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26
며칠 후, 서범익의 차를 타고 별채로 향했다. 마침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갔기에 부러 그때에 맞춰 저택으로 왔다. 지하실 인테리어가 끝났다는 연락에 온 것이다.
“제가 올 곳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결혼하면 이 집으로 들어올 거야. 난 우리 아이들도 이곳에서 키울 마음이거든.”
“…….”
“서울에서 이만큼 넓은 저택도 드물어. 내가 물려받을 유산이니, 당연히 이곳에 살아야지.”
“네.”
범익의 성화에 저택으로 왔지만, 몰래 들어온 것 같아 거북했다. 효원이 별채를 드나든 게 6개월이었지만, 한 번도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건 지하실 문에 도어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익이 문을 열어 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 넓었다.
“지하실이 이렇게 넓을 줄 몰랐어요!”
지하실은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화가 된 장소였다. 직사광선이 없고 바람이 잘 통했다. 습도에 민감한 그림은 따로 분리해 표구로 만들어 두었다. 누구의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이 굉장히 많았다.
“누가 그린 거야?”
“우리 엄마.”
“엄마요?”
서범익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그의 어머니도 화가였어?’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림 솜씨가 보통이 넘잖아요? 혹시… 화가셨어요?”
“화가까지는 아니었고, 그냥 그림을 사랑했지.”
효원은 앞서 걷는 그의 뒤를 따르며 벽면에 세워져 있는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녀의 그림에 대한 감상평을 하자면, 슬픔과 고독이었다.
효원이 빛을 상징한다면, 그의 어머니는 어둠이었다. 처음에는 밝은 이미지와 아름다운 자연을 그렸다면, 점점 해가 거듭될수록 작품은 검은색을 많이 포함했다. 검은색은 적절하게 표현하면 강함을 느끼게 할 수 있어도, 이렇듯 색이 진하면 자칫 음침한 분위기가 되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의 감정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많이 바뀐다. 자칫 마음을 비우지 않고 잡생각이 많으면 이렇듯 좋은 그림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밑그림이 밝은 것에 반면, 색채는 너무 어둡다.
“당신… 어머니 불행하셨어요?”
“…….”
그림이 그녀의 인생을 대변해 주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서범익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는 한 초상화 앞에서 그림의 모델을 노려보았다.
“젊은 시절 회장님이시네…….”
젊은 회장님의 모습은 범익과 흡사했다. 지금 서 회장의 모습은 미래의 서범익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빛을 강조했던 분이야.”
“아… 어쩌다가.”
서범익은 입술을 꾹 물었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가 났지. 그 후 하반신 마비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부터 이렇게 어두운 그림을 그렸어.”
“……!”
범익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그의 어깨가 잔뜩 굳어 있었다. 왠지 그의 어깨가 애처롭게 보였다.
설핏 그리운 듯한 미소가 걸렸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긴 한데. 고작 일곱 살 나이였는데 말이야. 두 발로 걷던 엄마가 휠체어를 탄다는 건 큰 충격이었어. 그리고 그 다음 해에 돌아가셨고.”
뭔가,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 듯 말끝이 흐려졌다.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기억은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기게 했다.
‘저보다 더 큰 사람인데. 더 강한 사람인데…….’
어쩐지 그가 더 작아 보였다. 왠지, 가슴이 찌릿했다. 지금껏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을 그가, 지금 저를 선택함으로써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는 것이 효원도 좋지만은 않았다.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없을 것이다. 아마도.
“저도 그때쯤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 너도 그랬다고 했지.”
범익이 효원을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도 잃었어요. 그래도 당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잖아요?”
위로를 건넸으나, 그것이 오히려 범익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준 것 같았다. 말주변이 없는 제 입을 꿰매고 싶었다. 효원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곧 범익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효원의 등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효원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우리는 헤어지지 말자. 그런 마음에서 내가 선물을 준비했어.”
“네?”
서범익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봉투였다. 그 봉투를 열어 보자마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신랑 서범익, 신부 이효원.]
“우리 결혼하자.”
순간, 효원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결혼해. 우리.”
“…헉! 범익 씨.”
“부모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나이야.”
“그렇지만.”
“나를 믿고 따라와. 이 방법이 최선이니까.”
심장이 널뛰었다. 정신없이 뛰는 심장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아래에서 터지는 감정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아버님 계실 때 허락을 받을 것을… 내내 후회했어.”
“윽…….”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끅끅, 눈물이 쉼 없이 터졌다. 범익은 효원의 뺨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도 우리를 받아들일 거야.”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내가… 내가.”
“물론이야.”
“범익 씨!”
그의 품에 안기자 범익은 효원을 어깨를 으스러질 만큼 힘껏 안았다.
기뻤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너무도 행복해 미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범익은 서 회장이 한국에 없는 날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언제부터 결혼식을 계획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그는 미니 결혼식으로 준비했다. 규모가 크지 않다는 게 효원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초대한 손님은 친구들 뿐, 일가친척은 모두 뺐다.
별장에 화려한 음식이 차려지고 초대받은 손님들과 술자리가 이어졌다. 결혼식은 내일이지만, 총각 파티처럼 흥겹게 보낼 마음으로 파티를 준비했다.
한참 서범익과 그의 친구들은 파티를 즐겼다.
효원은 이설의 전화를 기다렸다. 결혼식 청첩장을 보여 준 뒤, 이설은 집을 나갔다. 그 후로 이틀 내내 연락 한 번 없었다. 장소를 아니 이곳으로 오면 좋은데. 끝끝내 반대를 할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해하자 서범익의 호흡이 귓가에 닿았다.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서 자, 난 더 마시고 갈 테니.”
“술 조금만 드세요.”
“오늘 총각파티야. 취해도 좀 봐 줘.”
서범익은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다.
“그럼, 먼저 쉴게요.”
“샤워하고 기다려. 연인으로서 마지막 밤, 화끈하게 보내야지… 후후.”
범익의 손길이 은밀하게 허리를 더듬거렸다. 손님들 눈을 피해 끊임없이 효원의 몸을 만지며 농밀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종종 효원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야한 농담을 하곤 했다.
효원은 화끈거리는 볼을 식히며 2층으로 올라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도둑 결혼을 해도 될까?”
그때, 효원의 휴대폰으로 카톡 사진이 전송되었다.
효원은 카톡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속에는 이설이 있었는데 그녀는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누가 이 사진을 보낸 거야?’
어딘가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바로 이 별장이었다.
‘누나가 이 별장에 왔었어? 어?’
또 다른 사진이 전송되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효원의 머릿속은 암흑이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충격에 굳은 눈은 작은 사진에 집중되었다.
서범익과 이설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설이 흐느적거린 채 서범익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이설이 서범익에게 안긴 것을 보자 억제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을 덮쳐왔다. 앞뒤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반쯤 헐벗은 이설이 서범익의 몸에 올라탄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누나가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가?’
순간, 이설과 서범익이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범익이 조금 놀라는 것을 봤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확실히 봤다.
이설도 비슷했었다. 몹시도 놀란 듯 파르르 떨었다.
‘이설. 그리고 서범익… 무슨 사이지? 얼마 전 이설이 서범익의 집 앞에 우두커니 있던 건 왜지?’
혼란스러웠다. 효원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위가 쿡쿡 쑤시며 구토감이 일어날 것처럼 속에서 위액이 올라왔다.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절망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어떻게든 이 의문을 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효원은 이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의문을 풀 방법을 궁리했다.
누군가 목을 죄는 것 같았다. 받지 않는 전화가 마치 효원의 목을 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효원은 이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서범익과 무슨 관계야?]
메일을 보내 놓고 5분간 초조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이설에게서 전화가 왔다. 효원은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누나! 당장, 만나!”
- 나 그 별장 근처야. 금방 도착할 건데, 내가 그 자리에 가는 건 그도 싫을 거야.
“…누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저인데, 오히려 그녀가 더 괴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효원은 꿀꺽 침을 삼키고 효원에게 말했다.
“뒷문 열어 놓을 테니까, 몰래 들어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을 거야. 거기서 봐.”
효원은 전화를 끊고 별장 뒷문으로 달려갔다. 아래층 거실에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은 누가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구조였다.
효원은 아무리 정리를 해 보려 해도 도저히 둘의 관계를 정의할 수 없어 답답했다. 진땀이 흘러내렸다. 내장이 뒤틀리고 배가 아파왔다.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쩌면 그 끔찍한 상황이라면 어쩌지? 눈앞이 캄캄했다.
한 남자를 두고 사랑하는 두 남매라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효원은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삼켰다. 눈두덩이가 후끈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어지러웠다.
‘내일이면 결혼식인데. 우리 둘 결혼인데… 왜…….’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기다리자, 저 아래에서 구두소리가 들렸다. 어둠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설이었다.
이설이 입은 흰 롱 원피스가 마치 웨딩드레스처럼 보였다. 효원의 입가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효원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저 남자와 계약하기 전, 상대가 나였어. 여자 오메가가 필요했던 회장이 제의를 한 거야.”
“……!”
쿵, 심장이 철렁했다.
“6개월 전, 병을 고치기 위해 나를 샀고 그와 잤어.”
“…누, 누나! 설마! 그, 그때.”
“기억났니? 맞아. 6개월 전, 빚쟁이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온 그쯤이야.”
효원의 다리에 일시에 힘이 풀리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간신히 난간을 잡았지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저, 정말. 잤어? 그와, 그와…….”
“응, 잤어. 하룻밤 보냈어.”
“거짓말… 그에게 병이 있는데, 잤을 리가 없어.”
효원은 믿을 수 없었다. 오메가 페로몬 거부증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가 다른 오메가와 잤다는 건…….
효원은 울부짖고 싶었다. 벽 너머로 서범익의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속이 상했다.
“불감증 때문에 몇 번이고 구토를 하려고 했지만, 잔 건 맞아.”
“왜! 왜! 그걸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그때, 내가 서범익과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말했어야지. 이제 와서. 내일이면 결혼식인데…….”
효원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그 남자에게 너와 헤어지라고 했어. 우리 둘이 입을 다문다고 해도 너를 배신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가 그러더라? 흔하디흔한 원나잇이 뭐가 중요하냐고.”
“뭐……?”
“넌 쑥맥이라 몰라. 알파의 원나잇이 얼마나 흔한지. 러트사이클에 몸이 끌리면 아무나 잡고 뒹구는 거, 그라고 다를 것 같아?”
“이럴 수가…….”
“아무리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두 남매가 같은 남자와 섹스하고, 결혼하기까지 한다니.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못할 짓이야.”
“…….”
효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알리지 않고 헤어지게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너에게 말을 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아서. 이렇게 온 거야. 내일이면 정말 돌이킬 수 없으니까.”
“믿을 수 없어. 그래도… 그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는 나를 사랑해! 그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아.”
효원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설이 한심하다는 듯 효원을 바라봤다.
“그럼 내기할래? 그가 오메가의 유혹에 넘어가나 안 넘어가나.”
“뭐?”
“나 곧 히트사이클이야.”
“……!”
효원은 기겁했다. 이설이 겉옷을 벗는데 그녀에게서 강한 페로몬이 쏟아졌다.
“미, 미쳤어? 지금, 나와 결혼할 남자를 유혹하겠다는 거야?”
“너, 그 남자를 믿는다며? 그 믿음에 확신을 주려면 이만큼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못해! 절대! 그럴 수 없어!”
효원은 호흡이 곤란할 만큼 숨이 막혔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밀려오는 배신감과 충격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효원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설이 효원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눈을 맞췄다.
“그에게 반했던 나였지만, 원나잇 한 번으로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가질 수 없는 큰 남자니까. 그런 그가 너를 선택하고 여기까지 왔다면, 너도 그의 마음이 진실인지 확인해야 하잖아? 알파의 사랑은 너무도 가벼워. 만약. 그가 병을 치료한 뒤에도 너만을 찾으면 그건 사랑이겠지. 도박을 해 봐. 네가 확신한다면 못할 것도 없잖아? 그가 나에게 손을 뻗지 않을 테니까…….”
효원은 흠칫 떨었다. 이설이 효원의 뺨을 부드럽게 만지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사이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저, 시험이야. 나와 잤다는 걸 숨겼던 남자를 시험하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효원의 손이 양옆으로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