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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22화 (22/40)
  • chapter 22

    #22

    “오, 이효원! 새하얗게 생긴 게 술은 전혀 못 마실 것 같은데, 잘 마시네?”

    “와인은 맛있어서…….”

    승주가 만든 술자리는 꽤 고급스러웠다. 바를 통째로 빌려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이들 중에는 곧 유학을 떠날 사람과 졸업을 하는 사람 그리고 결혼을 할 사람도 있었다.

    꿀꿀한 기분만큼 오늘은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달짝지근한 와인을 마시다 보니 범익과 같이 마셨던 와인이 떠올랐다.

    달콤한 향을 좋아하는 효원을 위해 범익은 가끔 해외에 직접 주문을 넣어 주기도 했다. 효원은 보통 사람들보다 술이 약했다. 조금만 많이 마셔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볼이 벌겋게 변했다.

    오늘은 평소 주량을 넘긴 상태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술이 더 잘 들어가 서너 잔까지는 거뜬히 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아침이 되면 숙취에 골이 깨질 듯 아프겠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취하고 싶었다.

    “천천히 마셔.”

    “네.”

    우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효원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기분이 별로야? 울적해 보이는데…….”

    “아니, 좋아요. 음식도 맛있고, 와인도 훌륭해요. 어디서 공수한 와인이죠?”

    “영국에 계시는 삼촌이 선물로 보내 주셨어.”

    도수가 낮은 와인이 취향인 저와 달리 삼삼오오 모여 양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효원은 넓은 테이블에 턱을 괴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타인의 행복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듯, 효원은 그들이 웃으면 함께 웃었다.

    “나, 너를 보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꼭 말해 주고 싶었어.”

    “네?”

    “미래를 위해 네 재능을 썩히지 마. 너 이번 공모전에서 큰 주목을 받아서 여기저기 러브콜이 쇄도할 것 같은데. 네 발로 뻥 차지 말라고.”

    “아… 그렇죠.”

    바보가 아니고서야 좋은 기회를 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효원은 바보였다. 사랑에 눈이 먼 바보 멍청이…….

    화가가 되고 싶은 만큼, 서범익을 사랑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를 욕심냈다.

    “서범익 곧 결혼한다고 언론에서 쏟아 내던데… 그거 다 그쪽에서 너 보라고 하는 거야.”

    “…….”

    효원은 입술을 아득 물었다.

    “아무리 쇼윈도 부부라도 네가 그의 집을 드나드는 건 모양새도 안 좋고, 네 앞날에도 걸리는 문제야. 네 사랑은 너무 무모해. 아내 될 사람에게도 예의가 아니고.”

    “…정략결혼인 걸 모르는 사람 있어요?”

    “그래도 표면적으로 아내가 되니까 싫어도 싫다고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야. 내가 주위에서 잘 봐서 알아.”

    대부분의 재벌가 자제들은 정략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가 될 사람도 그만큼 각오를 하고 있겠지만, 신혼 초기는 가식적으로라도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한 집에 아내와 연인을 두고 살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게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효원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우혁은 가난한 알파였다. 승주와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지만, 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같은 입장이라 그럴까? 그의 이야기가 가슴속 깊이 와 닿았다. 아무리 주목을 받고 미래가 보장된 촉망받는 인재라도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더더군다나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허영 많은 누나를 보면 암담했다. 다행히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해도 또다시 빚을 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물론 서범익의 정부로 살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피식, 입가에서 웃음이 터졌다.

    정부… 결국 저는 그의 정부일 뿐,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속이 상했다.

    누군가 목을 죄는 것 같았다. 목 안이 칼칼하고 속이 헛헛했다. 사랑을 한다면 세상 모두를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 앞에서 무너지게 되는 걸 보니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속물 같았다.

    “나, 유학 갈 생각인데, 혹여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 해.”

    “유학 가요?”

    “응. 승주 데리고 떠날 거야.”

    “…서, 선배!”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우혁이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승주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승주 하나 못 먹여 살리겠어? 우리 둘만 가서 독립하기로 했거든.”

    “대, 대단해요. 그런 결심을 하다니.”

    “하나를 포기하면 쉬워. 그 하나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돈이지만. 후후.”

    그가 밝게 웃었다. 역시나 승주 집에서 반대를 하는 것 같았다.

    “부럽네요. 그런 결심을 할 수 있다니…….”

    우혁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으니 쉽게 결정할 수 있겠지만, 효원은 아니었다. 이설이야 제 밥벌이는 하니 괜찮다고 해도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 최소한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효원은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한참을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JK 그룹의 서범익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멋진 모습과 아름다운 약혼녀에 대한 부러움이 터졌다. 효원은 묵묵히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우혁과 승주가 보였지만, 술자리 안주가 된 서범익의 결혼을 잊기에 술만 한 것이 없었다.

    효원은 그가 결혼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가 아내와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하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질투심과 괴로움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여자와 몸을 섞은 뒤, 범익이 자신의 몸을 올라타 섹스를 하는 상상까지 하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욱…….”

    “괜찮아?”

    “으… 응, 좀 무리했나 봐요.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어지러운 몸을 일으켜 바를 빠져나가자, 입구에 있던 경호원이 단숨에 달려와 효원을 부축했다. 부축해 주려던 손을 뿌리치자 그가 코트를 내밀었다. 그 코트에 서범익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향기가 너무도 슬펐기에 효원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 * *

    경호원은 갓길에 차를 주차를 했다. 그리고 약국으로 뛰어가 숙취에 뛰어난 드링크를 사 와 내밀었다. 효원은 단숨에 드링크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응어리를 날려 주는 느낌이 들었다.

    술에 깨기 위해 잠시간 바람을 쐬었다. 저 멀리 한강이 보였는데 커다란 달이 뿜어내는 은빛 가루가 강 위에 뿌려져 무척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오후 10시, 평소 같으면 연락 한 번 했을 서범익은 연락이 없었다.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건지, 바쁜 건지… 아니면, 저 편하게 놀라고 일부러 연락을 안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쌓이는 부정적인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그의 약혼녀를 바라보던 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장은 예비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효원을 볼 때의 차가운 눈빛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서 회장은 자신에게 높은 벽을 세웠다.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그어 놓고 효원을 철저하게 타인으로 대했다.

    그는 언제나 차가운 얼굴이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효원을 쳐다보곤 했다. 무섭고도 두려웠다.

    마치 사지가 꽁꽁 묶인 힘없는 동물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회장은 그 동물의 정수리에 총부리를 겨누는 사냥꾼처럼 효원을 대했다. 그래서 회장만 만나고 나면 효원은 참혹한 말로를 예상하곤 했다.

    부르르-.

    “외투 입으십시오.”

    “아, 네… 고마워요.”

    효원이 몸을 떨자 몇 걸음 뒤에서 저를 따르던 경호원이 외투를 건넸다. 추운 줄 몰랐는데, 술이 깨기 시작하자 한기가 몰려왔다.

    부우우우, 부우웅-.

    경호원의 바지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한 그가 재빨리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H 호텔… 네, 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서범익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만 가셔야겠습니다.”

    “질문해도 될까요?”

    “네.”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제 말투만 듣고도 그는 알아듣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우리 두 사람, 언제까지 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의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니 누구보다 잘 아실 것 아니에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효원은 그를 보며 문득 망설여졌다.

    “회장님에게 저는 그의 치료제일 뿐 아무것도 아니란 거 알아요. 만약, 치료가 끝난 뒤에도 범익 씨가 나를 원한다면 숨은 정부로 두실 거라는 것도요. 질린다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도구라는 것도… 그 끝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답은 하나더군요.”

    효원의 입에서 솔직담백한 심정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가 움찔 떨었다.

    “폐인. 폐인이더라고요.”

    비록 웃고 있지만, 효원의 눈빛이 지독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동시에 서범익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지금은 회장이 두고 보고 있지만, 그에겐 언제든지 저를 쳐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서 회장의 발치에서 바짝 엎드려 빌빌 기지 않는다면 바로 칼날로 찍어 내릴 것이다. 아직 효원이 회장이 그어 놓은 선은 넘지 않았기에 봐주고 있지만, 선을 조금이라도 넘는다면…….

    분명 커다란 폭풍이 몰려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효원은 스위트룸 문을 열자마자 옷깃을 잡혔다. 그리고 밀고 들어오는 혀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이 효원의 뺨에 닿았다. 옷을 벗기는 손길이 다급했다. 언제나 짐승처럼 달려드는 범익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급한 듯 효원의 셔츠를 정신없이 벗겼다.

    뜨거운 혀가 목 줄기를 따라 촘촘히 훑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급기야 그가 페니스를 덥석 물어 쭉쭉 빨아 당기자, 효원의 뇌는 급속도로 쾌감에 젖어 들었다.

    “아윽…….”

    낮에 샤워를 했지만, 또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몸이 페니스를 애무하며 엉덩이 골을 만져대는 통에 움직일 수도 없도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젖어 드는 쾌감에 효원은 뜨거운 호흡을 연신 내뱉었다. 솔직한 육체는 여지없이 그가 선사하는 쾌감에 비명을 질렀다.

    “씨, 씻고, 씻어야 해요.”

    “괜찮아… 효원아.”

    “아, 아… 잠깐만요, 그래도 내가 싫어요.”

    깨끗한 게 좋았다. 그러나 그는 샤워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오늘은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약을 먹었지만 요즘 히트사이클 주기가 일정치 않았다.

    “콘돔.”

    “알았어. 젠장, 꼭 그렇게 따져야 해?”

    “임신이라도 한다면, 정말 찍히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고.”

    서범익이 이로 콘돔 포장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팽팽하게 발기한 페니스에 콘돔을 씌워 섹스를 준비했다. 문득, 그의 셔츠에서 여자 화장품 냄새가 훅, 끼쳤다.

    효원의 시선이 좀 더 위로 향했다. 서범익의 옷깃에는 핑크빛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셔츠에 립스틱 자국……?!!’

    “뭐예요? 이거. 셔츠에 묻은 립스틱…….”

    “뭘 의심… 하! 언제 이런 게 묻은 거야?”

    효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곧이어 효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오해야.”

    효원의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와 완전히 하체가 드러난 것을 보며 범익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래로 늘어진 페니스에 짜릿한 감각이 감돌자, 그가 페니스를 슬슬 만졌다.

    “하지 말아요.”

    기분이 나빠진 효원은 그의 손을 치고 등을 돌려 버렸다. 범익은 그런 효원의 허리를 감쌌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모임에서 어떤 여자와 부딪쳤어. 정말 오해야.”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다른 여자 만났다고 해도 괜찮다고요.”

    효원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범익은 내심 그가 질투하는 모습이 좋았다. 토라진 효원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보다 그의 하얀 등에 자신이 새겨 놓은 붉은 자국이 성욕을 불러일으켰다.

    사타구니 쪽으로 몰리는 저릿함에 뒤에서 누르듯 등을 굽혔다. 이미 한껏 기립한 페니스였지만, 토라진 효원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애무를 했다.

    목덜미를 살살 핥다가 어깨를 깨물고 귓불을 입 안에 넣어 쪽쪽 빨았다. 마른 몸에 유독 귓불만 통통한 것이 너무 귀여웠기에 입 안에 통째로 넣고 빨았다.

    자신이 애무할 뿐인데도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강렬한 쾌감이 느껴졌다. 늘 그랬다. 효원의 육체를 애무만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들었다. 처음 유사 섹스를 즐길 때에도 부끄러워 얼굴과 목이 빨개진 그가 예뻤기에 더욱 괴롭히곤 했다.

    “하지 마요… 읏.”

    눈가를 덮은 앞머리에 땀이 맺혔다. 효원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녀석은 신음을 참고자 숨을 고르고 있을 게 뻔했다.

    범익은 손으로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판판한 남자의 가슴이 뭐 그리 좋은지 그는 짓누르다가 유두를 잡아당겼다.

    그러다가 땀에 젖은 효원의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입술이 닿자 농밀하고도 야하게 키스를 했다. 혀끝으로 살짝살짝 핥는 게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서범익은 제 타액으로 범벅이 되도록 효원의 입술 이곳저곳을 핥았다. 효원의 페니스가 점점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신음을 참고 있어도 뜨거운 호흡이 그의 살덩어리에 휩쓸려 흘러나왔다. 잡아먹을 듯 흉포하게 키스를 했다.

    “으읍- 으베…….”

    혀와 혀가 얽힐 때, 상상 이상의 오르가즘이 느껴졌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두 사람의 페로몬이 방 안 가득 채워지면서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효원뿐만 아니라 범익 또한 정신이 혼미했다. 자신이 효원의 몸에 자신의 페로몬을 새겼지만 마찬가지로 자신도 효원의 페로몬 빠져들었다. 미칠 듯 빠져 드는 늪처럼… 둘만의 꿈의 나락에 갇혀 앞뒤 상황을 판가름할 수 없을 만큼 빠져들었다.

    사랑에 목적은 없었다. 효원이 자신에게서 도망을 친다 해도 놓치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건 이미 효원을 저만의 것으로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효원의 모든 것이 좋았다. 효원의 피 한 방울, 육체, 종래에는 정신까지도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서범익은 두 팔로 효원의 전신을 뱀처럼 휘감고, 부지런히 그의 육체를 애무했다. 엎드린 효원의 입술에서 야한 신음소리가 흘렀다. 싫다고 해도, 이렇듯 애무하면 바로 반응이 오는 민감한 몸이었다.

    러트사이클이 아닌데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범익은 오늘도 변함없이 키스를 하고 그에게 제 육체를 각인시켰다. 흡족했다.

    “질투하는 건 좋아. 끝내주는 기분이야. 그런데 효원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뻔히 약혼자가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범익은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뻔히 상대가 어떤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지껄이다니…….

    오늘 약속은 억지로 나간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쌀에 할 수 없이 약혼녀를 만나 형식적으로 데이트를 했다. 그런 자신을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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