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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20화 (20/40)
  • chapter 20

    #20

    겨울의 끝자락에 찾은 산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꽃과 동물의 발자국조차 남지 않은 새하얀 눈길은 효원의 저조한 기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코가 뻥 뚫리는 청량감과 맑은 공기는 효원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웠다.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무 자국도 없는 눈길에 제 발자국을 남기니 그것 또한 묘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두 연인은 넓은 눈길에 수없이 많은 발자국을 새기며 크게 웃었다. 야호, 야호,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하듯 소리를 치자,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곧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어때, 기분 전환이 좀 됐어?”

    “네, 좋아요. 평화롭고.”

    두 사람은 꼼짝없이 한 자세로 하늘에 석양이 붉게 질 때까지 서로의 어깨를 껴안았다. 차가운 날씨임에도 추위를 느낄 틈도 없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틈틈이 그는 휴대폰을 열어 소식을 확인했다.

    [JK 그룹 서범익 대표와 민성 그룹 차녀의 약혼식…….]

    당사자가 빠진 약혼식임에도 약혼 소식은 온 포털을 장식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을지 모른다. 범익과 효원은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그가 약혼했다는 기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너만 나를 믿으면 되니까.”

    “네, 믿어요. 아무렇지 않아요.”

    “그래…….”

    그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효원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더 묻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랑은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효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서범익의 손이 효원의 허리를 더듬거렸다.

    “안 아파? 하루쯤은 욱신거릴 텐데.”

    “전혀요.”

    효원은 후후 웃으며 허리춤을 조금 열어 이니셜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사랑의 증표로 서로의 몸에 이니셜을 새겼다. 서로가 지우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둘의 몸에 새겨져 있을 증거다.

    “공모전 준비는 다 됐어?”

    “네. 마지막 채색만 마치면 출품이에요.”

    “크게 주목받을 거야. 네 작품은 사람의 눈을 잡는 뭔가가 있어. 그림을 모르는 나도 눈을 뗄 수 없더라고.”

    그가 칭찬을 하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아니에요. 저보다 훌륭한 화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이번에는 좀 기대를 해 보고 싶어요.”

    그동안 많은 준비를 했다. 검은 칠이 된 작품은 출품할 수 없어서 이전에 그리고 있던 작품을 완성할 예정이었다.

    “배고프다. 그만 가서 밥 먹자. 감기 걸리겠어.”

    “네.”

    이곳에 와서 사용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시간이 되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별장에 돌아가 보니 재료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맛은 보장 못하겠지만, 한 번 해 주고 싶었어.”

    “우와! 정말요?”

    범익의 앞치마 두른 모습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의 매끈한 얼굴이 한 가정의 모범적인 남편의 모습처럼 보였다.

    “잘 어울려요.”

    “조금만 기다려.”

    “네!”

    배가 무척 고팠지만, 그가 만들어 줄 음식이 기대됐다. 그는 마치 셰프 같았다. 자신 없다는 모습은 어디로 가고 여러 재료를 뚝딱 손질해 놀라울 만큼 빨리 음식을 완성했다.

    마침내 그가 완성한 파스타를 보고 효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효원은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 입에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크림이 입 안에 퍼진 것과 동시에 행복감을 느꼈다.

    “와,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범익은 환하게 웃었다. 효원 또한 미소로 화답을 하며 두 사람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가 권한 와인은 파스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효원도 가볍게 마시기가 좋았다.

    “달달한 게 좋아요. 한 잔 더 줘요.”

    “달콤한 것에 유혹되어 취하면 약도 없어. 조심해.”

    “그까짓 거 취하죠. 뭐. 하하.”

    이래서 술을 마시는 건가 보다. 현재 현실에서 도피해서 보내고 있지만 아무도 없는 두 사람의 시간이 좋았다.

    “좋네요. 우리 키스할까요?”

    효원이 먼저 키스를 하자고 하자 범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익은 서둘러 손을 뻗어 효원의 얼굴을 당기더니 입을 맞췄다. 곧이어 혀가 들락거렸다.

    효원이 취한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느새 범익은 효원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 안았다. 두 사람이 격하게 엉키면서 의자가 넘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효원 위에 범익이 올라탔다. 이미 그는 정염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효원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랑해, 효원아.”

    그날 밤, 미친 듯이 서로를 안고 안았다. 서로에게 키스를 하고, 온몸이 땀에 젖을 만큼 격렬하게 섹스를 이어 갔다.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없는 육체는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섹스에 섹스가 더해졌다.

    효원은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해진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하는 운명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은 이 순간에 충실했다. 서로를 향한 진한 사랑과 서로를 원하는 만큼 마음껏 안고 신음했다.

    * * *

    이틀 후,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당숙이 다시 효원을 찾았다.

    “회장님께서 부르신다.”

    “…….”

    오후 3시, 회장이 집에 있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마 저를 만나기 위해 일찍 들어온 것이 분명했고, 그 이유도 효원은 예상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범익이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효원은 무거운 마음으로 저택으로 걸어갔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역시나 회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효원을 노려봤다.

    효원은 답답함을 느끼며 넌지시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의 언성이 곱지 않았다.

    “계약 조건을 어기겠다는 건가? 말해 보게.”

    “…아닙니다.”

    “그럼, 어쩌자고 녀석을 불러낸 건가?!”

    회장이 소리를 질렀다. 응접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효원은 두려움을 느꼈다. 거기다 묵직한 알파의 기운이 효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장의 눈빛은 정말 무서웠다. 효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 아들을 사랑하나? 같은 마음이야?”

    “아닙니다! 절대요!”

    죽어도 아니라고 말했다.

    “위약금을 기억하겠지? 자네가 약속을 어길 때, 3배의 위약금을 토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말게.”

    “…계약 사항은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직 계약은 유효했다. 그럼에도 회장은 이미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다려 달라는 서범익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지만, 회장에게 두 사람의 마음을 들킨 건 어떻게 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가름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회장은 두 손을 모으고 효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효원은 입술을 잘잘 깨물며 제발, 제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조사를 해 봤다면, 누가 저에게 매달리는지 알 텐데…….’

    지금 저를 붙잡는 사람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회장의 심기를 살폈다.

    “좋네. 내가 두 번 세 번 양보해서 내 아들의 병이 회복되는 날까지 두고 보겠네. 단! 조건이 있네. 자네의 감정도 같다면, 나는 절대 두고 볼 수 없으니 단단히 명심해야 할 거네. 그리고 추가로 자네가 범익을 설득해야 할 것이 있네.”

    “그게…….”

    그 말에 효원은 고개를 들었다.

    “다음 주, 약혼녀의 생일에 그녀를 에스코트하라고 하게나.”

    효원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어디까지나 자네는 비밀 정부에 지나지 않으니, 녀석을 설득하는 것도 자네의 몫이네.”

    * * *

    회장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에 더해 효원은 그의 약혼녀의 생일 파티에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효원은 아름다운 한 쌍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곧 다가올 미래, 그의 곁에 자리한 여자는 빼어난 외모와 지성미가 있었다.

    그녀는 막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행복해 보였다. 서범익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파티 내내 그를 바라보며 즐거운 미소를 흘리는 것을 보니, 예전부터 마음이 있었던 듯했다.

    부러웠다. 부러워할 자격도 없지만,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효원아, 너도 왔어?”

    “응.”

    다른 커플도 있었다. 우혁과 승주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효원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그런 관계 아니었어?”

    “…뭐, 그렇지.”

    유준태가 학교를 그만두며 두 사람에게 서범익과 사귄다고 떠벌리는 통에 학교 내에서는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흘리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주위에 파파라치가 기웃거렸다.

    심증은 있고, 확증이 없으니 기사에 실리지 않았지만……. 물론, 기사화가 된다고 해도 회장이 막을 것이다.

    효원은 저 멀리 보이는 한 쌍을 바라봤다. 서범익은 돌을 씹은 표정으로 효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단단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떻게 네 손으로 다른 여자를 에스코트하라고 말할 수 있지?’

    ‘…부탁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범익은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그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종종 짜증이 끓어오르는 듯 술을 퍼마셨다.

    효원은 그렇게 제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버텨 냈다. 지금부터 진짜로 서범익의 숨겨진 정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한번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갔음에도 그날은 너무나 추웠다.

    * * *

    시린 겨울이 지나갔다. 봄이 되자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꽃, 연둣빛으로 물든 나무 잎사귀가 효원의 눈에 담겼다. 그 사이로 정수리로 내리쬐는 눈부신 태양이 허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효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공모전에서 당당하게 입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대상을 타게 되었다. 효원도 이렇게 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온갖 포털에서 효원의 이름이 화제가 되었다. 문화계 평론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효원의 그림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효원에게 러브콜이 쇄도했다. 이미 JK 그룹에서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음에도, 그룹들은 효원에게 개인적으로 후원하기를 원했다.

    “오늘 N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회장님.”

    서 회장은 대상을 받은 효원의 그림을 봤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화가였다. 앞으로 더욱 성장할 기미가 보였다.

    몇몇의 평론가는 효원을 21세기 빛의 화가라고 불렀다. 몇 가지 색채만으로 빛과 어둠을 표현하는 방식은 화려함을 추구하는 현대 미술에서 탈피한 그림이었다. 과거 렘브란트가 환생을 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정교함과 생동감이 있어 한국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계속해서 그룹 쪽에 문의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룹에서 후원하는 학생이 성공하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고…….”

    회장은 서범익과 이효원과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다른 정부가 있다고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런데 효원이 이렇게 주목을 받으면 언론의 관심이 더욱 이쪽으로 쏠릴까 봐 걱정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모든 매체에 이효원은 응하지 않는다고 전하게. 그 녀석은 얼굴 없는 화가가 되어야 해. 그것이 이효원의 몸값을 더욱 상승하게 해 줄 터이니 그렇게 처리하고, 앞으로 비서실에서 이효원을 관리 대상으로 정해 언론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네.”

    효원의 존재가 앞으로 서범익에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마냥 갈라놓을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서범익에게 효원은 이용 가치가 있었다.

    러트사이클이 완벽하게 안정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효원의 얼굴과 이름, 그의 정보는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얼굴 없는 화가로서, 서범익의 숨겨진 정부로서 철저하게 숨어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 * *

    “너무 잘나가는 것 아니야?”

    “뭘…….”

    포털에는 효원의 그림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효원은 자신의 눈으로 결과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한 번 망쳤기에 출품할 때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상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효원은 그의 약혼식 후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했을 뿐이다. 그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작업을 했다. 매일 밤,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만큼 열정을 쏟았기 때문일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의외의 결실을 맺었다.

    “이리 와.”

    나긋한 목소리가 귓속에 속삭여졌다. 범익은 효원을 별채가 아닌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억지로 약혼을 한 후, 보란 듯이 아예 당당하게 제 방으로 효원을 불렀다.

    솔직히 효원도 별채보다는 그의 방이 편했다. 별채는 아무래도 목조로 지어진 건물이다 보니 방음에 약했다. 욕실도 별도로 떨어진 곳에 있어서 섹스를 하고 뒤처리를 하려면 무척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서범익의 방은 저택에서 반쯤 독립되어 있는 구조였다. 시끄러운 것을 질색으로 생각하는 그를 고려했기 때문에 방음도 완벽했다. 그래서 그의 방에서 섹스를 하면 효원은 참지 않고 마음껏 신음을 내질렀다.

    “넣으면 안 돼? 네 살 내음. 너무 좋아…….”

    “오늘 조심해야 해…….”

    매일 섹스하고 싶은 범익과 달리 효원은 철저하게 히트사이클에는 관계를 피했다. 약을 먹고 페로몬을 풍기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아직까지 잘 따라 주고 있는 그였지만, 그가 언제까지 참아 줄지 모르겠다.

    그런 효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범익은 애교를 부리듯 효원의 허리에 코를 묻었다. 효원은 그의 애교를 무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벗어 둔 옷을 입었다. 삽입 섹스는 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젖어 있었다. 서로의 페니스를 비비며 정액을 쏟아 낸 만큼 양도 많았다.

    두 번이나 토정을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며 효원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턱이 잡혀 돌려지자마자 뜨거운 혀가 비집고 들어와 입 안을 헤집었다.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휘젓는 혀는 효원의 성욕을 불살랐다.

    “만져 봐. 그럼 여기… 그래.”

    “하, 하지… 읍-!”

    강제적으로 쥐어진 뜨거운 살덩이에 효원의 어깨가 흠칫했다. 성난 검붉은 페니스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물기로 젖어 뚝뚝 흐르는 귀두 끝에 효원의 손이 닿자 성기가 일순 꿈틀꿈틀 움직였다. 하나의 살아 있는 덩어리처럼 꿈틀거리던 페니스가 본래의 크기보다 두 배 이상 부풀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는 농염한 분위기가 감돌며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효원은 섹시한 그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근육과 복부에 새겨진 왕(王) 자가 인상적이었다. 등 근육도 무척 발달이 되어 있었다.

    문득 서범익을 처음 본 날 그의 몸을 훔쳐봤던 게 떠올랐다. 작은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그 아래로 야생의 왕을 떠올리게 하는 강인한 몸까지 모든 게 완벽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그려 보고 싶은 남자의 몸이었다. 물론 그 아래에 꺼덕이는 페니스는 흉흉해 보기만 해도 움츠러들었지만, 허벅지와 긴 다리는 무척 예쁘다.

    “만져. 네 거잖아?”

    가끔 범익은 효원에게 자신은 효원만의 것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가 그렇게 말해도 저는 정부에 다르지 않았지만, 효원은 더 이상 자신을 비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비참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고 또 노력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림이었다. 그림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범익을 덜 사랑하는 방법으로 삼게 되자, 놀랍게도 그를 향한 애정이 전부 그림으로 향했다.

    범익은 여전히 제 몸을 감상하며 손가락으로 더듬는 효원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웃었다. 그리고 멍한 시선으로 초점이 흐린 효원의 눈가를 혀로 쓸다가 깊게 입을 맞췄다.

    “내 그림을 그려 보는 건 어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벗어 줄 수 있지. 자… 마음껏 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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