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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14화 (14/40)
  • chapter 14

    #14

    밤새도록 연달아 세 번을 했다. 덕분에 아침이 되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그로 인해 허리 아래로 전혀 감각이 없었다. 효원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효원의 몸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범익의 성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빳빳하게 선 것이 엉덩이를 찔렀다. 서범익은 고개를 숙여 효원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만요…….”

    “안 해. 정액 긁어내려는 것뿐이야.”

    효원이 다리를 오므리려는데 그가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넣었다. 밖으로 흘러내린 정액보다 안에 고여 있는 정액의 양이 상당했다. 그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젓자 효원은 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온몸은 늪에 빠진 것처럼 축축 늘어지고 가라앉았으나,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니 다시 젖어 갔다. 그렇게 쾌락에 떨었음에도 다시 젖다니… 제 몸이지만 매번 놀라웠다.

    “가만히 있어 봐.”

    “헉… 보지 마세요!”

    그가 허벅지를 활짝 열어 구멍을 꼼꼼히 살폈다. 부끄러웠다. 제 치부를 훤히 보여 준다는 건 너무도 창피했다. 아래를 확인한 서범익은 쯧 소리를 냈다.

    “짐승이 따로 없네…….”

    그가 가볍게 욕설을 뱉었다. 얼얼한 걸 보니 아마도 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자고 나면 나아요.”

    “…알아.”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더니 효원의 몸을 껴안았다. 둘은 서로의 몸을 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건 불편했다.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를 안고 있는 건 효원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다정하게 굴지 마요. 괜스레 다른 것을 기대하게 되잖아요?’

    효원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털고 싶었기에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판판한 가슴이 등에 착 달라붙었다. 등 뒤에 닿은 서범익의 숨소리가 아찔했다. 섹스의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내벽의 수축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의 몸이 닿자 구멍이 다시 벌름거린다.

    음란했다. 그와 섹스하면 할수록 음탕한 몸이 되는 것 같았다.

    효원은 어느덧 가슴 안쪽 깊숙한 곳에 봄의 햇살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무언가 자라는 것 같았다. 소름 돋는 욕심과 열망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와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이 들었다.

    몇 번이나 같이 잤다고 이런 생각이 드는지… 제 욕심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이효원, 정신 차려. 네가 넘볼 수 없는 남자야.’

    * * *

    비서실장은 서 회장에게 서범익의 두 번째 러트사이클에 대해 보고했다. 보고하는 내내 서 회장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특별히 말조심하려고 노력한 것은, 서 회장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특히, 서범익이 러트사이클이 아닌데도 하루 먼저 효원을 찾아 강원도로 갔다는 말에 표정이 말도 못 하게 어두워졌다. 비서실장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서범익의 주치의를 안내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범익의 불감증 효과를 보는 것 같은가? 이대로 그 오메가를 곁에 두어 병이 나을 수 있는지 확신이 필요하네.”

    “테스트 후 서 대표의 검사 결과입니다.”

    까다로운 검사라 첫 관계 이후 한 달이 다 돼서야 검사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검사 결과지를 본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군. 믿어도 되겠어. 그럼 완치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케이스마다 다르지만, 제일 빨랐던 케이스는 6개월이었습니다. 지금 결과로만 보면 더 단축될 것도 같습니다.”

    “흠…….”

    서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럼 3개월에 안에 회복될 수도 있겠군?”

    “3개월은 너무 빠릅니다. 최소한 6개월은 곁에 두고 봐야 합니다. 완치 후 러트사이클 억제제에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회복이 되었다고 봅니다만, 다른 오메가와 섹스를 할 수 있는지도 봐야 하고요.”

    “다른 오메가야 결혼해서 확인하면 될 것이고. 약혼을 서둘러야겠네.”

    “서 대표가 약혼을 합니까?”

    “그렇다네. 오래 기다린 아이니, 약혼이라도 빨리해야지. 다음 달에 상견례를 한 뒤 정식으로 약혼식을 하려고 하네.”

    “음. 그렇다면 그 전에 병이 호전되었는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주치의는 서범익의 1차 치료 기간을 2개월로 잡았다. 2개월 동안 두 사람이 부작용 없이 섹스한다면, 2차 3차는 확인하는 수준일 것이다. 서범익이 약혼을 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1년 안에는 100% 완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다른 부작용은 없겠는가?”

    “네? 다른 부작용이라는 건…….”

    “아, 아니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고. 그만 돌아가도 좋네.”

    주치의는 서 회장에게 인사를 한 뒤,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서 회장은 회전의자를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는데 비서실장은 긴장되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작용. 아마도 사랑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랑이라니… 일 이외에는 다른 것은 일절 관심 없던 서범익이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껏 곁에서 서범익을 지켜봤지만, 그는 JK 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일 뿐, 여자나 남자나 일절 관심 없었다. 그 흔하던 연애 한 번 해 보지 않은 남자였다.

    비서실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러트사이클에 따른 관계일 뿐입니다.”

    “그래도 계속 지켜보게. 러트사이클이 아닌 때에도 섹스를 하는지. 반드시 확인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은 시계를 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됐군. 점심 약속이 늦으면 실례지. 가지.”

    * * *

    효원은 월요일에 호텔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번에 그의 러트사이클이 예정보다 빨리 터졌기 때문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사흘 동안 같이 지냈다. 러트사이클이 터진 날엔 밤새도록 침대에서 뒹굴었고, 둘째 날부터는 그와 산책을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했다.

    평범한 연인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설악산 정상까지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보자 펼쳐진 절경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가을 산을 눈에 가득 담았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그제야 효원은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떠올렸다. 그는 서둘러 남 비서를 찾았다.

    “아, 제 그림은요?”

    “본가 별채에 두었습니다.”

    “네? 별채라뇨? 저 공모전 그림 그려야 해요.”

    “앞으로 그림은 별채에서 그리시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효원은 뒤를 돌아 서범익을 노려봤다. 하루에 두세 시간은 그려야 하는데, 그 그림을 그가 별채로 옮겨 두라고 했다니. 그림을 가지러 가려면 꼼짝없이 그의 본가로 가야 했다.

    “본가 별채는 멀리 떨어져 있어. 별채로 들어가는 문도 다르고, 집보다 집중하기 편할 거야.”

    “…왜, 멋대로 결정하는 거예요?”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넋을 빼고 그림을 그리는 건 꼴 보기 싫거든. 내 지시에 따라.”

    “…….”

    서범익이 효원의 손을 잡고 그의 롤스로이스에 탔다. 효원은 뒷자리에 그와 나란히 앉았지만, 입이 한 자는 튀어나왔다.

    “세 시간쯤 걸리니 올라가다 저녁을 먹고 가지.”

    “아뇨. 집으로 그냥 갈게요.”

    “왜?”

    “가야 해요.”

    효원은 메신저를 열었다. 아버지 간병인이 퇴근하는 시간이 오후 6시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곧바로 집에 가면 얼추 그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이설이 집으로 돌아오면 좋은데, 한 번 나가면 언제 올지 모르니…….

    [6시까지 집에 계셔 주세요. 그리고 혹시 제가 늦으면 아버지 주무시게 한 뒤 가셔도 됩니다.]

    [그래요. 나도 7시에 또 다른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초저녁잠은 깊으세요.]

    띠링, 띠링-.

    메시지가 울리자 서범익이 효원의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그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누구야?”

    “아니에요.”

    “…유준태야?”

    “아뇨!”

    효원은 자는 척 고개를 돌렸다. 세 시간 동안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는 조용했다. 고급 외제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좋았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문득 눈을 떠서 보니 차가 멈췄다 섰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어? 왜 이렇게 막혀요?”

    “앞에 6충 추돌 사고가 났다고 하는군.”

    “사고요?”

    “그래. 6시까지 도착 못 하겠는걸?”

    “6시… 혹시, 제 메시지 봤어요?”

    “봤어.”

    “하… 서범익 씨. 다른 사람 메신저를 훔쳐보는 것 실례란 거 몰라요?”

    “네가 남이야?”

    “그럼 뭔데요?”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넌, 내…….”

    “됐어요! 더는 듣기 싫어요.”

    그의 입에서 정부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잘라 버리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효원은 시계를 봤다.

    “우회할 도로를 찾는 중이야. 빨리 가라고 했으니 30분쯤 늦을지 몰라.”

    “…네.”

    “아버지가 환자야?”

    “…….”

    “어떤 병이야?”

    “그냥, 병이에요.”

    “말하기 싫어?”

    “…….”

    아버지의 병을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제 사생활에 깊게 파고드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효원은 아래턱을 문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국도로 빠져나왔다. 효원은 직전까지 꽉 막혀 있던 고속도로와 달리 한적한 국도를 보며 놀랐다.

    서울 시내로 접어들어 효원의 집으로 가는 차는 막힘이 없었다. 초조한 제 마음을 알았는지 신호까지 저를 도와주었다. 이윽고 집까지 거리가 10분쯤 남았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자 심장이 덜컹했다.

    “여보세요?”

    - 혹시, 효원 학생이야? 나, 옆집에 사는 오 씨 아저씨야.

    “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 에구, 지금 이 씨가 절도범으로 몰렸어.

    “네엑?! 왜요?”

    효원은 소리를 질렀다.

    - 아파트 입구에 편의점 있지? 아, 글쎄 이 씨가 물건을 훔치다 걸렸지 뭐야? 그 편의점 점주, 그렇지 않아도 좀도둑이 많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데 이 씨가 전부 덤터기 쓰게 생겼어. 빨리 와 봐. 경찰차 오고 난리가 났어.

    “경, 경찰차요? 빠, 빨리 갈게요. 저 근처예요. 조금만 시간을 벌어 주세요.”

    효원은 전화를 끊고 밖을 바라봤다. 금방까지 뻥 뚫렸던 도로가 신호에 걸렸다. 꽉 막혔다.

    “기사 아저씨 저쪽에 세워 주세요.”

    “신호 받으면 금방인데요?”

    “아뇨, 지름길로 가야겠어요. 빨리요.”

    효원은 차를 갓길에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서범익이 인상을 찌푸리며 효원의 손을 잡았지만, 효원은 그의 손을 빠르게 쳐 냈다. 효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물건을 훔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무척 놀라기도 했다.

    효원은 차가 멈추자마자 미친 듯이 뛰었다. 편의점 점주 성격은 동네에서 지랄 맞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손을 털었지만, 예전에 조폭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거구인 그의 팔에 그려진 문신은 위압감을 풍겼다. 환자라고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효원은 다리가 발발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자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욕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윽고 저 앞에 경찰차가 보였다. 경찰이 앞에 있음에도 편의점 점주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효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100킬로가 넘는 거구가 멱살을 잡고 흔들자 아버지의 몸이 마른 가지처럼 흔들렸다. 속에서 열불이 솟았다. 아무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싸움 구경을 하며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경찰까지도.

    “놔 주세요! 제가 보호잡니다!”

    효원은 구경꾼들을 제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효원을 보며 방긋 웃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바나나 우유와 사탕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시절 이설과 효원이 잘 먹던 간식이었다. 효원은 아버지 멱살을 잡은 편의점 점주를 노려봤다.

    “변상하면 되잖아요! 이분은 치매 환자예요.”

    “호오라, 말 잘했네. 변상? 그래, 변상해 그동안 내 편의점에서 없어진 물건이 얼마인지 알고 말하는 거지?”

    “뭐예요? 지금 아버지가 가지고 나온 물건 값만 계산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요거. 웃기는 놈이네? 고작 몇천 원 받자고 내가 이렇게 펄펄 뛰는 거로 보여?”

    “아저씨, 아버지가 가져온 것은 이 물건이 다예요.”

    효원이 경찰을 바라보자 경찰은 딴청을 부렸다. 아마도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억울한 장면을 목격하고도 누구도 변호해 주지 않았다.

    편의점 점주가 효원의 멱살을 잡았다. 몸이 휙 끌려가자 상대의 땀 냄새가 확 끼쳤다. 효원은 흠칫했다.

    “그럼, 예쁘게 생긴 놈. 얼마를 줄 건데? 합의하고 싶다면 물건값 100배로 줘야겠어.”

    “뭐… 뭐요?”

    “100배, 300만 원 토하라고 아니면 몸으로 때워.”

    “……!”

    그가 웃자 누런 이가 보였다. 그의 눈빛에 온몸이 굳어 갔다. 그가 효원의 멱살을 더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에 부딪히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뻑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덩치가 뒤로 확 밀려났다.

    바람처럼 날아온 주먹이 거구의 턱을 가격했고, 몸이 붕 떠올라 플라스틱 의자와 뒤엉켰다.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놀란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을 때 다시 발길이 날아갔다.

    빠악! 턱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쏟아졌다. 다시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갔다. 퍼억! 주먹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인지, 결국 그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효원은 덜덜 떨며 아버지를 안아 보호했다. 고작 몇 번의 공격에 기절한 남자를 보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람처럼 날아온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갈무리하지 않아 풍기는 날선 기운은 효원의 잔털이 곤두세울 만큼 날카로웠다.

    효원은 바들바들 떠는 아버지의 몸을 껴안고 눈을 꾹 감았다. 주위가 시끌시끌했다. 놀란 경찰이 서범익을 알아본 것 같았다.

    경찰이 보는 눈앞에서 사람을 폭행했음에도 현장에서 잡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경찰은 오히려 기절해 뻗은 편의점 점주가 119를 타고 가자 그 뒤를 잽싸게 따랐다.

    그의 가드들이 구경꾼들을 모두 돌려보낼 때까지 효원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효원의 손에 익숙한 손이 닿았다.

    “바닥 차갑다. 일어나. 어서.”

    “윽… 괜찮아요.”

    바보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난한 학생이라는 건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제 치부를 보는 걸까?

    남 비서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아버지는 서범익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이런, 눈이 부시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 허허허.”

    “아버지! 그만하세요!”

    아버지가 창피했던 걸까? 효원답지 않게 입에서 날카로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아버지가 흠칫 놀랐다.

    “왜, 그래? 옆방 학생? 화내지 말게.”

    효원은 눈물을 벅벅 닦으며 아버지가 훔치려고 했던 간식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자 서범익이 먼저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간식을 주웠다. 그리고 흙이 묻은 간식을 툭툭 털어 아버지에게 안겼다.

    “자, 아이들에게 먹이세요.”

    “오오! 고마워! 잘생긴 청년! 하하.”

    눈치 빠른 가드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파트로 들어가자 효원과 서범익만 남았다. 아니, 서범익이 효원의 손을 잡고 한적한 곳으로 이끌었다. 효원은 그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부끄러워?”

    “…….”

    “아버지가 치매라는 게 부끄럽냐고.”

    “아뇨. 저 자신이 부끄러워요. 병신 같아서요.”

    그러자 서범익이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저 효원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효원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효원의 허리를 잡고 바짝 안았다. 효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래 너 충분히 병신 같아.”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튀어나왔다. 효원이 웃자 서범익은 효원의 얼굴을 당겨 바짝 붙었다. 그의 아찔한 숨결이 효원의 입가에 닿았다.

    “앞으로 병신 짓 하지 말고 잘 봐, 이효원. 네 옆에 누가 있는지. 내가 너라면 내 앞에서 쪽팔리는 것보다 나를 이용해 뜯어낼 것은 모두 뜯어내겠어.”

    “뭐… 뭐라고요? 내가 꽃뱀처럼 보여요?”

    “그깟 꽃뱀에게 뜯겨 봤자지. 돈이라면 썩을 만큼 많거든.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권력은 더 크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네 가족이 소중하다면 나를 이용해.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테니까.”

    “……!”

    효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서범익은 손가락으로 효원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다음 러트사이클까지 숙제야. 작전을 잘 세워. 내가 이 입술에 현혹될 만큼 나는 아주 훌륭한 호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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