 없었다. 서범익의 키스와 함께 하이톤의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울렸다.

    * * *

    드디어 술자리가 끝나고 다들 방에 들어갔다. 우혁과 승주는 1층 주방으로 가 물을 마셨다. 아무래도 좀 전에 마셨던 와인이 꽤 자극적이었던지라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놨다.

    그때였다. 위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서 눈물이 범벅인 상태로 내려오는 사람은 둘의 친구였다. 효원은 휘청휘청 내려오더니 힘겹게 입을 뱉었다.

    “제발… 선배…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 * *

    푸르스름하게 동이 텄다. 더 잠을 자고 싶었지만, 두개골이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잠이 깼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새웠다. 얇은 시트가 떨어지자 시선은 당연히 옆으로 향한다. 곁에 온기를 느낌에도 기분이 저조했다.

    이상했다. 찝찝한 기분은 바로 이 향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 퍼진 페로몬이 효원의 페로몬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달라?’

    흠칫! 서범익은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간밤에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서범익의 얼굴은 점차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피부 위로 퍼지는 끔찍한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악, 시트를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설이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

    쿵!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설과 그리고 같이 옷을 벗은 제 모습에… 범익은 아득해졌다.

    범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설을 바라봤다.

    바보처럼 제 모습과 이설, 그리고 흐트러진 시트를 보다 미친놈처럼 벌떡 일어났다. 드로어즈와 가운만 걸친 채 허겁지겁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목청껏 효원의 이름을 불렀다.

    “이효원! 효원아!”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효원은 없었다. 그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귀걸이와 휴대폰만이 이별을 예감하게 했다.

    그 즉시 서범익은 벽을 향해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빠삭, 둔탁한 소음과 함께 휴대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조용한 새벽에 울려 퍼진 둔탁한 소음에 모두가 잠에서 깼다. 경호원이 헐레벌떡 거실로 뛰어나왔다. 서범익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효원, 찾아. 당장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 * *

    인천항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4시였다. 효원은 비행기가 아닌 크루즈를 예약했다. 출항이 오전 5시 30분이라 차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러다 답답해져 차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효원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그때, 저쪽에서 우혁과 승주가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마셔. 좀 진정될 거야.”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승주 선배.”

    “난 괜찮아. 다른 것도 아니고 네 부탁인데. 그런데 난 이렇게 도망쳐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서범익 난리 날 텐데.”

    “아뇨. 오히려 이게 편해요. 저도 확고하게 마음을 접었으니까요.”

    “…난 내 귀로 듣고 그게 사실인지 믿기지 않아. 어떻게 네 누나와.”

    승주가 파르르 떨었다. 셋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넓은 바다를 응시했다.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은 태양의 빛을 머금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초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따뜻한 공기와 바다 특유의 짠내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쓸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괜찮겠어?”

    “당장은 힘들겠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믿어요.”

    효원은 우혁의 시선을 뒤로 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듯 하늘을 보고 있다 눈물이 흐르면 그대로 목 안으로 삼켜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목이 막혔다.

    그가 그렇게 쉽게 다른 오메가를 안게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효원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어떻게 그녀에게 그럴 수 있는지…….

    효원은 지금껏 봤던 범익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 오히려 속 편한 거야. 회장님이 몰래 결혼한 사실을 알고 진노할 일도 피하고…….’

    효원은 서범익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가 실수를 했든 아니든 누나와 잤다면 이미 효원은 그와 이뤄질 수 없었다.

    ‘원래 내 꿈을 찾아가는 거야. 화가가 되는 꿈…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꼭…….’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며 눈가가 후끈거렸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지만 효원은 젖은 눈을 꾹꾹 누르기만 했다.

    효원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양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여린 어깨에 타인의 손길이 닿았다. 우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떠나도 연락하는 거 잊지 마. 힘들면 언제라도 전화 해.”

    * * *

    효원은 승주가 주는 도움을 고맙게 받았다. 승주가 급하게 마련해 준 돈을 가지고 배에 올랐다.

    뱃고동이 크게 울리자 효원은 육지에 남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점이 되자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쓰는 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풀썩, 침대에 눕자마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효원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끝난 제 사랑을 아파했다.

    * * *

    얼마나 잤을까?

    종일 잠만 잔 것 같았다. 그동안 못 잤던 것을 실컷 자고 일어났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남태평양 섬이었고, 그곳에서 몰디브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몰디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효원은 ** 섬으로 들어가는 경비행기를 탔다.

    목적지가 따로 없었던 효원은 몰디브 공항에서 눈에 띄는 섬 이름을 발견하고 향한 것이다. 그 섬은 언젠가 가볼 곳으로 꼽아 놓은 곳이었다.

    이윽고 경비행기가 작은 공항에 도착했다. 효원은 가방을 둘러메고 내려섰다.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지은 지 오래된 호텔이 보였다. 택시에서 내린 효원은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 전에 바다를 향해 걸었다.

    터벅, 터벅, 걷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효원의 눈앞에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졌다. 그러자 우울했던 마음이 단숨에 뻥 뚫렸다. 아름다운 바다와 마주하자 절로 탄성이 터졌다.

    섬은 바다와 환상적으로 조합을 이뤘다.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수상 리조트는 마치 투명한 바다 위를 떠 있는 것 같았다.

    ‘예쁘네… 평화롭고.’

    효원은 무작정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누를 타는 비치 바가 보였다. 카누를 타기 위한 관광객들이 시야에 잡혔다. 왠지 카누를 타고 싶어졌다. 저 카누를 타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범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맹렬하게 들끓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겨우 37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그가 보고 싶어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다.

    그때, 한 관광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효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효원은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대여소로 가 돈을 지불했다.

    늦은 오후라 대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효원은 짐을 맡겨 두고 카누를 탔다. 그리고 노를 힘차게 휘저으며 바다로 향했다. 오직 에메랄드 빛 바다를 응시한 채…….

    투명한 바다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바다 한가운데는 화려한 산호와 작은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녔다. 절로 시선이 빼앗겼다.

    효원은 계속 물속을 바라봤다. 화폭에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바다는 효원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효원을 끈질기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효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가 조금씩 기우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바닷속만 바라봤다. 이름 모를 화려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헤엄쳤다.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으로 이동을 하는 물고기는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한 무늬가 있었다. 레이스처럼 넓게 퍼진 아가미도 예쁘다.

    저조했던 기분이 한껏 풀어졌다. 투명한 바다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그러워지며 모든 슬픔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바다를 바라봤다. 그 사이 카누를 타던 대부분의 사람이 해변으로 돌아갔다. 하늘을 보니 해가 수평선에 걸려 있었다. 붉게 저물어가는 노을조차 아름다웠다.

    효원은 저도 모르게 하늘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몸이 기우뚱하더니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꾸륵, 꾸륵, 꾸르르르…….

    몸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수영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바닥으로 가라앉은 효원은 멀어지는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때쯤, 누군가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효원을 향해 정신없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효원은 몹시도 아팠다.

    * * *

    필립은 오랜만에 휴가를 보내려고 섬으로 들어왔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고 몰래 섬으로 왔다. 평소 카누를 타는 것을 즐기던 그는 오늘도 카누를 타기 위해 바다로 나온 참이었다.

    돈을 지불하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한 동양인이 카누 대여소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작은 머리와 하얀 얼굴이 예뻤다. 적당한 비율을 이목구비와 기다란 목이 미적 감각이 탁월한 필립의 눈을 사로잡았다.

    확실히 제 취향이었다. 취향도 취향이었지만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페로몬에 더 놀랐다.

    ‘이런 외국에 매력적인 오메가라니…….’

    우성 알파인 제 몸을 이렇게 흔들 정도라면, 페로몬이 짙은 오메가가 확실했다. 저런 오메가가 왜? 다 죽어 가는 슬픈 얼굴로 혼자 다니는 거지?

    필립은 계속 그를 바라봤다. 왠지 그의 모습이 많이 위태로워 보여 신경이 쓰였다. 넋이 나간 듯 바다만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걸렸다.

    ‘그런데, 어디서 봤던 남자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눈에 익었다. 필립은 저도 모르게 계속 그만 바라봤다. 그러다 그가 카누를 가지고 바다로 나가자, 저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혼자 두면 큰일이 날 것 분위기라 그의 근처에서 지켜봤다.

    뭔가 일을 낼 것 같아 주시하긴 했지만, 그가 바다로 뛰어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필립은 깜짝 놀랐다.

    ‘자살! 이곳에서 자살을?’

    그 순간 필립 또한 풍덩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헤엄을 쳤다. 남자는 힘을 주고 있는 듯 바다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필립은 손발을 휘저었다. 이를 악 다물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슬아슬하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그의 몸을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다.

    안 돼……!

    필립은 그의 몸을 잡고 바다 위로 올렸다. 어렵게 바다 위로 올라오게 했지만, 카누가 멀리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변까지 사람을 끌고 가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젠장!』

    그때, 배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필립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경호원이었다.

    『필립 경!』

    『위로 올려! 어서!』

    필립이 명령하자 경호원들이 남자를 끌어 올렸다. 필립은 배 위로 올라타 남자의 뺨을 툭툭 쳤다.

    그런데 남자는 숨을 쉬지 않았다. 덜컥, 지금껏 살아온 동안 이렇게 무서운 적은 처음이었다. 남자가 죽는 게 끔찍한 비극처럼 생각되었다.

    남자가 배 위에 죽은 듯 늘어졌다. 그 즉시 필립은 효원의 가슴을 압박했다. 기도를 확보한 뒤 그의 입에 숨을 깊게 불어넣었다. 심장을 압박하며 심폐소생술에 정신을 집중했다.

    『숨 쉬어! 이봐!』

    필립은 계속해서 효원의 코를 잡고 숨을 뱉었다. 그러나 남자는 쉽사리 숨을 쉬지 않았다. 파랗게 질려 가는 남자처럼 필립 또한 질려 갔다.

    『경!』

    『헬기 대기시켜 놔. 의사를 불러. 어서!』

    숨이 모자랐다. 지친 필립 또한 숨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남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필립은 숨을 불어 넣고 가슴을 압박하며 계속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그런 그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남자의 숨이 트였다.

    “콜룩콜록… 쿨럭- 하아하아.”

    남자의 입을 타고 물과 기침이 쏟아졌다. 급하게 숨을 내쉬는 효원의 가슴이 큰 폭으로 움직였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시뻘겋게 충혈된 필립과 눈과 마주한다.

    “누구… 세요?”

    * * *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필립은 그의 가방에서 여권을 찾았다. 그리고 바로 사람들에게 그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몇 시간 후 그의 신분을 조사를 마쳤다.

    역시, 익숙한 것 같더니…

    작년 한국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화가였다. 필립도 화가라 각기 세계에서 열리는 대회의 수상 작품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이 이효원의 그림이었다. 빛과 어둠을 적절하게 사용해 표현하는 기법이 렘브란트와 비슷했다. 아직 완벽한 스킬을 구사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보석이 너무도 매력적인 오메가라는 점도 놀라웠다.

    필립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이 남자가 왜 혼자 이곳으로 와 자살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호감이 갔다.

    필립은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수액과 영양제가 섞인 링거를 맞은 효원의 호흡이 점차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필립은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것은 서툴렀다. 뭐든 돈으로 해결하고 입을 열면 제 몸처럼 움직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제 손으로 하고 싶었다. 그를 간호하고 음식을 먹이고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후…….”

    필립 또한 피곤에 지친 몸이었지만, 그를 간호하는 이 시간을 놓고 싶지 않았다.

    솨- 솨솨-.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귓가에 잔잔하게 퍼졌다. 아름다운 파동과 함께 효원의 페로몬이 육체적인 피로를 말끔하게 없애 주는 것 같았다.

    효원의 숨소리를 듣다 보니 편안해졌다. 그리고 슬며시 잡은 손도 따뜻했다.

    ‘누가 그를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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